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5. 여러나라 시대

5.10  2010 2 7일 플러스코리아 기사 신라 '황금보검'의 실체와 주인은 누구? 도대체 누가 만들었으며 왜 한반도남부지역에서 발견이 되었나

 

윤복현 역사칼럼

 

경주 대릉원 인근 계림로 14호 고분에서 출토된 눈부신 황금보검은 이국적이고 화려함으로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도대체 누가 만들었으며 왜 한반도남부 경주지역에서 발견된 것일까?

 

 

황금보검은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그 원형을 보유하고 있는 검이라 할 수 있다. 다채로운 색감과 수정과 금으로 장식한 섬세한 조형미는 과히 예술적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다. 그런데,이러한 황금보검이 출토된 지역은 켈트족이 활동했던 불가리아 트로키히지역으로 유럽과 로마제국을 공포로 도가니로 몰아 넣으면서 로마제국으로부터 엄청난 금액의 조공을 받았던 4세기 훈족의 본거지이기도 했다.그러나, 신라의 황금보검의 원형은 켈트족이 주인공들이였으나,켈트족이 사라진 후에 로마인들이 제작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 졌다.

 

 

문제는 황금보검이 신라인들에 의해 제작된 것인지 아니면 주문제작한 것인지의 문제인데,정밀한 고고학적 검사를 통해서 황금보검은 동로마 금장식 장인들에 의해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황남대총에서 발굴된 유리잔들 또한 당시 로마인들이 제작한 로마유리잔들이였다.당시 신라인들은 로마에서 인도로 이어지고 인도에서 한반도로 이어지는 국제 해상무역로를 통하여 활발한 국제교역을 했음을 할 수 있다. 경주는 계획된 국제도시였고, 서역인들로 넘쳐 났으며, 서역인들은 신라인들로 살다가 신라땅에 묻히기도 하였다.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신라인들

 

국경이 없이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었던 유라시아 초원지역은 언제나 동-서양의 문화가 교류되고 융합되는 공간이였다. 그리고 그 문화교류의 주인공들은 '몽골리안'으로 대변되는 아시아 초원세력이였다. 기원전 800년 스키타이로 시작되는 초원문화의 특징은 '황금문화'였다. '알타이산' '황금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시아 초원세력은 황금으로 샤먼문화를 표현하며 스스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잊지 않으려 했다., 자신들의 얼굴은 황금처럼 누런 색이며 황금처럼 빛나는 민족이었다는 사실을 후손들과 후대에 전해주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목축을 위해서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초원의 주인은 정세변화와 기후변화에 따라 자주 바뀌었다. 지금은 유라시아대륙을 지배하며 동서문명을 하나로 이어 주었던 징기즈칸의 후예들인 몽골인들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지만, 고대에는 스키타이.흉노.선비.거란.몽골로 불리운 북방의 한민족이 초원길을 통하여 유럽에 한국의 문명을 전파하였고, 한국문명의 젖을 먹은 유럽은 다시 발전시켜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통하여 아시아를 침력하는 서양 제국주의 시대를 열기도 하였다.

 

 

이들 초원세력 중에 경주.김해.일본열도지역에서 출토되는 기마유물들의 주인공은 바로 4-5세기 선비족이다.

 

 

흉노족은 이미 한나라에 공격을 당하여 초원지역에서 사라지거나 선비족에 흡수된 시기가 2-3세기다. 한나라에 투항한 김일제세력도 물론 흉노세력이지만, 기원전 10세기에 한나라에 투항한 세력이기 때문에 기마문화를 상실하고 남흉노족처럼 한족화된 흉노계이기 때문에 김일제세력이 개국을 도운 신나라가 후한 광무제엑 망하고 산동지역에서 해로를 따라 한반도남부지역으로 들어온 시기가 서기1-2세기이기 때문에 경주지역의 4-5세기 적석목곽분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고구려 유리태왕때부터 전쟁을 시작한 고구려와 선비족은 관계는 악연관계라고 할 수 있다. 만주지역과 한반도 북부지역을 평정하고 고구려 선조들의 나라 고리국이 존재하는 요서지역으로 진출하려는 고구려 태조왕 시기부터 초원세력의 주인으로 군림하는 선비족은 요하지역을 경계로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다.중원지역을 노리는 선비족의 무용부족국가 '전연'은 먼저 고구려를 굴복시킨 후에 중원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고국원왕 때 드디어 전연은 황제 모용황이 5만군대로 고구려가 예상못한 험한 남부공격루트를 따라 쳐 들어와 환도성을 점령하고 5만의 고구려인들과 미천왕의 무덤을 도굴하여 미천왕의 시체를 가지고 갔다.

 

 

반면 고구려북부지역으로 공격해 들어올 것으로 예상한 고구려는 고국원왕의 동생 고무로 하여금 5만의 군대로 방어하게 하였으나, 모용황의 동생이 지휘하는 고작 수천의 선비군대로 공격했기 때문에 고구려 북부전선은 고구려군대가 선비군대를 막았고,고구려군에 패한 선비군대는 사분오열되어 일부가 동해안 루트를 따라 경주지역까지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선비족이 고구려를 공격한 당시 조양지역에 묻힌 선비족 나라 전연의 고분에서 경주.김해지역 적석목곽분에서 발견되는 동일한 청동솥(동복)들이 발견되었다는 점은 고고학적으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할 수 있다.

 

 

경주지역의 적석목곽분-주인은 2세기이후 흉노족을 흡수하고 초원의 주인이 된 선비족

 

유럽지역을 지배한 소수의 훈족과 몽골기마군대의 위력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선비의 수천 기마군대가 사로국을 무너뜨리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고 볼 수 있다. 선비모용씨는 사로국을 무너뜨리고 신라를 개국했고,일부세력은 김해 등 가야지역으로 들어가 가야의 지배세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해 대성동에서 출토된 선비족의 구리솥-동복(),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흉노계 선비 기마상()

 

 

신라 경주지역의 적석목곽분() 경남 창녕의 가야의 적석목곽분()

 

 

신라 법흥왕이전까지 신라왕족은 모두 모씨였다고 할 수 있다.신라가 김씨왕조라는 인식은 진흥왕시대부터이다. 법흥왕은 자신의 이름을 모진에서 김원종으로 개명했다고 [삼국사기][양서-신라전][만주원류고]에서는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경북 울진군에서 발견된 법흥왕봉토비문에도 수 많은 모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다.신라 법흥왕은 법령을 공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등 신라개혁에 앞장 선 왕이다. 순장의 인원도 사람에서 모형으로 대체하도록 국법으로 명시한 것은 아마도 초원문화를 포기하고 농경문화를 선택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신라왕조를 연 선비족은 모씨에서 김씨로 개명을 한 것일까? 그것은 당시 동아시아 강국으로 성장하는 고구려가 원수지간인 선비 모용씨가 신라왕조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게 된다면 신라의 국운은 그야말로 태풍앞에 촛불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였고, 신라권력집단에서 소외된 김알지세력과 동일한 초원세력으로써 연대함으로써 숫적으로도 열세한 선비족이 신라권력을 유지하는데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아예 김일제후손으로 자처하는 성씨 개명을 단행했다고 할 수 있다. 姚思廉(요사렴)이란 당나라 학자가 쓴 梁書(양서)에는 신라 법흥왕이 즉위 8, 서기 521년 중국 강남에 자리잡고 있는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친 사정을 기록하면서 신라 임금의 성은 ()요 이름은 () 이라고 적고 있다. 그 뒤 이연수란 당나라 학자가 편찬한 南史(남사)란 역사책에는 법흥왕의 성을 () 이름을 ()로 기록하고 있다.  는 글자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梁書(양서)의 기록을 南史(남사)에서 옮겨 적다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중국역사서 通典(통전)에는 법흥왕의 성명을 慕秦으로 적고 있다.

 

 

 

 

흔들거리는 신라금관

 

 

신라개국신화는 선비족 모용부족의 신화가 유사하며, 선비모용부족장들은 흔들거리는 왕관을 쓰고 다녔다는 점에서 흔들거리는 금장식의 신라왕관의 주인은 선비족의 모용부족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선비족 모용부족의 나라 '전연'에서 활약한 사람들의 고분에서 발견된 장신구와 유리그릇 등 각종 출토물이 신라와 가야, 나아가 일본의 고분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한 점이 많아 선비족 모용씨가 신라-가야-일본열도로 진출하는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출토 유물-로마에서 수입한 유리잔

당시 신라가 해로를 통하여 로마와 교역했음을 증명하는 유물이다

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13768&section=section78&section2=%EC%83%81%EA%B3%A0%EC%82%AC/%EA%B3%A0%EB%8C%80%EC%82%AC/)

 

 

 

5.11 2014 12 30일 플러스코리아 세계적 역사학자 보수기교수 '신라가 지구의 중심이었다'

 

리복재 기자 

 

비상한 관심, "대한민국 역사학계는 침묵으로 일관 비판 쏟아져

 

 

 

 

 무함마드 보수기 교수가 최초로 공개한 2천년전 고대 페르시아의 고지도에 나타난 경주. 사진=경북신문 이은희기자 © 편집부

 

 

[민족/역사/통일=플러스코리아타임즈-리복재 기자] 2천여 년 전 제작된 고대 페르시아의 지도에 신라의 수도 경주가 지구의 중심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돼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12 24일 경북 경주시 서라벌문화회관에서 열린 제92회 화백포럼에서 해양실크로드의 세계적 역사권위자인 이란 테헤란대학교 역사학과 모함마드 보수기 교수(사진) "2천여 년 전 제작된 고대 페르시아의 지도에 경주를 자오선의 시작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 문서는 신라가 이미 국제적인 왕국이었으며 세상과 폭넓게 교류했다는 점을 확실하게 증명해 준다"고 주장했다고 경북신문 이은희 기자가 25일 보도했다.

 

 

 

 

 보수기 테헤란대학 역사학과 교수. 사진=영남일보 © 편집부

   

 

이 매체에 따르면, 보수기 교수는 영국 런던의 그리니치 천문대 본초자오선 이전에는 신라의 왕경이었던 경주가 동서를 가르는 중심축이었고, 경주를 자오선의 시작으로 정하고 경주를 기점으로 지구상의 동서가 나눠졌다는 것.

 

 

보수기 교수는 이날 '실크로드를 통한 신라와 페르시아의 역사적 교류'라는 주제의 강의에서 한 장의 고지도를 최초로 공개하면서 "당초 지리학을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의 지도에는 칼레닷 섬(현재 스페인의 카나리아 제도)을 자오선의 기준으로 삼았지만 이후 페르시아의 자오선은 당시의 신라, 즉 현재의 경주를 자오선의 0도 지점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후 이슬람의 지리학 문서에는 이에 따라 신라의 강데즈(경주=금성. 현 중국대륙의 낙양=동경)를 자오선의 기준점을 설정했다"고 덧붙였다.

 

 

보수기 교수는 그동안 '강데즈'라는 지명에 대해 의문을 가졌지만 신라의 왕경인 경주가 과거 '금성'이라는 지명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강데즈'가 경주임을 밝혔다고 주장했다. 페르시아어로 '' ''을 뜻하고 '데즈' ''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는 "고대 페르시아 문헌에 수시로 강데즈에 대한 언급이 있었지만 이 지명을 신라와 연결 짓지 못해 수수께끼를 풀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중요한 퍼즐 조각 하나를 완성함으로써 실크로드상의 동쪽 시작점이 신라라는 사실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이날 보수기 교수는 신라의 공주와 페르시아 왕자가 결혼해 페르시아를 재건한 영웅을 낳은 사실을 묘사한 고대 페르시아의 서사시 '쿠쉬나메'를 설명하면서 이 서사시는 신라와 페르시아의 다양한 교류가 이뤄졌다는 점을 강력하게 시사한다고 주장했다.  '도로와 왕국 총람' 등 많은 페르시아 문헌에 신라를 "금이 많은 도시, 물이 맑고 젊은이가 많은 도시, 사시사철 꽃이 만발하고 살기 좋은 도시여서 한 번 방문하면 돌아가고 싶지 않은 도시로 묘사돼 있다" "신라는 페르시아에서 유토피아로 여겨진 최고의 왕국이었다"고 밝혔다.

 

 

 

 

 모함마드 보수기 테헤란대학 역사학과 교수가 공개한 고대 페르시아 문헌. 필사본인 이 사서에 신라가 여러번 언급돼 있다. 사진는 영남일보 © 편집부

 

 

한편, 영남일보 박진관 기자는 보수기 교수가 발표한 논문 이전엔 지금까지 아랍과 페르시아인 학자들이 편찬한 총 23권의 각종 역사서, 지리서, 백과사전, 풍물지 등에 신라가 부분적으로 언급됐다. 이 내용은 1970년대 이후 재미학자 정기원을 비롯해 김정위·정수일 교수를 중심으로 상당 부분 논의돼왔다. 특히 김정위 전 한국외대 이란어과 명예교수는 2005 중동사를 증보편찬하면서 중세 중동인 18명이 신라를 비롯한 한반도를 어떻게 묘사했는지에 대해 썼다. 이후 이희수 한양대 교수가 ·이슬람 교류사등에서 중동인의 신라 묘사에 대해 언급했다. 보수기 교수는 이번에 처음으로 페르시아의 고대 문헌을 인용해 이 사실들을 뒷받침했다고 전제한 뒤,

 

 

보수기 교수는 학술대회에서 “9~16세기 많은 페르시아와 아랍 문헌들에는 신라에 대한 흥미롭고 유용한 정보가 많은데 마티니 교수가 발간한 쿠쉬나메를 제외하곤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이란인은 이란에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 수세기 동안 신라와 교류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정치와 역사에 대한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사산조페르시아의 멸망(AD 632)으로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변화 과정을 거치면서 이슬람세계로 전해졌다. ‘신라(Sila)’라는 명사는 이란의 상인에 의해 육상과 해상 실크로드를 거쳐 이슬람 문화와 문학 속에 녹아들어오게 된다는 보수기 교수의 말을 전했다.

 

 

이에 대해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데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지구조선사 지명선 대표는 세계적인 역사학자인 이란 테헤란대 보수기교수는 경주(금성)가 원래 지구 자오선의 기준점(0)이 되는 세계의 중심이라고 밝혔다" 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신라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은 세계를 석권한 지배국이었다는 큰 사건인데도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보수기 교수에 대해서도 "보수기 교수는 대륙신라를 이해못하고 신라가 한반도에 위치한 것으로 생각하여 한반도 경주(금성)를 지목했으나, 신라는 대륙에 있었고 경주가 바로 하남성 낙양이었는데 페르시아지도의 강데즈는 곧 낙양(금성)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한반도 경주가 아니다"라며 아쉬움을 토로하고, "역사의 진실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고 보수기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였다.

 

 

다른 재야사학자도 경주(慶州)는 대륙의 동경(東京)이며, 동경이 곧 낙양(洛陽)이라는 지명으로 시대에 따라 다르게 쓰인 것뿐이지, 결국은 같은 지명이라며 이 글을 쓴 기자도 경주(慶州)가 낙양(洛陽)인 줄 모르고 쓴 것 같지만, 아마 기자가 경주를 대륙지명인 낙양이라고 썼으면 아마 학계가 난리 났을지도 모르겠다면서 천자문(千字文)에선 동서이경(東西二京)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는 대륙에서의 동경(東京)이요 다른 하나는 서경(西京)이며, 서경은 곧 장안(長安), 동경은 현 경북 경주시가 아니라 대륙 낙양이 경주(慶州)고 지명까지 설명했다.

 

 

 

 

  

 모함마드 보수기 테헤란대학 역사학과 교수가 발견한 신라’. 고대 페르시아 글자로 쓰여 있다. 사진=영남일보 © 편집부

 

 

다음은 역사의 중요성을 감안해 영남일보 박진관 기자의 기사를 여과 없이 인용 보도한다.

 

보수기 교수에 따르면 최초로 신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사람은 9세기 중엽 술레이만 시라피(Sulayman Sirafi)’라는 이란의 항해사다. 그는 극동지역을 여행한 이란 상인이기도 했다. 시라피는 그의 책에서 중국의 바다 한쪽에 알 신라(Al Sila, al은 관사)’라는 섬이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흰색 피부를 가졌고, 그 나라에 도착한 사람은 한 사람도 그 나라에 대한 기록을 갖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흰색 매를 가지고 있다고 썼다.

 

 

보수기 교수는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처음으로 극동아시아에 건너간 무슬림은 시라피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븐 코르다드베(Ibn Kordadbeh)’라는 페르시아의 지리학자가 AD 846년에 쓴 지리서에는 중국의 가장 끝 지점인 광쑤 근처에 많은 산과 많은 왕들이 있는데 그곳에는 금이 많다. 이슬람인 중에 그곳에 정착한 이도 있는데 살기가 좋았기 때문이다라고 나와 있다. 이븐 코르다드베의 정보는 페르시아와 극동아시아 간 문화적 관계에 기초했다. 11세기에 쓴 쿠쉬나메는 페르시아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텍스트다. 쿠쉬나메의 중요한 텍스트는 이슬람 이전에 속하는데 동양과 서양의 두 길에 바탕을 두고 있다.

 

 

페르시아인은 신라에 대해 신라(Silla)’ 또는 바실라(Basilla)’라고 했다. 바실라 혹은 신라 역시 한국에 대해 비슷하게 언급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둘 다 역사적 동질성을 갖고 있다. 보수기 교수가 발표한 고대 페르시아 문헌에 기록된 신라의 묘사와 실크로드를 통한 문화 교류논문에 나타난 신라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실크로드 © 편집부

 

 

마수디(Masudi·출생미상~957)가 쓴 황금초원과 보석광산 총람과 지리서인 학습과 개관 속 신라

 

<중국 해안 건너 신라와 그에 예속한 섬을 제외하곤 이 나라에 대해 많이 알려진 바는 없다. 하지만 이라크인과 일부 외국인이 신라와 그 섬에 정착했으며 그곳을 고향으로 선택했다. 신라는 공기가 맑고, 물이 깨끗했으며 농토가 비옥했다. 또한 보석과 광석물이 많은 데다 획득하기도 쉬웠다. 그래서 신라에 정착한 대부분의 사람은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 떠나는 이도 극히 적었다. ‘왕국과 도로총람에 따르면 중국의 동쪽에 한 나라가 있다. 이 나라에 위험을 무릅쓰고 여행한 사람 역시 맑은 공기와 비옥한 토지, 깨끗한 물에 반하고 풍요한 생활과 주민들의 친절한 행동으로 인해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일곱째 종족은 신라를 비롯한 중국과 그 주변지역이다. 그곳에는 노아의 아들 야벳과, 야벳의 후손 아무르족의 거주지다. 한 명의 왕이 그들을 통치하고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한편 김정위 교수는 중동사에서 아무르를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아들 야벳의 장자 고메르(Gomer)’로 봤다. 김 교수는 야벳의 일곱 아들 중 아무르의 이름이 빠질 때도 있었는데, 이때 아무르 대신 주마르(Jumar)’를 사용했으며 주마르는 고메르의 아랍어 철자라고 추정했다)

 

 

이븐 나딤(Ibn Nadim·출생미상~995)이 쓴 세계 각 나라의 목록(Al Fehrest)’에 나타난 신라

 

<중국에 신라라고 부르는 땅이 있다. 신라는 가장 아름답고 부유한 나라다. 그곳에는 금이 아주 많다>

 

한편 9~11세기의 지리학자 알 비루니와, 알 마수디, 알 이드리시는 각각 지도에 신라(Silla)라는 지명을 표시했다. 특별히 알 비루니(Al Biruni)’는 그의 지도 알 카눈(Al Qanun)’에 신라의 위도와 경도를 표시했다. 그는 신라에 대해 중국의 동쪽 끝에 위치하며 몇 명의 사람만이 바다를 통해 그곳으로 여행한다"고 썼다.

 

 

1092년 타바리(Mohammad Bin Ayub Tabari)가 쓴 갈렙이란 책에서의 신라

 

<중국과 가까운 또 하나의 도시는 신라다. 그곳은 강하고 견고하다. 신라의 왕은 매년 중국에 조공을 바쳐야 한다. 만약 조공을 보내지 않으면 비가 오지 않아 폐허가 될 것이다. 만약 조공을 보내면 이러한 상황은 완전히 변한다>

 

 

마르위지(S.Z.T. Marwzi)가 쓴 동물의 자연적 번성에 나타난 신라

 

<중국 영토의 가장 끝에 신라라는 땅이 있다. 무슬림이나 어느 이방인이든 그곳에 가면 정착하고 결코 떠나지 않는다. 유쾌하고 살기에 좋기 때문이다. 많은 금이 거기에서 발견된다>

 

 

에드리시(Edrisi·1099~1167)가 쓴 먼 지역을 가로지르는 트레킹 모험 속 신라

 

<신라는 중국의 북동부에 위치한다. 당시 몇 명의 사람이 신라를 여행했다>

 

 

투시(M.bin.A. Tusi·1161~1178)가 쓴 창조의 경외감에 나타난 신라

 

<신라는 중국에 있는 한 도시다.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은 결코 이 도시를 떠날 수 없다>

 

 

바크란(M.N.Bakran·1208)의 저서 세계 이야기에 나타난 신라

 

<마친(Machin) 혹은 중국 내지를 보실라(Bosila)라고 하는데 중국의 맨 끝부분에 있다. 이 지역은 산악지대이며, 때론 보신라로 불린다. 일부는 물속에 있다. 이 도시같이 예쁘고 풍요로운 도시는 발견할 수 없다. 소수의 사람이 이 도시에 도착하지만 너무나 살기 좋은 곳이라서 이 도시에 한번 가기만 하면 떠나지 않는다>

 

 

자카리야 카즈위니(Qazwini·1203~1282)가 쓴 창조의 경이로움과 존재의 희귀성 나라들이 남긴 발자취에 나타난 신라

 

<신라는 너무나 완벽하고 좋은데, 중국의 한 지방이다. 물이 달고 땅이 비옥하며 맑은 공기가 있어 가난하고 비루한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너무나 아름답다. 질병도 적다. 사람들이 만약 물을 땅에 뿌리면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고 한다. 유해동물과 해충, 파리와 전염병도 이 땅에선 거의 없다. 다른 지역에서 병이든 사람을 누구나 신라에 데려오면 병이 완쾌된다. 자카리야에 라지는 누구든지 신라에 오는 사람은 이곳에 정착하는데 풍부한 금과 과일, 맑은 공기와 물 등 살기 좋은 조건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라는 유쾌한 나라다. 중국의 가장 끝자리에 위치한다. 공기가 맑고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기에 사람들은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말하길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향유고래의 배설물에서 나는 향기)이 난다고 한다. 전염병과 다른 병은 물론 드물고 파리와 야생동물 또한 거의 없다. 다른 지역의 어떤 환자도 이곳에 오면 치유된다. 모함마드 자카리야 라지는 누구나 이 땅에 들어가면 살기 좋으므로 정착해 떠나려 하지 않는데 그건 자원과 금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그 진실을 안다>

 

 

세드 빈 알리 조자니(Jojani)가 쓴 도로와 왕국 총람에 등장한 신라

 

<신라는 중국의 맨 끝부분에 위치한다. 어떤 사람은 신라를 바신라라고 부르는데 바신라 역시 해변을 갖고 있다. 바신라는 부유하고 아름답다.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개 젊은이다. 그곳을 여행하는 사람은 매우 적은데 한번 그곳에 가면 살기가 좋아 떠나지 않는다>

 

이상으로 볼 때 페르시아인의 눈에 비친 신라는 무릉도원이자 이상향이다. 하기야 사막과 황무지로 된 그곳에서 바라본 동방의 신라는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일 수도 있다. 그들의 문헌에서 보듯 한번 신라를 찾은 사람은 그곳에 정착해 돌아오지 않는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 관한 이 기록들은 한자문화권 밖에서 나온 문헌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보수기 교수의 논문에 대한 반론도 있다.

 

송수환 울산대 연구교수는 ‘Silla’ ‘Sila’ ‘Shila’  혹은 군도라고 언급된 것을 볼 때 한반도의 신라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대양의 극동에 신라라는 섬이 있다’ ‘중국의 해안 쪽으로 신라라는 섬들이 있다’ ‘중국 저편 동해에 여섯 개의 섬으로 형성된 신라라는 나라가 있다는 설명을 예로 들었다. (·사진=영남일보 박진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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