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6. 남북국시대

6.21  2020 4 21일 경향신문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직지'보다 138년 앞선 금속활자본"국내 존재 사실 전혀 몰랐다"

 

이기환(경향신문 선임기자)

 

 

 

 

<남명천화상송증도가>에 붙어있는 무신정권 실력자 최이(?~1249)의 발문. “기술자들을 모집해서 기해년(1239) 주자본(금속활자본)을 거듭 인쇄한다는 내용이다. 지금까지는 목판본으로 다시 새겼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최근 속활자본으로 거듭 인쇄했다고 해석하는게 옳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현전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 1377(우왕 3) 찍어낸 <직지심체요절>이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다. 그렇다면 문헌상 최초의 금속활자본은 무엇일까. <고금상정예문> 혹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  2건으로 알려졌다. <고금상정예문>의 경우 “(1234~1241년 사이) 강화도에서 <고금상정예문> 28부를 금속활자본으로 찍었다는 이규보(1168~1241)의 언급(<동국이상국집>)만 남아있다. ‘

 

 

깨달음의 뜻을 밝힌다(證道)’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이하 남명증도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의 원전은 선가의 수행지침서인 <영가진각대사증도가>이다. 이 책은 진각대사 현각(665~713)이 선종의 6조 대사 혜능(638~713)을 배알한 뒤 크게 깨달은 경지를 칠언시로 읊은 것이다.

 

 

 

 

공인본’ <남명증도가>에는 헷갈리게 쉬운 활자를 조판할 때 뒤집어 넣을 경우가 있다. 한 일()자가 그렇다. 맨 왼쪽과 세번째 한 일( )자는 조판 때 뒤집힌 글자이다. 훗날 목판본(삼성본)으로 재인쇄할 때 용케 바꿔놓은 한 일()’자도 있지만 바로잡지 못하고 그대로 둔 것(네번째)도 있다.

  

 

<남명증도가>는 송나라 남명대사 법천(?~1001) <영가진각대사증도가>의 각 구절마다 게송을 붙여 깨달음의 진면목을 설파한 책이다. 국내에 현전하는 <남명증도가> 10여 종에 이른다. 책에는 “<남명증도가>가 널리 유통되지 않자 기해년(1239) 주자본(금속활자본) 중조(重彫)’했다는 무신정권의 실력자 진양공 최이(?~1249)의 발문이 붙어있다. 그러나 확실한 연도(1239)가 기록된 이 책들은 목판본으로 알려져왔다. 발문의 중조주자본(重彫鑄字本)’ 구절을 금속활자본을 모본으로 해서 다시 목판으로 판각한다는 뜻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공인본 삼성본과 동일본이라 해서 보물로 지정됐지만 공인본 삼성본은 확연히 글자가 다르다. ()자의 경우 윗부분이 이지만 삼성본에서는 이다. ‘()’ 자 역시 완전히 다르다.

 

 

보물 758-2로 지정된 이유

 

그런데 여기서 반전의 드라마가 연출된다. 만약 문헌상으로만 남아있다는 가장 오래된, 그것도 <직지심체요절>보다 138년 앞선 금속활자본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어떨까. 그것도 지금 이 순간 국내에 남아있고, 무엇보다 이미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다 알려진 책이라면 어떨까.

  

 

바로 2012년 보물(758-2)로 지정된 공인출판사 소장 <남명증도가>’(이하 공인본)이다.

불교서지학자인 박상국 동국대 석좌교수가 최근 펴낸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남명증도가>(김영사간)가 바로 그러한 반전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조판 및 인쇄기술 부족으로 활자가 움직인 모습. 나무를 매끈하게 다듬어 찍어낸 목판본이라면 이러한 인쇄상태일리 없다는 게 박상국 교수의 주장이다.

 

 

이 책,  공인본의 소장자는 공인박물관(경남 양산)을 운영했던 원진 스님이다. 스님은 2012 공인본은 1239년 최이 주도로 인쇄한 금속활자본이니 국가문화재로 지정해달라 신청했다. 그러나 당시 문화재위원회는 금속활자본이 아니라 목판본으로 인정해서 보물로 지정했다. 그것도 32년 전인 1984년 보물로 지정된 목판본 삼성출판사 소장’ <남명증도가>(이하 삼성본)와 동일본이며,  삼성본보다 늦게 찍어낸 것으로 판단했다. ‘공인본 삼성본보다 늦게 찍어낸 후쇄본이라는 점에서 ‘-’를 붙여 삼성본’(원래 758) 758-1호로, ‘공인본 758-2호로 교통정리했다.

 

 

 

 

이중으로 인쇄된 흔적. 조판된 활자가 움직인 경우, 종이가 말린 경우, 종이 놓인 위치가 바르지 않아 바로잡는 과정에서 이중 인출됐다.

  

 

집착을 고쳐줄 요량으로

 

하지만 아무리 보물의 가치가 충분하다한들 목판본을 금속활자본와 견줄 수 없다. 여기에 공인본은 이미 보물로 지정된 삼성본의 아류라는 판정을 받아 ‘-2의 대접을 받았으니, ‘공인본=금속활자본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던 소장자(원진 스님)로서는 속상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가 경북 안동의 원 소장자에게서 공인본’ <남명증도가>를 구입한 원진 스님과 최근 통화했더니 언젠가부터 이 책이 금속활자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운을 뗐다. 책 속에 금속활자로 인쇄하지 않으면 결코 보일 수 없는 흔적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공인본=최고의 금속활자본임을 입증한 자료를 갖고 나름 백방으로 뛰었지만 싸늘한 반응들이었습니다. 학계로부터 삼성본과 동일한 목판본인데 헛수고하지 말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죠.”

 

 

 

 

금속활자본은 주물이기 때문에 점과 필획의 완성도가 떨어져 글자 판독이 어려운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공인본을 보면 이런 부분을 가필해서 보사한 경우가 있다.

 

 

목판본 자격으로 보물지정 직후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 스님은 박상국 교수에게 문화재위원회가 잘못 판단했으니 재감정 좀 해달라고 의뢰했다. 박 교수 역시 처음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가 금속활자본임을 고집하는 스님의 집착증을 제발 이참에 말끔히 고쳐줄 요량으로 <남명증도가>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비판적 검토였다. 그런데 책을 한 장 한 장 들춰보던 박상국 교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볼수록 이 책(공인본)에는 금속활자본이 아니고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특징들이 보였습니다. 너덜이(쇠찌꺼기)와 글자 획의 탈락 등 초창기 금속활자 주조기술의 미숙으로 생긴 흉허물이었습니다. 또 목판본인 삼성본에 나타나는 목결(나무테 흔적) 공인본에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물 기술의 부족으로 흭이 탈락한 부분을 인위적으로 칠했다.

 

 

90년의 오류

 

박교수는 책에 등장하는 최이의 발문 중 중조주자본(於是募工 重彫鑄字本)’ 구절을 다시 유심히 들춰보았다. 그 해(2014) 10월 한학자인 구봉 이정섭 선생에게 불쑥 최이의 발문을 보여주며 해석을 부탁했다. 그러자 이정섭 선생은 한치의 주저없이 주자본(금속활자본)으로 다시 주조한다고 해석했다.

 

 

이럴 수가. 이 구절은 90년 가까이 주자본(금속활자본)을 목판본으로 다시 새겨고 추호의 의심없이 해석되고 있지 않았던가. 그래서 삼성본’(1984)은 물론이고 공인본’(2012)까지 목판본이라는 이유로 보물로 지정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이 ‘90년의 오독이었다니.

  

 

 

 

공인본에는 초창기 금속활자의 단점이라 할 수 있는 쇠찌꺼기 등으로 판독하기 어려운 활자들이 많이 보여서 인위적으로 가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가필이 잘못된 경우가 있었다. 후쇄본인 목판본 삼성본에서는 그것을 (·왼쪽에서 두번째)과 수(·네번째)로 고쳤다.

 

 

다른 한문 전공자들은 물론이고 중국학자인 쑨잉강(孫英剛) 저장대(浙江大) 교수(역사학)에게도 문의했더니 절대 다수의 해석이 한학자 이정섭 선생과 비슷했다. 중국의 쑨잉강 교수는 발문에 목판본이라는 언급이 없으니 다시 주자본(금속활자본)으로 간행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는 의견을 보냈다.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남명증도가>에 붙은 최이의 발문은 목판본으로 다시 새겨로 해석해왔을까. 박상국 교수는 선입견의 오류라 했다.  <남명증도가> 1931년 경성제대 도서관 주최 조선활자인쇄자료전 1954년 서울대·연희대 전시회에 잇달아 소개된 바 있다. 그러나 이들 전시회에 소개된 <남명증도가>는 모두 목판본이었다. 그런 판이니 최이의 발문을 목판본의 발문으로 철석같이 믿게 됐다는 것이다.

  

 

 

 

주조과정에서 활자가 탈락되면 인위적으로 가필하기도 했는데, 틀리게 가필한 경우도 많았다. 바르게 가필했다면 왼쪽 위부터 향(), (), (), ()자였다.

  

 

공인본과 삼성본은 동일본이 아니다.

 

최이의 발문을 거듭 주자본(금속활자본)으로 인쇄했다고 해석하자 수수께끼가 풀렸다. 손환일 서화문화연구소장도 2017 남명천화장승증도가(공인본)에 나타난 금속활자본의 특징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박상국 교수의 연구성과를 뒷받침했다. 손환일 소장은 최이 발문에 등장하는 조주(彫鑄)’ 금속활자의 주조 의미라면서 목판본의 경우 <고려사> 등의 사서를 보면 조판(彫板)’이라는 용어를 썼다고 밝혔다.

 

 

 

 

주조기술의 부족으로 너덜이(쇳물찌꺼기)가 그대로 나타난 공인본’(왼쪽)의 활자들. 그러나 나중에 나무판에 새긴 목판본 삼성본’(오른쪽)에는 보이지 않는다.

 

 

박상국 교수는 이 공인본 삼성본과 동일본이라면서 보물 758-1’(삼성본) 보물 758-2’(공인본)로 나란히 붙인 것이 명백한 잘못이라 했다. 특히 얼핏 보면 동일한 판본으로 보이는 글자도 확대해서 보면 각각 다른 판본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의 경우 공인본’() 삼성본’()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 ()’, ‘()’, ‘()’, ‘()’자 등을 비교해봐도 전혀 다르다. 또한 책 장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 선이 사라진 부분의 위치와 크기도 분명히 다르다. ‘공인본 삼성본은 완전히 다른 판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공인본에서 윗쪽은 진하고 아랫쪽은 흐리게 보이는 등 활자의 기울기에 따라 인쇄상태가 다를 수 있다. 목판본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활판인쇄의 단점

 

양질의 나무에 잘 다듬은 글자들을 새겨 완성되는 목판 인쇄에서는 이런 금속활자본의 특징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금속활자로 찍는 활판인쇄는 어떤가.

 

 

비근한 예로 활자가 조판된 상자 위에 먹을 묻혀 책을 찍어내는 과정을 생각해보라. 사람이 한 글자 한 글자씩 조판하기 때문에 심어놓은 활자의 높낮이가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아래나 위로 쏠릴 수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먹을 묻히고 그 위에 종이를 덮은 뒤 누르면(인쇄하면) 어떻게 될까. 인쇄된 글자들의 깊이가 달라지고, 색의 짙고 옅음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 이 뿐이 아니다. 사람이 수작업으로 하다보니 먹 묻힘이나, 누르는 힘(인쇄)이 일정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역시 인쇄상태가 고르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금속활자 발명 초창기였다면 더욱 그 흠결이 도드라졌을 것이다.

 

 

 

 

반대로 윗부분이 흐리고 아랫부분은 진한 경우. 활자가 일정하게 놓이지 않아 인쇄상태에 영향을 미쳤다.

 

 

흠결 많은 금속활자본

 

박상국 교수는 “‘공인본’ <남명증도가>에서 바로 이러한 초창기 금속활자본의 특징이 여실히 드러난다고 밝힌다. 금속활자 제작의 기술 부족으로 생긴 너덜이(쇠찌꺼기끊어짐·테두리 자국 필획들이 여기저기 보이고, 조판 때 회전된 오·탈자와 이중으로 인쇄되거나 인쇄 때 기울어진 글자 등이 나타났다.

  

 

조판 때 회전된 글자로는 한 일()’가 대표적이다. ‘공인본에서 제법 보이는 뒤집힌 일()’자 중 삼성본을 찍을 때 바로 잡은 것도 있지만 그대로 둔 것도 있다.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공인본이 금속활자본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글자들을 심어놓은 금속활자판에 먹솔로 먹을 칠한 뒤 종이를 얹고 문지르는 과정에서 이중으로 인쇄되는 경우가 심심찮게 보였다.

 

 

틈이 생겨 활자가 움직였거나 종이가 말렸거나 종이 위치가 바르지 않아 바로잡는 과정에서 이중으로 인쇄되는 경우 등이 있다. ‘()’ ()’, ‘()’, ‘()’, ‘()’, ‘()’ 등이다.

 

 

 

 

왼쪽이 흐리고 오른쪽이 진한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인쇄 때 기운 글자도 여럿 보인다. 원래 활판 조판 때는 수평을 잡고 잘 움직이지 않도록 나무 수평대를 대고 나무망치로 톡톡 두드려 고정시킨다. 하지만 목판처럼 완전하게 수평을 잡기는 어렵다.

 

 

때로는 윗부분이 높고 아랫부분이 낮게 심어진 활자들은 윗부분은 진하게, 아랫부분은 흐리게 인쇄된다. 당연히 반대의 경우도 있다. 또 한쪽 옆부분이 다른 면보다 높게 심어진 활자들이 있을 경우 왼쪽은 짙게 오른쪽은 흐리게 오른쪽은 짙게, 왼쪽은 흐리게의 형태로 인쇄될 수 있다.

 

 

위는 짙게 아래는 흐리게의 경우는 ()’, ‘()’, ‘()’, ‘()’, ‘()’ 등이다. 거꾸로 아래가 짙고 위는 흐리게 ()’, ‘()’, ‘()’, ‘()’, ‘()’등이 있다. ‘오른쪽은 짙게 왼쪽은 흐리게 ()’, ‘()’, ‘()’ ‘()’, ‘()’ 등이다. 이러한 현상은 금속활자본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공인본만의 특징이었다.

 

 

 

 

반대로 왼쪽이 진하고 오른쪽이 흐린 경우도 물론 있었다.

 

 

아차! 실수가필의 흔적

 

또한 공인본에는 인위적인 가필의 흔적이 역력하다. 금속활자는 주물(주형 속에 용해된 금속을 넣어 응고시켜 형태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점과 필획의 완성도가 떨어져 글자의 판독이 어려운 경우가 생긴다. 이런 글자가 나오면 원고의 최종 교정 차원에서 가필 했다. ‘공인본에서 가필 글자의 예는 ()’, ‘()’, ‘()’, ‘()’, ‘()’ 등이 있다. 가필이 잘못된 글자도 보인다. ‘공인본에서 ()’자가 판독하기 어렵게 되자 인위적으로 가필했지만 ()’자로 잘못 써넣었다. 이를 훗날 목판본으로 인쇄한 삼성본에서 ()’자로 바로 잡았다. 또 무()자를 알아 볼 수 없게 되자 기술자가 가필했지만 그만 파()자로 잘못 써넣었다. 이를 훗날 목각본으로 새긴 삼성본에서는 무()자로 고쳐넣었다.

 

 

 

 

공인본(A)과 삼성본(B)이 동일본이라고 하지만 자세히 보면 확연히 다르다. ()자 부분을 보면 공인본(A)과 삼성본(B)의 글자와 테두리의 높이가 다르다

  

 

너덜이는 금속활자의 특징

 

 공인본에서논 금속활자의 주조과정에서 달라붙어 생기는 너덜이(쇳물찌꺼기)의 흔적이 여럿 보인다.

 

이러한 흠결 때문에 공인본 삼성본 보다 후대에 인쇄된 것으로 판단되는 오류가 생겼다는 게 박교수의 견해이다. 보물지정 때 문화재위원회가 여러번 찍어 낡게 된 삼성본 목판을 토대로 공인본을 찍었으니 인쇄상태가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너덜이와 같은 흠결은 오히려 초창기 금속활자의 전형적인 특징이라는게 박교수의 이야기다.

 

 

예컨대 찌꺼기가 잔뜩 묻은 공인본 ()’자는 삼성본에서 말끔하게 다듬어졌다. ‘()’ ()’, ‘()’, ‘()’, ‘()’, ‘()’ 등 금속활자본인 공인본에서는 보였던 너덜이가 목판본인 삼성본에서는 깔끔하게 정리됐다. 박상국 교수는 이런 모든 요소들이 아직 제작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초기 금속활자의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공인본의 부족한 부분은 목판본인 삼성본을 인쇄할 때 대폭 보완됐다. 손환일 소장은 “‘공인본을 모본으로 목판본을 만들 때 조각수가 잘못되었거나 빠지고 뒤틀린 글자나 필획을 고쳐 새겨넣었다고 전했다.

 

 

 

 

활판인쇄로 찍어내는 과정이다. 초창기에는 활자를 주물한 뒤 조판하여 인쇄하는 과정이 매우 까다로웠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시험인쇄에 성공한 금속활자

 

박상국 교수는 따라서 그동안 삼성본과 동일한 목판본으로 여겨져 보물로 지정된 공인본 1239년 제작·인쇄된 분명한 금속활자본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공인본’ <남명증도가>는 직지심체요절보다 정확히 138년 앞선,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려는 왜 금속활자의 발명국이 되었을까. 고려인들은 거란이 침입하자(993) 부처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겠다는 일념으로 1011(현종 2)~1087(선종 4)에 걸쳐 대장경(처음 제작했다는 의미에서 초조대장경이라 한다)을 판각했다. 1232(고종 19) 몽골의 침입으로 이 <초조대장경>이 불에 타자 또다시 구국의 일념으로 16(1233~1248)에 걸쳐 새긴 경전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해인사 고려대장경이다. 박상국 소장은 바로 이 무렵(1239) 금속활자본인 공인본’ <남명증도가>가 탄생한 것에 주목한다.

 

 

 

 

세계기록유산인 해인사 고려대장경판. 목판본은 초창기 금속활자본과 달리 깔끔하게 인쇄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목판본은 오로지 특정 책의 용도로만 쓰였지만 금속활자는 다른 책의 인쇄에도 쓰일 수 있었다. |해인사 소장

 

 

이 시기에는 <고려대장경>의 목판 제작을 위해 전국 사찰의 각수들이 (대장경판을 제작하던) 남해로 차출되었습니다. 중앙에서는 기술자 공동현상이 빚어진 거죠. 그래서 당시 무신정권의 최고실력자인 최이는 목판이 아닌 금속활자 인쇄를 시도한거죠.”

 

 

금속활자술은 목판술과 달리 제작한 활자를 다른 책이나 다른 쪽을 인쇄할 때도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도된 금속활자 인쇄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초보적인 금속활자술이 당시 <초조대장경> 간행 등 고도로 발달한 목판인쇄술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이다. 초창기 제작술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너덜이(금속찌꺼기)를 비롯한 온갖 흠결들이 나왔을 터인데, 기술자들은 주조와 시험인쇄를 거듭해가며 수정·보완했을 것이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금속활자로 제작한 책(공인본)이 나왔으니 최이가 감격해서 발문을 썼을 것이다.

 

 

그래서 최이의 중조 주자본(重彫 鑄字本)’ 발문 구절 중 중조(重彫)’ 부분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찍어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공인본 소장자인 원진스님은 공인본이 금속활자본임을 인정받으려고 발품을 팔았지만 집착이라는 싸늘한 반응을 얻었다고 한다.

 

 

어떤 경우든 구텐베르크보다는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 탄생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대로 그렇게 발명된 금속활자본의 인쇄상태는 만족할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박상국 교수는 따라서 고려 인쇄의 주류는 인쇄상태가 좋은 목판인쇄로 회귀했고, 금속활자인쇄는 그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문헌상 등장하는 <고금상정예문>(1239~1241년 추정)과 현전하는 <직지심체요절>(1377) 등외에는 금속활자본이 알려지지 않고 있어요. 이런 책들은 인쇄문화가 단절된 상태에서 겨우 그 기술을 재현한 것이겠지요.”(박상국 교수)

 

 

그렇다면 1239년 간행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공인본’ <남명증도가>) 실패한 발명품인가. 그렇게 볼 수 없다. 그 실패의 경험은 고려말~조선초 피가 되고 살이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태종은 성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주자소를 만들어(1403)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정해자’)를 제작했고(1407), 세종은 숱한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금속활자의 백미라는 갑인자를 창조했다.(1434) 그 어떤 경우든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397~1468)의 금속활자 발명(1447년 무렵)보다 앞선 발명품이니 금속활자 발명에 관한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이쯤에서 의문점이 생길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활자를 만들었는데, 왜 서양만큼 활자문화를 꽃피우지 못했을까. (사진은 박상국 교수와 손환일 소장, 원진스님이 제공했습니다)

<참고자료>  

박상국,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남명증도가>, 김영사, 2020  

금속활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보조사상 연구원 제11차 정기학술대회, 2015  

손환일, ‘남명천화상송증도가(공인본)에 나타난 금속활자본의 특징’, <문화사학> 48, 한국문화사학회, 2017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4210600001&code=960100)

 

 

6.22  2004 9 12일 조선일보 西간도도 조선 땅

백두산 서쪽·압록강 북쪽지역

···유럽지도에도 표기

 

서간도(西間島)는 간도(間島)와 다른가? 그 영유권은 또 어떻게 되는가?”

 

간도라는 지명은 많은 혼란을 일으킨다. 원래 간도는 함경북도 종성군과 온성군 사이를 흐르는 두만강 중간의 삼각주를 가리키며, 19세기부터 두만강을 건너 땅을 개간하는 인구가 급증해 백두산 동쪽의 비옥한 토지를 모두 간도라 부르게 됐다. 우리 민족이 정착해 개간한 땅이라는 뜻에서 간도(墾島)’라 부르기도 했다. 넓게는 만주지역 전체를 간도라고 부르는 용례도 생겨났다.

  

 

우리가 보통 간도라 부르는 지역은 현재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동간도(東間島)’지역에 해당한다. 백두산 서쪽의 서간도는 이와 다른 지역이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일본, 서양의 많은 기록과 지도에는 압록강 북쪽의 서간도 지역 역시 조선 영토로 표기돼 있다.

  

 

1737년 프랑스 지리연구가 당빌(D’Anville)이 그린 조선왕국 전도’, 프랑스 듀 알드(Du Halde·1740)와 보곤디(R de Vaugondy·1750) 지도, 영국 윌킨슨(Wilkinson·1794) 지도와 1716년 청나라에서 제작된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 일본인이 작성한 동판조선국전도’(1882) 등이 그렇게 표기된 대표적인 지도들이다. 청대 사서인 길림통지(吉林通志)’ 조선의 변경이 심양(瀋陽)과 길림(吉林)에 접했다고 적었다.

  

 

압록강 북쪽에 그어진 이 국경선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전문가들은 명나라 때부터 압록강에서 북쪽으로 120리쯤 떨어진 요동(遼東) 동북쪽 변경에 중국측이 울타리를 설치했던 책문(柵門)’과 청나라 때인 1660년대 이곳에 버드나무를 심고 참호를 판 유조변(柳條邊)’을 만든 것이 실질적인 한·중 간의 국경선 역할을 했던 것이라고 본다. 청 강희제의 명을 받아 1708년부터 1716년까지 변경 지도를 작성한 프랑스 선교사 레지(Regis)의 실측도에 그려진 레지선이 바로 이 국경선이며, 이 선은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까지 그려져 있다. 서간도지역인 통화(通化환인(桓仁) 등지에 이주한 조선인은 1897년까지 37000명이었으며, 조선 정부는 1903년 양변(兩邊)관리사를 파견해 서간도지역의 조선인 마을을 묶어 향약제도를 실시하기도 했다.

 

 

한편 북간도(北間島)’는 보통 동간도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하얼빈과 길림(吉林) 등 북만주 지역을 보통 북간도라고 표현할 때는 연변 조선족자치주 북쪽인 송화강(松花江) 동쪽 일대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 지리적 개념은 1924년 프랑스 파리 외방정교회가 발행한 한국의 가톨릭에 실린 지도에 조선교구의 영역을 흑룡강성 일부까지 그린 것과 대체로 일치한다.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91270300)

 

6.23 2004 10 14일 조선일보 18~19세기 서양地圖 "간도는 조선땅"

당대 유명제작자가 만든 69점 공개

 

18~19세기 서양에서 제작된 고()지도의 대부분이 간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시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프랑스 당빌(D’Anville·1737), 독일 하세(Hase·1730), 영국 키친(Kitchin·1745), 이탈리아 상티니(Santini·1778), 오스트리아 몰로(Mollo·1820) 등 당대의 유명지도제작자들이 만든 지도는 두만강 이북 동간도 지역뿐 아니라 압록강 서북쪽도 조선 땅으로 표기하고 있다. 당시 조선·청을 구획하는 울타리였던 이른바 레지(Regis)을 두 나라 국경으로 명기하고 있으며, 동쪽 국경도 두만강보다 훨씬 북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 것으로 그렸다.

 

 

 

 

14일 동해와 관련된 첫 서양 고지도 도록 시 오브 코리아(Sea of Korea)’를 출간한 경희대 혜정문화연구소 김혜정(金惠靜) 소장은 간도를 분명한 조선 땅으로 표시한 서양 고지도 69점을 수집했다 조만간 이를 주제로 한 전시회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 소장은 대부분의 서양 고지도들이 옛 고구려 수도였던 집안(集安) 일대를 핑안(Ping-ngan)’, 즉 평안도 땅에 속했던 것으로 표기하고 있다 “18~19세기에 분명히 동간도와 서간도 일대가 조선 영토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라고 말했다.

 

 

 

 

 

 

1749년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리(D’Anville)가 제작한‘et des Rojaumes de COREE ET DE IAPAN’ 지도. 한국 평안도(PINGAN·왼쪽 밑줄)가 압록강 이북의 현 중국 집안지역까지로 돼 있고, 함경도(HIENKING·오른쪽 밑줄)도 두만강 이북 간도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당빌리는 프랑스 왕립과학아카데미 회원이었다.

 

 

 

 

 

1745년 키친(T. Kitchin)이 제작한 ‘A Map of QUAN-TONG or LEA-TONGE PROVINCE ; and the KINGDOM of KAU-LI or COREA’ 지도. 동해를 ‘SEA OF KOREA’라고 표기했다.』  

(출처;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101470440)

 

 

6.24  2018 5 17일 오마이뉴스 [지도와 인간사]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강리도가 실린 까닭-안 가봤으면서, 조선 사람이 어떻게 아프리카를 그렸지?

 

[오마이뉴스 김선흥 기자]

 

 

 

 

▲ 스미소니안 책자 강리도 혼코지本光寺  김선흥

 

 

안녕하세요. 오래된 질문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서양보다 훨씬 먼저 아프리카를 지도에 그리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 아프리카 지도는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이번 호의 탐험 과제입니다.

 

 

먼저 책 한 권을 소개한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 HISTORY of the WORLD in 1,000 OBJECTS  강리도 수록ⓒ 김선흥

 

2014년에 스미소니언이 출간한 <1000 개의 사물로 보는 역사> (Smithsonian HISTORY of the WORLD in 1000 OBJECTS)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기원전 2만 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념비적인 문물 1000개를 통해 인류의 발자취를 시각적으로 살펴보는 기획물입니다. 인류의 창의성과 성취에 대한 시각적 축제(visual celebration of human ingenuity and achievement)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사물 중에서도 일부 '특대'의 대접을 받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각각 양면의 지면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문헌으로서는 로제타 석, 마그나카르타 헌장, 미국 최초 헌법 문서 등입니다.

  

 

우리나라의 문물 중에서는 조선 초 제작된 세계지도 강리도(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일본 혼코지 소장본)가 유일하게 '특대'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첫 번째 사진). 조선시대에 총 4쪽을 할애하고 있는데 그 중 절반인 두 페이지가 강리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강리도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유

 

이 책은 강리도를 포함하여 총 4장의 지도를 수록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비중 높게 다루어 지고 있는 지도는 강리도와 16세기 터키의 해군제독 피리 레이스(Piri Reis)가 만든 지도(아래 사진, 1929년 이스탄불 황궁에서 발견됨)입니다.

 

    

 

 

▲ 피리 레이스Piri Reis 지도  16세기 터키의 세계지도ⓒ 김선흥

 

 

강리도가 여기에서 이처럼 부각되어 있는 것은 우연도 아니고 예외도 아닙니다. 서양에서 유사한 저서나 글들은 일일이 예거하기 힘들 정도로 허다합니다. 근래에 나온 책으로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영국의 저명한 지리학자 제리 브로톤(Jerry Brotton)이 펴낸 <열두개의 지도로 본 세계 역사>(A History of the World in Twelve Maps, 2012)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고대로부터 현대 구글 지도에 이르기까지 가장 의미심장한 지도 12개를 수록하고 있는데 강리도가 그 중의 하나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원저 114-145).

  

 

이 책은 강리도에 대해 그 동안 학계에서 축적된 연구 성과를 종합적이고 균형있게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 셀러로 선정된 이 책은 11개의 외국어로 번역되었으며(국내에서는 <욕망하는 지도>라는 이름으로 번역본이 나옴), 오스트리아에서는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강리도의 가치와 성가가 이를 통해 재확인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왜 강리도에 대한 인식이 국내외에서 이처럼 큰 괴리를 보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다시금 갖게 됩니다. 국내 유일의 국사 사전 <새국사사전>(교학사)에는 강리도가 등재조차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예전에 지적한 바와 같습니다. 아무튼 필자가 연재하는 '지도와 인간사'가 이러한 괴리를 조금이나마 좁힐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제 아프리카에 주의를 집중해 보겟습니다. 프랑스어 서적 <아프리카 역사의 이해 Connaissances de l'histoire africaine>(Mahawa Kande, 2009)는 첫 머리에서 강리도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   24-25쪽

 

 

"강리도는 1402년 한국에서 김사형, 이무, 이회에 의하여 제작되었다. 지도에는 상대적 위치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중국 제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서쪽으로는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도 그려져 있는데 중국에 비해서 실제보다 작게 나타나 있다.

 

 

이 지도가 보여주는 아프리카의 실제 윤곽에 대한 이해는 포르투갈 항해가 바르톨로뮤 디아스나 바스코 다 가마 보다 앞서 동양인이 그 지역을 탐험했음을 말해 준다. 아프리카 남단 부분은 대체적으로 정확한 형태를 지녔고, 오렌지 강을 찾아 볼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도 찾아 볼 수 있다. 나아가 아랍어로 이집트를 의미하는 Misr가 중국어로 표기되어 있다." (이형은 번역 참고)

 

 

도대체 서양인들은 어떻게 우리보다 먼저 강리도의 가치를 알아 보았을까요? 특히 아프리카에 주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아프리카를 알고 있었지?

 

명품은 숨어 있어도 결국 알아 보는 사람을 만난다고 합니다. 서양에서 강리도를 맨 처음 주목한 학자는 독일인 발터 푹스(Walter Fuch)박사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1946년에 강리도의 독보적 가치를 소개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설명할 생각입니다).

 

 

놀랍게도 푹스 박사는 강리도가 당시의 모든 유럽과 아랍의 지도들을 무색케 해버린다(completely overshadowing)고 평했습니다. 당시 국내에서는 강리도가 알려지지도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강리도가 주목받게 되기까지는 푹스 박사의 평가로부터 30년이 지나야 했습니다. 1970년대에 이찬 교수(서울대 지리학과)에 의해서였으니까요.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한 가지 흥미로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강리도를 바라보는 관점과 가치 평가에 있어서 우리와 서양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서양학자들을 가장 놀라게 한 대목은 중국도 아니고 한국도 아닙니다. 바로 유럽과 아프리카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아프리카입니다. 우리는 그 대목의 가치를 얼른 알아 보지 못했던 것이구요.

  

 

푹스 박사의 시선이 붙잡혔던 대목도 물론 아프리였습니다. 서양과 이슬람권 보다 훨씬 먼저 어떻게 동아시아의 지도에 아프리카의 올바른 모습이 그려질 수 있었는가? 이는 한 마디로 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수수께끼로 다가 온 것입니다. 실제로 서양 중심의 세계사가 근래 다시 쓰여지는 데에 강리도가 사료로 자주 등장하는 까닭입니다.

  

 

푹스 박사의 강리도에 대한 통찰은 동시대의 저명한 중국학 학자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 당시 영국 캠브리지 대학 교수)에 의해 계승 발전됩니다. 니덤 박사는 일찍이 1959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3권에서 6쪽에 걸쳐(551-556) 강리도의 탄생 배경과 가치에 대하여 논술하였습니다. 세기의 명저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이 저서를 통해 강리도가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세계학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이지요.

 

 

니덤의 강리도론은 이 지도의 의미 조명 및 가치 평가에 있어서 굳건한 토대를 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지를 아주 간략히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강리도 상의 지리지식은 서양보다 훨씬 앞서고 광범위하다. 이러한 지리 지식은 원나라 시절 아랍, 페르시아인 그리고 투르크 인들과의 접촉에서 얻어진 것이 분명하다.

 

 

- 강리도의 아프리카는 올바른 삼각형 형태를 띠고 있고 정확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이는 중국에서 1315년부터 그려진 아프리카가 반영된 것이다.

 

 

- 반면에 14세기 서양과 아랍의 지도에서 아프리카 남단은 언제나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이러한 오류는 15세기 중엽까지도 수정되지 않았다.

 

 

- 푹스 박사는 강리도가 당시의 모든 유럽과 아랍의 지도들을 완전히 무색케해 버린다(completely overshadowing)고 보았는데 제대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강리도에 그려진 아프리카 지도의 모본(밑그림)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아니, 그게 전해져 내려 온다는 말일까요? 전해져 온다면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을까요? 다음 지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다음 호에서 이어가겠습니다.

 

 

 

▲ <광여도> 초판본 복간본ⓒ 김선흥

 

 

 

▲ 고대 아프리카 지도  <광여도> 수록ⓒ 김선흥

(출처; http://v.media.daum.net/v/20180517114204055?rcmd=rn)

 

6.25  2019 11 5일 경향신문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반갑도다! 훈민정음의 나타남이여!' 1940 <간송본>의 출현에 외솔이 외쳤다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 기자 

 

 

 

 

1940년 경북 안동에서 출현한 <훈민정음 해례본>(원본 혹은 간송본). 세종대왕이 직접 지은 예의(서문 포함)는 전해졌지만 한글의 창제원리가 적힌 해례의 존재를 몰랐다가 이 해례본이 출현함으로써 모든 궁금증이 사라졌다. |김슬옹의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역사와 평가’, <한말연구> 37, 한말연구학회, 2015에서  

 

 

최근 문화재위원회는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을 보관할 간송미술관 보호각의 청사진을 조건부 가결했다. 2021년 완공될 보호각에 들어설 문화유산은 국보 12, 보물 32, 시도지정문화재 4건 등이다. 이중 최고의 문화유산은 뭐니뭐니해도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일제강점기인 1940년 우여곡절 끝에 확보한 국보 제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보호각 설립 계획안의 가결을 계기로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를 알아보고 최근 말썽을 빚고 있는 <상주본> <간송본> 2회에 걸쳐 비교해보고자 한다. 은 간송본의 출현에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가 반갑도다!”라 감탄사를 외친 이유,  <간송본> <상주본>과의 비교가 어림없는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어찌 뜻하였으랴. 수개월전 (훈민정음) 원본(이하 해례본)은 경북의 어떤 고가에서 발견되어 시내 모씨의 소유로 돌아갔다단지 책을 입수한 지 겨우 열흘도 넘지 못하여 그 번역문이 정리되지 않은 원고상태로 연재하는 것임을.” 1940 7 30일 조선일보는 원본 훈민정음의 발견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쓴다.

  

 

신문은 <훈민정음 해례본> 발견소식과 함께 훈민정음 한문본 해례본의 핵심내용인 훈민정음 해례(보기를 들어 풀어줌)’의 제자해(글자를 만든 원리와 방법)를 일부 번역해서 실었다. 당시 국어학자인 방종현(1905~1952)과 홍기문(1903~1992)은 해례본을 번역하여 84일까지 5회에 걸쳐 연재했다.

 

 

그런데 연재가 끝난지 불과 6일 뒤인 810일 조선일보는 강제폐간됐다. 일제는 중일전쟁(1937)을 일으킨 뒤 우리말·글의 교육과 사용을 금하고(1938), 창씨개명을 단행(1940)하면서 소통과 지식의 매개체였던 전국종합신문 폐간까지 강행한 것이다. 신문 폐간을 불과 10여 일 앞둔 암흑기 조선에서 한줄기 빛처럼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소식이 전해졌으니 얼마나 극적인가.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1894~1970)는 훈민정음 원본(해례본)의 발견을 두고 경북 안동에서 이런 진본이 발견됐다니 하늘이 한글의 운을 돌보시고 복주신 것이라면서 이렇게 외쳤다. “! 반갑도다! 훈민정음 원본의 나타남이여!”

 

 

 

 

1940 730일 조선일보. ‘원본 <훈민정음>의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훈민정음 창제후 494년 행방이 묘연했던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사실을 알리고 있다. 조선일보는 5회에 걸쳐 훈민정음 원본 관련 소식을 연재했고, 연재가 끝난 84일 이후 6일만에 강제폐간됐다. |김슬옹 전문위원 제공

 

 

외솔 최현배가 비명을 지른 이유

 

그렇다면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이 어떤 의미를 갖기에 외솔이 비명을 질렀을까.  

훈민정음 원본 혹은 해례본은 세종의 한글 창제 원리를 설명한 책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크게 예의 해례로 나뉜다. 세종대왕이 직접 지은 예의는 한글을 만든 이유(서문)와 사용법을 간략하게 한문으로 설명한 글이다. ‘해례는 세종의 명을 받들어 한글을 만든 집현전 ‘8학사가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법을 상세하게 설명한 글이다. 하지만 이 <훈민정음 해례본> 1940년 조선일보의 보도 전까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8세기 실학자들은 해례본의 서문을 포함한 예의 부문만 한글로 풀어쓴 <언해본>을 찾기는 했다. 이것이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익숙한 <언해본>인데, 세종의 한문 서문을 우리말로 바꾼 것이다. 그런데 서문을 포함한 예의 <세종실록> <월인석보> 등에도 실려있다. 하지만 해례가 빠진 <언해본>으로는 한글의 창제 원리와 용법을 알 수 없었다. 외솔 최현배는 이를 두고 훈민정음(한글) 반포 뒤 훈민정음(해례본)을 찍어 폈다는 기록이 없었다면서 최세진(1468~1542)·신경준(1712~1781)·유희(1773~1837) 같은 한글 학자도 그 원본을 보지 못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은 세종이 직접 지은 서문·예의 7쪽 중 4쪽이 사라진채 발견됐다.  66쪽 중 62쪽은 남아있다. 없어진 부분은 이용준 등이 안평대군의 글씨를 토대로 채워넣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편하게 쓰고자 한다(便於日用耳)’에서 ()’자를 ()’자로 잘못 쓰는 등의 오류가 생겼다. 이 오류를 단박에 알아차린 것은 바로 외솔 최현배였다.

 

 

화장실 창살론까지

 

그런 <해례본>이 조선일보의 보도 전까지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글창제의 원리를 두고 온갖 억측이 나왔다. 급기야 화장실 창살설까지 등장했다. 화장실에 앉아 새 문자 창제를 고심하던 세종대왕이 화장실 창살 모양을 보고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얼토당토 않은 설이었다. 대부분은 일제강점이 일본 어용학자들의 한글폄훼론이다. 일제 관학자들은 <언해본> 마저도 위작이라고 깔아 뭉갰다.

 

 

끝내 해례본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한글은 그저 세종대왕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우연히 만든 글자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우리말과 글을 말살하고 신문까지 강제폐간하던 바로 그 암흑기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홀연히 나타났으니 외솔이 하늘이 한글의 운을 돌보시고 복주신 것이라고 외친 것이다. 한글반포(1446) 이후 무려 494년만의 일이었다.

 

 

 

 

간송 전형필. 간송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기와집 10채값인 1만원에 구입하면서 거래를 주선한 이에게는 수고비로 1000원을 더 주었다. 귀한 유물은 귀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기와집 10채 가격으로 구입한 <훈민정음 해례본>

 

그렇다면 훈민정음 해례본은 어떻게 세상에 나왔을까. <해례본>을 처음 소개한 방종현은 수개월전 경북(안동)의 고가에서 발견되어 시내의 모씨 소유가 됐다고 했다. ‘시내의 모씨는 당대의 수집가였던 간송 전형필(1906~1962)이다. 그러나 원소장자 및 매각자와 관련된 정보는 1950년대 경북 안동고 국어교사였던 정철에 의해 처음 밝혀졌다. 정철은 1950년과 54년 국어국문학회가 내는 학술지 <국어국문학> 원본 훈민정음의 보존 경위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했다. 정철은 이 글에서 10여년간 베일에 싸였던 훈민정음 해례본의 원소장자는 경북 안동 와룡면 주하동에 사는 진성 이씨 가문의 후촌 이한걸(1880~1950)’이라 소개했다.

  

 

이한걸 선생의 3남인 이용준이 서울경학원(성균관대 전신)에서 공부했는데이용준은 가장 존경하는 스승 김모(국어학자 김태준)에게 자기 고향 안동에 훈민정음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자 김모는 곧 전형필님으로부터 많은 돈을 얻어 가지고 안동으로 내려와서 현물(훈민정음 해례본)을 보게 되었습니다김모는 사례금으로 3000원을 책주인인 후촌 선생에게 치르고.”

 

 

정철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진성 이씨 가문이 소장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일찍이 진성 이씨의 선조가 여진정벌의 공이 있어 세종대왕으로부터 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상으로 받아 늘 상자 속에 감추어 보존했고, 연산군(재위 1494~1506)의 한글 탄압 때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첫머리 두 장을 뜯어버리고 둘둘 말아서.”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을 전형필이 소장했다는 사실을 최초로 기록한 학술서. 외솔 최현배는 1942 <한글갈>에서  최근에 경북 모 고가에서 발견되어 경성 전형필님의 간수로 된 <훈민정음>”이라고 밝혔다. |김슬옹씨 제공

 

 

아닌게 아니라 이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결정적인 흠이 있으니, 바로 첫머리 두 장(4)이 훼손되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을 서예가이기도 한 이용준이 안타깝게 여겨 <세종실록>에 등장하는 세종대왕의 서문 등을 참고해서 안평대군 글씨체를 모방하여 채워넣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편하게 쓰고자 한다(便於日用耳)’에서 ()’자를 ()’자로 잘못 쓰는 등의 오류가 생겼다. 이 오류를 단박에 알아차린 것은 외솔 최현배였다.

  

 

어쨌든 김모(김태준) 국어학계의 연구자료로 이 책을 서울로 가져가겠으니 허락해달라고 간청했고, 이에 후촌 선생은 김모의 소원을 승락하고 동시에 500여년 전해오던 국보 원본 훈민정음을 김모(김용준)의 수중으로(결국 전형필님) 인도하게 되었습니다.”(정철)

 

 

우여곡절 끝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손에 쥔 간송 전형필은 1958년 소장 경위를 직접 밝혔다.

 

친한 서적상이 시골에 훈민정음 원본이 있다고 하기에 내가 틀림없이 원본이면 무슨 노력을 해서라도 살테니 가져오라고 했어요1년 후 그 사람이 와서 오늘 저녁 가져오겠다고 했어요. 초조하게 그 사람을 기다렸는데 밤중에 온 그 사람이 개선장군처럼 위세당당 웃는 모습으로 나타났어요.”

 

 

전형필은 그때 속심으로 가져왔나보다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헌 종이에 아무렇게나 돌돌말아 쥔 구겨진 종이를 가져왔다고 전했다. 당시 간송 전형필은 <해례본>의 가격으로 1만원(기와집 10채값)을 군말없이 내줬고, 거기에 수고비라며 1000원을 더 얹어주었다고 한다. 귀한 문화유산은 귀한만큼 대접 받아야 한다는 간송의 뜻이었다는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훈민정음 간송본>(이하 간송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1459(세조 5) 나온 <훈민정음 언해본>.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시작된다. 그러나 <훈민정음 언해본>에는 훈민정음 창제의 원리와 용법이 나오지 않았다. |서강대 소장

 

 

진성 이씨냐, 광산 김씨냐원 소장처의 논란

 

최근에는 훗날 <훈민정음 간송본>의 원소장처를 둘러싸고 다른 버전의 이야기가 나왔다.  

 <간송본>은 이용준(이한걸의 3)이 처가(광산 김씨 안동 종가 긍구당’)에서 유출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긍구당설을 주장하는 이들 가운데는 이용준이 광산 김씨 안동종가의 종손이자 이용준의 장인인 김응수(1880~1957)에게 보낸 편지를 증거로 내밀었다.  “(긍구당에서) 가려뽑은 책은 몇 분의 1에 불과하여 서가에 영향은 깊지 않으며값을 90원으로 결정했다는 편지와, “(긍구당에서) <매월집>을 가져온 일은 송구하옵고 범한 행동은 스스로 큰 죄라 여겨 할 말이 없지만용서하심이 어떠냐는 편지 등이 그것이다.

  

 

<간송본>이 긍구당에서 유출됐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용준이 처가인 광산 김씨 안동 종가인 긍구당에서 <매월집> 등을 빼돌렸을 때 <훈민정음 해례본>까지 유출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훗날 김응수의 손자(김대중) 고모부(이용준)가 긍구당의 책방에서 <훈민정음 원본> <매월당집>을 유출해서 조부(김응수)가 고모부에게 공부한 선비가 남몰래 책을 훔치다니 다시는 내 집에 발걸음 하지 말라!’고 꾸지람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단다.

 

 

이들은 연산군 때 한글(언문) 탄압을 피하려고 세종의 어제 서문 2(4)을 뜯어냈다는 주장 역시 근거가 없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어제 서문은 한문으로 적혀있기 때문에 떼어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연산군의 한글탄압이 아무리 극심하다 한들 임금(세종)이 하사한 내린 책, 그것도 어제 서문을 뜯어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결국 해례본의 낙장 2장은 원소유자인 광산 김씨 집안이 대대로 찍었던 장서인, 즉 증거를 없애려고 이용준이 찢은 것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여전히 <간송본>의 원소장처가 진성 이씨 가문이라는 견해를 굽히지 않는 이들도 있다. <매월당집> 만으로는 <간송본> 유출의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1946년 조선어학회가 펴낸 <훈민정음 해례본> 영인본. 간송은 이 영인본의 출간을 허락함으로써 훈민정음 연구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평을 받는다. |김슬옹씨 제공

 

 

훈민정음의 가치를 알아본

 

원소장처가 어디이든 <간송본>의 가치는 값으로 칠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라 할 수 있다.  

어떤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 문화유산을 많은 이들에게 공개하여 연구토록 하는 것은 더더욱 평가받아야 한다.  

 

 

사실 <간송본>이 이용준 친가인 진성 이씨 집안에서 소장했던 것인지 혹은 아니면 처가인 광산 김씨 집안에서 보존해온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당시 24살인 이용준은 아마도 친가나 처가 어른의 동의없이 <간송본>을 팔아넘긴 것은 분명하다. 만약 그 과정에서 증거를 없애려고 앞 두 장을 뜯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 또한 명백한 과오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과오를 감안하더라도 이용준은 <간송본>의 가치를 알아본 인물이라는 평가는 받을 수 있다. 이용준의 조카이자 광산 김씨 문중 인물인 김대중은 일부 학자들이 고모부를 도둑이라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훈민정음 보존에 공을 세운 셈이라면서 평가했단다.

  

 

고모부가 똑똑해서 훈민정음을 알아보고 훔쳐간 것은 나쁜 일이지만 고모부가 아니었다면 벽지로 쓰였을 지도 모르는 입니다.”(최기호의 훈민정음의 가치와 애국지사 외솔 최현배’, <나라사랑> 126, 외솔회, 2017에서)

 

 

이용준이 아니었다면 무가지보인 훈민정음 해례본이 한낱 벽지로 썼을 수도 있었다는 모골 송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2015년 간행된 <훈민정음 복간본>. <훈민정음 간송본> 1962년 국보(70)로 지정됐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김슬옹씨 제공

 

 

일본학자에게 넘어갔다면

 

이용준과 함께 해례본을 간송에게 넘기는데 핵심역할을 한 김태준(1906~1950)은 사회주의 국어학자이다. 당시 경성제대와 경학원(성균관대 전신)에서 강사로 조선문학을 강의하고 있었고, 재직 중 경성콤그룹에 참가해서 인민전선부를 담당했다. 김태준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주하·김삼룡 등과 함께 한국군에게 총살 당했다. 국어학자 안병희(1933~2066)는 바로 김태준의 공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만약 김태준씨가 해례본(간송본)을 전형필씨가 아니라 경성제대 일본인 교수에게 가져갔다면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고 일본으로 반출됐을 것이다. 김태준씨의 그때 일이 얼마나 휼룽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김슬옹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전문위원은 안병희가 말하는 일본인 교수는 1940년 당시 경성제대 우리말글 연구 교수인 고노 로쿠로(河野六郞·1912~1998)였다고 밝힌다. 바로 그 고노가 1947년 발표한 논문에서 “1940년 당시 경성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 원본을 볼 기회가 있었으나 그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했다는 것이다.

  

 

물론 사회주의 국어학자인 김태준이 일본인 교수에게 <해례본>을 넘길리 없었겠다. 그렇지만 순수 학문 연구자의 입장에서 같은 경성제대 강단에 섰던 고노에게 <해례본>을 보여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골이 송연하다.

  

 

영인본 출간의 의미

 

그러나 훈민정음 해례본을 지켜낸 간송 전형필의 공로야말로 첫손가락에 꼽혀야 한다.  

한글학회장을 지낸 김계곤(1926~2014) 아무리 가산이 넉넉하다한들 돈을 보람있게 쓸 줄 아는 이가 얼마나 몇사람이나 되겠냐면서 간송의 공로는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극찬했다.

 

 

간송이 일제강점기 중에서도 가장 힘겨웠던 시절인 1940년대 훈민정음 해례본을 기와집 10채값을 주고 사들여 지켜냈다. 이것만으로도 천고에 길이 빛날 업적이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해방 이후인 1946년 조선어학회(한글학회)에 해례본을 영인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간송은 훗날(1959) 영인본 출간과 관련해서 마음이 홀가분하다고 밝혔다.

 

 

이 책은 오랫동안 서고 깊이 넣어두었다가 해방 이후널리 세상에 내놓았습니다영인본이 나와 널리 책으로 세상에 퍼지게 되었으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 적이 안심이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소장자의 입장에서는 꽁꽁 숨겨놓고 혼자만 감상해야 박물관적인 희소가치가 생기고, 그 가치도 높게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가치있는 문헌을 오래 보존하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공유라 여겨 영인본 출간을 허락한 것이다. <한글학회 100년사>는 영인본 출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간송본>의 발견은 역사적인 사건이요 민족적인 경사였다. 그러나 손쉽게 접할 수 없었기에 만족하지 못했다. 마침내 영인본이 나옴으로써 누구나 쉽게 해례본을 대하게 됐고 신진들의 날카로운 분석도 뒤따랐다.”

 

 

이렇게 나타난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은 국보 70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전세계가 보존해야 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경향신문 선임 기자

 

<참고자료>  

김슬옹,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역사와 평가’. <한말연구> 37, 한말연구학회, 2015  

이상규, ‘잔엽 상주본 훈민정음 분석’, <한글> 298, 한글학회, 2012  

최기호,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와 애국지사 외솔 최현배’, <나라사랑> 126, 외솔회, 2017  

박종덕,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출과정 연구-학계에서 바라본 발견에 대한 반론의 입장에서’, <한국어회>, 31, 한국어학회, 2006  

박영진, ‘훈민정음 해례본 발견 경위에 대한 재고’, <한글새소식> 395, 한글학회, 2005  

김주원, ‘훈민정음 해례본의 뒷면 글 내용과 그에 관련된 몇 문제’. <국어학> 45, 국어학회, 2005

 

(출처; https://news.v.daum.net/v/20191105050008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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