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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4. 조선 4.12〈고조선의 중심지는 어디? 강단사학과 재야사학 패수(浿水) 위치 놓고 격론〉~4.13 〈<진짜고대사>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 하북성 북경에 .. 본문

지음/《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4. 조선 4.12〈고조선의 중심지는 어디? 강단사학과 재야사학 패수(浿水) 위치 놓고 격론〉~4.13 〈<진짜고대사>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 하북성 북경에 ..

대야발 2024. 2. 18.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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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4. 조선

4.12 2016 6 23일 조선pub 고조선의 중심지는 어디? 강단사학과 재야사학 패수(浿水) 위치 놓고 격론

이상흔 조선pub 기자

 

『동북아역사재단, 고조선의 영토 찾기 토론회 개최

 

 

 

 

 

6 21일 동북아역사재단 주최로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언론회관에서 '고조선과 한의 경계 패수는 어디인가?'라는 주제로 상고사 토론회가 열렸다. 왼쪽부터 박준형 박사(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김종서 박사(한국과 세계의 한국사교육을 바로잡는 사람들의 모임), 공석구 한밭대 교수(사회자), 심백강 박사(민족문화연구원), 이후석 박사(숭실대).

 

 

고대 고조선(古朝鮮)과 한()나라의 국경선 역할을 했던 패수(浿水)’가 어디인지를 고증하는 역사학계의 토론회가 열렸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 6 2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소위 강단사학과 재야사학계의 대표 주자들을 불러 고조선과 한()의 경계, 패수는 어디인가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 한나라가 요동의 옛 국경 요새를 수복하여 패수에 이르러 경계를 삼고 연에 소속시켰다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패수가 과연 어디인가 하는 것은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한사군(漢四郡)의 위치만큼 역사학계의 뜨거운 논쟁거리다.

 

 

강단사학이 패수를 보는 시각은 대체로 이병도의 청천강 패수설 노태돈의 압록강 패수설’, 그리고 혼하(渾河) 패수설로 정리될 수 있다. 이 가운데 혼하 패수설은 비교적 최근에 제기된 강단사학의 이론으로 오늘날 요녕성(遼寧省)에 있는 요수(遼水: 요하)의 동쪽에 흐르는 혼하를 패수로 보는 시각이다. 결국 요수(요하)를 기준으로 그 동쪽(요동)과 한반도를 우리 민족의 활동 영역으로 인식하는 시각이다.

 

 

혼하 패수설은 강단사학계에서도 고조선의 강역을 가장 서쪽으로 요동까지 넓게 확대해서 보는 시각으로, 기존의 한반도 패수설에 비교하면 한결 진일보한 시각이다. 하지만 민족사학계에서는 혼하 패수설도 결국 강단사학 이론의 연장선에 있으며, 그 논리가 한사군 한반도설과 대동강 낙랑설에 기초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재야사학 혹은 민족사학계는 패수의 위치를 오늘날 요수 서쪽의 대릉하(大凌河), 북경 동쪽에 있는 난하(灤河)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물론 민족사학자 가운데 대릉하나 난하 보다 더 아래쪽(서남쪽) 지역을 패수로 보는 이도 있다(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

 

 

동북아역사재단 토론회에서 김종서 박사(한국과 세계의 한국사교육을 바로잡는 사람들의 모임), 박준형 박사(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이후석 박사(숭실대), 심백강 박사(민족문화연구원)가 토론자로 나섰다.

  

 

결론부터 요약하면 김종서 박사는 패수의 위치를 난하로 지목했고, 박준형 박사는 혼하 패수설을 주장했다. 이후석 박사는 고고학적 증거를 근거로 패수가 오늘날 요하 이동지역에 있었을 것이라고 비정했다. 심백강 박사는 오늘날 하북성 보정시(수성진) 일대가 고조선의 서쪽 경계였기 때문에 이 일대에서 패수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론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다.

 

 

 

 

산해경에 기록된 조선의 위치. 산해경 해내경에는 동해 안쪽의(東海之內) 북해(발해) 모퉁이에(北海之隅) 이름을 조선이라고 일컫는 국가가 있다(有國名曰朝鮮)’라는 기록이 있다. / 김종서 박사

 

  

 

"한사군의 위치 고증으로 볼 때 패수는 북경 부근의 난하"

 

김종서 박사, 한국과 세계의 역사교육을 바로 잡는 사람들의 모임

 

이병도는 중국의 가장 오랜 지리서 산해경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산해경을 중국의 가장 오래된 지리서라고 평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병도를 비롯한 고조선·한사군 재() 한반도설 논자들은 정작 고조선이 발해의 북쪽, 영정하(永定河) 유역으로부터 요하(遼河) 서안(西岸)까지 사이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산해경의 여러 기록을 철저히 배척하거나 그 내용을 왜곡하여 왔다.

  

 

산해경에 고조선의 영역이 요하의 동쪽에 한정되고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자신들의 학설에 반하는 여러 기록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산해경 해내경에는 동해 안쪽의(東海之內) 북해(발해) 모퉁이에(北海之隅) 이름을 조선이라고 일컫는 국가가 있다(有國名曰朝鮮)’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중국의 동쪽 바다(발해·황해·동중국해)’ 중에서도 북쪽 바다(발해)’의 모퉁이에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말이다.

 

 

이 기록을 현재의 지명으로 옮기면 중국의 동쪽 바다 중에서도 북쪽 바다인 발해(북해)의 모퉁이 지역 중에서도 영정하의 동쪽으로부터 요동반도의 서부 지역에 이르는 지역에 조선(朝鮮)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로 풀이된다.

 

 

사기를 쓴 사마천(司馬遷)은 서기 전 109년부터 108년까지 1년간 벌어진 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을 직접 지켜본 사람이었고, 한나라 태사(사관)들의 우두머리인 태사령으로서 한나라와 조선과의 전쟁의 발발, 전쟁의 진행, 전쟁처리 등을 모두 지켜보고 조선열전(朝鮮列傳)’을 통해 기록을 남긴 사람이다. 패수는 한나라 육군과 조선의 수비군이 오랫동안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인 강이다. 때문에 사마천이 패수에 대하여 남긴 기록은 아주 정확할 것이다.

 

 

그 사마천이 한나라가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았다라고 하였으니 패수는 요동의 옛 요새와 바로 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만이 무리 1,000여명을 모아서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나가 패수(浿水)를 건넜다라고 하였으니 패수는 요동의 요새에서 동쪽으로 건너는 강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압록강이나 청천강 하류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너는 강이 아니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건너는 강이다. 따라서 압록강이나 청천강은 패수가 될 수 없다.  수경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흘러나와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패현을 지나서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패수가 기록된 설문해자》 《수경》 《한서의 기록은 청천강(혹은 압록강)이 패수라고 주장해온 고조선·한사군 재 한반도설 논자들의 주장이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청천강이나 압록강은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는 강으로, 동남쪽으로 흐르는 구간도 없고, 동쪽으로 흐르는 구간도 없기 때문이다.

 

 

한나라와 조선의 국경은 패수였고, 조선과 경계를 마주한 한나라의 군은 요동군이었다. 모든 기록과 지리적 위치 등을 세밀하게 고증해본 결과 당시의 기록을 충족시키는 패수는 난하나 난하 서쪽의 강이다.

  

 

 

 

기원전 3~2세기 무렵의 고조선 중심지와 서쪽 경계 변화도. 박준형 박사는 연의 공격으로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지역에서 한반도 서북부 지역으로 이동함으로써 패수의 위치도 이동하고 한자 표기도 달라졌다고 주장했다. /박준형 박사

 

 

"패수는 소요수로 불린 혼하(渾河)가 틀임없어"

 

박준형 박사, 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패수의 위치와 관련해서 청천강설, 압록강설, 대릉하설, 난하설 등 등 이미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견해가 제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기 조선열전’,한서 지리지’, 위략,수경주등 관련 사료에 보이는 패수의 위치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염철론(鹽鐵論) 주진편(誅秦篇)’에는 ()이 이미 천하통일한 후에 동으로 패수(沛水)를 넘어 조선을 멸망시켰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진이 패수(沛水)를 건너서 고조선을 공격하였다는 점이다.

 

 

사기 조선열전에 의하면 위만이 패수(浿水)를 건너 진고공지상하장(秦故空地上下鄣)에 머물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진대에 패수(浿水) 이동지역이 진의 요동군에 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으로 이것은 진의 공격 이전에 이 지역이 고조선의 영역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기 흉노열전에는 진한교체기 영토를 확장한 흉노가 동쪽으로 예맥·고조선과 접하게 되었다(東接穢貊朝鮮)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고조선은 한과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은 패수를 중심으로 그 서쪽에는 한과 북쪽에는 흉노와 접경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로써 한은 패수를 경계로 위로는 흉노를, 동쪽으로는 고조선·예맥을 동시에 상대해야만 했다.

 

 

사기조선열전에서는 멀고 지키지 어렵다는 이유로 다시 요동의 고새를 수리하고 패수를 경계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고조선에게 연의 동쪽 땅을 빼앗긴 것을 한의 입장에서 수사적(修辭的)으로 표현한 것이다. 결국 진한 교체기에 고조선이 패수 이동지역인 진의 옛 공지(空地)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패수 혼하설(渾河說)에 주목한다. 이 설은 비교적 최근에 제기된 견해로 기존의 연구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전한기(前漢紀)의 패수 관련 사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전한기는 후한 헌제가 한서의 문장이 번잡하고 읽기가 난해하다하여 198년 기전체의 한서를 1/4분량의 편년체인 전() 한기(漢紀)로 편찬케 한 것이다.

 

 

이 전한기 효무황제기에 고조선과 한의 경계를 시사하는 요수(遼水)가 언급되어 있다. 전한기 에서는 요수(遼水)를 새()로 삼았다고 했다. 요수에 대해서 수경주에는 대요수(大遼水)와 소요수(小遼水)가 있는데 기록을 토대로 보면 대요수는 오늘날 요하(遼河)이며 소요수는 혼하(渾河)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는 패수(沛水)는 새외(塞外)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패수(沛水)는 오늘날 요하(대요수)가 아닌 혼하(소요수)의 흐름과 일치한다. 따라서 전한기의 요수는 오늘날 혼하임을 알 수 있다.

 

 

심백강 원장이 주장하는 우리 민족의 주 활동지인 고대의 요서지역(고조선과 낙랑군의 중심무대). 고조선의 영토는 수성진의 갈석산(백석산과 낭아산) 일대까지 이어진다. 심 원장은 패수도 당연히 서쪽 경계선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백강 박사

  

 

요녕성의 혼하가 고조선의 패수가 될 수 없는 7가지 이유

 

심백강 박사, 민족문화연구원

 

1) 고대의 요수는 현재의 요하와는 다른 강이다.

 

요수라는 명칭은 산해경에 최초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요수는 위고 동쪽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발해에 주입된다.” 하지만 현재 요녕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요하는 동남쪽으로 흘러 발해에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서남쪽으로 흘러 발해에 주입된다. 따라서 산해경에 나오는 요수의 흐르는 방향을 통해서 본다면 고대의 요수는 오늘날의 요하와는 전혀 다른 강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 혼하의 발원지 백두산맥 서쪽이 한나라의 북방 변경이 될 수 없다.

 

혼하의 발원지는 요녕성 무순시 청원현 곤마령(滚馬嶺)이다. 즉 백두산의 지맥인 곤마령 서쪽에서 혼하가 발원한다. 수경주에 소요수를 설명하면서 물이 북쪽 변방 밖에서 발원한다(水出北塞外)”라고 말했는데 오늘날의 백두산이 과연 한나라 당시의 북쪽 변방이 될 수가 있겠는가. 한나라의 북새 즉 북방 변경은 산서성과 하북성, 그 북쪽 내몽고 일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북쪽 변방 밖에서 발원한다는 소요수를 오늘의 백두산 지맥인 곤마령 서쪽에서 발원한 혼하로, 그리고 그것을 다시 패수로 간주한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3) 패수는 북방에서 발원한 강이고 혼하는 동북방에 위치한 강이다.

 

상흠의 수경에서 패수는 낙랑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수경에 말한 패수는 물의 흐르는 방향으로 볼 때 현재의 요하가 아니라 산해경 동남쪽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간다라는 요수와 동일한 강임을 알 수 있다.

 

 

4) 고조선의 중심지로 본 패수는 혼하가 될 수 없다.

 

고조선은 평양, 아사달, 장당경 등의 도읍지가 있었는데 이 중에 2000년 동안 고조선 왕조의 중심지가 된 곳은 아사달이었다. 고조선 왕조의 중심지였던 아사달은 현재의 요녕성 조양시(朝陽市)로 이곳이 바로 고조선 시대의 아사달이었다고 본다. 아사달은 아침의 땅이라는 우리말이고 조양에서 는 아침, 은 양달을 뜻하는 한자로서 우리말을 한자를 빌어 뜻으로 표기한 것이다.

 

 

그리고 조양시는 지리적으로 내몽고 적봉시의 홍산, 건평, 능원 등 홍산문화, 하가점하층문화 유적지와 인접한 지역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비파형동검은 고조선의 영토범위를 추정하는데 있어 결정적 증거가 되는 유물인데 지금까지 비파형동검이 가장 많이 출토된 곳은 요서지역, 특히 조양시를 중심으로 한 일대이기 때문이다.

 

 

5) , , 한의 동쪽 경계로 본 패수는 혼하가 될 수 없다.

 

고조선 왕국의 강역을 살피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은 연나라의 동쪽 위치이다. 사기 소진열전 연나라 동쪽에 조선, 요동이 있다라고말했다. 그러므로 연나라의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면 고조선의 위치를 쉽게 알 수가 있다.

 

 

강단사학은 그동안 압록강 서쪽이 모두 연나라 땅이고 그 동쪽 대동강 유역에 고조선이 있었던 것으로 잘 못 이해해 왔다. 그러나 소진의 말에 따르면 연나라는 하북성 서남쪽에 나라가 있었고 하북성 동남쪽에는 고조선이 있었던 것이다. 고조선의 서쪽 강역은 연, , 한 대를 거치면서 줄곧 하북성 동남쪽을 포괄하고 있었으며, 동쪽으로 후퇴한 사실이 없다. 그렇다면 동북 길림성 백두산맥에서 발원한 혼하가 고조선의 서쪽 경계의 패수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6) 한의 요동군으로 본 패수는 혼하가 될 수 없다.

 

진시황 시대에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 5군을 설치했다. 주목할 것은 그동안 강단사학이 주장해 왔던 것과 달리 한나라 때 설치한 동북방 5군의 군현이 모두 현재의 하북성 북쪽과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이 모두 하북성을 중심으로 그 북쪽과 서쪽, 동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요동군만 홀로 수 천리를 뚝 떨어져 외로운 섬처럼 압록강 주변에 위치하고, 그 요동군 동쪽 대동강유역에 다시 고조선이 존재할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7) 낙랑군 수성현으로 본 패수는 혼하가 될 수 없다.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여기가 장성의 기점이다(樂浪遂城縣 有碣石山 長城所起)”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서 말한 낙랑군 수성현으로서 충족시켜야 할 세 가지 조건, 즉 수성현, 갈석산, 장성의 기점을 모두 구비하고 있는 곳은 현재의 하북성 남쪽 수성진이다. 고조선의 서쪽 경계가 먼저 고증된 후에 패수를 찾는 것이 순서다. 그렇게 볼 때 패수는 당연히 수성진이 있는 하북성 동쪽에서 찾아야 한다. 현재 요녕성의 요하 동쪽에 위치한 혼하가 고조선의 패수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춘추전국시대에서 당나라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한족 정권의 동북방 국경은 오늘의 하북성 동남쪽을 넘지 못했다. 이때의 요수는 현재의 요하가 아니라 하북성에 있던 요수이고, 이때의 요서, 요동은 현재 요하의 동서쪽이 아니라, 하북성에 있던 요수의 동쪽과 서쪽을 가리킨 것이다. 이상흔 조선pub 기자

(출처;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mcate=M1004&nNewsNumb=20160620672&nidx=20673&dable=10.1.4)

 

 

4.13  2017 10 1일 코리아히스코리타임스 <진짜고대사>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 하북성 북경에 있었다. 강단식민사학 가소로운 아이들과 <한겨레21>은 조선총독부 역사관 대변인들인가

 

 : 김 봉 렬 고조선으로 가는 길저자

 

『<진짜고대사>낙랑군은 하북성 북경에 있었다(1)

 

사료 몰이해로 엉뚱한 주장을 하는 강단식민사학자들

올바른 역사 연구를 위해 조선총독부의 식민노예사관을 벗어나야

 

 

<한겨레 21>은 지난 6 21일자 기사에서 국조 단군의 초상화와 민족의 성지인 백두산 사진을 표지에 내세워놓고 사이비역사학의 역습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리고 편집장 길윤형은 국뽕 3각연대라는 칼럼을 통해 정치인들과 역사학자는 물론 독립운동가 후손들까지 공개적으로 모독하고, 조롱했다. 최근에는 <진짜 고대사>라는 제목으로 강단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역사적 사실인양 기사화 하고 있다. 엊그제 8 9일자에는 자칭 젊은역사학자 모임 연구자라는 기경량의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는 글을 실었다. 한겨레의 친일매국행위가 도를 넘고 있다. 기경량의 글을 반박한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3995.html 참조

 

 

기경량과 강단사학계에 묻는다.

 

1. 낙랑국과 대방국의 위치는 어디인가?

2.삼국지의 고구려 강역 사방 2천리는 어디에 있는가?

3.진서는 서진의 평주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 우북평지역이라고 하였다. 이들 지역의 위치가 하북성인가? 한반도인가?

 

 

 

 

 <지도 1> 필자가 비정한 낙랑군 위치

 

 

삼국지에 기록된 3세기 무렵의 동아시아 정치체들의 위치. 당시 한반도 북부에는 한민족의 낙랑국과 대방국이 존재하였고, 하북성 북경일대에는 중국 군현인 낙랑군과 대방군이 존재하였다. 특히 당시 고구려의 강역은 사방 2천리였다. 고구려의 동쪽에 옥저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고구려의 강역이 동서로 2천리가 되려면 고구려의 서쪽 국경은 현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까지 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중국 군현의 가장 동쪽인 요동군은 하북성 지역을 넘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 정사인 진서에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 강단 식민사학계는 요동군을 요령성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그렇게 비정하면 요동군의 동쪽에 위치한 고구려의 강역은 삼국지에 기록된 사방 2천리는 고사하고 사방 800리도 나오지 않는다. 강단 식민사학계는 고구려의 강역을 1/5이하로 왜곡축소하고 있는 것이다. 지하에 계신 고구려의 선조들이 통곡할 일이다.

 

 

1. ‘낙랑군 평양설=식민사학 도식은 당연하다.

 

기경량은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 낙랑군 평양설로 인식했으며,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 다산 정약용 등 수많은 실학자들도 낙랑군 평양설을 주장했다. 낙랑군 평양설은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이 하루아침에 뚝딱 만든 왜곡의 산물이 아니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수많은 기록이 존재하며 기나긴 우리 역사에서 오랫동안 통설로 공인돼왔다. 그렇기 때문에 낙랑군 평양설=식민사학 도식은 철저히 허위다.”

 

 

강단사학계는 식민사학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기분이 나쁜 모양이다. 그래서 자기들이 주장하는 낙랑군 평양설이 고려시대부터 오랫동안 통설로 공인되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그렇까?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낙랑군 평양설로 인식한 것은 사실이나, 여기서 평양은 고려 서경을 가리킨다. 고려 서경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특히 최근 인하대 고조선연구소에서 국책사업으로 고구려 평양성을 찾는 연구를 하면서, 고구려 평양성이자 고려의 서경은 현 요령성 요양시 일대라는 수많은 사료를 제시한바 있다.

 

 

평양이라는 지명은 여러 곳에 있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 삼국유사 낙랑군 평양설을 현 강단사학계가 주장하는 낙랑군 한반도 평양설과 같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또 조선 초의 권람을 시작으로 조선 중.후기의 홍여하, 이익, 신경준, 박지원을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은 낙랑군 재요동설을 주장해왔다. 그러므로 낙랑군 재평양설 기나긴 우리 역사에서 오랫동안 통설로 공인돼왔다는 기경량의 주장은 거짓이다.

 

 

낙랑군 평양설을 통설로 대못을 박은 것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였다. 조선총독부는 한반도 식민통치를 쉽게 할 목적으로 실증사학을 빙자하여 점제현신사비, 효문묘동종, 와당, 봉니 등의 유물들을 조작하여 한반도 평양을 한나라 낙랑군지역으로 역사왜곡하였다. 그리고 해방 후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은 친일부역자들을 청산하지 못하였고,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부역했던 식민사학자 이병도, 신석호 및 그 제자들이 학문권력을 장악하고 낙랑군 평양설을 확대 재생산 하고 있다.

 

 

그들은 학문권력을 이용하여 조선총독부의 식민노예사관을 국검정 역사교과서의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으로 정함으로써 올바른 우리 역사가 밝혀지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도 교육현장에서는 대한민국 국민의 혈세로 일제 식민사학과 중국 동북공정의 동조자를 양산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 64일자에 기경량, 안정준, 김재원 등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제목은 도종환 후보자님 위대한 상고사는 안 됩니다.”라는 것이다. 담당 기자가 지도 사업에서 논란이 됐던 낙랑군 위치 문제는 어떻게 보나.”라고 물었다.

 

 

안정준 :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는 건 우리뿐 아니라 제대로 된 학자는 모두 동의한다. 100년 전에 이미 논증이 다 끝났다. 바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김재원 : “100년 전이라 하니까 자꾸 친일 사학 소리 듣는다. 하하.”

기경량 : “그러면 200년 전 조선 실학자들이 논증을 끝냈다라고 하자.”

 

 

위의 인터뷰에는 강단사학계의 관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낙랑군 평양설 100년 전에 이미 논증이 다 끝났다는 것이다. 100년 전이면 3.1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 설 무렵이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꺽고 식민통치를 쉽게 할 목적으로 실증사학을 빙자하여 점제현신사비, 효문묘동종, 와당, 봉니 등의 유물들을 조작하여 한반도 평양을 한나라 낙랑군지역으로 역사왜곡하여 통설로 확정하였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 강단사학계에서 낙랑군 평양설을 주장하는 핵심근거는 조선총독부가 일방적으로 발굴조사하여 발표한 낙랑 유물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낙랑군 평양설=식민사학이라는 비판을 하는 것이다. 강단사학계가 이러한 비판을 듣기 싫다면 조선총독부가 왜곡한 낙랑 유물이 아니라 낙랑군 평양설을 인정할 만한 다른 사료들을 제시하면 될 일이다. ‘낙랑군 평양설=식민사학 도식은 당연한 것이다.

 

 

2. 낙랑군이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는 1차 사료는 많이 있다.

 

기경량은 2015 11 16일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동북아특위) 주최로 열린 한국 상고사 대토론회: 한군현 및 패수 위치 비정에 관한 논의 학술대회에서 이덕일 소장이 한서 후한서의 주석을 1차 사료라고 한 말실수를 가지고 장황한 비판을 늘어놓고 있다. 하지만 낙랑군 하북성설을 뒷받침하는 1차 사료들은 많다. ‘낙랑군 하북성설 1차 사료를 몇 가지만 살펴보자.

 

 

1. 회남자

 

동방의 끝은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지나고 대인국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해가 뜨는 부목의 땅에 이른다(東方之極, 自碣石山, 過朝鮮, 貫大人之國, 東至日出之次, 榑木之地.).” 회남자』「시칙훈

 

 

갈석산은 요서계 바다의 서쪽 해변에 있다. 조선은 낙랑현이다(碣石在遼西界海水西畔, 朝鮮樂浪之縣也).” 회남자』「시칙훈(고유 주)

 

 

회남자는 한 고조 유방의 손자인 회남왕 유안(劉安, ? ~ BC 123)이 편찬한 백과사전의 일종이다. 위만조선이 존재하던 시기에 편찬된 책이므로 회남자의 기록은 위만조선에 대한 생생한 1차 기록이다.  회남자의 글에 동한시대 학자인 고유가 주석을 달았다. 고유 역시 낙랑군이 존재할 때의 학자이다. 회남자와 고유의 주석을 통하여 갈석산으로부터 한나라 낙랑군 낙랑현(조선현)을 지나는데, 갈석산이 요서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낙랑군 낙랑현(조선현)이 요서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2. 산해경

 

동해의 안쪽과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조선이라 한다. 조선은 천독天毒이다.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고 사람을 존중하며 사랑한다(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산해경18, 해내경

 

 

곽박이 말하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군이다(郭璞云 朝鮮今樂浪郡也).” 산해경18, 해내경(곽박 주)

 

 

산해경은 선진시대의 지리서로 조선이 존재하던 시기의 1차 사료이다. 조선이 중국 동해의 안쪽에 있다고 하였다. 중국의 동해 안쪽은 현 중국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등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조선(낙랑군)은 중국의 동해안 지역에 있었다.

 

 

3. 잠부론

 

옛날 주 선왕 때 역시 한후가 있었는데 그 나라는 연나라 가까이 있었다. 시경에 이르기를 커다란 저 한성은 연나라 백성들이 쌓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한의 서쪽에서도 역시 성을 한이라 하였는데, 위만에게 정벌당하여 해중海中으로 옮겨가 살았다(昔周宣王亦有韓侯其國也近燕故詩云普彼韓城燕師所完. 其後韓西亦姓韓, 爲魏滿所伐遷居海中).” 잠부론권제9, 지씨성제35

 

 

“(상략)...성수는 또 동남쪽으로 한성의 동쪽을 지난다. 시경』「한혁장에 이르기를 저 커다란 한성은 연나라 백성들이 쌓았네. 왕께서 한후에게 추와 맥을 주시니 북쪽 나라를 모두 맡았네.”라고 하였다. 정현은 말하기를 주나라가 한후를 봉하니 한성에 거하여 후백이 되었다. 험이의 핍박으로 점점 동쪽으로 이동하였다.”고 하였다. 왕숙은 말하기를 지금 탁군 방성현에 한후성이 있다. 세상에서는 한호성이라 이르는데 옳지 않다.”고 하였다...(중략)...성수는 또 동남쪽으로 흘러 거마하로 들어가므로 바다에는 이르지 못한다((上略)...聖水又東南逕韓城東, 詩韓奕章溥彼韓城, 燕師所完, 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鄭玄曰周封韓侯, 居韓城為侯伯, 言為獫夷所逼, 稍稍東遷也. 王肅曰今涿郡方城縣有韓侯城, 世謂之寒號城, 非也...(中略)...又東南流注于巨馬河而不達于海也).” 수경주12, 성수

 

 

잠부론은 후한 사람 왕부(王符, 85?~ 162)가 저술한 책이므로 낙랑군이 존재하던 시기의 1차 사료이다. 잠부론에서 그 후에 한의 서쪽에서도 역시 성을 한이라 하였는데, 위만에게 정벌당하여 해중海中으로 옮겨가 살았다.”는 구절을 통하여 고조선의 왕검성이 한성韓城의 서쪽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는데, 수경주등에 의하면 한성韓城은 탁군 방성현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하북성 탁군 방성현의 서쪽에 위치하였다.

 

 

이와 같이 낙랑군이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는 1차 사료는 여럿 있다. 그리고 이덕일 소장이 한서 후한서에 붙은 주석을 1차 사료라고 한 말은 잘못이지만, 주석들이 1차 사료가 아니라고 중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서 후한서를 주석한 당나라 시대의 사람인 안사고나 이현 등은 모두 중국 정사에 정통한 당대의 대학자들로서 중국 군현인 낙랑군의 위치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학자들이었다.

 

 

이들보다 500년 후의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나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또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의 주장보다는 훨씬 비중 있는 사료들이다. 이덕일 소장이 제시하는 사료들이 낙랑군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으며, 어떻게 우리 역사를 올바로 밝히는데 활용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기경량처럼 그것이 1차 사료냐? 2차 사료냐? 하는 말실수를 물고 늘어지는 것은 토론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망각한 것으로 우리 역사를 올바로 밝히는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2부에서 계속). 김봉렬

(출처; 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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