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 (4) 1960년 4‧19혁명, 1960년~1961년 의원내각제와 양원제 본문
■ 4‧19혁명
1995년 해방 50년을 맞아 보수언론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진보진영의 민중사관에 맞선 한국현대사 재평가 움직임과 그 일환인 '이승만 복권운동'이었다. 보수의 입장에서 보면 대한민국을 세운 '국부'인 이승만 복권운동을 왜 이처럼 뒤늦게 벌이기 시작했는가? 그 답은 수유리에 있다.
"데모가 이적(利敵)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부정선거 다시 실시하라!" 1960년 4월 19일 오후, 시위대는 점점 불어나 근 10만 명에 달하기 시작했다. 전날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국회 연좌농성을 마치고 귀가하던 고대생들을 이승만 정권이 사주하는 정치 깡패들이 쇠몽둥이 등으로 무차별 공격한 데에 분노한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며 광화문에서 이승만이 있는 경무대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탕탕탕!' 갑자기 경무대 앞을 지키고 있던 경찰들의 총구가 불을 토했다. '피의 화요일'과 함께 4.19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수유리 4‧19 묘역에 가면 4‧19 민주혁명기념탑 뒤로 줄지은 묘비들이 늘어서 있다. 186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결국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경찰에 의존하고 경찰을 우대해온 이승만 정권에 불만이 많았던 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
시위대는 경찰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하고 눈에 보이는 차를 징발해 시내를 누비고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경찰과 계엄군에 쫓겨 저항본부인 고려대학교로 후퇴했다. 고려대학교가 '4‧19의 전남도청'이었던 셈이다. 5‧18의 전남도청 학살과 같은 참극이 고려대학교에서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전두환과 달리 당시의 지휘관이 두 명의 부관을 데리고 직접 학교 강당으로 찾아가 태극기로 덮은 시신들에 정중하게 조의를 표했고, 이를 본 시위대가 군을 믿고 무장을 해제했다.
진정되어 가는 것 같던 정국은 학생들에 이어 교수들이 나서 이승만의 하야를 직접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미국까지 이승만의 등을 돌리면서 이승만 하야 쪽으로 급속히 기울었다. 그러자 이승만도 마지못해 하야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4월 26일 하야 성명 발표이후에도 갑자기 자신이 사임하면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며 사임서에 서명을 거부했다. 최후까지 비겁한 지도자의 추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러다가 주변의 압력으로 결국 서명을 하고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
이처럼 이승만은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하고 이에 항의하는 젊은이들의 목숨을 180여 명이나 빼앗고 쫓겨난 지도자이다. 즉 그는 박근혜에 앞서 국민의 손에 쫓겨난 최초의 지도자였다(최소한 박근혜는 이승만처럼 근 200명에 가까운 국민들을 죽이고 물러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이승만보다는 덜 나쁜 지도자였다. 박정희도 자신의 권력 연장을 위해 시위대에 발포를 해 이처럼 많은 국민들을 공개적으로 죽이지는 않았다). 그런 만큼 그를 복권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였다.
모든 사건이 그러하듯이, 4‧19의 원인은 사건사적 원인과 보다 구조적인 원인을 살펴봐야 한다. 직접적인 이유는 장기집권을 위한 3.15 부정선거와 이에 항의하는 대구의 2.28 시위와 마산의 시위과정에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신 유기 사건이다(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11회 '박근혜도 치켜세운 2‧28 운동, 대구의 민주화 전통을 걷다' <프레시안> 2021년 3월 31일자와 12회 '진보의 요람과 보수의 아성 공존하는 도시' <프레시안> 4월 2일자 참조). 설상가상으로, 이승만 정권이 4월 18일 깡패들을 동원해 고대생을 습격한 것이 4‧19를 촉발했다.
구조적으로는, 이승만 장기집권과 심각한 실업 등 경제 위기에 대한 반감이다. 특히 대학졸업생들이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등 청년실업이 심각해 청년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다. 1950년대 우리는 미국 원조물자를 가공하는 산업(방적, 제분, 설탕이라는 '3백산업')이 중심이었는데 1950년대 말이 되며 이 같은 원조가공 산업화가 소진된 데다 미국의 제3세계 전략이 원조에서 차관으로 바뀌면서 원조를 크게 줄이자 경제위기가 심화된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1950년대 말부터 동아시아에 미‧일‧한국으로 이어지는 안보 삼각동맹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한일 국교정상화를 압박했지만, 이승만은 말을 듣지 않았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를 교체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우선 '4‧19 혁명'이라는 명칭이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 성공 후 4‧19의 명칭을 '4‧19 의거'로 폄하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4‧19 혁명이라고 부른다. 4‧19는 정말 혁명인가? 혁명이라면 왜 혁명인가? 혁명이라고 보는 이유는 이승만을 성공적으로 몰아내고 민주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이라면, 4‧19는 혁명이 아니라 '성공한 항쟁'일 뿐이다. 사회구조 등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6년 말에 시작해 2017년 초까지 계속된 촛불항쟁이 박근혜를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촛불혁명'은 아니다. 나는 촛불 당시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라는 책을 썼는데, 이는 그것이 촛불항쟁 속에 단순히 박근혜를 몰아내자는 것을 넘어서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려는 급진적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살려서 촛불혁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후 현실은 전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즉 촛불혁명이 아니라 '촛불항쟁'(내지 '실패한 촛불혁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면 4‧19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에, 단순히 '4‧19 항쟁'인가? 나는 4‧19를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4‧19는 혁명이되, 실패한 '미완의 혁명'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승만 하야 이후다. 4‧19는 이승만 하야와 함께 끝난 것이 아니다. 이승만 하야로 그 1단계가 끝나고 2단계가 시작됐다. 이승만 정권 붕괴 후 이승만이 이끄는 극우정권에 의해 억눌려 있던 민중적 요구들이 거세게 분출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은 보도연맹, 거창 민간인학살 등 수많은 학살의 피해자들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움직임이다. 이들은 전국적으로 유가족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특히 거창의 유가족들은 학살에 적극적 역할을 수행한 이장에게 사과를 요구하다 거부하자 산채로 불을 질러 버렸다. 어용노조에 대항하여 교원노조와 같은 자주적인 노조가 생겨났고, 사회대중당, 사회당과 같은 진보정당들이 나타나 국회에 진출했다.
가장 극적인 것은 극우 분단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다. 남북한영세중립화를 통한 통일운동이 나타났고, 혁신정당들과 조직들이 자주·평화·민주 3대 원칙 하에 남북통일을 추진하기 위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를 결성했다. 1961년 봄, 학생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를 외치며 남북학생들의 평화교류를 추진했다. 이는 극우 분단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한 혁명이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5‧16 쿠데타로 실패하고 말았다. 따라서 4‧19는 실패한 미완의 혁명이다.
또 다른 문제는 4‧19를 단순히 '학생혁명'으로 보는 잘못된 경향이다. 물론 4‧19에서 학생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그들 못지않게, 어쩌면 그들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도시 하층민들이다. 이는 4‧19 희생자들의 분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186명의 희생자 중 학생은 22명에 불과하고 하층노동자 61명, 무직자 33명 등 도시 하층이 절반에 달한다. 따라서 4‧19를 단순히 학생혁명으로 보는 것은 이들의 고귀한 희생을 외면하는 일면적인 인식이다.
'여기는 1960년 4월 불의와 독재에 항쟁하다가 희생된 185명의 젊은 혼들을 모신 곳이다. 이들의 정신을 길이 받들고자 1962년 3월 23일 재건국민운동본부 안에 각계각층을 망라한 기념탑 건립위원회를 구성하고, 1962년 11월 21일에 기공하여 전 국민의 성금과 국고 보조로 이 공사를 진행하여 오늘로써 제막식을 거행하다.'
나 자신이 '운동권 출신'인 만큼 수유리 4‧19 묘역은 가끔 찾아가는 '마음의 성지'지만, 이번 답사를 하면서 4‧19 혁명기념탑 앞조각 뒤편에 새겨진 이 설명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4‧19 묘역이 5‧16 쿠데타 직후 쿠데타 세력에 의해, 그것도 재건국민운동본부라는 군사독재 냄새가 풀풀 나는 조직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이를 다시 '민주 성역화' 한 것은 김영삼 정부다).
그것만이 아니다. 탑의 글은 다른 사람도 아닌 이승만을 '성웅 이순신 같은 위인'이라고 극찬했고, 4‧19를 짓밟은 5‧16 쿠데타로 집권한 공화당의 창당선언문을 써주었으며 이후 유신과 전두환 지지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어용지식인 이은상이 썼다는 것도 발견했다.
아무리 5‧16 세력이 그와 친하다고 하더라도, 이승만을 '성웅'이라고 칭송하고 문인들을 모아 지원유세를 다녔으며 김주열 시신 인양과 함께 터져 나온 4‧11 마산의거에 대해 "적을 이롭게 하는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이며 특히 "고향 마산에서 터져 나온 일이기에 더욱 분개한다"고 했던 이은상에게 4‧19혁명기념탑 글을 의뢰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몇 년 전 자신이 성웅이라고 칭송한 이승만을 무너뜨린 4‧19, 자신이 '북괴를 도와주는 이적 행위'라고 힐난한 4‧11의 연장인 4‧19에 대해 탑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만 명 학생 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 제단에 피를 뿌린 185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되살아 피어나리라.' 이은상의 탑문은 현 4‧19묘역이 비극을 넘어 희극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놀라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가 원래 4‧19기념탑을 광화문에 세우려 했으나 데모의 중심이 될지 모른다는 이유로 수유리 골짜기로 귀양 보냈고, 탑은 친일인명사전에까지 오른 대표적인 친일, 친독재 조각가인 김경승이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그는 전두환이 1987년 황토현 동학전적지에 세운 전봉준 동상도 세웠는데 정읍시는 최근 이를 철거하고 동학의 정신에 맞는 동상을 새로 세우기로 했다). 넓은 공간이 필요한 묘역은 몰라도 기념탑은 역사의 현장인 광화문이나 청와대 앞에 세워야지, 왜 아무 관계도 없는 수유리에 세웠는가?
수유리 4‧19묘역을 떠나려는데, 한 자료에서 읽은 최석태 서울민족미술협회대표의 주장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5‧16세력이 4‧19를 짓밟지 않았나? 그것을 가리려고 성역화한 것 아닌가? 4‧19탑에는 정신이 송두리째 빠져있다. (…) 4.19탑은 철거돼야 한다. 아니 독립기념관으로 보내야 한다. 친일작가들이 이렇게 만들었다는 증거로, 친일유물로." 맞다. 새로운 4‧19탑을 역사의 현장인 광화문에 세워야 한다.(1)
■ 제2공화국 : 장면내각(1960년 6월 15일 ~ 1961년 5월 16일)
대한민국 제2공화국(大韓民國第二共和國)은 1960년 6월 15일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 불과 11개월간 존속했던 대한민국의 두 번째 공화 헌정체제이다. 대한민국 제2공화국 체제는 1960년 4·19 혁명으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 붕괴된 후, 제1차 과도 권한대행 체제(1960년 4월 27일 ~ 6월 14일)를 거쳐 6·15 개헌에 의해 설립된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양원제 의원내각제 기반의 헌정체제이다. 국무총리는 장면,[1] 대통령은 윤보선이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후, 국회는 의원내각제와 양원제를 권력 구조의 핵(核)으로 헌법을 개정하였다. 이 헌법에 따라 총선거가 실시되어 민주당의 장면 내각이 들어섰다.
민주당 정권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이념을 기반으로 사회제도의 개혁을 진행하는 한편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통한 산업입국을 꾀하였다. 그러나 민주당 내에서 장면의 신파와 윤보선의 구파 사이의 정치적 갈등으로 3번의 내각교체를 거치면서 이러한 계획을 구체화할 정치적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였고 4·19 혁명을 계기로 분출된 각계 각층의 요구에도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다. 결국 1961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이 일으킨 5.16 군사정변에 무방비 상태의 장면 내각은 속수무책으로 정권을 탈취당하였고, 곧 대한민국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한 군사독재 체제로 돌입한다.
역사
[편집]
과도정부 수반과 제2공화국의 초대 총리를 지낸 허정
4·19 혁명 이후 국회는 1960년 6월 15일 내각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6·15 개헌) 이 개헌안이 통과된 직후 제2공화국 헌법에 따른 민의원, 참의원 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때까지 임시 국무총리에는 4월 27일 이후 내각수반을 맡았던 허정이 선출되었고, 허정은 8월 12일 대통령이 선출 때까지 대통령 권한대행을 계속 겸임하였다. 1960년 8월 12일, 국회 양원합동회의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이 당선되었다.
4·19 혁명으로 인해 집권이 확실해진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개헌 갈등을 벌였다. 장면이란 유력 대통령 후보가 있었던 신파는 신속한 정·부통령 재선거 후 개헌(先選後決, 선선후결)을 주장하였고, 내세울만한 대통령 후보가 없었던 구파는 의원내각제로의 개헌 후 선거(先決後選, 선결후선)를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 구파와 시민 혁명으로 위기에 처했던 자유당이 결탁하여 의원내각제가 새로운 헌법체제로 채택되었다.[2]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제2공화국의 정무(政務)적 실권은 국무총리에게 있었고, 대통령은 형식적인 국가원수였다.[3] 그 밖에 국민의 기본권 보장 강화, 국회 양원제, 지방자치제 실시 등을 제2공화국 헌법의 특징으로 들 수 있다.
민주당 정부는 4·19 혁명에 따른 다양한 개혁 요구에 소극적으로 대응하였을 뿐만 아니라, 총리였던 장면의 민주당 신파와 형식적인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의 민주당 구파 간 파벌 갈등까지 벌여 정치적 기반이 약화되어 정책적 실행이 원활하지 못했고, 이승만 자유당 정권 청산 문제에도 과감하지 못했다.
1961년 5월 16일, 제2공화국은 소장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혁명세력이 벌인 5·16 군사쿠데타로 붕괴되었다. 5·16 군사쿠데타로 제2공화국 헌법은 효력이 정지되었고, 대한민국 헌정(憲政)은 이후 1963년 12월 27일 제3공화국이 출범하기 전까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정(軍政) 체제로 들어간다.
정치
[편집]
1960년 8월 19일 장면 총리 인준 직후, 장면 총리와 윤보선 대통령
제2공화국 정부는 '자유화'의 원칙에서 다양한 분야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4·19 혁명 이후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억압되었던 각계 각층의 열망이 활발한 정치활동과 노동조합의 결성을 통한 노동운동 등의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또한, 정치활동의 규제가 풀리면서 혁신세력을 중심으로 각종 단체가 만들어졌다. 4·19 혁명 주체가 아닌 장면 정권은 4·19 혁명을 주도했던 학생·시민들의 이러한 다양한 활동은 최대한 보장하였으나, 그들의 요구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특히, 3·15 부정선거의 주모자와 4·19 혁명의 전후에 있었던 일련의 시위에서 군중들을 살상한 관련자를 처벌하라는 요구가 점점 강해져 1960년 10월 11일에는 4.19부상자 50여명 등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민주반역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의 제정을 호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10월 17일, 민의원에 특별처벌법의 제정 근거를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헌법 부칙 개헌안이 제출되어 11월 29일에 반민주행위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소급입법의 근거가 되는 제4차 헌법개정이 이루어졌고, 이를 근거로 12월 31일에는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과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이 제정되었다.
윤보선 대통령
'자유화'의 바람은 남북관계에 대한 변화의 열망으로도 나타났다. 북진통일론이 국시(國是)나 다름없던 이승만 정권 하에서 이야기할 수 없었던 '평화통일론', '중립화 통일론', '남북협상론' 등 남북교류와 통일에 관한 여러 주장들이 대두되었다. 1961년 1월, 참의원에서 여운홍 의원은 남북협상을 공개적으로 제기했으며, 특히 학생운동세력과 혁신세력은 독재 타도의 여세를 몰아 직접 접촉을 통한 남북협상을 전개하려 시도하였다. 1961년 5월 13일, '민주자유통일'이라는 학생단체가 정부의 개입을 배제하고 판문점에서 '남북학생회담'을 가질 것을 제안하였는데, 사회 일각에서는 평화통일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마저 팽배했다.
불과 9개월 존속한 당시의 장면정권은 이러한 다양한 사회적 요구와 들뜬 분위기에 적절히 대응하고 관리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구파의 윤보선 대통령은 제2공화국 정부가 각계에서 분출된 자유화 요구로 정권 초기현상을 겪고 있는 와중에 명목상의 국가원수임에도 공공연한 간섭과 비난성명으로 장면정권에 부담을 주는 등 제2공화국 정부의 정치기반은 취약했다. 또한, 연이어 벌어지는 시위를 정부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자 사회혼란에 대한 우려도 커졌다.
제2공화국의 대통령 윤보선(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총리 장면
윤보선과 장면은 공무원 인사와 국군통수권을 두고 극심하게 대립했다. 정권 인수의 3개월만인 1960년 12월까지 장면은 자유당정권에 적극 부역한 경찰관 4천500명 등 다수의 공무원을 해임하였다. 그런데, 그 빈자리의 상당수는 민주당 당원출신으로 채워졌다. 윤보선은 공무원 인사가 있을 때마다 민주당 구파를 안배할 것을 압박하며 인사문제에 개입하는 한편으로 민주당 구파는 장면의 인사를 '정실인사', '부정부패'라고 비난했다. 또한 윤보선과 신민당 의원들은 대통령에게 부분적 군통수권이 있다고 주장해 장면과 민주당을 당황케 했는데, 이는 대통령이 상징적인 국가원수로서만 존재하는 의원내각제의 근간을 뒤집는 주장이었다. 이 일로 국회에서는 군통수권 중 군령권은 대통령, 군정권은 총리가 갖게 하자는 신민당과 총리가 완전한 군통수권을 갖게 하자는 민주당 간의 치열한 대결이 벌어지게 됐다.[4]
특히, 국군통수권을 두고 벌인 두 사람의 권력다툼은 군사반란의 빌미로 작용했다. 제2공화국 헌법 제61조제1항은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군을 통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었으나, 제72조에서는 '선전(宣戰), 강화(講和), 계엄안(戒嚴案), 계엄해제, 군사(軍事)에 관한 중요사항 및 각군 참모총장의 임면(任免)'은 국무총리를 의장으로 하는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치도록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군통수권의 실질적 행사자가 누구인지가 명확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으로 군(軍)통수권에 관한 구체적인 하위법률의 제정과 정비가 필요했음에도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대립으로 5·16 군사혁명가 발생할 때까지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그 해 2월 17일 장면이 임명한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은 정변 발생 후 이틀만에 군부 세력과 한패가 되었다. 결국,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국무총리 장면은 수녀원으로 숨고, 대통령 윤보선은 자기에게는 '군통수권이 없다'며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와 주한 미국 대리대사가 요청한 쿠데타 저지 목적의 병력동원 허가를 거부함으로써 군사반란을 사실상 방조하는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모습을 보여 헌정질서 중단을 초래케 했다.
최초로 완전한 지방의회와 단체장 선거 실시
[편집]1960년 11월에 《지방자치법》이 개정되면서 지방의회와 단체장을 직선제로 하는 완전한 민선 지방자치제의 기틀이 마련된다.[5] 이 법률에 따라 1960년 12월 12일에 서울특별시 · 도의회 의원선거가, 12월 19일에 시 · 읍 · 면의회 의원선거가, 12월 26일에 시 · 읍 · 면장 선거가, 12월 29일에 서울특별시장 · 도지사 선거가 실시되었다.
<자료출처>
(1) 4‧19기념탑에 새겨진 '친일‧친독재' 흔적들 (pressian.com) 2021.07.19.
<참고자료>
대한민국 제2공화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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