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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3. 배달국 3.1 〈동아시아 고대사의 열쇠 ‘치우천왕’ 논쟁 “치우를 잃으면 고조선 역사도 사라진다”〉~3.3 〈오성취각으로 배달국을 증거하다!〉 본문

지음/《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3. 배달국 3.1 〈동아시아 고대사의 열쇠 ‘치우천왕’ 논쟁 “치우를 잃으면 고조선 역사도 사라진다”〉~3.3 〈오성취각으로 배달국을 증거하다!〉

대야발 2024. 2. 1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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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3. 배달국

3.1 2003 10 28일 신동아 2003 11월호 동아시아 고대사의 열쇠 치우천왕 논쟁 치우를 잃으면 고조선 역사도 사라진다

 

글: 박정학 치우학회 회장

 

붉은악마와 함께 부활한 군신 치우는 역사인가 신화인가

 동아시아판 트로이 전쟁 탁록대전

 ··치의 자손임을 강조하는 중국의 속내

 치우는 동아시아 공동의 조상이다

 

 

 

2002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치우의 모습으로 분장한 응원단

 

 

중국이 지난해부터 5년에 걸쳐 200억위안( 3조원)을 투입해 고구려를 그들의 역사 속으로 편입시키는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라고 한다. 중국 공산당을 대변하는 광명일보는 아예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분이라고 못박았다(자세한 내용은 신동아’ 2003 9월호 중국은 왜 고구려사를 삼키려 하는가 참조). 이 소식을 접한 한국인들은 왜 갑자기 중국이 남의 나라 역사를 훔쳐가려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단순히 중국의 국경문제나 동북지역 소수민족의 동요를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며, 따라서 고구려사 왜곡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 속에는 중화사상이라고 하는 오래된 중국의 패권주의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한 동북공정의 다음 목표는 치우천왕(蚩尤天王)이 될 것이다. 치우를 중국 역사로 편입함으로써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이 부분은 이미 그들의 역사가 됐다)을 포함한 고조선 전체의 역사를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치우천왕의 존재는 2002년 월드컵 대회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붉은악마의 상징물로 활용된 귀면(鬼面)의 주인공이 바로 치우천왕이다. 기원전 2826세기에 존재했던 치우는 금속을 제련하여 무기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각종 전투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해 황제 헌원을 위협했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그를 전쟁신·군신·수호신으로 받들었다.

 

 

치우천왕은 누구인가

 

치우에 대한 기록은 사기를 비롯해 40여 종의 중국 사서에 등장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의 정사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환단고기 규원사화처럼 위서(僞書)로 치부되는 책에 자세히 기록돼 있을 뿐이다. 먼저 사기를 비롯한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치우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치우는 구려의 임금이었으며, 고대 천자의 이름이다.

 

 구리 머리에 철 이마(銅頭鐵額)를 하고 모래를 먹었으며, 금속을 제련해서 다섯 가지 병기를 만들었다(청동기 유적 발굴로 입증되고 있음).

 

 난을 일으키기 좋아하고 난폭하여 황제에 굽히지 않다가 잡혀 죽었다.

 

 그의 묘는 산동성 수장현에 있고, 매년 10월에 제사를 올리는데 붉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의 우두머리는 모두 그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특히 유방은 통일을 위한 마지막 풍패전투에 나가기 전에 치우사당에 참배하고 승리한 후 서안에 그의 사당을 짓고 높이 받들었다.

 

 

한국의 사서에 나오는 치우에 대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동사강목 치우기라는 혜성이 나타났다는 내용이 유일하며, ‘연려실기술’ ‘대동야승’ ‘청장관전서 등에서는 중국의 기록을 인용해놓았을 뿐이다. ‘성호사설에는 우리의 민속을 설명하면서 치우를 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치우사당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세 차례 나온다)를 지냈다는 내용이 언급돼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 규원사화에는 치우천왕이 배달나라 14대 임금(재위 109, 기원전 27072599)이며 황제와 치우가 패권다툼을 벌이게 된 경위, 치우가 만들었다는 무기의 종류와 전투방법, 10년간 73회나 치렀다는 주요전투의 내용, 염제 휘하의 한 군장이었다가 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염제로 등극하는 과정, 쇠를 캐 제련하는 과정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치우는 바로 고구려의 전신인 구려(九黎=九麗·九夷·句麗)의 임금이었으며, 치우가 수도를 청구로 옮겼다고 했으니 구려의 영역은 태백산 신단수가 있던 만주지역에서 청구가 있는 산동반도까지 이어졌던 것 같다. 기마족의 이동폭이 넓었음을 인정하면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상고시대 동북아시아에는 화하족(華夏族 또는 漢族), 동이족(東夷族), 묘만족(苗蠻)  3개의 부족집단이 있었다고 본다. 분포지역을 보면 화하족은 섬서(陝西)성 황토고원을 발상지로 황하 양안을 따라 중국의 서방과 중부 일부지역을 포함했고, 황제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동이족은 산동(山東)성 남부를 기점으로 산동성 북부와 하북(河北), 만주지역, 한반도, 일본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하남(河南)성 동부, 남쪽으로는 안휘(安徽)성 중부에 이르며,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거주했다. 동이족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소호·태호·염제·치우 등이 있다. 묘만족은 호북(湖北)성과 호남(湖南)성을 중심으로 거주했고, 삼묘·구려·형만·요족 등 30여 개의 지파가 있으며 치우는 그들의 공통 조상이다. 여기서 치우는 동이의 대표적 인물이면서 묘족의 조상이기도 하니, 구려가 동이의 부락이었다가 남쪽으로 이동하여 묘족연맹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트로이전쟁 못지않은 탁록대전

 

치우시기에 이르러 동이연맹(고을사회로 볼 때)을 다스리던 염제(왕호, 사람 이름이 아니라 여러 명의 염제가 있음) 유망이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여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같은 동이연맹 군장의 아들이던 황제 등이 제위를 탐하므로 이를 바로잡기 위해 구려족 임금인 치우가 일어났다. 그러나 어리석은 염제 유망이 제위를 찬탈하려는 줄 알고 황제와 손을 잡고 치우와 대적한다(이에 앞서 염제는 황제와의 싸움에서 졌다). 하지만 황염동맹은 치우에게 대패하고 치우는 공상에서 동이족연맹의 임금인 염제가 되니 마지막 염제였다.

 

 

같은 동이족 연맹의 일원이던 치우와 황제 헌원은 10년간 73회나 싸웠으나 황제는 늘 패했고, 그러면 여성들에게 쫓아가 도움을 청하여 그 군대를 이끌고 다시 도전했다가 또 패하곤 했다. 여기서 여성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에 대해 여성들이 황제를 좋아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당시는 모권사회였으므로 각 부락의 실질 지도자가 여성이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치우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무기인 금속무기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안개를 일으키고 비와 바람을 부르는 등의 도술을 행했다고 하니 승리는 당연했을 것이다.

 

 

그 후 그들의 마지막 싸움이자 동양 역사기록상 첫 대전인 탁록대전이 현재의 베이징 서북쪽에 있는 탁록(?鹿)에서 벌어진다. 이 대전은 기마족이 내려와 농경족과 섞인 동이족 가운데서, 부계사회를 지향하는 기마족 문화의 치우와 모계사회 지향의 농경문화의 황제 간의 충돌이었다. 한신대 김상일 교수는 동쪽의 정신문화와 서쪽의 물질문화의 충돌이라고 설명한다.

 

 

이 전쟁으로 중국에서는 치우가 죽었다 하고, 우리쪽 기록에 따르면 치우군의 부장인 치우비가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투 후 치우는 묘족의 시조가 됐고, 무덤이 산동반도 서남쪽에 있으며 군신으로 추앙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탁록에서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최근 중국의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鹿中華三祖文化硏究會)는 탁록지역에서 4개의 치우 무덤을 찾아내고, 그 중 1개가 진짜 치우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치우가 탁록에서 죽었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려는 의도다. 그러나 산동성에서는 한서의 기록을 인정하여 지역 내에 있는 3개의 무덤 중 문상현 남왕진의 무덤을 진짜 무덤으로 보고 작년부터 복원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어쨌든 탁록전투로 인해 동북아시아에서 동·서 문명의 특성이 구분되어 뚜렷하게 다른 문화집단이 형성되었으며, 그 두 문화집단(모권·물질 대 부권·정신)의 갈등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순임금이 부권사회를 지향하다가 자기 딸들에게 독살당한다는 금문학자들의 주장을 보더라도 역사적으로 모권과 부권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다.

 

 

치우에 집착하는 중국

 

이렇듯 의미가 깊은 치우천왕의 역사지만, 그의 활동영역이 대부분 현재의 중국 땅인 데다 국내 문헌사료의 부족 등을 이유로 국내 학계는 치우 연구를 소홀히했고, 아예 중국 고대의 신화인물로 치부하고 있다. 반면 중국측은 몇 년 전부터 치우는 묘족의 선조일 뿐 아니라 황제, 염제와 더불어 중화민족 역사의 3대 인문시조(人文始祖)”라고 주장하고 치우 복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치우가 중국의 조상이라면 그가 다스린 구려와 그 후신인 고구려는 자연스럽게 중국 역사에 편입되고, 치우의 영역과 법통을 이어받은 고조선 역사마저 중국에 귀속될 것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삼황오제(三皇五帝)를 신화적 존재로 보았고, 하우(夏禹)부터 실존 역사로 취급했다. 황제의 자손인 하우를 그들의 조상으로 받들면서 스스로를 화하족이라 불렀다. 그 외에 염제의 후손인 동이족과치우의 후손인 묘만족은 오랑캐라며 야만족 취급을 했다.

 

 

1997 4월 호남성 이안링(炎陵縣)현에 있는 염제 신농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높은 산 위에 염황지자손(炎黃之子孫)’이라는 큰 간판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중국인들이 황제의 자손(子孫)일 뿐 아니라 염제의 자손이기도 하다는 것을 강조한 문구였다. 그동안 중국에서는 유적유물의 발굴작업이 진행될수록 황하문명을 비롯해 선진(先秦) 문명의 주인공이 그동안 오랑캐라 비하하던 동이족임이 드러나고 있었다. 한자를 비롯해 우수하다고 알려진 많은 중국문화가 한족의 문화가 아니라는 연구도 속속 나옴에 따라 황제의 자손인 것만 강조해서는 더 이상 정통성을 인정받기 어려운 상태가 된 것이다.

 

 

 

한국과 중국의 치우 연구자들은 세 차례에 걸쳐 치우 국제 학술대회를 열었다.

 

 

여기에 1988년 덩샤오핑(鄧小平) 염황자손(炎黃子孫)’이라는 휘호를 앞세워 소수민족 끌어안기를 강조함에 따라, 중국 내에서는 동이족의 시조 염제(炎帝 神農)를 자기들의 시조에 포함시키려는 운동이 벌어졌다. 정치적 목적의 동화정책에 따라 한 민족이 두 조상을 갖게 된 것이다.

 

 

1999 6월 필자는 한배달 치우학회 회원들과 함께 동이족의 역사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산동반도와 탁록지역을 찾았다. 베이징의 서북쪽에 있는 탁록에는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가 주축이 되어 1995년에 세운 귀근원(歸根苑)이라는 사원이 있고, 그 가운데 삼조당(三祖堂)’에 염제·황제·치우제 세 사람의 좌상을 안치하고 참배를 하고 있었다. 이미 치우가 중국의 역사에 편입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치우를 난폭하고 난을 일으키기 좋아하는 야만족으로 취급하고, 염제와 황제의 가장 큰 업적이 치우의 정벌이라 자랑하던 중국인들이 이제는 치우를 황제·염제와 같은 반열에 올려 스스로 ··(··)의 자손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상이 셋이 된 이상 황제의 자손이라는 화하족만으로는 이를 설명할 수 없으므로 화하족(황제의 후손)과 동이족(염제의 후손) 및 묘족(치우의 후손)을 합쳐 중화족이라는 새로운 민족 명칭을 만들어냈다. ‘중국은 한족(漢族)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고, 이로써 중국은 동이의 역사, 묘족의 역사를 모두 중화족의 역사에 포함시킬 수 있는 근거를 갖게 됐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에서는 ·· 삼조를 모시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여, 1993 10월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 런창허(任昌和) 회장이 ··치 삼조문화의 관점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공식화되기에 이른다. 이어 탁록삼황삼조문화학술토론회가 열리고, 1995년에 귀근원을 만들면서 삼조문화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으며, 후속 연구도 활발했다. 한마디로 정부의 지원 아래 대대적인 치우 끌어안기 사업이 진행된 것이다.

 

 

2001년 산동반도의 치우무덤을 찾았을 때 주민들 대부분이 그 위치조차 알지 못했으나, 2002년 봄 명지대학 진태하 교수 일행이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는 산동성의 치우 무덤을 복원 중이었다. 또 호남성에 치우의 동상을 세우고 1993년부터 간추절(秋節)’ 행사를 개시하여 묘족의 독특한 문화전통을 살리면서 경제발전의 중요한 창구로 사용하기도 하고, 세계 치우학술대회를 열어 치우에 대한 연구범위를 세계로 확대하고 있다. 이는 치우와 관련한 문화의 흔적이 미국 오대호지방과 남아메리카, 북유럽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중국학자 왕대유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이처럼 중국인들은 1980년대까지 자신들의 조상인 황제에 대항했다 해서 미워하던 치우를 공동조상으로 받들면서 세계적인 공인을 얻으려 하고 있다.

 

 

치우 무덤과 유적복원 활발

 

2001년 옌볜대학에서 열린 치우학술대회에서 중국측으로는 유일하게 치우에 대해 발표한 짜오위다(趙育大)씨는 치우의 문화가 한족의 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황제와 치우 중 누가 정통이고 누가 비정통이라는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우리측과 비슷한 주장을 하기도 했으나, “중화민족은 황염동맹을 핵심으로 한다” “치우는 묘족의 시조라고만 하고 동이의 수장이었음은 간과했다.  중화문명사에서 전환적인 의미를 띄는 인문시조라고 하여 당시 동서문명충돌론이 아니라 중화문화라고 하는 문화집단만을 강조했다. 한편 치우가 탁록에서 죽었으므로 그 무덤도 당연히 탁록에 있어야 한다면서 산동성에 있다는 한서의 기록을 무시하는 등 치우라는 걸출한 인물을 인정하면서도 중화문화라고 하는 카테고리 속에서만 보려고 해 동서 문화충돌론을 주장한 한신대 김상일 교수와 상당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김교수는 두 문화집단이 있어 충돌이 생기는 것이므로 중화문화 하나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는 중화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필자가 공동시조로서 함께 연구하자고 제안해 앞으로 연구 교류하기로 합의했다. 이 학술대회를 통해 옌볜대학 교수들에게 치우는 우리 조상이라는 점을 알려줌으로써 우리도 연구를 시작하겠다는 반응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정부가 과연 조선족에게 그런 연구를 허락할지 미지수다.

 

 

이렇게 중국이 치우에 집착하는 이유에 대해 단순하게 소수민족을 끌어안는 동화정책의 일환이며, 한반도의 남북통일시 생길 수 있는 국경문제에 대비하고, 문화유적의 관광자원화를 통한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실리적 목적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고구려는 물론 고조선을 포함하는 동이·묘족과 관련된 모든 역사를 하나의 중국사로 끌어가려는 논리로서, 패권주의인 중화사상의 부활을 예고하는 것이라 하겠다.

 

 

삶 깊숙이 자리 잡은 치우의 흔적

 

이처럼 중국이 일방적으로 치우 연구를 진행하면서 모든 치우의 후예들을 중국인화하는 것을 경계하려면 국내에서도 치우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사실 치우를 한()족의 시조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미 중화족 속에 포함된 동이와 묘족의 조상인 것은 분명하다. 즉 치우는 우리의 조상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조상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누가 더 많은 연구를 하고 어느 지역에 그 흔적이 원형대로 많이 남아 있느냐, 또 그 유산을 누가 더 현대화하느냐에 따라 치우의 역사가 중국의 것이 되거나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고, 또는 둘 다의 것이 될 수도 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치우에 대한 정서와 평가는 일반 대중과 학계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난 월드컵 이후 국민들은 치우를 당연히 우리 역사로 인식하고 있는 반면, 학계는 치우가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을 뒷받침할 실증적 자료가 없다며 여전히 중국 고대의 신화적 인물로 보고 있다. 앞서 밝혔듯이 그나마 치우에 대한 기록이 있는 책들은 모두 위서(僞書)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일상생활 곳곳에서 치우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장승의 모습으로, 혹은 주요 건물 입구에 서 있는 해치(또는 해태, 사천왕)의 모습으로 치우는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친밀한 홍소로,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에게는 무서운 포효로 보이는 표정을 통해 악귀로부터 마을의 재액을 막아주고 있는 것이다. 또 기와집 치미나 막새기와(귀면와)에 위치하여 집을 화재와 재액으로부터 보호해주고, 동짓날에는 붉은 팥죽이 되어 병마와 액운을 막아준다. 또한 단오절 적령부(赤靈符)라는 붉은 부적을 통해 개인과 집안을 보호해주기도 하고, 군사들의 방패와 무기와 군기(軍旗), 투구 등에 새겨져 승리를 일궈내는 군신으로 작용을 하며, 잡귀를 막아주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붉은 도깨비로 항상 우리 곁에 머물렀다.

 

 

도깨비 연구가인 조자용 박사나 윤열규씨에 의하면 도깨비는 중국과 일본에도 있지만 한국의 도깨비만이 소뿔이나 자신감에 넘치는 홍소 같은 치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소뿔 투구를 쓰고 경기를 하는 치우희, 고구려 벽화에서는 각저희라고 했던 씨름은 현재 우리 민속의 대표적인 놀이가 되어 있으며, 소뿔 대신 황소를 상으로 준다.

 

 

상고사 연구는 어디로

 

사실 한국 상고사 연구자들은 정사로 인정할 만한 단군 이전의 민족사 기술이 거의 없어 발을 구른다. 단군도 신화적 인물로밖에는 취급할 수 없는 상황이니 그 이전의 역사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한민족, 배달민족이라는 말의 출처가 바로 환단고기라는 것이다. 책 자체는 위서로 의심받고 있지만 이 책에서만 볼 수 있는 한민족, 배달민족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류학의 보편적인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1만년 전후 중석기 내지 신석기 시대가 되면서 떠돌이 생활을 마감하고 정착생활을 시작하는데, 이때 작은 부락 단위로 생활했기 때문에 부락사회 또는 마을사회(단국대 윤내현 교수의 주장) 시대라 한다. 그러다 약 6000년을 전후하여 인구가 급격히 늘면서 식량이 부족해지자 전쟁이 일어나고 자기 보호를 위해 서로 연맹을 시도한 부락연맹사회 또는 고을사회(윤내현)가 형성된다. 그 후 청동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4500년 전후 고대국가가 탄생했다. 기록이 있는 것은 바로 국가사회부터다. 그 이전의 역사는 창세신화를 비롯한 다양한 신화와 전설의 형태로 전해졌다.

 

 

 

화재와 재액으로부터 집을 보호하기 위해 기와집 치미와 막새기와에 새기는 도깨비의 모습은 바로 치우의 흔적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도 고조선이라는 국가 이전에 마을이나 고을사회 단계가 있었을 것이며, 이와 관련한 신화나 전설이 구전이나 무가(巫歌) 형태, 또는 야사로 남아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학계는 단군 이전 시대를 역사화하는 데 관심이 없었으며 아예 역사에서 지워버림으로써 그 속에 포함된 치우의 역사도 당연히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중국 역사책에 치우가 동이족이며, 구려의 임금이라고 적혀 있는 만큼, 만약 그 때를 우리의 고을사회 역사로 해석해 환단고기 규원사화의 내용으로 이를 보완한다면 훌륭한 단군 이전사가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도도 해보지 않고 우리 스스로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 가져왔다.

 

 

예를 들어 만주지역에 있던 요···청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에서 일어났으며, 중국 고대사에서 동이로 분류되던 민족이 세운 나라들이다. 따라서 우리 겨레의 역사에 포함시킬 수도 있으나 우리는 말갈, 여진, 만주족이라며 오랑캐로 몰았고 우리의 역사에서 제외시켰다. 대신 중국은 지배를 받았지만 문화로 흡수했다는 논리로 자국 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대조영이 세운 나라 또한 처음에는 이었으나 당나라가 멋대로 발해국왕에 봉하자 나라 이름도 발해로 바꾸었고, 지금도 우리가 스스로 부른 이름 보다는 발해라고 부르고 있으니, 중국은 이를 근거로 발해가 당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실린 지도를 보면 난하 동쪽, 청천강 이북까지만 고조선 영역으로 표시하고, 그 남쪽을 삼한이라고 해놓았다. 그리고 많은 국내 학자들이 한민족의 형성을 신라통일이나 고려의 재통일 이후로 보고 있다. 바로 광명일보의 주장처럼 고씨 고려(고구려)와 왕씨 고려는 다르므로 고구려는 중국, 고려는 삼한의 후예인 한민족이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는 빌미를 우리 스스로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이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할 날도 멀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또 국내 학자들은 한반도 밖의 한민족 청동기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신용하 교수 등 일부 학자들이 고조선 영토로 거론하기도 하는 산동반도와 만주 요녕성의 경우 기원전 25세기까지의 청동기 유물이 나오고 있으나 우리의 문화로 인정받지 못했다. 북한이 주장하는 대동강 유역의 기원전 30세기 청동기 유물이나, 양수리에서 출토된 기원전 24세기 청동기 시대 유물들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렇듯 민족의 형성기라고도 볼 수 있는 우리의 청동기 시기가 기원전 10세기 설에 묶여 있으니, 그 이전 인물인 치우는 물론 단군조차 역사적 인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 중국 학자가 한자는 한()족의 언어체계와 맞지 않으므로 한족이 만든 글자가 아니라 동이족의 글자다라고 주장해도 동이족의 핵심이라는 우리는 한자가 우리 겨레의 글자일 가능성조차 무시해버린다.

 

 

이처럼 우리 사학계가 만주를 포기하는 동안 국민들은 의분에 젖어 백두산 관광길에 올라 만주는 우리땅!’이라는 현수막을 걸어놓고 애국가를 부르는 등 대책 없이 중국측을 자극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중국정부가 한국의 국무총리에게 항의서신을 보내는 등의 해프닝이 발생하는 것도, 알고 보면 한국 고대사에 대한 논리적, 학문적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치우에 대한 연구는 재야에서 진행되고 있다. 겨레얼 바로찾기 운동단체인 사단법인 한배달은 1999년부터 중국의 치우연구 현황을 파악하는 한편, 그 해 12월말 치우학회를 설립해 국내외의 치우 관련 사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2000년과 2001년에는 한국과 중국(옌볜대학)에서 각각 치우학술대회를 열고, 치우자료집과 학회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경기대 법정대 고준환 교수가 치우천황이라는 책을, 소설가 이우혁이 치우천왕기라는 소설을 발표했지만, 학계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우리 스스로 포기한 역사

 

 

 

중국 중화삼조당에 모신 치우상.

 

 

2001년 옌볜대학에서 열린 제2회 치우학술대회(주제 고대동아시아 종족과 한민족’)에서 확인한 바는 옌볜대학을 비롯한 중국내 조선족들에게 고구려 이전 역사연구가 금기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동이족, 묘만족, 화하족을 합쳐 중화족이라고 하면서도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임이 분명하고 선후를 이은 관계인 고구려, 발해에 대해서도 고구려족, 발해족 등 나라마다 민족의 이름을 붙여 같은 민족임을 부정하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소수민족을 우대한다고 하지만 결국 소수민족을 더욱 작은 단위로 나누어 자체연대나 단결의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이런 큰 그림 속에서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에 포함시키는 동북공정이 계획되고 진행되는 것이다.

 

 

2003년 봄 동북아 경제포럼이 열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 지역은 본래 아시아인들이 살던 곳이지만 지금은 백인들이 주인이다. 1860년대 러시아가 부동항을 얻기 위해 극동함대를 앞세워 백인들을 이곳에 이주시키고 대신 아시아인(특히 고려인들)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결과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사관은 1860년 이전의 역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불과 150년 만에 인구의 구성과 역사의 주도세력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 역시 200여 년 만에 원주민인 인디언의 역사는 사라졌다.

 

 

이렇게 지역의 역사와 종족의 역사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서술자의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만약 만주지역과 산동반도 지역은 수천 년 전에도 중국 땅이었고, 한족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오랜 고정관념을 버리면 우리 고대사는 다시 쓰여져야 할 것이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사람의 시각에서 쓰면 처음부터 자신들의 영역이었던 것처럼 쓰거나, 그 이전의 역사는 빼버릴 가능성이 높다. 마치 미국과 블라디보스토크의 역사에서 원주민들의 역사가 지워진 것과 같다. 반대로 과거 거주했던 종족(원주민)의 시각에서 쓰면 미국은 인디언의 역사, 블라디보스토크는 발해인들의 역사가 될 것이다.

 

 

주도권 싸움 대신 공동연구를

 

현실적으로 보면 둘 다 옳다. 그리고 둘 다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둘이 조화돼야 완전해진다. 양국의 공통 조상인 치우 문화라는 공통점이 한국과 중국의 연대를 쉽고 강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치우의 역사가 종족간 다툼의 빌미가 아니라 협력과 화합의 근거가 돼야 한다. 치우의 종족적인 계보로 따지면 중국의 만주-산동반도-남서지역, 한반도, 일본, 대만, 동남아 지역까지 동이와 묘족의 거주영역이 모두 해당한다. 그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치우를 연구하고 발전시키며, 상호 교류를 통해 문화의 공통점을 찾아낸다면 아시아 공동체를 만드는 데 큰 힘이 될 수 있다.

 

 

고구려도 마찬가지다. 만주지역은 배달나라 시대를 빼더라도 고조선-고구려-(발해)까지 약 3300년 동안 한민족이 나라를 세우고 거주했던 지역이다. 그러니 여기서 지배층은 고구려족, 피지배층은 말갈족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떻게 3300여 년 동안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살면서 민족이 다를 수 있겠는가. 말갈, 여진, 몽골, 만주족은 한민족 내지 배달민족(중국에서는 동이족)의 지류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우리와 일본의 조상이기도 하고 중국 동이족이나 묘족의 조상이기도 한 치우천왕. 각자가 자기 민족의 선조로 기록하고 있고, 양쪽이 다 옳다면 결론은 이렇다. 당시 동아시아에 큰 문화집단이 있었고, 그 지도자가 치우와 황제였으며, 그들 간에 충돌이 있어 각자의 문화 독창성이 더 강화되거나 상호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화가 싹트기도 했을 것이다. 김상일 교수는 이를 동서문화의 충돌로 보았다. 종족의 이동과 문화의 이동도 있었을 것이다. 그 과정을 추적하여 동아시아의 상고사를 재정립하는 것이 오늘날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남겨진 과제다.

 

중국이나 중화만이 중심이어서도 안 되며, 한민족만이 중심이라고 해서도 안 된다. 각국이 보유한 역사기록과 전설, 신화, 민속 자료들을 최대한 수집하여, 너와 나를 버리고 양쪽의 공동 조상, ‘우리의 조상인 치우를 연구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朴 政 學

 

 1947년 울산 출생

 부산고, 육군사관학교,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연세대 행정학 석사, 강원대 대학원에서 한국 고대사 전공

 현 사단법인 한배달 회장, 치우학회 회장

 현 강원대 강사, 강원고고학연구회 회장

 

(출처: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02913/1)

 

 

3.2.1  2012 10 3일 브레이크뉴스 기사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 문명인 까닭<1>홍산문화 유물에 보이는 인장의 기원과 고조선문화

 

박선희 상명대 교수. 

 

이 글은 홍산문화유적에서 출토된 옥으로 만든 도장이 중국학자들의 견해처럼 중화민족제일인이 아니라 고조선문화와 관련이 있음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이 옥도장이 환웅의 신시문화 유산임을 다음의 내용들을 통해 명확히 밝히게 될 것이다. 글 차례는 1. 홍산문화의 성격과 옥인장 출현 2. 홍산문화 출토 옥인장의 주체 검토 3. 홍산문화가 지속된 고조선문화(1. 옥으로 만든 복식유물과 고조선 2. 채색기법의 성격과 고조선문화 3. 석경의 기원과 고조선문화) 4. 옥인장은 환웅의 신시문화 유산으로 한다.

 

 

최근 중국에서는 홍산문화를 포함한 만주의 고대문화를 총칭하여 하나의 강 이름으로 포괄하여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이를 중국의 황제문화로 포함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하문명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면 중국학계의 단순한 설명을 용납하고 동북공정을 따르는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우리는 이 문화를 반드시고조선문명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옥도장의 주체해명을 통해 그 까닭을 밝히게 될 것이다. 홍산 옥인장의 주체가 중화민족제일인이 아니라 환웅천왕 신시문화의 상징물로 올바르게 제자리를 찾아가게 되길 기대한다. <필자 주>

 

 

1. 홍산문화의 성격과 옥인장 출현

 

홍산문화에 속하는 내몽고 나만기유적에서 두 개의 옥인장이 출토되었다. 중국학자들은 이 옥인장에 모두 구멍이 뚫려있어 끈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고 양식에 따라 동물형 옥인장(그림 1)과 쌍두조형 옥인장(그림 2)으로 분류하였다. 이 옥인장에 끈을 꿰어 의복에 차고 다녔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옥인장이 홍산문화의 특징인 옥으로 만든 용과 새 등의 유물들과 함께 출토되어 만들어진 시기를 홍산문화시기(서기전 4500서기전 3000)로 추정하며 ‘(中華民族第一印)’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필자가 연구한 바로는 홍산문화유적에서 패대에 사용되었을 다양한 복식품들이 출토되었는데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것과 달리 고조선문화의 특징적 요소들을 나타내고 있어 중국학자들이 옥인장을 중화민족제일인으로 분류하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연구는 홍산문화의 다양한 유물성격을 근거로 옥인장의 주체를 올바르게 해명하는 목적을 가진다.

 

 

홍산문화는 내몽고 동남부와 요령성의 서부 적봉, 조양, 능원, 건평 등을 중심으로 하며, 하북성 북부, 노합하상류, 대릉하 상류와 중류로 유적지가 넓게 분포되어있는데 고조선 질그릇의 특징인 새김무늬 질그릇들이 출토되는 것이 공통점이다. 홍산문화는 주로 복식품으로 사용되었을 옥기뿐만이 아니라 적석총, 제단, 성곽과 취락유적들이 함께 두드러진 문화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용되었을 악기와 도구 등의 유물에서 보여 지는 문화적인 의미와 상징적 가치 역시 뛰어나다. 특히 홍산문화 후기(서기전 3500서기전 3000)의 우하량유적은 제단과 여신묘, 적석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규모의 유적으로 상당히 수준 높은 사회발전의 단계를 이루고 있다.

 

 

 

 

 옥인장의 인면 ©브레이크뉴스

 

 

홍산문화에서 보여 지는 이러한 문화현상들은 중국문화와 확연히 구별되고, 고조선문화와 이후의 여러 나라 시대 문화 특징에 지속적인 발달 양상을 보여준다. 따라서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옥인장을 중화민족제일인으로 해석하는 중국학자들의 견해는 중화주의에 따른 헛된 집착일 뿐이다.

 

 

중국학자들은 어떠한 유물을 분석할 때, 대상유물과 동반유물의 기원과 양식 및 문화적 상징성 등에 관한 변천사적인 연구가 선행되고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유물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이 내려져야하는 마땅한 수순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중국학자들은 아주 단순히 오늘날 만주가 그들의 영토이기 때문에 그곳에 대한 고대의 연고권을 주장하는 의도적인 경향이 많다. 홍산 옥인장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이다. 옥인장이 출토된 나만기유적은 홍산문화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사회변화의 요소로 고고학자료에 나타나는 돌무지무덤, 성터의 출현, 옥기의 사용 등을 든다. 신석기시대에서 동석병용시대 속하는 홍산문화(서기전 4,500서기전 3,000)는 이러한 요소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데 옥인장을 비롯하여 복식유물로 보이는 곡옥을 비롯한 다양한 양식의 옥기가 많은 량 출토되었다. 중국학자와 일본학자들은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곡옥을 가장 이른 시기에 사용했던 것으로 보고 있지만, 옥기의 사용은 중국보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훨씬 이르며 곡옥의 사용도 마찬가지이다.

 

 

내몽고자치구 동부의 규모가 크고 오래된 신석기 집단 거주지인 흥륭와유적(서기전 6,200서기전 5,200)에서는 동아시아 최초의 옥귀걸이(그림 3)와 함께 옥도끼 등 지금까지 약 100여점의 옥기가 출토되었다. 중국의 옥전문가들은 흥륭와유적에서 출토된 옥귀걸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 옥기의 재료는 분석결과 요령성 수암현에서 생산되는 옥으로 밝혀졌다. 흥륭와유적에서는 옥기와 함께 동북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새김무늬 질그릇이 출토되었다.

 

 

 

 

 흥륭와유적출토 옥 귀걸이 ©브레이크뉴스

 

 

한반도에서는 흉륭와유적과 거의 같은 시기에 속하거나 보다 이른 시기일 것으로 추정되는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선사유적에서 수암옥으로 만든 것과 같은 모양의 옥귀걸이가(그림 4) 출토되었다. 또한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패총유적(서기전 4,000서기전 3,000년경)에서도 문암리와 거의 같은 유형의 귀걸이가 발굴되었다. 이후 한반도지역의 여러 유적에서는 옥기가 계속 출토되어지는데 매우 정교하고 다양한 발달 양상을 보여준다.

 

 

흥륭와문화는 이후 요하지역의 주요 신석기문화인 부하문화(서기전 5,200서기전 5,000)로 이어지고 대체로 같은 분포지역에 있는 조보구문화(서기전 5,000서기전 4,400)와 병존하면서 발전해 나아가 동석병용시대인 홍산문화로 이어진다. 흥륭와문화는 홍산문화와 서로 계승관계에 있어 우리 민족의 선사시대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화라고 하겠다.

 

 

두 문화는 분포지역이 거의 같고 계승관계를 나타내는 유물은 옥기뿐만 아니라 질그릇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만주의 흥륭와유적을 비롯하여 한반도에서 옥기가 출토된 문암리 등의 여러 유적에서는 한민족 특징의 새김무늬 질그릇이 함께 출토되어져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밝혀준다. 아울러 한반도와 만주지역은 수공업 생산기술의 교류와 상품 교역이 활발했음도 알 수 있다. 나만기유적에서 출토된 옥인장은 이러한 교역에서 필요한 정치적 구조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인장의 출현은 사회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마련이다. 농업과 함께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집단취락지가 형성된다. 집단취락지의 형성은 정치적 지도자를 출현시키며 통치체계를 갖추게 된다. 아울러 그와 관련된 구조물과 상징물들이 마련된다. 그 예로 신석기후기에 속하는 우하량유적에서 보이는 돌무지무덤과 규모가 큰 건축물 및 정교한 옥기의 생산은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야 하는 일이다. 우하량유적은 여러 부족이 연맹을 이루어 정치적 지도자가 출현했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신분과 빈부의 차이가 발생하고 전문 수공업자가 출현했으며 전쟁의 발생과 함께 종교의 권위자가 존재하였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 다량의 방직도구와 재봉도구가 출토되어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라고 생각된다. 앞에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주요한 사회변화의 요소로 돌무지무덤, 성터의 출현, 옥기 사용 등을 들었으나, 복식자료로부터 본다면 방직도구와 재봉도구의 급격한 증가도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옥인장이 출토된 나만기의 유적들에서도 흙으로 만들어진 성벽이 발견되었다. 성벽 안에서는 많은 량의 채색 질그릇을 비롯한 다양한 양식의 질그릇과 옥기, 뼈와 뿔 및 돌로 만든 생산도구와 방직도구, 재봉도구 등이 출토되었다. 성곽유적은 정치적 지도자가 무리를 통치하며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동체의 자취를 보여주는 정치적 구조물이다. 이들은 공동체에서 생산한 옥기를 비롯한 수공업품과 농업품 등으로 큰 규모의 교역을 진행하였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인장이 쓰여졌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인장은 정치지도자가 직권을 행사하는 상징물이며 공구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만기의 여러 유적들에서는 한민족 문화의 특징인 새김무늬와 기하학문양의 질그릇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 글은 고고학의 발굴보고서 등을 중심으로 이웃나라와의 비교를 통해 홍산문화로부터 비롯된 우리 옥기문화를 실증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이를 토대로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옥인장의 주체가 고조선 이전 환웅의 신시문화였음을 밝히게 될 것이다. 아울러 홍산 옥문화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고조선 문화가 이후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보여주는 지속성의 실체와 정체도 함께 해석하고자 한다. 박선희. 상명대 교수

(출처; 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231631§ion=sc5)

 

 

3.2.2  2012 11 13일 브레이크뉴스 기사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 문명인 까닭<2>머리스타일과 옥 절풍의 고유성

 

박선희 상명대 교수.  

 

『 ~ 첫 번째로 옥으로 만든 복식유물 가운데 속발(束髮)과 관련이 있을 옥 절풍의 고유양식이 고조선 문화와 여러나라시대를 거쳐 삼국시대로 까지 지속되었음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홍산문화유적의 우하량 1호 적석총 M4 M15유적에서 옥고가 한 개씩 출토되었다. 발굴자들은 옥고의 출토위치가 두개골 아래 혹은 정수리 아래쪽 일 것이라고 밝히며 머리를 틀어 묶고 이를 덮어씌우는 것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옥고는 속이 비스듬히 드러나 보이는 원통형으로 윗부분이 아래 부분보다 약간 넓으며, 아래 부분의 양쪽에는 각기 1개의 작은 둥근 구멍이 있어 머리꽂이를 꽂는 것이 가능하다. 발굴자들은 머리를 정수리에서 묶고 옥고가 이를 덮었을 것인데 무게로 인해 미끄러지므로 머리꽂이로 고정시켰을 것이라 설명했다. 또한 이 옥장식이 머리 장식품일 뿐만 아니라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의 구실도 했을 것으로 보았다.

 

 

 

 가면 ©브레이크뉴스

 

 

실제로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조개껍질로 만든 인형의 머리양식은 틀어 올려 진 상투머리양식이고 맨상투 위에 옥고와 유사한 것을 덮어씌워 매무새를 갖춘 두발 모양이다. 이러한 머리양식은 같은 시대 북방지역 석인상들이 긴 머리를 틀어 올리지 않고 그대로 늘어뜨린 것과 구별된다.

 

 

신석기시대 한반도와 만주의 유적들에서는 머리를 틀어 올리면서 꽂았을 머리꽂이가 골고루 출토되어진다. 신석기시대의 머리꽂이는 주로 새의 뼈와 뿔 등 가벼운 재료로 만들었고, 옥이나 돌, 토기조각으로도 만들었다. 머리꽂이는 주로 문양이 없이 밋밋한 것이 대부분인데, 간혹 장식적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점 또는 선을 누르거나 그어서 문양을 새긴 것들이 있다. 이러한 문양은 신석기시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출토된 질그릇이나 가락바퀴 등에 보이는 문양과 같은 양식으로 이후 고조선으로 지속된다.

 

 

틀어 올린 머리양식은 옥인장이 출토된 나만기유적과 가깝게 위치한 적봉시 오한기 흥륭구 홍산문화유적에서 출토된 조소품인 남신상에서도 보인다. 발굴자들은 이 인물상이 서기전 3,300년 무렵에 속하다고 했다.

 

 

 

 

 남인상 ©브레이크뉴스

 

 

남신상의 틀어 올린 머리양식은 매우 특징적인데, 머리 뒤에서 땋아 세 번 돌리면서 정수리로 올려서 끝자락을 이마 바로 위 머리까지 내려 장식으로 마무리하였다. 당시 옥문화가 발달하고 머리 장식이 출토되었던 예로 보아 땋은 머리자락을 마무리한 장식은 옥장식일 가능성이 크다. 이로보아 당시 틀어 올린 머리양식이 정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 이러한 머리를 덮어씌웠을 옥고가 출현한 것으로 보아 머리를 틀어 올려 위의 인물상처럼 끝부분을 옥장식으로 마무리하거나, 또는 옥고를 씌우는 머리양식이 유행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머리양식은 한민족의 고유한 습속으로 중국에서 보이지 않는다. 한민족의 고유한 습속은 남신상의 다리를 접고 앉아있는 자세에서도 찾아진다.

 

 

이러한 사실로 부터 고조선 이전시기 한반도와 만주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이 머리꽂이를 사용해 일정한 머리양식을 갖추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머리꽂이는 틀어 올리는 머리양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틀어 올린 머리를 덮는 고조선과 고구려에서 널리 사용된 변이나 절풍과 같은 모자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홍산문화기에 속하는 우하량유적에서는 작은 크기의 절풍 모양 옥 장식품이 출토되었다. 이 옥 장식품이 절풍을 조각한 것이라면, 절풍은 고조선보다 앞선 시기부터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옥고는 고조선시대에 널리 사용되던 절풍의 초기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조선시대의 틀어 올린 머리와 관모양식이 신석기시대부터 형성되어진 것임을 알게 한다.

 

 

실제로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晋書)? 등에는 고대 한민족이 머리를 틀어 올렸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 기록들은 고조선이 붕괴된 후의 한()에 관한 것이지만, 이러한 머리양식은 고조선으로부터 계승되어졌을 것이다.

 

 

고조선시대에는 머리꽂이를 금속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춘추후기에 속하는 요령성 금서 사과둔유적에서는 금으로 만든 18쎈티미터 길이의 머리꽂이가 출토되기도 했다. 이처럼 서열이 높은 금속인 금으로 머리꽂이를 만들어 사용했던 것은 당시 틀어 올린 머리양식이 복식양식에서 큰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된다. 같은 춘추시대에 속하는 고조선의 유적인 오한기 초보산 제사유적에서 출토된 남자상은 머리를 정수리 위에 틀어 올리고 그 위에 절풍과 같은 상투만을 덮는 모자를 쓴 모양이다.

 

 

중국의 선사시대 유적에서는 머리꽂이가 출토되지만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처럼 모든 유적에서 골고루 출토되지 않는다. 중국에서 머리꽂이는 주로 황하중류 유역에서 출토되어진다. 하북성 자산유적에서 뼈로 만든 머리꽂이가 출토되었고, 서안 반파유적에서 돌과 뼈등으로 만든 머리꽂이가 많이 출토되었다. 이 같이 황하중류유역에서 주로 머리꽂이가 출토되어지는 것은 그 지역의 머리양식으로부터 설명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예로 감숙성 태안대지만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채색질그릇에 보이는 머리양식은 이마를 덮은 단발머리이다. 감숙성 임조에서 출토된 채색질그릇에 보이는 머리모양은 정수리에서부터 S자모양으로 땋아 내려뜨린 모양이다. 청해성 대통현 상손가색에서 출토된 채색질그릇에 보이는 그림의 사람들은 모두 짧은 묶은 머리를 하였다. 이처럼 이마를 덮은 단발머리와 땋은 머리모양은 머리꽂이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황하중류유역에 위치했던 상왕조의 유적인 안양 은허 5호무덤에서는 묘주인 부호의 옥으로 만든 머리꽂이 20여개와 뼈로 만든 머리꽂이 490여개가 출토되어 머리양식이 무척 호화로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고학의 출토자료로 보면, 상왕조시대의 남자들은 머리를 정수리에서 짧게 땋아 내려뜨리거나 머리 전체를 말아 올렸는데, 그 실제모습이 부호묘에서 출토된 옥과 돌로 만든 사람 조소품에서 보인다. 돌로 만든 사람의 머리양식은 모자 안으로 머리를 말아 올려야 하므로 머리꽂이를 여러 개 사용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머리꽂이의 사용방식은 한민족의 머리양식처럼 상투를 찌는 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부분적으로 틀어 올리는 머리양식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한반도와 만주 대부분의 선사유적에서 머리꽂이가 출토되는 것과 달리 중국의 선사시대유적에서는 주로 황하중류유역을 중심으로 머리꽂이가 출토되어지는 요인이 될 것이다.

 

 

고조선시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변이나 절풍과 같이 상투머리만을 덮는 폭이 좁고 높이가 있는 모자를 썼던 것은 홍산문화시대로부터 형성되어져 널리 정형화된 머리양식이다. 고조선 붕괴 이후 여러나라시대와 삼국시대로 오면서 부여와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등에서 상투머리에 변이나 절풍을 많이 썼음이 고분벽화에 보이는 관모와 출토되어진 유물들로부터 확인 된다. 실제로 부여사람들의 틀어 올린 머리양식에서 지속성을 보이는데, 길림시 모아산유적에서 출토된 청동으로 만든 사람에게서 나타난다. 이 같은 머리양식은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조개껍질로 만든 인형의 것과 유사하다.

 

 

같은 머리양식이 유금이나 청동으로 만들어진 부여와 고구려의 가면에서도 보인다. 길림시 동단산에서 출토된 유금으로 만들어진 입체감 있게 만들어진 가면은 머리 부분이 훼손되었는데, 발굴자들이 정수리부분을 그림에서와 같이 점선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면 상투머리 양식이다. 또한 고구려의 유금으로 만든 가면 역시 윗부분이 손상되었으나 정수리부분이 올라간 같은 양식이다.

 

 

신라초기 토우들의 머리모양도 모두 크고 작은 머리꽂이를 사용하여 틀어 올린 맨머리를 변이나 절풍으로 씌워 아름답게 꾸몄다. 경주 황남리에서 출토된 남자 토우들이 대부분 고깔 모습을 한 관을 쓰고 있어 고조선을 이어 변을 썼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도 변을 사용했음이 부여에서 출토된 토기편에 보이는 변의 모습에서 확인되는데 양쪽에서 을 내려 턱밑에서 묶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도 백성들은 변을 많이 썼는데, 그 실제 모습이 집안에 위치한 우산 2110호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인형에서 보인다.

 

 

이상의 내용으로부터 고조선 이전시기 한반도와 만주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머리꽂이를 사용해 틀어 올린 상투머리를 하였고, 홍산문화시기에는 상투위에 옥고 등을 씌워 우아한 머리양식을 갖추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조선시기로 오면 일반적으로 옥고 대신 상투머리를 덮을 수 있도록 폭이 넓지 않고 높이가 있는 변이나 절풍과 같은 모자가 발달하게 되었다. 변이나 절풍은 주로 가죽과 자작나무껍질 또는 누에 천을 사용했으나, 이후 금과 은, 금동 등으로 만들어 신분을 상징하기도 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썼던 관 전체를 금으로 만든 금관의 한부분인 금절풍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후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백제와 신라, 가야에서 만들어진 금관과 금동관 등도 모두 고조선시대부터 오랫동안 지속된 상투머리와 그 위에 썼던 절풍을 기본형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 금관의 기본양식은 홍산문화로 부터 비롯된 고조선문화의 전통에서 그 실체와 정체성을 재인식할 수 있다. 박선희. 상명대 교수.

(출처; 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238192§ion=sc5)

 

 

3.2.3  2012 11 15일 브레이크뉴스 기사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문명인 까닭<3>옥단추와 달개장식의 다양성

박선희 상명대 교수.  

 

홍산문화 후기의 우하량유적에서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장식품으로 사용되었을 옥기가 다량 출토되었다. 출토된 옥기는 주로 달개장식으로 쓰였을 장식품과 치레거리들이 많다. 즉 비실용성 생산공구류와 인물, 동물, 식물, 곤충형상을 사실적으로 조각한 것 또는 추상적인 동물형상을 조각한 것, 신발의 모양을 나타낸 것 등으로 매우 다양한데, 대부분 구멍이 뚫려있어 의복에 달거나 걸어 장식했을 것이다. 신발모양의 장식품은 지금의 버선형태와 유사하다.

 

 

요령성 심양의 북쪽 지역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유적인 신락문화유적(서기전 6,000년대 후기)에서도 새김무늬 질그릇과 함께 옥기가 출토되었는데, 발굴자들은 일부 장식물을 옥단추로 구분했다. 이처럼 홍산문화유적에서는 다량의 방직도구와 재봉도구, 옥으로 만든 복식 장식품이 출토되어지는 것으로 보아 전문 수공업자들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추론된다. 이러한 경제력의 발전은 복식분야에서 장식단추와 달개장식의 양식을 보다 다양하게 정형화시켜 나갔을 것이다.

 

 

실제로 장식단추의 발전양상은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부터 보편적으로 나타나 직물생산이 발달하면서 다양한 장식기법의 복식문화를 이루어 나갔다. 이 같은 발전양상은 중국 황하유역의 신석기문화유적들에서 장식단추가 드물게 발견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초기유적인 궁산유적(서기전 6,000~서기전 5,000)에서는 뼈구슬과 둥근모양의 토기단추가 출토되어 실제로 바늘과 실을 사용해 의복에 단추와 구슬을 달거나 꿰어 걸었던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신석기중기의 후와유적(서기전 4,000)에서는 둥근모양의 돌단추와 함께 방직도구와 재봉도구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곽가촌유적(서기전 3,780서기전 3,530)에서는 뼈북과 함께 둥근모양의 토기단추와 가락바퀴 등의 방직과 재봉에 사용된 도구들이 돌과 뼈로 만든 구슬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후 신석기후기의 좌가산유적과 서포항유적 4기층(서기전 3,000)에서는 곡옥과 뼈, 돌로 만든 나뭇잎모양의 달개장식과 조개껍질로 만든 구슬, 팔찌 등이 많이 출토되어 의복장식이 이전보다 화려하고 다양한 조형미를 추구해나간 모습이다.

 

 

신석기중기부터 장식구슬의 출토량이 증가한 것은 전문 기능인 수공업자의 출현과 함께 달개장식품의 생산 규모가 커졌음을 말해준다. 아울러 의복에 장식단추를 사용하고 구슬로 장식하거나 달개장식을 달아 복식에서 공간을 꾸몄던 조형적 전통기법이 정착되어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은 만주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주지역에서는 서기전 4,000년경에 속하는 심양 신락유적의 하층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특징적이다. 이 유적에서는 최근에 만든 것처럼 검은색 광택이 나는 흑옥으로 만든 장식품이 출토되었다. 발굴자들은 이 같은 흑옥 장식품이 중국의 신석기시대유적에서 아직까지 발견된 적이 없어 신락유적의 것이 가장 이르다고 분석하며 보기 드문 진귀품으로 평가했다.

 

 

요령성 매전지질감탐공사 과학기술소에서 감정한 내용에 의하면, 이 흑옥의 원료는 무순 매전 서부 본층의 것으로 밝혀졌다. 심양에서 무순까지는 약 100리의 거리인데 당시 교통수단으로 신락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매정을 가져다 정교한 장식품을 만들었다고 하겠다. 신락유적에서 출토된 흑옥 장식품은 전체 유물의 10분의 1이나 차지한다. 발굴자들은 유물이 차지하는 큰 비중으로 부터 흑옥 장식품이 당시 사람들의 사회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홍산문화유적에서는 허리띠를 장식했을 네모난 크고 작은 옥장식들이 출토되었다. 발굴자들은 가죽허리띠에 달아 옥대를 만들었을 것으로 분석했다. 그리고 이 옥대가 중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양식의 허리띠는 중국보다 앞서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등의 초기유적에서 보여 지며 삼국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이 만주의 신석기시대 여러 지역에서는 지역마다 특색을 달리하는 재료를 융통성 있게 사용해 단추와 달개장식 및 장신구를 만들어 의복위에 자유로운 조합의지와 다양성을 추구한 장식기법을 발전시켜 나갔다고 하겠다.

 

 

이처럼 신석기초기부터 시작된 장식단추와 달개장식의 복식기법은 홍산문화에서 옥을 재료로 독창적이고 입체적인 양식들을 표현하면서 크게 발전한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의복에 장식하던 토기단추와 돌단추, 뼈와 뿔, 조개껍질로 만든 구슬, 옥장식 등은 홍산문화를 지나 고조선시대로 오면 옥과 청동, 철을 재료로 한 것들로 적극 대체되어 보다 화려해졌다. 옥은 다양한 장신구의 재료가 되었고, 청동과 철은 둥근 모양과 나뭇잎모양의 장식단추로 만들어져 의복위에 달아 여밈새를 처리하거나 달개장식으로 사용되어 다시 고조선문화로 이어져 한층 화려하고 현대적인 조형미의 지속성을 보인다.

 

 

고조선시대에 오면 직물의 발달과 함께 장식양식이 보다 화려해져, 뼈나 뿔, 조개껍질 등으로 만들어진 것보다 옥과 청동, 철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것들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뼈와 뿔, 조개껍질, 옥은 다양한 장신구의 재료가 되었고, 청동과 철은 주로 둥근 모양과 나뭇잎모양의 장식단추로 만들어져 의복 위에 달아매어 화려하게 장식했다. 또한 다양한 종류의 직물 발달은 의복에 다는 장식단추와 장식품의 사용도 직물의 성격과 아울리게 변화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자연히 종래의 장식단추에 새로운 장식기법이 더해져 대담하고 역동적인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청동기시대에는 직물생산량이 크게 늘어나고 옷 만드는 일이 많아지면서 장식단추의 사용량도 크게 늘어난다. 고조선유적에서 출토되는 청동장식단추는 그 양식이 주로 원형과 나뭇잎모양으로 나타난다.

 

 

 

 

청동장식단추 ©브레이크뉴스

 

   

그 형태는 윗면이 도드라진 원형인 것과 편편한 원형으로 꼭지가 달린 것, 도드라진 원형으로 단추구멍이 있는 것, 가운데 구멍이 있는 구슬모양의 것, 단추 구멍 2개가 나란히 있는 것, 정사각형 가운데 원형의 구멍이 있고 변 주위에 문양이 있으며 뒷면에 단추꼭지가 있는 것, 원형으로 둘레에 작은 구멍이 있고 뒷면에 단추꼭지가 있는 것, 반원형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또한 청동장식단추는 표면에 문양을 나타내는 경우와 문양이 없는 소면 상태의 두 종류로 크게 구분된다. 표현된 문양은 대부분 신석기시대의 문양양식을 그대로 계승하여 새김무늬질그릇이나 가락바퀴 등에 보이는 양식과 같다.

 

 

고조선 사람들은 장식단추를 의복뿐만 아니라 모자나 신발 또는 활집 등 복식의 여러 부분에 자유롭게 사용했다. 한민족의 여러나라에서는 모자에 새깃을 꽂는 것 이외에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에서 금과 은, 옥 등으로 모자를 장식했다. 이러한 고급 장식재료는 중국이나 북방지역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서 고조선의 전통을 계승한 화려하고 높은 수준의 관모 양식을 이루게 만들었다.

 

 

고조선에서는 청동장식단추를 일반 복식에서 뿐만 아니라 특수복식인 갑옷과 영성필사영자유적출토 고조선 청동투구 청동투구에도 사용했다. 고조선에서는 일반인들이 평상복에서 청동으로 화려한 장식을 했기 때문에 청동장식단추가 자연스럽게 갑옷에 응용되었을 것이다. 또한 청동을 사용하면서부터 종래의 돌이나 뼈 등으로 만들던 공구나 무기를 청동으로 만들어나갔기 때문에 가죽이나 뼈로 만들던 갑옷재료도 청동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고조선사람들이 의복에 장식했던 장식단추의 양식은 고조선이 붕괴된 이후 여러나라시대로 이어져 나라마다 조금씩 특색을 달리하여 발전해 나간다. 예에서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입는 곡령에 약 5센티미터 이상 되는 은화를 꿰매어 장식했다. 부여사람들은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모자를 썼다.

 

 

 

 

 백제사신의 옷 ©브레이크뉴스

 

 

고구려 사람들도 청동장식단추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마한 사람들은 북방지역에서 청동장식단추를 많이 사용한 것과 달리 의복에 주로 구슬을 장식했다. 이러한 내용들은 일반인의 의복에서도 화려한 장식이 가능했던 한민족 복식의 특징으로 중국이나 북방지역과의 차이점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금()으로 만든 옷을 입고 금과 은으로 장식 했다.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했으므로 이러한 고구려의 풍속도 예와 마찬가지로 고조선의 것을 이었을 것인데 그 실제 모습이 안악3호 고분벽화와 왕회도, 마조총 수렵도 등에서 확인된다.

 

 

고구려에서는 의복뿐만 아니라 금관과 관장식에 일정하게 장식단추모양의 원형과 나뭇잎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원형과 나뭇잎모양의 장식단추를 달아 만든 보다 발달 된 고구려 관식과 장식품이 서기 3세기서기 4세기에 걸쳐 고구려 영역의 여러 지역에서 출토되었다. 대표적인 유적은 원태자 무덤과 북표현 방신촌 진무 덤, 조양현 왕자분산무덤이다. 신라와 백제, 가야의 금동관과 금관 등에서 보이는 관식과 절풍, 원형과 나뭇잎모양의 장식 등은 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의 금관양식의 영향이었다. 이 같은 고구려의 금관식은 신라와 백제, 가야뿐만 아니라 주변민족들에게도 영향을 크게 주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요녕성 북표현 서관영자에 위치한 북연 풍소불무덤에서 출토된 금관식과 내몽고자치구 달무기에서 출토된 금관식이다.

 

 

이처럼 장식단추의 양식은 홍산문화로부터 시작되어 고조선 이전시기부터 복식에 장식물로서 다양하게 사용되어져 고조선 붕괴 이후 여러나라로 이어지고 다시 삼국시대로 이어져 한민족의 중요한 장식양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따라서 고대 한민족 복식에 보이는 장식단추에 대한 비교 분석과 통시적 전승을 검토한 결과, 한민족 복식의 원형을 중국이나 북방 호복계통으로부터 오거나 영향을 받았다는 종래의 견해를 수정할 수 있게 하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특히 원형과 나뭇잎모 양의 장식단추는 생명력 있는 조형의지와 역동적이며 생동하는 한민족의 정서를 줄곧 표현해 온 고유한 문화 인소로서 그 정체성이 올바르게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아울러 홍산문화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고조선복식문화가 이후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보여주는 지속성의 실체와 정체로 부터도 우리는 홍산문화를 반드시 고조선문명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박선희. 상명대 교수.

(출처; 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238564§ion=sc5)

 

3.2.4  2012 11 15일 브레이크뉴스 기사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문명인 까닭<4>홍산문화 채색기법의 성격과 발달

 

박선희 상명대 교수.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는 장식기법 뿐만 아니라 염색기법에서도 과학적인 수준을 이루었다.

신석기시대부터 풀, , , 열매, 뿌리, 곤충, 돌 등의 자연의 재료로부터 염료를 채취하여 질그릇에 채색을 하거나 벽화를 그리고 의복에 물감을 들이는 등 채색과 염색을 생활화하였다. 그 실제 예들이 암화와 벽화, 채회도, 채도, 칠기 등에서 보인다.

 

 

신석기시대 다양한 색상의 염료를 사용하기 시작했던 사실은 적봉시 오한기에 위치한 조보구유적(서기전 5000서기전 4400)에서 출토된 그림이 그려진 채색질그릇에서 처음 보인다황하유역의 앙소문화(서기전 4512서기전 2460)에서 보이는 채색질그릇보다 이른 시기이다.

 

 

요령성 심양 부근의 신락유적(서기전 5000년경)에서는 채색질그릇과 함께 붉은색과 검은색 염료가 출토되었다. 붉은색 철광석과 석묵을 사용한 흔적이 있고, 연마기가 출토되어, 당시 사람들이 연마기를 사용해 염색재료를 만들었음을 알게 한다흑룡강성 목단강 해림현에 있는 자하향암화에는 적색과 자색의 광물성 안료가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조보구유적출토채색질그릇 ©브레이크뉴스

 

 

홍산문화의 우하량유적(서기전 3500년경) 여신묘 벽화에는 붉은색과 황백색이 채색된 화려한 기하학문양이 보인다. 벽면에는 적색과 홍색사이에 황백색을 교차하여 삼각문양으로 채색한 기하문양을 표현했고, 소하연문화에서는 흰옷위에 흑색과 홍색 등을 사용했다. 이 두 내용은 서로 다른 것을 그렸지만 소하연 채도의 부호문양과 여러 종류의 색채가 함께 장식된 특징으로 본다면 연원이 같은 공통의 요소를 가진다. 여신묘 벽면에 보이는 적홍색 기하문양과 소하연문화의 뢰문 또는 기회자형으로 불리우는 문양과 유사하다.

 

 

소조달맹의 석붕산유적에서 출토되는 질그릇에서도 같은 문양이 나타난다. 이 문양은 질그 릇에 연결되어 문양을 이루기도 하지만, 다른 부호와 함께 연속하거나 단독으로 그려져 원시글자 혹은 도화자로 인식되며  혹은 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주로 홍산문화의 제사유적들에서 이 부호가 나타나고 있어 제사와 관련된 의미를 내포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홍산문화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 유적들에서 나타나는 피리와 같은 관악기 등 어떠한 악기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홍산문화의 객좌 동산취유적과 우하량유적, 릉원 삼관전자유적, 부신 호두구유적에서는 모두 밑바닥이 없는 채색질그릇이 출토되었다. 발굴자들은 이처럼 밑바닥이 없는 직통형의 채색질그릇을 당시 사람들이 가죽을 씌워 북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론한다. 우하량유적 제16지점 하층 적석총에서 출토된 통형 채색질그릇의 입구 부분에 테둘레가 있어 북면의 가죽을 편리하게 묶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채색질그릇은 주로 큰무덤과 주무덤의 외부를 둘러싸며 세워져 있어 특정한 제사형식을 갖추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아울러 제사의식과 채색은 연관성을 가질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우하량유적출토 통형질그릇 ©브레이크뉴스  

 

 

여신묘벽화의 채색은 소하연문화(서기전 3000서기전 2000)의 흑색과 홍색 등의 채색 문양으로 계승되어지고 다시 하가점 하층문화(서기전 2000서기전 1500)로 이어진다. 이러한 염료의 사용은 화려한 흑색 바탕위에 홍색과 백색이 어우러진 채색질그릇을 만들어낸 오한기에 위치한 대전자유적에서 잘 나타난다.

 

 

대전자유적에서는 아름다운 문양의 질그릇과 함께 대전자유적에서 출토된 붉은색 안료가 담긴 돌그릇과 채색질그릇 부분 붉은색 안료가 담긴 정교하게 만들어진 돌그릇이 출토되어 채색이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알게 한다. 그 외에 고형의 칠기도 출토되어 칠기의 역사가 이른 시기부터 진행되었음과 다양한 채색기법이 발전해갔음을 알게 한다.

 

 

신석기시대부터 자연의 재료로부터 염료를 채취하여 질그릇에 채색을 하거나 벽화를 그리고 의복에 물감을 들이는 등 채색과 염색을 생활화 한 모습은 고조선시기로 오면 보다 과학적인 발달을 이룬다. 고조선 사람들은 복식에서 장식기법과 직조기법 뿐만 아니라 염색기법에서도 독창성을 보인다.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전에서 “(부여 사람들은) 국내에 있을 때의 옷은 무늬가 없는 것을 숭상했으며, 무늬 없는 포로 만든 큰 소매의 겉옷과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었다고 했다. 동부여는 고조선을 이은 나라였으므로 그들의 복식은 고조선의 것을 계승했을 것이다. 고조선 시대의 청동기 문화층에서 출토된 흙으로 만든 남자 인형들은 모두가 서 있는 형태로 아래 폭이 넓게 퍼져 있거나, 긴 길이의 겉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부여에서 입었던 큰 소매 달린 겉옷의 원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동부여의 넓은 폭과 긴 길이의 겉옷을 입었던 모습은 길림시 모아산에서 출토된 도용에서 확인된다. 위의 ?삼국지? 동부여에 관한 서술내용에서 尙白 白布가 보인다. 은 일반적으로 흰색으로 번역하여, 부여사람들이 흰색 천을 숭상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과 달리 실제로 고조선시대부터 줄곧 많은 생산량을 가지며 복식재료로 즐겨 쓰여 졌던 실크의 경우 색상과 문양이 화려한 상태로 출토되어진다. 평양 낙랑구역 무덤들에서는 해방 이전과 이후 고조선과 최리 낙랑국이 생산한 많은 량의 다양한 종류의 사직물이 출토되었다. 이 천들은 모두 염색한 것이었고, 바탕색과 다른 색으로 문양을 직조하여 넣은 것도 있으며, 일부러 색상을 내기위해 탈색 한 것도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에서 이처럼 염색과 탈색기술이 발달한 것으로 본다면 부여에서 겉옷을 만들었던 천들은 염색을 통해 문양이 두드러지지 않게 단아한 색감을 냈을 것이다.

 

 

실크는 정련공정에서 약간의 세리신을 남겨두는 것이 탄성을 부여하는데 더 좋으며, 세리신이 섬유표면에 0.5퍼센트 남아있는 경우에 완전히 정련된 경우에 비하여 염색이 최고 1.6배나 진하게 된다. 특기할 것은 평양 낙랑구역에서 출토된 천들이 성분분석 결과 이 같은 과학적인 염색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는 점이다.

 

 

평양 낙랑유적에서 출토된 고조선의 실크들은 모두 염색을 거친 직물로서 주로 밤색과 자주색을 띠며 문양이 없는 것과 문양이 있는 것, 또는 넝쿨문양을 수놓은 것, 붓으로 문양을 그려 넣은 것 등 다양한 기법을 표현한 염색직물이다. 신석기시대부터 발달되어진 천연염료의 생산과 발달은 고조선시대에 오면 복식에 더욱 적극적으로 사용되어, 의복에 문양을 그려 넣거나 실이나 천을 염색하여 문양을 직조하여 그 위에 색실로 수를 더하는 등 고유한 기법으로 화려한 복식문화의 갖춤새를 정형화 시킨다.

 

 

고조선을 이은 고구려 복식에도 고분벽화 등에는 흰색의 옷은 보이지 않고 다양한 색상과 화려한 문양이 있는 의복이 대부분이다. 특히 고구려는 금()으로 상징될 만큼 금()을 즐겨 입었다. ()은 누에 실을 여러 색으로 물들이고 이를 섞어 화려한 문양으로 짠 것이다. 따라서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등에서 이야기하는 白衣는 흰옷을 의미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의는 단색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무늬가 같은 계통의 색상으로 표현되어 옷의 바탕색과 무늬가 서로 크게 이색지지 않고 단아한 조화를 이룬 것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조선의 복식은 고구려로 오면서 색실로 짜 넣는 직조기술과 염색기술에서 더욱 발전양상을 보이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복식에는 특히 기하학문양이 많이 표현되었다. 문양은 주로 둥근 문양과 네모문양, 마름모문양 등으로 다양하며 직선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추상적인 문양도 있다. 이러한 고구려 사람들이 복식에서 나타낸 문양들은 주로 염색기법과 직조기법, 자수기법 등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동암리고분벽화의 고구려사람들 ©브레이크뉴스

 

 

고구려 복식에 나타나는 색상은 고조선의 염색기술을 이어 색실로 직조한 것이거나, 직조한 직물을 침염법으로 염색한 것으로 기하학문양을 나타내는 염색법에는 홀치기염과 납힐기법, 채회기법, 협힐기법 등이 있다고구려 사람들은 염색기법과 자수기법을 혼용하면서도 그 위에 장식기법을 더하여, 우아하고 화려한 복식문화를 발달시켜 나갔다.

 

 

고구려의 장식기법은 기학학문양의 또 다른 표현 양식으로 홍산문화의 전통을 이은 고조선의 것이 지속된 것이다또한 고구려 사람들은 같은 양식의 문양이라도 크기와 양식의 차이 및 기하학적인 선의 방향을 달리하여 개성 있는 복식문화를 이루었는데, 이러한 독창적인 색상과 문양을 나타내는 복식기법은 홍산문화로부터 비롯된 채색기법 위에 고조선의 전통기법을 발전적으로 지속해 나갔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박선희. 상명대 교수.

(출처; 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238727§ion=sc5)

 

3.2.5  2012 11 15일 브레이크뉴스 기사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문명인 까닭<5>석경의 기원과 고조선

 

박선희 상명대 교수.   

 

 

환웅의 신시시대는 마을 연맹체를 형성하여 정치권이 형성된 시기로 유적과 유물들은 종교의식을 반영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고대사회를 지배하는 중요한 수단이 종교와 무력이었지만 종교가 정치보다 우위에 있어 사회를 지배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이 홍산문화의 우하량유적으로 신상과 거대한 제단유적이다. 이 제단은 원형과 방형의 적석제단이고 제단의 돌돌림 울타리는 3중 원형을 이룬다. 이러한 유적과 유물들은 이 시기에 종교가 일정한 권위를 가지고 군림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우하량유적 이외에도 요령성 서부와 내몽골지역을 중심으로 발달된 홍산문화 유적인 요령성 객좌현 동산취유적, 부신현 호두구유적에서는 제단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원형의 돌무지를 비롯해 제사를 지냈던 건물터, 돌무지 안에 돌널무덤이 있는 유구 등이 발굴되었다.

 

 

이러한 특징의 제단 유적들은 중국이나 북방 유목문화지역에서 보이지 않는 반면 한반도의 북한지역에서 발굴되고 있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는 방형과 원형의 돌돌림 제단유적이 2곳에서 모두 5기가 발견되었다. 황북 연탄군 오덕리의 송신동유적과 평양시 용성구역 화성동의 당모루유적이 대표적이다. 이 유적들은 고조선시기에 고인돌을 축조하면서 제의를 행하였던 제단이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그 기원은 요서지역의 홍산문화에서 보이는 제단시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홍산문화의 제단 규모와 양식, 유물 등을 환웅시대의 신시문화 유적으로 해석하게 하며, 이곳에서 형성된 제단유적이 고조선시기에 한반도와 만주일대에 널리 전승되었다고 하겠다.

 

 

 

요령성 평강유적에서 출토된 고구려 초기 금장식 ©브레이크뉴스

 

 

환웅천왕의 신시문화에 이어 고조선시대의 이러한 종교 유적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단군사화에 보이는 종교의식의 반영으로부터 볼 수 있다. 단군사화에 등장하는 환웅과 곰, 호랑이의 상징성이 바로 고대인들의 종교의식으로 반영된 것이다. 고조선은 하느님을 수호신으로 했던 환웅족과 곰을 수호신으로 했던 곰족, 호랑이를 수호신으로 했던 호랑이족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조선의 단군은 바로 이 여러 종족들을 다스리는 종교적 통치자인 동시에 정치적 통치자였다.

 

 

이러한 고조선시기의 종교의식을 담은 상징적 유물들은 삼국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다양한 양식을 나타내며 발전되어갔다. 좋은 예로 요령성 평강지구유적에서 출토된 고구려초기의 금으로 만들어진 장식품에는 단군사화의 내용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있다.

 

 

고조선의 단군이 정치적 통치자이고 종교지도자였음을 다음의 기록으로부터 살펴볼 수 있다. 후한서 한전에는 여러 국읍에는 각각 한 사람으로써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를 주재하도록 하였는데, 이름 하여 천군(天君)이라 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단군은 몽골어에서 하늘을 뜻하는 텡그리(tengri)와 그 뜻이 통하는 것으로 하느님 또는 天君으로서 종교의 최고 지도자에 대한 호칭이었다.

 

 

위의 기록으로 보아 한에서는 국읍에서 하늘에 제사를 주재하는 종교지도자가 있었는데 그를 천군이라 불렀던 것이다. 고조선에 속해있던 대부분의 나라들이 고조선시기 요서지역에 위치했던 것과 달리 한은 원래부터 한반도에 위치해 있어 그 통치체제나 통치조직에서 고조선의 것을 큰 변화 없이 계승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은 고조선을 그대로 이어 종교를 주관하는 종교지도자와 종교 성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내용을 알려주는 것으로 후한서』「동이열전한전에는 또 소도를 만들고, 그곳에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고 하여 한나라에는 종교지도자인 천군 뿐만이 아니라 소도라는 종교적 성지인 별읍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홍산문화유적 출토 석경 ©브레이크뉴스

 

 

소도의 나무에 매달았던 방울은 고조선의 대부분의 유적에서 고루 출토되어진다. 청동방울은 고조선의 특징적 유물 가운데 하나로 가지방울과 팔수형방울을 비롯하여 다양한 양식의 것들이 만들어졌다. 고조선시대의 북은 아직 출토된 것이 없지만 홍산문화의 여러 유적에서 질그릇에 가죽을 씌워 북으로 사용했을 밑바닥이 없는 직통형의 채색질그릇이 다수 출토되었다. 고조선에서는 악기가 크게 발달하여 관악기와 타악기, 현악기가 모두 사용되었다.

 

 

홍산문화시기에서는 종교의식에 사용되었을 타악기의 한 종류인 석경이 출토되어지며, 만주의 여러 유적에서도 발전된 모습의 석경들이 나타나고 이후 고조선문화로 지속되어진다. 중국에서 석경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 이리두문화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리두 문화시기는 21세기 무렵에서 17세기 무렵으로, 홍산문화유적에서 출토된 석경 보다 2,000년에서 1,800년 정도 늦게 나타나기 때문에 석경의 발달사에서도 홍산문화는 한민족의 문화였음이 밝혀진다. 석경의 대하여 상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홍산문화유적에서는 두 개의 석경이 출토되었는데 하나는 길이 44쎈티미터, 넓이 26쎈티미터, 두께 5쎈티미터이다. 다른 하나는 길이 58쎈티미터, 넓이 20쎈티미터, 두께 2쎈티미터이다. 중국학자들은 앞에 설명한 석경은 낮고 묵직한 음이 나며, 또 다른 하나는 청동종의 소리와 유사하다고 밝혔다.

 

 

 

水泉유적출토 ©브레이크뉴스

 

   

고조선시대의 석경으로 요령성 조양 수천유적 하가점하층문화층에서 온전한 모습의 석경이 출토되었다. 요령성 건평현의 이도만자 동남구유적에서도 석경이 발견되었다. 떨어져 나간 부분을 복원하면 대략 1미터 정도의 큰 석경이다. 석경의 몸체 윗부분에 직경 0.6쎈티미터 정도의 구멍을 뚫어 끈으로 매달도록 했다. 대략 서기전 2,000년 무렵의 것이다.

 

 

요령성 부신시 고대산유형의 물관지유적에서과 요령성 건평현 동북부에 위치한 객라심 하동유적에서도 석경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들의 연대는 서기전 2,100년경으로 고조선 초기에 해당된다.

 

 

중국 중원지역에서 발견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석경으로는 이리두 문화유적인 산서성 양분현 도사유적과 하현 동하풍유적에서 출토된 석경이다. 이리두 문화시기는 대개 서기전 1,900년 내지 1,600년 무렵으로, 만주지역의 석경 보다 훨씬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서기전 14세기 무렵에 해당하는 은나라 무정의 왕비무덤인 부호묘에서 출토된 석경은 다듬어지기 이전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 외에 서기전 14세기에서 서기전 11세기 무렵에 속하는 중국 하남성 안양시 무관촌 은나라의 대묘에서 출토된 석경이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면 중국의 석경은 고조선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하겠다.

 

 

이러한 악기들은 종교의식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후한서』「동이열전 부여전에, ‘행인들은 밤낮없이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며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고 하였고, 후한서』「동이열전 고구려전에는 밤에는 남녀가 떼지어 노래를 부른다하였으며, 후한서』「동이열전 한전에도, “그들의 풍속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고 북치고 비파 뜯기를 좋아한다 고 하였는데, 이와 비슷한 내용이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에도 보인다. 이 기록들은 고대에 한반도와 만주지역 거주민들이 음악과 춤을 매우 즐겼음을 알게 해 주는데, 이러한 풍속은 고조선으로부터 전해 내려왔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으로부터 중국의 이리두 문화시기에 만들어진 석경은 홍산문화유적에서 출토된 것 보다 2000년에서 1800년 정도 늦은 것을 알 수 있다. 홍산문화시기에서 이미 타악기의 한 종류인 석경이 보이고 이후 고조선의 여러 유적에서 이를 계승하여 발전시킨 형태의 석경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석경의 발달사에서도 홍산문화는 한민족의 문화였음이 밝혀진다.

 

 

이처럼 홍산문화의 종교적인 예술품들에 관한 연구는 홍산문화의 성격이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것과 크게 구별되고, 고조선과 여러나라시대에 그 특징적 요소들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홍산문화의 성격이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것과 크게 구별되고, 고조선과 여러나라시대 문화에 그 특징적 요소들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음을 밝히게 되어 그 실체와 정체를 한민족 문화의 원형으로 귀속시켜야 할 것이다.

 

 

홍산문화의 모든 내용들이 고조선문화의 원형임을 입증해 주고 있는 상황에서 최근 중국에서 홍산문화를 포함한 만주의 고대문화를 총칭하여 하나의 강 이름으로 포괄하여 요하문명이라 부르는 것에 동의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요하문명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면 중국학계의 단순한 설명을 용납하고 이 문화를 중국의 황제문화로 포함시키려 하는 동북공정을 따르는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우리는 이 문화를 반드시고조선문명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박선희. 상명대 교수.

(출처; 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239033§ion=sc5)

 

 

3.3  2015 11 11일 브레인미디어 오성취각으로 배달국을 증거하다!

 

단군조선 이전의 역사가 천문기록으로 확인됐다. 박석재 한국천문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 10일 서울시 종로구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국학원 주최로 열린 제148회 국민강좌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는 배달국이라며 배달국의 오성결집 기록이 천문류초에서 발견됐다라고 말했다.

 

이날 박 위원은 천문으로 개천을 말하다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박 위원이 밝힌 천문류초(天文類抄)’는 세종의 명에 의해 천문학자 이순지(李純之, 14061465)가 옛 기록들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이 한 곳에 모이는 오성결집(五星結集) 기록은 중국 삼황오제의 전욱 고양씨(顓頊 高陽氏, BC 2513 - BC 2436)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갑인년 (BC 2467)

해의 이름이 갑인일 때, 갑자월 초하루 아침인 동짓날 한밤중에 해와 달 및 오성이 자방에 합하였다.

 

한국아마추어학회에서 오성결집현상을 30개 이상 발견했다고 합니다. 4500년 전의 천문기록을 제가 맞춰보는 거에요. 천문소프트웨어를 돌리려니 제 손이 벌벌 떨렸습니다.”

 

 

 

 148회 국민강좌가 열리는 가운데 박석재 한국천문연구원 연구위원이 강연하고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BC 2467년보다 3년 전인 BC 2470 9월 새벽 오성취각(五星聚角)’이 있었다. 오성이 28수 각() 별자리 주위에 모여서 취각이라고 한 것. 오천년 전의 기록에서 3년의 오차는 큰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오성취각의 발견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박 위원은 삼황오제의 시대가 전설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천문기록을 통해 관측하는 천문대가 있었고 이를 통치하는 국가가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비슷한 시기 배달국의 역사 또한 허구가 아니라는 점으로 연결된다.

 

박 위원은 중국에서 발견한 동이족 유적을 사진으로 보여줬다. 요하문명의 우하량 유적의 적석총, 상투를 튼 고대인의 무덤, 곰토템 여신상 등이다. 특히 옥으로 상투를 틀었다는 점에서 동이족이 분명하다고 했다. 이는 배달국으로 추정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문헌은 잇는가? 현재는 <환단고기>가 유일하다. 1911년 독립운동가 계연수가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를 모은 책이다. 일부 학자들의 위서론에 대해서도 박 위원은 환단고기도 가필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필이 없는 역사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위화도회군 이후 조선왕조는 명을 큰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러니 작은집에서 제사(천제)를 지낼 수가 없었죠. 대륙을 통치한 단군의 역사서도 수거했습니다.”

 

세조실록에 기록된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三聖記)가 대표적이다. 이는 <환단고기>에 담긴 책명과 같다. 이는 조선왕조의 수거령에 불구하고 단군사서가 후대로 전승됐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단군세기> 오성취루 현상은 1993년 박창범 교수와 라대일 박사의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 논문으로 밝혀졌다.

 

박 위원은 오성취루 현상보다 앞선 오성취각의 발견으로 배달국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5가지로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첫번째는 개천이다.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조선을 세운 것이 아니라 BC 3,897 거발환 환웅이 태백산 신시에 풍백, 우사, 운사와 함께 배달국을 세운 것이 개천이라고 했다. 이어 삼국유사에 나오는 환인은 환국의 장자국을 상징한다. 환국에 대해서는 이마니시 류가 삼국유사에서 환국을 환인으로 변조한 사례를 들었다. 환국은 존재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또 조선 이전부터 구전된 민족의 경전인 천부경은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론이라며 현대의 CC (Continuous Creation) 우주론, 정상우주론 (定常宇宙論)과 같은 개념과 비슷하다고 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붉은악마를 상징하는 치우천황은 배달국 14대 자오지 환웅이고 태호복희는 배달국 5대 태우의 환웅의 막내 아들이다.

 

박 위원은 직접 작사한 개천가라는 노래를 들려주면서 대한민국은 개천사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편, 내달 국민강좌는 8일 조성제 무천문화연구소장이 상고사 속의 무속문화를 주제로 강연한다. . 윤한주 기자

(출처; 브레인미디어,

http://www.brainmedia.co.kr/brainWorldMedia/ContentView.aspx?contIdx=17007&fromMenu=MediaListSection01&menuCd=Brain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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