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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14) 1918년~1922년 신한청년당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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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14) 1918년~1922년 신한청년당

대야발 2025. 5. 5. 17:46

 

 

 

 

 

 

 

1918년 11월 28일 중국 상해에서 여운형·장덕수·김철·선우혁·한진교·조동호 등 20~30대 독립운동가들이 만든 신한청년당은 1차 세계대전 마무리를 위해 열린 파리 평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했고, 국내·일본·만주·연해주에 밀사를 보내 독립 만세 시위를 유도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난 뒤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출범을 주도했다.

 

신한청년당은 소수 정예주의를 채택해 '20~40세, 기성 당원 2명 이상의 추천'으로 자격을 제한했다. 김규식·조소앙·이광수·김구·신석우·서병호·송병조·이유필 등 50명가량이 당원이었고, 외교·교육 활동과 기관지 '신한청년' 발간 등 활발히 움직이다 1922년 말 해산됐다.

 

 

 

■ 3·1운동의 숨은 주역 '신한청년당'을 아시나요

이선민 선임기자2018. 11. 28. 03:05

 
1918년 11월 중국 상해서 여운형·장덕수 등이 결성
파리 평화회의에 대표 파견하고 臨政 출범 주도.. 오늘 100주년

 

 

'우리 사업의 시초는 독립을 완성함에 있도다. 우리의 국토와 자유가 회복되는 날까지 싸우고 싸우리라. 그러나 대한의 청년아, 우리에게는 독립 이상으로 더 중요한 사업이 있도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민족을 개조하는 동시에 학술과 산업으로 우리 민족의 실력을 충실케 해야 하나니라.' ('신한청년당 취지서')

 

 

28일은 '3·1운동의 진원(震源)'으로 꼽히는 신한청년당이 결성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18년 11월 28일 중국 상해에서 여운형·장덕수·김철·선우혁·한진교·조동호 등 20~30대 독립운동가들이 만든 신한청년당은 1차 세계대전 마무리를 위해 열린 파리 평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했고, 국내·일본·만주·연해주에 밀사를 보내 독립 만세 시위를 유도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난 뒤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출범을 주도했다. 신한청년당은 소수 정예주의를 채택해 '20~40세, 기성 당원 2명 이상의 추천'으로 자격을 제한했다. 김규식·조소앙·이광수·김구·신석우·서병호·송병조·이유필 등 50명가량이 당원이었고, 외교·교육 활동과 기관지 '신한청년' 발간 등 활발히 움직이다 1922년 말 해산됐다.

 

 

 

파리 평화회의에 파견된 신한청년당 대표단이 현지인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앞줄 오른쪽 끝이 김규식, 왼쪽 끝이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 뒷줄 왼쪽에서 둘째가 이관용, 셋째가 조소앙이다. 작은 사진은 1919년 12월 상해에서 간행된‘신한청년’창간호. 이광수가 주필을 맡았다.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28일 오후 1시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23층 컨벤션홀에서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주최로 열리는 '3·1운동의 숨은 주역 신한청년당' 학술회의는 내년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신한청년당의 역사적 의의와 주요 인물들의 활동을 재조명하는 자리다.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몽골을 거쳐 1918년 무렵 천진에 있던 김규식은 신한청년당에 의해 파리 평화회의 대표로 지명되자 1919년 1월 상해로 와서 당원으로 가입하고 선편(船便)으로 파리로 향했다"며 "1919년 3월 16일 파리에 도착한 뒤 스위스 유학생 이관용과 임정이 파견한 조소앙·여운홍의 도움을 받아 일제 식민 지배의 실상과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광범위한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고 말한다.

 

 

변은진 고려대 연구교수는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중순부터 당원을 각지로 보내 파리 평화회의 대표 파견을 알리고 조선 독립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도록 민족적 궐기를 촉구했다"며 "김철·서병호·선우혁·김순애는 국내로 들어가 천도교·개신교 지도자들을 만나 자금을 모으고 만세 운동을 촉구했으며, 장덕수·이광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 유학생들의 궐기를 조직했고,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를 돌며 현지 한인들의 만세 시위 운동을 자극했다"고 설명한다.

 

 

김희곤 안동대 교수는 "신한청년당은 3·1운동 이후에는 독립운동가들을 상해로 모으고 '독립 임시 사무소'를 만드는 등 임시정부 수립의 실무를 담당했으며 초기 임정에서 핵심 간부를 맡아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했다"며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이란 이름에는 '구한(舊韓)'인 대한제국과 구별되는 근대국가와 시민사회를 지향하는 신세대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1)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인 1919년 3·1운동을 촉발시킨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 몽양 여운형이라면?

여운형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억은 광복 전후부터 그가 1947년 7월 암살당할 때까지 몇년간의 활동에 관한 것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 3·1운동 뒤에 ‘몽양’ 있었다

한겨레 한승동기자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08-04-30 20:15

 

 

이정식 교수의 ‘몽양 여운형’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인 1919년 3·1운동을 촉발시킨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 몽양 여운형이라면 사람들이 믿을까. 여운형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억은 광복 전후부터 그가 1947년 7월 암살당할 때까지 몇년간의 활동에 관한 것이 거의 전부였다.

 
독립청원서 작성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 파견 강덕상의 ‘여운형…’ 방대한 자료 균형적 해석
 

지난해 12월 초 국내에 번역·출간된 재일동포 역사학자 강덕상 시가현립대 교수의 <여운형 평전 1>은 방대한 자료들을 통해 기존 연구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강 교수는 자신이 “평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독립운동사론”이라고 한 그 책에서 독립운동 세력이 3·1운동과 밀접하게 얽혔던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와 파리 강화회의에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자세하게 논하면서 몽양의 역할에 대해 포괄적으로 언급했다.

 

 

은사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와 함께 한국민족운동사를 천착해온 이정식(77)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경희대 석좌교수의 <몽양 여운형>(서울대 출판부 펴냄)은 <여운형 평전 1>과는 또 다른 각도로 몽양의 실체에 다가가면서 그것이 이룩한 성취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요소들을 보탰다. 특히 3·1운동이 일어나는 데 몽양이 직접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료들을 담았다.

 

이에 따르면 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 쪽 승리로 끝난 1918년 11월28일 당시 상하이에서 기독교 전도사로 교민친목회(그 다음해 초 교민단으로 바뀌고 몽양이 단장이 됨) 총무를 맡고 있던 몽양은 파리 강화회의를 피압박민족 해방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강조한 주중 미국대사 내정자 찰스 크레인의 연설을 듣는다.

 

그 자리에서 크레인을 직접 만난 몽양은, 그해 여름 상하이에 와 있던 8살 아래의 와세다대 출신 장덕수 등과 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고 신한청년당을 결성한 뒤 일제의 탄압을 피해 톈진으로 망명한 김규식을 불러 강화회의에 보내기로 했다. 김규식이 상하이를 출발한 것은 1919년 2월1일. 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려는 노력은 여러 갈래로 경주됐으나 오직 김규식만 성공했다.

 

파리행을 토의할 때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쪽에서 서울에 사람을 보내 국내에서 독립선언을 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조선이란 망한 나라가 존재감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발언권도 없고 누군지조차 모를 자신에게 회의 참석자들이 관심을 기울일 리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정식 교수의 ‘몽양 여운형’

 

 

이정식 교수는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씨를 만나 책에 인용한 그 얘기를 확인했는데 김규식 평전까지 썼던 자신의 뒤늦은 깨달음을 탓하면서, 도쿄와 서울에 전달된 그 말이 3·1운동을 불러일으켰다고 밝혔다.

 

기독교·천도교·불교계 지도자들이 3·1운동을 조직하고 주동하게 만든 직접적인 동기는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었다. 그런데 2·8선언 직전 주동자였던 최팔용을 움직인 것은 상하이에서 도쿄로 잠입한 장덕수였다.

장덕수를 일본과 조선에 파견한 것은 몽양이었고,

거사 계획을 알리고 김규식 여비를 모금하는 것이 장덕수의 주요 임무였다.

 

 

이정식 교수는 중국 5·4운동까지 촉발한 3·1운동 발발 이후 전도사 여운형은 독립운동가 여운형으로 위상이 바뀌며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데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이 교수는 사람들이 광복 뒤의 일들만 가지고 몽양을 평가하지만 그 기간은 “그의 60평생의 극히 짧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며, 50여 년에 걸친 자신의 한국민족주의운동사 연구 “거의 모든 장면”에서 몽양과 마주쳤다고 강덕상 교수와 꼭 같은 말을 했다.

 

그는 강 교수의 <여운형 평전 1>이 “자료의 방대함과 서술의 세밀함에서 너무나 충격적이었다”며, 그 때문에 자신은 몽양의 삶 전체를 추적하는 전기를 쓰기보다는 “나름대로의 해석” 쪽으로 집필 방향을 바꿨다고 말했다.

 

<몽양 여운형> 역시 800쪽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이다. <여운형 평전 1>은 왜곡되거나 무시당한 몽양의 일생과 시대상을 구체적 사실들을 통해 바로잡는다는 일념으로 일로매진했고, <몽양 여운형>은 사실들의 중층적 맥락을 섬세하게 살피면서 균형 감각을 유지하려 애썼다.

 

“서재필, 이승만, 김규식 등을 연구하여 전기를 쓰기도 했고 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가들을 연구한 바 있지만 여운형을 가장 좋아한다”는 이 교수는 몽양의 사상이 ‘모호한 팔방미인’이라거나 그를 ‘공산주의에 도취된 줏대 없는 기회주의자’로 보는 주류적 시각에 대해서는 그에게 맞지 않는 “사상적인 틀을 무리하게 맞춰보려고” 한 결과일 뿐 사실이 아니라고 지적했다.(2)

 

 

 

■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베르사유조약 100년과 무산된 독립청원의 꿈

연합뉴스 2019. 6. 26. 09:00
 
1차대전이 끝난 뒤 6개월간의 파리평화회의를 거쳐 1919년 6월 28일 프랑스 베르사유궁전 거울의 방에서 각국 대표들이 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9년 6월 28일, 프랑스 파리 남서쪽 베르사유궁전 거울의 방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 대표들이 패전국 독일의 대표를 불러놓고 440개 조항으로 이뤄진 베르사유조약에 서명했다. 5년 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를 저격해 1차대전의 도화선에 불을 댕긴 바로 그날이었고,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항복을 받아낸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가 48년 전 통일 독일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한 바로 그 장소였다.

 

1918년 11월 11일 1차대전의 총성이 멎은 뒤 승전국들은 1919년 1월 18일 파리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 베르사유체제를 탄생시킨 파리평화(강화)회의의 시작이다. 평화를 내세우긴 했지만 사실은 독일의 배상금 액수를 정하고 패전국들의 영토를 나눠 갖기 위한 자리였다. 모두 27개국 대표가 참석했으나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3명이 좌중을 이끌었다. 동맹국 영국의 요청에 따라 참전을 선언하고도 유럽 전선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은 채 동아시아에서 영토 야욕만 채우던 일본의 사이온지 긴모치 총리도 당당히 참석해 목소리를 높였다.

 

 

2018년 11월 11일 프랑스 파리 개선문에서 열린 1차대전 종전 기념식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의장대 앞을 지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베르사유조약을 비롯해 나머지 패전국과의 후속 조약이 마무리된 결과 유럽의 지도는 크게 바뀌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해체되고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가 독립했다. 오스트리아는 영토의 73%와 인구의 75%를 잃어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헝가리도 영토의 3분의 2가 떨어져 나갔다. 독일은 알자스·로렌 지역을 포함해 13%의 영토를 내주고 아시아에서도 중국 산둥반도 등을 일본에 빼앗겼다. 오스만튀르크제국은 중동 지역을 영국과 프랑스 등에 할양하며 이스탄불과 소아시아반도의 터키로 쪼그라들었다. 불가리아도 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그리스 등 주변국에 땅을 나눠줘야 했다.

 

 

파리평화회의에는 전쟁 당사국이 아닌 나라들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국권을 빼앗긴 피식민국들도 대표를 파견해 식민국의 만행을 폭로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할 무대로 여겼다. 윌슨 미국 대통령이 1918년 1월 14개 조의 평화 원칙을 발표하며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운 것은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에게 한 가닥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해 11월 미국 대통령 특사 찰스 클레인이 중국 상하이를 방문해 "파리평화회의는 약소민족 해방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연설한 것도 청신호였다.

 

 

 

파리평화회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파견돼 활약한 김규식. [연합뉴스 자료사진]

 

 

 

여운형·장덕수·김철·선우혁 등을 중심으로 1918년 8월 발족한 신한청년당은 그해 12월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하는 한편 1919년 2월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했다. 양반 관리의 자제로 태어난 김규식은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에게 입양됐다가 구세학당(경신학교 전신)에서 신학문을 익히고 독립협회 활동을 거쳐 미국에 유학했다. 로어노크대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프린스턴대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프랑스어에도 능통해 파리평화회의 대표에 적임이었다.

 

 

1919년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은 한국대표관을 개설해 외교 활동에 나서는 한편 '자유한국'(La Coree Libre)을 간행해 3·1운동 등 한국 독립운동에 관한 소식을 알렸다. 4월 11일 임시정부 출범 후에는 외무총장 겸 파리평화회의 대표위원으로 임명돼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의 서한을 클레망소 파리평화회의 의장에게 전달했다. 김규식은 한국대표관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로 개칭하고 이관용과 황기환을 부위원장과 서기장에 각각 임명했다. 친일 관료 이재곤의 셋째아들인 이관용은 스위스 취리히대에 유학하던 중 김규식의 제안을 받아 합류했고, TV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주인공 유진 초이(이병헌)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황기환은 미군으로 1차대전 유럽 전선에 투입됐다가 종전 후 동참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청사.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들의 활약 덕분에 유럽 언론들도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품기 시작했다. 파리위원부가 발행한 '구주의 우리 사업'에 따르면 1919년 3월부터 1920년 10월까지 프랑스 신문에 실린 한국 관련 기사는 133종 423건에 이르렀다. 교황 베네딕토 15세도 "사랑하는 한국 교회의 자녀들이 받는 핍박에 대해 우려하며 속히 자유와 행복의 생애를 누리기를 하느님께 간구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파리위원부에 보내왔다.

 

 

미국에 있던 이승만도 정한경·민찬호와 함께 파리평화회의에 참여하려고 했으나 미국이 프랑스행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아 무산됐다. 김창숙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고자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파리장서)와 곽종석·김복한 등 유림 137명의 서명자 명단을 적은 종이를 꼬아 미투리로 만들어 신고 압록강을 건넜다. 파리로 향하려던 그는 상하이에서 임정 요인들과 상의한 끝에 김규식에게 영어 번역본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상하이에 남았다. 파리장서는 국내와 중국 등의 주요 기관에도 수천 부가 배포됐다.

 

 

 

4월 17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 명륜당에서 열린 '유림 독립항쟁 파리장서 100주년 기념식'에서 유림과 성균관대 학생들이 독립청원서를 낭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는 파리평화회의 회의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 승전국의 일원인 일본 대표가 이를 허용할 리 만무했다. 12년 전 만국평화회의에서 분루를 삼킨 헤이그 특사들의 비운이 재현된 것이다. 파리에서 활동하던 호찌민도 베트남을 프랑스에서 독립시켜 달라고 청원했으나 열강들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해 승전국들의 제 몫 챙기기를 위한 허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말았다.

 

 

베르사유체제는 이듬해 국제연맹까지 탄생시키며 세계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듯 보였으나 그것은 피식민국을 제외한 '그들만의 리그'였다. 결국 히틀러와 무솔리니라는 괴물을 낳고 일본 군국주의의 발호를 막지 못한 채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20년 만에 붕괴하고 말았다. 그러나 파리평화회의는 애국지사들의 독립 의지를 고무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모멘텀이 됐고, 이를 통해 결집한 항일투쟁의 역량과 열망이 광복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오래도록 기억될 역사적 사건임이 틀림없다. (한민족센터 고문)(2)

 

 

 

<자료출처>

 

(1) 3·1운동의 숨은 주역 '신한청년당'을 아시나요 (daum.net)

 

 

(2) 3·1운동 뒤에 ‘몽양’ 있었다 (hani.co.kr)2019-10-19

 

 

(3)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베르사유조약 100년과 무산된 독립청원의 꿈 (daum.net)

 

 

 

<참고자료>

 

신한청년단 - Daum 백과

 

 

신한청년당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1919 한겨레] 하늘도 돕는 신한청년당 독립투쟁 (daum.net)

 

 

"신한청년당 기관지에 사회주의 지향 강하게 나타나" (daum.net)

 

 

3·1운동 산파 역 신한청년당 100년 만에 '햇빛' (daum.net)

 

 

[1919 한겨레] 최초의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 결성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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