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6. 남북국시대

6.1  발해 기층민 말갈족도 고대 한민족 홍콩 사학자 김광석씨 논문

 

2006 9 18일 국민일보

 

이명희 기자

 

발해 사학자인 김광석(62) 홍콩 능인서원 한국학과 교수는 박사논문에서 발해의 기층민이었던 말갈족이 고대 한민족이라고 주장했다고 연합뉴스가 18일 보도했다.

 

김 교수는 1991년 홍콩에서 발표한 '발해족의 형성과 그 사회형태 연구'라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말갈족은 북방 이민족이 아닌 한민족의 일원으로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발해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었다"고 밝혔다.

 

김 교수에 따르면 말갈족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었던 예맥계 속말말갈이 발해 건국의 주체가 됐는데 속말수(粟末水=지금의 제2 쑹화강)에서 유래된 속말말갈은 부여 계통으로 고구려와 혈연, 지역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우수한 철기문화를 자랑했다.

 

발해는 당시 나라명에 ''()을 사용했는데 이는 자주독립 공동체라는 의미였다고 김 교수는 전했다. 특히 발해문자에 능통해 발해 외교문서의 번역을 맡기도 했던 당나라 시선 이태백도 발해를 고려(고구려의 의미)나 백제로 부르며 외국으로 취급했다는 기록이 그의 시문집 '옥록총담'에 기록돼 있다고 그는 밝혔다.

 

김 교수는 "발해는 계속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고 34차례 일본에 외교사절을 파견했으며 또 당나라와 자주 전쟁을 벌인 점은 독립 주권국가라는 사실을 말해주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명희 기자

http://news.media.daum.net/society/affair/200609/18/kukminilbo/v14076030.html)

 

6.2  거대영토 통치 목적수도를 5곳에 설치한 발해의 五京제도

2007 9 18일 동아일보

권재현 기자

 

 

 

 

『《발해의 수도가 다섯인 것은 당() 5(五京)제의 영향이 아니라 부여·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은 내재적 발전 논리에 입각한 것이라는 박사학위 논문이 나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8월 박사학위 졸업논문 발해 문왕(文王)대의 지배체제 연구’(필자 김진광)가 그것. 국내 15번째 발해사 전공 박사논문인 이 논문은 발해 3대 문왕의 재위기간(737793) 사방 5000에 이르는 발해의 최대 판도가 확정됐으며 이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3 6부제 같은 중앙행정체제와 5 15 62주의 지방행정체제가 완비됐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 같은 제도의 완비가 이뤄진 시점은 10대 선왕(宣王·818830) 때라는 것이 그동안 학계의 주류 의견이었다.

 

김진광 박사가 특히 주목한 점은 발해 문왕 때 상경 중경 동경 남경 서경의 5경제가 확립되고 57년의 재위기간 중 사실상 4차례나 도읍지를 옮겼다는 점이다. 학계에선 발해의 5경제를 당의 제도를 수입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그러나 당의 5경제는 본래 4경제였다가 안사의 난’(755) 때 현종의 피란처였던 남경을 757년 다섯 번째 수도로 지정하면서 성립됐으며 그나마도 불과 4년 뒤인 761년 폐지됐다. 또한 후대 중원을 장악한 국가들로 계승되지도 못했다. 반면 발해의 5경제는 755756년경 중경(당시 지명은 현주·顯州)에서 상경으로 천도할 즈음부터 성립했다고 봐야 하며 이후 요와 금의 5경제로 계승됐다는 점에서 그 기원과 기능이 다르다는 것이 김 박사의 지적이다. 북경에 해당하는 상경의 명칭에 이미 상하좌우와 동서남북에 해당하는 방위의 개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당과 발해의 5경제가 오행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공통점을 지니긴 하지만 당의 5경이 내란의 산물이라면 발해와 요·금의 5경은 광활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내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본질적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문왕은 동모산중경상경동경으로 3차례의 천도를 단행됐고 다시 상경으로 천도를 준비하다 그 1년 전에 숨졌다.

 

김 박사는 이처럼 발해의 천도가 문왕 때 집중된 것은 새로 획득된 영토와 다양한 이민족에 대한 통치력 강화라는 내재적 필요성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고 주장했다. 이는 발해의 상경천도가 안사의 난 이후 당의 내분을 이용한 적극적 북방정책의 일환이라면 동경천도를 일본과 외교관계 강화를 위한 동방정책의 포석이란 식으로 대외적 요인에서 그 원인을 찾던 것과 차별화된 시각이다.

    

실제 문왕 사후 49 25년간 계속된 내분과 잦은 왕의 교체로 왕권 약화와 영토 축소가 이뤄지면서 수도가 상경으로 고정된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10대 선왕 때 이뤄진 정복 활동이 그 과정에서 발해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게 된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는 해석으로 연결된다.

 

발해의 5경제가 이처럼 내재적 발전 논리에 의해 도입됐다는 점에서 오히려 영토가 겹치는 부여의 5(五加)제나 고구려의 5(五部)제 또는 신라의 5소경(五小京)제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727년 발해 2대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계승했다고 한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김 박사는 발해 문왕 때에 들어서 비로소 자신을 천손(天孫)으로 지칭하고 스스로 황제로 칭하기 시작한 점은 독자적 천하관을 구축했던 고구려의 천손의식을 명실상부하게 계승할 수 있는 토대를 완비했기 때문이라며 발해가 해동성국으로 불리게 된 기틀은 선왕 때가 아닌 문왕 때부터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권재현 기자

(출처;

http://www.donga.com/news/more23/article/all/20070918/8491108/1?comm)

 

6.3  성헌식의 대고구리 중국 황화 이북에 자리 잡은 대진국(발해) 강역 9천리

 

2013 7 22일자 스카이데일리 기사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대부분 사람들이 동만주에서 건국된 발해의 강역이 만주뿐인 것으로 알고 있는 이유는 전신인 고구리의 강역도 만주일대 뿐이었고, 남쪽에 있는 통일신라의 강역이 한반도의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이라고 배워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학계는 이 같은 학설을 입증해주는 유물적 증거로 길림성 돈화와 화룡에서 발견된 정혜·정효공주의 무덤을 대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공주의 무덤이 발견된 곳은 대진국의 동쪽 강역임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주들의 무덤을 다른 나라 땅에 조성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적 사실로 본 대진국(발해)의 서쪽 강역은 현 국사교과서에 있는 지도처럼 서만주 일대가 아니라 훨씬 더 중국대륙 깊숙이 하남성 황하까지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대대로 중국 땅으로 알고 있던 황하 이북의 땅이 우리 대진국(발해)의 강역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과연 그럴까라고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동모산과 천문령은 어디인가

 

 

 

 

동모산(東牟山)은 대진국(발해)의 초기도읍지이고, 천문령(天門嶺)은 대조영이 당나라 장수 이해고를 대파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그런 동모산을 길림성 돈화에 있는 성산자산성으로 알고 있으며, 천문령은 서만주 심양 부근에 있는데 위치 미상으로 알려져 있다. 과연 그런지 아래와 같이 상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동모산으로 알려진 길림성 돈화에 있는 성산자산성(위 사진)과 위치도. <사진·이미지=필자제공>

 

 

 

 

 대조영의 발해 건국 도정과 천문령 위치도. <이미지=필자제공>

 

우선 동모산을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검색하면 하남성 탕음현 서쪽 40리로 탕하가 나오는 곳. 즉 수경주의 석상산이다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북부 하남성의 동단인 은허(殷墟)발굴지 남쪽으로 접해있는 학벽(鶴壁)시를 말하는 것이다. 천문령을 검색하면 천문산은 하남성 휘현 서북 50라는 설명이 나와 산서성과 하남성 휘현의 경계에 있는 해발 1304m짜리 지금의 운태산(云台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두 곳을 아래 대중상과 대조영의 건국 행적에 연관시키면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종 때 이맥 선생이 쓴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668년 고구리 멸망 때 서압록하(西鴨錄河)를 지키던 대중상이 동쪽 동모산으로 가서 나라를 세우고는 후고구리(後高句麗)라 하고 연호를 중광(重光)이라 했고 32년 붕어하니 묘호를 세조(世祖)라 하고 시호를 진국열황제(振國烈皇帝)라 했다. 영주(營州) 계성에 있던 태자 대조영이 제위에 올라 홀한성을 쌓아 도읍을 옮기고, 당나라 장수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격파하고는 국호를 대진(大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고 고구리의 옛 땅을 차지하니 땅은 6천리가 개척됐다. 21년 붕어하니 묘호를 태조(太祖)라 하고 시호를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라 했다고 한다.

 

따라서 동모산과 천문령도 압록수와 유주 가까운 곳에 있어야 이치에 합당할 것이다. 고대 압록수는 현재 산서성을 가로지르는 분하를 말하는 것이므로 서압록하는 분하 서쪽이며, 영주는 유주(幽州)에서 떨어져나간 행정구역이므로 황하북부 하남성과 산서성 남부 어딘가를 지칭하는 지역이다. 현재의 학설대로 동만주에 있던 대조영이 이해고의 당나라 군대와 서만주 심양 일대에서 싸웠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로 역사왜곡인 것이다.

 

 

 

 당나라 장수 이해고를 천문령(운태산) 협곡으로 유인해 대파한 대진국의 초기도읍지 동모산은 학벽시(아래사진은 협곡) 및 위치도. <사진·이미지=필자제공>

 

해동성국 대진국의 강역은 9000

 

이후 대조영의 후예 황제들은 대진국의 강역을 더욱 넓힌다. 이어지는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이에 태자 무예가 즉위하여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하니 개마, 구다, 흑수의 여러 나라가 신하될 것을 청하며 공물을 바쳤다. 대장 장문휴를 보내 등주와 동래를 취하여 성읍으로 삼자 당나라 왕 융기(현종)가 노하여 병사를 보냈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듬해 장수 연충린이 말갈병과 함께 요서(遼西)의 대산 남쪽에서 당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 당나라가 비밀리에 신라와 약속해 급습하자 보병과 기병 2만을 보내 이를 격파했다.

 

인안 17년 송막 12성을 쌓고 요서(遼西) 6성을 쌓으니 마침내 5 60 1 38현을 소유하니 원폭이 9000리로 성대한 나라였다. 이 해 당나라와 신라 및 왜도 나란히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니 천하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칭송했다. 이에 발해사람 셋이면 한 마리의 호랑이를 당한다는 말이 생기게 됐다. 이 때 백성들은 화락하고 역사를 논하며 의를 즐겼다. 오곡은 풍성하고 사방은 안락했다. 대진육덕이 있어 이러한 대진국을 찬미했다. 19년 황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광종이라 하고 시호를 무황제(武皇帝)’라 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어 태자 흠무가 즉위해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하고 도읍을 동경용원부로부터 상경용천부로 옮겼다. 이듬해 태학을 세우고 천경신고를 가르치며 환단고사를 강연하고 국사 125권을 편찬하니 문치는 예악을 일으키고 인간을 홍익하는 교화는 이로써 만방에 미치게 됐다. 57년 황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세종 시호를 광성문황제(光聖文皇帝)라 하였다고 기록돼 있는데, 동만주에서 발견된 정혜·정효공주 비문에 대흥이라는 연호가 기록돼 있어 이 기록의 신빙성을 입증해 주고 있다.

 

위 기록에 등장하는 요서는 유주라는 행정구역에 속한 요서군(遼西郡)으로 황하 굴곡지점인 산서성 서남단 영제시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이를 입증하는 기록은 <한서지리지> <설문해자> <사기 집해>이며, 유물적 증거로는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다 굶어죽은 백이와 숙제의 무덤이 발견됐다. 중국은 하북성 동쪽 진황도시 노룡현에 백이·숙제의 가짜 유적지를 만들어놓고는 그 일대가 요서군이었다는 역사왜곡을 하고 있으나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위인 것이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당나라와 신라 및 왜도 나란히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니 천하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대진국본기>에 기록된 대진국 황제들의 자체연호 사용기록과 위 무황제의 기록은 <신당서>의 기록과 일치한다. 따라서 작았던 당나라가 9000리 강역의 대진국에게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은 역사적 사실일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최근 중국은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어불성설의 동북공정을 일삼고 있다.

 

 

 

 <대청광여도>에 그려진 백이·숙제의 실제 무덤(아래사진) 2008년 필자에 의해 발견돼 그동안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을 자행한 중국의 파렴치한 행위가 낱낱이 밝혀지게 됐다. <사진·이미지=필자제공>

 

백이·숙제가 굶어죽은 수양산은 요서군

 

허신의 <설문해자> 수양산은 요서에 있다(首陽山在遼西)”는 기록이 있고, 백이·숙제가 굻어죽은 수양산이 어디인지 가장 확실하게 밝힌 기록은 <사기 집해> 마융이 말하길 수양산은 하동지방의 포판에 있는 화산의 북쪽에 있고, 그곳은 황하가 꺾여 흐르는 곳이다(集解馬融曰 首陽山在河東蒲阪華山之北河曲之中)”라고 기록돼 있다. 여기서의 하동(河東)은 글자 그대로 황하의 동쪽으로 지금의 산서성 남부를 말하는 것이다. 위 기록을 입증해 주는 지도는 청나라 때 만들어진 <대청광여도>로 지도에는 황하가 꺾이는 동쪽에 수양산과 포판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으며 백이·숙제의 묘라고 상세히 그려져 있다.

 

 

 

 지명이동은 조작이다. <이미지=필자제공>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유주(幽州)는 요동군, 요서군, 낙랑군, 발해군 등 10개 군이 속해있는 행정구역이며, 그 위치는 산서성 남부와 황하 북부 하남성 일대이다. 그를 입증해주는 유물적 증거가 바로 요서군을 상징하는 백이·숙제의 무덤과 하남성 제원시를 흐르는 낙랑군에 속한 패수인 것이다. 아래 요서군 설명에 고죽성이 있는 영지현이라는 설명이 있는데 현 산서성 서남단 영제시를 말하는 것이며, 고죽성은 바로 백이·숙제가 왕자로 있었던 고죽국을 말하는 것이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유주에 속한다)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고죽성이 있는 영지현)莽曰令氏亭肥如玄水东入濡水濡水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은 역사말살 행위다. <이미지=필자제공>

 

중국은 그동안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을 자행했다. 고구리와 대진국의 영토는 황하에서부터 동만주까지로 9000리였다. 식민사학의 역사왜곡이 중국의 왜곡보다 더 심하다.

(출처;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1020&keyWord=%25BC%25BA%25C7%25E5%25BC%25AE)

 

 

6.4   성헌식의 대고구리 발해 멸망시킨 거란()은 발해 이은 후예국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2013 7 29일자 스카이데일리 

 

최근까지 사화산으로 알려져 왔던 백두산이 폭발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고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왜냐하면 만일 백두산이 폭발한다면 어마어마한 규모로 예측되기 때문에 한반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 때문이다. 특히 북한정권이 그로 인해 붕괴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러면서 천년 전 해동성국 발해의 멸망을 그 예로 들고 있다.

 

백두산 화산폭발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일본 나고야대학교 연대측정종합연구센터 연구팀은 백두산에서 용암과 화산재로 쓰러진 고목을 채취해 연대측정을 해본 결과 백두산의 화산 폭발은 929~945년에 있었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이는 폭발이 문헌상 발해가 거란족의 요()나라에 멸망한 926년보다 3~19년 이후에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과학적으로 보면 발해의 멸망과 백두산 화산폭발은 직접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국내 화산학계의 권위자로 알려진 모 교수는 백두산 폭발이 발해 멸망 3년 후에 일어났으나, 그 전조증상이 미리 일어나는 법이므로 그로 인해 발해국의 민심이 이반되어 거란에게 멸망당한 것이다라고 이상한 설명을 하면서, <요사 야율우지전> 민심이 이반하고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군대를 움직이니 싸우지 않고 이겼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들었다. 화산학계에서 발해 멸망과 백두산 화산 폭발을 연계시키는 근거 역시 바로 이 기록 때문이다.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네티즌들에게는 그럴듯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우선 백두산에 엄청난 화산폭발이 있었다는 역사기록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백두산의 폭발영향. <이미지=필자제공>

 

당시 화산폭발지수가 7.4정도로 추정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지수가 4이상이면 대규모 폭발에 속하며, 8을 최대로 지정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7.4의 강도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대폭발이다. 수년 전 발생한 아이슬란드의 화산지수가 4정도라고 한다. 천년 전의 백두산 폭발은 그의 1000배에 해당하는 화산재를 분출했을 것이므로 말로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실로 엄청난 재앙을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특히 일본열도에 주었을 것이다.

 

백두산 일대는 대진국(발해)의 동북 변방

 

백두산이 대폭발한 적이 있다는 과학적 근거가 이렇듯 확실하나, 폭발했다는 역사기록이 어떠한 사서에도 없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 이유는 우리가 국사시간에 배운 대로 백두산 일대가 대진국(발해)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대진국의 도읍이 그 일대에 있었다면 위에서 모 교수가 말한 전조증상으로 발해국의 민심이 이반되어 요나라에게 쉽게 망했다는 이상한 주장도 어느 정도는 수긍될 수 있다. 게다가 곧 화산이 폭발할 발해 땅을 얻기 위해 거란이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지난번 칼럼에서 언급했다시피, 대진국의 도읍이 있던 핵심강역은 북부 하남성 일대로, 남으로 황하에서부터 정혜·정효공주의 무덤이 발견된 동만주까지 9000리가 해동성국 대진국의 영토였던 것이다. 따라서 백두산 일대는 대진국의 중심이 아니라 수천 리나 떨어진 동북단 변방의 외지이기 때문에 백두산 대폭발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대진국(발해) 멸망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는 것이다. 기류의 흐름 때문에 오히려 일본열도가 영향을 훨씬 크게 받았을 것이다.

 

대진국(발해) 멸망 원인은 내부 쿠데타

 

 

 

 대진국의 강역은 하남성 황하에서부터 연해주까지 9000. 백두산 폭발과 대진국(발해) 멸망은 아무 상관이 없다. <이미지=필자제공>

   

먼저 <요사>에 기록된 발해의 멸망 장면을 보기로 한다. 925 12,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발해 정복을 위해 출병한다. 발해의 부여성을 포위한지 3일 만인 1 3일 성을 함락시킨다. 거란의 선봉이 발해의 도읍 홀한성을 향해 질주하는 도중에 발해의 3만 대군을 격파하고 9일 홀한성을 포위하고, 3일 후인 12일 발해의 마지막 왕에게 항복하라는 의사를 전한다. 이틀 뒤 14일 대인선은 흰 소복을 입고 양을 끌고 신하 300여 명과 함께 항복하고 만다. 이로써 발해는 15 229년 만에 멸망했다는 것이 사학계의 중론이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도 대진국 애제의 청태 26년 봄 정월 야율배는 동생 요골과 선봉이 되어 밤에 홀한성을 포위하자 애제가 성 밖에 나가 항복함으로써 나라가 망했다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어 위 <요사>의 내용보다도 축약되어 있고, 다른 점은 대진국이 건원칭제했다는 사실 뿐이다.

 

 

 

 

 백두산 화산폭발시 예상 피해지역. <이미지=필자제공>

 

 

너무도 허망한 멸망으로 솔직히 뭔가가 이상한 기록이다. 해동성국이라는 명성을 얻었던 대진국(발해)으로서는 너무도 허망한 멸망이다. 고구려의 광활한 고토를 거의 대부분 차지했던 대제국이 채 보름도 못돼 속절없이 무너졌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그리고 거란족이 쳐들어왔는데 겨우 3만 병력으로 저지했다가 패하자 도성이 포위되어 왕이 항복했다는 만화 같은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까?

 

9000리 대제국 대진국의 진짜 멸망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고리국지(高麗國志)> <고리사력(高麗史歷)>라는 역사책이 있는데, 이 책들은 대진국의 역사실록으로 <요사>가 왜곡하고 있는 대진국의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사서로 현재 소장처는 일본(고려국기 28)과 러시아(고려사력 16)이다. 이 책에는 대진국 멸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 <고리국지>의 거란에 대한 기록

    

契丹属国にしたし部族民たちを中央管理登用したその耶律阿保机5城大将軍じてたし契丹軍担当する役割たした契丹軍忠誠することができる10がいた

 

(해석) (대진국은) 거란을 속국으로 삼았고 부족민들을 받아들여 중앙관리로 등용하였다. 그 중에 야율아보기를 ‘5성 대장군에 봉했고 거란군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겼다. 거란군은 (대진국에) 충성할 수 있는 10만의 군사가 있었다.

 

2. <고리사력>의 거란에 대한 기록

 

Император 916 лет aejong генералов и пять генералов бывшего вассальн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будет goguri из yayul просмотра голосовых связок yowang стержней.

 

 

(해석) 916년 애종 황제는 고구리(=대진)의 종속국인 거란 출신의 장군 야율아보기를 5성대장군과 요()왕에 봉하였다. ( 거란의 요왕은 대진국 황제의 제후임이 명백히 밝혀진 기록)

 

3. <고리국지>의 대진국 멸망 기록

 

大将軍 耶律阿保机 上京城入城して宮城襲撃して皇帝捕虜としたしい高句麗遼国千人おり震国管理をそのまま登用した

 

(해석) 대장군 야율아보기가 상경성에 입성하여 궁성을 습격하였고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새로운 고구리(=대진국)는 요()나라로 천명했고 진국의 관리를 그대로 등용하였다.

 

 대진국의 임금을 황제라 표현했고, 진국이라는 국호도 나온다.

 

4. <고리사력>의 대진국 멸망 기록

 

Путаница дела вождя 926,  5 yayul капитализированных привел армию в 100000 был введен в sanggyeongseong Вынужден отречься от престола императора принять naeeotda печати

 

 

(해석) 926 5호대장군 야율아보기가 혼란한 국정을 틈타 10만 대군을 이끌고 상경성에 입성하였다. 황제에게 양위를 강요하여 인새를 받아내었다.

 

5. <고리사력> 거란의 대진국 황족 처우에 대한 기록

 

Ko, которая для лиц в качестве королевских семей бывших аристократов daessi и Принцесса и брака было укрепление системы управления.

 

 

(해석) 전 황족인 대씨와 공주와 혼인하였고 고씨 황족들을 고관으로 기용하여 통치체제를 강화하였다.  대씨와 고씨를 황족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고구리와 대진국은 황제국

 

 

6. <왜인흥망사(倭人興亡史)> 의 기록

 

926年 耶律阿保机上京城入城したホール忽汗城療養がある皇帝譲位強要した

 

(해석) 926년 야율아보기는 상경성에 입성 후 홀한성에서 요양 중인 있는 황제에게 양위를 강요하였다.

   

위 기록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오는데, 대진국이 왜 멸망했는지 확실해진다.

 

황제국 대진국은 거란을 속국으로 삼아 야율아보기를 대장군 겸 제후인 요왕에 봉한다. 야율아보기가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애제를 체포하고 양위를 강요했다. 애제가 양위함으로써 대진국은 망했고, 요나라가 새로운 고구리가 되어 대진국의 정치체제를 그대로 답습한다 고구리는 대진국을 거쳐 요나라 --> 금나라 --> (원나라) --> 청나라로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

(출처;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1138&keyWord=%25BC%25BA%25C7%25E5%25BC%25AE)

 

 

6.5  박성수교수의 역사 뒷이야기 중국 금나라 시조된 마의태자의 후손

신동아 2000 5월호 

박성수교수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왕자 마의태자는 2명이었다.

마의태자는 금강산 아닌 설악산을 근거지로 왕건에 대항했다.

마의태자 후손이 여진으로 들어가 금나라를 세웠다.

 

신라 최후의 왕 김부(金傅, 경순왕)의 태자인 마의태자(麻衣太子). 경순왕이 고려 건국자 왕건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한 후 신라 천년 사직을 경솔하게 넘겨줄 수 없다고 반대하다가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 마의를 입고 초식(草食)하며 살다가 죽었다는 인물이다.

 

생몰연대를 전혀 알 수 없는 신비의 인물인 마의태자는 일반적으로 개골산, 그러니까 지금의 금강산에 숨어 살다가 자결한 것쯤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 보성고등학교 한문 교사로 재직했던 김종권씨였다. 이미 작고했는데, 일찍부터 이 사실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는 일에 여생을 바친 분이었다고 한다.

 

마의태자가 금강산에 갔건, 설악산에 갔건 그것이 무어 그리 중요하다고 여기저기 다리 품을 팔면서 외치고 다녔을까? 한때 필자도 김종권 선생을 한심한 재야사학자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우연히 이 문제를 다룰 기회가 있어 자세히 살펴보다 그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마의태자가 금강산에 갔다는 이야기는 실의에 빠져 죽으러 갔다는 뜻이고, 설악산에 갔다는 이야기는 신라의 국권을 왕건 같은 반역자당시 왕건은 일개 반란분자에 지나지 않았다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굳은 저항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금강산과 설악산이 가지는 상징 코드를 해석해내면 마의태자와 관련한 역사는 다시 쓰여야 할 것이다. 왕건은 고려의 건국 명분을 신라에 망한 고구려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의 국권을 평화적으로 양도받아 은근히 고려 건국에 합법성과 정통성을 가미하려 했다.

 

왕건으로서는 신라의 차기 대권 후계자인 태자가 경순왕의 양국(讓國)에 반대한다는 것이 여간 껄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왕건은 이 자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하고 중신들과 상의했을 것이고, 중신들이 간단합니다. 태자를 마의태자라 부르게 하시고 금강산에 죽으러 갔다고 하면 될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을 것이다. 역사 왜곡이란 이런 때 하는 것 아니겠는가. 왕건도 이 소리를 듣고 탄복했을 것이고 그리 하거라 했을 것이다. 당시 금강산은 그곳에 유배될 경우 살아서 돌아오기 힘든 곳으로 인식돼 있었기 때문이다.

 

강원도 인제에 김부리(金富里)라는 마을이 있다. 지명(地名)이 경순왕의 이름 김부(金傅)와 똑같다. 그러나 이 김부는 경순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마의태자를 의미한다. 이제 그 역사의 현장으로 찾아가 보자.

 

인제 김부리 지명의 유래

 

강원도 인제를 지도에서 찾아보면 속초 쪽으로 거의 다 가 한계령을 넘기 직전에 있다. 인제군은 남북으로 기다랗게 뻗어 있는데, 김부리는 인제군의 남쪽 경계인 상남면에 소재한다. 서울에서 차로 가려면 46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인제 어구에 서 있는 마의태자유적비를 보고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된다. 먼저 김부리에 대해 적어놓은 인제군사를 찾아보기로 하자.

 

본래 김부동 김보왕촌 김보왕동 등으로 불리다가 김보리가 되더니 김부리가 되었다. 김부리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 머무르면서 신라를 재건하고자 김부대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모집해 양병을 꾀했다 하여 그렇게 불린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이곳에는 김부대왕각이 있어 봄, 가을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

    

그런데 김부리로 들어가 보니 사람이 하나도 살지 않는 폐촌 아닌가. 또 김부리와 나란히 갑둔리(甲屯里)가 있었다고 하는데, 장방형 분지여서 마의태자가 은신하기 좋은 곳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김부리와 갑둔리를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말했다는데, 육군에서 재빨리 이 일대를 사격연습장으로 수용해버리는 바람에 사람이 살 수가 없었다.

 

지금 김부리에는 이 마을 어린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 건물이 텅 빈 채 서 있고 그 옆에 대왕각이 남아 있다. 이름이 대왕각이지 서낭당이나 다름없다. 옛날에는 이 분지에 마을이 셋이나 있었고 마을마다 대왕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제 하나 남은 대왕각마저 영원히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1000년 동안 김부대왕각에서 김부대왕 제1자의 위패를 모셔온 신라 유민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한 산골로 변해버린 것이다.

    

마의태자 유적지는 비단 경주김씨 후손이나 강원도 인제군의 역사 유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 국군에도 호국정신을 기리고 가르치는 유서 깊은 역사의 장이다. 바로 그런 곳이 국군의 불도저에 의해 역사의 무대 밖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필자가 갔을 때는 마의태자 유적지로는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대왕릉 터가 없어지고 그 위에 아스팔트가 깔리는 순간이었다.

 

마의태자 유적지가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기슭에 있다고 처음 밝힌 이는 19세기 초의 유명한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이었다. 그는 그곳을 김부대왕동(金傅大王洞)’이라 했다고 분명히 증언했다. 그러면서 자세한 것은 인제 읍지(邑誌)에 실려 있으며 경순왕은 곧 신라의 항왕(降王)인 김부라고 부연하였다. 그러나 이규경은 이 마을을 답사하지 못한 탓에, 김부가 마의태자란 사실을 모르고 경순왕으로만 이해했다.

 

실제로 김부리의 김부대왕각에 모셔놓은 위패에는 김부대왕 제1라고 명기돼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의태자 생존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오층석탑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이 석탑에 김부수명장존가(金富壽命長存家)’라는 비명(碑銘)과 요 성종 태평16년 병자(서기 1034, 고려 정종 2)라는 간지(干支)가 나왔다. 그래서 어쩌면 이 탑이 마의태자가 죽고 난 후 그 후손이 세운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항려(抗麗) 운동의 기지

 

김부리에는 마의태자와 관련된 유적, 유물들이 적잖게 남아 있었다. 앞에서 말한 대왕릉터와 김부석탑 2(오층석탑 1기와 삼층석탑 1), 그리고 마의태자를 따라온 충신 맹장군 일가의 고분군이 있다. 이 골짜기를 맹 개골이라 전하는데 개골산의 개골이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흥미를 끄는 유물은 대왕각 제단에 배설돼 있었다는 철마상(鐵馬像)이다. 이것 역시 누군가 가져가버려 찾을 길이 없는데 그 모형이 남아 있다. 철마상을 두고 경주의 신라왕릉에서 발굴된 천마상(天馬像)을 모작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이가 있지만, 필자가 아는 한 철마상은 대장간에서 무사하기를 비는 부적(符籍)이었다. 이런 부적이 많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곳에 대장간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장간에서는 농구뿐만 아니라 무기도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밖에도 김부리가 고려에 반대하는 항려운동(抗麗運動) 기지였다는 증거로 이 고을의 특이한 지명을 들 수 있다. 김부리 옆의 마을 이름이 갑옷 갑()자에 진 칠 둔(), 즉 갑둔리다. 갑옷을 입고 진을 친다는 군사적인 이름이 왜 필요했을까. 또 한 골짜기의 이름은 막을 항()자에 군사 병()으로 항병골이니, 이렇게 위험천만한 이름을 붙여 불렀다는 사실이 이상하다. 거기다 단지(斷指)골이 있고, 임금이 넘었다는 행차 고개에다, 수거 넘어 등의 지명이 있다.

 

더욱 괴이한 것은 다물리(多勿里)라는 지명이다. 다물이란 고구려 말로 국권 회복 또는 광복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지명들이 모두 마의태자의 광복운동을 암시하거나 그와 관련된 이름들이다.

 

이곳 인제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마의태자와 관계 있다고 믿는 지명으로 경기도 양구군 북면에 있는 군량리(軍糧里)라는 마을 이름을 든다. 이곳에서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마의태자의 부하인 맹장군이 양구지에 가서 병사를 모집하고 군량미를 징발해 저장하던 곳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龍門寺) 경내에 하늘 높이 서 있는 은행나무가 마의태자가 심은 것이라는 전설은 너무 유명하고, 인제와 지척간인 강원도 홍천군 동면에 지왕동(至王洞)이 있는데, 마의태자가 횡성군 탑산(塔山)을 거쳐 이 마을에 왔다가 인제로 떠났다는 것이다.

    

다물리 마을에서 해마다 지내던 민속행사 가운데 마의태자와 관련된 것이 적지 않았다 한다. 대왕각(大王閣) 동제(洞祭)에서는 제상에 꼭 미나리떡과 취떡을 올려놓았다는데, 마의태자가 이 곳에 와서 특히 좋아한 음식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제례 때는 절을 네 번이나 했다고 전한다. 천자(天子)가 아니면 4배까지 하지 않는 것이 예다.

 

이러한 김부리 마을의 동제는 고려 500년 동안 몰래 지내야만 했을 것이다. 고려왕조가 볼 때 마의태자는 반역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궁리 끝에 마의태자라 하지 않고 경순왕 이름인 김부를 썼을 것이다. 탄압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쩌면 일족 몰살의 화를 당했을지 모른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신라 멸망 후 200년 만에 영남지방에서 신라 유민들이 항려운동을 일으켰다. 그 때문에 무신들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는 등 고려왕조는 최대 위기를 맞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마의태자와 직접 관계가 있는 사건은 아니지만, 신라 유민들은 신라가 망한 지 200년이 지난 시점에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의태자는 두 사람이었다"

 

마의태자는 조국 광복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서라벌을 떠났고 뜻을 같이하는 충신열사들이 그를 따랐다. 신라는 화랑(花郞)의 나라였다. 화랑의 힘으로 발전하고 또 통일의 꿈을 이룩한 나라였다. 그런 신라가 아무리 타락하고 나약해졌다 하더라도 아무런 저항도 없이 고려에 순순히 항복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경순왕이 군신회의를 열어 고려에 투항하기로 결정했을 때 마의태자는 화랑답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대권을 물려받을 사람이 바로 마의태자 아니던가. 그런 자리를 한마디로 반역자이자 역적인 왕건에게 넘겨준단 말인가. 그래서 마의태자는 아버지의 무조건 항복에 극력 반대했다고 삼국사기에서도 기록하고 있다.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하늘의 명(天命)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 의사들과 더불어 먼저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나라를 지키다가 힘이 다한 연후에야 그만둘 일이다. 어찌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넘겨준단 말인가.”

 

이 얼마나 의젓하고 화랑다운 말인가. 태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신라가 부패하고 타락했다고 하나 아직 충신과 의사가 많이 남아 있다. 둘째, 신라의 민심이 흩어졌다고 하나 수습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셋째, 힘이 다할 때까지 싸우다가 그만둘 일이지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할 수는 없다.

 

한편 이때 경순왕의 다른 왕자 한 사람은 머리를 깎고 해인사에 들어가버렸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고려의 관사(官史) 삼국사기에는 그런 말이 전혀 없고 마의태자 한 사람만 반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과연 그랬을까?

    

신라의 왕손인 박((() 세 성씨의 족보로 가장 오래 된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 인조 20, 1642)’를 보면 그 자리에서 자결한 왕자도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뿐만 아니라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귀부(歸附)하기 전에 두 부인(석씨와 박씨)이 있었고 그 사이에 왕자를 여덟 명이나 두었다. 이들 여덟 명의 왕자 가운데 두 사람이 개골산에 들어갔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그해 10월 고려에 귀순할 때 석씨의 막내 분()과 박씨의 맏아들 일() 두 분이 극력 간()하다가 왕이 들어주지 않자 어전에서 통곡하더니 영원히 이별하고 함께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를 집으로 삼고 마의 초식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즉 마의태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두 사람이 광복운동을 하러 입산했다는 말은 안 하고, 죽으러 갔다고 쓴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를 덜기 위해 다른 일반의 경주김씨 족보에는 경순왕의 첫째 왕비인 석씨 부인이 기록돼 있지 않다는 점을 밝혀둔다. 말하자면 경주김씨 내부에도 이견이 있는 것이다. ‘삼성연원보를 인정하지 않는 측에서는 경순왕의 둘째 왕비 박씨부인만 인정하고 그 맏이인 김일이 마의태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신라삼성연원보와 같은 내용의 족보가 또 하나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경순왕의 첫째 부인 석씨의 존재가 재확인되고 있다. 일제시기 평안도에서 간행된 경김족보(慶金族譜)’가 바로 그것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남한에서 간행된 족보에는 첫째 부인 석씨가 빠진 데 비해 북한에서 간행된 족보에는 석씨가 기록돼 있다는 잠정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마의태자 후손으로 보이는 김씨가 여진 땅에 들어가서 금나라를 건국하고 중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세웠다는 사실과 관계된다.

 

마의태자의 마지막 거점 한계산성

 

어쨌든 마의태자는 혼자서 경주를 떠나지는 않았다. 마의태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일행도 많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마의태자의 조부 효종랑(孝宗郞) 1000명이나 되는 화랑도(花郞徒)의 우두머리였다고 한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서울(경주)을 점령하여 경애왕(景哀王)을 폐위하고 경순왕을 새 임금으로 옹립한 것도 경순왕이 바로 효종랑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의태자는 그런 훌륭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버지가 비굴하게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고 결연히 개골산으로 떠났고, 그런 태자를 따르는 신라의 충신과 의사가 많았던 것이다.

    

왕건에게 귀부(歸附)하러 가는 경순왕의 일행은 향차(香車)와 보마(寶馬) 30여 리나 이어졌다고 하는데 마의태자 일행도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경순왕 일행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따가웠지만 마의태자 일행을 보는 군중의 눈에서는 망국의 눈물이 맺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마의태자 일행은 강원도 인제 설악산 기슭에 도착한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깊은 산골인 하늘 아래 첫 동네를 택했을까. 바로 그곳에 한계산성(寒溪山城)이라는 이름난 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승람 한계산성은 인제현 동쪽 50리 거리에 있다. 산성은 둘레가 6278, 높이가 4척의 석성(石城)이다. 지금은 퇴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한계산성의 정확한 위치는 인제군 북면 한계 3 1번지다. 인제읍에서 원통 면사무소를 지나 오른쪽 44번 국도로 꺾으면 한계령을 넘어 양양으로 가는 길인데, 가다 보면 향토공원이 나오고 옥녀탕이 보인다. 거기서 하차하여 가파른 산길을 기어가다시피해 30분 정도 올라가면 평탄한 능선에 오르게 되고 이윽고 아름다운 성벽이 나타난다. 성안에서는 냇물이 흘러 소리가 요란하다. 냇물을 건너가면 성의 남문이 나온다. 이 남문 자리가 해발 1000m라 한다.

    

성문 안으로 들어서서 성벽에 올라섰으나 병사 500명이 들어설 수 있다는 넓이 600여 평의 대궐 터와 절터가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외성이고 훨씬 더 올라가면 내성이 또 있는데, 그곳에 대궐 터가 있다는 것이다. 내성은 너무 험해서 산악 전문가가 아니면 올라갈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내성에 우리가 찾는 천제단(天祭壇)이 있는 것이다. 삼국시대 사람들은 적과 싸우기 전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 필승을 다짐했다. 한계산성의 천제단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이른바 삼신단(三神壇)’이다. 또 거기에 비명(碑銘)이 새겨져 있는데 글씨는 의선운장(義仙雲將) 김성진(金成鎭), 선천주(仙天主) 신광택(申光澤) 그리고 김세진(金世震)이라는 세 사람의 이름과 경오(庚午), 신미(辛未)라는 간지(干支)로 판독되었다고 한다.물론 세 사람이 어느 시기의 누구인지 알 수 없고, 간지의 정확한 연대도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의선운장이란 의병장을 말하는 것이니, 김성진과 김세진은 마의태자를 따라온 신라 장군 아니었을까. 그리고 두 사람은 신라의 왕족 경주김씨 아니었을까.

 

간지의 연대도 마의태자 때라면 경오, 신미년은 각각 고려 광종 20(970), 21(971)이었을 것이다. 신라가 망한 해부터 헤아리면 36년 내지 37년 뒤가 된다. 만일 이 가설이 입증된다면 이 산성은 신라 멸망 이후 고려 제4대 광종 때까지 적어도 37년간 마의태자를 따라온 신라 유민들이 장악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산성에 올라서서 동쪽을 보면 한계령 고갯길이 눈 아래 훤히 내려다보인다. 아마도 동해안 쪽에서 한계령을 너머 침입해오는 고려군을 감시하고 또 막기 위해 이 자리에 성을 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지도를 보면 개성에서 인제 땅은 너무 멀다. 이곳을 공격하자면 육로보다 동해안에서 진부령을 넘는 것이 훨씬 쉽다. 지금 동해안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로 한계령, 진부령, 대관령이 있는데 진부령의 본시 이름은 김부령(金富嶺)이었다는 말이 있다.

 

한계산성에도 전설이 많다. 이 험한 산에 성을 쌓을 때 동네 사람들이 일렬로 서서 돌을 손에서 손으로 넘겼다는 이야기, 그리고 한계산성 아래 동네 총각에게는 시집가지 말라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왜 그런 말이 돌았을까. 마의태자와 운명을 같이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전해지고 있기 때문일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강원도 인제에서는 마의태자가 설악산에 들어와서 광복운동을 했다고 믿고 있다. 인제 땅은 본래 신라 영토가 아니라 고구려 영토였다. 그래서 고구려 말로 구토(舊土)회복이라는 단어인 다물(多勿)이 이곳에 한 지명으로 남아 있다.

 

일설에 한계산성은 맥국(貊國)의 동쪽 국경을 지키는 산성이었다고도 하니 일찍부터 인제 땅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계산성 같은 난공불락의 산성이 있었던 것이다. 마의태자가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면 마의태자가 살다가 죽었다는 금강산은 어떻게 되는가. 지금 금강산 구경이 한창이다. 우리나라 관광객은 동해안 쪽으로 가서 외금강을 보고, 금강 중의 금강이라 하는 내금강(內金剛)을 보지 못하고 돌아온다고 한다. 금강산은 철원 쪽에서 들어가서 단발령을 넘어 먼저 내금강을 본 다음에 외금강, 해금강 순으로 보는 것이 구경의 원칙이다.

 

개골산이 금강산인가

 

그러니 지금 가는 금강산 유람으로는 내금강을 못 볼 뿐만 아니라 마의태자 유적도 볼 수 없다. 비로봉 밑에 있다는 전설의 태자릉(太子陵)도 못 볼 것이다. 아무튼 사람들은 태자릉을 마의태자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삼국사기를 들여다보자.

 

왕자는 통곡하며 왕을 사별(辭別)하고 곧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마의를 입고 초식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마의태자의 최후를 적고 있다. 지금까지 이 기록을 믿고, 마의태자가 비관한 끝에 금강산에 들어가 굶어죽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 실제로 금강산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동국여지승람 금강산은 그 봉우리가 모두 12000봉이나 되는데 비로봉이 제일 높다고 하며 골짜기마다 108개나 되는 불사가 산재한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금강산에는 민가가 한 채도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곳에 경작지가 전혀 없어 외부의 식량지원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산은 바위 봉우리가 벽처럼 서 있어 이르는 곳마다 천길 만길이라 몸을 의지할 만한 암자도 움집도 없었으며 채소나 과일을 심어서 먹을 만한 흙 한 줌도 없었으니 여기에 산다는 것은, 구멍에 숨거나 나무 위에 둥지를 짓고 사는 새나 짐승과 같이 거처하지 않는 한 하루도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금강산은 최남선의 말처럼 커다란 바윗 덩어리요, 온갖 기묘한 변화를 나타낸 하나의 화강암 덩어리에 지나지 않은 것이요, 금강 없는 금강산인 것이다.

 

그러니 이런 산속으로 태자 일행이 들어갔다는 것은 죽으러 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금강산에 가보면 마의태자 유적지가 남아 있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먼저 금강산의 이름부터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의 원본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중간(重刊)된 것이다. 그래서 개골산에 괄호를 하고 금강산이라 주석을 단 부분은 고려 때 나온 삼국사기 원본에 있었다 하더라도, 삼국시대 당시에는 개골산은 물론 금강산이란 이름도 없었다.

 

즉 마의태자가 갔다고 하는 개골산을 삼국시대에는 상악(霜岳) 또는 설악(雪岳)이라 불렀다. ‘삼국사기 32 제사(祭祀)조에 보면 강원도 고성군의 상악과 역시 강원도 수성군(지금의 간성군)의 설악에서 소사(小祀), 즉 산신제를 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개골산이나 금강산이란 지명이 삼국사기에는 나타나지 않고 상악이라고만 나오는 것이다. ‘삼국유사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삼국시대에는 개골산이니 금강산이니 하는 지명조차 없었던 것이다.

 

개골산과 금강산이란 지명이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고려사부터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주로 금강산으로 나오지 개골산은 드물다. 또 금강산은 중앙에서 모반죄 같은 큰 죄를 지은 정치범의 유배지로 등장한다. 고려시대에는 금강산에 유배되면 살아서 돌아오기 어려운 곳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후대에 조작된 금강산 태자 유적지

    

그러다 조선시대에 이르면서 금강산은 유학자들의 수도장으로 변했고, 금강산이라는 불교 냄새 나는 이름 대신에 개골산이니 풍악산이니 하는 이름을 갖게 된다. 조선시대에 나온 동국여지승람 회양도호부조에 보면, 금강산에는 이름이 다섯가지나 있다고 기술한다.

    

산 이름이 다섯 있는데 첫째 금강, 둘째 개골, 셋째 열반, 넷째 풍악, 다섯째 지달이다. 세상에서 부르는 이름은 풍악이지만 중 무리는 금강산이라 한다. 이 금강이란 이름은 화엄경에 근본한 것이다.”

    

그러니까 삼국시대에는 상악이라 불렀고 고려시대에는 스님들이 금강산이라 이름을 고쳐 지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스님들이 금강산이라 불렀지만 일반인은 풍악이라 불렀다고 한다. 개골산도 풍악이란 이름과 함께 조선시대에 일반화된 이름으로 생각된다. 또 금강산과 설악산이 연접돼 서로 암수 하는 사이이고 보니 혼동될 우려마저 있는 것이다. 하물며 삼국시대의 상악(금강산)과 설악(설악)은 구별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산 이름보다 더 중요한 의문점은 금강산에 있다는 마의태자 유적지는 분명 후대에 조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처음으로 지적한 학자가 육당 최남선이다. 그는 일찍이 금강산을 등산, 태자 유적지를 보고 금강예찬(金剛禮讚)’(1927)이란 기행문에서 이것은 가짜라고 말했다.

  

 신라 태자의 유적이란 것이 전설적 감흥을 깊게 하지만 그것과 역사적 진실과는 딴것입니다. 첫째 세상만사를 다 끊고 이 깊은 산골에 들어온 태자에게 성이니 대궐이니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태자의 계마석(繫馬石)이니 마구간(馬廐間) 터니 하는 것은 다 옛날 예국 때의 천제단이요, 태자성(太子城)이란 것도 제단으로 들어가는 성역 표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금강산의 태자 유적들이 후대에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최남선 특유의 지명학(地名學)을 터득해야 한다. 본시 금강산은 예국의 영산(靈山)이었다. 신라가 이를 계승하여 해마다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이르러 골짜기마다 불사가 들어서서 산신제를 지내던 곳이 불단으로 변하고 금강산 봉우리마다 불교 이름이 지어지고 말았다.

 

 

태자 유적지도 그런 것 중 하나인데 태자성은 둘이나 있고 망군대와 장군봉이 모두 마의태자가 조국 광복을 위해 군사를 지휘하던 산으로 이름지어졌다. 심지어 단발령까지도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에서 멀리 금강산 절경을 보고 중이 되려고 머리를 깎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니 금강산의 전설은 믿기 어려운 것이 많다.

 

 

여하간 금강산의 마의태자 유적지도 설악산의 마의태자 유적지와 같이 마의 초식하다가 춥고 배고파서 죽은 무기력한 마의태자상을 부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국 광복을 위해 당당하게 싸우다 죽은 씩씩한 태자상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마의태자가 삼국사기 같은 정사에 나오는 나약한 태자가 아니라 정의에 불타는 전설 속의 대장부였다면 금강산으로 가지 않고 설악산으로 갔을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조국광복을 위해 떠난 태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면 하나는 설악산으로 가고 다른 하나는 금강산 기슭 어딘가 갔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금강산에 그를 추모하고 아끼는 유적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마의태자의 행방

 

필자의 두 가지 가설을 이상하게 보는 독자가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마의태자 문제에 관한 한 또 하나의 가설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의 마의태자로 보이는 사람이 여진 땅에 들어가서 금()나라의 시조가 되었다는 엄연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10년 전에 만주 영고탑(寧古塔)으로 알려진 발해진을 탐방한 일이 있다. 발해진은 발해의 상경이요, 요의 상경이기도 한 역사의 고장일 뿐만 아니라 금 태조가 공격하여 되찾은 우리의 서울이었다. 가던 날 발해진 광화문 위에는 구슬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넋을 잃고 앉아 있는 필자를 향해 그곳 조선족 한 사람이 한 말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이 땅은 중국 땅이 아닙니다. 우리 땅입니다. 중국 사람 말 듣지 마시구레.”

 

 

또 다른 마의태자 행방과 관련해 먼저 고려사를 찾아보기로 하자. 고려 11대 문종 28(1074) 9, 그러니까 신라가 망하고 마의태자가 개골산으로 들어간 해(935)로부터 139년 후의 일인데, 갑자기 동여진(東女眞)의 추장 오고내(烏古)가 죽고 그의 아들 핵리발(劾里鉢)이 자리를 이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 오고내와 핵리발 부자가 남도 아닌 고려인이요 옛날 신라 왕족 김씨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고려로 볼 때 매우 불길한 일이었다. 신라를 멸망시킨 고려가 볼 때 신라왕족 김씨 후손이 바로 코앞에 나라를 세워 국경을 맞댄다는 것은 여간 불안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 김씨는 누구란 말인가. 고려왕조는 그가 경순왕의 투항을 반대하고 개골산에 들어갔다는 마의태자 후손은 아닌지 바짝 긴장하고 정보를 수집하느라 혈안이 되었다. 보고가 들어왔다. 다행히 마의태자 후손은 아닌 것도 같았는데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정보에 따르면 동여진을 장악한 이른바 태사(총독)는 금준(今俊)이란 사람의 후손인데 평주(平州) 사람이었다 한다. 일설에는 김행(金幸)이라고도 한다. 금씨란 우리나라에 드문 성이니 김씨가 맞을 것이고, 그는 몸을 숨기기 위해 함보(函普)라는 법명을 쓰기도 하였다. 이 사람이 영흥에 숨어 살다가 여진 땅으로 월경하여 아지고촌(阿之古村)이란 마을에서 여진 여자를 취하여 극수(克守)를 낳았는데 이가 곧 금나라 시조라는 것이다.

  

 

그러면 평주는 과연 어딘가. 황해도 평산(平山)이 평주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잘못이고 함경도 영흥(永興)이 평주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고려 수도 개성과 가까운 황해도에서는 왕건의 눈을 피하기 어려웠고 여진 땅과 너무 멀었다. 함경도 영흥은 원산 근처에 있는 군사요지로서 여진과 접경지대였다. 여기 같으면 왕건의 눈을 피해 중으로 숨어 살거나 여진으로 망명하기 쉬웠을 것이다.

  

 

영흥을 일명 평주라 한 것은 바로 고려 문종 때 이곳에 평주진을 쌓아 여진의 침략에 대비했기 때문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영흥에는 정변진, 장평진 같은 군사기지가 생겨난 것을 보면, 고려는 이곳을 북방수비의 요지로 삼았던 것 같다.

 

 

함경도 영흥은 또 금강산과 가깝고 설악산과도 가까워서 만일 고려군과 싸워 져서 후퇴한다면 동해안을 거쳐서 함경도 원산 방면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 같으면 재기를 노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의치 않았는지 마의태자는 다시 여진 땅으로 갔다. 아무리 왕건이 마의태자를 잡으려 해도 조국광복을 향한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영흥 땅이야말로 뒷날 태조 이성계가 일어나 고려왕조를 전복한 혁명의 고장이란 사실이다. 대륙을 통일하는 금나라의 시조가 나고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가 난 고장이 바로 영흥 땅인 것이다.

  

 

여진으로 떠난 마의태자 후손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금나라 시조가 된 김행(金幸) 또는 김준(金俊)이란 인물이 과연 경순왕과 어떤 관계인가. 아들인지 손자인지 분명치 않다. 물론 족보에도 나오지 않으며 나왔다 하더라도 믿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다만 그가 마의태자와 같은 외자 이름이라는 사실, 그리고 중 행세를 하며 피해 다녔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순암 안정복은 김준의 형제가 삼형제였다고 하면서,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증언이다.

  

 

현재 마의태자의 후손이라 주장하고 있는 부안김씨 족보에 따르면 김행이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고,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나머지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김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족보 문제는 나중에 좀더 연구하기로 하고 여진으로 간 김행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진은 당시 원시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행과 그 후손들은 국가를 건설할 지혜와 문화가 없는 여진족을 지도하여 나라 세우기에 진력했던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조국 신라를 잃은 마의태자의 한을 풀기 위해서였다.

  

 

그곳 풍속은 흉노와 같아서 여러 부락은 성곽도 없이 산과 들에 분거하였으며, 문자가 없어 언어와 결승(結繩)으로 약속하였다. 그 땅에는 말이 많았는데 준마는 간혹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고 한다. 사람들은 날쌔고 용맹스러웠고 아이들도 능히 활을 잡아당겨 새나 쥐를 쏘아 맞혔다. 커서는 모두 활 쏘고 말을 타고 싸움터에 나가 싸우는 노련한 병사[勁兵]가 되었다. 그러나 각 부락이 서로 자웅을 다투어 통일되지 못했다.

  

 

여진의 강역은 서쪽으로 우리나라와 경계를 접해 있기 때문에 일찍이 거란과 우리 나라를 섬겨 몇 번 와서 조회했다. 그러나 그 예물은 사금이나 짐승 가죽이나 말이었고, 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은으로 후히 주어 보냈다.

  

 

고려사는 이렇게 여진이 후진 사회였다고 하면서 그 위치는 흑룡강 유역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흑수(黑水), 즉 흑룡강의 옛 습속에는 방이 없고 땅을 파서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어 그 속에서 살며 수초(水草)를 찾아다녔으므로 언제나 정처없이 옮겨 살았다. 김행의 후손 극기라는 인물이 토지를 개간하고 곡물을 재배하면서부터 집 짓는 제도가 생겼고 사람들이 그 지역을 납갈리(納葛里)라 이름했다. 그 말은 한자로 거실이란 뜻이었다.”

 

 

당시 여진은 생()여진과 숙()여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김행이 간 여진은 생여진이었다. 생여진은 끝까지 요의 지배를 받지 않다가 결국 요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세워 중국을 지배한다. 이는 신라에서 망명해간 왕자의 힘이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마의태자 후손이 금나라 세워

    

마의태자 후손이 여진(女眞)에 들어가 금나라를 일으켰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도 산견(散見)된다. ‘고려사 세가(世家) 13 예종 10(1115) 3월조에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온다.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일컫고 국호를 금이라 했다. 혹은 말하기를 옛적 우리 평주(平州) ()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거주했으니 이가 금의 시조다라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평주 승 김행(金幸)의 아들 극기(克己)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古乙) 태사(太師)라 하고 고을이 활라(活羅) 태사(太師)를 낳고 활라가 아들이 많아 장자를 핵리발(劾里鉢)이라 하고 계자(季子)를 영가(盈歌)라 했는데, 영가가 웅걸(雄傑)이어서 중심(衆心)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위를 이었고 오아속이 졸하매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

  

 

또한 고려사의 같은 예종 4(1109) 6월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여진 사신이 고려에 와서 옛날 우리 태사 영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종이 대방(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고 했고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항일독립운동가요 민족사학자인 백암(白岩) 박은식은 꿈에 금태조를 만났다(夢拜金太祖)’는 글을 썼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얼마나 분했는지 꿈에 금태조가 나타나더니 이렇게 꾸지람을 하셨다는 것이다.

 

 

너는 조선의 유민이 아닌가. 조선은 짐의 부모의 고향이요 그 민족은 짐의 동족이라. 지금 조선민족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볼 때 매우 측은한 바가 있으나 하늘은 자분자강(自奮自强)하는 자를 돕고 자포자기하는 자를 싫어하시나니 이것이 천의(天意). 너희 조선민족은 아직도 과거의 죄악을 반성하지 못하고 있구나.”

 

 

물론 이 글은 역사소설이다. 그러나 근거 없는 소설가의 소설이 아니라 진실만을 말하는 역사가의 소설이다.

 

 

규장각 부제학을 역임한 김교헌(金敎獻)은 소상하게 신라 왕손이 여진 땅에 가서 먼저 완안부의 지도자가 되고 어떻게 해서 금나라를 세우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그의 한국사 개설서인 신단민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말갈이 발해에 속했는데 발해가 망하니 그 부락의 전체 이름을 여진이라 했다. 또 백두산을 동과 서로 나누어 서쪽은 숙여진이라 하고 동쪽은 생여진이라 했다. 요에 속했으나 생여진은 나라를 스스로 다스리는 제도 아래에서 임금을 태사(太師)라 했다. 그리고 신라의 종실 김준의 아들 극수(克守)를 맞아 왕위에 앉혔는데 부락의 이름을 완안(完顔)이라 하고 그들의 성이 되었다. 완안은 여진 말로 왕자라는 뜻이다.”

 

 

납북 사학자 손진태도 금태조는 황해도인야라는 논문에서 금태조 아골타가 스스로 고려는 부모 지방이라 했고, 중국측 기록 금지에는 금나라 왕은 본시 신라인이요 호가 완안인데 완안은 한어로 왕이란 뜻이라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금태조가 신라인이라는 것은 이미 고려 때부터 전한 이야기여서 고려사에 기사가 너무 많다고 말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와서 실학자 이수광이 그의 지봉유설에서 옛날 금의 완안씨는 본시 고려인이었기 때문에 고려에 매우 후하게 대했고 끝내 침범하지 않았다. 의주는 원래 고려 땅이라 금이 요를 멸한 뒤 고려에 돌려주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금나라는 우리 역사로 편입돼야

 

이제 우리는 여기서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하여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오랫동안 신라가 무기력하게 망했다고만 생각했다. 심지어 이등박문이 고종을 협박하여 양위시킬 때도 신라 경순왕을 인용하면서 양국(讓國)이 마치 한국의 전통인 양 놀려댔다.

 

 

또한 그 뒤에 친일파 이광수가 소설 마의태자를 써서 마의태자의 금강산 입산을 널리 기정사실화했다. 광복 후에도 현인의 신라의 달밤이 히트하여 신라는 백제와 달리 두말하지 않고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것으로 알게 됐다.

 

 

그러나 금강산의 태자 유적지를 가나 설악산의 유적지를 가나, 마의태자는 아버지인 경순왕 앞에서 말했듯이 천명이 아니고서는 신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믿고 충신 의사를 모아 끝까지 역전사수(力戰死守)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의태자의 후손이 여진에 가서 금나라를 세워 선조들이 이루지 못한 유한을 풀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 얼마나 장한 일이며 진실한 역사인가.

  

 

여기서 꼭 해두어야 할 말은 지금까지 중국의 역사로 알던 발해와 요 그리고 금의 역사는 우리 역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주의 유학자들은 감히 중화를 침범한 요와 금나라를 우리나라 역사 속에 끌어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발해는 겨우 우리 역사라 했으나 요나 금은 우리 역사의 울타리 밖으로 몰아낸 것이다.

 

 

지금의 중국사가 성립된 것은 청나라 때의 일이다 그 이전의 중국사는 이른바 중화민족의 역사였다. 몽고는 물론 거란(), 여진()의 역사는 중국사가 아니었다. 이들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킨 것은 청나라였다. 청은 후금이요 여진의 나라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출처: http://bluecabin.com.ne.kr/data_store/kmnala_maitaja.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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