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5. 여러나라시대

5.12 '제 4 제국'의 흔적을 찾아서

입력 2007. 7. 3. 15:50수정 2007. 7. 3. 15:50

에가미 나미오라는 일본학자가 있었다. 그는 고대 일본 민족의 원형이 북방에서 한반도를 거쳐 내려온 기마민족이라고 주장하면서 한국과 일본에서 심심찮게 출토되는 북방계 유물이 그 증거라고 이야기했다.

그의 주장대로 옛 금관가야의 수도였던 김해지역에서는 북방계 유물이 몇 점 출토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오르도스형 청동솥'인데, 분명히 이 청동솥은 남방계 유물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에가미 나미오의 주장은 고대 한국과 일본의 미스터리를 규명하는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더군다나 에가미는 기마민족설을 주장하면서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기정사실화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 터라 한국 입장에서는 다소 거북한 인물이기도 했다.

 

박물관 입구

이런 에가미가 지난 1990년에 대성동 고분군 발굴현장을 방문해서 고대 일본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어떤 유물을 보고 한편으로는 기쁨을, 한편으로는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기뻤던 이유는 학자였기 때문이었고, 착잡한 이유는 일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 유물이었기에 북방 유목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해박한 식견을 가진 그가 그런 심정에 빠졌을까?

쇠의 바다인 김해시 구산동에 가면 김수로왕의 탄강지인 구지봉이 넉넉하면서도 안온한 자태를 지닌 채 김해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이 구지봉 정상에 오르면 우선 수로왕비인 허황후릉이 눈에 뜨이고, 부산에도 없는 국립박물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지난 1998년 7월에 정식으로 개관한 이 박물관은 '국립김해박물관'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고고학 전문 박물관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북방계 청동솥

이런 특성답게 '국립김해박물관'은 가야와 관련된 유물과 유적을 집중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특히 지난 1990년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고대 가야 고분군의 유물이 다수 전시되어 있어 관람객들과 가야사 전공 학자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에가미 나미오로 하여금 기쁨과 착잡함을 동시에 안겨준 유물 또한 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고대 일본 왕족의 무덤에서만 발굴되는 것으로 알려졌던 '파형동기(바람개비형상 동기)'라는 유물이다.

'파형동기'는 대성동 고분군을 경성대학교 박물관 팀이 발굴하면서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사진에서 보듯이 바람개비 형상을 한 이 유물은 일종의 장식품으로서 나무 방패에 부착하였던 액세서리였다.

이 유물은 대성동 13호 고분에서 6점이나 출토되었는데, 여태까지 이 유물은 고대 일본 지배자들의 무덤에서만 출토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야의 대왕 무덤으로 추정되는 13호분에서 일본 것보다 훨씬 큰 파형동기가 발견됨으로써 일본 고유의 유물이라는 주장은 쏙 들어가고 말았다. 또한 이 유물의 존재로 인해 고대 일본 지배층이 가야에서 건너간 계층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던 것이다.

 

'제4의 제국' 흔적, 파형동기와 청동솥

 

신비의 파형동기

에가미가 기뻤던 것은 자신의 학설인 북방기마민족설이 입증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즉, 파형동기가 가야 지배자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은 북방의 기마민족이 한반도 남부에서 지배층을 형성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지배층이 되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착잡했던 것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경영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한반도인이 고대 일본을 경영했음이 '파형동기'에 의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파형동기'라는 유물은 고대 가야와 일본의 관계를 규명하는 중요한 유물인 것이다. 그래서 소설가 최인호씨도 가야를 다룬 소설인 '제4의 제국'의 서두를 '파형동기의 발굴 장면'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국립김해박물관'은 참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건립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는 김해를 경주 못잖은 문화관광의 도시로 만들겠다는 전임 시장과 시청 직원들의 열정이 큰 몫을 했다고 한다. 1도 1국립박물관의 원칙을 가진 문화부와의 갈등, 시공사의 부도, 부지 구입을 위한 예산 확보 등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국립김해박물관'은 1998년 7월 정식으로 개관하게 되었다.

 

박물관 내부

현재 김해박물관은 두 개의 실내 전시실과 1개의 야외 전시장을 갖추고 있다. 금관가야를 비롯한 가야의 유물을 집대성하고 있으며, 부산·경남지역의 선사사대의 문화상과 변한의 문화유산도 아울러 전시하고 있다. 특히 고대인들이 남겨놓은 유적과 유물을 복원하는 사업과 가야 관련 학술회의와 강좌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어 지역의 문화 사업을 향상시키는 소중한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제1전시실은 선사시대와 변한, 금관가야의 유물을 중점적으로 전시하고 있는데, 특히 전시실 입구에 마련된 타임터널은 관람객들에게 고대 가야로 날아가는 듯한 흥미로움을 안겨준다. 또한 당시의 매장의례를 보여주기 위해 실물크기로 복원한 창원 다호리 1호 무덤과 그 출토유물은 보는 이들에게 고대인들의 숨결을 그대로 전해준다.

 

제2전시실에 가면 다양한 가야 제국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금관가야를 제외한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의 유물이 관람객들을 반기게 된다. 이 전시실을 찬찬히 둘러보면 관람객들은 하나의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 어디에서도 6가야라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어릴 때 교과서에서 배웠던 것은 분명 6가야였는데. 그리고 '비화가야'는 또 어디에 있던 곳인가 말이다.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학자에 따라 가야제국의 수를 6개에서 20개까지 본다고 한다. 그리고 가야제국 중에서 유물과 유적이 입증된 곳은 금관, 대, 아라, 소가야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이 4개 가야제국에 대한 유물은 있지만 나머지 가야에 대해서는 문헌상의 기록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그동안 우리들이 가야에 대한 알고 있었던 것은 일종의 '도그마(교조적인 지식)'였던 셈이다. 현장 학습은 이래서 중요하다.

 

전사들의 판갑옷

넓고 훌륭한 전시관을 다 둘러보고 난 후 야외로 나가보니 우선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고인돌 하나가 눈에 쑥 들어온다. 이 고인돌은 전형적인 남부지방의 고인돌이라고 한다. 그것 참 넉넉하게 생겼다!

야외전시장에는 이밖에도 '돌널무덤'과 '돌덧널무덤'이 실물크기로 전시되어 있어 옛 사람들의 자취를 느끼게 해준다. 물론 이 고분들은 지배자들의 무덤이다. 그래서 이 무덤들에는 가야 민중들의 피와 땀이 애잔하게 배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절의 정치체제가 어떠하였든지 간에, 그 시절의 민중들이 어떤 어려움을 갖고 살았든지 간에 이 유물들은 나직하게 외칠 것이다. '지금 우리를 바라보고 분석하는 너희들의 행위도 하나의 역사가 될 것이다'라고 말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햇살이 박물관의 잔디밭에 내리고 있었다. 야외에 마련된 민속마당에서는 젊은 부모들과 함께 온 어린이들이 굴렁쇠를 굴린다, 널뛰기를 한다, 제기차기를 한다 하면서 즐거운 웃음을 터트린다. 그 해맑은 웃음이 보기 좋아 나도 덩달아 웃어본다. 문화의 향기란 이렇게 즐거운 것이다.

┃국정넷포터 김대갑(kkim40@hanafos.com)

 

 

5.13  [이훈범의 문명기행] 후쿠오카에 웬 가야산? 열도 곳곳엔 5세기 가야인 흔적

중앙선데이

입력 2019.02.16 00:20

 

이훈범 기자 구독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김해 금관가야의 철기 유물들. 투구와 갑옷, 말투구 등이 보인다. 말투구는 국내에서 처음 발굴된 것으로 챙과 얼굴, 볼 가리개가 완전히 갖춰진 실전용이다. [사진 복천박물관]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나림(那林) 이병주의 명언으로 지난번 기사를 마무리했는데, 사실은 하나가 더 있다. 햇볕도 안 들고 달빛도 비켜가는 곳에 습기가 차면 음산한 이데올로기가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역사의 자의적 해석, 나아가 의도적인 역사 왜곡이 그렇게 생겨난다.

역사를 이데올로기로 변질시키는 누기(漏氣)는 주로 맹목적 애국심이다. 일본이 주장하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이 대표적이다. 오늘날에는 일본 학계에서조차 생명력을 잃은 터, 굳이 설명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다만 경계해야 할 것은 그처럼 이데올로기화된 역사는 정치권력에 악용돼 인류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에도(江戶) 시대(1603∼1867) 때부터 일본 국학자들이 주장하던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에 의해 한국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됐던 것처럼 말이다.

마음껏 상상하되 그것만 옳다 믿진 않아

어찌 보면 과거 국내학자들이 ‘임나’란 말 자체를 꺼내는 걸 금기시하고 일본학자들의 주장에 체계적으로 반론을 펴지 않았던 것 또한 역사를 이데올로기와 구분하지 못한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란 과거의 일이기에 후대의 역사 해석은 상상력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증거 사료가 적을수록 더욱 상상력에 의존해야 한다. 하지만 상상과 주장은 다르다. 내 상상이 명백한 증거로 입증되기 전까지는 그저 가설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때는 다른 상상, 즉 다른 가설들도 받아들여야 한다. 내 상상만 옳고 남의 상상은 틀리다는 주장은 억지요 독선에 불과한 것이다. 명백한 사료가 있어도 그 해석이 다를 수 있을진대, 사료가 부족한 부분에서는 두 말이 필요 없다.

일천한 지식과 게으른 발걸음으로 가야사를 더듬으면서 절실히 느낀 게 그것이었다. 마음껏 상상하되 그것만 옳다고 믿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 말이다. 혹시 간과되거나 누락되는 것이 없는지 잘 살펴야 하지만, 행여 부풀려지거나 미화되지는 않는지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야를 ‘철의 왕국’이라고 하지만 인류가 철을 만진 건 가야인들보다 거의 1500년이나 앞선 일이다. 기원전 1200년 즈음 이미 세계 여러 지역에서 철기를 사용했음이 증명되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철기 문명을 이룩한 히타이트인들이 철제 무기를 만든 때는 기원전 1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들이 만든 철기는 철광석을 녹여 만든 게 아니라, 쇠와 불순물이 섞인 철광석 덩어리를 두드려 만든 단철(鍛鐵)이었다. 그래도 당시에는 독보적인 야금 기술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히타이트인들은 철기 제국으로 성장한다. 4대 고대 문명 중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가장 먼저 시작된 것도 히타이트의 철기 제조 기술 덕분이었다.

한반도에 철기가 들어온 것도 기원전 300년 무렵이다. 중국 전국시대의 화폐인 명도전(明刀錢)이 압록강 중류지역에서 출토되는 점으로 미뤄 중국을 통해 한반도에 소개된 것으로 보인다. 이어 기원전 108년 낙랑군의 설치와 더불어 한반도에 철기가 급속도로 전파됐다는 게 정설이다. 따라서 가야의 철기는 당시의 한반도 사람들에게 결코 새로운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야의 철기를 폄하할 건 아니지만, 또한 독보적인 철기로 미화할 것도 아닌 것이다. (가야의 철제 투구와 말 갑옷, 깃대, 환두대도 등 철제품의 조형미는 부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백성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지난 기사에서 가야 유민에서 신라의 지배세력으로 성장한 김유신 가문을 언급했지만, 모두가 그렇게 운이 좋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신라는 가야를 정복한 뒤 오늘날 충주지역에 지방도시 중원경(中原京)을 만들어 가야 유민들을 이주시켰다. 진흥왕의 총애를 받은 가야금 명인 우륵(于勒)조차도 신라의 수도인 경주가 아닌 중원경에서 일생을 마쳐야 했다. 가야 귀족 출신으로 신라 최초의 유학자이자 문장가였던 강수(强首) 역시 그렇다. 그는 당나라 장수 설인귀에게 보내는 문무왕의 친서를 써 문무왕의 칭찬을 받았다.

“강수가 문장 짓는 일을 스스로 맡아 서한으로 중국과 고구려, 백제에 뜻을 전한 바, 능히 우호를 맺는 공을 이뤘다. 선왕이 당나라에 병력을 청해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비록 군사적 공로 덕분이지만 또한 문장의 도움도 있었으니, 어찌 강수의 공을 소홀히 하랴.” (『삼국사기』 <열전 제 6>)

 

그럼에도 강수가 신라 17관등 중 8등에 해당하는 사찬(沙飡) 벼슬에 머문 것은 스스로 고백하듯 “중원경 사량(沙梁) 사람”인 까닭이 아닐 수 없다.

그들보다 신분이 낮은 수많은 가야 백성들은 가야 멸망 후 노비나 그와 비슷한 신분으로 전락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운명을 피해 외국으로 망명한다. 가장 가까운 곳이 일본이다. 가야 때부터 교류가 많았던 만큼 이질감도 덜 했을 것이다. 국가나 국민, 국경의 개념이 오늘날처럼 확고하지 않았던 시기인 만큼 일본의 거부감도 심하지 않았다.

 

당시 왜인들이 만난 첫 외국인은 가야인

2017년 오사카에서 열린 사천왕사 왔소 축제.

 

오늘날 일본 오사카 사천왕사(四天王寺)에서는 매년 11월 ‘왔소 축제’가 열린다. 가야와 백제, 고구려, 신라, 조선의 사절단 복식을 한 가장행렬 참가자들을 향해 길가에 모인 인파들이 “왓쇼이!”를 외친다. 이는 우리말 ‘왔소?’에서 유래한 것이다. 불교와 한자, 도예, 건축 등 선진 문명과 문화를 전한 한반도 도래인들에 대한 과거의 환영식을 재현하는 것이다. 1000여 명의 가장행렬에서 가야 복장을 한 사람들이 선두에 선다고 한다. 그만큼 수가 많았다는 뜻이다.

가야 유민들에 의해 일본에 전해진 스에키.

 

실제로 일본에서 도질 토기인 스에키(須惠器)가 출현하는 시기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축조가 중단되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 이전 시기의 일본 토기는 좀 더 무른 토기인 하지키(土師器)가 대부분이다. 스에키는 철분 함량이 많아 짙은 회색 빛이 나고 단단해 왕실과 귀족들이 애용하던 토기다. 5세기 즈음 일본으로 건너간 김해 가락국의 유민들이 만든 것이다.

이와 함께 일본어 사전을 보면 ‘가라(から)’라는 말이 있는데, ‘일본 문화를 모르는 외국사람, 외국문화’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일본 열도에서 왜인들이 만난 최초의 외국인이 가라인, 즉 가야인들이었던 것이다. 이 ‘가라’에는 또한 ‘당(唐)’이란 뜻도 있다. ‘가라’가 처음엔 외국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이다, 일본이 당나라와 직접 교역을 시작하면서 외국의 대명사가 당이 됐고, 원래 있던 발음 ‘가라’를 당 자에 붙였다는 해석이 그럴듯해 보인다.

일본에 건너간 가야인들의 기술이 당시 일본의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것이었던 만큼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 또한 작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이주 가야인들은 대부분 일본 지배층에 편입된다.

가야인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일본 지명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가설이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후쿠오카현의 가야산(可也山), 가라(韓良), 다타라천(多多羅川), 다타라촌(多多羅村), 사가현의 가라쓰(唐津), 야마구치현의 다라(多羅), 다타라산(多多良山), 나라현 아스카의 가야나루미 신사(賀夜奈流美神社), 지바현의 다타라(太太良) 등이 그런 곳이다. 이러한 지명들은 “가야인들이 일본 열도의 입구인 규슈 북부로 건너가 야마토 지역까지 이동하는 과정에서 각지에 정착하면서 남긴 흔적”이라는 게 조원영 합천박물관장의 설명이다.

일본 천황계가 백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가설 역시 일본사회에 대한 가야 유민들의 이 같은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쭐할 것도 없다. 그것은 여전히 가설일 뿐이고 설령 사실이라 해도 그래서 어떻다는 건가. 우리가 일본 왕실에 대해 친권을 행사할 것도 아니잖는가. 일본은 일본이고 역사는 그저 역사일 뿐이다.

 

이훈범 대기자 / 중앙콘텐트랩 cielble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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