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5. 여러나라 시대

5.1  2008 3 30일 플러스코리아 단군조선과 고구려를 이어주는 부여사

 

많은 독자분들이 역사관련 기사를 애독하고 계십니다. 저희 플러스코리아는 일제 식민사관를 청산하고 우리의 민족사를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 [환단고기] 등 우리의 문헌들를 중심으로 고대 중국 문헌들과의 비교분석, 고고학를 토대로 유라시아 대륙과 만주와 한반도를 연결하는 차원에서 가장 객관적인 관점으로 민족사학을 정립하는데 노력하겠습니다. 과거인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우리 조상들의 정신과 역사에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찾고 미래를 설계하는 민족비젼이 되었으면 합니다. 많은 관심과 애정바랍니다. 감사합니다.[편집부]

 

 

부여의 유래와 어원

 

부여라는 나라이름의 시초는 초대 단군왕검의 막내아들로 국방에 능통했다는 부여(夫餘)에서 왔다. 외교에 능통했다는 첫째인 태자가 부루(夫婁 : 2세 단군, 재위 기원전 2240~2182), 둘째가 부소(夫蘇 : 구려(원시 고구려=고리국)에 봉해짐), 셋째가 부우(夫虞 : 진번국(요동의 제후국)에 봉해졌다. 부여란 명칭은 초대 단군왕검의 넷째 아드님의 이름인데, 초대단군은 아들 부여를 제후국 국왕으로 봉했다. 그 나라의 이름이 부여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학자들은 이를 원시부여라 부른다.

 

 

장군출신 44대 구물단군은 나라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력을 쇄신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수도를 장당경(藏唐京; 지금의 티벳, 단군 44~47대까지 188년간의 수도)으로 옮기고 국명 또한 대부여(大夫餘)’로 바꾸기에 이른다. '부여'로 국명을 바꾼 구물단군께서는 아마도 국방에 능했다는 단군왕검의 넷째 아드님이신 부여의 후손이라 여겨진다.

 

 

 

 

 - 타 오르는 "(부여)" 을 상징하는 백제왕관(무녕왕릉 출토) -

 

 

'부여'의 어원은 청동기 문명을 가지고 알타이 지역에서 동진해 온 단군족의 이동과 관련된다고 보여진다. 단군왕검의 네 아드님의 이름에 들어 가는 ''의 어원은 당시 유라시아 대륙에 널리 퍼져 있던 말(페르,펴라,벌 등)의 의미로 '(fire)'을 의미한다.

 

 

청동기 문명의 주역 단군족(부여.고구려)

 

또한 청동기 문명의 주역인 단군족은 ''이 중요했고, 몽골과 만주지역의 부여에 대해 고대 중국문헌은 "집마다 철갑옷.철기구 등이 가득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만큼 청동문명의 주역인 단군족이 ''을 이용하여 쇠를 자유자재로 잘 활용했다는 증거이며,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역시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또한 부여를 계승한 고구려 역시 '개마무사'라는 철갑기마부대를 보유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고 본다.

  

 

고대 중국문헌은 부여와 고구려를 단군족(예맥족)의 직계후예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 예맥족은 요서(난하=고리국의 발원지)지역에서 청동기 문명을 일으켜 요동지역으로 이동하여 전파한 종족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청동기문명의 중심지와 관련하여 고고학적으로도 동진해 온 단군족의 초기 중심지는 요서지역의 난하(고구려의 발원지=번조선 수도=고구려 수도 평양성)지역이라 볼 수 있으며, 단군족의 중심세력이 동이족의 터전이며 북방의 외부세력의 침략과 유입으로부터 안전한 지역인 요동지방의 하얼삔(진조선의 수도 아사달)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일부는 한반도 지역으로 들어가 대동강 평양(마한의 수도)에 터를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청동검의 형태도 만주와 유라시아 지역은 단군족의 이동시기형태인 비파 청동검이고, 비파청동검이 변형된 한반도의 세형동검은 단군족의 정착시기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민족사 역사왜곡하는 MBC

 

사전에 상황과 구조를 전제로 사건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조사확인없이 방송윤리를 위반해 가면서까지 대한민국의 원천기술을 보유한 황우석죽이기에 불을 당긴 MBC는 특허를 노린 황우석 죽이기 음모세력의 돈다발에 수단화되지 않았다면 상업주의에 치중한 엄청난 반국익적 오류로써 대국민 사죄와 수습에 나서야 한다. 또한 역사왜곡으로 수 많은 민족사학 세력으로부터 비판과 비난을 받았던 사극 주몽과 일본자금유입설과 관련한 태왕사신기에 이어 소설가 최인호의 ‘4제국 가야를 드라마화 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미리부터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 드러 나야할 문제지, 결코 일개 방송의 이윤창출를 위한 상업주의적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MBC는 자신의 엄청난 오류에 대해 대국민 사죄와 수습에 나서던지 방송국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민족과 조상을 수단화하고 국민을 파는 반민족 반국가적 방송행위는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엄청난 오류에 대한 사죄없이 겉으로 민족과 민중을 내세우며 생각하는 척 하며 속으로는 잇속을 챙기려는 파렴치한 행위는 추악한 위선과 거짓에 불과하기 때문이다.[편집자 주]

 

 

 

 

고구리 건국이야기를 다루었던 MBC드라마 <주몽> 무엇이 왜곡되었나?

 

우리 고대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드라마이였지만, 제작 전 문헌자료에 대한 치밀한 비교분석과 자문없이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상황설정과 지나친 극적 구성으로 실제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한 사극이였다. 진실을 외면한체 조상들의 역사를 돈벌기를 위한 상업성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건 엄청난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에 한민족사의 잃어버린 고대사의 고리를 고스란히 복원시켜주는 환단고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드라마 <주몽> 시대의 역사를 알아보고 한민족 상고사의 국통맥을 간추려 소개하며, 환단고기를 위서로 몰고 있는 반민족적이고 반국가적인 일제 식민사관에 대항할 자료로 제시한다.

 

 

어린시절 주몽은 겁쟁이?

 

왜곡의 한 예로, 고구려를 창건한 주몽의 인물됨을 살펴보자.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도, 주몽은 기골(氣骨)이 뛰어나 범인과 달랐으며, 불과 일곱 살이 되어 스스로 활을 만들어 백발백중의 실력을 자랑하였다고 나온다. 그래서 ‘()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불렀기에(善射者謂朱蒙) 그를 또한 주몽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주몽은 나이 스물이 되도록 활은 고사하고 칼 한번 들어보지 못한 겁쟁이로 나온다. 극적 전개를 위한 각색이라고 해도, 고구려 창업군주의 인물됨을 왜곡하는 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드라마 <주몽>이 한민족의 상고사 특히 부여사를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MBC주몽의 한 장면

 

 

천제지자(天帝之子) 고주몽

 

근래 TV 사극은 옛사람들의 정신의 맥과 한민족의 문화를 소개하는 측면보다는, 권력과 재물을 둘러싼 야비한 다툼만을 부각시켜서 드러내는 경향이 짙다. <주몽> 역시 고대 인물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전제로, 우리 역사를 지나치게 정치사, 전쟁사로 몰아가는 문제점이 있다.

 

 

고대 인물들이 현대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 아닐까.  

 

주몽에 대하여서는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주몽이 영특하고 대범하고 영웅적인 기개가 있으니, ()부여국 왕자들이 주몽한테 왕위를 뺏길까봐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래서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부여를 떠나라고 한다. 주몽이 도망을 가다가 엄리대수(淹利大水), 즉 지금의 송화강에 다다랐다. 강을 건너야 되는데, 뒤에서는 ()부여 군사가 주몽을 잡아 죽이려고 쫓아온다.  

 

 

그 때 주몽이 수신(水神)에게 말하기를, “아시천제지자(我是天帝之子)”, “나는 천제의 아들이다라고 외친다.

 

 

이 말은 나는 천제 즉,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천자다.’ 이런 뜻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리 민족에게 천제 문화, 천자문화가 생생히 살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호태왕 광개토열제의 비문에도 우리 고주몽 태조께서는 천제지자(天帝之子)’ 황천지자(皇天之子)’라고 쓰여 있다. 그 말은, 당시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지는 하나님의 진정한 대행자만이 황제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말이다.  

 

 

잃어버린 한민족사의 고리, 부여(夫餘)

 

이제 구체적인 역사 내용을 살펴보자. 가장 중요한 것은 부여사의 왜곡으로 인해 드라마 <주몽>의 등장인물간의 인척관계가 대단히 잘못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 아니다

 

고주몽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인 고진(高辰)의 손자인 불리지(일명 고모수高慕漱)와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유화부인과 해모수가 부부인연을 맺은 것으로 설정하여, 유화부인이 시증조할아버지와 관계를 맺은 것으로 왜곡하고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이런 역사왜곡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부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

 

드라마에서는 주몽이 태어난 나라를 부여라고 한다. 우리 민족의 흥망사를 살펴보면, (원시)부여, 대부여,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서부여, 남부여 등 수많은 부여가 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어 시청자들의 혼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주몽이 태어난 나라는 동부여이다. 주몽은 북부여의 건국자인 해모수 단군의 고손자로서 황손(皇孫)이다. (삼국유사도 분명히 해모수가 북부여의 건국자임을 밝히고 있다.) 광개토열제의 비문에 황천지자(皇天之子)’라고 했던 것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중국사가들의 역사왜곡과 국내사가들의 중국사 베끼기

 

그런데 왜 우리는 이것을 잘 모르고 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의 역사가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역사왜곡에 기인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여기서 다 언급하기 힘들지만, 중국은 한() 무제 때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 이후로 동방의 천자국(天子國), 스승의 나라, 조선(朝鮮, 고조선)의 역사를 일부러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조선은 세상에서 아는 것과 달리 하나의 국가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하나의 주체국 아래 수많은 제후국을 거느리고 있는 일종의 연방체제로 이루어진 대제국이었다. 조선이란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 단지 제후국의 이름만 거론하면 조선은 역사 속에서 오리무중으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후세의 김부식과 같은 우리의 역사가들은 중국인들이 써준 역사를 베끼기에 급급했던 탓에 우리의 역사, ()조선사는 실체가 없는 신화로만 남게 된 것이다. ()조선사를 역사 속에서 지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부여사 또한 지우는 것이었다. 조선의 역사 계승은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를 거쳐서 열국시대와 사국시대(고구려·백제·신라·가야), 남북국시대(대진국·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에 이르게 되는데, 북부여를 역사 속에서 지우면 뒤에 생겨난 국가들은 ()조선과 전혀 관계없는 역사의 미아가 될 것이라는 것을 중국인들은 노렸던 것이다. 

 

 

읽어버린 부여사

 

그럼 구체적으로 부여의 정체를 풀어보자. 이것이야말로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다빈치코드>보다 더 큰 파장을 불러올 동양 한민족사의 실체에 얽힌 중대한 비밀코드를 풀어내는 열쇠이기도 하다.  

 

 

()조선의 역사 |

 

단군조선은 군사지휘권을 가진 진조선(만주.연해주.몽골.시베리아)을 중심으로 번조선(산동.요서)과 마조선(한반도)으로 분할통치하는 3한 관경제 나라였다. 진조선의 단군은 대단군으로 불리였으며, 번조선과 마조선은 대단군의 혈족이나 덕이 있고 현명한 유명인사가 부단군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부여의 원뿌리는 ()조선(朝鮮)이다. ()조선은 마흔일곱 분의 단군이 나라를 다스렸다. 한 나라를 크게 진한(辰韓, 후기엔 진조선) 번한(番韓, 후기엔 번조선) 마한(馬韓, 후기엔 막조선) 셋으로 나눠, 진한은 단군이 직접 통치하고, 번한 마한에는 부단군을 두어 일종의 연방체제로 국가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삼한 안에도 더 작은 제후국들이 존재했다.

 

 

대부여의 등장

 

44대 단군은 구물(丘勿)단군이다. 그는 본래 43대 물리단군 때 상장군(上將軍)이었다. 43대 단군 때 사냥꾼의 두목 우화충이 사냥꾼들을 모아 반역을 저질렀다. 그들이 수도를 점령하고 물리단군이 피난 중에 죽자, 이에 맞서 반란자들을 제압한 이가 바로 상장군 구물이었다.

 

 

이에 5(우가 마가 구가 저가 양가; 5인으로 구성된 조정의 주요 대신(大臣)) 제신들은 그를 44대 단군으로 추대하게 된다.  

 

 

구물단군은 나라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력을 쇄신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수도를 장당경(藏唐京; 지금의 개원(開原), 단군 44~47대까지 188년간의 수도)으로 옮기고 국명 또한 대부여(大夫餘)’로 바꾸기에 이른다. ()조선의 종통은 보전하고 나라 이름을 바꾼 것이다. (‘부여란 명칭은 초대 단군왕검의 넷째 아들의 이름인데, 초대단군은 아들 부여를 제후국 국왕으로 봉했다. 그 나라의 이름이 부여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학자들은 이를 원시부여라 부른다.) 

 

 

요컨대 ()조선의 국호가 부여(대부여)로 바뀐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명심 또 명심해야 한다. ()조선의 국통은 다름 아닌 부여를 통해 계승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일제식민사학을 답습한 국사교과서에서는 ()조선과 부여가 어떤 관계이며, 또 부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어떻게 국통맥이 이어졌는지를 전혀 알 수 없게 되어있다.

 

 

북부여의 등장

 

()조선 말기인 대부여로 오면서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군권이 독립되고, 진조선의 중앙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군웅들이 할거하며 나라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47대 단군 고열가(高列加) 50여년에 걸친 치세에도 결국 이 혼란을 바로잡지 못하고, 5가 대신들에게 나라를 맡기고 산으로 은거하게 된다.(BCE 238) 이로써 2,096년간의 ()조선은 막을 내리고, 5(五加)에 의한 과도기의 공화정이 실시된다.

 

 

이 무렵 ()조선의 종실(宗室) 사람 해모수가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어나(BCE 239) 세력을 키우면서 6년간 계속된 공화정을 철폐하고 5가 제신들의 추대로 단군조선의 대통을 이어 다시 북부여(北夫餘)’를 건국하게 된다(BCE 232). 이렇게 대부여의 국통은 북부여로 이어진 것이다.  

 

 

해모수는 국가 체제를 그대로 보전하고 나라 이름만 북부여라고 한 것이다. 해모수도 단군으로 호칭했으므로, 해모수 단군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해모수가 북부여라고 나라이름을 정한 데에는, 북부여가 대부여 곧 단군 ()조선의 정통정신과 법통을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역사의식을 나타낸 것이다.  

 

 

 

 

해모수(단군조선의 제후국 고리국 왕손)/고두막한(47대 고열가 단군후손)

 

 

북부여를 계승한 고구려

 

그러면 북부여의 국통은 어디로 이어졌는가? 고구려로 계승되었다.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구려후(高句麗侯) 고진(高辰) 3대손이다. 광개토대왕비에서도 옛날 시조 추모(주몽)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다(唯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天帝之子)” 하여 강한 북부여 계승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단군의 ()조선-북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한민족사의 국통은 삼신문화가 전수된 정신사적인 정통맥일 뿐만 아니라, 직계조상과 후손으로서 혈통줄을 타고 계승된 것이다.  

 

 

드라마 <주몽>에서 보이는 부여는 엄밀히 말해서 동부여이다. 그런데 해부루가 다스렸던 동부여는 드라마에서 이야기하듯 중국의 전한(前漢)과 국경을 맞대고있지도 않았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가질 수도 없었다. 동부여는 가섭원 부여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만주 흑룡강성 통하현(通河縣)에 위치하고 있어 북부여에 의해 막혀 한나라와 교류를 할 수 없었다.

 

 

드라마가 상정하는 그 자리에는 사실 북부여가 자리잡고 있었다.

 

 

 

 

 

역사에서 사라진 인물, 동명성왕 고두막한

 

또 드라마에서 볼 때 전한(前漢)이 매우 강성하여 부여 국내에까지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 역사적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동부여를 떠나온 고주몽은 북부여의 국통을 잇게 되는데, BCE 58년 고무서 단군이 죽자 고주몽이 유명(遺命)을 받들어 즉위하여 고구려를 세웠다. 주몽은 북부여의 6대 단군인 고무서(高無胥)의 둘째딸 소서노와 혼인하여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낳는다. 잘 알려진 것처럼 후일 소서노는 그의 아들 온조와 함께 백제를 건국한다.  

 

 

그러니까 소서노는 드라마에서처럼 거상 연타발의 딸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조 본문에서조차 주몽이 ‘(졸본)부여왕의 둘째 딸과 결혼 후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명시하고 있다. 단지 일설로만 연타발의 딸일 가능성을 주를 달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나라의 국통맥을 치졸하게 끊어놓는 것이다. 연타발은 고구려의 창업공신으로 고주몽을 도와 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BCE 200년경 유방이 한나라를 일으킨 후, 연나라 사람 위만이 한의 세력에 쫓겨 ()조선의 분국인 번조선의 변방으로 피난을 와 있다가 BCE 194년 번조선 왕조를 강탈하게 된다.

 

 

 

 

 고추모의 어머니 유화와 고추모

 

 

이후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 한나라 무제의 침입과 내부 분열로 인해 번조선 위만정권도 막을 내리게 된다.(BCE 108) 한 무제는 계속해서 번조선 일대와 북부여의 서쪽변방으로 침략을 하는데, 이 때 서압록(요하) 사람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가는 곳마다 격퇴하여 민심을 크게 얻게 된다. 고두막한은 또한 ()조선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그는 민심과 혈통을 바탕으로 북부여 4대 고우루 단군을 이어 제위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동명(東明)’이라고 개칭하게 된다.

 

 

따라서 세상에서 말하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은 고주몽이 아니다. 또한 북부여를 창건한 해모수도 아니다. 고두막한이 바로 동명성왕인 것이다. 그가 바로 북부여 5대 단군이며 고주몽의 장인이 된 6대 고무서 단군의 아버지가 된다. 그러니까 소서노의 할아버지인 셈이다.  

 

 

물론 주몽이 동명부여’(졸본으로 도읍을 옮겼기에 졸본부여라고도 함)를 계승하였으므로, 주몽을 동명왕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참고로, 북부여 4대 단군 고우루를 이어 그의 동생 해부루가 5대 단군으로 먼저 즉위하였으나, 고두막한에 쫓겨 동쪽의 가섭원이란 곳으로 나라를 옮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동부여의 시작이다.) 

 

 

고두막한의 태양 같은 의기와 충의에 힘입어 사실상 한나라는 조선의 고토에서 세력을 떨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한나라가 번한의 영토 부근에 한사군(낙랑, 임둔, 현도, 진번)을 설치한 것은 사실이나 고두막한을 필두로 한 민중의 뜨거운 저항으로 조기에 무너지고 만다.

 

 

지금의 국사 교과서에서도 이제 이 한사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혹자들이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된 것으로 기술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이라 할 수 있다. 

 

 

민족사의 맥은 정신사에서

 

이상의 내용은 주로 한민족의 정통도가사서를 묶어 편집한 환단고기 내의 단군세기, 북부여기, 고구려국본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전개한 것이다. 이런 사서들은 한양조선 시대조차 중국에 사대하는 풍토로 인해 금서로 묶여 있었다. 흔히 강단 사학자들이 기존의 역사 서술구도와 맞지 않다는 이유로 맹목적으로 부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조선 시대의 역사 서술의 사정을 무시하는 것이다.  

 

 

한민족의 참역사는 정신사를 알아야 한다. 왜 고주몽 성제는 최초의 연호(年號) 다물(多勿)’이라고 했던가? 다물이란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회복하다’, ‘되물리다는 뜻을 가진 한민족의 고어(古語)이다. 고주몽 성제는 ()조선의 역사적 문화적 영광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의 혈통적 정신적인 연계성을 따지지 않고, 무턱대고 고구려와 고조선이 별개의 나라인 것처럼 서술하는 현재의 역사 기술 풍토는 마땅히 시정되어야 한다.

 

 

한민족의 참 역사는 고조선이 나라를 다스렸던 근본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한민족 역사는 단순히 청동동검과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유물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오늘날과 같이 스테인리스 그릇이 아닌 토기에 음식을 해먹었더라도 오히려 오늘날 인간보다 훨씬 더 수승(殊勝)한 인간적 덕성으로 살고 있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선사(先史)시대라 하여 반 짐승과 동일한 인간으로 보는 현대의 역사 인식도 또한 마땅히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부

(출처: 플러스코리아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9904§ion=section78§ion2=)

 

 

5.2  2014 9 6일 조선일보 "갸름하고, 찢어진 눈 가장 오래된 韓國人 얼굴 찾았다"

 

 

 미네소타 김민구 교수 "2~3세기 夫餘 얼굴상 2점 확인"

머리에 상투 튼 모양 귓불엔 귀고리용 구멍 뚫려

 

 

 

 

부여 2~3세기 금동 얼굴. 높이 17.9. /김민구 교수 제공

 

 

길고 갸름한 얼굴에 위로 쭉 찢어진 눈꼬리, 머리엔 상투를 틀고 귓불을 뚫은 중년 남성.

 

중국 지린성에서 출토된 한 뼘짜리 얼굴상이 고대 한국인 최고(最古)의 얼굴 조형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민구(37) 미국 미네소타대 미술사학과(동양미술) 조교수는 "일제강점기 지린성 지린시 동부 둥퇀산(東團山)과 마오얼산(帽兒山) 일대에서 출토된 금동 얼굴상 2점은 한민족계 고대국가인 부여(夫餘) 2~3세기의 유물"이라고 밝혔다. 최근 발간된 '미술사논단' 38호에 수록된 '부여의 얼굴: 둥퇀-마오얼산 출토의 금동면구(金銅面具)와 그 외연(外延)'이라는 논문에서다.

 

 

김 교수는 "둥퇀-마오얼산 일대는 중국 후한(後漢) 말기 혹은 고구려계 유적일 것이라 막연히 추정했으나 중국 지린성문물고고연구소 등이 최근까지 발굴 조사한 결과 부여의 왕성지(王城址)임이 확인됐다" "금동 얼굴 역시 후한 말기나 훨씬 늦은 시대의 거란계 유물로 추정돼왔으나 출토지가 부여 왕성지로 확인되면서 명실공히 부여의 유물로 확인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이 일대에선 금동 얼굴이 최소 6점 발견됐다. 4점은 일찍 자취를 감췄으나 2점은 중국 뤼순박물관(추정)과 지린성박물관에 각각 전한다. 그나마 국내 학계에선 광복 이후 잊힌 유물이다. 둘 다 얼굴은 갸름하고 인상은 강렬하다 못해 기괴하다.

 

 

 

 

지린성 마오얼산에서 출토된 부여 금동얼굴. 오른쪽은 훼손 전 원형을 추정한 그림. /김민구 교수 제공

 

 

이 중 둥퇀산에서 출토됐다고 전하는 얼굴상의 높이는 17.9. 정수리 부분이 상투를 튼 것처럼 볼록 솟아있고, 귓불에 천공(穿孔·구멍을 뚫은 흔적)이 있어 귀고리를 착용했음을 시사하는 점 등이 고대 한민족 특유의 습속을 보여준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이마의 주름, 벌어진 입, 살짝 내민 혀. 이 얼굴은 관동청박물관(현 뤼순박물관) 1926년 발간한 소장품 도록에 사진이 처음 등장한다. 다른 한 점은 중국 고고학자 리원신(李文信·1903~1982) 1934년 마오얼산 아래 밭에서 발굴했다. 높이 13.8. 지린성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얼굴상의 용도는 뭘까. 김 교수는 마구(馬具)나 무기 등에 장식용으로 장착됐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부여(기원전 2세기 이전~기원후 346)는 철기를 기반으로 이 지역에 최초로 고대국가를 성립한 세력이다. 이들의 문화가 이후 고구려·백제는 물론 바다 건너 왜()에까지 정치·언어·이념·종교 등 다방면으로 계승됐다. 김 교수는 따라서 이 얼굴상은 고대 한국인 자신의 모습이라 할 입체 조형 최고(最古)의 걸작이라고 했다.

 

 

미술해부학 박사인 조용진 얼굴연구소장은 부여족과 연관된 브리야트족의 얼굴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상당히 유사하다. 긴 얼굴에 광대뼈, 홀쭉한 뺨, 얇은 입술 등 북방계 얼굴이라고 했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 고고학) “5~6세기 신라 기마인물형 토기의 얼굴과도 비슷하다. 한국인을 포함한 극동 퉁구스 계통 민족의 공통적 특징을 잘 담고 있는 전형적 북방계 얼굴이라고 말했다. 허윤희 기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9/06/2014090600811.html

 

 

5.3  2018 6 9일 코리아히스토리타임스 부여는 만리장성 북쪽에 있었다

 

오종홍 기자

 

우리 국사교과서에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이 어떻게 들어가 있나 짚어본다.

 

한나라 식민지, 한사군 중 하나인 낙랑군은 어디에 있었나

 

부여는 지금 처럼 길림성, 흑룡강성 일대 만주에 있었나

 

고구려 발상지, 졸본은 과연 만주 환인현인가

 

한나라 군대와 싸운 서안평이 압록강 하구 건너 단동일대였나

 

모두 식민사관에서 나온 것이다

 

 

 식민사관에서 말하는 서안평은 현재 북한 압록강 하구 건너 단동일대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 1차사료인 <요사> 지리지는 중국 내몽골자치구 파림좌기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중국과 일본에 팔아먹는 강단식민사학자들 외에 바른 역사를 찾겠다고 열심히 뛰는 인물들 중에도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인사도 눈에 띈다. '민플러스'라는 진보매체에 연재를 하고 있는 박경순이라는 역사저술가다. 그는 한사군 하나인 현토군, 졸본, 부여, 서안평 등을 식민사관으로 편찬된 국사 교과서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나라 역사는 그 나라 국민정신을 만든다. 특히 국사교과서라는 책을 통해서 국가가 전 국민을 상대로 가르친다면 더욱 그렇다. 더구나 어린 학생들부터 교육한다면 미치는 영향은 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 국사책은 과연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우리 역사 머리부분에 해당하는 상, 고대사가 궁금하다.

 

 

1.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은 어디에 있었나

 

우리 국사교과서는 우리에게는 아주 이질감으로 다가오는 역사를 초반부에 다룬다. 소위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다. 조선(단군) 서쪽 변경 끝자락에서 일어난 아주 작은 일을 마치 우리역사 머리 부분인 양 다루어 주입시키고 있다.

 

 

더구나 그 사건이 본래 일어난 지역이 아닌, 우리나라 북쪽 서북한 지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른바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한사군, 특히 낙랑군 위치다. 낙랑군은 중국 식민통치기관이다.

 

 

일제는 우리역사가 중국 식민통치로 시작했다고 날조했다. 이런 사관이 우리 국사책에 스며 있다. 우리 국사교과서는 우리역사를 축소, 왜곡하여 낙랑군 위치를 현재 북한 평양일대로 본다. 현행 국사책이 이것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보자.

 

 

서기2007년도 교학사 판 중학교 국사교과서 33쪽에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고구려 성장을 얘기하면서, “4세기 초 미천왕 때에는 남으로 대동강 유역을 확보한 후, 요동지역으로 세력을 점차 확대해 나갔다.” 이 표현을 보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4세기 초 북한 평양에 있는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을 몰아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삼국사기> 미천왕조에는 서기313년 낙랑군을 침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아 왔다고 나온다. 이 기록을 왜곡해서 평양에 있는 낙랑군을 고구려 미천왕이 멸망시키고 대동강 유역을 확보했다고 한 것이다. 이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고대사학회라는 단체가 있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를 위시하여 전국 대학교 고대사 전공한 교수들이 회원으로 있다. 이들이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이 부분을 뭐라고 기록하고 있을까. 역시 서기2007년 교학사 판 49쪽을 보자. 삼국정치 발전편 고구려 부분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미천왕 때에 낙랑군을 완전히 몰아 낸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 책에는 아예 낙랑군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미천왕 때 낙랑군을 완전히 몰아냈다는 것은 앞서 밝힌 서기313년에 미천왕이 낙랑군 포로 2천여명을 사로잡아 왔다는 것에 터잡은 말이다. 낙랑군을 완전히 몰아냈다는 것은 멸망시켰다는 말이다. 실제로 한국고대사학회는 멸망시켰다고 한다. 위 중학교 국사교과서와 표현만 달랐지 같은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기록은 결코 낙랑군을 완전히 몰아냈다고 하지 않는다. 그냥 낙랑군 포로 2천여명을 사로잡아왔다고 한다. 이 고등학교 국사책 서술은 북한 평양에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있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가르쳐 준 것을 그대로 받아쓰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낙랑군은 북한 평양에 있었던 것일까. 먼저 낙랑군을 포함한 한사군이 어디에 있었는지 살펴보자. <사기> 조선열전 초반부에 나온다.

 

 

"위만이 망명했다. 무리 1천여 인을 끌고 왔다. 상투를 틀고 만이복장을 해서 동쪽으로 국경을 넘어 패수를 건너 진나라 옛 빈 땅인 상하장에 거주하면서 진번, 조선 만이를 점차 복속했다. 결국 연나라, 제나라 망명자들이 그를 왕으로 삼고 도읍을 왕험이라고 했다."

 

 

"주석8: 색은에 따르면 지리지에서 낙랑에 운장이 있다. 주석9:신찬이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동쪽에 있다."

 

(満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斉亡命者王之都王険. [] []索隠案地理志樂浪有雲鄣. []臣瓚云王険城在樂浪郡浿水之東.사기/조선열전)

 

 

이 기록을 보면 위만이 망명자들과 함께 최종 도착한 곳은 진나라 상하장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연나라, 제나라 망명자들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고 왕험성을 도읍으로 했다. <사기> 조선열전 주석에는 낙랑에 운장이 있다고 한다.

 

 

본문 진나라 옛 공터인 상하장에 한나라가 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낙랑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나라 상하장이라고 했으니 진나라를 벗어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진나라 경계는 진 장성 동단이 기준이다. 진장성 동단은 현재 하북성 난하 동남쪽 갈석산까지다(태강지리지, 진서/지리지, 통전 등)

 

 

특히 <진서> 지리지를 보면 낙랑군이 어디에 있었는지 명확하게 알려 주고 있다. “낙랑은 한나라 때 설치했다. 6개현을 통할하고 있는데 호수는 37백이다. 조선현은 주나라 기자를 봉한 곳이다. 둔유현, 혼미현이 있다. 수성현에는 진나라가 축조한 장성이 일어나는 곳이다. 루방현, 사망현이 있다(樂浪郡漢置. 統縣六, 戶三千七百. 朝鮮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

 

 

낙랑군에는 수성현도 있는데 이 수성현에는 진나라가 쌓은 진장성 곧 만리장성 일어나는 곳이라고 한다. 만리장성 동쪽 끝에 낙랑군 수성현이 있다는 말이다. 만리장성은 동쪽 끝은 현재 중국 하북성 산해관 서쪽이다.

 

 

 <사기> 하본기 주석에는 태강지리지를 인용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태강지리지에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일어나는 곳이다(太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여기에는 보다 명확하게 낙랑군 수성현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만리장성에 이어 갈석산까지 등장한다. 갈석산이 어디에 있는 지 알면 낙랑군 위치도 확인된다. 갈석산은 현재 하북성 난하 동남쪽에 존재한다.

 

 

이런 기록은 이후 나오는 중국 다른 사료에 계속 반복해서 등장한다. 낙랑군이 북한 평양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1천 수백 킬로미터 덜어진 중국 하북성에 있었다는 것이다.

 

 

소위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하북성에 있었다는 것은 그 동쪽은 우리 땅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반도는 물론이고 만주, 현재 요하를 건너 더 훨씬 서쪽까지 우리 역사 강역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일제는 낙랑군을 북한 평양에 갖다 놓음으로써 이 광활한 땅을 모두 중국에 팔아먹었다. 그리고 서북한 지역의 초라한 땅만이 우리역사 강역이라고 왜곡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 국사책이 그대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부여는 어디에 있었나

 

그렇다면 우리 국사책은 부여를 어디에 갖다 놓고 있을까. 앞서 언급한 우리 고등학교 교과서 49쪽을 보면 부여를 길림성, 흑룡강성 일대로 그려놓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사기> 화식열전에 의하면 부여는 연나라 북쪽 인근에 오환과 함께 있다. 부여가 연나라 북쪽에 있다는 얘기다. 연나라는 그럼 어디에 있었는가. 발해와 갈석사이에 있다고 한다.

 

 

발해는 현재 하북성 천진시 바다인근이다. 갈석은 갈석산으로 하북성 난하 동남쪽이다. 부여가 이 연나라 북쪽에 있다고 한다(夫燕亦勃碣之閒一都會也...北鄰烏桓, 夫餘 사기/화식열전).

 

 

 <한서> 지리지에는 부여는 연나라 수도인 계의 북쪽에 있다고 한다. 또 주석에는 구체적으로 부여위치를 말하고 있다. 부여는 장성북쪽에 있는데 현토로부터 1천리 떨어져 있다고 한다(, 南通齊, 碣之間一都會也 北隙烏丸夫餘師古曰:「薊縣, 燕之所都也. , 勃海也. , 碣石也. 師古曰:「訓際是也. 烏丸, 本東胡也, 爲冒頓所滅, 餘類保烏丸山, 因以爲號. 夫餘在長城之北, 去玄菟千里. 夫讀曰扶.한서/지리지)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 동이전에는 부여가 장성 북쪽에 있고 현도군과는 1천여리가 되며 남으로는 고구려, 동으로 읍루, 서쪽으로는 선비와 접하고 있다고 한다. 또 북쪽에는 약수가 있고 방이 2천여리라고 한다(夫餘在長城之北, 去玄菟千裏, 南與高句麗, 東與挹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方可二千裏 삼국지/위서/오환선비동이전).

 

 

부여 위치를 가장 객관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중국 정사인 1차사료에는 일관되게 부여가 장성 북쪽에 있다고 한다. <사기>/화식열전의 연나라 북쪽 부여 위치와 통한다. 그런데도 우리 국사책은 부여가 현재 만주 길림성에 있다고 그려놓고 있다.

 

 

 

 

중국 요령성 조양시 원대자 고분군에서 발견된 벽화다. 묘 주인이 고구려 태왕을 상징하는 백라관을 쓰고 있다. 백라관은 중국 <구당서>, <신당서>에 따르면 고구려 태왕이 쓰는 관이라고 나온다. 똑 같은 벽화가 북한 안악3호분 고구려 벽화묘에서도 발견된다. 벽화에서 주인공이 검은색 모자를 쓰고 있고 그 위 주변에 다시 선으로 투명색 관이 하나 더 쓰여 있다. 이것이 백라관이다.

 

 

4.고구려 발상지 졸본은 어디인가

 

부여에서 고구려가 나왔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일어나 첫 번째 도읍지는 어디일까. 먼저 앞서 언급한 중학교 국사책을 보자. 33쪽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는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나라의 모습을 갖추었다. 고구려의 지배 세력은 부여 계통의 이주민이었으며,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토착민들과 힘을 합하여 나라를 세웠다(기원전37)”

 

 

이번에는 앞서 언급한 고등학교 국사책을 보자. 47쪽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국가 체제를 정비한 것은 고구려였다.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고구려는 1세기 후반 태조왕 때에 이르러 정복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또 같은 책 37쪽에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고구려는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유역인 졸본(환인) 지방에 자리 잡았다. 이 지역은 대부분 큰 산과 깊은 계곡으로 된 산악지대였기 때문에 농토가 부족하여 힘써 일을 하여도 양식이 부족하였다.”

 

 

모두 고구려 발상지를 압록강 근처로 비정하고 있다. 고등학교 국사책은 이곳을 졸본성이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졸본성이 압록강 인근이라고 한 점이다. 고구려가 이 언저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보다 자세히 말하면 현재 만주 환인현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졸본성이 이곳에 있었을까. 졸본은 다른 말로 흘승골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현재 요하 서쪽 조양시 인근 의무려산 일대로 나온다. 여기가 고구려 중심지라는 소리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자.

 

 

"<통전>에 의하면 주몽이 한나라 건소2년경에 북부여에서 동남으로 가서 보술수를 건너 홀승골성에 살았다. 나라 이름을 구려라고 하고 고를 씨로 삼았다. <고기>에 이르길, 주몽이 부여에서 도망 나와 졸본에 이르렀는데 곧 홀승골성이다. 졸본과 비슷한 곳이다."

 

 

"옛날에 대요가 망하지 않았을 때 요나라 황제가 연경에 있었는데 우리 조빙자들이 동경을 지나 요수를 건너 하루 이틀에 걸쳐 의주醫州(의무려산이 있는 주)에 이르렀다. 이어 연나라 계로 향했다. 이러한 이유로 (졸본=홀승골성이 의무려산이라는)그 사연을 알게 되었다. 주몽이 홀승골성을 도읍으로 했다."

 

"按通典云: “朱蒙以漢建昭二年, 自北扶餘東南行, 渡普述水, 至紇升骨城居焉. 號曰句麗, 以高爲氏.” 古記云: “朱蒙自扶餘逃難, 至卒本.” 則紇升骨城卒本, 似一處也. 昔大遼未亡時, 遼帝在燕景=燕京, 則吾人朝聘者, 過東京涉遼水, 一兩日行至醫州, 以向燕薊, 故知其然也. 自朱蒙立都紇升骨城삼국사기/지리지."

 

 

 <삼국사기> 기록이 진실하다는 것은 앞서 중국 1차사료에 나오는 부여위치를 볼 때 확인된다. 앞서 부여위치가 중국 진나라 만리장성 북쪽에 있었음을 확인했다. 이것이 진실하다는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태왕과 태조태왕 때 일어난 사건으로도 증명된다. 모본태왕은 중국 산서성 태원까지 진격하여 한나라를 정벌한다. 그리고 다음 왕 때 요서에 10개성을 쌓는다.

 

 

고구려본기2 모본왕 2, , 군대를 보내 한나라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했다高句麗本紀2-慕本王-2年 二年, ,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삼국사기/고구려본기)”

 

 

고구려본기2 태조대왕3, 2월 요서에 10개성을 쌓아 한나라 병력에 대비했다(高句麗本紀3-大祖大王-3, 三年,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지금으로 말하면 난하 동쪽 하북성 까지 고구려 강역이었다는 소리다. 그러니 고구려 중심지는 당연히 요하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조양시 부근에서 안악3호분과 같은 양식의 무덤이 발굴되기도 했다. 벽화도 고구려 태왕들 모습을 하고 있다.

 

 

북한에 있는 고구려 안악3호분 벽화다. 주인공이 검은색 모자를 쓰고 있고 그 주위에 선으로 그려진 관을 하나 더 쓰고 있다. 이것이 요하 서쪽 조양시 원대자묘에서 발견된 벽화묘의 주인공 백라관과 같은 것이다. 고구려 판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직접 1차 사료다. 현재 요하 건너 서쪽, 조양시 동쪽에 위치한 의무려산 일대가 고구려 발상지 졸본으로 나온다. 왜 이 서쪽에서 고구려 태왕 묘로 보이는 원대자 유적이 나왔는지 알 수 있다. 사료와 고고유적이 맞아 떨어지는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5. 서안평은 어디인가

 

서안평은 우리 고대사에서 주요한 지명이다. 서안평이 어디냐에 따라 고구려 판도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식민사관에서는 서안평이 현재 압록강 하구 건너편 중국 단동일대라고 한다. 서안평이 여기라고 한다면 고구려는 이 서안평을 두고 중국 한나라와 전쟁을 벌인다. 고구려 땅이 여기에도 못 미친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중국 내몽골자치주라고 파림좌기라고 한다면 그 동쪽은 고구려 땅이 된다. 서안평을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크게 달라진다. 서안평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태왕조, 동천왕조에 등장한다. 태조태왕조에는 서기146 "가을 8월에 왕이 장군을 파견하여 한나라 요동서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처자를 약탈하여 얻었다(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고 한다.

 

 

이 얘기는 중국 <후한서> 동이열전에도 나온다(,桓之閒, 復犯遼東西安平,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양쪽 사료가 교차 검증이 되니 역사사실로 믿어도 될 것이다.

 

 

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조에도 서기242년에 서안평을 왕이 장군을 파견하여 요동서안평을 파괴했다고 한다(王遣將 襲破遼東西安平). 이 기록들은 하나 같이 '요동서안평'이라고 한다. 서안평이 요동이라고 한다. 압록강 하구 단동이 요동이라는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다. 지금 따져 보아도 요동은 현재 요하 동쪽 언저리를 나타낸다.

 

 

이 기록들을 볼 때 서안평을 기준으로 당시 고구려와 한나라가 국경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안평은 <요사>지리지, 상경부편에 의하면 임황부에 있다고 하는데 이곳은 현재의 내몽골 자치주로 나온다. “상경도상경 임황부는 본래 한나라 요동군 서안평 땅이었다. 신나라 왕망이 북안평이라고 했다(上京道上京臨潢府, 本漢遼東郡西安平之地. 新莽曰北安平.요사/지리지/상경부).

 

 

위 기록을 종합해 보면 고구려 당시 요동은 현재 요하를 건너 현재 내몽골 자치주 파림좌기 언저리라는 얘기다. 이렇게 기록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 가면 고구려 윤곽이 나온다. 판도가 그려진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머릿속에 고구려 판도를 현재 요하 이동 만주지역으로 그리고 있다. 이러한 지리비정은 모두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일제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반도사> <조선사> 및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내놓은 책이나 논문이 다 이런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이 식민사관을 현재 우리나라 거의 모든 학자들이 따르고 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역사관련 책들이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6. 정부가 나서서 역사 바로 잡아야한다

 

일제는 우리나라 역사 강역과 시간을 축소해서 반도로 가두어 놓았다. 모두 조작 날조한 것이다. 중국 1차사료에 뻔히 역사진실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부정적인 내용만 뽑아다가 역사를 구성했다. 그 때는 이것이 통했다. 그러나 서기21세기 지금 모든 정보가 공개되고 있고 손가락 몇 번만 두들기면 모든 1차사료가 바로 뜬다. 지금은 정보통신이 고도로 발달해서 모든 사료가 개방되어 있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식민사관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버젓이 거짓된 역사를 국가가 앞장서서 전 국민에게 국사교과서를 통해서 주입시키고 있다. 일제식민지 노예사관으로 여전히 일본에 예속시키고 있다.

 

 

해방 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 부역한 이병도, 신석호 등 친일사학자들이 우리 역사학계를 장악했다. 이들이 식민사관으로 우리 국사책을 만들었다. 우리 국사책은 아직도 일제 조선총독부 지배를 받고 있다.

 

 

수 많은 적폐가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우리 정신을 지배하는 역사적폐가 가장 심각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혼돈 속에서 가치관을 상실한 채 헤매고 있다. 모두 일제식민사관의 후유증이다. 이제 실상을 바로 알고 정부가 나서서 바로잡아야 할 때다. 오종홍 기자

(출처; 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2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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