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6. 남북국시대

6.6  2006 9 15일 동아일보 한국 시야 - 역사로 확대해야

 

권재현 기자

 

중국 동북공정의 연구결과를 종합평가하고 대응을 모색하는 고구려연구회 학술토론회에서 한국사의 시야를 금과 청의 역사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됐다.

 

 

14일 오후 국회 헌정기념관 대강당에서 열린 중국의 동북공정 연구성과에 대한 분석과 평가 학술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동북공정 배후의 역사관에 대응할 한국의 새로운 역사관이 필요하다며 이같이 의견을 모았다.

 

 

이날 서영수 단국대 교수는 중국의 역사침탈이 왜곡단계를 넘어서 주변지역 역사를 아예 말살하는 4단계에 이르렀다고 비판했다.

 

 

서길수(고구려연구회 이사장) 서경대 교수는 몽골에서는 우리가 중국사라고 생각하는 원제국의 역사뿐 아니라 흉노, 선비(···북위), 돌궐, 위구르, 거란()의 역사를 모두 자신들의 역사로 간주한다 한국도 중국에 들어선 모든 왕조사를 중국사로 인정하는 사대주의적 역사관을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고구려, 발해의 뒤를 이어 그 땅에 나라를 세운 금과 청의 역사를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역사관이 출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요금사를 전공한 김위현 단국대 명예교수는 여진이 세운 금의 역사에는 금의 왕족이 고구려 또는 신라에서 왔다는 내용이 있고, 금나라 태조 아골타(阿骨打) 여진과 발해는 본동일가(本洞一家)’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송사(宋史)에는 금 태조(太祖) 아고타의 8대조가 통일신라 왕족 출신의 김함보(金函普)라는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으로 기술하듯 금. 고려 시대를 남북조로 분류할 수 있다며 이를 뒷받침했다.

  

 

발해사 전공자인 한규철(고구려연구회 회장) 경성대 교수는 여진은 고구려인의 후손인 발해 주민과 헤이룽(黑龍) 강 유역에 있던 흑수말갈이 합쳐져 이뤄졌다 ·금의 주민 대다수도 발해인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윤명철 동국대 교수는 발해와 통일신라만 남북(南北)국시대로 볼 것이 아니라 발해의 뒤를 이은 요·금과 통일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 역시 남북국시대로 봐야 한다 동북공정을 통해 한반도에만 갇혀 있던 한국사의 시야가 새롭게 개안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주장은 한. 당 이후 중국 본토(중원)에 들어선 한족 정권인 송()과 명()이 북방 민족인 금과 청에 각각 정복당했고, 당나라 멸망 이후 1949년 공산 중국이 건국될 때 까지 1,000여 년간 한족이 만주 지역을 완전하게 지배하지 못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이런 사관에 따라 중국과 역사 갈등을 겪은 몽골은 흉노선비유연돌궐위구르에 이어 요와 원을 자국 역사로 편입했다고 서 교수는 전했다. 권재현 기자

 

6.7  2009 9 5 KBS 1TV [특별기획] 만주대탐사 2부작-2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특별기획] 만주대탐사 2부작-2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금태조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금태조 아골타

 

 

중원에서 최초로 한족을 밀어낸 금태조 아골타, 그의 시조는 놀랍게도 신라인 함보였다. 이것은 전설이나 야사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와 금 건국 시 송나라에서 씌어진 <송막기문>에 명확히 나오고 있다.

 

금시조의 이름은 함보인데 처음에 고려에서  신분이다(금사본기 제 1, 세기)

 

여진의 추장은 신라인이고 완안씨는 중국말 왕과 같다송막기문

 

 

 

금사

 

 

 

송막기문

 

 

고려에서 온 신분이며 신라인인 금시조. 아골타의 출생년도를 고려해 계산해보면 금 시조 함보가 여진에 들어온 시기는 신라 말, 고려 초다. 당시 신라와 고려의 왕권교체기였던 한반도의 사정을 생각하면 두 사서는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아골타의 조상 함보, 그는 과연 누구일까?

 

 

함보, 그는 누구인가

 

 

 

금황실 계보도

 

 

<동명해사록> 함보의 대손 아골타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

 

김부(경순왕敬順王)가 비록 항복하여 고려왕이 합병하였으나 김부의 외손 완안아골타는 곧 권행의 후예로서 능히 중국을 갈라 다스려 백 년 동안 대를 이었으니... (동명해사록 1636)

 

 

조선의 유학자 김세렴은 여진족의 아골타를 경순왕의 외손이며 조선최고가문 권행의 후예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권행의 본래 성은 ()씨였다. 김행의 아들이며 경순왕의 외손인 금의 시조. 당시 족내혼을 했던 신라 왕실의 관습을 고려하면 그의 성이 (덧말:)이며 신라의 후예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동명해사록>  시조와 <금사> 함보는 과연 동일인인가? 

 

 

신라 후예인 왕족과  발해 후손의 왕비족이 세운 나라, 

 

함보를 시조로 둔 금 황실은 발해인을 왕비로 맞는다. 금나라의 성군 세종의 어머니, 4대 황제 해릉왕의 어머니는 모두 발해 여인이었다. 또한 아골타는 발해인을 신뢰하여 발해유민 장호를 새로운 수도 북경 건설 책임자로 등용한다. 발해는 대제국을 경영해본 경험이 있었다금나라는 이런 발해의 경험을 이용하여 국가체제를 확장해 나갔던 것이다

 

 

청 황실의 성씨도  김씨였다

 

 

 

청태조 누루하치

 

 

금 멸망 후 1606, 여진은 다시 중원을 장악했다. 바로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이다 그런데 청나라 황제 성은 아이신 줘러 였다. 아이신愛新이란 금(), 줘러覺羅란 겨레()부족 씨 등을 뜻한다. 결국 금 부족, 김씨들이라는 뜻이다. 신라 왕족인 경주 김씨, 그의 후예인 금 황실, 청 황실까지 그들은 모두 금을 뜻하는 김()씨들이었던 것이다.

 

 

만주역사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금나라, 청나라로 이어지는 만주의 역사는 우리 민족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한족의 영토 중원을 만주대륙에 합병하여 오늘의 중국을 완성한 여진족, 그들 선조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국수주의적 우월감을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반역사적인 동북공정 논리에 정면으로 대응하고 우리 역사를 지켜내어 향후 동아시아와 한반도 지역에 평화의 논리적 근거를 재확인하자는 것이다.

(출처; KBS역사스페셜

http://www.kbs.co.kr/1tv/sisa/historyspecial/view/vod/1605745_30885.html)

 

 

6.8  2012 7 15일 연합뉴스 "여진족 역사, 한국사에 넣어야"

 

중국이 동북공정(東北工程) '장백산 문화론'을 내세워 고구려·발해사가 여진족(만주족)의 금·청나라로 연결된다는 논리를 펴는 가운데 여진족의 역사를 한국사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문화유적학과 교수는 오는 20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국고대사의 시공간적·문헌적 범위'를 주제로 열리는 학술회의에서 연구논문 '한국사의 확대과정과 여진사(女眞史)의 귀속 문제'를 발표한다.

 

 

이 교수는 이 논문에서 청나라 이전의 여진족의 역사는 중국사로 볼 수 없다면서 한국사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만주 지역에서 생성과 성장·소멸을 거듭했던 종족의 역사 가운데 부여와 고구려, 발해는 한국사에 편입됐는데 동일하게 만주 지역에서 활동했던 여진족의 역사는 애매한 상황이 됐다"고 지적했다.

 

 

여진족의 역사는 숙신(肅愼)읍루(邑婁)물길(勿吉)말갈(靺鞨)여진만주족으로 이어진다.

 

 

이 교수는 "(여진족이 세운) 후금(後金)이 산해관 이남으로 진격해 중원 대륙을제패하고 청()이 되었을 때는 중국사인 것이 분명하다"면서 하지만 그 이전의 여진사는 "중국사일 리 없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그 근거로 사료와 문헌을 제시하면서 12세기 이후 정치적으로 만주 지역의 지배 종족이 된 여진족의 국가 기원이 한국과 관련을 맺고 있다고 분석했다.

 

 

'고려사'는 물론 '이역지'(異域志) '신록기'(神麓記) 등 중국 문헌들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시조를 '신라인' 또는 '고려인'이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또 역사학자 손진태가 민족주의 사학자 박은식의 역사 인식을 이어받아 금나라 역사를 한국사에 편제시켰지만 이러한 역사 인식이 계승되지 못했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그는 "여진의 존재는 민족주의 사학자인 박은식에 의해 우리 역사로 인식됐으며 해방 후 출간된 손진태의 저작물에선 숙신 이래 여진의 금사(金史)까지 한국사에 편재했다"면서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후금의 역사까지도 한국사 체계에 편제하는 작업이 유효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간도 문제와 엮어져 있는 이 사안과 관련해 후금의 역사를 한국사에 편제하는 것은 전략적으로도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출처;

http://imnews.imbc.com/news/2012/culture/article/3096870_10138.html)

 

 

6.9  2013 8 12일 스카이데일리 성헌식의 대고구리 중국 중원을 지배한 금·청나라는 우리와 같은 동족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중국의 통일왕국 송나라의 두 황제를 사로잡아 무릎 꿇린 여진족의 금나라는 당시 중국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여진족이 우리 민족과 무관한 것으로 알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시각은 고려 때 윤관 장군이 여진족을 토벌하고 9성을 쌓았으며, 조선왕조 때 김종서 장군이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4군과 6진을 개척했고 청나라가 조선에 쳐들어와서는 삼전도에서 인조임금의 항복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중원에 광대한 제국을 이룩한 여진족의 금나라와 청나라는 우리와 같은 엄연한 단군의 후예들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구리(高句麗)의 후예가 대진국(발해)이고 또 대진국의 후예가 거란족 요나라와 여진족 금나라이며, 금나라를 이은 것이 청나라인데 어찌 대진국(발해)까지만 우리 역사에 포함될 수 있단 말인가. 그 기록의 근거를 찾아보기로 한다.

 

 

금나라의 뿌리는 우리와 같다

 

<금사세기>에 따르면 금나라의 시조 함보는 고려(신라)에서 왔다고 했으며, 금 태조 아골타가 요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나서 발해인을 초유하면서 말하길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동사강목>에 고려의 윤관 장군이 여진을 토벌하고 9성을 쌓은 후 공적문에 여진은 본시 고구리의 부락이다. 본디 고구리가 영유한 곳이어서 옛날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말했다고 돼 있어 고려에서도 여진이 고구리의 후예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금사세기> 금의 선조는 말갈로부터 나왔다. 옛 숙신의 땅이다. 5대 때에 거란에 복속되었다. 강의 남쪽 사람들은 거란에 편입되어 숙여진이라 불렀고, 북쪽에 있는 사람들은 거란에 편입되지 않았으며 생여진이라 불렀다. 생여진 지역은 이른바 백산과 흑수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참고로 생()과 숙()은 곧 신()과 구()의 뜻이라고 한다.

 

 

 

 금나라 황실 가계도 및 금 태조 아골타의 동상. <사진=필자제공>

 

 

말갈은 고구리와 대진국(발해)를 구성하는 주요부족이었다. 그렇기에 당태종이 쳐들어왔을 때 말갈은 15만 군대로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과 함께 싸웠던 것이며, 고구리가 망하자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는 대중상과 함께 대진국(발해)의 전신인 후고구리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신당서>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다. 왕의 성은 대씨이다라는 기록과, <요동행부지> 발해는 흑수말갈의 남쪽에 있으며 실제로는 말갈의 속말부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대진국(발해)가 말갈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한 말갈에 대해 <대금국지>에는 여진은 말갈의 후예이다. 북위··주나라 때에는 물길로 불렸고 수나라에 이르러 말갈로 불렀다. (중략) 거란의 동북 모퉁이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말갈은 옛 숙신씨이다. 말갈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다라는 기록은 여러 사서에 많이 등장한다. <원사지리지> 흑수말갈이 발해에 복속되고 발해가 약해지자 흑수가 다시 그 땅을 회복하니 금나라 시조의 부락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대금국지>에는 금나라 시조 1세 함보(函普)는 처음에 신라에서 왔고, 완안부에 살았기에 성을 완안(完顔)씨라 했다. 신라왕의 성은 김씨로 수십 대를 이어졌다. 금나라 시조가 신라에서 왔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아니다. 나라 이름도 마땅히 여기서 따왔다라는 기록과 금나라의 본명은 주리진(珠里眞)으로 숙신(肅愼)의 음이 변한 것이다. 이것이 뒤에 잘못 전해져 여진(女眞, 慮眞)으로 불렸으며 숙신씨의 후예로 발해의 별족이다. 남쪽으로 고려와 이웃하고 서쪽은 발해와 경계를 하고 동쪽은 바닷가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어 2세 오로, 3세 아랍, 4세 소혁, 5세 실로, 6세 호란, 7세 화륵박으로 이어졌고, 8세인 금 태조 아골타는 화륵박의 둘째 아들이고 셋째 아들이 태종이다. 1115년 태조가 비로소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대금(大金)으로 고치고 연호를 천보(天輔)라고 했다가 수국(收國)으로 바꿨다. 이후 금나라는 1125년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1127년 송나라를 공격해 두 황제를 사로잡는 전성기를 누리다 건국 120년 후인 1234년 칭기즈칸의 몽골에게 멸망당한다.

 

 

 

 감숙성 경안현에 있는 금태조 아골타의 4째 아들 김올출의 비문 . <사진=KBS방송 화면캡처>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고려 예종에게 보낸 국서에서 형인 대여진 금국황제는 아우인 고려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우리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섬기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했다고 말하고 있다. 금 태조의 4째 아들 완안올출의 후손들이 현재 감숙성 경안현에 살고 있는데, 그들이 모시는 사당의 비석에는 김올출이라고 적혀 있다. 이 말은 금나라 황족은 김씨였으며, 감숙성 경안현까지 금나라 영토였다는 의미인 것이다.

 

 

청나라는 우리와 같은 동이족

 

만주에서 활동하던 여진족에 누루하치라는 만고의 영웅이 나타나 1616년 여러 부족을 통일해 나라를 세우고는 금()이라 했다가 아들 태종 때 대청(大淸)으로 바꾼다. 태종은 명나라를 도모하기 전 후한을 없애고자 조선에 쳐들어와 인조임금에게 항복을 받는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삼전도의 치욕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당시 청 태종이 인조임금을 죽이고 조선을 멸망시킬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은 것은 서로 동족이기 때문이었다.

 

 

청나라 건륭황제의 칙령을 받들어 편찬한 사서인 <흠정만주원류고>에는 우리나라가 나라를 세우고 땅을 열어 처음으로 일어났던 동방은 왕조를 일으킨 기반으로서 땅이 신령하고 상서롭다고 하면서 숙신, 부여, 읍루, 삼한, 물길, 말갈, 발해, 신라, 백제, 금을 만주족의 뿌리로 여기고 있다. , 그들의 조상이 우리와 같다는 말이다.

  

 

책 서두에 있는 황제가 내리는 유지에서는 당시 한족들이 명나라를 없애고 들어선 청나라 사람들을 오랑캐라고 비하하면서 반청의식을 조장하고 있는 것에 대해, 건륭황제는 그렇다. 우리는 소위 너희가 말하는 동이사람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숭상해 마지않는 순임금과 주무왕도 모두 이족이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고 너희가 존경하는 맹자가 직접 순임금은 동이사람이요, 주무왕도 서이사람이다라고 했다. 이어 건륭황제는 즉 동이·서이는 단지 동서 지역을 가르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너희 명나라 출신들은 주나라의 후예를 자처하니 서이사람이고, 우리 청나라 사람들은 동이사람이다. 동이사람 순임금의 후예인 우리가 서이의 후예인 너희를 지배하는 것이 무슨 대수일 것인가라고 말했다.

    

 

 

 동이족의 땅이었던 산서성 남부 명조가 원의 1시 방향에 그려져 있다. <이미지=필자제공>

 

 

건륭황제 유지의 근거로는 맹자가 <이루장구 하>에서 말하기를 순임금은 제풍에서 태어나고 부하로 이사하시고 명조에서 죽으셨는데, 제풍·부하·명조가 동이족의 땅이니 그는 동이사람이다.(舜生於諸風 移於負荷 卒於鳴條 諸風負荷鳴條 東夷之地 舜東夷之人也)”라고 했으며, 또한 맹자가 주나라 문왕은 기주에서 태어나 필영에서 죽었는데, 그는 서이사람이었다.(文王生於岐周 卒於畢郢 西夷之也)”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청나라 황족들의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이다. 금나라의 시조 김함보가 신라인이라는 이유로 흔히 신라를 사랑하고 생각하는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하나, 실제로는 만주어로 애신은 금이라 금원(金源) 또는 금족(金族)이라는 뜻이다. 즉 우리말로 김씨네라는 뜻이다.

 

 

 

 건륭황제의 7대손이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KBS방송 화면캡처>

 

 

 300년간 중원을 지배했던 청나라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문을 닫는다. 이는 대제국 고구려가 그때까지 이어지다가 망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동북공정을 무력화시키려면 고구리와 대진국의 후예인 요, , 청나라의 역사를 잘 밝혀야 할 것이다. 그 속에 답이 있기 때문이다.

(출처;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1358)

 

 

6.10  2014 11 23 [한국NGO신문] "금나라-청나라는 우리 민족  신라의 후예..“

 

박정학 기자 

 

심백강 박사, 우리 고대사 바로잡을 중요자료 책 3권으로 펴내

 

 

[한국NGO신문] 민족NGO 박정학 기자 = 20여 년 간 사고전서에 나오는 우리나라 역사 관련 자료들을 끈질기게 영인 발간해온 민족문화연구원장 심백강 역사학 박사가 그 가운데 우리 역사를 바로잡을 핵심적인 자료들만 모아 대중들이 읽기 쉬운 3권의 책으로 발간했다.

 

 

 

▲ 책 설명하는 심백강     © 민족NGO

 

11 17일 사)한배달 사무실을 방문한 심 박사는 이번에 나온 3권의 책에서는 지금까지 강단사학자들이 사료가 부족하여라는 핑계로 바로잡지 못하고 있던 고대사 왜곡의 핵심적 과제에 대한 전혀 새로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선보이는 자료들만 모았다.”면서 몇 가지 예를 들면서 재야 사학자들도 이런 내용을 알고 역사바로잡기 운동을 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일독을 권했다.

 

 

이번에 발간 된 책은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 『사고전서 사료로 보는 한사군의 낙랑』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우리역사 3권이다. 이날 설명한 내용의 핵심을 소개한다.

 

 

되찾은 고조선에서 세상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조선하(朝鮮河)는 송나라 때의 무경총요 왕기행정록에서 찾았고, 노사에서 해내경 고조선사기라고 말한 기록을 찾아냈으며, 태평환우기에서 노룡현의 朝鮮城’, 晉書에서 조선공, 두로영은의 비문에서 선비족의 발상지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록을 찾아냄으로써 중국의 하북성 진황도시 요서지역에 요서조선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내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학자별로 달리 비정한 낙랑군의 위치, 고구리의 수도 평양의 위치, 이번에 발간한 심백강 박사의 새 책 © 민족NGO

 

 

한사군의 낙랑에서는 이병도가 평양이라고 비정했던 낙랑군이 윤내현이 수정했던 난하지역보다 더 서쪽에 있다는 것을, 前漢書에서 갈석 낙랑, 畿輔通志에서 고죽국 낙랑, 大明一統志에서 영평부 낙랑, 路史에서 노룡 낙랑, 武經總要에서 요수 낙랑, 통감지리통석 대사기속편에서 평주 낙랑 등 20개의 책에서 찾아냈다. 동시에 동한 시대 이전에는 현 갈석산이 아닌 그 서쪽 역수 유역에 갈석산이 있었음을 밝혀냈다.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우리 역사에는 고조선 이전 예맥족과 동이족 및 우리 민족의 관계를 밝혀 우리가 예맥족의 후예임을 증명하고, 앞에서 소개한 고조선, 낙랑의 역사에서는 진태강지리지 등을 통해 한과 고조선의 국경이 낙랑군 수성현(지금 하북성 역수 유역의 서수현 수성진)이었음을 밝혔다.

 

 

이어 시경 한혁편 등 여러 사료를 통해 하남성 남쪽에 있던 삼한과 하북성 남쪽의 호타하 유역에 있던 북부여(남부여는 산동성 남쪽으로 봄)를 증명했다.

 

 

그리고 문헌통고』 『통전』 『삼국사기 등을 통해 앞 노룡현 일대의 낙랑에서 출범하여 창려현 지역에 수도를 두었던 요서 고구려의 실재를 설명하고,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도 한반도의 평양이 아니라 요서 평양이었다면서 그것을 읽어버리게 된 이유를 국사편찬위원회 등 이병도 이후의 식민사학자들이 장악한 우리 사학계의 잘못으로 분석했다.

 

 

백제는 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했는데 그 부여가 산동성 부산(鳧山)에서 발원하였으며 신라까지 거느렸던 대제국이었던 요서 백제가 있었고, 소정방이 멸망시킨 것은 백제의 일부분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신라의 장에서는 흠정만류고를 인용하여 계림을 길림 지역으로 보면서 금나라도 신라인 함보가 세운 정권으로 정리함으로써 금나라와 청나라가 우리 민족 신라의 후예임을 설파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사료들은 앞으로 제도권 식민사학계에 의해 왜곡되어 있는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판단됨에 따라 국사찾기협의회(회장 김정권)에서는 사실 사고 전서를 꼬치꼬치 읽은 학자들이 강단이나 재야를 막론하고 별로 없는 것으로 안다. 따라서 이 자료는 제도권과 싸우는 데 매우 좋은 무기가 될 것 같다. 이를 보다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전파하여 우리나라 역사를 바로잡는 데 중요한 도구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겠다.”고 가치를 평가했다.

(출처; 한국NGO신문

http://www.ngo-news.co.kr/sub_read.html?uid=65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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