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 (14) 제3공화국 : 박정희정부(1963년 12월 17일 ~ 1972년 10월 16일) 1964년 6·3항쟁 본문

항쟁은 1964년 3월24일 대학생들이 '밀실에서 이뤄지는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나서며 시작됐다. 하지만 당시 박정희 정권의 밀실협상은 계속됐고, 급기야 6월3일 성난 시민들까지 시위에 대거 가세하기 이르렀다.
거리로 쏟아져나온 1만5천여명의 시민과 대학생들은 한일회담 반대와 함께 "박정희 군사정권 퇴진하라"는 구호를 외쳤고, 이에 박정희 정권은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병력을 서울시내에 투입해 시위를 진압하는 초강경 대응으로 맞섰다. ......
특히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나 독도 문제 등 오늘날 `한일 과거사'라는 이름으로 제기되는 미해결 현안을 큰 숙제로 남기면서 때만 되면 망령처럼 되살아나는 한.일 외교갈등의 씨앗이 된 실정이다.
■ [6월3일!] "일본에 굴복하다니"… 분노한 대학생들의 외침
머니S 김인영 기자 2024. 6. 3. 07:16
[역사 속 오늘] 6·3 항쟁

1964년 6월3일. 박정희 정권의 한·일 협상에 반대한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 시위에 나섰다.
박정희 정부는 1964년 6월3일 계엄령을 선포하며 당시 절정에 이른 한·일국교정상화회담 반대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6월3일 선포된 계엄령은 같은해 7월29일 해지됐다.
6·3항쟁 시위가 된 서울대 단식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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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2월 박정희 정부는 3월 안에 일본 교섭의 기본 방침을 밀고 나가겠다는 결정을 발표했다. 박정희 정권은 일반 여론의 추세를 무시한 채 3억달러의 청구권 보상에 만족하며 한국 어민들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일본에 내주는 굴욕 외교를 행했다.
이에 반발한 서울대 문리대생들은 1964년 5월30일 교정에서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고 한·일 회담 성토와 박정희 정권 성토식을 한 후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는 6·3항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당시 서울대 학생회장이었던 김덕룡씨는 "오늘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낭독하고 단식농성을 진행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식농성에 참여하는 학생 수가 점점 늘어났다.
대학생들은 서울 시내의 거리로 나와 "박정희 정권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1964년 6월2일 고려대, 서울대 법대, 서울대 상대생을 필두로 진출해 시위를 주도하자 서울 지역의 대학생들이 이에 동참하며 항쟁이 시작됐다.
서울대 단식농성에 이어 각 지역의 대학에서는 관을 준비하며 한·일 협상을 무리하게 추진하려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의장에 대한 규탄 성명과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민주적 민족주의 장례식을 열었다.
이밖에도 시민사회단체와 윤보선·장택상·박순천 국회의원 등을 중심으로 구성된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도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한·일협상 반대 또는 한·일협상 조건 재수정을 외쳤다.
1964년 6월초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한·일국교정상화회담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자 6월3일 낮 12시에 학생들은 거리 시위를 벌였다. 일제히 서울 시내 거리로 나온 약 1만2000명의 학생은 경찰과 충돌하면서도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를 행하던 학생들은 경찰의 최루탄 공세에 결국 학교로 철수했다. 하지만 이 시위는 6·3 항쟁의 시발점이 됐다.
서울 18개 대학 1만5000여명은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국회의사당을 점령했다. 학생들의 시위가 격렬해지자 박정희 정권은 6월3일 밤 9시40분에 선포하기로 한 계엄령을 오후 8시로 소급해 서울시 전역에 대해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 선포 이후 시작된 언론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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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부는 인혁당이 한·일 협정 반대 이슈를 선동해 배후 조종해 대한민국 정부 전복을 기도한 반란 사건으로 규정했다. 박정희 정권은 6월3일 오후 6시30분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 금지와 진압, 언론검열, 대학 휴교 등 주동자 검거에 나섰다.
시위의 주동 인물과 배후세력으로 지목된 학생과 정치인, 언론인 등 1120명이 검거됐다.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이명박, 이재오, 손학규, 김덕룡, 현승일, 이경우 등 348명은 내란 및 소요죄로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 동안 복역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방송 담화를 통해 6·3 항쟁 시위를 "야당 정치인들의 선동이며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 공부에 매진해 달라"고 강조했다.
1964년 6월6일 계엄령이 선포된 지 3일 뒤에 무장 군인들은 학생들에게 호의적이던 동아일보사에 심야에 침입해 위협 공갈을 가했다. 이는 당시 동아일보가 친민주당, 친신민당계 언론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에 윤보선 의원은 "언론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요, 탄압이며 나아가 언론 그 자체를 말살하려는 독재의 극치"라고 비판했다. 서울 시내에 경찰과 계엄군이 투입돼 1964년 7월28일 시위는 진압됐고 이튿날인 29일 계엄령은 해제됐다.(1)
■ 전국 시위에 계엄령 선포한 그날 [그해 오늘]
1964년 6월 3일 한일협정 반대 항쟁
전국 시위에 계엄령 선포, 1000여명 체포
2025년 6월 3일 대한민국 유권자들은 계엄령 발동이 촉매가 된 대통령 탄핵으로 조기 대선을 치르게 됐다. 묘하게도 61년 전 오늘은 정부의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해 전국에서 시민들이 들고일어나자, 군부정권이 이를 억누르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한 날이기도 하다.

4.19 이후 최대 규모 항쟁으로 기록된 6.3 항쟁은 정부의 일방적인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해 일어났다. 일본과의 국교, 전후 보상문제 등을 논의한 한일기본조약 협의는 이승만 정부부터 꾸준히 진행돼 왔는데, 1964년 초 박정희 정부가 밀어부친 협상 내용이 일부 알려지면서 대학가 등에서 반대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는 일제 치하를 벗어난 지 그다지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아 반일 감정이 강했던 시절이고, 일제 강점에 대한 일본 측 사과조차 명확히 공개된 바가 없어 협정에 대한 비판 여론이 강했다.
한일협정을 제2의 경술국치에 비유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고, 박정희 정권이 이같은 분위기에도 협정을 밀어붙이자 전국적인 시위가 폭발했다.
저항이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로 확산되고 시위가 절정에 이른 6월 3일 오후 8시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해 시위 진압에 나섰다. 경찰과 군 4개 사단 병력이 동원됐고 영장 없는 수색, 체포, 구금 등이 가능해져 전국에서 잡아들인 학생, 정치인 언론인이 1000명을 넘어섰다. 체포된 이들 중에는 후일 한국 정치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
박정희는 방송담화까지 내 시위를 “야당 정치인들의 선동”으로 격하하는 한편 학생들은 학교로 가 공부나 하라고 다그쳤다. 계엄령은 두달 가까이 지난 7월 29일에야 해제됐다.
이후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 이어졌으나 결국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고 한일수교까지 이뤄지면서 이 항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때 항의한 시민들이 옳았던 것은, 이 협정이 6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강제징용, 위안부 피해 등의 배상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로 증명되고 있다.(2)
■ <6.3 항쟁> ① 역사적 평가
굴욕적인 한일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던 대학생들이 박정희 군사정권에 항거한 6.3 항쟁이 3일로 46주년을 맞는다.
특히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들이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지난달 `1910년 한일병합 조약은 무효'라는 성명을 양국에서 동시에 발표하면서 6.3 항쟁에 대한 역사적 관심은 어느 때보다 더 높다.
항쟁은 1964년 3월24일 대학생들이 '밀실에서 이뤄지는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나서며 시작됐다.
하지만 당시 박정희 정권의 밀실협상은 계속됐고, 급기야 6월3일 성난 시민들까지 시위에 대거 가세하기 이르렀다.
거리로 쏟아져나온 1만5천여명의 시민과 대학생들은 한일회담 반대와 함께 "박정희 군사정권 퇴진하라"는 구호를 외쳤고, 이에 박정희 정권은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병력을 서울시내에 투입해 시위를 진압하는 초강경 대응으로 맞섰다.
이어 박 정권은 시위 주동인물과 배후세력으로 이명박(현 대통령)당시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을 비롯, 이재오(국민권익위원장), 손학규(민주당 전 대표), 김덕룡(대통령 국민통합특보), 현승일(전 국민대 총장) 등 시위 지도부 348명을 내란 및 소요죄로 붙잡아 철창에 가뒀다.
이러한 국민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박 정권은 이듬해인 19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면서 한일수교 논란은 13년8개월 만에 `일방적인' 마침표를 찍었다.
6.3 항쟁은 이처럼 박 정권에 의해 진압되며 당장에는 좌절을 겪었지만 이 민주화운동은 한국의 현대사에 면면히 이어진 민주주의의 초석을 닦는데 큰 획을 그었다는 평가다.
특히 4.19의 저항정신을 계승하면서 1969년 3선 개헌 반대운동과 1973년 유신체제 반대운동으로 이어지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평가이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한 유형렬 6.3 동지회 부회장은 "일본의 부당함에 맞서는 민족주의 운동으로 3.1 운동의 맥을 잇는 동시에, 군사정권 퇴진을 요구한 민주주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4.19 혁명의 정신을 계승했다"며 "특히 6.3 항쟁은 향후 군사정부 퇴진 운동에 첫 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둘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한일수교에 대한 평가가 여전히 분분한 것도 6.3 항쟁의 의미에 빛을 더해주고 있다.
한일수교는 경제개발을 위한 외화도입이 절실했던 상황에서 당시 박정희 정권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평가도 물론 있다. 3억 달러의 `경제협력자금'(청구권자금)이라는 `종자돈'으로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전시 중 개인피해의 청구권이 소멸되면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대가로 받은 경제협력자금에서 개인배상금이 포함되지 않는 등 배상자금 규모가 적었고, 경제적 실리에 급급한 나머지 역사부채 청산의 기회를 희생시켰다는 지적도 여전하다.
특히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나 독도 문제 등 오늘날 `한일 과거사'라는 이름으로 제기되는 미해결 현안을 큰 숙제로 남기면서 때만 되면 망령처럼 되살아나는 한.일 외교갈등의 씨앗이 된 실정이다.
일본과의 관계와는 별도로 6.3 항쟁이 민주화를 겪으며 선진화를 추구하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작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을 배제하고 국가가 독단으로 정책결정을 밀어붙일 때 국민적 저항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강원택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민족의 생존이 걸린 대북문제나 국민의 살림살이와 직결된 FTA(자유무역협정) 체결 등의 국가적 정책결정 과정에서는 투명성을 바탕으로 국민을 설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6.3 항쟁의 교훈"이라고 말했다.
46년 항쟁의 `주역'들은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라는 6.3 항쟁 정신을 자양분 삼아 이후 사회 각계각층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과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 김덕룡 국민통합특보,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문희상 전 국회부의장 등이 정치권의 대표적 `6.3 세대'로서 현재도 역사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으로 6.3항쟁을 주도했던 주역 중 한 명인 김덕룡 대통령 국민통합특보는 "4.19 혁명이 군사쿠데타로 좌절됐지만 6.3 항쟁을 계기로 3선개헌 및 유신개헌 반대, 광주민주화항쟁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이라는 민주화운동의 명맥이 이어질 수 있었다"며 "젊은 세대들이 6.3 항쟁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린다면 21세기 위대한 한민족의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3)
<자료출처>
(1) [6월3일!] "일본에 굴복하다니"… 분노한 대학생들의 외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