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6. 남북국시대

6.13.1  2015 6 18일 월간조선 2015 6월호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王家의 후손이다! [역사탐험]  古代史 연구가의 도발적 문제제기

 

 | 주몽예 북방민족사학자·법률학 박사

 

 

 

세계 정복자 칭기즈 칸.

 

 

칭기즈 칸(1162~1227)이 세상을 떠난 지 한 세대가 조금 지난 1260년경 페르시아 사가(史家) 주바이니(Ata^-Malek Juvayni·1226~1283) 세계정복자사(Tarikh-i Jahangushay-i)라는 사서(史書)를 지었다. 이 책에서 그는 칭기즈 칸에게 세계 정복자라는 칭호를 바쳤다. 미국의 역사가 잭 웨더포드(Jack Weatherford) 현대세계를 창출한 칭기즈 칸(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2004)이라는 책에서 칭기즈 칸을 현대세계를 창출한 사람으로 표현했다. 이 위대한 업적을 이룬 칭기즈 칸의 선조는 누구일까?

 

 

1240년에 출간된 것으로 알려진 몽골비사(蒙古秘史)를 보면, 칭기즈 칸에서 위로 10()를 올라가면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룬 고와가 나온다. 그녀에서 다시 10대를 더 올라가면 부르테 치노가 나온다. 우리는 이 부르테 치노가 당연히 몽골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칭기즈 칸과 그의 조상 역사를 기록한 몽골비사는 책 이름을 몽골사 칭기즈칸사라고 하지 않고 비밀스러운이라는 말을 붙여 몽골비()라고 한다. 왜일까? 바로 칭기즈 칸 선조의 비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칭기즈 칸 관련 역사책들을 연구한 바에 의하면, 놀랍게도 칭기즈 칸의 직계 시조는 발해(渤海)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이다. 칭기즈 칸은 그의 19대손(代孫)이다.

 

 

칭기즈 칸이 (==황제)’이 되기 전 어릴 적 이름은 테무진이다. 이 이름은 고구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칭기즈 칸이라는 칭호는 대조영 등의 호칭이었던 진국공(震國公)’ 또는 진국왕(震國王)’의 옛 소리인 텡기즈 콘(Тenggizkon=팅기즈 칸=팅궤트 칸)’에서 나온 것이다.  발해국왕(渤海國王)’이라는 뜻이다.

 

 

세계 정복자 칭기즈 칸은 자신의 이름과 칭호를 통해 자신이 고구려 대무신왕의 후예이자, 발해국왕의 후손이라고 자처한 것이다. 칭기즈 칸이 자신의 종족 이름으로 채택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몽골이라는 말은 말갈(靺鞨)’, 곧 고구려-말갈어로 말골(馬忽)’에서 나온 것이다.

 

 

에르게네 콘 이야기

 

 

 

집사를 지은 라시드 웃딘의 동상.

 

 

칭기즈 칸의 손자 훌라구(Hulagu)가 기반을 잡은 일칸국(Il Khanate·지금의 이란 및 이라크 지역에 있던 몽골제국의 칸국 중 하나-편집자 주)의 재상(宰相)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은 1310년경 집사(集史)라는 역사책을 지었다. ‘모든 튀르크 종족과 타타르 종족의 기원 이야기라고 하는 이 책은 튀르크와 모골(몽골의 튀르크-페르시아식 표현) 종족의 대전쟁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에르게네 콘(Ergenekun) 이야기라고 한다. 티무르 왕조(Timurid Dynasty) 4대 칸이었던 울룩벡(Ulugh Beg·1394~1449)이 집필한 사국사(Tarixi arba’ ulus)에는 에르게네 콘 아르카나 콘(Arkanakun)’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옛날에 몽골이라고 부르던 종족은 지금부터 거의 2000년 전(집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기. 집사의 다른 부분을 보면 이 사건은 라시드 웃딘의 시대로부터 600년쯤 전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필자 주)에 다른 튀르크 종족들과 적대와 대립을 벌여, 그것이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다른 종족들이 몽골 종족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었는데, 얼마나 많이 참살했는지 두 남자와 두 여자를 빼놓고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그 두 가족은 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험준한 곳으로 도망쳤는데, 그 주변은 모두 산과 숲이었고 통과하기에 지극히 어려운 좁고 험한 길 하나를 제외하고는 어느 방향에서도 (길이) 없었다. 그 산지 중간에는 목초가 풍부한 아름다운 초원이 있었는데, 그곳의 이름이 에르게네 콘이었다.

 

 

 그 두 사람의 이름은 네쿠즈와 키얀이었고, 그들과 그 후손들은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혼인을 통해서 (숫자가) 많아졌다.  몽골어에서 키얀 산 위에서 땅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이다. 키얀이 대담하고 매우 용맹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이러한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키야트는 키얀의 복수형이다. 계보상 그와 비교적 가까운 후손들을 옛날에 키야트라고 불렀다.

 

 

그 산과 숲 사이에 사는 무리가 많아져서 공간이 좁아지자, 그들은  모두 함께 모여서 숲에서 수많은 장작과 석탄을 실어와 쌓고, 70마리의 소와 말을 죽여서  대장장이의 풀무를 만들었다. 많은 양의 장작과 석탄을 그 협곡의 아래에 쌓고, 계획에 따라 70개의 거대한 풀무를 일시에 불어대니 그 협곡이 녹아내려서  길이 하나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이동을 해서 그 협곡에서 넓은 초원으로 나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키얀에 소속된 지파가 그 풀무들을 불었다고 한다. 네쿠즈라고 알려진 종족과 그 지파인 우량카트 종족도 마찬가지로 불었다고 한다. (김호동 역주의 라시드 웃딘의 집사 부족지, 파주, 2005, 252~256)

 

 

몽골, 타타르, 튀르크

 

칭기즈 칸은 스스로 자신의 종족을 몽골이라고 일컬었다. 원래는 칭기즈 칸 자신의 종족만을 칭하는 것이었지만, 후일 그가 통일한 몽골고원의 종족들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다. 튀르크·페르시아 등에는 모골’, 인도에는 무갈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타타르(韃靼)’는 칭기즈 칸의 몽골 종족과 대립하다가 칭기즈 칸에게 정복된 종족 중 하나였지만, 중동이나 서방세계에는 몽골족의 다른 이름으로 알려졌다. 중국에서도 명나라 이후에는 몽골족을 달단이라고 칭했다.

 

튀르크(突厥)’ 6세기 이후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종족으로 서방으로 이동하면서 튀르크로 알려졌다. 후일 셀주크튀르크, 오스만튀르크 등이 중동 지역의 패자(覇者)가 됐다. 중동을 비롯한 서방세계에서는 튀르크족은 물론 몽골족과 타타르족을 통틀어서 튀르크라고 부르기도 했다.

 

 

두 사람의 생존자

 

 

 

에르게네 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터키인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다.

 

 

한편 사국사는 이 전쟁의 정황을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오래전 옛날 엘 콘(Elkhon)이라는 모골 종족의 통치자가 있었다. 그의 둘째 아들인 투르 이븐 파리둔(Tur ibn Faridun)은 타타르 칸(Totor Khoni)인 세빈치 칸(Sevinchkhon)과 동맹하여 모골 종족에게 전쟁을 걸어왔다.

 

 

엘 콘과 몽골인들은 이들에 대항해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참패했다. 엘 콘의 아들 카욘(Kayon)과 엘 콘의 양자 누쿠즈(Nukuz), 그리고 그들의 두 아내와 이 두 사람의 간호자 외에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카욘과 누쿠즈 두 사람은 적을 피해 아르카나 콘(집사의 에르게네 콘)이라는 지방으로 도망해 살게 되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집사와 비슷하다. 사국사에 의하면, 이후 카욘의 가계에서 나온 후손을 키요트(Kiyot), 누쿠즈의 후손을 다를라킨(Darlakin)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집사가 말하는 모골 종족의 두 선조이다. 집사는 키얀과 네쿠즈 둘 중 누가 칭기즈 칸의 선조인지 분명히 밝히지 않았지만, 사국사는 카욘의 후손 키요트(Kiyot)씨가 칭기즈 칸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사국사가 칭기즈 칸의 직계 선조로 거명한 카욘의 아버지 엘 콘은 튀르크의 계보(17세기 히바 칸국·Xiva xonligi·의 아불가지 바하디르 칸이 지은 역사책) 등 다른 사서들에서는 일 한(Il Han)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엘 콘(일 한)과 그의 아들 카욘/키얀(Kiyan)’은 과연 누구인가?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에게는 원기(元璣)와 일하(壹夏) 두 아들이 있었다. 일 한은 바로 일하이다. 일 한과 일하는 같은 소리이자 같은 뜻을 가진 이름이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두 인물이 같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역사 기록을 통해 이들이 같은 사람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일 한이 대야발의 아들 일하라는 것은 그의 아들 키얀이 누구인지 살펴보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키야트 ()’씨라는 뜻

 

그렇다면 집사에 나오는 키얀의 후손 종족의 이름인 키야트(사국사 키요트’)’는 무슨 의미인가?

 

 

이 키요트씨는 1008년에 편수된 송본광운(宋本廣韻)을 참조하면, 놀랍게도 바로 ()’씨의 옛 소리(8~9세기경 한자음)이다. 이를 라틴 문자로 표기하면 ‘khiot/qiot’인데, 집사 등이 말하는 키야트와 정확히 일치한다. ‘씨는 우리말 크다에서 나온 씨를 음차(音借)한 것이고, ‘()’씨는 그 뜻(의미)을 따른 한자를 성으로 삼은 것으로, 같은 의미이다. 예를 들어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아버지 이름은 걸걸중상(乞乞仲象 또는 乞乞仲相)이었지만, 대조영은 왕조를 세우면서 씨를 자신의 성으로 삼았는데, ‘이나 는 모두 크다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키얀의 후손인 키야트 씨족의 명칭은 걸씨(乞氏)’,  클씨(大氏)’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키얀의 성씨도 키요트,  걸씨’, 달리 클씨라는 얘기가 된다.

 

 

라시드의 집사에 의하면, 몽골어에서 키얀(Qiyan, Kiyan)’ 산 위에서 땅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를 말한다고 한다. 이를 한자로 쓰면 산골 물 간()’이다. 키얀을 한자로 표기하면 걸간(乞澗)’ 혹은 대간(大澗)’이 된다.

 

 

사국사에서 카욘과 함께 아르카나 콘으로 피신했다고 한 엘 콘의 양자 누쿠즈(집사 네쿠즈(Nequz)’, 튀르크의 계보 등의 니쿠즈(Nikuz)’)는 누구일까? 그는 발해 제2대 왕 대무예(大武藝)의 맏아들 도리행(都利幸)의 아들인 님금이다.

 

 

사국사에서는 누쿠즈의 가계에서 생긴 씨족을 다를라킨(Darlakin)’이라고 했다. ‘다를라킨은 곧 무왕(武王) 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을 의미한다. 송본광운 등을 참조하면 도리행 8~9세기경 한자음은 도리캉이다. 한자 (, )’ 으로도 읽는데(‘行列의 경우), ‘ 8~9세기경의 발음은 (khang)’이었다.

 

 

몽골/퉁구스어나 북방 중국어에는 발음을 하면서 ‘r()’ 발음을 집어넣은 경우가 있는데, 이를 어중삽입(語中揷入) 소리라고 한다. 도리캉에 ‘r()’ 소리가 들어가면 도리--이 되는데, ‘다를라킨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누쿠즈(니쿠즈/네쿠즈)’의 후손 씨족을 다를라킨이라고 일컬은 것은, 네쿠즈의 아버지인 도리행의 후예라는 의미이다.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16세기에 나온 시바니의 서()(Shibani-name)라는 책이다. 이 사서는 샤이바니 왕가(Shaybanids)가 타타르어로 자기 선조의 계보를 기술한 것이다. 샤이바니 왕가는 칭기즈 칸의 장자(長子) 주치의 후손들을 일컫는다. 이 책에서는 네쿠즈를 데르리긴 한(Derligin Han)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데르리긴 한은 곧 다를라킨 한이다(‘ 은 같은 의미이다).

 

 

집사를 보면 〈…링쿰(lıngqum)’이란 말은 키타이어로 대아미르를 뜻한다. 그러나 몽골의 평민들은 링쿰이란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 운운하는 기록이 나온다.

 

 

아미르(Amir)’는 사령관·총독이라는 의미로 이슬람 세계에서 왕족이나 귀족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에미르(Emir)’라고도 하는데, 아랍에미리트연방(UAE) 에미리트 에미르(아미르)가 다스리는 땅이라는 의미다.

 

 

텡기즈 콘 대야발

 

여기서 보듯 바로 키타이어 링쿰 군주(임금)’라는 의미다. 키타이는 원래 거란을 의미했지만, 원나라 때는 양쯔강 이북 지역을 의미했다. 오늘날 서양에서 중국을 지칭하는 캐세이(Cathay)’라는 말이 키타이에서 나왔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 몽골인들은 북방 한인(漢人)’ 지역을 키타이(契丹)’라고 하고, 오늘날 양쯔강 이남의 남방 한족(漢族)’ 지역을 낭기아드’,  남인(南人) 지역이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원나라 때 키타이에는 거란은 물론, 고려, 여진, 발해가 포함된다. 따라서 집사에서 키타이어라고 한 것은 거란말일 수도 있지만, 고려, 여진, 발해어일 수도 있다.

 

 

엘 콘의 양자 네쿠즈는 바로 발해 무왕(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데르리긴 한)의 아들이다. 그는 사국사에는 기록되었으나, 동방사서와 족보에는 기록되지 않은 님금이다.

 

 

그러면 사국사가 일 한(엘 콘)의 아버지라고 하는 텡기즈 콘(Tengizkhon)은 누구인가?

 

 

텡기즈 콘은 대조영의 칭호였던 진국왕이라는 의미다. 송본광운에 따르면 震國王의 옛 한자음은 팅궤트 칸이다. 이것이 팅기즈 칸/텡기즈 콘으로 바뀐 것이다.

 

 

즉위 전의 대조영이나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은 진국왕과 유사한 진국공이라는 칭호도 썼다.

 

 

사국사는 일 한(엘 콘, 일하)의 아버지가 텡기즈 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텡기즈 콘은 진국왕(진국공)’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대조영이나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필자는 텡기즈 콘은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동방사서(중국 등 동아시아의 역사서)’는 대야발을 발해 반안군왕(盤安郡王)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의 사서들, 대씨대동보 등을 종합해 보면, 대조영 가문의 계보상 텡기즈 콘은 대야발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집사에서 튀르크와 모골 종족의 대전쟁으로, 사국사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이라고 기록한 전쟁이 어떤 사건이었는지를 보자. 이는 바로 발해 말갈(몰골, 모골)과 당나라 사이의 동아시아 대전쟁이다. 바로 이 전쟁 때문에 칭기즈 칸의 선조인 키얀과 네쿠즈가 아르카나 콘으로 숨어들어 갔다.

 

 

700년간 동아시아의 강국이었던 고구려는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서방세계에는 무크리(Mukri)’ 혹은 코라이(Koorai)’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 고구려가 나당(羅唐)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한 후 마지막 왕 고장(高藏)과 그의 직계 가속은 모두 당나라 장안으로 잡혀갔다.

 

 

발해 씨는 고구려 왕실의 庶子 가문

 

 

 

발해를 세운 대조영.

 

 

고구려 땅 백산(白山)과 속말(粟末) -고을(靺鞨),  말 키우는 고을의 지방 통치자 말골추(靺鞨酋) 대조영 일가도 포로로 잡혀 당나라 영주(營州·랴오닝성 조양·朝陽)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거란추장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버지 걸걸중상과 그 아우로 추정되는 걸사비우(乞四比羽), 그리고 걸()조영은 이때를 틈타 동으로 빠져나왔다. 이들은 조상의 땅이던 동모산(東牟山)에서 말골과 구려(고구려) 백성을 규합하여 698년에 나라를 세웠다. 이 나라가 우리가 흔히 발해라고 하는 진국(震國) 고려(高麗)’.

 

 

송기호 서울대 교수 등 우리 주류 국사학계는 속말말갈 가문은 고구려국인(高句麗國人)’,  고구려 왕족 또는 일반 고구려인과 전혀 다른 퉁구스(Tungus) 종족이라고 본다.

 

 

그러나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 왕족의 후예이다. 다만 이들은 고구려 왕실의 서자(庶孼·서얼)이기 때문에 고씨(高氏)’ 대신 그와 유사한 의미의 걸씨(乞氏=클씨=大氏)’를 성으로 사용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최치원(崔致遠) 열전(列傳) 당문습유(唐文拾遺)  43에 수록된 최치원의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을 보자. 이 기록들은 고구려(왕족)의 남은 서자들(高句麗殘孽=대조영)이 무리로 모여(類聚) 북의 태백산(太白山) 아래에서 나라 이름(國號)을 발해(渤海)라고 했다고 한다. 이 기록에서 보듯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왕족)의 서자 출신이다.

 

 

건국한 지 약 28년이 지났을 무렵, 발해는 대부분의 고구려 영토를 수복했다. 고구려 때의 국경 마을이던 말골(馬忽=말고을=馬郡), 즉 말갈칠부(靺鞨七部)도 대부분 수복했다.

 

 

이 사태를 지켜보던 당 현종(玄宗)은 발해를 약화시키기 위해 발해 무왕 인안(仁安) 7(현종의 개원 13),  725년에 흑수말갈을 발해로부터 분리시키려 한다. 흑수말갈 부장(部長)을 회유하여 도독(都督자사(刺史)로 임명하고, 그 땅을 당나라의 흑수부(黑水府)로 삼았다. 당 조정은 현지 통치자들을 감독하는 장사(長史)를 파견하여 흑수 지역에 대한 직접 통치를 도모했다. 심지어 당은 흑수부장의 가계에 당나라 황실의 이()씨 성까지 주겠다고 꾀었다.

 

 

대문예의 망명

 

이러한 발해 와해공작을 지켜본 무왕 대무예는 분개했다. 그는 다음해인 726년 당에 빌붙기 시작한 흑수말갈을 치라는 명을 내린다. 정벌군 총사령관을 맡은 무왕의 아우 대문예(大門藝)는 친당파(親唐派)였다. 그는 흑수말갈을 치라는 명령은 당에 대한 도전과도 같으므로 그 명()을 거두어달라고 청했다. 그는 흑수에 이르러서도 형에게 전갈을 보내 다시 같은 뜻을 전했다.

 

 

이를 받아본 국왕 형 대무예는 크게 노해 문예를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대신 자신의 사촌형 대일하를 파견했다. 동시에 문예를 잡아 처벌하라고 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문예는 급히 당나라로 망명해 버렸다. 이 부분을 사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엘 콘 통치 시에 그의 둘째 아들인 샤 오파리둔 투르 이븐 파리둔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병사와 대인(大人), 수없는 군대와 함께 모바라운 나흐르(Movarounnahr)와 튀르키스탄(Turkistan) 땅으로 떠났다. 그는 모바라운 나흐르에 이르렀으나, 그곳에서 머물며 살지 않고, 튀르키스탄 지역으로 말을 달렸다.

 

 

모바라운 나흐르는 오늘날에는 우즈베키스탄 지역이라고 하지만, 원래 아랍어로 강 건너의 땅이라는 말로 실은 흑수 너머의 말갈(黑水靺鞨)’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튀르키스탄은 당시의 몽골고원에 자리 잡은 돌궐(突厥)과 실위(室韋·내몽골·당나라 때 만주 지역에 살던 몽골-퉁구스계 종족-편집자 주)를 가리키고 이 역시 흑수말갈을 말한다.

 

 

동생 대문예가 당나라로 달아나자, 대무예는 당 현종에게 대문예를 죽이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당 현종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얼마 뒤 대무예의 맏아들 대도리행(大都利行)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아마 대문예의 송환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당나라 장안에서 당초 목적과는 달리 이른바 숙위(宿衛·중국 당나라 때 조공국 왕자들이 궁궐에서 황제를 호위하는 것-편집자 주)하다가 728 4월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도리행이 죽은 직후 당나라는 예()를 갖추어 그의 주검을 본국에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도리행이나 그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사라진다.

 

 

발해- 전쟁

 

 

 

집사에 실린 몽골족의 전쟁 모습.

 

 

그로부터 45개월이 지난 732 9, 무왕 대무예는 대당(對唐) 전쟁을 선포한다. 압록강 하구에서 발해군을 출발시켜 당나라 등주(登州)를 치게 한 것이다. 바로 이 발해의 등주 진공(進攻), ‘동방사서는 기록했으나 사국사는 생략한, 바로 그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의 서두 부분이다.

 

 

말갈(발해), 곧 모골 군사는 우선 압록강의 지류 포석하의 박작구에서 집결한 뒤 732 9월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에 상륙했다. 그리고 발해 장군 장문휴(張文休)는 등주를 약탈하고 발해군을 맞이해 싸운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을 전사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당 현종은 우령군장군(右領軍將軍) 갈복순(葛福順)에게 반격을 명했다. 이에 관한 전투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장문휴의 발해군은 갈복순의 군대에 의해 오히려 궤멸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발해의 등주 기습 다음해인 733년 개원 21(무왕 15) 봄 정월, 당 현종은 당나라 군대에 발해 본토 공격을 명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신당서(新唐書) 발해열전(渤海列傳)’ 등이 이를 기록했다. 이때 당 현종은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幽州)로 가서 병사를 모아 발해로 진공하도록 했다.

 

 

대문예는 바로 사국사 타타르의 세빈치 칸과 동맹하여 모골 종족에게 전쟁을 걸어왔다고 한 엘 콘의 둘째 아들 투르 이븐 파리둔이다. ‘투르 이븐 파리둔 파리둔의 아들 투르(Tur)’라는 뜻이다. 이 말은 곧 흑수말갈의 다른 이름인 파리땅(勃利州, 발리주)의 아들 투르라는 말이다.

 

 

대문예의 발해 진공과 동시에 당 현종은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벼슬에 있던 신라인 김사란(金思蘭)에게 신라(新羅)로 돌아가서 1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발해 남쪽 국경을 치게 했다.

 

 

문예가 쳐들어오자 무예는 발해군을 몸소 이끌고 산해관(山海關)으로 유명한 오늘날 허베이성(河北省) 친황다오(秦皇島) 부근의 마도산(馬都山)에 이르러 성읍(城邑)을 공격했다. 이때 오늘날 당나라 장액(張掖·장쑤성) 출신 오승자(烏承玼)가 요로(要路)를 막고 큰 돌들을 깨어 ‘400의 석성(石城)을 구축(構築)했다.

 

 

이 때문에 발해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고, 발해군의 진격으로 흩어졌던 당나라 백성들을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오승자가 구축했다는 석성의 규모로 보아 당나라 군사는 기록상의 ‘1만명이 아니라, 발해 남쪽 국경으로 출동한 신라군 10만보다 몇 배나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양측의 사상자도 매우 컸을 것이다. 이 싸움의 자세한 경과는 더 이상 알려져 있지 않다.

 

 

발해의 남쪽 영토 상실

 

이때 자치통감  신당서가 기록한 대로 남쪽에서는 신라군이 발해의 남쪽 주군(州郡)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10만명은 당시로 보아 대단한 수의 병력이므로 발해와 신라 간의 전투는 매우 치열했을 것이다. 발해와 신라의 전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사서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신라군은 큰 추위를 만나고 눈이 한 발이나 쌓여 전체 병사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이 기록의 공백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앞서 본 사국사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 기록이다.

 

 

당나라 및 신라와의 전쟁이 끝난 후 대무예는 수도를 동모산에서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 현주(顯州)로 옮겼다. 현주는 오늘날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서성진(西城鎭) 북고성촌(北古城村)이라고 추정된다.

 

 

발해-당 전쟁으로부터 5년이 지난 737(무왕 19, 개원 25) 무예가 세상을 떠났다. 당에서 죽은 맏아들 도리행의 아우 흠무(欽茂)가 뒤를 이었다.

 

 

발해-당나라 전쟁의 결과에 관하여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한국민족대백과 발해의 등주 공격은 당에 발해를 가볍게 볼 수 없는 나라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등주 공격 이후 당은 발해를 동북에 위치한 강대국으로 대하고 활발한 문화교류를 행하는 조치를 취했다. 해동성국이라는 발해의 이칭은 당시 발해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서 탄생하였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필자가 파악한 역사적 사실과는 매우 큰 거리가 있다. 사국사에서는 타타르 8대 칸 수윤지와 모골의 일 한 사이의 대전쟁에서 모골군(말갈군)이 전멸당하고, 일 한이 전사하고, 그 가운데 오직 카욘과 누쿠즈(도리행 아들 님금) 두 사람만이 살아남아 갓 혼인한 그들의 아내들과 몇 명의 시종만 데리고 밤의 어스름을 틈타 아르카나 콘으로 도망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대(中古代) 사서의 기록을 정리한 청말(淸末)의 역사가 황유한(黃維翰)이 쓴 발해국기(渤海國記()에는 당 현종이 발해를 친 공으로 패강(浿江·대동강) 이남(以南) 땅을 신라에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당나라와 신라, 흑수말갈과 실위 기병대로 이루어진 4국 연합군이 남북에서 발해를 협공한 결과, 적어도 남쪽 전선에서는 발해가 패해 많은 영토를 빼앗겼음을 보여준다.

 

 

발해가 상실한 이 땅은 바로 요사(遼史)가 전하는 발해 서경(渤海 西京) 압록군(鴨綠軍=鴨綠郡)’ 이남 지역이다. 압록군은 바로 대전쟁에 패한 후 살아남은 키얀(乞澗)과 네쿠즈(님금)가 적을 피해 숨어들어 갔다는 모든 튀르크 종족과 몽골 종족의 고향이라고 알려진 아르카나 콘(Arkanakun=Arqanaqun·집사의 에르게네 콘)’이다.

 

 

아르카나 콘은 어디인가?

 

몽골학자 빌렉트(L. Bilegt), 부랴트(몽골족 후예들이 세운 러시아의 공화국) 학자 조릭투예프(B. Zoriktuyev), 김호동 서울대 교수 등은 일반적으로 집사 아르카나 콘으로 기록한 것을 에르게네 쿤(Ergenekun)’으로 읽는다. 빌렉트는 그 땅을 에르군 콘(Ergun Kun)’으로도 읽으면서, 러시아 측에 있는 아무르강(흑룡강) 상류의 아르군(Argun’)’ 또는 에르구네 물(Ergu’ne mo’ro’n)’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집사가 말하는 아르카나 콘(Arqanaqun)’은 오늘날 학자들이 생각하는 그 아르군(Argun’)이 아니라, 요사 발해서경(渤海西京) 압록군(鴨綠軍)’으로 적힌 지역이다. 곧 말갈(발해) 구어(口語) 압록강(鴨綠江)/() ()’이다. 이곳이 바로 아르카나 콘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무엇보다 당시에 -/-로군으로 소리 났을 압록군(鴨綠軍/鴨綠郡)’의 말갈 구어 형태를 복원해 보면, 이는 아우로군(鴨綠郡)()  또는 아우로강(鴨綠江)() ()’이다. 필자 등 몽골어·튀르크어 등을 이해하는 이들이라면 이 소리가 세월이 흘러 몽골-튀르크어화하면서 그 소리가 아로간나 쿤을 거쳐 아르카나 콘으로 바뀌어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로 그 소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역사적 진실이다. 특히 집사 사국사가 말한 그 전쟁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정체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구려-발해계 인물들이다. 일 한(=일하), 그의 아버지 텡기즈 콘(=震國公=대야발), 그의 아들 키얀(=걸간), 그의 양자 네쿠즈(=님금),  다를라킨(=도리행) .

 

 

또 종족 이름인 모굴은 말갈-발해어(靺鞨-渤海語) ‘몰골(馬忽)’,  말 고을이라는 고구려어의 말갈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다면 말골인 키얀()과 무왕의 맏아들 도리행의 아들인 님금이 발해-당나라 연합군과의 전쟁에 대패하여 도망가 숨어들었다는 그 아르카나 콘은 당연히 발해-말갈 땅이다. 문어(文語)로는 요사 발해서경 압록군이고 말갈 구어로는 바로 압록강나/() 이다.

 

 

집사 키얀 네쿠즈 에르게네 콘 계곡으로 들어간 뒤 세월이 흘러 그들의 후손이 불어나, ‘키야트, 또 원래는 몽골이 아니었던, 우량카트(우리 사서의 吾良哈=오랑캐) 등 및 몇 지파가 생겼다고 한다. 그 가운데 키얀의 후손인 콩그라트(Qungrat) 종족이 먼저 아르카나 콘을 뛰쳐나왔다. 이어 나머지 모골 종족이 그곳에서 나왔다고 한다.

 

 

집사가 말한 그 콩그라트 종족의 전설적인 시조는 황금항아리(Bastu-i jarrin)’라는 인물이다. 집사는 그를 군주(임금)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필자는 황금항아리가 누구인지 동서방 사서와 우리 역사를 통해 추적해 보았다. 그는 타타르어 사서인 칭기스의 서에 나오는 알툰 칸(Altun Han)’,  황금의 칸이었다.

 

 

今幸의 등장

 

 황금의 칸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금행(金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은 누구나 아는 것처럼 황금이고, ‘()’은 앞에서 도리행의 경우에 살펴보았듯이, 옛날 한자음은 ’,  (=군주)’이다. 금행은 고려사에는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今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들 함보(函普)가 바로 후일 금()나라를 여는 아골타의 조상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황금의 칸의 계보이다. 19세기 초 중앙아시아에 있던 몽골계 콩그라트 왕조의 역사책 행운의 정원 황금의 칸 집사에 나오는 키얀의 손자라고 한다.  금행은 발해 대야발의 손자인 키얀의 손자라는 이야기이다.

 

 

일부 우리 학자들은 금사(金史)》 《대금국지(大金國志)》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등을 잘못 이해해 이 금행의 아들 함보를 신라인(新羅人) 김함보로 보고 있다. 또 조선 시대 김세겸의 잘못된 기록을 곧이 곧대로 믿고 함보의 아버지 금행 신라인 김행’, 곧 안동 권씨 시조 권행(權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은 칭기즈 칸과 그의 부인 콩그라트 종족의 부르테 우진의 선조가 된 집사 황금항아리(=황금의 칸=알툰 칸)’이고, 대야발의 4세손이다.

 

 

집사에 의하면, ‘황금항아리에게는 삼형제가 있었다. ‘추를룩 메르겐(조선 말갈)’ ‘쿠바이시레(커가씨네=흘석렬·紇石烈)’, 그리고 투스부다우(대씨부 대왕)’가 그들이다. 이 세 아들은 고려사 금행의 세 아들,  금사에 나오는 금 시조 삼형제, 곧 카고라이(阿古逎=아고래=고구려), 함보(=큰보=큰가), 그리고 보코리(보활리·保活里=무구리=고구려) 삼형제와 같은 인물들이다.

 

 

두 그룹으로 대조되는 이들의 이름은 얼핏 보면 매우 낯선 이름들이지만, 두 가지는 다 위의 괄호 속 이름 풀이에서 보듯이, 우리말 말갈어에 기반한 퉁구스어(추를룩 메르겐)와 말갈어(쿠바이시레), 그리고 한자(투스부다우)로 된 칭호이다.

 

 

황금항아리 失地 회복

 

 

 

나라 태조 완안아골타.

 

 

집사에 의하면, 이 황금항아리(=금행)의 일족은 그들의 8촌 형제인 발해 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 때에 발해서경 압록강네 군을 뛰쳐나왔다. 선왕이 90여 년 전 발해-당나라 전쟁에서 패해 잃어버린 흑수말갈 등 북방 영토와 남국(南國) 신라에 빼앗긴 한강 이북 영토를 회복하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황금항아리는 이에 적극 호응했다. 이때 황금항아리의 콩그라트 종족은 다른 모골(말갈) 종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골 종족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 급히 전투를 위한 채비를 갖추고는 발해 남쪽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대장정에 나섰다. 이것이 집사에 나오는 콩그라트 종족의 에르게네 콘 대이탈-대장정 이야기이다.

 

 

그 결과 황금항아리 일행은 신라와의 싸움에 이겨, 평주(平州), 곧 오늘날 황해도 평산 이남까지 회복했다. 어쩌면 경기도 개성은 물론, 한강 이북까지 진출했을 수도 있다.

 

 

황금항아리 금행은 그 공으로 평주에 눌러앉아 군왕(郡王)이 되었다. 이 때문에 집사는 그를 군주()와 같은 인물이라고 한 것이다. 고려사 예종 조 본문은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이라는 비밀코드로 그를 기록했다.

 

 

튀르크의 계보에 의하면, 황금항아리(=금칸=금행)의 큰아들인 아고래(=카고라이=고구려)에게는 콩그라트(Konkirat)’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이 집사가 말하는 좁은 의미의 콩그라트 종족(지파)’의 소() 시조가 되었다. 칭기즈 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이 이 종족 출신이다. ‘콩그라트 큰고려씨’,  고구려씨라는 말이다.

 

 

황금항아리의 둘째 아들 함보는 당시의 발해 반안군(길주)으로 들어가 반안군왕이 되었다. 금사에서 함보가 여진 완안부(完顔部)로 들어가 완안부인(完顔部人) 혹은 완안부장(完顔部長)이 되었다는 역사의 기록은 이 사실이 잘못 알려진 것이다. 그의 생시에는 이른바 여진은 없었고, ‘발해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함보의 두 아들 중 큰아들이 코로(烏魯·오로=胡來·코라이=高麗·호래)이다. 이 코로의 6세대 후손이 금나라를 세운 완안 카고리다(阿骨打·아골타)이다. 이 가계는 집사가 말하는 예키라스 종족이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한치윤(韓致奫)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놀랍게도 이 종족을 삼한(三韓)의 종족 야크라씨(役拏氏·역라씨)’라고 기록했다. 이 가계는 분명히 우리 종족이다.

 

 

모든 몽골의 어머니 알란 고와

 

 

 

라시드 웃딘의 집사에서 묘사한 칭기즈 칸의 즉위식 장면. 칭기즈 칸은 그의 호칭을 통해 자신이 고구려-발해의 후예임을 드러냈다.

 

 

함보의 아우 보활리(保活里)는 함보와 함께 고향 평주를 떠나 야라(耶懶·오늘날 함흥)로 들어갔다. 이 보활리의 3대손이 바로 집사의 투스부다우의 3세손 코를라스다. 이때부터 이 가계는 코를라스 종족으로 불린다.

 

 

코를라스 종족 원사(元史)와 우리 사서가 말하는 카라로스/합란로씨(合蘭路氏)’. 청대(淸代)에 나온 황조통지(皇朝通志)는 이들을 고려나씨(高麗那氏)’라고 기록했다. 이들은 함경남도 함흥에서 집성부락을 이루어 살았다.

 

 

이 가계는 몽골비사에서는 코리라르다이 메르겐(고려나라씨 말갈)의 코리-투마드(고려-주몽) 라고 한다. 부랴트족 사이에 전해지는 말로는 코리 메르겐(고려 말갈)의 코리-부랴트(고려-부여) 종족이라고 한다.

 

 

이 지파에서 나온 이가 바로 코를라스의 딸이자, 칭기즈 칸의 10대 선조로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란 고와(함경도 阿蘭지방의 乞哥, 곧 걸씨 부인)이다.

 

 

지봉(芝峰) 이수광(李睟光) 지봉유설(芝峰類說) 후금(後金)’, 곧 청()나라 태조 아이신지로 누르하치(愛新覺羅 努爾哈赤建)의 가문이 전조(前朝), 곧 고려(高麗) ‘왕씨(王氏)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명()으로 지은 만주원류고에서 청나라 황실은 자신들이 발해 말갈의 대씨와 금나라 왕가인 완안씨의 후손이라고 자처한다. 놀라운 일이다. 고구려와 말갈의 발해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고려,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로 이어진 것이다.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커부려 칸=고구려 칸)’의 시대에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Il Milione)에서 칭기즈 칸 친기 칸(Cinghi Kane)’이라고 기록했다. 당시 친구이 칸이라고 발음하던 진국왕(震國王=발해왕)’이라는 의미다.

 

 

칭기즈 칸의 어릴 적 이름은 테무진(鐵木眞)’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학자가 이를 (터머르/데미르)를 다루는 대장장이 또는 철인(鐵人)’이라고 해석한다. 이 이름에 대해 원사 태조기(太祖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조(太祖)의 휘()는 테무진이고()은 키얀씨(奇渥溫氏, 기옥온씨=키야트 칸씨)이고, 몽골부인(蒙古部人)이다.  처음에 열조(烈祖·칭기즈 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부를 쳤을 적에 그 부장(部長) 테무진을 사로잡았다.  열조는  이로 말미암아 사로잡은 테무진의 이름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는데(名之)그 뜻()은 무공(武功)을 가리킨다.

 

 

여기서 보듯 테무진 위대한 무공(武功)의 신()’이라는 뜻인 고구려 3 대무신왕이라는 말이다.

 

 

칭기즈 칸의 후예들

 

테무진은 자기 시대까지는 그 이름조차 없던 땅에서 태어나 여러 부족을 통일했다. 그리고 페르시아인 사가 모스투피 카즈비니(Mostufi Qazvini·1281~1349)가 쓴 선별된 역사(Tarikhe Gojide)가 말하듯이, 처음으로 자신의 나라 이름을 몽골(=말갈)’이라고 했다. 이는 당시 이미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던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진국왕(=발해왕)’을 뜻하는 칭기즈 칸을 자신의 왕호로 택했다.

 

결론적으로 세계 정복자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인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오늘날에도 남북한과 몽골공화국으로 이어져오고 있다.<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출처 | 월간조선 2015년 6월호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mcate=M1004&nNewsNumb=20150617624&nidx=17625)

 

 

6.13.2  1300년 동안 숨겨진 칭기스칸 가계의 비밀 ;칭기스칸 가계의 비밀 코드를 찾아서(1) - 전원철 박사 인터뷰

 

『[월간조선] 6월호에는 북방민족사학자 주몽예씨의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왕가(王家)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다소 '도발적인' 기고문이 한편 실렸다. 주몽예씨는 칭기스 칸 연구를 위해 29개국 언어로 된 사서를 읽고 이를 전부 비교대조한 결과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였다고 한다. 그의 기고문에 대한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주몽예씨의 본명은 최근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1. 2을 펴낸 전원철 박사인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pub]은 그가 칭기스 칸 연구에 뛰어든 계기와 [월간조선] 기고문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직접 만나 보았다. 인터뷰 분량이 길어 3회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칭기스 칸은 발해 왕가의 후손" 

 

 

 

'세계 정복자' 칭기스 칸.

 

 

2015 6월호 <월간조선>에는 아주 흥미 있는 기고문 하나가 실렸다. 주몽예라는 북방민족사학자가 쓴 <칭기스 칸은 고구려-발해(渤海) 왕가(王家)의 후손이다!>이라는 장문의 기고문이 그것이다.

 

 

이 기고문에서 필자는 우리가 그 동안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문제를 제기했다. 바로 12세기에 아시아-중동-유럽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의 영웅 칭기스 칸이 고구려-발해 왕가의 후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주몽예씨의 기고문을 보면, 막연히 몽골과 우리는 서로 관련이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 것이 아니다. 그는 매우 구체적으로 칭기스 칸은 발해(渤海)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제19대손이라는 것을 칭기스 칸의 족보 계보를 통해 증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그는 역사언어학적 고증을 통해 칭기스 칸의 어릴 적 이름인 테무진은, 그가 강인하고 위대한 인물이었음을 가리키는 철인 이라는 일반적인 풀이와는 달리, 고구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혔다. 또 칭기스 칸이라는 칭호도 일반적으로 왕중의 왕 이라는 일반적 풀이와는 달리, 대조영의 호칭이었던 진국공(震國公)’ 또는 진국왕(震國王)’에서 나온 것으로,  발해국왕이라는 뜻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월간조선> 기고문을 <조선pub> 사이트를 통해 소개하자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그가 칭기스 칸을 연구하게 된 배경과 <월간조선> 기고문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주몽예씨를 직접 만났다.

  

 

고구려-발해=고려-금나라-원나라 제국(諸國)-청나라가 한 가계

 

 

 

북방민족사학자 전원철 박사.

 

 

그는 최근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1. 2 (비봉출판사)을 펴냈다. 책에 소개된 그의 약력을 살펴보니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외무부 유엔국 유네스코담당자문관,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체첸전쟁 현장주재관을 거쳐, 미국에서 법학박사를 딴 후, 미국로펌에서 변호사로 근무했다고 되어 있다.

 

 

2권으로 이루어진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 <월간조선> 기고문에 미처 소개하지 못한 칭기스 칸 선조의 역사를 추적한 광범위한 연구결과를 담고 있다. 그 결과 그는 단지 세계정복자로 알려진 몽골의 위대한 인물 칭기스 칸의 선조가 우리의 고구려-발해 왕가임을 증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동안 수수께끼로 남아왔던 우리 역사의 여러 잃어버린 고리들을 찾아내 보여준다.

 

 

몽골비사 등에는 칭기스 칸의 선조계보가 나오는데, 학자들은 그것이 칭기스 칸에서 3~4대를 제외하고는 허구나,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왔다. 또 학자들은 그 계보에 나오는 인물들의 시대나 그들이 살던 장소, 그들이 행한 일들의 실체도 전혀 이해하거나 규명한 바가 없었다.

  

 

그런데 전 박사는 이 계보에 나오는 인물들 하나 하나가 실존인물이며, 그들이 살던 시기, 심지어 연도까지 규명해내고, 그들이 살던 곳이 막연히 몽골의 그 어디쯤이라는 식이 아니라, 우리 땅 어디 어디라고 구체적으로 오늘날의 지명까지를 알려주고 그들이 살면서 이룬 일들을 입증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우리 역사의 여러 잃어버린 고리들을 보면, 그는 고구려는 우리, 말갈(발해)은 퉁구스족이라는 주류학설을 뒤엎고 발해를 세운 칭기스 칸의 선조인 대()씨 가문은 고구려왕가의 서자(庶子) 집안이며, 고구려와 발해는 한 가계에서 나온 우리 역사라는 것이다. 또 발해가 망하는 시점 직전에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 신라의 개성호족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발해 왕가의 외손임을 밝힌다.

  

 

구체적으로 왕건은 금()나라 시조 함보(函普)의 아버지 금행(今幸)의 외증손이라고 밝힌다. 왕건은 거란이 발해를 무너뜨리자, 격노하면서 예물로 보내온 낙타들을 만부교 다리 아래에서 굶어 죽게 하면서, 거란과의 국교수립을 거부했다. 이 때 그는 발해는 내 친척의 나라라는 말을 하면서, 망명해 온 발해 세자 대광현 일행을 자신의 왕씨 종적(宗籍, 족보)에 올리는데, 그 이유는 한 집안 종씨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왕건이 몸소 보인 그 미스터리한 선언(발해는 내 친척의 나라)과 행동(발해 세자를 자신의 족보에 올린 것)이 이해가 될 수 있다.  926년 발해가 무너진 우리 북한 땅에서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가 명백히 보여주듯이 서기 948년 고려 정종 3(定宗 三年)때부터 이미 여진(女眞)이 들어섰는데, 이는 발해의 계승국이었음을 보여준다.

  

 

금 시조 함보는 이때에서 약 3세대 전에 장차 여진으로 불리게 될 발해 반안군(盤安郡)으로 들어갔는데, 발해가 망한 뒤 4세대 후에 함보의 4대손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금나라를 세웠다.

 

 

이와 관련, 최근 수년간 몇몇 학자들이 신문, 방송 인터넷, 논문 등에서 주장하여 금 태조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가계가 신라 왕족이라고 하는 견해가 광범위하게 퍼졌는데, 전원철 박사는 책에서 이 견해는 철저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금나라를 세운 완안아골타 7대조 함보(函普)와 그 아버지 금행(今幸)은 남국 신라가 망할 때 936년대의 인물이 아니라, 북국 발해가 엄연히 존재할 때인 840~50년대의 발해 왕족들로 각각 대야발의 5대와 4대손이라고 밝힌다.

  

 

또 그는 신라 왕가의 후손이라고 우리 학자들이 믿어온 청나라의 시조 아이신교로(愛新覺羅:애신각라) 누르하치 역시 고구려-발해-고려와 한 가문인 금나라 황족의 후손이라고 한다. 결국 고구려-발해=고려-금나라-원나라제국-청나라가 한 가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중국이 주장하는 동북공정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그들 왕조를 창조한 것이 우리 민족이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징기스칸>의 한장면.

 

    

한낱 소수의 양치기 야만 유목인이 세계정복?

 

우리는 그동안 칭기스 칸에 대해 몽골 초원의 여러 유목민을 통일한 좀 더 힘 있는 야만적 유목민 부족 출신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수천 년 간 초원에서 양이나 치던 민족이 갑자기 부족 통일을 이루고, 여러 문명 세계를 정복한 동기와 힘의 원천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해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인 전원철 박사의 말대로 칭기스 칸이 고구려-발해의 후손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칭기스 칸과 그의 원정대는 더 이상 말을 탄 야만 유목인이 아니며, 그가 벌인 정복활동도 그저 영토 확장이나 재물 약탈, 혹은 그저 별다른 이유 없이 힘을 과시하기 위해 벌인 게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전원철 박사는 그 이전에는 세계지도에 없는 땅에서 느닷없이 전 세계를 떨게 한 세계 정복자가 탄생했다 아무런 문화, 전통, 기술, 조직력의 배경이 없던 한 줌도 안 되는 소수의 한낱 양치기 유목민 무리 따위가 자기보다 인구면에서 1000배가 더 되고, 또 당시의 온 세상을 지배하던 여러 개의 문명세계를 그렇게 단시일 내에 정복하는 일을 과연 이룰 수 있었을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결국 세계를 정복한 칭기스 칸의 몽골족은 뛰어난 무기 제조술과 오랫동안 집적된 문화와 정보전달체계, 그리고 윤리와 도덕을 겸비하여, 더불어 잘 정비된 사회조직을 가진 고구려-발해-후고구려의 유민들이었기 때문에, 또 여기에다가 그들이 유목민의 말 타는 기술을 잘 조합했기에 그런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 전 박사의 주장이다.

  

 

그동안 주몽예라는 필명을 사용해 온 이유에 대해서 전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부터 근 11~2년 전 제가 지나(China) 또는 중화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르고 중국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하는 그 나라의 관보인 <광명일보> 고구려역사는 중국변방의 역사이다라는 제목으로 이른 바 동북공정을 발포하는 충격적인 글을 발표했습니다.

  

 

그 때 중국이 우리 고대사를 통째로 빼앗으려 한다며 온 나라가 수년째 격노하며 들끓었고, 두 나라 간의 심각한 외교문제가 되었던 것을 모두 기억할 것입니다. 저는 당시 미국에 있을 시절이었는데, 저도 그 소식을 전해듣고 그 충격적인 글을 찾아 읽어 보고 분노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그 글을 썼는지를 원문을 통해 찾아보니, 그 글의 저자가 변방의 무리라는 뜻인 변중(邊衆)’이라는 필명을 쓰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중국(中國)이라는 왕조는 역사상 존재한 적 없어"

 

 

 

전원철 박사가 최근 펴낸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 1, 2.

 

 

전 박사는 이를 보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변방의 무리(邊衆)’따위가 어찌 주몽의 후예에게 조상을 훔쳐갈 음모를 꾸미는가, 비록 땅은 빼앗겼지만, 조상까지 빼앗길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주몽의 후예이다라는 뜻으로 주몽예를 저의 호를 삼기로 했습니다.”

  

 

나아가 전 박사는 우리가 중국을 일반적으로 중국(中國)’이라고 부르는데 이도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중국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이 나라의 정식 명칭은 영어로는 ‘Peoples’ Republic of China,  지나(차이나) 인민공화국이고, 정식국명도 중화인민공화국이므로 중공국 또는 지나국이라고 약칭하여 부를 수는 있어도 중국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니면 좀 귀찮아도 정식국명을 써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부르는 게 좋습니다.

  

 

왜냐하면 중국(中國)’이라는 이름을 국명으로 쓴 이른 바 중국왕조는 전혀 없으며, 원국, 명국, 청국으로 썼을뿐이고, 이 왕조의 외교무대에서 간혹 중국(中國)’이라는 말을 썼을 때에는 이 칭호는 단지 외국을 속국으로 간주하고 자기를 종주국이라고 간주하는 입장에서 그들이 외국인들에게 대해 스스로를 높여 쓰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걸 따라서 그렇게 칭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 박사는 우리가 스스로 지나국 중국이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그 속국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번에 펴낸 저서에서도 주몽예라는 호를 계속 쓸 것을 고집했으나, 소설도 아니고 중요한 역사적 진실을 밝힌 작업인 만큼 본명을 밝혀야 한다는 주변의 권고를 마침내 수락하여 진짜 이름으로 책을 냈다고 밝혔다.

  

 

칭기스 칸의 집안은 자기 조상이 패배한 전쟁의 기록을 후손이 절대 잊지 않도록 기록하였고, 마침내 승리의 기록으로 만들었습니다. 비록 부끄러운 역사일지라도 과거를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비록 발해와 후고구려가 망해 이 땅을 떠났지만 우리 피붙이로 났던 그들이 나중에 전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든 그 역사의 발굴을 통해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똑바로 알고, 또 우리의 미래 비전이 제시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습니다.”

 

 

 

전 박사의 서가 책꽂이에는 온갖 언어로 쓰여진 고대 사서의 원서가 잔뜩 있었다. 몽골, 투르크, 페르시아, 부랴트, 아랍어 등 여러 언어로 된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에 관한 책들. 손 옆의 두꺼운 책은 페르시아어 본 승리의 서(  ).

 

 

 

책꽂이 일부를 좀 더 확대한 모습. 두꺼운 페르시아어 본 승리의 서(  ) 옆에 인도 구르칸 조의 아크바르의 서>와 그 옆의 주베이니의 선별된 역사 등이 보인다.

 

 

 

 

부랴트어 본 몽골비사, 타타르어 본 승리의 서(  ), 투르크의 계보 등이 꽂혀 있다.

 

    

29개 언어로 된 고대 사서를 전부 독파

    

그는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를 연구하고, 칭기스 칸이라는 책을 쓰기 위해 혼자 29개 언어로 된 사서들을 전부 독파했다고 했다.

 

 

서양에서 옛날에 발간된 라틴어 기록들을 비롯하여, 중세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 사서는 물론, 동방의 몽골비사 등 중세 몽골문, 청대 만주어 본, 요사(遼史), 금사(金史), 원사(元史) 및 우리의 삼국사기, 고려사 등 각 사서들의 내용을 교차 체크하여, 인명 및 지명을 각 시대별 언어의 변천과정을 통해 면밀히 분석하였다는 것이다.

 

 

저는 몽골비사, 집사, 사국사, 투르크의 계보 등 서방사서에 기록된 칭기스 칸의 선조의 계보(shejare, 족보)’를 동방 및 우리 사서들과 교차 체크하여 그 인물들의 이름 소리만 대충 맞추어 나가는 식이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곳의 지명, 그들의 활동시기와 연도, 행적, 족보상의 계보까지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우리 사서에서 확인하여 칭기스 칸의 계보를 추적했습니다. 그 결과 사서들의 내용이 서로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에 이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십수개 민족어로 쓰인 중요 원본사서의 해독만 하더라도 전문역사가나 전공자조차도 엄두를 내기 어려울 작업이다. 하지만, 그는 이들 원서의 해독뿐 아니라 그 내용을 대조, 비교, 교차확인까지 해내기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드는 연구·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전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맞습니다. 사실 여러 가지 언어를 이해하는 여러 동서양 역사학자들 여럿이 모여 함께 해야 할 연구를 혼자 해낸 셈입니다. 그 결과 1162년 칭기스 칸 탄생 이래 853년간 숨겨진 비밀, 아니, 그 선조로부터 치면 고구려 멸망 후 1300년 동안 숨겨진 세계사적인 대비밀이 드러났다고 자부합니다. 이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한 학자는 제가 이룬 연구 성과를 보고 세계사 1000년 간을 다시 써야 할 대발견이라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결국 <월간조선>에 기고한 그 담대한 기고문은 자신이 수년간 연구한 결과를 사학계의 전문학자가 아닌 일반독자도 비교적 알기 쉽게 정리한 그 책의 일부를 요약한 내용이었던 셈이다.

 

 

'몽골'은 칭기스 칸 선조의 나라인 말갈’(=물길),  말 고을에서 온 말

 

소위 일류 대학을 나와 좋은 직업을 가지고, 무리없는 생활을 누리던 그는 왜 모든 일을 제쳐두고 갑자기 칭기스 칸 가계 연구에 뛰어든 것일까? 전 박사는 우선 몽골과 칭기스 칸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90년 우리나라가 몽골과 국교를 맺었는데, 당시는 저는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원을 갈까 취직을 할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당시 한국에 유학온 몽골학생을 알게 된 계기로 몽골어에 관심이 생겨 공부를 하였고, 그를 통해 몽골어판 몽골비사를 구입해 읽게 되었습니다.

 

 

몽골비사를 읽으면서 제 마음속에 의문이 생겼는데,  몽골비사 <몽골사> <칭기스 칸사>라고 하지 않고 비밀스러운 이라는 수식어를 달았을까 하는 것 하나와, 칭기스 칸의 선조라고 하는 부르테 치노에 대한 의문 때문입니다. 보통 학자들이 부르테 치노를 몽골어로 잿빛 푸른 이리(蒼狼)’라고 푸는데, 몽골인들은 이 때문에 자신들이 푸른 이리의 자손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저는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었고, 항상 부르테 치노는 과연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떠나지 않은 이 물음을 끈질기게 추적했고, 그 결과 몽골족의 선조라고 하는 부르테 치노는 그 동안 학계와 항간에 알려진 전설적 푸른 이리와는 전혀 다른 말로, 고구려-말갈어인 부여대씨랑’(夫餘大氏郞: 부려-테치-)이라는 말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치노’(氏郞: 씨랑)라는 말은 오늘날 씨족의 종친회장 격으로 고구려-원나라-북원을 거쳐 몽골어로 지농이라는 말로 계승되었다는 것.

  

 

“‘몽골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칭기스 칸이 자신의 종족만을 칭하는 명칭이었는데, 이후 그가 통일한 몽골고원의 종족들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사실 테무진 이전에는 테무진이 통일한 지역은 이름조차 없던 땅이며, 종족의 이름도 메르키드, 케레이트, 타타르, 나이만 족 등 여러 종족이 살고 있어서 하나로 특정되지 않았습니다.

 

 

몽골은 칭기스 칸은 선조의 나라인 말갈’(=물길),  말 고을의 옛 소리인 -고을’,  (, )-고을(, )’에서 생긴 말입니다. 고구려는 여러 개의 고을(구려) 일곱 개의 말 골(말갈)’로 이루어져 커진() 나라 커구려(고구려)’였고, 결국 말갈’, 곧 옛소리로 몰골이 몽골의 어원입니다.”

  

 

전 박사는 칭기스칸은 몽골리아 땅의 여러 종족들을 통일한 뒤 자신의 나라 이름으로 고구려-말갈 가운데 후자를 선택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선조가 바로 말갈(발해) 왕족이었고, 또 그가 나라를 세울 당시에 동쪽에서는 자신과 같은 선조에서 나와 혈통을 나누는 왕건의 고려(고구려)’가 이미 존재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고려라는 국명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몰골(말갈)’의 전음인 몽골을 자기 국명으로 택했다는 것이다.

 

 

 

집사 페르시아어 본의 도분 바얀과 알란 코와기 . 책에 연필 글씨는 전 박사가 독서 중 참고하기 위해 표기해 놓은 것이다.

 

 

 

몽골비사 불어판 주석서. 전 박사가 부르테 치노, 고와 마랄, 보카 등 칭기스 칸 선조의 이름을 불어로 푸른늑대, 흰암사슴, 숫소, 등으로 모두 잘 못 번역해 두었으나, 불어권에서는 가장 유명하다고 지적하는 책.

 

    

칭기스 칸 계보에 등장하는 '투르크어 고어'는 우리 옛말

    

-우선 <월간조선> 기고문을 읽어보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정리를 한번 해주시죠. 어디에 칭기스 칸이 고구려-발해 왕가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겁니까?

  

 

칭기스 칸의 선조에 대한 기록은 우선 중세 몽골어로 쓴 몽골비사를 비롯하여, 집사》 《사국사》 《투르크의 계보》 《칭기서의 서 등 페르시아, 중세 투르크어, 타타르어 된 서방사서와 셀렝게 부랴트종족의 역사 등 부랴트어로 쓰인 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모든 사서의 원문을 모두 비교 대조하고, 텍스트의 행간을 해독하여 우리 삼국사기, 고려사 ·구당서 등 동방사서를 교차 대조하여, 칭기스 칸 선조의 실체를 찾아낸 것입니다.”

  

 

-그런 책에 기록이 있다면, 왜 그 많은 서양의 칭기스 칸 연구가, 동양의 학자들이 그 동안 그런 사실을 밝혀내지 못한 것인지요.

  

 

역사학자들이 당대의 언어를 모르면 모든 시대의 역사 연구가 그렇듯이, 위에 열거된 책을 읽어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칭기스 칸의 선조 계보에 관한 사서는 중세 페르시아, 투르크어, 몽골어, 타타르어, 한문 등 여러가지 옛 언어로 되어있습니다. 이 여러 나라 언어를 우선 이해해야 그 사서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사서들이 특히 각 언어들의 중세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어려움도 있죠.

 

 

또 단지 언어를 이해한다고만 해서 이 사서들의 비밀을 알 수는 없습니다. 칭기스 칸의 선조의 계보는 동방과 서방이라는 엄청난 거리를 두고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시기에 기록되었지만, 서로 매우 일관되게 기록되어 왔습니다. 그 계보 속의 선조들이 살았던 정확한 지방과, 민족, 그 언어, 그 역사를 모르고서는 이 사서들의 비밀을 절대 캘 수가 없습니다.”

 

 

전 박사는 예컨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로 된 사서는 그 언어를 쓰는 민족의 학자들이 읽으면, 외국어로 배워야 하는 우리보다는 비교적 쉽게 읽을 수는 있겠지만, 막상 그 언어를 쓰는 학자들도 그 사서의 진정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그 사서들에 나오는 인명과 지명이 투르크어나 페르시아어 어휘들이 아니기 때문이죠. 당연히 그 뜻을 알 수가 없죠. 그들은 우리말과 우리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이 그 이름들을 그 무슨 투르크어 고어 라는 식으로 풀이했는데, 그들은 막상 그 투르크어 고어휘의 소리나 뜻이 무엇인지를 전혀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말한 그 투르크어 고어는 사실은 우리말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죠. 몽골인들이 왜 하필 투르크어를 썼겠습니까? 또 서방 학자들은 칭기스 칸의 선조들이 오늘날의 몽골리아가 아니라 우리 땅에서 살았다는 점을 몰랐고, 우리 역사도 몰랐기에 그 역사적 진실을 캘 수가 없었던 겁니다.”

 

 

세계의 수많은 학자들이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을 풀지 못한 이유

 

-우리나라 학자들이나, 박사님께서 지나국이라고 부르는 중국, 몽골 학자들은 왜 그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없었습니까.

  

 

우리 역사학자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 타타르어, 몽골어, 만주어, 부랴트어 및 티베트어 등 그런 외국어로 적힌 사서를 읽을 어학적 지식이 없습니다. 대개는 한문이나 이 연구에는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일어, 영어 정도만 이해하는 학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또 더러 이 언어들을 일부 이해하더라도 그 사서들에 적힌 내용이 우리 땅에서 벌어졌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한 거죠. 다른 나라 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칭기스 칸 관해서 수많은 책이 출판되었지만, 박사님과 비슷한 주장이라도 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기존 대부분의 몽골 학자들은 서방 학자들이 완전히 오역하거나 잘못된 학설을 내놓은 것을 그 무슨 선구적 업적이라고 이야기 하며, 서방 학자들이 오류 위에 세운 지식체계에 대한 권위를 맹종하면서 안일하게 답습해온 이유도 큽니다. 쉽게 말해 독자적 연구와 고민 없이 그저 프랑스의 어느 학자가, 독일학자 누구누구가, 러시아의 어느 전문가 누구누구가, 몽골의 어느 교수 누구누구가 이렇게 말한다는 정도의 지식으로 칭기스 칸을 연구해 왔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요즘 학자들은 그렇다 쳐도 중국 본토 학자들의 연구는 어떤지요.

 

 

이미 칭기스 칸 당시부터 송나라 사신 등이나 역사가들이 잘못 알고 기록한 사실이 많습니다. 칭기스칸은 지금부터 약 852년 전에 탄생했지만, 그의 선조 이야기는 고구려가 망한 668, 곧 지금부터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칭기스 칸과 그 선조들이 활동했던 지역의 지명과 인명, 직책 등은 모두 기본적으로는 우리말인 말갈어(고구려-발해어)에 뿌리를 둡니다.

  

 

그렇지만, 그 낱말들이 몽골어, 지나의 한어(漢語), 만주의 퉁구스어, 오늘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투르크어,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란에 이르는 페르시아어와 아라비아반도의 아랍어, 그리고 유럽의 라틴어와 이태리 토스카나 방언 등으로 전해지면서 많은 변화를 거칩니다. 이 때문에 칭기스 칸의 선조 계보를 적은 그 사서들이 기록된 해당 시대의 언어와 역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그 사서들 속의 비밀은 결코 풀 수가 없었던 겁니다.”

  

 

전원철 박사는 고대와 중세, 근세에 걸쳐 기록된 동서방의 어렵고도 다양한 언어로 기록된 사서를 하나씩 해독하면서, 거기에 기록된 선조들의 이름과 그 뜻, 그들이 산 시기와 한 행적 등을 동방사서와 대조하여 확인하면서 칭기스 칸의 뿌리를 찾아 들어갔다 결국 칭기스 칸 선조가 기록된 책에 등장하는 인명과 언어, 지명이 모두 고대 우리말이었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칭기스 칸을 연구했지만, 칭기스 칸의 뿌리인 우리 고대사와 우리 옛말을 모르는 상태에서 아무리 연구를 해봐야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코드가 풀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지명과 인명, 관직이 현재 몽골이나 투르크어에서 비슷한 단어에 연결시켜 해석하거나, 예전의 학자들이 궁여지책으로 풀어놓은 뜻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