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고구려(5) 6대 태조무열제(太祖武烈帝, 태조황제, 태조대왕, 53년-146년) 55년 요서에 10성을 쌓음, 56년 동옥저 정벌, 68년 갈사국 항복, 72년 조나 정벌, 74년 주나 정벌, 105년 요동 공격, 118년 현도군과 화려성 공격, 121년 후한의 침공을 물리치고, 현도군과 요동군을 공격, 121년 04월 선비와 연합하여 후한 요동군의 요대와 신창까지 진격, 121년 12월 후한의 현도성을 포위, 부여가 후한을 구원 본문
1. 고구려(5) 6대 태조무열제(太祖武烈帝, 태조황제, 태조대왕, 53년-146년) 55년 요서에 10성을 쌓음, 56년 동옥저 정벌, 68년 갈사국 항복, 72년 조나 정벌, 74년 주나 정벌, 105년 요동 공격, 118년 현도군과 화려성 공격, 121년 후한의 침공을 물리치고, 현도군과 요동군을 공격, 121년 04월 선비와 연합하여 후한 요동군의 요대와 신창까지 진격, 121년 12월 후한의 현도성을 포위, 부여가 후한을 구원
대야발 2025. 11. 5. 16:20
《삼국사기》 권 제15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太祖大王)
태조대왕이 나라 사람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다 ( 53년 11월 )
태조대왕(太祖大王) 국조왕(國祖王)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궁(宮)이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어수(於漱)이다. 유리왕(珫璃王)의 아들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고, 어머니 태후(太后)는 부여 사람이다. 모본왕이 죽고 태자가 못나 사직을 맡기에 부족하자, 나라 사람들이 궁(宮)을 맞이하여 뒤를 이어 왕위에 앉게 하였다. 왕은 태어나자마자 눈을 떠서 볼 수 있었고, 어려서 조숙하여 뛰어났다. 〔즉위할 때의〕 나이가 일곱 살이어서 태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요서에 10개 성을 쌓다 ( 55년 02월 )
3년(55) 봄 2월에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군대에 대비하였다.
누리가 곡식을 해치다 ( 55년 08월 )
〔3년(55)〕 가을 8월에 나라 남쪽에서 누리[蝗蟲]가 곡식을 해쳤다.
동옥저를 정벌하여 영토를 넓히다 ( 56년 07월 )
4년(56) 가을 7월에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영토를 넓혀 동쪽으로 창해(滄海)에 이르고 남쪽으로 살수(薩水)에 이르렀다.
물고기낚시질을 구경하다가 흰 물고기를 얻다 ( 59년 04월 )
7년(59) 여름 4월에 왕이 ‘고안’이라는 연못[孤岸淵]에 가서 물고기 낚시질을 구경하다가 붉은 날개가 달린 흰 물고기를 얻었다.
도성에 큰 홍수가 나다 ( 59년 07월 )
〔7년(59)〕 가을 7월에 경도(京都)에 큰 홍수가 나서 백성들의 집이 깊이 잠겼다.
사냥을 나갔다가 흰 사슴을 잡다 ( 62년 08월 )
10년(62) 가을 8월에 동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흰 사슴을 잡았다.
누리가 곡식을 해치다 ( 62년 08월 )
〔10년(62) 가을 8월에〕 나라의 남쪽에서 누리[蝗蟲]가 곡식을 해쳤다.
갈사왕의 손자 도두가 항복하다 ( 68년 08월 )
16년(68) 가을 8월에 갈사왕의 손자인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항복해왔다. 도두를 우태(于台)로 삼았다.
천둥이 치다 ( 68년 10월 )
〔16년(68)〕 겨울 10월에 천둥이 쳤다.
관나부의 패자 달가를 보내 조나를 정벌하다 ( 72년 02월 )
20년(72) 봄 2월에 관나부(貫那部)의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 조나(藻那)를 정벌하고, 그 왕을 사로잡았다.
도성에 가뭄이 들다 ( 72년 04월 )
〔20년(72)〕 여름 4월에 경도(京都)에 가뭄이 들었다.
환나부의 패자 설유를 보내 주나를 정벌하다 ( 74년 10월 )
22년(74) 겨울 10월에 왕이 환나부(桓那部)의 패자(沛者) 설유(薛儒)를 보내 주나(朱那)를 정벌하고, 그 왕자인 을음(乙音)을 사로잡아 고추가(古鄒加)로 삼았다.
부여가 상서로운 동물을 바치자 대사면을 시행하다 ( 77년 10월 )
25년(77) 겨울 10월에 부여 사신이 와서 뿔 셋 달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다. 왕이 상서로운 물건으로 여겨 대사면을 시행하였다.
도성에 눈이 많이 내리다 ( 77년 11월 )
〔25년(77)〕 11월에 경도(京都)에 눈이 3척(尺) 내렸다.
책성으로 순행하여 바위에 공적을 새기다 ( 98년 03월 )
46년(98) 봄 3월에 왕이 동쪽으로 책성(柵城)을 순행하였다. 책성의 서쪽 계산(罽山)에 이르러 흰 사슴을 잡았다. 책성에 도착하여 여러 신하와 함께 잔치를 열고, 책성(柵城)의 수(守)와 관리[吏]에게 물건을 나누어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마침내 바위에 공적을 새기고 귀환 길에 올랐다.
책성에서 돌아오다 ( 98년 10월 )
〔46년(98)〕 겨울 10월에 왕이 책성으로부터 〔도성에〕 도착하였다.
책성에 사절을 보내다 ( 102년 08월 )
50년(102) 가을 8월에 책성에 사절을 보내 〔백성을〕 어루만져 안심시켰다.
부여가 호랑이를 바치다 ( 105년 01월 )
53년(105) 봄 정월에 부여의 사신이 와서 호랑이를 바쳤는데, 길이가 1장(丈) 2척(尺)이나 되었고, 털 색깔은 매우 밝았으나 꼬리가 없었다.
후한의 요동을 공략하였으나 요동태수 경기에게 패하다 ( 105년 01월 )
〔53년(105) 봄 정월에〕 왕이 장수를 보내 한(漢)의 요동으로 들어가 여섯 현을 약탈하였다. 〔한의 요동〕태수 경기(耿夔)가 군사를 출동시켜 우리 군대를 막으니, 왕의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요동태수 경기가 맥인을 격파하다 ( 105년 09월 )
〔53년(105)〕 가을 9월에 〔한의 요동태수〕 경기가 맥인(貊人)을 격파하였다.
왕이 질산 남쪽에서 자주색 노루를 잡다 ( 107년 09월 )
55년(107) 가을 9월에 왕이 질산(質山) 남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자주색 노루를 잡았다.
동해곡의 수가 꼬리가 긴 붉은색 표범을 바치다 ( 107년 10월 )
〔55년(107)〕 겨울 10월에 동해곡(東海谷)의 수(守)가 붉은색 표범을 바쳤는데, 꼬리의 길이가 9척(尺)이나 되었다.
가뭄이 들어 백성들을 진휼하다 ( 108년 )
56년(108) 봄에 크게 가물었다. 여름이 되었는데 땅에서 농작물이 자라지 않고 백성들이 굶주리자, 왕이 사신을 보내 식량을 주어 먹여 살렸다.
후한에 사신을 보내 안제의 관례를 축하하다 ( 109년 01월 )
57년(109)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 한(漢)에 가서 안제(安帝)가 〔머리에〕 관[元服]을 쓰는 것을 축하하였다.
후한에 사신을 보내 현도군에 속하기를 요청하다 ( 111년 )
59년(111) 사신을 보내 한에 가서 토산물을 바치고 현도군(玄菟郡)에 속하기를 요청하였다. 『통감(通鑑)』에는 이해 3월에 고구려왕 궁(宮)이 예맥과 함께 현도를 침입하였다.”라고 하였으므로, 속하기를 요청하였는지 혹은 침입하였는지 알 수 없다. 아마 어느 하나는 잘못일 것이다.
일식이 일어나다 ( 114년 03월 )
62년(114) 봄 3월에 일식(日食)이 일어났다.
남해를 순수하다 ( 114년 08월 )
〔62년(114)〕 가을 8월에 왕이 남해(南海)를 두루 돌아다니며 시찰하였다.
도성으로 돌아오다 ( 114년 10월 )
〔62년(114)〕 겨울 10월에 남해로부터 〔도성에〕 도착하였다.
일식이 일어나다 ( 116년 03월 )
64년(116) 봄 3월에 일식이 일어났다.
눈이 많이 내리다 ( 116년 12월 )
〔64년(116)〕 겨울 12월에 눈이 5척(尺)이나 내렸다.
지진이 일어나다 ( 118년 02월 )
66년(118) 봄 2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한의 현도군과 화려성을 공격하다 ( 118년 06월 )
〔66년(118)〕 여름 6월에 왕이 예맥(穢貊)과 함께 한의 현도군을 습격하는 한편,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누리와 우박이 곡식을 해치다 ( 118년 07월 )
〔66년(118)〕 가을 7월에 누리[蝗]와 우박이 곡식을 해쳤다.
현명한 사람을 천거하게 하고, 스스로 생활하기 힘든 자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주다 ( 118년 08월 )
〔66년(118)〕 8월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어질고 착한 사람과 효성이 있어 부모에게 순종하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였다. 〔또한〕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이 없는 사람 및 늙어서 스스로 살 수 없는 사람 등을 위문하고 의복과 음식을 주게 하였다.
후한의 침공을 물리치고, 현도군과 요동군을 공격하다 ( 121년 )
69년(121) 봄에 한의 유주(幽州)자사(刺史) 풍환(馮煥), 현도태수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 등이 군대를 이끌고 침략해 와서 예맥거수(穢貊渠帥)를 공격하여 죽이고 무기와 군마, 재물을 모두 빼앗았다. 이에 왕이 아우 수성(遂成)을 보내 병력 2천여 명을 거느리고 풍환과 요광 등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 수성이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자, 풍환 등이 이를 믿었다. 그에 따라 수성이 험요한 요충지를 근거지로 삼아 대군을 막고, 몰래 3,000명을 보내 현도와 요동 두 군을 공격하여 그 성곽을 불태우고 2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선비와 연합하여 후한 요동군의 요대와 신창까지 진격하다 ( 121년 04월 )
〔69년(121)〕 여름 4월에 왕이 선비(鮮卑) 8,000명과 함께 요대현(遼隊縣)으로 가서 공격하였다. 요동태수 채풍이 군대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으로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공조연(功曹掾)인 용단(龍端)과 병마연(兵馬掾)인 공손포(公孫酺) 등이 온몸으로 채풍을 막다가 모두 진영에서 죽었다. 죽은 자가 1백 여 명이었다.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숙신의 사신이 오다 ( 121년 10월 )
〔69년(121)〕 겨울 10월에 왕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의 사당에 제사 지내고, 백성 가운데 곤궁한 자들을 찾아가 안부를 묻고[存問] 물건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숙신의 사신이 와서 자주색 여우가죽 옷, 흰색 매, 흰색 말 등을 바쳤다. 왕이 잔치를 열어 그를 위로해서 보냈다.
부여에서 돌아오다 ( 121년 10월 )
〔69년(121)〕 11월에 왕이 부여로부터 〔도성에〕 도착하였다.
수성에게 군사와 나라의 일을 맡기다 ( 121년 11월 )
〔69년(121) 11월에〕 왕이 수성에게 군사와 나라의 일을 통괄하게 하였다.
후한의 현도성을 포위하자 부여가 구원하다 ( 121년 12월 )
〔69년(121)〕 12월에 왕이 마한(馬韓)과 예맥(穢貊)의 기병 1만여 기를 거느리고 현도성(玄莬城)으로 나아가 포위하였다. 부여의 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군사 20,000명을 거느리고 한나라 군대와 힘을 합쳐 대항하여 싸우게 하니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후한의 요동을 침입하자 부여가 후한을 구원하다 ( 122년 )
70년(122)에 왕이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입하였다. 부여의 왕이 병력을 보내 이를 구하고 〔우리 군대를〕 쳐부수었다. 마한은 백제의 온조왕 27년(9)에 멸망하였다. 지금 고구려왕[麗王]과 함께 병력을 보낸 자는 아마도 멸망한 다음 다시 부흥한 자일 것이다.
목도루를 좌보로 삼고 고복장을 우보로 삼다 ( 123년 10월 )
71년(123) 겨울 10월에 패자(沛者) 목도루(穆度婁)를 좌보로 삼고, 고복장(高福章)을 우보로 삼아, 수성과 함께 정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일식이 일어나다 ( 124년 09월 )
72년(124) 가을 9월 경신 그믐에 일식이 일어났다.
후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 124년 10월 )
〔72년(124)〕 겨울 10월에 사신을 보내 한에 들어가서 조공하였다.
도성에 지진이 일어나다 ( 124년 11월 )
〔72년(124)〕 11월에 경도(京都)에 지진이 일어났다.
수성의 측근들이 수성에게 왕위 찬탈을 건의하다 ( 132년 07월 )
80년(132) 가을 7월에 수성이 왜산(倭山)에서 사냥하고 측근들과 잔치를 열었다. 이에 관나(貫那)의 우태 미유(彌儒), 환나(桓那)의 우태 어지류(菸支留), 비류나(沸流那)의 조의(皂衣) 양신(陽神) 등이 몰래 수성에게 말하기를, “이전에 모본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못나서 여러 신하들이 왕자인 재사(再思)를 왕위에 앉히려 하였으나, 재사가 자신이 늙었다고 하여 아들에게 양보한 것은, 형이 늙으면 동생이 잇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왕이 이미 늙었는데 〔왕위를〕 넘겨줄 뜻이 없으니 당신께서는 계획을 세우소서.”라고 하였다. 수성이 말하기를, “뒤를 잇는 것은 반드시 적자(嫡子)로 하는 것이 천하의 변치 않는 도리이다. 비록 왕이 지금 늙었으나 적자가 있는데, 어찌 감히 엿보겠는가?”라고 하였다. 미유가 말하기를, “동생이 현명하면 형의 뒤를 잇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으니 그대는 의심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좌보인 패자 목도루(穆度婁)는 수성에게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병을 핑계 대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수성이 질양에서 사냥하다 ( 138년 03월 )
86년(138) 봄 3월에 수성이 질양(質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놀고 즐기는 것이 한도가 없었다.
수성이 동생 백고의 간언을 듣지 않다 ( 138년 07월 )
가을 7월에 〔수성이〕 또 기구(箕丘)로 사냥을 나갔다가 5일 만에야 돌아왔다. 그의 동생인 백고(伯固)가 충고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재앙[禍]과 복(福)은 들어오는 문이 따로 없고, 오직 사람이 부르는 대로 오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왕의 동생이라는 근친 신분으로 모든 신료의 우두머리가 되어, 이미 지위는 최상이 되었고 공적도 아주 큽니다. 마땅히 충성과 의리로 마음을 지키고, 예의와 겸양으로 자신의 욕심을 이겨내어, 위로는 왕의 덕에 부응하고 아래로는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부귀가 몸에서 떠나지 않고 재앙과 환란이 생기지 않습니다. 지금 〔당신은〕 이러한 것을 생각지 못하고 향락만 탐닉하며 근심거리를 잊고 있으니, 〔저는〕 마음속으로 당신을 위하여 이를 위태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수성이 대답하기를, “무릇 사람의 마음에 누가 부귀와 환락을 바라지 않겠는가마는 이것을 얻는 자는 만에 하나도 없을 따름이다. 지금 내가 즐길 만한 형편인데,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느냐?”라고 말하며 끝내 듣지 않았다
환도에 지진이 일어나고 태조왕이 흉몽을 꾸다 ( 142년 09월 )
90년(142) 가을 9월에 환도(丸都)에 지진이 일어났다. 왕이 밤에 꿈을 꾸었는데, 한 마리 표범이 호랑이 꼬리를 물어뜯어서 끊었다. 깨어난 다음 그 길흉을 물으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호랑이는 모든 짐승의 으뜸이고, 표범은 같은 종류이면서 작은 것이니, 왕의 족속 가운데 아마도 대왕의 후계를 끊으려고 모의하는 자가 있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기분이 나빠 우보 고복장(高福章)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어젯밤 꿈에 본 것이 있는데, 점쟁이의 말이 이와 같으니 이를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고복장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착하지 않은 일을 하면 길(吉)한 것도 변하여 흉(凶)한 것이 되고, 선한 일을 하면 재앙도 도리어 복이 됩니다. 지금 대왕께서 나라를 집안처럼 근심하시고, 백성을 자식처럼 어여삐 여기시니, 비록 작은 이변이 있더라도 어찌 무슨 근심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수성이 왜산에서 왕위 찬탈을 모의하다 ( 146년 07월 )
94년(146) 가을 7월에 수성이 왜산(倭山) 아래에서 사냥을 하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대왕이 늙었으나 죽지 않고 내 나이도 장차 저물어 가니 기다릴 수 없다. 생각건대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책략을 세워주기를 바라노라.”라고 하였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삼가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한 사람이 홀로 나와 말하기를. “조금 전에 왕자께서 상서롭지 못한 말씀을 하셨는데, 주위 사람들이 바른 충고를 하지 못하고 모두 말하기를, ‘삼가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고 하니 가히 간사하고 아첨한다고 일컬을 만합니다. 저는 바른 말을 하려고 하는데 존귀한 뜻이 어떠하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수성이 말하기를, “그대가 바른 말을 할 수 있다면 약과 돌침[藥石]이 될 텐데, 어찌 의심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지금 대왕이 어질고 안팎에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거늘, 당신이 비록 공적이 있다고 하지만 휘하에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들을 거느리고 어진 임금을 폐위하려고 꾀한다면, 이것이 어찌 한 가닥 실[單縷]로 만균(萬鈞)의 무게를 매달아서 거꾸로 끌려고 하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비록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그 불가함을 알 것입니다. 만약 왕자께서 도모하는 계획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효성과 순종으로 임금을 섬기면 대왕께서도 왕자의 착함을 깊이 알고 반드시 양위할 마음을 가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장차 재앙이 미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수성이 〔이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빴다. 주위 사람들이 그의 정직함을 질투하여 수성에게 참소하여 말하기를, “왕자께서는 대왕이 연로하여 나라가 위태로워질까 염려하여 뒤를 잇고자 도모하는 것인데, 이 자가 이와 같이 망언을 하니 저희들은 〔일이〕 누설되어 화가 미칠까 염려됩니다. 마땅히 죽여서 입을 막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수성이 그 말에 따랐다.
후한의 요동군 서안평현을 습격하다 ( 146년 08월 )
〔94년(146)〕 가을 8월에 왕이 장수를 보내 한의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현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잡아왔다.
고복장이 수성을 숙청할 것을 진언하다 ( 146년 10월 )
〔94년(146)〕 겨울 10월에 우보 고복장(高福章)이 왕에게 아뢰기를, “수성이 장차 반란을 일으키려 하니 청컨대 먼저 그를 죽이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다. 수성이 나라에 공적이 있어서 내가 장차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니 그대는 번거롭게 염려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고복장이 아뢰기를, “수성은 사람됨이 잔인하고 어질지 못하여, 오늘 대왕의 선위를 받으면 내일 대왕의 자손을 해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단지 어질지 못한 동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만 알고, 무고한 자손에게 환난이 미치는 것은 알지 못하십니다. 대왕께서는 이를 깊이 헤아리시기 바라옵니다.”라고 하였다.
태조대왕이 수성에게 양위를 하다 ( 146년 12월 )
〔94년(146)〕 12월에 왕이 수성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어 온갖 정사에 피로하기만 하다. 하늘의 운수가 너에게 있다. 하물며 너는 안으로 국정에 참여하고, 밖으로 군사를 총괄하여 오래도록 사직에 공적이 있고, 신하와 백성들의 여망을 채워 주었다. 내가 〔나라를〕 부탁함에 있어 적임자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너는 즉위하여 왕 노릇하며 영원히 경사스러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의 자리를 물려주고 별궁으로 물러나니, 태조대왕이라고 칭하였다.
『후한서』에는 “안제(安帝) 건광(建光) 원년(121)에 고구려왕 궁(宮)이 죽고 아들 수성이 즉위하였다. 현도태수 요광(姚光)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고구려의〕 국상(國喪)을 틈타 군대를 발동하여 저들을 공격하려 합니다.’라고 하니, 의논하던 자들이 모두 허락할 만하다고 여겼다. 상서(尙書) 진충(陳忠)이 말하기를. ‘궁(宮)이 이전에 빼어나고 영리하여 요광이 토벌하지 못하였는데, 사망하자마자 그를 공격하는 것은 의롭지 않습니다. 마땅히 사람을 보내 조문하고, 그와 함께 이전의 죄를 책망하고 꾸짖되 용서하여 죽이지는 마시어 장차 〔그들이〕 착해지도록 하는 방안을 채택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안제가 그 말을 따랐다. 다음 해에 수성이 한(漢)의 포로[生口]를 돌려보냈다.”라고 하였다. ‘해동고기(海東古記)’를 살펴보면, “고구려 국조왕(國祖王) 고궁(高宮)은 후한 건무(建武) 29년 계사(53)에 즉위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일곱 살이어서 국모(國母)가 섭정하였다. 효환제(孝桓帝) 본초(本初) 원년 병술(146)에 이르러 왕위를 양보하여 친동생인 수성에게 물려주었다. 이때 궁의 나이가 100세이고 왕위에 있은 지 94년째였다.”라고 하였다. 즉 건광 원년은 궁이 재위한 지 69년째 되는 해이니, 『한서』의 기록과 고기(古記)가 상충하여 서로 부합하지 않는다. 혹시 『한서』의 기록이 잘못된 것인가?(1)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태조 융무 3년(55년)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셨다. 그 10성은 이러하다.
첫째는 안시성이니, 개평부에서 동북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둘째는 석성이니, 건안성에서 서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셋째는 건안성이니, 안시성에서 남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넷째는 건흥성이니, 난하의 서쪽에 있고,
다섯째는 요동성이니, 창려의 서남쪽 경계에 있고,
여섯째는 풍성이니, 안시성에서 서북쪽으로 1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일곱째는 한성이니, 풍성에서 남쪽으로 2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여덟째는 옥전보이니, 옛날 요동국으로 한성에서 서남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아홉째는 택성이니, 요택성에서 서남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열째는 요택성이니 황하 북류의 왼쪽 언덕에 있다.
융무 5년(57년)봄 정월에 또 백암성과 용도성을 쌓으셨다.
『삼한비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구지」에 말하기를, 요서에 창료현이 있는데, 당나라 때 요주로 고쳤다. 그곳 남쪽에 갈석산이 있고, 그 아래가 곧 백암성이다. 당나라 때 암주라 부른 곳이 이곳이다.
건안성은 당산 경계 안에 있고, 그 서남은 개평인데 일명 개평이라 하였으니 당나라 때 개주는 이곳이다.
『자치통감』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현도군은 유성과 노룡 사이에 있다. 『한서』에 '마수산이 유성 서남에 있는데 당나라 때 여기에 토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고려진은 북경 안정문 밖 60리쯤에 있다. 안시성은 개평부 동북쪽 70리에 있는데, 지금의 탕지보이다. 고려성은 하간현 서북쪽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 무열제께서 쌓으신 것이다.
책성(연해주)에 태조무열제의 공덕을 새긴 기공비가 있고, 동압록의 황성에 광개토경대훈적비가 있다. 안주 청천강 연안에 을지문덕 석상이 있고, 오소리강 밖에 연개소문송덕비가 있다. 평양 모란봉 중턱에 동천제(11세)가 하늘에 기원하던 조천석이 있고, 삭주 거문산 서쪽 기슭에 을파소 묘가 있고, 운산 구봉산에 연개소문 묘가 있다.(2)
■ 요서 10성
《삼국사기》에 태조대왕 3년(서기 55년) 봄 2월에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았다고 했는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10성의 위치까지 자세히 나온다.
『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태조 융무 3년(55년)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셨다. 그 10성은 이러하다.
첫째는 안시성이니, 개평부에서 동북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둘째는 석성이니, 건안성에서 서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셋째는 건안성이니, 안시성에서 남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넷째는 건흥성이니, 난하의 서쪽에 있고,
다섯째는 요동성이니, 창려의 서남쪽 경계에 있고,
여섯째는 풍성이니, 안시성에서 서북쪽으로 1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일곱째는 한성이니, 풍성에서 남쪽으로 2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여덟째는 옥전보이니, 옛날 요동국으로 한성에서 서남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아홉째는 택성이니, 요택성에서 서남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열째는 요택성이니 황하 북류의 왼쪽 언덕에 있다.
융무 5년(57년)봄 정월에 또 백암성과 용도성을 쌓으셨다.』(2)
《조선상고사》
■ 왕자 수성(차대왕)의 요동 회복(105년-121년, 17년전쟁)
『《후한서》에는 당시 후한을 침략한 고구려 측 핵심 인물을 잘못 기록했다. 고구려 태조대왕은 형식상 군림한 제왕이었고, 전쟁과 관련된 일은 거의 다 차대왕 즉 수성 왕자가 처리했다.
전쟁의 경위는 이러하다. 처음에는 후한이 먼저 요동을 침탈하고 고구려를 침입했으며, 고구려는 이에 맞서 대항하는 피동적 위치에 있었다. 다음에는 고구려가 주동적으로 요동을 회복하고 후한의 변경을 잠식했으며, 후한이 이에 맞서대항하는 피동적 위치에 있었다. 요동 회복을 위한 전쟁은 서기 105년에 개시되어 121년에 끝났으니, 17년간의 일이었다.
이 전쟁의 첫해는 서기 105년으로 이때 왕자 수성의 나이는34세였다. 수성은 '고구려는 토지의 넓이나 인구의 규모는 후한에 뒤지지만, 산이 크고 계곡이 깊어 방어하기에 좋으므로 소수의 병력으로도 후한의 대군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 반면 후한은 평원과 광야의 나라이므로 침입하기가 용이하여, 고구려가 비록 한 번에 후한을 격파하기는 힘들어도 자주 변경을 교란하여 피폐하게 만든 후 격멸한다'는 판단하에, 장기적으로 후한을 침입하고 교란하는 전략을 수립한 뒤 정예병을 이끌고 요동에 들어가 신창 · 후성 등 여섯 개 현을 쳐서 수비군을 격파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그런 다음에 예족과 선비족을 끌어들여 후한의 우북평 · 어양 · 상곡 등을 해마다 침략하니, 17년 동안 후한이 입은 인력 · 가축 · 재물의 손실이 매우 컸다.
서기 121년 2월에서 3월 사이에, 고구려의 침공을 우려한 후한 안제는 유주자사 풍환, 현도군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에게 '유주의 인력과 병력으로 고구려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수성은 태조의 명에 따라 신치 총사령관이 되어 2천 명을 이끌고 험지에 주둔하여 풍환 등을 막는 한편, 3천 명을 동원해서 샛길로 요동 현동 등의 지역을 불태워 풍환 등의 후방 지원을 차단함으로써 결국 풍환 등을 대파했다. 같은 해 5, 6월에는 수성이 선비족 병력 8천 명을 다시 동원해서 요동의 요대현을 쳤다. 이때 수성은 고구려 정예병을 신창에 잠복시켰다가 요동태수 채풍의 구원병을 습격하여, 채풍과 그 이하 장수 100여 명을 참살하고 수많은 병졸을 살상하거나 사로잡고, 요동군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같은 해 12월이나 서기 122년 1월에는 백제와 예족의 기마병 1만 명을 동원해서 현도 · 낙랑 두 개 군을 점령했다. 이로써 위우거가 잃은 고토 즉 옛 오열홀 전부를 완전히 회복했다. 수년간의 전쟁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상태에서 이같이 대패한 후한은 다시 전쟁을 벌일 힘이 없어 요동을 포기하고 세폐를 다시 내는 조건으로 고구려에 화평을 구걸하고 포로를 돌려받았다. 포로 한 사람당 어른은 비단 40필, 아이는 20필이었다.
고구려가 요동 · 낙랑 등을 회복한 사실이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편이나 《후한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구당서》 〈가탐 열전〉에는 "요동 · 낙랑은 후한 건안시대에 함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탐은 당나라 때에 주변 민족에 관한 유일한 연구자이기 때문에 그의 말에는 반드시 출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건안'은 서기 196년 즉 후한 헌제 원년이니, 고구려가 중쇠(번창하던 나라가 중간에 쇠퇴한 일_옮긴이)한 때였으므로 건안은 건광의 오자라고 봐야 한다. 건광은 후한 안제 때인 121년 · 122년의 연호이며 왕자 수성이 채풍을 베고 후한 군대를 격파한 때다. 고구려가 요동군에 임시 설치된 현도 · 낙랑 등을 회복한 시점은 이때라고 봐야 한다.
고구려는 요동을 차지한 뒤, 지금의 개평현 동북쪽 약 70리에 환도성을 수축하고 서쪽 경영의 거점으로 삼는 한편, 국내성 졸본성과 함께 삼경으로 삼았다. 환도성의 위치에 관해서는 후세 사람들의 쟁론이 분분했다. 어떤 사람들은 환인현 부근 즉 지금의 혼강 상류인 안고성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집안현 홍석정자산 위라고 했다. 앞의 것은 산상왕이 설치한 제2환도성이고 뒤의 것은 동천왕이 설치한 제3환도성이다. 제5편에서 서술하겠지만 태조 때의 환도성이 가장 먼저 설치한 제1환도성이다. 《삼국사기》〈지리지〉에서 "안시성은 환도성이라고도한다"고 했고, 《삼국유사》에서는 "안시성은 일명 안촌홀이다"라고 했다. 환은 우리말의 '알'이다. '환도'나 '안시'나 '안촌'은 다 같이 '아티'로 읽어야 한다. 이곳은 지금의 개평현 동북쪽 70리에 있었음이 명백하다. 그런데도 후세 사람들은 세 개의 환도성을 구별하지 못하고 한 곳에서만 환도를 찾고자 했다. 이러니 환도성의 위치를 고증하기 위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이곳의 위치가 여전히 애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3)
■ 태조 94년 8월 기사
『〈고구려본기〉 태조 80년(서기132년_옮긴이) 기사에서는 "좌보패자인 목도루가 수성이 다른 뜻을 품은 것을 알고, 병을 핑게 삼아 벼슬에 나서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차대왕 2년(서기147년_옮긴이) 기사에서도 "좌보인 목도루가 병을 핑계 삼아 벼슬에서 물러났다"고 했다. 이미 15년 전에 병을 핑계 삼아 벼슬에서 물러난 목도루가 어떻게 15년 뒤인 차대왕 2년에 또다시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아무런 생각도 없이 각종 고서에서 이것저것 발췌했다. 그 심각성이 이 정도였다. 또 '좌보'나 '패자'나 다 똑같은 '팔치'의 번역어인데도 겹말(같은 뜻의 단어가 중복된 어휘_옮긴이)인 좌보패자라는 말을 사용했으니, 어찌 웃을 일이 아니겠는가?
태조 94년 8월 기사에서는 "왕이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기습하고 대방 수령을 죽인 뒤 낙랑태수의 처자를 약탈했다"고 했다. 이것은 《후한서》에 나오는 "질환 연간에 고구려왕 백고가 요동 서안평을 다시 침범하고 대방 수령을 죽인 뒤 낙랑태수의 처자를 약탈했다"는 내용을 베껴 쓴 것이다. '질환 연간'은 질제와 환제가 교체된 해를 가리키므로 '질환 연간'은 태조 94년이라는 이유로, 김부식은 이것을 태조 94년 기사에 삽입했다.
그런데 백고는 신대왕의 이름이고, 이때는 신대왕 원년으로부터 20년 이전이었다. 그래서 김부식은 '고구려왕 백고'란 여섯 글자를 "장수를 보내"라는 부분으로 대체했다. 하지만 당시의 태조는 차대왕과 막근의 상쟁때문에 대외 문제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후한서》의 '질환 연간'은 '환영 연간'(환제와 영제의 교체기)인 신대왕 때로 정정해야 옳다. 이것을 태조 94년의 일로 기록한 것은 잘못된 일인데도, 김부식이 여기에다가 정확하게 달까지 못 박아 '8월'이라고 한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에 국내외 기록을 인용하면서, 모호한 내용이 나오면 아무 근거도 없이 년과 월을 맘대로 바꾸고 자구를 가감한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4)
<주>
(2)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561쪽~563쪽
(3)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시공사, 218쪽~231쪽(제5편(1) 고구려의 전성시대 제2장 태조대왕 · 차대왕 두 대왕의 문치 1. 태조대왕 · 차대왕 계보의 오류 2. 태조대왕 · 차대왕 시대의 '선배' 제도 3. 태조대왕 · 차대왕 시대의 제도 제3장 태조대왕 · 차대왕의 한족 축출과 고토 회복 1. 한나라의 국력과 동방 침략의 과정)
(4)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시공사, 237~238(제5편(1) 고구려의 전성시대 제4장 차대왕의 왕위찬탈 1. 태조대왕의 가정불화 2. 수성의 음모와 태조의 선위)
<참고자료>
˝해모수의 '해'씨는 고구려 태조때 '고'씨로 변경˝: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9/04/26
고구려 쿠데타로 본 삼국사기 기록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