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 (5) 1961년 5.16 쿠데타, 1972년~1979년 유신체제 본문
제3·4공화국 : 박정희정부(1963년 12월 17일 ~ 1979년 10월 26일)
■ 5.16 군사 쿠데타
"박정희의 경제성장은 '만들어진 신화'"
'박정희의 그림자'.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이 등장한 지 어느덧 반세기가 흘렀다. 그 사이 군부독재 청산을 위한 민주화의 바람이 일었고 이른바 두 번의 '민주정부' 역시 등장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박정희라는 이름의 견고한 '신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직까지도 일각에선 박정희 정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향수론'까지 고개를 드는 상황이다.
그 '그림자'의 밑바탕엔 경제성장이라는 '신화'가 깔려있다. 경제 발전을 위해선 민주주의를 유보하는 것이 불가피했고, 그것이 후발 산업화국가가 처한 '숙명'이라는 것이다. 이 논리 속에선 헌법까지 뜯어고쳐 장기 집권을 한 독재자도, 민주화의 열망을 틀어막은 국가의 폭력조차도 모두 용인된다.
과연 경제성장을 위해선 독재도 용인될 수 있는 걸까. 5.16 쿠데타 50년을 맞아 14일 '민주·평화·복지포럼(상임대표 이부영)'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참가자들은 '쿠데타 정당화론'이 "근거 없다"고 입을 모았다.
박정희 신화 : "박정희 시대 경제성장은 당시 산업 구조 때문"
임혁백 고려대 교수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은 정치체제가 권위주의여서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산업화에 유리한 구조적 조건이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라며 '독재 불가피론'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임 교수는 "모든 국가주도의 경제가 권위주의적인 것은 아니며, 일본·오스트리아·핀란드의 경우 민주주의 하에서 국가주의적인 경제발전을 훌륭하게 이룩했다"며 "결국 박정희는 산업화와 경제발전을 위해 권위주의 독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해 경제발전을 명분으로 내걸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임 교수는 또 박정희 시대와 대비되는 '민주정부 무능론'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박했다. 구체적인 수치를 따져보면 권위주의 정권보다 민주정부 집권 당시 경제 성적표가 훨씬 좋았다는 것이다. 그는 "권위주의 시대의 고성장은 만성적인 고인플레, 무역적자를 수반한 데 반해, 민주정부는 1998년부터 만성적 무역적자를 흑자로 전환시켰고, 물가를 안정시켜 저인플레, 고임금, 저실업 고도성장의 패턴을 정착시켰다"며 "경제발전에 있어서 민주주의가 권위주의보다 우월하다"고 설명했다.
경상대 장상환 교수 역시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을 일종의 '신화'라고 분석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이 경제성장에 엄청난 공을 세운 것이 아니라, 성장률이 높을 수밖에 없는 공업화 초기에 집권을 했던 것 뿐"이라며 "그 당시의 경제성장은 박정희의 공이 아닌 시대적인 조건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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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1월,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경북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해 분향하고 있다. ⓒ뉴시스 |
박정희 향수 : "우리 삶의 불안정성이 강한 리더십에 대한 향수 낳았다"
박정희 시대 18년 동안 민주주의와 인권이 유린됐다는 비판은 일반적이지만, '신화'는 여전히 견고하다. 서울대 정근식 교수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의 원인을 △경제성장에 대한 신화 △보수언론의 '박정희 되살리기' △10.26이라는 죽음의 비극적 형식 △민주세력의 분열과 무능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정 교수는 "그러나 박정희는 자신에게 저항하는 사회운동의 주체를 역사의 주체로 만들었다"며 "현재까지도 박정희의 유령과 싸워야 하는 이 세력이 어떤 대안을 만들어 제시하느냐에 따라 '박정희 그림자'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연세대 김호기 교수는 "박정희에 대한 향수는 현재 삶의 불안정성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사회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되고 적지 않은 국민이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삶의 불안정성 때문에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라며 "결국 박정희가 옳아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현재의 곤궁이 강력한 리더십으로 상징되는 박정희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정희의 유산 : "노동의 비인간화, 사회 깊숙이 스며든 박정희의 유산"
문제는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향수'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박정희 정권의 재벌 키워주기 식 경제성장론과 노사간 불균형은 오늘날 심각한 사회 양극화, 자영업자의 몰락, 광범위한 비정규노동자 형성의 원인이 됐다"며 "박정희 시대의 노동탄압과 사회 불균형을 보수정권이 그대로 답습해온 것"이라고 꼬집었다.
김 교수는 "지난 2009년 쌍용차 노동자들을 진압하던 경찰의 모습을 보면, 민주정부 10년을 경험했다고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토끼사냥'이었다"며 "박정희 시대 때 공고화된 '노동의 비인간화'를 민주정부 10년의 역사로 덮어버리기엔 이미 우리 사회에 너무나도 강하게 스며든 탓"이라고 설명했다.
만들어진 신화…"'박정희의 그림자'를 걷어내자"
'신화' 극복을 위해선 그를 뛰어넘는 '대안'이 절실하다는 지적도 공통적으로 나왔다. 김동춘 교수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청산과 함께 대안이 필요하다"면서 "노동의 인간화와 800만 비정규직 문제부터 해결해야 박정희 모델과의 결별이 이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호기 교수는 "박정희 시대를 넘어서는 것은 박정희 모델보다 나은 새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데 있다"며 "김대중, 노무현이란 민주정부의 리더십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진보개혁세력의 리더십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장상환 교수 역시 "우리나라는 개발독재 국가에서 곧바로 신자유주의 국가로 전환돼 그 어느 때보다 제대로 된 복지국가의 건설이 필요한 때"라며 "이제 시대적 과제가 되어버린 복지국가를 구상하는 데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 치밀함이 요구된다. 그런 면에서 진보진영은 박정희 통치의 치밀성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1)
■ 국가가 머리카락과 치마길이까지 지시했던 유신체제
<Z>. 그리스 출신의 세계적인 정치영화감독인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이 한 그리스 인권운동가의 암살을 주제로 만들어서 최고의 외국영화상 등 아카데미상을 두 개나 받은 1960년대의 명화이다. 이 영화의 끝에는 1967년 쿠데타로 집권한 그리스 군부가 집권 후 금지한 목록들이 나온다. 그 중에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바로 미니스커트다. 미국 유학시절 이 영화를 보다가 이 부분을 보고 "어쩌면 군사독재는 똑같은가" 하고 무릎을 쳤다.
박정희가 1972년 유신을 선포하며 시작된 유신시대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이 유신시대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군화발도, 중앙정보부 지하실도 아니고, '자'다. 그렇다. 유신체제는 머리카락 길이와 치마 길이까지 법으로 규정해 처벌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3년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할 수 있도록 경범죄를 개정한 뒤, 귀를 덮는 머리와 무릎 위 17센티미터보다 짧은 미니스커트를 단속 대상으로 삼아 경찰들이 자를 들고 다니며 단속했다. 이 결과 1973년에만 1만2870명이 장발 단속에 걸려 경찰에게 머리를 깎였다.
이제는 극우논객이 된 한 유명 교수는 명동에 나갔다가 장발 단속에 걸려 머리를 깎인 뒤 분노해 반정부 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명동 파출소 앞바닥에는 '미니스커트 장발 단속 등 국가의 통제와 청년들의 자유가 충돌하던 현장'이라는 표시판이 설치되어 있다.
유신시대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것은 반상회다. '반'은 일제가 국민들을 조직, 통제하기 위해 만든 최말단 조직이다. 박정희 정권이 유신 선포 후 주민통제를 위해 이 같은 반을 정기적으로 소집해 주민들을 의무적으로 참석하게 한 것이 바로 반상회다.
1976년 5월 31일 오후 6시,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동시에 반상회가 열렸다. 전국 671만 가구에서 한 명씩 참석하게 했는데, 526만 명이 25만5000 곳에 모여 참석율이 78.4%였다.
이렇게 시작된 반상회는 매달 1일인 새마을의 날 전날 저녁에 열려 반장과 구청직원이 참석해 출석을 점검했고 불참에 대해서는 벌금을 물리기도 했다. 이 모임은 정부의 주민통제 수단으로 정부 홍보에 주로 이용됐지만, 북한의 5호감시제처럼 주민들이 서로 감시하고 수배중인 학생운동 지도자 등을 색출하는 목적으로도 이용됐다.
정치학은 비민주적인 정부를 권위주의와 전체주의로 구분한다. 권위주의는 많은 군사독재들처럼 국민들을 탈정치화시킨다면, 전체주의는 파시즘이나 구 사회주의 체제와 북한처럼 마르크스·레닌주의 주체사상 같은 공식적인 통치이데올로기(반공과 같은 부정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적극적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으며, 이 이데올로기로 국민들을 적극적으로 의식화, 정치화시키고 동원하며, '사적 영역'이라는 것을 아예 허용하지 않거나 있더라도 이 영역까지 침투해 통제한다.
이 같은 기준으로 볼 때, 이승만에서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졌던 우리의 독재체제들은 기본적으로 권위주의 체제였지만, 유신은 장발 단속과 반상회 등이 보여주듯이 전체주의에 가까웠던 체제였다. 즉 국가가 머리카락 길이와 치마 길이 같은 개인의 취향까지도 통제했던 체제가 바로 유신이다.
"제적 2359명, 찬성 2357표, 무효 2표, 찬성 99.9%로 박정희 대통령이 제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유신의 흔적을 만나려면, 우리는 장충단공원에서 가까운 장충체육관에 가야 한다. 이곳은 유신의 또 다른 상징인 '체육관 선거'가 치러진 곳이다. 1972년 12월 23일 이곳에서 제8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대통령은 유신헌법에 의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선출했는데, 대의원 정수 2359명 중 전원이 참석하여 단일후보인 박정희는 아마도 잘못 찍은 무효표 2표를 제외하고 99.9%의 지지를 얻은 것이다. 99.9%의 지지라니, 북한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사실상의 전체주의 체제였다.
"아니 이게 진짜란 말이야?" 1971년 5월, 제8대 국회의원 선거결과를 보고받은 박정희는 분노와 경악이 합쳐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총선 결과 공화당이 승리하긴 했지만 득표율(48.8%)이 야당인 신민당(44.4%)과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대구에서 5석 중 무려 4석을 야당이 차지한 것이다. 국회의장 이효상 등 자신의 심복들이 다 떨어진 것이다.
1961년 5‧16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미국의 압력으로 민정 이양 후 1963년 선거에서 승리, 대통령에 당선됐고 1967년 재선했다. 대통령 4년 연임제였던 헌법에 의해 1971년에는 권력을 내놓게 된 박정희는 야당과 여당 내 내각제 세력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3선 개헌을 강행해 1971년 3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총선 결과를 볼 때, 선거에 의해서는 앞으로 정권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한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위해 다음 해 10월 17일 10월 유신을 단행한 것이다.
메이지유신에서 빌려온 이름에서부터 친일파시즘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유신은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과 정치활동 등을 중지시키며, 10월 27일까지 헌법개정안을 공고해 1개월 내에 국민투표에 부친다는 내용이다. 대만의 영구집권 총통제를 모델로 만들어진 유신헌법은 대통령직선제를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제로 전환하며,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하고 연임 제한을 없애 종신 집권이 가능하도록 했다.
국회의원의 1/3(유정회)을 대통령이 임명하며, 대통령이 헌법을 일시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가지며, 대통령이 국회해산권과 법관임명권을 가짐으로써 3권 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했다. 한마디로, 박정희가 평생 동안 제멋대로 나라를 운영하게 만든 사실상 세습만 없는 '현대판 왕정체제'였다.
유신 헌법은 국민투표에 부쳐져 80% 투표에 찬성 73%로 통과됐다. 하지만 이에 대한 찬반토론을 금지하고, 유신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이 긴급조치에 의해 금지되고, 언론을 통제한 상황에서 관권선거까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투표였다는 점에서 진정한 민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대수의 '물 좀 주소'와 '행복의 나라로', 이장희의 '그건 너', 조용남의 '불 꺼진 창',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터 김'. 공통점은 모두 유신시대 금지곡이었다는 점이다. '물 좀 주소'는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행복의 나라로'는 지금은 행복하지 않냐는 이유로, '그건 너'는 불신풍조 조장을 이유로, '불 꺼진 창'은 왜 불이 꺼져 있느냐는 이유로, '키다리 미스터 김'은 작은 키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뿐만 아니라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은 분식의 날로 지정해, 음식점에서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게 했으며, 평일에도 밥에는 보리쌀 등을 25%이상 섞어 팔도록 의무화했다.
이처럼 박정희는 유신헌법에 의해 대통령에게 부여된 긴급조치 발동권을 발동해,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 자체를 금지하고 유언비어 배포를 처벌하는 등 긴급조치 1호에서 9호까지 발표해 국민들 삶의 구석구석을 통제했다. 소위 '긴조(긴급조치)세대'가 탄생한 것이다. 전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긴급조치에 대한 재판은 비상군법회의가 담당하도록 하였으며 박정희 정권은 589명을 기소했다. 특히 긴급조치 4호는 반유신 학생운동인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에 대한 것으로, 박정희 정권은 그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를 조작해 사법살인을 함으로써 국제적인 비판을 받았다.
유신체제는 부마항쟁에 대한 대응을 놓고 벌어진 박정희·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갈등 속에서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하면서 끝났다. 그러나 12‧12군사쿠데타와 5‧18 학살을 통해 집권한 전두환은 '박정희 없는 유신헌법'에 의해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체육관 선거에 99.4%의 지지를 받아 7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됐다.
장충체육관을 떠나려고 하자, 갑자기 궁금해졌다. 박정희를 존경하는 보수청년들은 짧은 치마를 입었다는 이유로 유치장에 끌려가고, 머리카락이 길다고 바리캉으로 머리 한가운데를 깎이고, 좋아하는 노래들이 금지곡으로 지정되고, '새마을 노래' 등 건전가요들만 들을 수 있고, 수요일과 토요일은 밥을 먹고 싶어도 분식 이외에는 사먹을 수 없고, 매달 한 번씩 반상회에 의무적으로 참석하게 하면, 그래도 박정희를 존경할까?
10월 유신의 흔적들
진해는 한국에서 벚꽃이 가장 아름답다고 자처하는 '벚꽃의 도시'다. 그러나 진해, 그것도 미래를 꿈꾸는 어린이도서관 앞에 가면, 부끄러운 우리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10월 유신 기념탑'이다. 중원로터리의 진해문화원 옆 '아이세상 장난감도서관' 앞에는 젊은 해군 등이 유신헌법 책을 들고 하늘을 향해 주먹을 높이 들고 있는 10월 유신 기념탑이 설치되어 있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후 얼마 되지 않은 1973년 초에 만든 것이다.
진해에서 마산을 거쳐 고성으로 넘어가는 구 도로에는 동진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창원공원묘원 입구에 있는 이 고개에도 어두운 역사의 유산이 남아 있다. '조국의 무궁한 발전과 평화적 남북통일을 기원하면서 우리들은 삼가 여기에 동산을 세우노라. 1977년 12월 19일 통일주최국민회의 마산지역 대의원 백찬기 등.' 이같이 쓰여 있는 '유신동산'이라는 기이한 기념돌이다.(2)
<자료출처>
(2)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72716405224743
<참고자료>
[7인의 대통령]"박정희는 대한민국 근대화의 총괄계획가" (daum.net)2021. 07. 07.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51317230656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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