력사를 찾아서
《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3. 배달국 3.4〈정경희 교수, “홍산문화는 배달국 문화이자, 한국 선도문화”〉~3.7.2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⑩ 中에 세운 고조선 분국〉 본문
《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3. 배달국 3.4〈정경희 교수, “홍산문화는 배달국 문화이자, 한국 선도문화”〉~3.7.2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⑩ 中에 세운 고조선 분국〉
대야발 2024. 2. 18. 11:13《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3. 배달국
3.4 2016년 11월 14일 브레인미디어 〈정경희 교수, “홍산문화는 배달국 문화이자, 한국 선도문화”〉
『한국 상고사 부정하는 동북공정 논리의 오류와 위험성 지적
지난 12일 부산 해운대구 문화복합센터에서 ‘제9회 한국선도의 역사와 문화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정경희 교수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동아시아의 마고문화’를 주제로 발표했다. 정경희 교수는 동북공정의 핵심논리가 지닌 오류와 위험성을 지적했다.
정 교수는 “동북공정 논리에 따르면 한국은 은나라의 해외속지(점령지)인 기자조선으로 출발하여, 위만조선, 한사군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으며, 한국에는 고유문화가 없고 중국 은나라 예제문화를 전달받아 발전했다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역사를 비롯한 한국 상고사를 부정하는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했다.
▲ 정경희 교수는 홍산문화가 배달국문화이며, 유물, 유적을 통해 선도수련문화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동북공정은 중국이 자국 내 소수민족의 이탈을 방지하고자 만든 정치적 목적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바탕으로 한다. 중국이 그동안 자국문화에서 배제했던 동북 요서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선진 상고문화인 홍산문화가 발굴되자, 이를 통해 자국을 세계 최고의 상고문화를 가진 문화대국으로 역사관을 재정립하는 국책사업으로 진행했다. 중국은 2015년 동북공정을 마무리하였으며, 2016년부터 전 세계를 대상으로 수많은 연구논문을 쏟아내며 선전공정에 들어갔다.
정경희 교수는 이에 대응하여 홍산문화가 배달국문화이며, 한국의 선도문화임을 입증하여 중국 동북공정의 오류를 바로 잡아가는 논리를 제시했다. 홍산문화 여신묘에서 발굴된 반가부좌 선도수행 형태의 7개의 여신상과 한국 선도사서 <부도지>에 나타난 마고 7여신(마고, 궁희, 소희, 4천녀)의 연계성을 밝혔다. 또한 홍산문화의 각종 유물에서 한민족의 기철학적 세계관인 삼원오행론의 형태를 찾아냈다.
정 교수는 이어 선도 제천문화를 계승한 해운대 장산문화제와 해운대 ‘최치원 유적’에 나타난 선도문화를 조명했다. 정 교수는 최치원 선생이 활동하던 시대상황과 행적, 기록 등을 다양하게 조명하여 선도의 맥을 이은 선가仙家였음을 밝히고, 천부경과 연관된 기록들을 살폈다. 그리고 후대에 유학자로 채색되어 선도적 면모가 숨겨진 정황을 설명했다.
정 교수는 "한 예로 경남 하동 운암영당의 최치원 진영(1793)을 X-레이로 촬영한 결과 최치원 선생 좌우에 쌓인 책들은 본래 동자들이 서 있었다. 유교가 강성하던 시기에는 도교적 또는 선가적 면모를 유학자로 채색한 것이다. 그러다 유교세력이 쇠약해진 1925년 <단전요의>, 1927년 <고운선생문집> 등에는 한국 선도의 최고 경전인 '천부경'과 연계할 기록들이 나타난다."고 했다.
정 교수는 “한류 원조로 최치원을 부각한 것은 2015년 중국 시진핑 주석의 제안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중국은 최치원 선생을 도당유학생으로서 당나라에서 도교와 유학을 배운 중국문화 전파자로 알리고 있다. 그러나 최치원 선생은 우리 고유 선도인 풍류를 중심기반으로 유‧불‧도를 수용한 세계주의자라는 것을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한다.”며 “단지 동상, 기념관만 세우면 중국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게 된다. 시민 스스로 지역 문화유산에 대해 적극적으로 정체성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정 교수는 “선도문화는 동북공정을 대응할 논리이기도 하지만, 생명을 중시하고 모두가 하나라는 조화와 홍익철학으로 세계평화를 이끌 지구인정신의 뿌리”라고 했다. 강나리 기자 』
http://www.brainmedia.co.kr/brainWorldMedia/ContentView.aspx?contIdx=18841
3.5 2018년 7월 9일 코리아히스토리타임즈 〈단군 넘어 한웅, 중국요서 우하량에 있다?〉
『홍산문화지로 알려진 요서 내몽골 우하량은 조이족 땅이었다.
중국 하북성 근처에 신시시대 한웅흔적 발견
새를 숭배하는 동이족 터전으로 판명
여신묘, 곰발조소, 수행하는 여신상 등
조선(단군)이전 흔적도 보여
▲ 서기2018.06.28. 서울 종로3가 태화빌딩에서 한뿌리사랑세계모임(한뿌리, 회장 박계옥)이 주최한 시민강좌가 있었다. 이날 강사로 나선 이찬구 박사는 조이족이 한웅족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역사를 배운다. 그렇다면 우리 국사교과서가 역사로 인정하는 시기는 어디까지 갈까. 서기전2333년에 개국한 조선(단군)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국사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고대사학회는 단군을 역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신화라고 한다.
지난 서기2016년에서부터 2017년 까지 한국고대사회가 주도한 시민강좌 총 50여회를 취재한 결과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이들은 단군은 커녕 한참 뒤의 역사인 고구려, 백제, 신라조차도 <삼국사기>에 나온 데로 다 인정하지 않는다.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에 따라 서기4세경에서야 사실상 백제, 신라가 들어섰다고 가르친다. 고구려는 조금 이르지만 서기 이후에나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엄연히 서기 1세기경에 모두 개국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런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관점으로 지금 대학원에서 석사니 박사니 하며 후학들이 배우고 있고 붕어빵 찍어 내듯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다.
그럼 어떻게 단군 조선이 서기전2333년에 개국했다는 기록이 들어가 가게 되었을까. 이는 서기1970년대 민족사학계에서 1차 사료를 가지고 투쟁한 결과다. ‘국사찾기협의회’를 만들어 당시 안호상, 임승국, 이유립, 김정권 등 학자들의 눈물겨운 투쟁 결실이다.
당시 국회에 청문회까지 열게 하여 우리 국사책이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증명했다. 국내 사료를 근거로 밝혀냈다. 이를 강단식민사학계에서는 국사교과서 ‘파동’이라고 치부한다. 마치 정상 국사교과서가 불순한 세력에 의해 침탈당했다는 듯이 다루고 있다. 이 투쟁 결과 단군이 역사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또 이와 대척점에 서 있는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 등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때는 정식으로 상당부분 할애해서 수록해 놓은 체제였다. 그러나 이후 대놓고 수록은 안했어도 간접 방식을 통해서 유지하고 있다. 여전히 우리 역사는 중국 식민지에서부터 사실상 시작했다는 태도를 현행 검인정 모든 국사교과서들도 취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 국사는 사실상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것일까. 일연 <삼국유사>를 고조선기를 보면 단군 이전에 한웅의 신시시대가 있다고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 한웅, 천부인 3개 태백산, 신시, 인간360여사를 다루고 있고 풍백, 우사, 운사라는 관직도 나온다. 너무 오래된 역사여서 이렇게 아주 압축해서 전해지고 있다. 이는 문헌이 신시시대가 존재했음을 나타내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고고학 상으로도 밝혀낼 수 있을까. 서기2018.06.28. 서울 종로3가 태화빌딩에서 한뿌리세계모임(한사모, 회장 박계옥)이 주최한 시민강좌가 열렸다. 이날 강사로 나선 이찬구 박사가 이에 대하여 의미심장한 발표를 했다.
흔히 알려진 홍산문화지역을 중심으로 한웅 신시시대를 조명했다. 중국 내몽골 요서에 위치한 특히 우하량 지역에서 나온 유물과 유적을 집중 분석했다. 그는 먼저 우하량 유적을 남긴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동안 다투어진 주장들을 전했다. 북한에서는 리지린이 맥부족이라고 했다고 한다. 또 북한 전대준은 박달족이라고 했다. 남한에서는 한영우가 아사달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중국은 북적北狄으로 보았다.
그런데 우리를 한편으로는 놀라게 한편으로는 슬프게 한 사실도 등장했다. 이런 여러 주장이 나오기 이미 수십 년 전인 서기1938년에 일제가 발굴하고 있었다. 일제 만몽학술단은 이 문화 주인공을 동호東胡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우리 강단주류사학계는 어떻게 보는 지 궁금하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부역한 친일사학자, 이병도 학파가 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통해서 식민지 통치 보조기관으로 만든 경성제국대학이 있다. 이 대학이 현재 서울대학이다. 식민지 체제 그대로 이어받아 이름만 경성제국대학에서 서울대학으로 바꾼 것뿐이라고 이 분야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이병도->김철준->노태돈->송호정 등으로 서울대 국사학파 맥이 이어지고 있다. 이 서울대 국사학파가 우리나라 역사학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친일식민사학자, 이병도 학풍을 이어오고 있다. 이병도는 일제식민사학을 체화한 친일사학자다.
이 사람의 학문 고손자벌인 송호정 한국교원대학교 교수는 당시 요서지역 주인공이 동호라고 한다. 그 서쪽은 산융족이 지배했다고 한다. 앞서 서기1938년에 발표한 일제 만몽학술단의 견해와 일치한다. 우리와 상관없는 북방 어느족 역사라는 뜻이다.
이는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이 우리 안에 살아있음을 말한다. 우리는 해방된 지 73년이 되어가고 있으나 역사는 여전히 일제식민통치를 받고 있다.
이날 이찬구 박사는 중국학자 이민의 견해를 끌어들여 홍산문화 우하량 주인공을 조이족鳥夷族으로 설명해 나갔다. 시기상으로도 서기전 2천년 이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지역에서 새가 새겨진 조작유물 특히 부엉이 조각, 옥으로 된 새 조각 등을 근거로 이 지역을 새를 숭배하는 족이 지배한 것으로 판단했다. 또 갑골문을 제시하여 이족이 존재했음을 덧붙였다.
▲ 만주 요령성 평강지구에서 발견된 금동새조각상. 독수리, 곰, 범, 이리가 새겨져 있다. 이를 한웅의 신시시대가 존재했다는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이어 조이족이 우리 땅 원주민이었을 것이라고 북한학자 리지린의 견해를 소개했다. 또 그는 문헌증거로 <삼국유사> 고조선기, <규원사화> 등을 제시했다. 또한 이암이 쓴 <단군세기>에 등장하는 국선소도와 큰 나무를 상징하는 웅상雄常도 하나의 근거로 보았다. <산해경>에 이와 닮은 기록이 있음도 상기시켰다.
계속해서 그는 우하량에서 곰발소조와 새 조소품들이 나온 것을 근거로 한웅족과 곰족의 결합을 추정했다. 또 요령지방에서 나온 이른바 금동새조각품을 근거로 한웅시대가 존재했음을 밝혔다. 이 금동새조각품에는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곰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는 범, 오른쪽 구석에는 이리를 새겨놓고 있다.
이 박사는 한웅을 신화라고 하지만 사실은 역사라는 사실을 서양 학자들의 발언을 끌어와 설명했다.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신화는 거룩한 역사, 곧 시간 시발점에서 태초에 일어난 원초적이 사건”이라고 했다. 프레이저는 “의식은 사라지지만 신화는 남는다”라고 했다. 이는 살아있는 신화를 통해서 사라진 의식을 되찾는다는 것인데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을 뜻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신화는 재현되고 이 신화는 다시 역사를 드러낸다고 강조했다. 그 한 사례로 올해 2월에 강원도 평창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에 개막식에서 등장한 얼굴이 사람이고 몸은 새인 인면조를 들었다. 이러한 재현은 우리 무의식에 새겨진 신화가 역사로 살아나는 것으로 풀이된다. 오종홍 기자』
(출처; 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3078)
3.6 2019년 8월 1일자 인사이트코리아 〈고조선 이전 태백산 아래 환인·환웅의 배달국 있었다〉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땅 넓이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중국은 ‘동북공정’ 역사침탈
환국, 배달국 추정 위치.<그래픽=이민자>
한민족 역사와 관련한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 나라와 통치자라 할 수 있는 이름은 ‘환국(桓國)’ ‘환인(桓因)’이다. 아직까지 유적이나 유물, 관련 사서들에 의해 나라의 존재 시기나 위치 등을 확증할 수는 없으나 여러 사서에서 이 이름에 대한 기록들을 남기고 있다. 따라서 한민족 상고 역사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기록이 말하는 환국의 역사
고려 충렬왕 때 일연(1206~1289년)이 지은 <삼국유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조선 이전에도 나라 또는 통치자가 존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옛적에 환인(桓因)이 있었다(제석을 이른다). 서자부에 환웅께서 계셨다. 항상 천하에 뜻을 두었으며, 인간 세상을 탐구했다. 아버지께서 자식의 뜻을 아시고 삼위태백을 살펴보시니 가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이라. 이에 천부인 삼개를 전수하시고, 그 이치로써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께서 무리 3000명을 이끌고 가셨다. 태백산 정상(즉 태백은 현재의 묘향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가셨다. 이름하여 신시이며, 환웅천왕이시다.”
이 기록은 사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손보기 교수가 보관하다 연세대에 기증한 조선 초기 간행본인 <삼국유사> 파른본의 내용이다. 한편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된 조선 중종 때 간행된 정덕본(正德本)에는 환인이 환국으로 기록돼 있다.
이같이 조선조에 발간된 <삼국유사>의 판본들에서는 두 가지 기록 (환인-환국)이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조선 시대에는 상고 역사의 시작인 환인, 환국을 같이 인식하고 있었던 데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수산(修山) 이종휘는 조선 후기 영조·정조 때의 학자로 <수산집>이라는 문집을 남겼다. 이 문집의 일부인 <동사(東史)>에서 고조선, 삼한, 부여·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다루고 있는데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단군본기(檀君本記)>를 서술했다. 그는 고조선을 신화가 아닌 실존했던 나라로 인식하고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를 전개했다. 그리고 환인-환웅-단군-부루(夫婁)로 이어지는 세계(世系)를 밝혔다. 고조선 이전에도 세계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다음은 <동사> 단군본기의 기록이다.
“조선왕 단군의 할아버지는 신인(神人) 환인(桓因)이다. 환인에게는 환웅이라는 서자가 있었다. 환웅은 태백산에 살았는데 신웅(神龍)의 이적으로 박달나무 아래서 (단)군을 낳았기 때문에 단군(君)이라고 이름했다.”
1462년 조선 세조 8년 권람이 쓴 <응제시주(應製詩社)>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에게 서지부에 대인 아들이 있었는데 웅(雄)이라 불렀다. 아래 세상으로 내려가 교화하고자 뜻이 있었기에 천부인을 받으시고 3000명을 거느리고 신단수 아래로 내려 오셨으니 이름하여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불렀다.”
영의정을 지낸 조선 후기 현종·숙종 때 문인 남구만은 <약천집(藥泉集)>에서 <삼국유사>를 인용해 환국의 존재를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옛 기록의 설명에 이르기를 옛적에 환국이란 나라가 있었다. 제석을 이른다. 서자부 환웅께서 계셨다.”
삼국유사.<문화재청 홈페이지>
조선 영조·정조 시대의 성리학자 유광익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풍암집화(楓巖輯話)>에서 <삼국유사>의 환국을 인용하고 있다. 내용은 <약천집>과 같다. 조선 중기 중종·인종 시대의 문신인 정황의 <유헌집(遊軒集)>에는 다음의 기록이 있다.
“책상 위의 티끌은 3년의 세월이 두텁게 쌓였구나. 나라의 근본이 하나의 깃발로 휘날리는구나. 어찌 환국을 삼가 기억하지 않겠는가?”
조선 후기 영조·정조 시대의 문신 이복휴는 상고 시대부터의 우리 역사를 시로 읊은 <해동악부(海東樂府)>에서 환국을 기록했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옛적에 환국이란 나라가 있었다. 서자부 환웅께서 계셨다. 환국에는 환인이 계셨고, 환인에게는 환웅께서 계셨다. 부친께서 자식에게 명하기를…”
조선 시대 후기 순조·헌종 시대의 문신 홍경모는 그의 문집 <관암전서(冠巖全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잡기에 이르기를 조선 이전에 환국이 있었으며, 제석의 서자부에 환웅께서 계셨다. 천부삼인을 전수받으시고 그 무리들과 더불어 태백산 아래로 이주하시니라. 그 산 위에 신단수가 있었다. 옛날에 환웅은 신시의 천왕이셨다. 그리고 환웅의 자손이 단군이라 불렀다.”
이외에도 고려 충렬왕 13년 1287년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 <조선왕조실록(세종, 단종, 성종, 선조, 현종, 영조, 정조 편)> <세종실록지리지> 등에도 환인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아래는 위서 논란이 있으나 주목할 만한 사서들이다. 여기서 환국과 환인의 기록을 살펴보자.
환국 역사 3000년, 배달국으로 이어져
신라 시대 승려 안함로가 지은 <삼성기 상(三聖記 上)>과 고려 공민왕 때 원동중이 지은 <삼성기 하(三聖記 下)>, 고려 말 행촌 이암이 지은 <단군세기(檀君世記)>, 이암의 현손이며 조선 연산군·중종 시대 학자인 이맥(李陌)이 편찬한 <태백일사(太白逸史)>, 고려 공민왕 때 범장(范樟)이 저술한 <북부여기(北夫餘記)> 등의 사서를 일제강점기인 1911년 계연수가 한 권의 책으로 엮어 <환단고기(桓檀古記)>라고 이름 지었다. 이 사서들에서 기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삼성기 상>의 기록이다.
“우리 환국을 세운 것은 아주 오랜 옛날이다. 한 신이 사백력의 하늘에 있으면서 유일한 신이 되어 밝은 빛을 우주에 비추었다. 이에 권능으로 형체를 변하여 만물을 생기게 하였으며 오래 살면서 그것을 보고 항상 즐거워했다. 지극한 기를 타고 다니니 묘함이 자연과 어울렸고, 형체가 없이도 보며, 하는 것이 없어도 만들며, 말하지 않고 행했다. 어느 날 동녀 동남 800명을 흑수와 배산 땅에 내려 보냈다. 이때 환인은 감군이 되어 하늘에 살면서 돌을 쳐서 불을 만들어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가르쳤다. 이것을 환국이라 하며 환인을 친제환인씨 또는 안파견이 라고도 한다. 7세를 이어 내려왔으나 그 햇수는 알 수가 없다.”
<삼성기 하>에도 다음의 기록이 있다.
“옛날에 환국이 있었는데, 백성들이 부유하고 또 수도 많았다. 처음에 환인이 천산에 살면서 도를 얻어 오래 살고 몸에는 병이 없었다. 하늘을 대신해 사람을 교화해 싸움이 없게 하고 사람들은 스스로 힘을 내어 일을 하므로 굶주림과 추위가 없었다. 혁서 환인, 고시리 환인, 주우양 환인, 석제임 환인, 구을리 환인으로 이어져 지위리 환인에 이르렀다. 지위리 환인을 혹 단인이라고도 한다. 고기에 말하기를, 파내류 산 아래에 환인 씨의 나라가 있었다. 천해 동쪽 땅을 파내류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이 5만 리, 동서가 2만여 리인데 이것을 모두 환국이라 한다.…7세를 이어 그 역년이 모두 3301년인데….”
또 <태백일사>에도 환국 기록이 있다.
“전에 말하기를, 삼신의 뒤를 환국이라 하고 환국은 하느님이 사는 나라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삼신은 환국보다 먼저 있었으며 나반이 죽어서 삼신이 되므로 삼신은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다. 사람과 만물이 다 같이 삼신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삼신을 한 뿌리의 조상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환인이 삼신을 대신하여 환국의 천제가 되었다.”
<삼성밀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파내류 산 밑에 환인 씨의 나라가 있었다. 천해의 동쪽 땅도 파내류국이라 하는데 그 땅의 넓이는 남북이 5만 리 동서가 2만여 리이다. 이것을 통틀어 환국이라 한다.”
<조대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옛날에 환국이 있었는데 백성들의 생활이 부유하고 풍족했다. 처음에 환인이 천산에 있으면서 도를 얻어 오래 살고 몸을 다스려 병이 없었다.”
1075년 조선 숙종 때 북애(北崖)가 쓴 <규원사화(揆園史話)>에도 관련된 기록이 있다. <규원사화>는 고려 공민왕 때 이명이 <진역유기(震域遺記)>와 40여 사서를 바탕으로 쓴 것이라 하는데 <진역유기>는 예로부터 존재하던 고대 사서 <조대기(朝代記)>를 보고 썼다고 한다. 이 사서는 1972년 국립중앙도서관의 이가원·손보기·임창순 3인의 고서심의위원이 1675년에 작성된 진본임을 확인하고 귀중본으로 지정한 책이다.
“상계(上界)에는 문득 하나의 큰 신(神)이 있었으니 그는 환인이요 온 세상을 다스리는 무량(無量)한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발해 건국자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727년에 저술한 <단기고사(壇記古史)>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환씨전(桓氏典)에, 동방에 부여족이 태백산 부근에 흩어져 살았는데, 그중 환인은 관대하고 도량이 커서 가옥의 건축과 의복제도를 시작하고, 아들 환웅을 낳으니, 그 뛰어난 모습을 호걸이라 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 상고사와 관련해 고조선 건국 이전 최초의 나라 또는 통치자로 생각해볼 수 있는 환국-환인에 대해 여러 기록이 남아있다. 한편 <삼성기 상·하> 와 <태백일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환국은 넓이가 남북 5만 리, 동서 2만 리에 달했다 한다. 또 환국의 군장인 환인은 7대를 이었고 환국이 지속된 역년이 3301년이라 한다. 단군을 군장으로 하는 고대 국가인 고조선마저도 한편의 민족설화나 신화로 치부되는 상황에서 기록이 남아있는 단군 이전의 상고 역사는 어떻게 평가받아야 할 것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대목이다.
‘박달나라의 임금’
한민족은 배달민족이라 불린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편찬한 <한국민족 문화대백과사전>을 보면 배달은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로 그 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숙종 때 북애가 지은 <규원사화>에서 단군은 ‘박달나라의 임금(檀國之君)’을 말하며 우리말에 ‘단(檀)’을 ‘박달’ 혹은 ‘백달’이라 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또 일각에서는 배달은 밝다는 뜻인 ‘배(밝)’와 땅을 의미하는 ‘달’을 합친 말로 동쪽으로 향해 간 것을 의미한다고 하기도 한다.
그동안 우리 역사에서 BC 24세기에 건국했다는 고조선을 신화로 취급하고 있으나 고조선 이전에 존재했던 한민족 국가에 대한 기록들이 엄연히 우리 사서에 남아있다. 배달국의 존재를 나타내는 ‘배달-신시(도읍지)-환웅(임금)-청구(국명 또는 지명)’ 등에 대한 기록은 일연(1206~1289년)의 <삼국유사>, 권람(1416~1465년)의 <응제시주>, 유희령(1480~1552년)의 <표제음주동국사략>, 홍언필(1530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 권문해(1534~1591년)의 <대동운부근옥>, 허목(1595~1682년)의 <기언>. 남구만(1629~1711년)의 <약천집>, 홍만종(1643~1725년)의 <해동이적>, 유광익 (1713~1780년)의 <풍암집화>, 이종휘 (1731~1797년)의 <동사>, 홍경모(1774~1851년)의 <관암전서>, 안정복(1778년)의 <동사강목>, 이복휴의 <해동악부> 등이 있다.
앞서 소개한 위서 논쟁이 있는 <환단고기>의 <삼성기 상·하> <태백일사>와 <규원사화>에는 좀 더 상세한 기록들이 있다. <삼성기 상>은 “환웅 씨가 그 뒤를 이어 일어나서 하느님의 명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와 천평에 자정과 여정을 파고 청구에 정지를 만들었다. 천부인을 가지고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였으며 세상이 하늘의 이치에 맞도록 교화되어 사람을 널리 유익하게 하였다. 도읍을 신시에 세우고 나라 이름을 배달이라 하였다”고 기록한다.
<삼성기 하>는 “이때 환웅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라 하며 이분을 환웅천왕이라 한다. 풍백·우사·운사를 시켜 곡식과 임금의 명과 형벌과 질병과 선악 등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 다스리게 하여 세상을 이치에 맞도록 교화하여 인간을 널리 유익하게 하였다” “배달은 환웅이 하늘을 열면서 얻은 호칭이다. 도읍한 곳은 신시이며 뒤에 청구로 옮겨 18세를 이어 전하였다. 역년은 1565년이다”라고 한다.
<삼성기 하>는 18세에 걸친 임금(환웅)의 이름과 역년도 소개하고 있다. <태백일사>는 <진역유기> <삼성밀기> <삼한비기> <조대기> 등 고대 사서와 중국 사서를 인용했음을 밝히면서 배달국의 역사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첫 임금인 환웅천황의 건국기, 태고문자의 시작, 치우천황의 탁록대전 등을 기록하고 배달국의 시작인 신시의 개천으로부터 18세를 이어 1565년이 지나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이 일어났다고 한다.
<삼성기 상·하>와 <태백일사> 등의 기록은 고조선 건국 이전에 배달국이 존재했고 다수의 임금이 대를 이었으며 도읍지가 처음에 신시에서 청구로 옮겼다고 하는 고대국가의 존재를 설명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중국 랴오닝성과 내몽골 자치구 일대에서 발견된 고조선 이전 문화인 홍산문명은 이 일대에 존재했던 고대문명과 고대국가에 대해 엄청난 역사적 사실을 증거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홍산문화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기술하겠다.
한편 배달국 기록과 관련해서 ‘치우천황’을 빼놓을 수 없다. 치우천황은 고조선 건국 이전에 동북아에 존재했던 나라의 통치자로 알려져 있다. 치우천황에 대해서는 중국 사서에도 기록들이 있다. 한나라 무제 시대의 사관 사마천(BC 145~BC 86)은 중국 역사 25사의 첫 시작인 <사기> 의 <오제본기>에서 “치우가 반란을 일으키고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자 황제가 제후들의 군사를 징발하여 탁록의 들판에서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명한 ‘탁록대전’에 대한 내용인데 치우천황과 전쟁했다는 황제 헌원은 중국 신화에서 삼황(三皇)에 이어 중국을 다스렸다는 오제(五帝)의 첫 번째 왕이다.
<사기>에 담긴 치우천황
치우상이 담긴 귀면와.<국립중앙박물관>
이 외에도 중국 사서에 치우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다. <사기>를 비롯한 <관자> <태평어람> <산해경> <후한서> 등에서는 ‘치우의 형제가 81명이며 몸은 짐승이나 사람 말을 하였다’ ‘구리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졌다’ ‘모래와 돌을 먹었다’ ‘칼·창·큰 활 등 병장기를 만들었다’ ‘쇠를 제련하여 창 등 무기를 만들었다’고 전해오는 이야기와 치우 무덤의 존재 위치, 제사 관례를 기록함으로써 치우가 실존 인물이며 철제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중국과 전쟁을 한 이민족 국가의 통치자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삼성기 하>는 18대 환웅 중 14번째 환웅인 치우천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또 몇 대를 지나 자오지환웅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신령스러운 용맹이 있어 크게 뛰어났다.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하고 큰 안개를 일으켰으며 구야를 만들어 광석을 캐고 쇠를 녹여 병기를 만들었다. 이에 천하가 크게 두려워했다. 세상에서는 이를 치우천황이라고 한다. 치우는 천둥 치고 큰비가 내려 산하를 바꾸어 놓는다는 뜻이다. 치우천황이 염제신농이 쇠해 가는 것을 보고 큰 뜻을 품고 자주 서쪽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또 색도로부터 군사를 진격시켜 회대 사이의 땅을 점령하였다. 헌후가 일어나자 즉시 탁록들로 나아가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 뒤에 오장군을 서쪽에 보내어 고신을 쳐서 공을 세우게 하였다. 이때 천하는 셋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탁록의 북쪽에는 대요가 있고 동쪽에는 창힐이 있고 서쪽에는 헌원이 있었다. 서로는 자기의 병력을 가지고 이기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에 헌원이 치우보다 늦게 참전했기 때문에 싸울 때마다 불리하여 대요에 의지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 창힐에 의지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음은 <태백일사>에서 밝히는 황제 헌원과의 탁록대전의 내용으로, 중국 사서 내용과 전쟁 결과가 다르다.
“천황은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를 시켜 탁록을 포위하게 하여 멸망시켰으나 헌원은 그래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고자 하였다. 천황은 구군에 동원령을 내려 네 길로 나누어 진격하게 하고 스스로 보병과 기병 3000명을 거느리고 곧장 헌원과 탁록 유웅들에서 계속 싸웠다. 이때 군사를 풀어 사방으로 조여 들어가게 하여 베어 죽이기를 수없이 하였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하고 싸움을 독려하였다. 적군은 두려움에 손을 떨며 목숨을 걸고 도망쳤다. 100리 사이에는 적의 병마를 볼 수 없었다.”
“치우천황이 군대의 진용을 정비하여 사면으로 진격한 지 10년 동안 헌원과 싸운 것이 73회나 되었다. 그런데도 장수들은 피로한 기색이 없었고 군사들은 뒤로 물러설 줄 몰랐다. 뒤에 헌원은 여러 차례 싸워 천황에게 패하고도 더욱 군사를 크게 일으켰다. 심지어 우리 신시를 본받아 새로운 무기와 갑옷을 만들고 또 지남거를 만들어 백번이나 싸움을 걸어왔다. 이에 천황은 불같이 노하여 형제와 종친에게 싸움준비에 힘쓰도록 하고 위세를 떨쳐 헌원의 군사가 감히 싸울 뜻을 갖지 못하게 하려고 한 판 크게 싸워 한 개의 진을 여지없이 무찌른 뒤에야 싸움을 그쳤다. 이 싸움에서 우리 장수 치우비가 공을 급히 세우려 하다가 불행히 진중에서 죽었다. <사기>에서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규원사화>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이때 헌원이란 사람이 유망이 패하여 달아나고 치우 씨가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 임금이 되고자 했다. 헌원은 군사를 일으켜 치우 씨에게 도전했다. 치우 씨는 탁록들에서 헌원을 맞아 크게 싸웠다. 이때 군사를 풀어 사방을 치니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적군의 마음이 흐려지고 손이 떨려 급히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졌다.
치우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사기> 등에서 ‘구려(九黎)의 임금’ ‘구려임금의 호칭은 치우’라고 하고 있다. 즉 중국과 전쟁한 이민족 국가의 통치자로 인식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성수 명예교수는 고조선의 역대 단군이 치우를 만고의 무신(武神)으로 우러러 제사를 지냈고 중국조차 산둥성 궐향성에 있는 치우의 능에서 매년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한다. 그는 또 귀면와의 도깨비상 주인공은 치우상이며 한국인이 국난이 있을 때마다 우러러 숭상하던 한국인의 장군상이자 병신(兵神)이라고 한다.
중국, 동북공정으로 배달국 역사 삼킨다
치우천황은 탁록대전이 기원전 2600년경의 사건이기 때문에 실존했다면 고조선 이전 인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탁록대전에 관한 역사 기록은 고조선 이전에 동북아에 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고조선조차 신화로 치부해 버리는 우리의 기존 역사 인식의 틀에서는 배달국을 실존 역사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달라진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동안 역사 시대를 기록이 남아있는 주나라 시대인 기원전 9세기경으로 보다가 동북공정을 시작하면서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통해 이제는 하나라의 시작을 기원전 2070년으로 설정했고 치우와 황제가 전쟁을 벌인 탁록대전을 기원제 2600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 인정했다.
1995년 베이징 인근 탁록현에 귀근원(歸根苑)이라는 절을 세우고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이라는 사당을 지었다. 이 사당에는 치우, 황제, 염제의 상이 나란히 앉아 있다. 원래 중국인들은 염제, 황제를 자기들의 조상으로 하여 ‘염·황 후예’라고 해왔다. 중국 하남성 정주시에는 2007년 20년이라는 대역사 끝에 염황 이제(二帝)의 조각상이 세워진 바도 있다.
그러나 역사 공정의 진행 과정에서 동이족의 왕이자 한민족의 조상인 치우천황을 염제·황제와 함께 중화문화의 공동 시조로 영입해 버렸다. 우리가 기원전 24세기에 존재했던 고조선을 신화로 인식하고 있는 사이에 고조선 이전 배달국 시대에 활약했던 동이족 지도자를 중국인의 조상으로 둔갑시켜 버린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역사 공정의 배경은 황하문명 등 중국이 주장해온 그들의 고대 문명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꽃피웠던 홍산문화의 유적이 내몽골, 랴오닝 성 일대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 http://www.insightkorea.co.kr/)
3.7.1 2019년 8월 28일 문화일보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⑥ 고조선 태동시킨 ‘환웅의 군장국가’〉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환웅, 예·맥족 포용… 부족공동체→고대국가 발전 터 닦았다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⑥ 고조선 태동시킨 ‘환웅의 군장국가’
고대국가 형성前 準국가형태
과도기적 정치체제가 군장國
군장(chief)이 여러 고을 통치
‘최고의 예술품’ 무계리 석검
‘제사용 술잔’ 조동리 간토기
당시 군장들 권력·삶 보여줘
6000~7000년前 대동강 유역
한족 ‘환웅 군장국가’가 지배
기후변화로 예·맥 이동·유입
강대했던 환웅, 홍익인간 실천
예·맥족 제압 않고 정착 도와
곰 토템 맥족과 혼인동맹까지
고조선 국가는 선행한 ‘환웅’족의 군장국가(君長國家·chiefdom)를 한 단계 더 지양·발전시킨 고대국가였다. 여기서 군장국가란 스펜서와 서비스 등 진화론적 사회학자·문화인류학자들이 정립한 개념인데, 고대국가 형성 직전에 군장들(chief)이 자기 고을에 일종의 준국가(準國家)로 볼 수 있는 통치조직과 질서를 만들어서 고을과 주변 일대를 통치하는 정치체를 의미한다. 군장국가는 부족공동체로부터 고대국가로 가는 과정의 과도적 정치체다. 군장국가의 특징은 동일한 큰 부족 안에서도 크고 작은 다수의 군장국가가 출현해, 처음에는 상호 대등한 관계에서 협동 또는 경쟁하면서 자기의 통치세력을 점차 더 확대해 가는 데 있었다.
한반도에서 ‘한’(韓)의 군장국가 실태를 보면, ‘삼국지’ 위서 ‘한’조에 주로 한강 이남 진(辰)국 지역의 이름만 나온다. 마한에 속하게 된 것이 월지국(月支國) 등 54국, 진한에 사로국(斯盧國) 등 12개국, 변한에 미오야마국(彌烏耶馬國) 등 12개국이 있다.
고고유물로는 ‘한’족 무덤양식인 고인돌의 크기가 비교적 크고, 부장품 중에서 생산용구와는 별개의 전투용 또는 위신용 석검(石劍·특히 손목 방패 장치가 있는 전투용 석검)과 제천(祭天)용 특수 토기들의 출토는 군장국가 존재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예컨대 전북 진안군 모정리의 경우, 상당히 큰 A-1 고인돌 1기에서 ‘붉은 간토기’(磨硏紅陶)와 함께 10개의 석검이 출토됐다. 같은 지역 모정리 망덕 고인돌에서는 붉은 간토기와 함께 역시 7개의 석검과 다수의 돌화살촉이 출토됐다(③, ④ 참조). 붉은 간토기는 태양(하늘)에 제사하는 용구이고, ‘검은 간토기’(磨硏黑陶)는 지신(地神)과 강물(水)에 제사하는 용구다. 이 지역을 통치하는 ‘한’족의 ‘군장국가’가 형성됐음을 추론할 수 있다.
충북 충주 조동리 부근 군장국가의 군장의 제사용 붉은 간토기(약 6200년 전) 등을 보면(② 참조), 오늘날의 술잔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 경남 김해 무계리 군장국가의 군장의 석검은 그 시대 세계 최고의 예술적 석검이다.(① 참조) 한강 이남 군장급 고인돌 무덤 출토품들의 편년이 대부분 6000년 전~7000년 전임을 보면, 고한반도에서는 적어도 약 6000년 전~7000년 전에 다수 ‘군장국가’들이 출현했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한’족 대군장들 가운데서 ‘환웅국’은 고한반도 가장 북변에 위치한 군장국가로서, 역시 적어도 약 6000년 전~7000년 전에 지금의 대동강·청천강 유역에 형성돼 발전되고 있던 군장국가였다고 본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단군설화’에서 보면, 단군왕검에 의한 조선(고조선) 개국 과정을 설명하면서 분량의 거의 4분의 3을 ‘환웅’ 이야기에 배정하고 있다.
인류 모든 역사에서 고대 개국시조의 역사는 ‘신화’ 또는 ‘설화’로 돼 있다. 시조 신성화를 위해 신(神)·하느님(天)을 빌린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적 역사는 개국신화 속에서 신화적 요소와 사실적 요소를 구별해 내어 사실만으로 역사를 정립해야 한다. 그런데 ‘단군설화’에는 신화적 요소는 ‘환인(=하느님)’ 설명의 단 한 번이고, 모두 사실 이야기로 돼 있다. 단군 ‘신화’(神話)가 아니라, 단군 ‘설화’(說話)이고 ‘사화’(史話)이다. 단군설화의 ‘곰’과 ‘범’도 진화론적 사회학·인류학의 토템이론이 잘 설명해 주는 것처럼, 신석기시대 부족명칭이다. 그러므로 ‘단군설화’를 신화라고 버리는 것은 이 시대 유일한 문헌사료를 버리는 어리석은 일이다. 단군설화에서 ‘사실’의 줄거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환인(하느님)의 여러 아들 가운데 환웅(桓雄)이 항상 지상에 내려와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는 뜻이 강하므로, 환인(하느님, 아버지)은 지상의 삼위(三危)산과 태백(太伯)산을 내려다보니, 태백산이 가히 홍익인간(弘益人間)하기 적합하므로 아들 환웅을 천부인(天符印:하느님이 붙인 징표) 3개를 주고 무리 3000명을 이끌고 지상에 내려가게 했다.”
여기서 ‘삼위산’은 중국 감숙성 돈황(敦煌) 부근의 산이고, 태백산은 고한반도에 있는 산이다. 환인(하느님)은 고‘한반도 태백산’을 선택해 아들을 내려 보낸 것이다. 하느님이 선택한 땅 고한반도 ‘태백산’의 신성성이 함축돼 있다.
(2)초대 “환웅은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의 신단수(神壇樹) 아래 내려와 여기를 신시(神市)라고 말하니, 이 분이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는 분이다.”
여기서 ‘태백산’ ‘신단수’ ‘신시’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과 학설이 제시돼 있다. 필자는 인류의 하늘에서 내려온 신화(및 설화)의 서술양식에 따라, 이들을 모두 ‘건국 부족 거주 지역’에 연결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태백산’은 ‘밝’족의 제천하는 신성한 ‘큰 밝달’이다. 즉 ‘밝’족 거주지역인 고한반도의 제천하는 산이다. ‘신단수’는 태백산(‘밝’족 거주 지역) 내의 신성한 숲이 있는 한정된 지역을 가리킨다. ‘神市’는 ‘(신성한) 왕검의 도읍지’의 한자 뜻 표기로서, ‘왕검성’과 같은 뜻이다.
(3)환웅이 처음 3000명을 이끌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또한 환웅은 고한반도 북변에서 자생한 족속이 아니라 하늘(실제 역사에서는 고한반도 중부)에서 이동해 들어온 족속이 수립한 군장국가의 군장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4)환웅의 하강(이동) 후의 치세의 목표에 하느님(환인)으로부터 받은 홍익인간(인간을 널리 이롭게 함)과 재세이화(在世理化·세상을 이치로 교화시킴)의 설화가 기록돼 있는 것은 환웅 군장국가의 통치이념이 정립돼 있었음을 시사한다.
고한반도 각지에서 군장국가들이 형성·발전돼 고대국가 형성 직전에 있던 약 5000년 전에 요서 지역에, 갑자기 기후변화가 일어나서 강우량이 급감하고 장기간 기후 건조화가 진행됐다. 요서지방 대릉하와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홍산문화를 만든 농경부족인 ‘맥’족은 더 이상 이곳에서 농경을 지속하기 어려워 남방 이동을 감행하게 됐다. 우하량 유적지를 중심으로 ‘홍산문화’ 유적을 남긴 ‘맥’족은 약 5000년 전에 여족장의 지휘 아래 남방으로 부족 대이동을 감행했다. 홍산문화 출토 유적·유물이 5000년 전에 갑자기 뚝 그치고, 그 대신 요동반도 압록강 유역, 요서의 하가점 하층문화유적 지역에서 홍산문화를 계승한 ‘맥’족의 유적·유물이 발견·발굴된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당시 ‘맥’족의 이동은 4갈래로 나누어졌다.
첫째 갈래는 여족장(우하량 지역)의 지휘 아래 압도적 다수가 동남쪽 요동반도와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 북부로 이동했다. ‘맥’족의 원래 기원은 ‘고한반도 밝족’이었으므로 고한반도의 온난한 기후와 강우량을 아는 맥족은 기원지인 역사적 고향 방향으로 진로를 택했다고 볼 수 있다. 또 요동반도와 한반도는 농업경작에 적합한 토지가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둘째 갈래는 어떠한 사정으로 ‘맥’부족 내의 소수 일부 씨족이 주류에서 이탈해 바로 남방의 발해만 연안 해안으로 내려와 새 정착지를 개척한 경우다. 발해만 연안은 해수면이 낮아져서 해안선은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맥’족 이동의 이 갈래가 서요하 발해만 연안지역에 정착 후 고조선 건국 후에 통합돼 남긴 유적이 ‘하가점 하층문화’다.
셋째 갈래는 어떠한 사정으로 ‘맥’부족 내의 극소수 씨족이 서남방으로 이동해 중국 동해안에 정착한 경우다. 당시 중국 동해안은 해수면이 약간 내려가서 주인 없는 새 간척지가 조성되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 동해안 새 간척지에 정착해서 고대 중국인들이 말한 ‘동이’(東夷)의 일부가 됐다.
넷째는 기후 건조화 후에도 이동하지 않고 요하 상류 양안과 시라무렌 강·노합하 유역에 남아서 후에 조성된 수초지·목초지에서, 목축으로 생업을 바꾸어 유목민이 된 경우다.
필자는 동북아시아 유목민은 약 4000년 전~5000년 전 건조기에 부족 이동을 감행하지 않고, 그대로 예족과 맥족 지역의 거의 말라 가는 강가에 남아서 수초지·목초지를 따라 유목생활을 시작한 원 실위(室韋)족과 원 산융(山戎)족에서 기원한다고 보며, 그들도 원래 ‘밝’족의 후예들이었고, 맥족·예족의 남겨진 갈래였다고 본다. 필자는 이 동아시아 유목민 기원의 발견을 매우 중시한다. 그들은 유목민이 되자 ‘이리(늑대)’를 토템으로 정해 자기 정체성을 구별했다.
‘맥’족뿐만 아니라 ‘예’족 중에서도 농경씨족들의 일부는 기후 건조화시기에 씨족이동을 감행해 농경에 적합한 남방으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남방 이동 ‘예’족은 ‘맥’족보다는 소규모였다고 추정된다. 왜냐하면 ‘예’족의 다른 일부는 삼림지대와 큰 강·호수지역 환경에 잘 적응해 수렵과 어로를 농경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정착했기 때문에, 농경이 어려워져도 수렵·어렵 등 다른 생존수단이 여전히 일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족은 요동반도와 압록강·두만강 양안 및 청천강 이북의 고한반도에도 이미 분포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상해 정착했던 ‘예’족 일부의 남하는 이 지역의 인구밀집에만 작용했지 큰 교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맥’족 주류의 큰 규모의 동남방 이동은 이 지역에 상당히 큰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 약 5000년 전 이제 요동반도는 ‘예’족 지역에 새로 ‘맥’족이 들어와서 ‘예’족과 ‘맥’족이 섞여서 거주하는 지역이 됐다. ‘맥’족이 고한반도에 이동해 들어오자 이번에는 청천강 일대까지 군장국가를 형성하고 있던 ‘한’족의 ‘환웅’ 군장국과 접변하게 됐다.
인류 초기역사에서 취약한 부족집단이 찾아와 복속하면 강대한 부족은 대개 전쟁과 폭력으로 노예화시키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환웅 군장국가의 마지막 군장 ‘환웅’은 그렇게 하지 않고, 찾아온 곰 토템 맥족과 범 토템 예족을 자기 영토에 정착시켜 선진농경을 가르쳐 주고 도와줬다. 곰 토템 맥족의 여족장이 한족 환웅군장국의 마지막 군장 ‘환웅’에게 ‘혼인동맹’을 요청하자 ‘환웅’ 군장은 이것도 수용해 ‘한’족(환웅국)과 ‘맥’족의 혼인동맹에 의한 두 부족의 결합이 이루어졌다. 필자는 환웅국의 마지막 군장 ‘환웅’은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통치 이념을 잘 실천한 큰 시야를 가진 군장이었다고 생각한다.
환웅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맥’족을 포용해 정착시키고 혼인동맹으로 한·맥 2부족의 결합을 성취했기 때문에 환웅의 군장국가는 그 자리에서 즉각 매우 강대하게 됐다. 이것만이 아니다. ‘맥’족이 ‘한’족 환웅국가의 왕비를 내는 부족으로 대우받게 됐음을 알게 된 제2갈래의 발해만 연안 ‘맥’족과, 중국 동해안 간척지에 들어간 제3갈래의 ‘맥’족과 옛터에 잔존해서 유목민이 돼 가는 ‘맥’족 등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진 모든 ‘맥’족들이 모두 환웅의 군장국가 정치체에 순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출처;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82801032812000001)
3.7.2 2019년 12월 4일 문화일보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⑩ 中에 세운 고조선 분국〉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고조선 이주민, 5800년 전 산동반도 개척… 古중국에 선진문명 전수
▲ 고조선 첫 이주민 태호족의 족장(왕) 복희와 여와의 상징 벽화.
- 한민족 문명학
해수면 낮아져 생긴 동쪽 해안 간척지에 정착… 東에서 온 큰 활 가진 ‘동이’족이라 불려
결혼·화식·선진농경법 등 가르쳐… 고조선 상징 ‘아사달 문양’ 토기도 곳곳서 출토
▲ <그림 1>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의 지형 변화(기원전(BC) 5500~BC 1300). 황색은 후에 간척지. BC 5500년경 산동반도가 2개의 섬으로 돼 있다가 BC 1300년경 연륙이 끝나 간척지가 만들어지고, 현재(완신세·完新世)의 지형이 됐다.
중국 산동반도와 황하 및 회수 하류 유역 등 중국 동해안에는 약 5800년 전부터 2400년 전까지 고조선 이주민들과 그 후예들이 들어가 세운 다수의 자치적 소분국(小分國)들이 형성돼 고조선 문명권의 서남부 일대를 이루면서 발전하고 있었다. 신채호 선생은 이들을 고조선 ‘식민지’라고 표현했는데, 필자는 ‘分國’이라고 바꾼다.
고조선 사람들의 이 시기 이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지역의 환경변화를 먼저 알 필요가 있다. 중국의 장광직 교수가 1986년경부터 아날학파의 방법론을 적용해 그린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의 지형적 환경 변화를 보면, 고조선 사람들의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에의 연속적 대폭 이주 정착의 배경을 알 수 있다.
최후의 빙기가 끝나고 지구온난화가 진행돼, 약 1만2000년 전의 지구 기후가 대략 오늘날처럼 된 후, 온난화가 최고로 진전된 약 7500년에는 해수면이 올라가서 산동반도는 대륙에서 분리된 ‘2개의 섬’이 돼 있었다. 후에 고조선 이주민이 이주해 들어가 거주한 박(박)·상구(商邱)·개봉(開封) 지역은 바닷물에 잠겨 있는 해수면 아래의 대륙붕이었다. 약 3300년 전에는 해수면이 다시 내려가서 산동의 2개 섬은 대륙과 연륙돼 산동반도가 됐다. 그 결과 이전 바닷물에 잠겼던 지대는 새로운 저지대 간척지가 됐다. 산동과 황하 하류 늪지대도 완전히 평원이 돼 오늘날과 같은 지형이 됐다. 중국 동해안에도 해수면이 내려가서 긴 줄의 간척지가 자연적으로 조성됐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산동반도와 황하 하류에서 회수유역 및 양자강 하류유역에 이르는 중국 동해안의 새로 조성된 직선 띠는 새로운 해안 ‘간척지’로서 토착인의 연고 점유권과 소유권이 없는 주인 없는 개척 가능한 새 땅이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상대적 과잉인구에 시달리던 고(古)한반도 ‘밝’족과 ‘한’족, 그리고 한발을 만나 남하하던 ‘맥’족 일부와 고조선 건국 후 고조선 이주민들은 이 주인 없는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의 주인 없는 새 간척지를 농토로 개척하면서 고조선 이주민의 자치적 ‘마을공동체들’을 형성했고, 이들이 결합해 고조선 이주민의 자치적 소분국들을 형성했다고 본다.
산동반도 및 중국 동해안의 간척지 분포와 고조선 이주민의 정착지 및 분국의 분포는 거의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그들은 이주할 때 ‘큰 활’을 갖고 들어왔으며, 토착인들은 이 특징을 보고 후에 고조선 이주민들은 ‘동이’(東夷: 동쪽에서 온 큰 활을 가진 사람들)족이라고 표현하게 된 것이라고 해석된다. 고조선 계통 이주민 중에서 가장 먼저 이 지역에 이주해 들어온 씨족은 고조선의 ‘태호’(太호)족이었다. 이들은 古한반도의 ‘밝’족의 한 씨족이었다.
‘태평어람’(太平御覽)과 ‘예기정의’(禮記正義)에 인용된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는 ‘태호’는 동방(東方)의 ‘진’(震)에서 나왔고 밝은 태양을 상징으로 삼기 때문에 태호(太호)라 한다고 기록했다. 호(호)자는 좌변과 상단에 ‘白’(‘밝’의 뜻)자를 2개나 쓰고 하단에 ‘本’자를 붙여 그들이 ‘본래 밝족’임을 표시했다. 太(태)자는 맨 처음의 뜻이다. 중국 고문헌은 태호족을 ‘복희’(伏羲)씨 또는 ‘포희’(포犧)씨라고도 기록했는데, ‘伏’ ‘포’는 모두 ‘밝’의 한자 차음표기라고 필자는 해석한다. 또한 여기서 震(진)은 방향과 지역을 모두 가리키는데, 중국 고문헌이 쓰인 시기의 관용대로 古한반도 진국(震國, 辰國) 지역을 가리킨 것이다.
중국학자들은 태호족이 동이족의 선두로서 중국에 들어온 시기를 5800년 전~4800년 전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고조선 건국 무렵에 고(古)한반도에서 밝족(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유형)의 한 씨족이 선진 농경문화를 갖고 산동반도 지역에 이주해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태호족은 농경에 적합한 진(陳·지금의 하남성 회양현) 지역에 정착해 농경생활에 들어갔다.
고조선 건국과 고조선 문명 형성기에 이주한 태호족은 선진 고조선 문명을 고중국에 전수해 줬다. 필자의 설명보다 근대 중국 석학 부사년(傅斯年)의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에서 지적한 태호족이 당시 고중국에 전수한 다음의 선진문명 항목을 들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태호족이 △결혼(가취·嫁娶)제도 △화식(火食) 방법 △태호족 신농(神農)씨는 보습과 가래를 만들고 농경(農耕)을 가르침 △태호족 포희씨는 새끼의 매듭에 의한 의사소통법(결승·結繩)과 그물 짜는 법을 만들어 가르침 △포희씨는 비파(거문고의 일종) 36줄을 만듦 △포희씨는 역(易)의 8괘(卦)를 만들어 만물의 이치를 알게 했고, 신농(神農)이 이를 제곱해 64괘(卦)를 만듦 등이 기록돼 있다.
▲ <그림 3> 고조선 두 번째 이주민 소호족의 산동반도에서 출토된 ‘아사달’ 문양의 토기. <그림 5> 양저문화 유적 출토 옥기에 새겨진 ‘아사달’ 문양과 소호족 상징인 ‘새’.
신농씨는 고대부터 중국인들이 염제(炎帝), 적제(赤帝) 등으로 높여 부르면서 사마천이 ‘사기’(史記) 삼황본기(三皇本紀)에서 3황의 하나로 넣었던 씨족이었다. 사마천은 신농씨가 “나무를 쪼개어 보습을 만들고 나무를 휘어서 보습자루를 만들어, 보습과 가래의 사용법을 만민에게 보여서 비로소 농경을 가르쳤다. 그래서 신농씨라 했다”고 기록했다. 즉 고대 중국에 농경을 전파한 부족을 고대 중국에서는 고조선(동이족) 신농씨로 보아온 것이다. 선진 농경뿐만 아니라 악기 ‘비파’와 주역 8괘, 그리고 현재도 중국인들이 토템으로 사용하는 ‘용’(龍)도 고조선의 ‘태호’족이 중국에 가져가 전파한 태호족의 토템이었다. 즉 태호족이 이주할 때 갖고 간 선진 고조선 문명의 전수가 고중국 문명의 기원의 하나가 된 것이었다.
태호족에 뒤이어 약 5000년 전~4000년 전에 산동반도의 간척지에 이주해 들어간 고조선 이주민은 ‘소호’(少호, 少昊)족이었다. 그들도 선진 농업경작과 태양숭배와 새 토템을 갖고 들어가서 산동반도의 곡부(曲阜)지방에 정착했다.
소호족의 산동반도 대문구(大文口)문화 유적 상층에서는 약 5000년 전~4400년 전의 고조선족임을 밝혀 ‘아사달 문양’을 새긴 고조선식 뾰족밑 팽이형 토기 술잔이 11개(파손품 포함)나 출토됐다.
태호족과 소호족의 이주 이후 연달아 고조선 이주민들이 산동 반도와 중국 동해안에 정착해 간척지를 새 농토로 개척하면서 고조선에서 간직해 온 농경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은 정착지에 자치적 마을공동체를 만들었다가, 마을공동체들이 연합해 자치적 소분국들을 형성하고, 고조선어를 사용하면서 고조선 문화를 갖고 생활했다.
그 결과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의 이전 간척지대는 양자강 하류 남안까지 이주해 들어온 고조선 사람들과 그 후예들의 크고 작은 ‘분국들’의 생활 터전이 됐고 고조선 문명권의 일부가 됐다. 중국인들이 후에 관내의 동이(東夷)라고 부른 진(秦)나라 이전의 선진동이(先秦東夷)는 바로 고조선 이주민들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산동(山東), 산서(山西), 하북(河北) 발해안, 하남(河南)성 동부, 강소(江蘇)성 북부, 안휘(安徽)성 동북각 지방의 이른바 동이족은 조선족(朝鮮族)이라고 보았으며, 기원전(BC) 1000~BC 600년경까지 고조선족이 매우 강성했음을 지적했다.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문화사’에서 독립된 장으로, 서국을 고조선 이주민의 식민부락 가운데 하나인 소국으로 출발해 한 시기 주(周)와 어깨를 나란히 겨루면서 주나라에 매우 관대했던 고조선 식민지 국가였다가, 주의 선왕(宣王)의 공격을 받고 패망했다고 설명했다.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 지역 동이족의 기원이 고조선 이주민인가의 끊임없는 질문에 대해, 청동기 유물도 있지만, 여기서는 고조선 이주민들의 무덤인 ‘고인돌’로 증명해 보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운반불능인 고인돌 무덤이 이주민의 사실을 명료히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산동성 등주(登州)의 치박(淄博)에는 1930년대까지 대형 개석식 고인돌과 탁자식 고인돌이 남아 있었다. 산동반도와 회수 유역의 ‘동이’지역에는 이 밖에도 다수의 고인돌 무덤이 있었는데, 지금은 유적으로 보존돼 있는 것이 별로 없다.
▲ 중국 산동성 치박(淄博)에 남아 있는 탁자식 고인돌 사진.(캐나다 고고학자 하가 시메이즈, 1936년 촬영)
그러나 고조선식 고인돌의 중국 호칭인 석붕(石棚) 이름을 가진 지명은 아직도 다수 남아 있어서 고조선 이주민 공동체 분국들과 고인돌 무덤이 존재했던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필자는 동이족의 하나인 우족(우族)이 고조선으로부터 청동기를 처음으로 고중국 지역에 가져와 전파했음을 이미 밝힌 바 있다. 양자강 하류 북안에 중국 고고학자들이 양저문화(良渚文化) 유적이라고 호칭하는 고대 유적이 있는데, 그 상층유적(BC 2300년경)은 ‘동이문화’ 유적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양저문화 상층유적 출토 옥기들 가운데 고조선의 상징인 ‘아사달’ 문양과 그 문양 위에 고조선 이주민 ‘소호’족의 상징인 ‘새’를 새긴 (그림 5)와 같은 옥기가 출토됐다.
또한 양자강 하류 절강성 일대에는 고조선 이주민 무덤인 고조선식 고인돌이 지금도 50여 기가 남아 있다. 이들 고인돌의 축성 연대는 청동기 시대인 BC 11세기~BC 400년경(중국 편년 상말 주초~춘추 말기)으로 편년되고 있다. 이것은 고조선 시대에 해당한다. 주목할 것은 중국 양자강 하류 남안의 고인돌들의 형태 및 축성 구조가 고조선·진국 지역(전라남도 지역) 고인돌들의 형태 및 축성 구조와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산동반도 등에 이주한 고조선 사람들은 회수 유역부터 산동반도 이북 해안 지역에 걸쳐서 자치적 소분국을 세워 활동했다. 그들은 고조선 중앙정부의 통치를 받지 않았고, 또한 물론 고중국 계열 어느 소왕국의 통치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이주할 때 가지고 간 고조선 문화 양식을 변용·발전시키면서 자치생활을 했다. 중국인 학자 장광직(張光直) 교수가 상(商)시대 중국에 대한 정밀한 연구 끝에 동이족의 분포 지역을 지도로 그린 것이 있는데, 동이족의 영역을 객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의 고조선 이주민 분국들은 진시황이 BC 221년경 북으로는 만리장성을 수축해 고조선 기마부대와 고조선 이주민의 월경을 차단하고, 동으로는 ‘동이족’을 고중국인들과 섞여 살도록 강제이주 정책을 실시해 급속히 해체돼갔다. 그러나 고조선 이주민이 갖고 들어간 선진 고조선 문명이 그 후 고중국 문명의 기원과 형성에 끼친 영향과 도움은 실로 막대했다. 중국 상(商)나라도 고조선 이주민이 세운 나라였으며, 고중국 문명의 중핵인 상(商)문명도 바로 선행 고조선 문명을 고중국 지역에서 계승한 문명이었다.』
(출처;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12040103141200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