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6. 남북국시대

6.15 2007 11 27일 매일경제 800년 전 출판강국으로 우뚝 섰던 고려

 

노원명 기자

 

고려시대는 과학기술이 크게 흥했던 시기였다. 청자로 대표되는 고려의 도예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당시 도예는 기술부가가치가 매우 높은 최첨단산업으로 오늘날 반도체 산업에 비견할 만하다. 청자 못지않게 세계 최첨단을 달린 기술이 바로 고려의 인쇄술이었다. 고려는 출판문화가 매우 발달한 나라였는데 일찍이 방대한 분량의 팔만대장경을 인쇄했다. 또 서양보다 무려 200여 년이나 앞선 1234년 역사상 최초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을 인쇄했다. 아쉽게도 이 책은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1377년에 간행된 `직지심체요절`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받고 있다. 고려는 초일류 과학 문화대국이었던 것이다.

 

 

 팔만대장경 - 세계최대 대장경판 4트럭 70대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해인사 팔만대장경.

 

 

= 국보 32호 팔만대장경은 13세기에 만들어진 세계 최대, 최고(最古) 대장경판이다.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4000 번뇌에 해당하는 84000 법문을 실었다고 해서 팔만대장경이라 불린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한글과 함께 우리 민족의 과학적, 문화적 우수성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그 시기에 이만한 규모와 완성도의 목판을 만든 인쇄술도 대단하지만 8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온전히 목판을 유지해온 보존기술 또한 우리 전통과학의 우수성을 돌아보게 만든다.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19(1232) 초조대장경이 몽고군 침입으로 불탄 후 불력(佛力)으로 몽고침입을 막는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대장경판은 고종 24년부터 35년까지 12년 동안 판각됐는데 준비기간을 감안하면 모두 16년이 걸렸다. 이후 몽고 침입,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강점, 625 등 숱한 전란과 외침을 거치면서도 단 한 번도 불타지 않았다. 규모도 엄청나 4 트럭 70대분에 이르며 총 5200만 글자를 수록하고 있다. 한자에 능숙한 사람이 하루 8시간씩 30년을 꼬박 읽어야 하는 분량이다.

 

 

경판 크기는 가로 70, 세로 24 내외이고 두께는 2.6~4, 무게는 무게는 3 내지 4이다. 구성을 보면 모두 1496 6568권으로 되어 있다. 경판 재료로는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주로 쓰였다. 산벚나무가 74%로 대부분이고 돌배나무가 16% 정도다. 단풍나무, 박달나무, 후박나무, 굴거리나무, 사시나무도 일부 사용됐다. 당시 산에서 베어 온 원목을 바다물에 3년을 담갔다가 소금물로 삶고 민물에서 염기를 빼고 그늘에서 말린 후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경판에는 옻칠이 돼 있어 미적 효과는 물론 방습 및 방부 기능, 아울러 벌레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경판 표면에 먹을 바른 후 2~3회에 걸쳐 옻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옻은 여과, 탈수 등 기본 정제만 한 생옻을 사용했는데 칠 두께는 0.06 정도다.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각은 북위 3548, 표고 645m에 위치하고 있다. 장경각 동쪽의 가야산 자락과는 대략 20, 서쪽 비봉산과는 10도 정도 경사각을 이룬다. 산과 이루는 경사각은 일조량과 직결된다. 맑은 날을 기준으로 했을 때 경판고가 햇빛을 받는 시간은 하절기 12시간(6:3018:30), 가을 9시간(8:0017:00), 동절기 7시간(9:3016:00) 정도다. 바람의 영향도 고려됐다. 연간 계절풍의 방향은 여름철에는 남동풍이고 겨울철에는 북동 내지 서풍이 많다. 산풍(山風)이 초당 8m 이하일 때는 평행기류의 순풍, 8~15m일 때는 약간 소용돌이가 섞인 평행바람임을 감안하면 판전은 항상 서늘한 바람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할 수 있다.

 

 

장경각은 해인사 경내에서 가장 낮은 온도와 다습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내부 공간 기온은 온도차가 섭씨 2도를 넘지 않고 상대습도는 통상 80% 정도를 유지하고 건조할 때에도 40% 이하로 내려가는 일이 극히 드물다. 이는 건조에 의한 경판 변형을 방지하기 위한 의도가 건축 당시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직지심체요절 - 최고 금속활자본서구보다 50년 앞서

 

 

 

 

 

= 현존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의 정식 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주최한 한 전시회에서 `직지심경`이라 소개되면서 한동안 이렇게 불려왔으나 공식 표기는 아니다. 직지심체요절은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든 것보다 약 50년 이상 이른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만들어졌다.

 

 

직지심체요절은 상 2권으로 구성돼 있는데 금속활자본 상권은 현재 전하지 않고 하권 1책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보관돼 있다.

 

 

금속인쇄술의 맹아기에 중앙관서도 아닌 지방 사찰에서 만들어진 만큼 활자본 자체의 수준은 썩 높지 않다. 활자의 크기와 글자 모양이 고르지 않고 부족한 활자는 나무 활자로 섞어 사용했기 때문에 인쇄상태가 조잡하다.

 

 

당시 금속활자를 어떻게 주조했는지를 기록한 문헌은 따로 전하지 않는다. 다만 당시 기술수준을 감안해 유추해 볼 때 밀랍주조법에 의해 주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금속활자 인쇄술 발명의 기원에 대해선 고려 문종연간(10471083) 기원설, 숙종 7(1102) 기원설, 예종 15(1120) 기원설, 충열왕 23(1297) 기원설, 고종 19(1232) 이전 기원설 등이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

 

 

프랑스에 보관 중인 직지심체요절 금속활자본 책의 크기는 세로와 가로 각각 24, 17. 다섯 구멍을 뚫고 붉은 실로 꿰맨 선장본(線裝本) 형태로 되어 있다. 종이는 전통한지에 인쇄됐고 전체가 배접되어 있다.

 

 

직지심체요절이 갖는 금속활자본으로서 특징을 보면 우선 본문의 항렬(行列)이 바르지 않고 비뚤어져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당시 기술수준의 한계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 중에는 글자가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경우도 있다. 인출(印出)된 자면(字面)에서 나타나는 묵색(墨色)의 농도 차이가 심하고 반점(斑點)이 나타나 있는 경우가 많다. 또 일()이나 일() 등의 일부 글자는 아예 거꾸로 식자된 경우도 있으며, 어떤 글자는 인쇄 도중에 탈락된 경우도 있다. 동일 면에서 동일한 활자의 같은 글자모양이 보이지 않는 반면 동일한 활자가 다른 장에서는 사용되고 있다. 글자의 획에 티가 남아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직지심체요절은 왜 프랑스로 건너가게 된 것일까. 1886년 한불 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초대 주한대리공사로 부임한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18531922)가 조선에 근무하면서 수집한 고서 및 각종 문화재에 직지심체요절이 포함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수집경로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으나,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18651935) 1901년에 저술한 `조선서지`의 보유판에 게재된 것 등으로 미뤄 1900년께에는 이미 수집된 것으로 추측된다. 플랑시는 우리나라에서 수집해간 대부분 고서를 모교인 동양어학교에 기증했는데 직지심체요절은 앙리 베베르(Henri Vever, 18541943) 180프랑에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다가 1950년께 유언에 따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됐다. [노원명 기자]

(출처; 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7&no=649603)

 

 

6.16 2016 5 26일 코리아히스토리타임스 고려의 강역은 어디까지인가? 신의주-원산경계의 고려 강역은 일제식민사관...

 

신완순(한울빛새움터 원장)

 

<고려도경>은 대륙고려를 말한다.

 

고려는 남쪽으로 요해(遼海)에 막혀있고 서쪽은 요수(遼水)에 이르고 북쪽은 거란의 옛 땅과 접하고 있으며 동쪽은 금()나라에 이른다.”

 

 

고려의 강역을 기술한 이 대목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3 봉경(封境)편에 기술된 내용이다. 흔히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 불리는 <선화봉사고려도경>은 송나라의 문신이었던 서긍(徐兢, 1091~1153)이 고려 인종 1(1123)때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송나라에 돌아가 고려의 인문과 지리 등을 담아 저술한 40권으로 된 책이다. ()가 명숙(明叔)이며 호()가 자신거사(自信居士)인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은 원래 글과 그림이 같이 있어 도경(圖經)이라 한 것이나 그림은 없어지고 글만 전한다. 고려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 군사, 예술, 기술. 복식, 풍속, 등의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의 강역을 고찰하기 위하여 위의 권3 봉경(封境)편을 이어서 보자.

  

 

고려는 또한 일본유구탐라흑수(黑水)모인(毛人) 등의 나라와 개의 어금니처럼 들쭉날쭉하게 얽혀있다. 신라와 백제가 스스로 그 나라를 곧게 지키지 못하여 고려에 병합이 되니 지금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가 이것이다. 그 나라는 경사(京師, 남송의 서울변경)의 동북쪽에 있는데, 연산도(燕山道)로부터 육로로 가서 요수를 건너 동쪽으로 그 강역은 무릇 3,790리이다. 해도(海道)로 가면 하북(河北)경동(京東)회남(淮南)양절(兩浙)광남(廣南)복건(福建)에서 모두 갈 수 있다. 오늘날 건국된 나라는 바로 등주(登州)내주(萊州)빈주(濱州)체주(棣州)와 서로 바라보고 있다. 옛적의 봉경(封境)은 동서는 2,000여 리, 남북은 1,500여 리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신라와 백제를 합병하여 동북쪽은 조금 넓어졌지만 그 서북쪽은 거란과 접하였다.”

  

 

기존의 역사인식으로는 한반도를 벗어나서 고려의 강역을 생각할 수 없다. 후백제와 신라를 통합한 고려의 강역이 압록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고려에 사신으로 와서 직접 체험을 하고 저술한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마치 다른 나라의 역사를 대하고 있는 것 같다. 압록강과 원산만 이남의 어디에 동서가 2천리 넘는 곳이 있는가? 한 예로 현재의 휴전선은 155마일이다. 사실 155마일도 직선거리도 아니지만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250Km 정도이며 우리 고유의 리()로 환산하면 고작 600여 리 남짓 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위의 <고려도경>에서 이야기하는 고려의 옛 강역 동서 2,000여 리와 남북 1,500여 리는 어디에 조재하여야 하며 후백제와 신라를 통합하여 리가 되었다는 것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또한 고려의 동쪽은 백두대간과 그 너머가 바다인데 어디에 금나라가 있었다는 것인가?

  

 

 

 

 '서북피아양계만리지도', 보물 제1537, 소재지 국립중앙도서관, 제작시기 조선 시대(서기1471), 붉은 화살표 위치가 고려시대 윤관장군이 북방여진족을 축출하고 비석을 세운 공험진이다. 두만강 넘어 700백리라고 되어 있다. 이는 우리가 현재 국사책에서 배우고 있는 신의주-원산만 선 이남의 고려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는 고려의 강역을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고려도경>에 적혀 있는 고려의 강역을 추론해보자.

 

먼저 고려는 등주(登州)내주(萊州)빈주(濱州)체주(棣州)와 서로 바라보고 있다는 기록에서 이 지역이 어디인가를 살펴보면 이 네 곳은 현 중국의 산동성 발해 연안을 따라 북쪽과 서북쪽에 늘어선 지명들이다. 이곳에서 마주보고 있는 곳은 현 중국의 하북성과 요녕성이다. 그렇다면 하북성과 요녕성 중의 하나가 고려의 강역이 시작되는 곳인데 어디일까? 당연히 하북성에서 출발한다. 그 이유는 <거란지리도>에 표시된 요수의 위치와 갈석산에 대한 <통전>의 기록을 들 수 있다. <거란지리도>에 그려진 요수는 현 요녕성이 아닌 하북성에 그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또한 <고려도경>에서 압록강 서쪽에 또한 백랑(白浪)황암(黃嵓)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2리쯤 가다가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른다. 이것이 요수(遼水)라고 하였다.

  

 

따라서 <거란지리도>에 표시된 요수는 현 하북성 천진을 거쳐 발해로 흘러들어가는 영정하일 가능성이 높다. 고려시대 압록강의 서쪽의 백랑황암 두 강이 합류된 요수는 영정하였으며 압록강은 현재의 요하였다. <요사(遼史) 115 고려 편에서 요 성종 3(985) 가을 7월 모든 도()에 명을 내려 각각 병장기를 갖추도록 하고 동쪽으로 고려를 쳤다. 8월 요택(遼澤)이 물에 잠기어 출병을 그만두었다라고 하여 요수가 거란과 고려의 중요한 거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에서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요수는 일명 압록이라 하였다. 대개 예전에는 동북의 모든 물을 일컬어서 압록이라고 칭하였다.”하고 하여 압록이란 말은 고정된 강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압록강이란 지명은 지난 2008 10월 칼럼에서 수계의식을 갖던 특별한 강을 지칭하였으며 나라가 옮겨질 때마다 이동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갈석산은 여러 기록에 나타나는데 당나라 때 두우(杜佑, 735 ~ 812)가 편찬한 <통전(通典)> 186 변방 고구려 편에서 갈석산은 한() 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으며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 오늘날 그 증거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遼水)를 끊고 고려에 들어가는데 유적지가 아직도 남아 있다.”라고 하였다. 이때의 고려는 물론 고구려이다. 그런데 위 기록의 주()에서 갈석산은 오늘날 하북성 북평군 남쪽 20 리에 있으며 고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左碣石)이라 한다.”라고 하여 갈석산은 하나가 아니며 여러 곳에 존재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갈석(碣石)이란 경계를 나타내는 표지석과 같은 것이다. 진시황이 몽념을 시켜 현 하북성 산해관까지 장성을 쌓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산해관까지 장성이 연결된 것은 근대의 명나라 때이다. 갈석산을 현재의 산해관 근처에서 찾거나 심지어는 황해도 수안을 한 낙랑군 수성현이라 하여 갈석산이라 우기는 것은 명백한 역사왜곡이며 역사와 영토를 중국에게 통째로 내주는 꼴이다.

 

 

 

 

 거란지리도 중의 발해인근 지도 - 고려는 남쪽으로 요해에 막혀있고 등주, 래주, 빈주, 체주와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 것은 고려의 강역이 하북성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통전>에서 말하는 고구려의 갈석은 현 산서성 상산(常山) 즉 항산(恒山) 주변에 있었던 갈석이었으며 고려경내에 있었던 것은 하북성 갈석으로 보아야 한다. 산서성 지역의 갈석산은 <상서(尙書)> <사기(史記)>에서 말하는 협우갈석입우하(夾右碣石入于河)”  갈석을 오른쪽(서쪽)으로 끼고 황하에 흘러들어간다고 한 갈석으로서 고구려와의 경계인 갈석이며 하북성 북평군 노룡현에 있었다는 갈석산은 후대에 옮겨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았을 때 <고려도경>의 고려 강역에 대한 기술은 올바른 것이며 하북성에서 두만강 너머까지가 고려의 강역이었다. 결국 <고려도경>에서 말한 요수에서 3,790 리의 출발점이 하북성이 되어야만 서두에 말한 강역과 합치되게 된다. 또한 현재 한반도 남해를 요해(遼海)라고 부른 적이 없고 요()지역에 있던 바다를 요해라 한 것으로 현 발해가 요해였다. 따라서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고려의 강역과, 남쪽으로 요해(遼海)에 막혀있다는 <고려도경>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현 요녕성의 요하가 고려시대에 압록강이었다면 새롭게 조명을 해야 할 것들이 많다. 서희 장군이 거란의 침략에 맞서 거란 장수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강동 6주를 차지하게 된 지역과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지역이 현 압록강 이남 평안도 일대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지명의 비정이다. 이는 압록강의 개념과 이동을 고려하지 않은 고착화된 개념에 기인된 것이며 마땅히 현 요하 동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고려의 서경이었던 평양이 <원사>에서는 동녕부라 하고 현재의 요동 지역이라 하였으며 원나라에서 고려 말기의 임금들을 심양왕이라 한 것 역시 고려의 강역과 무관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고려의 장성과 압록강 이남에 표시된 강동 6주와 함경도 지역으로 비정한 여진의 위치도. 강동 6주와 동북 9성의 위치는 재고되어야 한다.

 

 

또한 윤관 장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다는 곳도 지금의 함경남도 지역으로 비정을 하고 있다. 윤관의 동북 9성은 함경도 지역이 아니라 두만강 이북 700 리에 있는 선춘령(先春嶺) 일대였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익(1681~1763) <성호사설>에서 윤관의 비는 선춘령에 있으니 두만강 북쪽으로 7백 리가 되는 곳이다. 그 비에 새긴 글은 비록 호인(胡人)이 긁어버리기는 했으나 옛날 흔적이 아직도 다 없어지지는 않았다. 윤관이 6성을 설치하고 공험진(公嶮鎭)을 개설하였는데, 고령진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소하강(蘇下江) 가에 이르면 옛 터전이 그대로 있으니 곧 선춘령의 동남쪽이요 백두산의 동북쪽이다. 그는 이만큼 국경을 멀리 개척해 놓았는데, 지금 두만강으로 경계를 정한 것은 김종서(金宗瑞)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신채호(申采浩) 고려사지리지에 두만강 건너 7백 리 선춘령 밑에 윤관이 세운 정계비(定界碑)가 있는데 9성의 위치가 왜 함흥평야로 내려오는가?”라고 하여 선춘령이 고려의 동북쪽 경계가 되는 지역임을 말하고 함흥평야 일대로 비정한 역사의 강역을 깎아내린 역사학자들을 질타하였다.

  

 

서긍이 <고려도경>을 편찬하면서 고려의 전반적인 부분을 서술하고 그림과 지도를 남겼지만 그림과 지도가 사라진 것은 너무나 아쉽다. 남송이 전란에 휩싸인 기간에 <고려도경>의 그림은 분실되었다고 하는데 강역을 고찰함에 있어서도 지도가 남아 있었다면 많은 부분이 쉽게 설명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고려의 역사가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 누군가 일부러 그림을 없앴으며 또한 글로 서술된 부분도 첨삭을 가하여 왜곡을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서긍이 남겨 놓은 책에서 이렇게나마 고려의 역사를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가 결코 나약하고 작은 나라가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다. 고려의 강역은 현 중국 하북성에서 두만강 이북까지 이어진 나라였으며 동북아의 중심국가로 손색이 없는 나라로 475년간 존속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여 현 국사 교과서의 고려부분은 새롭게 고쳐져야 한다. : 신완순(한울빛새움터 원장)

(출처; 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477)

   

 

6.17 2017 5 31일 코리아히스토리타임스 고려의 동북강역은 고구려 보다 넓었다. 고려 국경선은 어디까지인가...

 

오종홍 기자  

 

『우리역사지리는 일제 관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만든 것...  

'맑은' 압록강이냐, '푸른' 압록강이냐...  

요동지역은 고려시대까지 우리의 역사 강역이었다.

 

 

서기2017.5.26.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고려국경선 문제를 다루는 학술발표회가 있었다. 이 학술발표회는 단순히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국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정당을 대표해서 각 당의 국회의원들이 함께 했다. 특히 이날 학술발표회를 개최한 주체가 국회의원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컸다. 단순한 학술회의가 아니라 국가적인 관심사라는 것이다. 지난번 기사에 이어 이번 기사에서는 이날 학술주제 발표를 한 5명의 학자들의 발표 내용을 싣는다.

 

 

윤한택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연구교수는 첫 발제자로 나서 고려 서북의 국경에 대하여 발표했다. 요나라와 금나라 시기의 압록강을 고증했다. 윤 교수는 압록이라는 글자에 주목했다. 한글로는 압록이라고 하지만 한자로는 압록鴨淥과 압록鴨綠으로 구분해서 사료를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편의상 윤 교수는 물수변의 압록강을 맑은() 압록강이라고 하고 실사변의 압록강을 푸른() 압록강이라고 구분해서 부르면서, 맑은 압록강은 현재의 중국 요하를 가리킨다고 했다. 그리고 푸른 압록강은 현재 북한 신의주 옆으로 흐는 압록강이라고 했다. 그런데 <고려사> <요사> <금사> <신당서> <무경총요> <동문선> 및 기타 사료에서 이 두강을 혼동해서 쓰면서 역사의 왜곡이 일어났다고 했다.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의 윤학태 연구교수는 자신이 한문에 대해서는 전문가라며 중국과 우리나라의 1차사료를 분석해 본 결과, 고려의 국경선은 요동이라고 했다.

 

 

결국 <요사> <금사> 등 동이족 계열의 민족이 쓴 사료에서는 이들 나라와 고려의 국경선은 현재의 요하로 나타나는 맑은 압록강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그리고 푸른 압록강은 고려의 후방 방어선 역할을 하는 강이었다고 했다. 따라서 서희가 거란 장군, 소손녕과 영토담판을 해서 가져온 강동6주는 요하지역의 동쪽이라고 밝혔다. 윤 교수는 이러한 실적은 불과 몇 년 동안 집중 연구함으로써 얻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강당주류사학계에서는 해방 후 71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 같은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일제 조선총독부가 남겨 놓은 자료만 되풀이 해온 것이 이해 할 수 없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인철 경복대학교 교수는 고려중기 동북국경으로 주제 발표를 했다. 특히 고려 예종시기 윤관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9개성을 쌓은 곳을 밝혀냄으로써 고려의 국경선을 확정해 나갔다.

  

 

먼저 <고려사> ‘지리지 서문을 인용하여 고려 국경선의 대략적인 위치를 가늠했다. <고려사> ‘지리지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고려의 북방 영토는 서북은 당나라 이후로 압록을 경계로 하였고, 동북은 선춘령을 경계로 하였다. 서북은 고구려 지역에 못 미쳤으나 동북은 고구려 영토보다 더 북상했다.”

 

 

이 서문을 보면 우리가 알고 이는 고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그리고 있다. 동북의 고려 강역이 고구려 보다 더 넓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윤관이 개척했다는 9개성이 어디에 있었나이다. 이 교수는 여기에는 세 가지 학설이 있다면서 차례로 소개했다. 함경도 길주 이남설이 그 중 하나인데 이는 소중화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의 견해라고 했다. 특히 서기17세기의 한백겸이 <동국지리지>를 내 면서 못을 박았다고 했다. 한백겸은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을 북한 평양을 중심으로 지도까지 그려 붙여 놓아 중화사대주의 사관의 핵심 인물로 손꼽힌다. 이 교수는 이 학설보다 더 축소된 학설이 함흥평야설이라고 했다. 이 학설은 조선총독부에서 내놓은 것이라고 했다. 일제가 우리나라와 만주 식민지 정책에 맞게 만들어 낸 것이라고 했다. 일제는 이를 통해서 우리나라와 만주를 영구히 식민 지배를 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윤관이 개척한 동북 9성을 함흥평야일대로 비정하면서 구체적으로 지명까지 달아 놨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아무런 사료적 근거도 없이 제멋대로 달아놓은 것이라고 꼬집었다.

  

 

 

 

 경복대학교 이인철 교수는 고려의 동북강역은 두만강에서 8백여리 떨어진 길림성의 대수분하 지역이라고 했다. 문헌과 현지답사를 통해서 확인이 가능하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두만강 이북설이다. 이 학설은 이인철 교수 등 이 주장하는 최근에 대두 된 학설이다. 다른 학설은 명확한 근거도 없이 거의 추정으로 만들어진 학설인데, 두만강 이북설은 철저히 사료적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고 있다. <고려사> <세종실록> ‘지리지’ <용비어천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사료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 교수는 윤관이 개척한 9성이 선춘령과 공험진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이 문헌들의 구체적인 기록을 따라 현지답사를 수차례 했다고 했다. 특히 <용비어천가>에는 선춘령과 공험진에 대하여 거리와 걸린 날수까지 기록해 놓고 있어 현장을 찾는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했다. 결국 현재의 두만강 북쪽의 대수분하 지역을 따라 분포되어 있는 오배촌 그리고 홍석립자촌 지역이라고 결론지었다.

  

 

강원대학교 윤은숙 교수는 서기13-14세기 고려의 요동인식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특히 요심지역, 즉 요양과 심양을 중심으로 이 지역의 역사 변천 과정을 들여다봄으로써 고려의 강역이었음을 논증했다. 윤 교수는 요심지역이 사방으로 열려있는 지역이라는 것에 주목했다. 평지가 많아 옛날부터 물산이 풍부하여 유목민족과 정주민들이 끊임없이 부침을 거듭한 곳이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종족들이 섞여 살 수밖에 없었는데 이로써 일종의 국제도시가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구체적으로 이 지역이 고려의 강역임을 말해주는 것은 고려인 홍복원의 활동이라고 했다. 이 지역에서 고려의 관리로 있었던 홍복원은 몽골제국이 쳐들어오자 서경, 안주, 귀주 등 이 지역의 40여개 성을 들어서 항복했다고 했다. 그리고 몽골은 홍복원에게 이 지역의 고려군민만호라는 벼슬을 내렸다고 했다. 몽골의 원나라가 이와 같은 조치를 취한 것은 이 지역이 대대로 고려의 강역이었음을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고려의 충선왕이 제왕의 신분으로 심양로를 분봉지로 받은 것과 이 지역으로 자발적으로 들어가 사는 고려인을 고려정부에서 돌려달라고 원나라에게 요청하는 사건도 이 지역이 고려의 강역이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해다. 더구나 서기1370년 고려 공민왕이 지용수 등과 함께 요양의 요성을 차지하고 이곳은 고려의 땅이며 백성도 고려의 백성이라고 선언한 것은 명백히 이 지역이 고려의 강역이었음을 말해준다고 했다.

 

 

 

 

 강원대학교 윤은숙 교수는 요동지역에서 일어난 고려 관련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요양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 고려의 강역임을 논증해 나갔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이 지역이 고려강역임을 밝힌 것은 윤 교수가 처음으로 보인다.

  

 

남의현 강원대학교 교수는 명대 한중 국경선은 어디였는가로 주제 발표에 나섰다. 남 교수는 소중화 조선과 명나라와의 국경선을 서기1480년대를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파악했다. 서기1480년 이전에는 남만주의 연산관까지가 우리와 명나라와의 국경선이라고 했다. 이 시기는 고려시대인데 원나라와 고려가 국경선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원나라가 명나라한테 망하자, 명나라가 고려와 원의 국경선을 그대로 이어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서기1480년대 이후 소중화 조선이 들어서고부터는 조금 후퇴한 봉황성이 국경선이 되었다고 논증했다. 남 교수는 <원사>를 통해서 기초적인 사실을 확인했고, 소중화 조선의 최부가 남긴 <표해록>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밝혀냈다. 이어 서기1860년 청나라에서 편찬한 <성경전제비고> 동변외개간승과설관사의 라는 문헌으로 상세하게 고증해 나갔다. 그러면서 서기19세기 초에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온 김경선의 사행기록을 제시하여 소중화 조선 후기까지도 역사의식이 있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패수가 요동의 서쪽에 있었고 고구려의 평양성이 요양에 있었다는 것을 밝혔다. 이를 통해서 소중화 조선까지 남만주 일부분까지 우리역사의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강원대학교 남의현 교수는 명나라와 소중화 조선의 국경선을 파악함으로써 고려의 국경선을 밝혀냈다.

 

 

이날 학술발표회를 인도하며 사회를 맡은 인하대 융합고고학과 복기대 교수는 각 발제가 발표를 끝내면 다시 한 번 핵심쟁점을 정리해서 설명했다. 이를 통해서 참석한 시민들이 이해를 쉽게 하도록 도왔다. 복 교수는 지금과 같이 우리의 역사지리강역이 정해진 것은 소중화 조선도 일정한 역할을 했지만, 조선총독부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했다. 특히 일제의 관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가 주도하여 펴낸 <조선역사지리지>, <만주역사지리지>를 보면 이 책의 내용이 고스란히 현행 우리 국사책의 역사지리에 반영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우리 국사책은 일본인이 만들어 준 것이라는 것이다. 복기대 교수는 드러내놓고 강단주류사학계가 조선총독부의 식민사관을 추종한다고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복 교수가 이날 한 말을 종합해 보면 강단주류사학이 모든 문제의 뿌리임을 지적한 것으로 나온다.

 

 

 

 

 인하대학교 융합고고학과 복기대 교수가 일제의 우리나라 역사 왜곡과 날조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이날 학술 발표회에서 복 교수는 특히 우리역사지리는 일제 관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주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했다.

  

 

복 교수는 국경사 문제는 단순한 과거의 역사가 아님을 강조했다. 고려의 국경사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큰 과제를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에 중국 정부의 동향을 소개하면서 통일이후 중국과의 국경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 측에서 최근에 내놓은 국경관련 서적을 하나 소개했다. <주변역사 강역변천>이라는 책인데 이 책은 현재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수십 개의 나라와 국경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맨 앞장에서 우리나라와의 국경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 비중도 상당히 높다고 했다. 그 만큼 중국에서 우리나라와의 국경문제에 대하여 가장 민감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복 교수는 국경사는 학자들만이 나서서는 안 되고 국가차원에서 철저한 대응을 해야 향후 역사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학술발표회에는 조선총독부 사관을 추종한다고 비판 받은 강단주류사학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식민사학의 한 축으로 비판받은 동북아역사재단의 한 연구위원도 참석해 있었다. 교육부의 학술진흥과에서도 학술진흥과장 등 3명의 공무원이 참석해서 학술 발표가 끝날 때 까지 함께 했다. 주최 측에서는 계속해서 바른 역사를 회복하는 학문성과를 쌓아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잘 못 된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로 세우겠다고 했다. 오종홍 기자

 

 

6.18 2017 5 16일 코리아히스토리타임스 서희가 거란한테 받은 강동6주는 어디일까?

 

오종홍 기자

 

- 고려-거란()와의 전쟁터는 요서지역이었다...  

 

일제식민주의 사관이 71년 적폐라면,  

소중화 조선의 중화사대주의 사관은 6백년이 넘는 적폐...  

이제, 고려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어야 할 때...  

소중화 조선의 고지도에서 말하는 강동6주 위치와 식민사관이 같다.

 

 

국제연합(UN) 평화유지군이 세계 주요 분쟁지역에서 활동 중이다. 우리나라도 국제연합소속의 일원으로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고 있다. 주로 육군특수전사령부 소속의 공수특전여단들이 맡고 있다. 전시작전권이 여전히 미군의 손아귀에 있는 일반부대와는 달리 공수특전여단들은 전시작전권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평화유지군 파견부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부대 중에서는 서희부대도 있다.

  

 

서희는 고려초기인 서기993, 거란의 1차 침공 때 거란과 담판을 하여 이른바 강동6주를 거란으로부터 획득한 고려의 문신이다. 피를 흘리지 않고 침략군에게서 오히려 땅을 빼앗고 적군을 돌려보내는 것은 전쟁에서 가장 좋은 상책으로 통한다. 서희의 이러한 지혜로운 상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1천년이 훨씬 넘은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따서 부대를 창설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거란으로부터 빼앗은 이른바 강동6주는 오늘날 어디일까? 우리는 국사시간에 현재 압록강 근처 의주를 시발점으로 해서 그 오른쪽 지역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역사의 진실은 이것이 아니라, 현재의 중국 땅, 요하 지역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주장이 나왔다.

  

 

소중화 조선 고지도 일관되게 반도사관에 입각...

 

서기2017.5.15. 유라시안넷(회장 이민화)이 광화문 케이티 건물에서 주최한 역사인문학특강에서 남주성 강사가 이 같이 밝혔다. 남 강사는 먼저 기존의 주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현행 국사교과서가 말하는 강동6주 위치와 고려의 국경을 국사교과서의 지도를 통해서 보여 주었다. 고려의 국경은 현재의 압록강 신의주에서 동쪽으로 원산만까지 잇는 선이다. 강동6주는 압록강 의주와 그 동쪽의 평안북도로 비정하고 있다.

  

 

이러한 체계는 서양의 근대역사학이 도입된 후 조선총독부소속 조선사편수회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그대로 이어받아 국사책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남주성 강사에 의하면 강동6주의 경우, 일본인들에 앞서 이미 소중화 조선에서 이와 같이 그리고 있는 것이 드러났다. 청구도, 대동여지도, 대동방여전도 등의 고지도의 지명을 보면 강동6주에 나오는 지명과 거란의 고려 침공로 상에 있던 지명이 모두 현재의 평안북도 일대로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고려는 남만주 일대를 장악한 제국이었다. 공민왕(서기1370)은 지용수와 함께 기병 5천을 이끌고 요동의 요성에 진격하여 점령하고 고려 땅이었음을 선포했다. 남주성 강사는 이날 강의에서 고려는 요동까지 차지한 제국으로 그렸다.

 

 

선화봉사고려도경이 말하는 고려의 강역은...

 

그러나 남주성 강사는 이에 대하여 지리적 상황과 거란의 요나라 군대가 기병 중심으로 되어 있었다는 점을 들어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더구나 중국 측의 요사 지리지, 무경총요, 성경강역고, 원사, 대원일통지 등의 문헌사료에서 강동6주의 지명들은 요녕성 서쪽에 위치해있는 것으로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사료도 제시되었다. 선화봉사고려도경이 대표적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은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에 사신으로 왔을 때 편찬한 고려의 인문지리서다. 여기에 고려의 강역이 묘사되어 있다.

  

 

이 문헌에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 땅은 현재의 압록강 의주선에서 동해안 원산만 선 이하다. 평안도 일부와 강원도 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초라한 나라다. 그런데 고려도경에는 고려의 남쪽은 요해로 막히고 서쪽경계선은 현재의 요수와 맞닿아 있고 북으로는 옛 거란지역과 접경을 이루고 동으로는 금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고 나온다(高麗南隔遼海 西距遼水 北接契丹舊地 東距大金).

 

 

한반도의 고려가 아니라는 소리다. 한반도를 포함한 남만주일대를 차지한 고려가 그려지고 있다. 이 고려의 강역을 통해서 볼 때, 거란이 고려에게 내준 강동6주는 현재의 압록강 일대의 평안북도가 될 수 없다는 자연스런 결론에 이른다. 또한 만주원류고에 따르면 신라는 개원과 철령, 길림까지를 경계로 하는 남만주까지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고 이 신라를 고려가 이어받았다는 점에서 고려의 강역은 남만주일대까지 된다는 것이 다시 확인된다.

 

 

서희가 뺏은 땅은 강동8개지역...

 

국사교과서에서 말하는 강동6주는 흥화진(의주), 곽주(곽산), 귀주(귀성), 통주(선주), 용주(용천), 철주(철산). 이러한 설정은 송사와 속자치통감에서 나왔다. 그러나 고려사와 동사강목에서는 흥화진, 곽주, 귀주, 선주, 장흥진, 귀화진, 안의진, 맹주라고 하여 8개의 지역으로 나온다. 강동6주 보다 더 넓은 지역을 거란으로부터 얻어냈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8개 지역의 땅 이름을 찾을 수 있다면 서희가 빼앗은 지역이 어디인지 확인이 가능하다. 대표지명으로 흥화진을 보자. 흥화진은 현재 의주라고 국사교과서에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무경총요에서는 보주라는 행정구역을 말하면서 북쪽으로 2십리지점에 대릉하가 있다고 한다. 대릉하는 중국역사상 단 한곳밖에 없다. 현재 중국의 요서지방이다. 그런데 이 보주 안에 내원성이 있다. 이 내원성의 동쪽으로 신라의 흥화진이 4십리에 있다고 한다. 결국 대릉하 부근에 서희가 거란으로부터 빼앗은 강동6주의 하나인 흥화진이 있었다는 얘기다.

 

 

거란의 2차 침공 로를 보면 나머지 지명도 가늠이 된다. 거란 성종은 고려의 장군 강조가 자기 임금을 살해했다는 명분을 들어 침공한다. 이때 강조는 고려군 30만을 이끌고 통주에 주둔한다. 거란 성종은 40만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을 거쳐서 20만은 통주로 진격한다. 여기서 압록강이 어디냐를 알면 자연스럽게 다시 흥화진 그리고 통주의 위치가 파악된다. 만주원류고에 의하면 압록강은 익주강이라고 하는데 요나라의 황룡부에 있었고 발해의 황룡부라고 한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요수를 일명 압록이라고 나온다. 현재의 압록강이 아니라는 소리다. 이미 요사 지리지나 삼국사기 지리지를 통해서 보면 고구려의 수도, 평양이 현재의 요녕성 요양일대로 나온다. 그 서쪽이나 서북쪽에 있는 강이 압록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현재의 요하나 더 서쪽의 대릉하가 당시의 압록강으로 비정된다. 따라서 이른바 강동6주는 이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현행 국사교과서에 나오는 고려시대의 서희가 거란으로 부터 받았다는 강동6주 표기도. 강동6주는 요나라의 동경지역에 있었다. 고려와 거란()과 조약에서 고려가 강동6주를 얻는 대신 거란에 조빙할 것이라고 했다. 강동6주가 있는 거란의 동경도 원래 고려 땅이라고 주장하는 가운데 맺어진 고려와 거란의 강화조약이다. 그런데 위 지도에 따르면 압록강 아래 평안북도가 거란의 동경이라는 것인데, 요사지리지등 모든 사료는 거란의 동경은 오늘날 요하 이서 지역으로 나온다. 위 지도는 반도사관에 따른 날조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소중화 조선의 중화사대주의사관, 망국의 지름길...

 

그렇다면 소중화 조선은 어째서 강동6주와 거란의 침공 지역을 모두 다 평안도 일대로 그려 놓았을까? 이미 민족사학계에서 밝혀나가고 있듯이 이성계와 정도전 등 소중화 개국세력의 우리역사 말살정책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중국을 상국으로 섬기고 개국의 정당성을 중국의 공자유교에서 찾다보니 제국의 역사를 축소, 말살하는 수순을 밟았다는 것이다. 대륙에서 발생한 고려의 역사를 반도 안으로 끌어들인 혐의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소중화 조선의 세종대에 국력을 쏟아 부어 만든 세종실록 지리지 하나만 보더라도 얼마나 중화사대주의 반도사관에 입각해서 편찬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일제가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한사군을 북한일대로 날조해서 박아 놓았다고 하지만, 이미 세종 때에 이러한 날조 작업을 완성해 놓은 상태다. 일제는 이것을 갖다가 봉니, 와당, 전돌 등 유물조작을 통해서 식민지배에 맞게 더 정교하게 완성해 놓은 것이다. 세종실록지리를 보면 현재 평양을 기자조선, 위만조선 그리고 한사군의 중심인 낙랑군으로 새겨놓고 있다. 강원도 강릉 일대를 임둔군이라고 하고 있다. 기타 나머지 군도 모두 북한 일대에 그려놓고 있다.

  

 

남주성 강사,  

역사한문학에 조예가 깊어...

 

남주성 강사는 이날 강의가 완성된 것은 아니고 계속 미진한 부분을 찾아 나가는 과정에 있다고 했다. 인하대학교와 연계해서 바른 역사를 찾는데 더욱 힘써 나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인지 인하대학교의 복기대 교수 일행이 함께 했다. 남주성 강사는 감사원의 국장을 끝으로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현재는 한국수력원자력()에 상임감사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남주성 강사는 우리역사연구를 한지 상당한 세월이 지난 것으로 파악된다. 이미 만주원류고를 번역해서 내놓은 바 있을 정도로 역사한문에 정통한 것으로 보인다. 이날 강좌를 개최한 유라시아넷은 다음 서기2017.6.12.에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을 초청하여 동북아 역사지도 바로보기라는 주제로 강좌를 연다(070-7728-2694). 오종홍 기자

(출처; http://m.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2046)

 

 

6.19  2018 4 21일 코리아히스토리타임스 고려말 우리국토, 만주까지였다  '강원도 철령위' 위치는 일제 조선총독부 식민사학자가 만들어 준 것이다

 

오종홍 기자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식민사학계에 반격 2>

 

고려 말, 고려와 명나라와의 국경은 '요동' 철령  

위화도 회군 세력에 의해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작  

광복 후, 일제 조선총독부 식민사학자 왜곡된 주장을 답습하여  

'강원도 철령위'로 고착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정태만 교수가 밝혀낸 고려말 철령위 위치.

 

 

고려말 신생국 중국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일방 통보해 왔다. 철령위의 라는 것은 명나라 행정, 군사구역을 나타낸다. 곧 철령까지 명나라 국경선이라는 뜻이다. 명나라 영토라는 말도 된다.

  

 

철령위 설치는 명나라가 고려 영토인 철령을 자기네 영토로 편입하겠다는 통보였다. 명나라가 흥기하면서 몽골제국, 원나라가 몽골초원으로 퇴각해 갔다. 이에 원나라가 사실상 차치하고 있던 고려 영토, 철령지방을 신흥국 명나라가 원나라 대신 차지하겠다는 것이 철령위 설치통보다.

  

 

이 통보에 고려는 대화로 여러번 시도했으나 먹혀들지 않자, 명나라를 토벌하자는 결론에 이른다. 당시 우왕과 최영을 중심으로 하는 자주파가 내린 결단이었다. 그래서 최영을 8도도통사로, 조민수를 좌도통사, 이성계를 우도통사로 하여 10만 정예군을 편성하여 명나라 토벌에 보낸다.

 

 

<고려사절요>에 고려군이 평양을 지날 때 배웅 나온 백성들이 '고려군 10만이 나가고 있다'고 환호 했다.

 

또 기마병력은 2만이 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기마병, 기병의 위력을 보자.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 태조 금누루하치가 한말이 있다. “내게 기마병 1만만 주면 세계를 제패할 수 있다.” 이는 기마병의 위력을 상징하는 말로 유명하다. 그 만큼 기마병의 파괴력이 1당 백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중화사대주의자, 우도통사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반란으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만약에 이성계의 반란이 없었더라면 동아시아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가슴이 뛴다. 동아시아 패자로 우리가 몽골제국, 원나라에 이어 등극했을 것이다.

 

 

더 추정해보면 해양제국 고려, 상업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했던 고려제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배제 못한다. 지식정보 최첨단을 달릴 수 있게 하는 금속활자를 세계최초로 만들었고, 최고질의 종이를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종이는 이조선 시기 병사들 우비와 방탄복으로도 사용되었을 정도로 대량생산체제, 최고질 한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송나라 서긍이 남긴 <선화봉사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의 민간에는 책이 없는 집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이는 금속활자를 통한 대량출판체제가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이고 세계최고 지식정보사회를 구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국사책에서 그려지는 우리 고려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 거의 정반대 모습이다. 모두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이 만들어낸 그늘이다.

 

 

이와 더불어 고려역사를 담은 <고려사> <고려사절요>가 위화도 회군 반란 세력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밝혀지고 있다. 이는 필연이다. 고려 <왕조실록> 등 고려가 남겨놓은 사료가 분명히 있었을 텐데 현존하지 않는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이성계 조선이 만든 이조선 <고려사>, <고려사절요>만 전하고 있다. 이는 고려 눈으로 바라본 고려사가 아니라, 중화사대주의 정권, 이조선 눈으로 바라본 고려역사라는 뜻이다. 승자가 쓴 것이니 얼마나 왜곡, 날조되었는지는 굳이 따져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고려역사는 결국 조선총독부 식민사관과 이조선의 왜곡으로 두번 죽은 셈이다.

 

 

특히 철령위 위치 왜곡이 극심하다. 철령위 위치에 대하여 현행 국사교과서는 당시 명나라가 강원도 북단 철령에 철령위를 설치하여 그 이북 지역을 직접 통치하려고 한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비상한 관심을 끈다. 참고로 쌍성총관부라는 기구가 있는데 원나라가 설치한 것으로 철령위 이북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명태조 주원장은 요동의 철령을 경계로 할 것을 제안

 

철령위가 현행 국사교과서가 말하는 강원도가 아니라는 주장이 인하대학 고조선 연구소 정태만 교수에게서 나왔다. 서기2018.03.30.() 서울 경복궁 고궁박물관, 별관에서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주최 학술회의가 열렸다.

  

 

이날 발제자로 나선 정 교수는 먼저 고려말 서기1387 12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명나라와 고려간에 철령을 경계로 할 것을 통고해 온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 철령은 강원도 북단의 철령이 아니라 요동의 철령이었다고 분명히 했다.

 

 

당시 명 태조가 양국간 경계로 삼고자 한 철령은 강원도 북단의 철령이 아니라, 요동의 철령이라는 것이다. 당시 고려는 "철령과 그 이북의 문주, 함주, 공험진 등이 고려땅"임을 주장한 표문을 명나라에 제출했다. 이에 명태조가 "요동 봉집현에 이미 철령위가 설치(서기1388 3)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고려는 옛날부터 압록강을 경계로 해왔으므로, (요동의) 철령과 그 이북땅은 명나라 땅 이라며 내놓으라고 했다. 이에 고려는 이러한 명나라 요구를 거부했다. 또 고려가 그 철령이 '강원도 철령'인지 '요동의 철령'인지 명시하지 않고, 고려땅임을 주장한데 대해, 명나라는 철두철미하게 요동에 있는 철령에 관한 것으로 간주하고 고려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 같은 사실은 처음부터 주원장이 강원도 북단 철령이 아닌 요동의 철령을 경계로 하여, 그곳에 철령위를 설치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당연히 강원도 철령 북단의 쌍성총관부 지역을 직접 통치할 생각도 없었음을 의미한다. 정 교수는 이러한 근거로 <명실록>(1387.12.26, 1388.3.27, 4.18) <명사>(이원명 전)를 들었다. 이는 야사가 아닌 정사의 기록을 근거로 하는 만큼, 그 근거가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고려 말에 명태조 주원장이 경계로 삼고자 한 철령이 강원도 철령이 아니라 요동의 철령이었다는 것은 최근 인하대학의 복기대교수, 강원대학의 남의현 교수 등 몇몇 학자들이 주장한 바 있다. 정교수는 이에 더하여 이렇게 잘못 알려지게 된 근본 원인이 <고려사>조작 때문이이라고 지적했다.

 

 

 

 

 이성계 조선에서 내 놓은 고려역사책, <고려사>, <고려사절요>는 고려 진면목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고려사> <고려사절요>부터 누락 왜곡

 

정교수에 의하면, 서기1388 4,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위의 철령위에 관한 사실들을 고려에 통고하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고려사> <고려사절요>에는 '요동에 이미 철령위가 설치되었다(1388 3)는 사실'이 누락되었다. 뿐만 아니라 "명나라에서 철령위 설치 논의가 중단되었다"고 왜곡되게 기록되어 있다.

  

 

이미 한 달 전에 강원도가 아닌, 중국 요동에 철령위가 설치되어 종료되었는데도 '논의가 중지되었다'고 왜곡시킨 것이다. <고려사> <고려사절요>는 철령위 설치통보에 따른 명나라 토벌을 반대하고 위화도 회군 반란으로 집권한 세력이 쓴 사료다. 이성계 조선 초에 편찬된 역사서로써 위화도회군을 정당화하기 위해 누락 왜곡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정태만 교수는 추정했다.

  

 

일제 관변학자에 의한 왜곡 및 식민사학자들의 답습

 

<고려사> <고려사절요>가 철령위 위치를 누락, 왜곡시키므로써 철령위 위치 왜곡 근본원인이 된 셈이다. 그 후 대일항쟁기에 일제 관변학자들에 의해 '고려말 문제가 된 철령은 강원도 철령'을 말하는 것으로 고착되었다. 해방 후에는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그대로 답습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고려사> <고려사절요>가 철령위 위치를 왜곡 시켰기 때문에 해석을 바로 해서 위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고려 말에 명나라가 강원도 북단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그 이북 지역을 직접 통치하려고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따라서 마땅히 중고등학교 교과서도 바로 잡아야 한다.

 

 

당시 고려는 요동지방을 고려땅으로 인식

 

그러면 명나라 토벌은 왜 하려고 했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이는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로 일어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명나라의 무리한 공물 요구, 상호 간의 사신 피살, 자주파와 사대파의 갈등 등 여러가지 복합적 요인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고려의 고려 땅, 요동수복전쟁이다. 고려는 공민왕 때에 이르러 현재 요하 동쪽에 위치한 요동성을 수복하고 이곳이 고려 땅임을 선포하는 등 원나라 간섭으로 눌려 있던 고려 땅 수복전쟁에 나섰다.

  

 

그런데 요동성 더 동쪽에 있던 철령에 명나라의 위를 설치하여 중국 명나라 땅으로 만들겠다고 하니, 고려에게 이는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국토를 빼앗길 수 없으니 명나라를 토벌하겠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현재 중국은 잘못된 설정된 철령위 위치를 역이용하여 "강원도에 철령위가 설치되었고 그 이북 지역은 명나라 땅이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정 교수는 우리 세대에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앞으로 북한의 격변기에 화근이 될 수있다고 내다 봤다.

 

 

 

 

 중국은 현재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으로 채워진 우리 국사책을 역 이용하여 고려말 명나라가 말한 철령위가 강원도 북단에 있었다고 한다. 이는 또 다른 동북공정이다.

 

 

명나라 스스로도 '압록강은 고려땅'을 인정하고, 요동의 철령이북은 중국땅 주장

 

한편 정교수는 이날 고려는 오래전부터 압록강을 경계로 해 왔다는 것을 명나라 스스로가 인정했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에 따르면 서기1387 12월 명나라에서 철령을 고려와 명나라간에 경계로 할 것을 알려왔다. 이어 4개월 뒤인 서기1388 4, 다시 요동땅 철령에 철령위가 설치되었다고 통보했다. 또 고려가 오래전부터 압록강을 경계로 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따라서 이 두 개 역사 사실을 연계시키면 서기1388년 당시 명나라와 고려간 국경은 요동땅 철령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국 고려말 강원도 철령에 철령위를 설치하여 명나라가 직접 통치하려고 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또 요동의 철령을 지나는 선이 명나라와 고려간의 국경이었다는 것이다.

 

 

철령위는 5년간만 존속하다가 요양 북쪽 현재의 철령시로 이동

 

현재 중국 심양시 북쪽에는 철령시가 있다. 이 지명은 과거의 철령위에서 유래 한다고 전해진다. 고려말, 명나라 초기 처음 설치된 철령위는 1388년부터 1393년까지 단지 5년간만 존속했다.

 

 

그러다가 병참지원 어려움 등으로 그 지명마저도 지금의 철령시로 이동해 버렸다. 때문에 철령위를 찾기가 어렵다. 이런 사정으로 이날 정 교수는 철령위의 위치에 대한 몇가지 견해를 발표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렇기 때문에 향후 더 추가적인 연구를 필요로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 강원도 북단이 고려말 철령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압록강 강건너에 있었다는 것이다.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는 정부로 부터 연구지원비를 받아 고려국경사를 연구, 발표해 오고 있다. 기존에 알려진 고려국경사를 원점에서 다시 조사하는 작업이다. 이 연구사업에 따라 기존 국가교과서로 대표되는 고려국경사는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에서 나왔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연구를 박근혜 정권 국정국사교과서 사업과 연계시켜 파탄내려는 세력이 있다. 정요근 덕성여대 교수로 대표되는 한국중세사학회 등 식민사학계다. 감사원에 감사청구를 할 정도로 이들은 이 사업저지에 사활을 걸고 있는 형국이다. 그동안 조선총독부판 식민사학으로 호의호식해 온 자들의 정체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서기2018.03.30.인하대학 고조선연구소 학술발표 심층취재 2부끝, 3부에서 계속). 오종홍 기자

(출처; 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2863)

 

 

6.20  2017 5 23일 뉴시스 중국 철령까지 우리땅일제왜곡 극복, 고려국경 찾았다

 

 

 

서울=뉴시스한국 역사학계는 고려의 국경을 <왼쪽>처럼 인식하고 있다. <오른쪽>은 일본의 의도적 왜곡을 거둬내고 고려사’, ‘요사 등 사서에 기반해 고증한 고려의 국경선이다.

  

 

인하대 고조선 "고려 천리장성, 랴오허 유역에 위치" 

 

서울=뉴시스신동립 기자 = 중국 랴오닝성 톄링(鐵嶺)시 일대까지가 고려(918~1392)의 땅이었다. 윤관(?~1111)이 설치한 동북 9성의 현 위치는 지린성 옌볜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음모 탓에 우리나라 영토는 축소됐고, 결국 반도가 되고 말았다.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가 입증한 새로운 사실들이다.

 

구체적으로, ‘고려사-지리지 고려는 서북으로 당 이래 압록을 경계로 했고 동북은 선춘령을 경계로 삼았다. 대개 서북으로는 고구려에 다다르지 못했으나 동북으로는 그것을 넘어섰다고 기록했다.

 

 

그럼에도 고려의 서북 국경은 압록강에서 시작해 동으로 함경도 원산만이라는 것이 정설인양 굳어졌다. 조선 초 성리학자들이 편찬한 고려사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조선 후기 사대·모화주의 학자들 일부와 훗날 조선총독부 주관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가 야합하면서 기정사실화했다. 중국의 동북공정도 일제가 이렇게 왜곡한 한국사가 바탕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과거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했다는 설의 근거이기도 하다.

 

 

고려사-지리지의 압록(鴨淥)을 일제는 압록강(鴨綠江)이라고 획정, 압록강에서 원산만 이남 지역만 고려의 땅이라고 봤다. 하지만 당시 고려와 국경을 맞댄 요나라의 역사책 요사와 대조하면 압록은 압록강이 아니라 랴오허(遼河)의 지류다.

 

 

복기대 교수(인하대 융합고고학) 국회와 교육부의 지원을 받은 한국 고대사의 쟁점 사항에 관한 연구, 특히 한국의 기본 틀이 되고 있는 1945년 이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사를 번역하고 원문대조 정밀해제하면서 파악한 사실이라고 밝혔다.

 

 

고려의 서북 국경선으로 추정되는 천리장성, 동북지역 국경으로 윤관이 축성한 9성의 위치도 찾았다. 복 교수는 고려 국경선이 현재 인식하는 국경선으로 비정되다 보니 이와 연동된 발해, 조선의 국경선 문제도 자연히 왜곡된 고려 국경선을 기준으로 정해지게 됐다고 지적했다.

 

 

윤한택 교수(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압록강(鴨淥江)은 오늘날 중국 랴오닝성을 관통해 흐르는 랴오허, 압록강(鴨綠江)은 북한과 중국 국경선인 압록강이라고 못 박았다. 고려의 서북 국경에는 압록강이 둘 있었다. 국경선으로서의 압록강(鴨淥江)과 후방방어선으로서의 압록강(鴨綠江)이다. 압록강(鴨淥江)은 보주(保州), 압록강(鴨綠江)은 의주(義州)가 거점도시였다. 보주는 의주방어사가 관할했다. “고려의 서북 국경선은 고려 전체시기를 통해 변함없이 압록강(鴨淥江)이었다.”

 

 

건국 초 고려는 유소(?~1038)에게 천리장성 축조 책임을 맡겼다. 변방 방어체계인 천리장성의 탄생이다. 압록강 하구~원산만에 있었으려니 한다. 그러나, 이 선상에서는 천리장성으로 볼 수 있는 대규모 시설이 확인되지 않는다.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다. 돌로 쌓은 담은 일부 남아있지만 성이라고 할 정도는 못된다.

 

 

윤 교수는 압록강(鴨淥江)으로 추정되는 현 랴오허 유역에 천리장성이 있었다는 증거를 확보했다. “‘1084년 시점 압록강(鴨淥江) 연안 요 수비병의 규모는 1, 1, 2, 70, 8영에 합계 정병 22000명이었다는 고려의 기록이다. 남쪽은 요나라의 동경성에서 시작해 서북으로 황룡부에 이른다. 이 지명들을 보면 요나라의 동경성은 현 랴오닝성 랴오량(遼陽), 황룡부는 지린성 중북부다. , 천리장성은 현 압록강변이 아니라 랴오허 유역에 있었던 것이라는 설명이다.

 

 

원 사료를 읽지 않은 중국 고고학계는 고려 천리장성을 고구려의 장성으로 오판했다. 윤 교수는 기본 사서를 근거로 해 고려 국경사를 연구하면 기존의 후방방어선인 압록강(鴨綠江) 아래쪽으로 비정돼 온 강동 6, 북경장성(천리장성), 서경 등은 현 랴오허 유역으로 이동하게 된다고 짚었다.

 

 

한편 윤관의 동북9성은 어디에 있었는지, 아직 정설이 없다. 막연히 함경도 남부에 위치했으리라고 추측할 따름이다. 아니나 다를까,  함흥평야 일대설은 일제 관학자들이 주장했다.

 

 

이인철 교수(경복대학교 기획처장) 우리나라와 만주를 영구적 식민지로 만들려는 목적으로 조작한 식민사관 중 반도사관에 의한 결과물이라고 판단했다. 진실은 조선 태종실록 세종실록에 담겨있다. 조선과 명나라의 국경 협정에서 명나라는 공험진(公嶮鎭) 이남부터는 조선의 관할이므로 해당 지역을 조선으로 귀속하는 데 동의했다. 공험진이 조선과 명나라의 국경선이 된 것이다.

 

 

이 교수는 동북9성 위치를 비정하는 주요 지명인 공험진과 선춘령(先春嶺)은 두만강 이북에 위치했다. 오늘날 지린성 옌볜 자치주 북단 어디로 추정이 가능하다. 조선 초 용비어천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문헌들도 동북9성은 두만강 이북 700리에 위치했다고 서술했다고 제시했다.

 

 

이 같은 연구결과는 김세연 의원(바른정당)과 인하대 고조선연구소가 26일 오전 10시 국회 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여는 일본에 의해 왜곡된 고려 국경선의 실체는?-조선사 해제사업 결과를 중심으로 학술회의에서 공개된다. 윤한택 교수, 이인철 교수와 더불어 윤은숙 교수(강원대 사학) ‘13~14세기 고려의 요동인식·심지역을 중심으로’, 남의현 교수(강원대 사학과) 명대 한·중 국경선은 어디였는가’, 박시현 교수(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송나라의 고려 국경선 인식을 발표한다.

 

 

연구를 총괄한 복기대 교수는 중국이나 일본도 반박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특히 새롭게 비정된 압록강의 위치나 고려의 천리장성 위치는 그동안 한국역사학계의 고려사 인식체계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짚었다. 신동립 기자

(출처; 뉴시스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70522_0014911619&cID=10701&pID=1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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