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고구려(8) 9대 고국천제(故國川帝, 고국천왕, 179년-197년) 184년 좌원에서 후한 요동태수의 침공군을 격퇴, 191년 을파소를 국사에 임명, 194년 진대법 제정. 본문
1. 고구려(8) 9대 고국천제(故國川帝, 고국천왕, 179년-197년) 184년 좌원에서 후한 요동태수의 침공군을 격퇴, 191년 을파소를 국사에 임명, 194년 진대법 제정.
대야발 2025. 11. 9. 22:24
《삼국사기》 권 제16고구려본기 제4 고국천왕(故國川王)
고국천왕이 즉위하다 ( 179년 12월 )
고국천왕(故國川王) 혹은 국양(國襄)이라고도 한다.은 이름이 남무(男武)혹은 이이모(伊夷謨)라고도 한다.이고, 신대왕 백고(伯固)의 둘째 아들이다. 백고가 죽자, 나라 사람들이 맏아들인 발기(拔奇)가 못났다고 여겨 함께 이이모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한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초에 발기가 형으로서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消奴加)와 함께 각기 하호(下戶)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公孫康)에게 나아가 투항하고, 비류수(沸流水) 가로 돌아와 머물렀다. 왕은 신장이 9척으로 자태와 용모가 씩씩하고 뛰어나며 힘은 솥을 들 만하였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두루 청취하여 결단하였고, 관대함과 엄격함에 있어서는 중용을 지켰다.
우씨를 왕후로 삼다 ( 180년 02월 )
2년(180) 봄 2월에 비(妃)인 우씨(于氏)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 왕후는 제나부(提那部) 우소(于素)의 딸이다.
졸본의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 180년 09월 )
〔2년(180)〕 가을 9월에 왕이 졸본(卒本)에 가서 시조의 사당[始祖廟]에 제사를 지냈다.
붉은 기운이 태미 별자리를 통과하다 ( 182년 03월 )
4년(182) 봄 3월 갑인 밤에 붉은 기운이 태미(太微) 별자리를 통과하였는데 〔형상이〕 뱀과 같았다.
혜성이 태미 별자리에 나타나다 ( 182년 07월 )
〔4년(182)〕 가을 7월에 혜성[星孛]이 태미 별자리에 나타났다.
좌원에서 후한 요동태수의 침공군을 격퇴하다 ( 184년 )
6년(184)에 한의 요동태수가 군대를 일으켜 우리를 쳤다. 왕이 왕자 계수(罽須)를 보내 적을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한의 군대와 좌원(坐原)에서 싸워서 이겼는데 베어버린 〔적군의〕 머리가 산처럼 쌓였다.
화성이 심수 별자리에 머물다 ( 186년 04월 )
8년(186) 여름 4월 을묘에 화성[熒惑]이 심수[心] 별자리에 머물렀다.
일식이 일어나다 ( 186년 05월 )
8년(186) 5월 임진 그믐에 일식이 일어났다.
왕후의 친척인 어비류와 좌가려가 4연나와 함께 반란을 도모하다 ( 190년 09월 )
12년(190) 가을 9월에 경도(京都)에 눈이 6척이나 내렸다. 중외대부(中畏大夫)인 패자(沛者) 어비류(於畀留), 평자(評者)인 좌가려(左可慮) 등은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였는데, 그 자제들이 모두 권세를 믿고 무례하고 거만하였으며, 남의 자녀를 노략질하고 전택을 빼앗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통해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화를 내며 〔그들을〕 죽이려 하니 좌가려 등이 4연나(椽那)와 더불어 반란을 도모하였다.
좌가려 등의 반란을 평정하고 을파소를 국상에 임명하다 ( 191년 04월 )
13년(191) 여름 4월에 〔좌가려 등이〕 무리를 모아 왕도(王都)를 공격하였다. 왕이 기내(畿內)의 병력을 동원하여 이를 평정하고, 마침내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 “요즈음 관직을 총애하는 것에 따라 주고 작위는 덕행으로 승격되지 않으니, 해독(害毒)이 백성에게 미치고 우리 왕실을 동요시키고 있다. 이는 과인이 현명하지 못하여 일어난 것이다. 이제 너희 4부는 각기 현명하고 어질면서도 〔지위가〕 낮은 데 있는 자를 천거하여라.”라고 하였다. 이에 4부가 함께 동부(東部)의 안류(晏留)를 천거하였다. 왕이 그를 불러 국정을 맡기려 하자 안류가 왕에게 말하여 아뢰기를, “미천한 신은 용렬하고 어리석어 진실로 큰 정치에 참여하기에 부족합니다. 서압록곡(西鴨淥谷) 좌물촌(左勿村)의 을파소(乙巴素)라는 자는 유리왕 때의 대신인 을소(乙素)의 손자인데, 성질이 굳세고 의지가 강하며 지혜와 사려가 깊지만, 세상에서 등용되지 못하고 힘써 농사지어 자급하고 있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 겸손한 말과 정중한 예(禮)로써 그를 초빙하여 중외대부(中畏大夫)에 임명하고, 관작을 더하여 우태(于台)註 011로 삼고 말하기를, “과인이 외람되이 선왕의 대업을 이어받아 신민(臣民)의 위에 있으나, 덕이 부족하고 재주가 모자라 아직 〔백성을〕 다스림에 구제하지 못하였소. 선생은 능력을 숨기고 지혜를 감춘 채 궁벽하게도 재야에 있은 지 오래 되었소. 이제 나를 버리지 않고 번연히 찾아오니 〔이는〕 나의 기쁨과 행복일 뿐 아니라 사직과 백성의 복이오. 가르침을 받기를 청하니 공은 마음을 다하기 바라오.”라고 하였다. 파소는 마음으로는 비록 나라에 허락하였지만, 받은 관직이 국사를 다스리기에 부족하다고 여겨 이에 대답하여 아뢰기를, “신은 둔하고 느려서 엄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어질고 착한 사람을 뽑아 높은 관직을 주어서 대업을 이루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그 뜻을 알고 곧 국상(國相)에 제수하여 정사를 맡겼다. 이에 조정의 신하와 왕실의 친척들이 파소가 신진 관료로서 옛 신하들을 이간한다고 여겨 그를 미워하였다. 왕이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귀천을 막론하고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는 멸족시키겠다.”라고 하였다. 파소가 물러나와 다른 사람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고, 때를 만나면 벼슬하는 것은 선비의 마땅한 도리이다. 지금 임금이 나를 후의로써 대하니 어찌 다시 옛날과 같이 은둔하는 것을 생각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지극한 정성으로 나라를 받들고 정교(政敎)를 밝게 하고 상과 벌을 신중하게 하니, 인민이 편안하고 〔나라의〕 안과 밖이 무사하였다.
안류를 대사자로 삼다 ( 191년 10월 )
〔13년(191)〕 겨울 10월에 왕이 안류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만약 그대의 한 마디 말이 없었다면 과인은 을파소(乙巴素)를 얻어 함께 다스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지금 많은 공적이 쌓인 것은 그대의 공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벼슬을 내려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을파소의 등용에 대한 사론
논하여 말한다. 옛날 명철한 임금은 어진 이에 대해 그를 등용함에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그를 등용하면 의심하지 않았다. 은(殷)의 고종(高宗)이 부열(傅說), 촉(蜀)의 선주(先主)가 공명(孔明), 진(秦)의 부견(符堅)이 왕맹(王猛)을 대한 것이 그와 같다. 그런 후에야 어진 이가 작위에 앉고 능력이 있는 이가 관직을 맡아 정치와 가르침이 밝게 닦이고 국가를 보위할 수 있다. 지금 왕이 결연히 홀로 결단하여 을파소를 바닷가에서 선발하여 여러 사람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백관의 위에 앉히고, 또한 천거한 자에게도 상을 내렸으니 선왕의 방법을 터득하였다고 할 만하다.
백성이 굶주리자 식량을 주어 구제하다 ( 194년 07월 )
16년(194)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堕霜] 곡식을 죽여 백성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식량을〕 주어 구제하였다.
진대법을 시행하다 ( 194년 10월 )
〔16년(194)〕 겨울 10월에 왕이 질양(質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길에서 앉아 우는 자를 보았다. 〔왕이〕 “무슨 까닭으로 우는가?”라고 물으니 〔그가〕 대답하여 아뢰기를. “신은 매우 가난하여 늘 품팔이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올해는 흉년이 들어 품팔이할 곳이 없어서 한 되의 곡식[升斗之食]도 얻을 수 없기에 우는 것일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아! 과인이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들을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으니 과인의 죄로다.”라고 하고, 옷과 음식을 주고 위무하였다. 이에 내외의 담당 관청에 명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홀로 사는 노인, 병들고 가난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 등을 널리 찾아 구제하여 먹여 살렸다. 담당 관청에 명하여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까지는 관(官)의 곡식을 내어 백성 가구(家口)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등이 있게 식량을 주어 대여하게 하고, 겨울 10월에 이르러 갚게 하는 것을 항식(恒式)로 삼으니, 도성과 지방의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후한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투항하다 ( 197년 )
19년(197)에 중국에서 큰 난리가 일어나 한인(漢人)들이 난리를 피하여 투항해 오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이때가 한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2년이었다.
고국천왕이 사망하다 ( 197년 05월 )
여름 5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고국천(故國川) 들판에 장사지내고, 이름을 고국천왕이라 하였다.(1)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을파소가 국상이 되어 나이 어린 영재를 뽑아 선인도랑으로 삼았다. 교화를 주관하는 자를 참전이라 하는데, 무리 중에 계율을 잘 지키는 자를 선발하여 삼신을 받드는 일을 맡겼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라 하는데,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규율을 잘 지켜, 나라의 일을 위해 몸을 던져 앞장서도록 하였다. 일찍이 을파소가 무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신시시대에 신교의 진리로 세상을 다스려 깨우칠 때는, 백성의 지혜가 열려 나날이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렀으니, 그것은 만세에 걸쳐 바꿀 수 없는 표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전이 지켜야 할 계율을 두고, 상제님의 말씀을 받들어 백성을 교화하며, 한맹을 행함에도 계율을 두어 하늘을 대신해서 공덕을 베푸나니 모두 스스로 심법을 바로 세우고 힘써 노력하여 훗날 세울 공덕에 대비하라."(2)
평양 모란봉 중턱에 동천제가 하늘에 기원하던 조천석이 있고, 삭주 거문산 서쪽 기슭에 을파소 묘가 있고, 운산의 구봉산에 연개소문 묘가 있다.(3)
■ 고국천왕
단재 신채호선생은 김부식이 고국천왕 남무가 이이모이자 발기의 동생이라고 기록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보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고국천왕(혹은 국양)의 이름은 남무(혹은 이이모)이니, 신대왕인 백고의 둘째아들이다. 백고가 죽자 나라 사람들은 장남인 발기가 모자라다는 이유로 이이모를 왕으로 세웠다. 한나라 헌제 때인 건안 초에 발기는 형인 자기가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와 더불어 각각 하호 3만여 명을 데리고 공손강에게 항복하고 비류수 상류로 돌아와 정착했다"라고 했다.
김부식은 이 내용을 《삼국지》 〈고구려 열전〉에서 옮겨왔다. 그런데 발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산상왕 편의 발기이고 이이모는 산상왕 연우다. 《삼국지》의 작자가 발기 · 연우 두 사람을 신대왕의 아들로 잘못 기록했음을 알지 못한 김 씨는 고국천왕 남무가 이이모이자 발기의 동생이라고 기록하는 오류를 범했다.
《삼국지》 〈공손탁 열전〉에 의하면 공손강의 아버지인 공손탁이 한나라 헌제 때인 초평 원년에 요동태수가 되었다. 그가 건안 9년에 사망하자, 공손강이 지위를 승게했다. 한나라 헌제 때인 초평 원년은 고국천왕 12년이다. 고국천왕의 집권 초기에는 공손강은 고사하고 아버지 공손탁도 아직 요동태수를 꿈꾸지 못하던 때였다. 그런데도 김 씨는 이것을 고국천왕 재위 원년의 사건으로 잘못 기록했다. 앞에서 소개한 "공손탁을 도와 부산의 적을 치도록 했다"는 신대왕 5년 기사와 함께 고려하면, 김 씨는 공손탁이 어느 시대 사람인 줄 몰랐던 것 같다. 이것은 기괴한 일이다.』(4)
<주>
(2)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563쪽~565쪽
(3)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567쪽
(4)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244-246쪽(《조선상고사》 제5편(1) 고구려의 전성시대 제6장 을파소의 재상직 수행 1. 왕후의 국정 개입과 좌가려의 난 2. 을파소의 등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