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6. 남북국시대

6.11  2015 3 26일 조선pub " 태조 누르하치는 신라인 후손" 고대사학자 심백강 인터뷰 인터뷰()- 동아시아의 문명의 시작과 끝

 

이상흔 조선pub 기자

 

 

 

 

심백강 원장이 사고전서 기록을 토대로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을 표시한 지도. 수성진과 발해만을 잇는 붉은 선이 한나라와 고조선의 국경선이다. 심 원장에 따르면 상고시대 우리 민족의 주 활동무대는 고대의 요서지역으로 불린 발해만 인근의 노룡 지역이다.

 

 

중원 대륙에서 발견되는 삼한시대 관련 유적

 

-낙랑군에 대해서 하실 말씀이 많겠지만, 지난번 인터뷰에서 어느 정도 다루었기 때문에 이야기의 주제를 삼국시대로 옮기겠습니다. 삼국시대 이전에 한반도에 삼한(三韓: 마한변한진한)이 있다고 배웠습니다. 우리 민족의 주요 터전이 발해만에서 시작되는 중원 대륙이었다면 삼한도 한반도에만 존재했을 수가 없겠네요.

 

 

내몽고 적봉시의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는 고조선이 남긴 문화유적이라는 것은 이미 공인된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가점하층문화와 동질성을 띈 문화유적이 하북성 남쪽 서수현(보정시 관할)의 한가영(韓家營) 유적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이는 시경에 나오는 연()나라 부근에 있었다는 한성(韓城: 서주시대 맥족의 한성, 즉 한국)의 위치 기록과도 일치합니다. 바로 서주시대 이전에 있었던 대륙한국의 존재를 문헌과 고고학이 아울러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하북성 서수현 고적 설명 기록 중에는 해왕성(解王城)’에 관한 기록도 등장합니다. 이는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의 시조들인 해모수해부루고주몽과 연관이 있는 지역임을 나타냅니다. 고주몽도 원래 해씨(解氏)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민족은 태양을 숭배했던 민족으로 여기서 말하는 해는 물론 ’,  태양을 상징하는 의미의 한자 표현입니다. 중국의 한족역사상에는 해왕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북성 서수현의 해왕성 유적은 부여의 해부루, 해모수와 관련된 유적이 확실해 보입니다.”

  

 

-우리는 국사 시간에 고구려가 압록강 지류의 졸본(중국 요녕성 환인현) 지방에 자리 잡았다가 나중에 압록강 중류 유역의 국내성(중국 길림성 집안시)으로 천도하면서 발전했다고 배우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국내에 교육부 검정교과서 8종이 그 내용이 대동소이합니다. 고구려에 관한 서술에서 요서(遼西: 오늘날의 요서가 아니라, 북경 북쪽에서 발해만으로 빠지는 조하를 기준으로 한 고대의 요서지역을 말함)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분명히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아 한나라 군대의 침입에 대비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압록강 유역이나 요동지방이 아닌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아 한나라 군대의 침입에 대비했다는 것은 건국 초기 고구려의 영토가 요서지역까지 포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성을 쌓을 때 한나라로부터 새로 땅을 빼앗아서 쌓은 것이 아니라, 한나라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고 했으니, 이때 고구려의 활동 중심지가 이미 요서지역이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왜 오늘날 삼국사기에도 언급된 요서고구려에 대해서 학교에서 전혀 가르치지 않는 것인지요.

 

 

이병도가 삼국사기의 이 조항에 주석을 달면서 잘못 기재한 오류가 아니면 지명의 오기일 것이다라며 요서고구려를 부정했습니다. 이병도는 일제의 식민사학을 계승했고, 우리의 강단사학이 이병도 사학을 계승하고 있으며, 이를 계승한 강단사학의 주장이 국사학계의 통설이 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오늘날 국사교과서에서 요서고구려를 잃어버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심백강 원장은 이병도와 이병도 사학을 계승한 강단사학은 고대의 요동을 오늘날 요하 동쪽의 요동으로 잘못 이해함으로써 한국사를 압록강 이남의 반도사로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데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요서요동에 대한 오해가 한국사를 요서조선요서낙랑요서고구려요서백제를 모두 잃어버린 반신불수의 역사로 왜곡시킨 직접적인 요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고대의 요수와 현재의 요하를 표시한 지도. 산해경 '요수는 위고 동쪽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발해에 주입되며 요양으로 들어간다'고 기록돼 있다. 현재의 요하는 동남쪽이 아니라 서남쪽으로 흘러 발해에 주입된다. 심백강 원장은 "고대의 요수는 오늘날의 요하와는 전혀 다른 강"이라며 "요동요서에 대한 지리적 오해가 우리 고대사를 뒤틀어 놓은 근본적인 이유"라고 말했다.

 

 

심 원장은 고대의 요서요동이 오늘날의 요서요동과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산해경에 의하면 요수는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요녕성의 요하는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갑니다. 요녕성에 있는 모든 강은 지리적으로 볼 때 발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서남쪽 방향으로 흐를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현재 요녕성의 요하는 산해경에서 말한 고대의 요수와는 완전히 다른 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러면 동남쪽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가는 강은 어디에 있는가. 하북성에 있습니다. 가령 하북성 남쪽에 있는 호타하는 동남쪽이 아닌 동쪽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갑니다. 하북성에서 정확히 동남쪽으로 흘러서 발해로 들어가는 강은 조하 난하가 있습니다. 그런데 송나라 때 편찬된 무경총요에 현재 북경 북쪽에 있는 조하가 조선하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조하가 고대의 요수이며 진한시대에 설치한 요서군, 요동군의 기준이 된 것은 바로 이 조하였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병도를 위시한 강단사학자들은 역사지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고대의 요수를 현재의 요녕성 요하로 오인하였기 때문에 여기서 패수를 청천강, 낙랑을 대동강유역으로 보는 등 온갖 오류가 발생한 것입니다.”

 

 

고조선의 '왕험성'이 고구려의 '평양성'

    

-원장님은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우리역사에서 고구려의 원래 수도 평양은 현재의 평양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원래 수도는 어디였습니까.

 

 

당나라 때 두우(杜佑)가 편찬한 통전에 진()나라 때 설치했던 평주(平州) 지역을 설명하면서 <후위(後魏) 시기에 이르러 고구려가 거기에 도읍을 정했다>고 했습니다. 후위는 조조가 세운 위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명칭으로 선비족이 세운 북위 정권을 가리킵니다. 통전 <평주> 조항에는 <평주 소재지는 노룡현에 있다. 오늘날의 노룡현에는 옛 고죽성이 있는데 백이 숙제의 나라였다. 전국시대에는 연나라에 속하였고, ()나라 때는 우북평과 요서군 지역이었다>고 했습니다.

  

 

이곳은 태평환우기 <고조선의 조선성이 있다>고 한 바로 그곳입니다. 다행히 수당시대의 노룡현은 현재 중국 지도에 아직도 그 지명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현재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북위시대, ()나라시대의 평주, 진한시대의 요서군, 은나라시대에 백이숙제의 나라 고죽국이 있었던 그 지역이 바로 요서고구려의 수도가 있던 지역입니다. 남송시대 학자 왕응린의 통감지리통석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노룡현 부근 현재의 하북성 창려현이 요서고구려의 수도 평양이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국역사지도집>에 실린 수나라시대의 지도. 오늘날 하북성 발해만에 있는 진황도시 부근에 북평군 노룡현이 표기되어 있다. 오늘날까지 고대 사료에서 언급된 '노룡'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우리측 기록에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삼국사기<동천왕> 조항에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의 터전이다. 다른 어떤 기록에는 왕의 도읍은 왕험이다>라고 하였다고 했습니다. ‘왕검의 터전 혹은 왕의 도읍은 왕험이다라고 한 것은 국조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울 때 도읍했던 그 평양성을 가리킨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고조선이 도읍한 평양성은 어디인지 궁금해지는데, 바로 동양 최고의 지리서인 산해경 <동해의 안쪽 발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을 조선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발해의 모퉁이가 오늘날의 발해만 일대 요서지역이고, 이 요서지역을 진() 나라시기에는 평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평주의 평은 평양의 평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구려는 427년 장수왕 15년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 고구려의 수도가 현재의 북한의 평양으로 옮겨졌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통전 북위시대에 고구려가 요서의 평주에 도읍했다고 했으니, 장수왕 15년에 옮긴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북한의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중국 북경 북쪽의 조하, 즉 조선하 유역에 있던 요서의 평주라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유명한 수당이 압록강 혹은 청천강 등을 건너 고구려 평양성을 침공했다고 알려진 내용도 완전히 달라지겠군요.

 

 

장수왕이 천도했을 때가 고구려의 국력이 쇠약했을 때가 아니고 광개토대왕 바로 다음 시대로 국력이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을 때입니다. 이 당시 고구려의 강역은 서쪽으로는 발해만을 끼고 있는 요서지역으로부터 동쪽으로는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을 모두 차지하고 있을 때입니다. 668년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한 후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는데, 통전에서 <안동부 지역에 진()나라 때는 평주가 설치되었고, 북위시대에는 고구려가 거기에 도읍을 정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바로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과 당나라가 설치한 안동도호부가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 아닌 평주에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심 원장은 이는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파격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당나라가 멸망시킨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대동강 유역 평양성이 아닌 요서에 있던 평주 평양성이 된다는 결론이라고 말했다.

 

 

 

<중국역사지도집>의 동진시기 평주 지도.

 

 

요서의 터전을 잃고 압록강 이남으로 밀려난 고구려

    

-당나라와 전쟁에서 패하고 나서 짧은 시간에 요서지역에 있던 고구려 주력 세력이 한반도로 이주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고구려가 요서지역의 터전을 잃고 하루아침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 쪽에 새로운 터전을 잡은 것입니다. 이는 후대에 고려가 원나라에 한 번의 전쟁으로 먹히지 않고, 강화도를 배경으로 수십년에 걸쳐 항거하면서 명맥을 유지한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당시 고려는 고구려보다 국력이 약했고, 원나라는 당나라보다 국력이 강할 때인데도 원나라는 고려를 한 번에 삼키지 못했습니다. 강력했던 고구려의 잔존세력(보장왕)이 한반도로 터전을 옮겨 한반도에서 명맥을 유지한 것은 일면 당연합니다.”

 

 

심 원장은 고려시대 원나라의 몽골족은 바로 우리나라 머리맡에 위치하고 있어서 말을 타고 바로 쳐들어올 수가 있었지만, 당나라의 중심은 장안 (지금의 섬서성)이었다 그곳에서 고구려처럼 강력한 나라를 일거에 정벌하여 없앤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고 덧붙였다.

 

 

명나라 때 유명한 학자 정개양(鄭開陽)이 쓴정개양잡저 5 <조선고>에는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평양을 함락시키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자 그 나라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압록수 동남쪽 1000여리에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고구려는 장수왕 때 현재 대동강 유역 평양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당나라가 요서고구려의 평주 평양성을 함락하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자, 동쪽으로 이동하여 대동강 유역에 정착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고구려가 요서에서 대동강 유역으로 수도를 옮겼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심 원장은 정개양은 왕양명의 제자로 <일본도찬>, <조선도설>, <유구도설> 등의 저술을 남겼을 정도로 동아시아의 정세에 아주 밝았던 학자라며 그가 고구려에 대해 이같이 주장했다면 반드시 어떤 명확한 근거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제는 거대한 제후국

 

-백제가 부여를 계승한 나라라면, 결국 백제의 주 근거지도 한반도가 아니라는 말씀이 되는 건지요.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를 포함하여 해안을 따라서 발해만 일대에 나라가 걸쳐져 있었습니다. 청나라 황제의 특명으로 편간된 흠정만주원류고 3권에 보면 <백제는 국내에서 여러 제후나 왕을 세워 그들의 공훈에 보답했는데 송나라제나라(남북조시대의 남조를 말함)시대로부터 이미 그러했다. 그렇다면 이는 백제의 영토는 광활하고 인구는 많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백제가 왕과 제후를 거느린 대제국이었다는 것입니다.

 

 

흠정만주원류고에서 <백제의 강역은 서북쪽으로는 광녕, 금주, 의주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해성, 개주, 동남쪽으로는 조선의 황해도, 충청도, 전라도를 포괄하고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기록을 통해 백제의 융성기에는 한반도뿐 아니라, 중국대륙 동북쪽에 광할한 영토를 소유했던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심 원장은 조선이 친명배청(親明背淸) 정책을 펴는 바람에 조선과 청의 관계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청나라가 한국 고대사를 의도적으로 미화했을 리는 만무하다 다만 자신들의 터전인 만주의 고대사 원류를 추적하다 보니 백제사와 만나게 되었고 그것을 가감없이 기술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백제와 부여와의 관계를 좀 부연해주시죠.

 

 

백제는 고조선-부여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였고, 대륙 깊숙한 요서 지역에 수도를 가질 만큼 강력한 대제국을 세운 나라였습니다. 후한서<동이열전>에 부여국에 대해 설명하면서 <본래는 예()의 땅이었다>고 했습니다. 하북성 예하(濊河) 유역이 북부여의 발상지로 판단되는데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18 <예하> 조항에 보면 <예하를 포오거(浦吾渠)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즉 예하가 후한시대 연간에 포어거로 불렸다는 건데 포어거 부여하의 다른 이름입니다. 후대 금나라에서 부여가 있던 곳에 포여로(蒲與路)’를 설치했고, 명나라에서 복여위(福餘衛)’를 설치했는데, 이는 모두 부여의 음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음이 비슷한 글자로 바꾸어 쓴 것입니다. 중국어에서  로 부여의 와 같은 발음이고, ‘()’ ()’ ()’와 같은 발음에 속합니다.”

 

 

-예하는 정확히 어디에 있는 강입니까.

 

 

명일통지 <예하는 평산현 서북쪽 60리에 위치하고 있다. 강물이 흘러서 평산현 동남쪽을 경유하여 호타하로 유입된다>고 했습니다. 예하는 오늘날 중국 지도 상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오늘날 하북성 남쪽 호타하 부근에 있던 강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상을 종합하면 부여는 그동안 우리가 알아왔던 것처럼 길림성 송화강 일대가 아닌 북경남쪽 호타하 유역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중원에 있었던 고조선의 영토에서 고구려와 부여가 흥망한 것으로서 고조선의 영토가 어디까지였는가를 고증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문제입니다.”

 

 

 

<중국역사지도집>의 청나라 지도. 흠정만주원류고에 따르면 백제의 강역은 한반도 해안으로부터 발해 연안까지 해안을 따라 길게 펼쳐져 있었다. 위 지명은 흠정만주원류고에서 백제의 영역이라고 언급한 지역이다.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운 신라의 후손들

 

 

-금나라 역사서에 금태조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1115~1234)의 시조인 함보(函普)가 신라인이라는 것을 밝혔는데 신라와 금나라와의 관계는 정확하게 어떻게 되는지요.

 

 

금나라는 전성기에 북송을 멸망시키고, 남송과 서하를 굴복시키며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며 120년간 중원을 다스렸습니다. 금나라에 대한 현재 중국 측 기록을 보면 여러 중국민족 가운데 하나인 여진족이 수립한 정권으로 기술했으나 이는 사실과 많이 다릅니다. 금나라는 여진족, 거란족, 한족, 발해족, 고려족 등 다양한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나라를 세우고 경영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통치세력은 신라족 계통이었습니다. 따라서 금나라는 신라족이 세운 정권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여진족이 주요 구성원인데 어떻게 그렇게 보시는지요.

 

 

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제나라와 노나라의 건국을 주도한 통치 집단은 서주로부터 이주해온 세력이었지만, 먼 옛날부터 토착민으로 이 지역에 거주한 원주민은 우이(嵎夷)와 내이(萊夷)였습니다. 이 두 민족은 제나라와 노나라의 민족을 구성하는데 주체 성분이지만, 제나라와 노나라를 우이족 내이족 정권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함보가 신라의 선진문명을 가지고 여진 지역으로 가서 추대를 받아 수령에 취임했고, 그 후손이 여러 여진족을 통일하여 세운 게 금나라입니다. 당연히 신라인이 세운 정권이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여진족이 세운 나라라면 여진족 중에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함보와 그 후손 아골타는 신라인이라는 것이 청나라 이전 중국문헌에 보이는 공통된 견해입니다.”

  

 

-함보는 어떤 사람입니까.

 

 

함보는 신라가 망할 무렵에 여진으로 터전을 옮겼으니 고려에서 온 신라인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고려사의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김극수(金克守)라는 분이 바로 함보와 동일인이 확실합니다. 이 분은 고려에서 망명한 신라왕족의 후예인 김행의 아들입니다.

 

 

고려사에는 금나라 시조의 후손들, 즉 아골타를 비롯하여 금의 초창기 왕들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호칭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청나라 때 나온 흠정만주원류고는 금나라 국호도 신라왕의 김씨 성에서 유래했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청나라 당대 최고 학자들의 종합적인 연구 검토를 거친 끝에 내린 최후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 청태조.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의 후손이다. 아골타는 신라인의 후손이다.

 

 

훗날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의 후손들이 청나라(1616~1912)를 세웠다. 심백강 원장은 동북 백두산 지역에 근거지를 두었던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면서 만리장성 너머 중국의 동북지방이 모두 중국의 강역에 포함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족이 중원을 다스리던 한명 시대에는 만리장성 너머 동북방을 제대로 지배한 적이 없습니다. 고조선부여고구려선비말갈거란여진 등 동이(東夷) 민족들이 이 지역의 토착민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만 또한 청나라의 강희 황제가 중국에 편입시킨 땅입니다.

 

 

오늘날 거대한 중국의 기초를 닦은 것은 한나라도 당나라도 송나라도 명나라도 아닌 바로 동이민족이 세운 청나라 왕조였던 것입니다. 청나라는 애신락라(愛新覺羅) 누루하치가 세운 나라로 원래 국호는 대금(大金)이었으며 그 아들 황태극에 이르러 비로소 국명을 청으로 개정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습니다.”

 

 

심백강 원장은 청나라 황실의 성() ‘애신각라(愛新覺羅)’의 의미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애신은 만주어로 ()’을 의미하며, ‘각라는 여진어에서 원방(遠方)’을 의미하는데 후에 원지(遠支)’를 의미하는 말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결국 만주어 애신각라는 김원지(金遠支)인데 우리말로는 김씨의 먼 지손이 된다는 것이다. 심 원장의 부연설명은 이렇게 이어진다.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는 남송과 몽고의 협공으로 멸망했으나, 잔존세력들이 중국의 동북방지역에서 활동했습니다. 이후 명이 부패하고 방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누루하치가 분열된 여진족의 각 부락을 통일하여 후금을 세웠습니다. 앞서 조상들이 세운 나라 이름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죠. 2대 황제인 황태극이 국호를 금에서 청으로 바꾸면서 국명에 내재된 신라왕실 김씨의 흔적은 지워졌습니다. 하지만, 그 성씨인 애신각라 네 글자에는 청나라가 신라 김씨의 후예라는 의미가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원장님 말씀을 들으니, 우리 역사를 대하는 시각부터 달라지는 느낌입니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합니다. 신라에서 고려로 왕조가 교체된 이후 신라왕실의 김씨 후손들은 중국으로 건너가 다시 김씨 왕조인 금나라를 세웠고, 이 금나라가 발전하여 중국 천하를 완벽하게 통일한 것이 바로 청나라 왕조입니다. 반만년 전 동아시아 최초의 국가 고조선이 밝달족에 의해 요서의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건국되었고, 중국 최후의 국가 역시 밝달족 신라의 후손들에 의해 민족의 영산 백두산 밑을 발상지로 하여 건국된 것입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서 한마디 하신다면.

 

 

저는 제 책에서 동북공정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면 동북공정의 논리는 저절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제가 사고전서 자료를 가지고 쌓은 밝달족의 고조선 장성이 앞으로 중국이나 일본이 우리 역사를 왜곡할 수 없도록 영원한 만리장성 역할을 할 것으로 믿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어느 학파나 정권이 알아주는 일이 아니라, 민족과 역사가 알아주는 일을 해왔습니다. 민족과 역사는 그 무엇보다 생명력이 강하고 길기 때문입니다.”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2&mcate=M1001&nNewsNumb=20150316940&nidx=16941)

 

   

6.12  2012 10 20일 중앙일보 몽골은 한국과 4  고구려 첫 도읍도 몽골에 있었다

 

 

 

최기호 울란바타르대학 총장(오른쪽)이 지난 6일 대학 체육관서 종이문화재단과 함께 개최한 세계평화 기원 종이비행기 날리기 행사서 몽골 어린이와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맞춰 말춤을 추고 있다. [사진 종이문화재단]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의 성산인 자이슨 자락. 현지인의 존경을 받는 한 한국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있다. ‘이태준 열사 기념공원이다. 몽골에서 신의(神醫)로 불렸던 의사 이태준(1883~1921)을 기리는 곳이다. 이태준은 1911년 세브란스의학전문(연세대의 전신) 2회 졸업생 여섯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재학 시절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리고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 박사의 권유로 1914년 몽골로 들어갔다. 그는 몽골 환자들을 치료하며 독립운동을 돕는다. 그러던 중 1921년 몽골을 삼키려던 일본군과 손잡은 백러시아군에 체포돼 38세로 자이슨 자락에서 생애를 마친다.

 

 

묻혀 있던 이태준 열사의 존재를 찾아내고 이런 기념공원을 만든 주역 중 한 명이 최기호(70) 울란바타르대학 총장이다. 최 총장은 오지의 병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분이라며 동시대에 활약한 성자 앨버트 슈바이처 박사와 같은 의인이라고 말했다. 이태준의 별명이 몽골의 슈바이처. 최 총장은 몽골의 비밀 기록을 확인해 그의 존재와 활약상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몽골 정부가 제공한 땅에 연세대가 비용을 대 2000 7월 묘비 제막식을 했다. 당시 기념공원 일대는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은 도시의 팽창과 함께 노른자위 땅이 됐다. 한때 땅을 돌려달라는 요구가 몽골 당국에서 나왔다. 최 총장은 도시에는 공원도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설득했더니 더 이상 그런 말이 안 나온다고 말했다.

 

 

 

 

남한에서 약 2000 떨어진 몽골. 하지만 거리보다 더 멀게 느껴졌던 나라다. 냉전과 남북 분단 때문이다. 남한 땅은 섬 모양을 하고 있다. 북으로는 갈 수 없고 동·· 3면의 바다를 통해서만 외부와 교류하는 나라가 됐다. 최 총장에게도 몽골은 먼 땅이었다. 그는 “90년 몽골에 처음 갔을 때 홍콩과 베이징을 경유해 3일 넘게 걸렸다 중국 항공사의 비행기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아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최 총장이 몽골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한국어와 만주어·몽골어·일본어 등 주변 언어 간 관계를 연구하면서다. 30년 전 도쿄외국어대 대학원 몽골학과를 수료했다. 하지만 냉전의 벽은 적성국가 몽골을 가볼 수 없는 땅으로 만들었다. 길이 뚫린 것은 한·몽 수교가 이뤄진 90년이다. 지금은 직항로가 열리고 4만여 명의 몽골인이 한국에 살고 있다. 한국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 몽골인만 25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전체 인구( 300만 명) 10% 가까운 몽골인이 한국 생활을 체험했다는 말이 된다.

 

 

 

최기호 울란바타르대학 총장은 한국과 몽골은 언어·인류학 적으로 가장 가까운 나라라고 말했다.

 

 

최 총장은 학문적으로 몽골과 고려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탐구해 왔다. 고려시대 청산별곡에서 그는 몽골의 흔적을 읽는다. 몽골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동원한 고려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상태를 고려인 원감국사(圓監國師)가 표현한 작품이란 주장이다. 특히 후렴구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를 몽골어로 해석해 보여줬다. 그 뜻은 이기자 이기자 이긴다 이기리라 이겨.

 

 

우리말에는 많은 몽골어 잔재가 남아 있다. 그중 하나가 부산의 자갈치 시장. 과거 이 곳이 자갈밭이어서 그렇게 불린다는 설도 있지만 최 총장의 해석은 다르다. 물고기를 뜻하는 몽골어 자가스에 직업을 뜻하는 몽골어 가 합성된 단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갈치 시장은 물고기를 파는(잡는) 사람이 모여 있는 곳쯤 된다. 최 총장은 한참을 가다는 말의 어원도 몽골의 역참제도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몽골제국이 정비한 역참제도에서 역참과 역참 사이의 거리( 40) 한 참이다. 이게 먼 거리여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뜻으로 변했다.

 

 

몽골이 말을 키웠던 제주도의 지명에서 몽골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제주도는 1273년 삼별초가 평정된 뒤 몽골 관부가 설치된 곳이다. 1276 8월 몽골 말 160마리를 제주도로 가져와 수산평(현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에 방목했다. 제주도의 조랑말 명칭은 상하의 진동 없이 매끄럽게 달리는 조로모로 주법이란 몽골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한국몽골학회 박원길 회장에 의하면 몽골인들은 말에게 가장 치명적인 설사병 치료제로 몽골 초원에서 지천으로 자라는 약용식물도 가져왔다. 수산평 근처에서 자라는 피뿌리풀이다.

 

 

최 총장은 제주도 지명에 많은 오름은 몽골어로 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산굼부리 역시 가운데가 아름답게 깊이 파인 비탈산이라는 몽골어에 유래했다고 본다. ‘비바리 작다()’ 며느리(바리)’가 결합한 몽골어다. 제주도에서는 이 말이 처녀를 뜻한다. 한라산도 몽골어로는 큰 호수가 있는 산쯤으로 풀이된다.

 

 

최 총장은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의 첫 도읍이 동()몽골 땅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실마리는 올해로 서거한 지 1600년이 된 광개토대왕의 비. 중국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의 광개토대왕비는 아들 장수왕이 대왕 서거 2년 뒤인 414년에 세웠다. 비문의 첫 머리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시조 추모왕(동명성왕)의 행적으로 시작한다. 연구 초점은 바로 추모왕이다. 12세기 중엽 편찬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주몽(朱蒙)’과 같은 인물이다. 13세기 말의 삼국유사에서도 추모왕은 주몽으로 기록돼 있다. 중국의 역사책에는 주몽·추몽·중모·도모 등으로 다양하게 나온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날까. 최 총장은 고구려인이 직접 기록한 추모가 당연히 가장 정확하고, 나머지는 이를 다른 한자로 옮긴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추모는 무슨 뜻인가. 최 총장은 추모왕의 시호가 동명성왕인 데 착안해 샛별(동명성·금성)’이란 뜻의 몽골계 단어인 촐몽에서 기원했을 것으로 본다.

 

 

최 총장이 다음으로 주목하는 것은 추모왕이 남하하는 길에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지나게 됐다는 비문 대목이다. 추모왕은 자신을 죽이려 하는 부여의 대소로부터 도망쳐 후일을 도모하라는 어머니 유화 부인의 명을 따른다. 엄리대수는 삼국사기에서 엄사수’, 삼국유사에선 엄수(淹水)’. 최 총장은 엄리가 강 이름을 나타내는 고유명사의 어근이고, ‘대수 큰 강물이란 뜻이므로 엄니는 아무르(아무+)’라는 강 이름이라고 풀이한다.

 

 

광개토대왕비는 추모왕이 엄리대수를 건넌 뒤 비류곡 홀본(忽本)에 도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37년의 일이다. 중국사서인 위서는 홀본이 아니라 홀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 기록했다. 사서들은 비류곡을 모둔곡(毛屯谷)’이라는 특이한 형태의 지형으로 묘사했다. 몽골어나 여진어로 모드 나무이므로 모둔곡은 바로 나무가 많은 골짜기를 의미한다는 것이 최 총장의 주장이다. 동몽골 부이르노르 할힌골에는 끝없는 초원이 끝나는 지점에 높은 산이 있다. 최 총장은 이 할힌골이 홀승골이라고 본다. 그는 92년부터 수차례 할힌골 부이르노르와 다리강가 일대를 답사했다. 한국의 시골 주거지역에서 자라는 비름나물을 비롯해 초원에서 보기 어려운 풀들이 자라고 있는 지역이었다. 조개묻이 세 곳도 골짜기에서 발견됐다. 유목민이 먹지 않는 조개를 잡아먹는 사람들의 흔적이다. 성터나 석인상도 확인됐다. 또 몽골 여인과 고구려 여인이 초원에서 만나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는 전승설화가 채취됐다. 최 총장이 펴는 주장에 이론이 없을 수 없다. 초기 고구려의 위치를 놓고 설이 분분하다. 하지만 그는 고구려가 동몽골 땅에서 나라를 열었고, 지금도 언어·인류학적으로 몽골이 한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라고 확신한다. 그는 일본이 한국과 8촌쯤 된다면 몽골은 4촌뻘이라고 말했다.

 

 

그가 2년 전부터 총장을 맡고 있는 울란바타르대학에는 몽골인 3500여 명이 공부하고 있다. 지난 8월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한국어과도 설치돼 있다. 학생들은 몽골어와 어순이 같은 한국어를 비교적 쉽게 익힌다고 한다. 최 총장은 ·몽 교류와 협력, 몽골의 발전에 이바지할 몽골 청년들을 키운다는 보람으로 즐겁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몽고 vs 몽골=몽고(蒙古)와 몽골(Mongol)은 한국인에게는 그게 그거 같다. 하지만 몽골인에게 몽고는 치욕의 단어다. 중국인이 몽골을 비하해 붙인 나라 이름이기 때문이다. 글자대로 풀면 몽매하고 고루하다는 뜻이다. 지금도 이런 의미 차이를 모르는 많은 한국인이 몽골과 몽골인을 몽고와 몽고인으로 부르고 있다. 중국에서는 네이멍구(내몽고)’처럼 여전히 몽골을 몽고로 부른다. 고려는 몽골 치하에서 독자적인 왕국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제국의 간섭은 많았으되 외형상 독립국의 지위는 잃지 않았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조선과 이를 잇는 대한제국의 말로와는 대조를 이룬다.

(출처: 중앙일보

http://news.joins.com/article/964581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