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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1. 고구려(2) 2대 유리명제(琉璃明帝, 광명대제, 유류왕, 유리왕, BC19년-18년) 3년 국내성 천도 본문

여러나라시대/고구려(고려)

1. 고구려(2) 2대 유리명제(琉璃明帝, 광명대제, 유류왕, 유리왕, BC19년-18년) 3년 국내성 천도

대야발 2025. 11. 3. 22:38
 

 

 

 

「광개토대왕릉비」

 

아!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우셨다. 왕은 북부여에서 나셨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알을 가르고 세상에 내려오시니, 날 때부터 성스러우셨다. □□□□□□ 명(命)에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어 왕께서 나루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들이 떠올라라." 이 말씀에 따라 즉시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들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을 건너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 (왕은) 왕위에 낙이 없자 (하늘로) 사신을 보내시니, 황룡이 내려와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에 서서 승천하셨다. 세자로서 고명(顧命)을 이어받은 유류왕은 도(道)로써 나라를 다스렸고, 대주류왕(대무신왕)은 왕업을 계승하여 단단히 하셨다.

  • 원문: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郎.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郎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即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 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履龍首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 紹承基業.(1)

 

 

 

 

《삼국사기》 권 제13고구려본기 제1  유리왕(琉璃王) 

 

유리명왕이 즉위하다 ( 기원전 19년 )

 

유리명왕(琉璃明王)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유리(類利)인데 유류(孺留)라고도 한다. 주몽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예씨(禮氏)이다.

 

처음 주몽이 부여에 있었을 때 예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그 여인이〕 아이를 배었는데, 주몽이 떠나온 뒤 태어났으니 그 아이가 유리이다. 〔유리가〕 어릴 때 길가에 나가 놀다가 참새를 쏘려다 잘못하여 물 긷는 부인의 항아리를 깨뜨렸다. 부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 아이는 아비가 없는 까닭에 이처럼 미련하구나.”라고 하였다. 유리가 부끄러워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묻기를, “저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나라에 용납되지 못하여 남쪽 땅으로 달아나서 나라를 열고 왕을 칭하였다. 떠날 때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에게〕 「내가 물건을 남겨 두었는데,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에 감추어 두었다」라고 말하시오. 만약 이것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아이는〕 곧 나의 아들이요’라고 하셨다.”라고 하였다.

 

유리는 그 말을 듣고 곧 산골짜기로 가서 그것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피곤하여 돌아왔다. 하루는 아침에 마루 위에 있는데 주춧돌 사이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주춧돌에 일곱 모가 있었다. 이에 기둥 아래를 뒤져서 부러진 칼 한쪽을 찾아냈다. 마침내 그것을 가지고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등 세 명과 함께 떠나 졸본에 이르러 부왕(父王)을 뵙고 부러진 칼을 바쳤다. 왕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을 꺼내어 이를 합치니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다. 왕이 이를 기뻐하며 〔유리를〕 태자로 세웠는데, 이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왕비를 맞아들이다 ( 기원전 18년 07월 )

2년(B.C. 18) 가을 7월에 다물후(多勿侯) 송양의 딸을 들여 왕비로 삼았다.

 

흰 노루를 잡다 ( 기원전 18년 09월 )

〔2년(B.C. 18)〕 9월에 서쪽으로 사냥하러 가 흰 노루를 잡았다.

 

신작이 모이다 ( 기원전 18년 10월 )

〔2년(B.C. 18)〕 겨울 10월에 신작(神雀)들이 궁궐 뜰에 모여들었다. 〔이 해에〕 백제 시조 온조(溫祚)가 〔왕위에〕 올랐다.

 

골천에 이궁을 짓다 ( 기원전 17년 07월 )

3년(B.C. 17) 가을 7월에 골천(鶻川)에 이궁(離宮)을 지었다.

 

왕비가 죽어 새로 두 여인을 맞이하다 ( 기원전 17년 10월 )

〔3년(B.C. 17)〕 겨울 10월에 왕비 송씨(松氏)가 세상을 떠났다. 왕이 다시 두 여자에게 장가들어 후처[繼室]로 삼았다. 한 명은 화희(禾姬)라 하는데 골천 사람의 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치희(雉姬)라 하는데 한나라 사람[漢人]의 딸이었다. 두 여자가 총애를 다투고 서로 잘 어울리지 않으므로, 왕이 양곡(涼谷)에 동·서 2궁(宮)을 지어 각기 그들을 두었다. 후에 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을 나가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으니 두 여자가 다투었다. 화희가 치희를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는 한나라 집안의 천한 첩[婢妾]으로, 어찌 무례함이 심한가?”라고 하였다. 치희는 부끄럽고 한스러워 도망쳐 돌아갔다. 왕이 그 말을 듣고 말을 채찍질하여 쫓아갔으나, 치희는 성을 내고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나무 아래서 휴식을 맛보다 꾀꼬리[黃鳥]가 날아와 모여드는 것을 보고 감탄하여 노래하여 말하기를, “훨훨 나는 꾀꼬리는 암수가 서로 의지하는데, 외로운 이 내 몸은 누구와 함께 돌아갈 것인가!”라고 하였다.

 

 

부분노의 계책으로 선비를 굴복시키다 ( 기원전 9년 04월 )

11년(B.C. 9) 여름 4월에 왕이 여러 신하에게 일러 말하기를, “선비(鮮卑)는 〔지세의〕 험준함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고, 이로우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지키니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만일 이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내가 장차 그에게 후한 상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부분노가 나와서 말하기를, “선비는 지형이 험하고 수비가 단단한[險固] 나라이고 사람들이 용감하나 어리석으므로,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고 꾀로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부분노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마땅히 사람을 시켜 저들에게 들어가 정세를 탐지케 하고[反間] 거짓으로 ‘우리나라는 작고 병력이 약하며 겁이 많아 움직이기 어렵다.’라고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선비는 반드시 우리를 가벼이 보고 대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그 틈을 기다렸다가 정예 병력을 이끌고 샛길[間路]을 따라가서 수풀에 숨어 그 성을 엿보겠습니다. 왕께서 약한 병력[羸兵]을 시켜서 그 성 남쪽으로 나가게 하면, 저들은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올 것입니다. 〔그때〕 신이 정예 병력으로서 그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왕께서 친히 용맹한 기병을 이끌고 저들을 협공한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에 따랐다. 선비가 과연 문을 열고 군대를 내어 쫓아왔다. 부분노가 병력을 이끌고 그 성으로 달려 들어가니 선비가 이를 바라보고 크게 놀라 되돌아 달려왔다. 부분노가 관문을 맡아 막고 싸우니, 목을 베어 죽인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깃발을 들고 북을 울리며 나아가니, 선비는 앞뒤로 적을 맞아 계책이 다하고 힘이 꺾여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왕이 부분노의 공을 생각하여 식읍(食邑)을 상으로 주었으나, 〔부분노가〕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왕의 덕이니, 신이 무슨 공이 있습니까?”라고 하고는 결국 받지 않았다. 왕이 이에 황금 30근과 좋은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화성의 위치를 관찰하다 ( 기원전 7년 01월 )

13년(B.C. 7) 봄 정월에 화성[熒惑]이 심성(心星)을 지켰다.

 

 

부여가 볼모 교환을 요청하다 ( 기원전 6년 01월 )

14년(B.C. 6) 봄 정월에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 문안하고 볼모[質子]를 교환할 것을 청하였다. 왕은 부여의 강대함을 꺼려 태자 도절(都切)을 볼모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하여 가지 않으므로 대소가 화를 냈다.

 

 

부여가 침공하였다가 물러나다 ( 기원전 6년 11월 )

〔14년(B.C. 6)〕 겨울 11월에 대소가 병력 50,000명으로 쳐들어 왔으나, 큰 눈이 내려 사람들이 많이 얼어 죽었으므로 돌아갔다.

 

 

왕이 돼지가 달아난 죄를 물어 사람을 죽이자 병에 걸리다 ( 기원전 1년 08월 )

19년(B.C. 1) 가을 8월에 교사(郊祀)에 쓸 돼지[郊豕]가 달아나자 왕이 탁리(託利)와 사비(斯卑)에게 이를 쫓게 하였다. 〔그들은〕 장옥택(長屋澤) 가운데에 이르러 이를 찾아내어 칼로 그 다리의 힘줄을 끊었다. 왕이 그것을 듣고 화내며 말하기를, “하늘에 제사지낼 희생을 어찌 상하게 할 수 있는가?”라고 하고, 결국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던져 넣어 죽였다.

9월에 왕이 병에 걸렸다. 무당이 말하기를, “탁리와 사비가 빌미가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사과하도록 하니 곧 병이 나았다.

 

 

태자 도절이 사망하다 ( 1년 01월 )

20년(1) 봄 정월에 태자 도절이 사망하였다.

 

 

설지가 천도를 건의하다 ( 2년 03월 )

21년(2) 봄 3월에 교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자 왕이 장생(掌牲) 설지(薛支)에게 명하여 이를 뒤쫓게 하였다. 〔설지가〕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에 이르러 찾아내어 국내 사람의 집에 가두어 기르게 하고는 돌아와 왕을 뵙고 말하기를, “신이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렀는데, 그 산수가 깊고 험하며 땅이 오곡을 키우기에 알맞고, 또 큰 사슴·사슴·물고기·자라가 많이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만약 도읍을 옮기시면 백성의 이익이 무궁할 뿐 아니라, 전쟁[兵革]의 걱정도 면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위중림에서 사냥하다 ( 2년 04월 )

〔21년(2)〕 여름 4월에 왕이 위중림(尉中林)에서 사냥하였다.

 

 

지진이 일어나다 ( 2년 08월 )

〔21년(2)〕 가을 8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국내에 가서 지세를 살피고 위사물을 만나다 ( 2년 09월 )

〔21년(2)〕 9월에 왕이 국내에 가서 지세를 보고 돌아오다가 사물택(沙勿澤)에 이르러, 한 장부가 못 위의 바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왕에게 일러 말하기를, “왕의 신하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기쁘게 허락하고, 〔그에게〕 사물(沙勿)이라는 이름과 위씨(位氏)라는 성씨를 주었다.

 

 

국내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다 ( 3년 10월 )

22년(3) 겨울 10월에 왕이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협보가 왕에게 불만을 품고 남한으로 떠나다 ( 3년 12월 )

〔22년(3)〕 12월에 왕이 질산(質山) 북쪽[陰]에서 사냥하며 5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대보(大輔) 협보(陜父)가 간하여 말하기를, “왕께서 새로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평안히 지내지 못하므로,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 형정(刑政)을 올바르게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생각하지 않으시고 말을 달려 사냥하며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왕께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지지 않으신다면, 신은 정치가 문란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 선왕의 위업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사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매우 화가 나 협보의 관직을 파하고 관원(官園)을 맡아보게 하였다. 협보가 분하여 남한(南韓)으로 가버렸다.

 

 

왕자 해명을 태자로 삼다 ( 4년 02월 )

23년(4) 봄 2월에 왕자 해명(解明)을 세워 태자로 삼고, 나라 안에 크게 사면하였다.

 

 

날개가 있는 사람을 조정에 등용하고 우씨 성을 주다 ( 5년 09월 )

24년(5) 가을 9월에 왕이 기산 들판에서 사냥하다 이상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양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었다. 그를 조정에 등용하여 우씨(羽氏)라는 성씨를 주고, 왕의 딸에게 장가들게 하였다.

 

 

황룡국왕이 보낸 활을 해명이 부러뜨리자 왕이 화내다 ( 8년 01월 )

27년(8) 봄 정월에 왕태자 해명이 옛 도읍[卒本]에 있었는데, 힘이 있고 매우 용감하였다. 황룡국(黃龍國)의 왕이 이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강한 활을 선물하였다. 해명이 그 사신을 마주함에 그것을 당겨 부러뜨리고 말하기를, “내가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활 자체가 굳세지 못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황룡국왕이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화를 내며 황룡국왕에게 알려 말하기를, “해명이 자식이 되어 불효하니, 청컨대 과인을 위하여 그를 죽여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황룡국왕이 해명을 죽이지 못하다 ( 8년 03월 )

〔27년(8)〕 3월에 황룡국왕이 사신을 보내 태자와 만나기를 청하였다. 태자가 가려고 하니, 사람들 가운데 간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지금 이웃 나라가 이유도 없이 뵙기를 청하니,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죽이시려 하지 않는데, 황룡국왕이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하고는 마침내 갔다. 황룡국왕이 처음에는 모략을 꾸며 죽이고자 하였으나, 만나서는 감히 해를 입히지 못하고 예를 갖추어 보냈다.

 

 

태자 해명이 자결하다 ( 9년 03월 )

28년(9) 봄 3월에 왕이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도읍을 옮겨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국가의 기틀[邦業]을 굳건히 하고자 하였다. 너는 나를 따르지 않으며 굳센 힘을 믿고 이웃 나라에 원한을 맺으니, 자식으로서의 도리가 어찌 이와 같은가?”라고 하고, 이에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 태자가 곧 자결하려고 하자 어떤 이가 그를 말리며 말하기를, “대왕의 장자가 이미 돌아가시어 태자께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는데, 지금 〔왕의〕 사자가 한 번 온 것으로 자결하시면, 그것이 속임수가 아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지난번 황룡국왕이 강한 활을 보냈을 때, 나는 그것이 우리나라를 가벼이 여기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었던 까닭에 〔활을〕 당겨 부러뜨려 되갚았던 것인데, 뜻밖에 부왕으로부터 책망을 당하였다. 지금 부왕께서 내가 불효하다고 하여 칼을 내리시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니, 아버지의 명령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곧 여진(礪津)의 동쪽 들판[東原]으로 가서 창을 땅에 꽂고 말을 달려 거기에 찔려 사망하였다. 그때 나이가 21세였다. 태자의 예로 동쪽 들판에 장사지내고 사당[廟]을 세웠으며, 그 땅을 불러 창원(槍原)이라 하였다.

 

 

태자 해명의 자결에 대한 사론

논하여 말한다. 효자가 부모를 섬김에는 마땅히 곁을 떠나지 않고 효를 다하는 것이 문왕(文王)이 세자였을 때처럼 해야 한다. 해명이 따로 떨어진 도읍[別都]에 있으면서 무용(武勇)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니, 죄를 얻게 된 것은 마땅하다. 또 들으니 『춘추좌씨전[左傳]』에는 “자식을 사랑함에 의로운 방도[義方]로 그를 가르치고, 그릇된 곳으로 들지 않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지금 왕은 처음에 일찍이 그를 가르친 적이 없었는데, 그가 악하게 되자 미워함이 지나치게 심해져 그를 죽이고서야 그쳤다.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다고 이를 만하다.

 

 

왕자 무휼이 부여를 꾸짖다 ( 9년 08월 )

〔28년(9)〕 가을 8월에 부여왕 대소의 사신이 와서 왕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우리 선왕[金蛙王]과 〔당신의〕 선군(先君) 동명왕(東明王)은 서로 사이가 좋았으나, 〔당신의 선군이〕 우리 신하들을 꾀어 도망하여 이곳에 이르러 성곽을 완성하고 사람들을 모아 나라를 이루고자 하였다. 대체로 나라에는 크고 작음이 있고, 사람에게는 어른과 아이가 있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김이 예(禮)이며, 아이가 어른을 섬김이 도리[順]이다. 지금 왕이 만일 예와 순리로써 나를 섬길 수 있다면, 하늘이 반드시 그대를 도와 국운[國祚]이 오래 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사직을 보존하려고 하여도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를 세운 지 오래되지 않고 백성과 병력이 잔약(孱弱)하니, 형세에 맞춰 부끄러움을 참고 굴복하여 훗날의 성공을 도모하리라.”라고 하였다. 그래서 여러 신하와 의논하여 〔대소에게〕 답하여 말하기를, “과인은 바다 구석에 떨어져 있어 아직 예의를 듣지 못하였는데, 지금 대왕의 가르침을 받고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왕자 무휼(無恤)이 나이는 아직 어렸으나, 왕이 부여 〔사신의〕 말에 회답하고자 함을 듣고 스스로 그 사신을 만나 말하기를, “우리 돌아가신 할아버지[先祖]께서는 신령의 자손으로 어질고 재주가 많으셨는데, 대왕께서 시샘하여 해를 입혀 부왕[金蛙王]에게 참소하여 욕되게 말을 기르게 하였으므로, 불안하여 나가신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과거의 허물은 생각하지 않으시고, 다만 병력이 많은 것을 믿고 우리나라를 깔보고 업신여기니[輕蔑], 청컨대 사자는 대왕께 돌아가 알리기를, ‘지금 여기에 알들이 쌓여 있는데, 만일 대왕께서 그 알들을 허물어뜨리지 않으신다면 신은 장차 섬길 것이요, 그렇지 않으시면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시오.”라고 하였다. 부여왕이 이를 듣고 많은 신하에게 두루 물으니, 어떤 할멈[老嫗]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알들이 쌓여 있는 것은 위험함이요, 그 알들을 허물어뜨리지 않는 것은 안전함입니다. 그 뜻을 말씀드리니, ‘왕께서 자신의 위험함은 알지 못하시고 남이 〔굴복하여〕 오기를 바라시는 것이니, 위험함을 안전함으로 바꾸어 스스로 살피시는 것만 못하다’라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개구리들이 싸우다 ( 10년 06월 )

29년(10) 여름 6월에 모천(矛川) 가에서 검은 개구리가 붉은 개구리와 무리를 이루어 싸웠는데, 검은 개구리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의논하던 사람이 말하기를, “검은색은 북방(北方)의 색이니, 북부여가 파멸할 징조이다.”라고 하였다.

 

 

두곡에 이궁을 짓다 ( 10년 07월 )

〔29년(10)〕 가을 7월에 두곡(豆谷)에 이궁(離宮)을 지었다.

 

 

왕망이 연비를 죽이고 고구려왕을 하구려후라 부르다 ( 12년 )

31년(12) 한나라 왕망(王莽)이 우리 병력을 징발하여 호(胡)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우리가 가려고 하지 않자 무리하게 억지로[強迫] 보내었더니, 모두 도망하여 밖으로 나가버렸고, 그로 인하여 법을 어겨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임을 당하니, 〔중국의〕 주군(州郡)이 잘못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嚴尤)가 〔왕망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군으로 하여금 저들을 위로하여 편안케 하여야 합니다. 지금 함부로 큰 죄를 씌우면, 그들이 결국 배반할까 염려됩니다. 〔배반이 일어나면〕 부여의 족속 중에 반드시 부응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니,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하였는데, 부여와 예맥(獩貊)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는 큰 근심거리입니다.”라고 하였다. 왕망은 〔엄우의 말을〕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령하여 이를 공격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꾀어내 그 목을 베어 머리를 수도[京師]로 보냈다.양한서(兩漢書)와 남북사(南北史)에는 모두 “구려후(句麗侯) 추(騶)를 꾀어내 목을 베었다.”라고 하였다. 왕망이 이를 기뻐하며 우리 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 고쳐 이름하고,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에 〔고구려가〕 한(漢)의 변방[邊地]을 침범함이 더욱 심하여졌다.

 

 

왕자 무휼이 부여의 침략을 물리치다 ( 13년 11월 )

32년(13) 겨울 11월에 부여인이 쳐들어오자, 왕이 아들 무휼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무휼은 병력이 적어 맞설 수 없을 것을 우려하여, 기묘한 계책을 세워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그들을 기다렸다. 부여군이 곧바로 학반령(鶴盤嶺) 아래에 이르자 복병이 나가 불의에 공격하니, 부여군이 크게 패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무휼이 병력을 풀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왕자 무휼을 태자로 삼다 ( 14년 01월 )

33년(14) 봄 정월에 왕자 무휼을 세워 태자로 삼고 군무와 국정[軍國]의 일을 맡겼다.

 

 

양맥과 고구려현을 복속시키다 ( 14년 08월 )

〔33년(14)〕 가을 8월에 왕이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병력 20,000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쳐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병력을 내어 보내 한(漢)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현(縣)은 현도군에 속하였다.

 

 

왕자 여진이 물에 빠져 사망하다 ( 18년 04월 )

37년(18) 여름 4월에 왕자 여진(如津)이 물에 빠져 사망하였다. 왕이 애통하여 사람을 시켜 시체를 건지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후에 비류 사람 제수(祭須)가 찾아서 알리니, 마침내 예로써 왕골령(王骨嶺)에 장사지내고, 제수에게 금 10근, 밭 10경(頃)을 주었다.

 

 

왕이 두곡에 행차하였다 ( 18년 07월 )

〔37년(18)〕 가을 7월에 왕이 두곡에 행차하였다.

 

 

왕이 두곡에서 죽으니 유리명왕이라 불렀다 ( 18년 10월 )

〔37년(18)〕 겨울 10월에 〔왕이〕 두곡의 이궁(離宫)에서 돌아가시니, 두곡의 동쪽 들판에 장사지내고, 유리명왕이라 불렀다.(2)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유리명제 21년(단기2335년, BCE2년) 도읍을 다시 눌견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는데 이곳을 황성이라고도 한다. 성안에 환도산이 있는데 산위에 성을 쌓고 유사시에는 거기에 머무르셨다.(3)

 

 

 

 

 

■ 유류왕

 

단재 신채호선생은 유리왕은 광개토왕비문에 따라 유류로 써야 하고, ‘누리’로 읽어야 하는데, 세(世)란 뜻이고 명(明)이란 뜻이라고 보았다.

 

추모왕에 이어 아들 유류왕이 등극하고, 유류왕에 이어 아들 대주류왕이 등극했다. 유류는 〈고구려 본기〉에 나오는 유리명왕()의 유리()다. 유류·유리(琉璃)·유리(類利)는 다 ‘누리’로 읽어야 하는데, 세(世)란 뜻이고 명(明)이란 뜻이다. 대주류왕은 〈고구려 본기〉의 대무신왕 무휼이다. 무(武)·주류(朱留)·무휼은 다 ‘무뢰’로 읽어야 한다. 이것은 우박 혹은 신(神)이란 뜻이다. 유리()와 명()을 시호로 이해해서 유리명왕이라고 하고 유리()를 이름으로 이해한 것은 〈고구려 본기〉의 잘못이다. 또 무()와 신()을 시호로 이해해서 대무신왕이라고 하고, 무휼을 이름으로 이해한 것 역시 〈고구려 본기〉의 잘못이다. 여기서는 광개토왕비문에 따라 유리()·대무신을 유류·대주류로 쓰기로 한다.』(4)

 

 

 

 

<주>

 

 

(1) 광개토대왕릉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 삼국사기 < 한국 고대 사료 DB

 

(3)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561쪽, 571-573쪽

 

(4)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위즈덤하우스, 169쪽-171쪽(《조선상고사》 제4편 열국쟁웅시대(중국과의 격전시대) 제2장 열국의 분립 2.고구려의 발흥 2) 동부여와 고구려의 알력)

 

 

 

<참고자료>

 

 

고구려를 수성한 기업가 유리왕.임동주 서울대 초빙교수: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9/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