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력사를 찾아서

1. 고구려(3) 3대 대무신열제(大武神烈帝, 대무신제, 대주류왕, 대무신왕, 18년-44년) 22년 02월 부여 정벌, 26년 10월 개마국 정벌, 26년 12월 구다국 투항, 28년 07월 후한 요동태수의 침입을 물리침, 32년 04월 낙랑국 정벌, 37년 낙랑을 멸망시킴. 본문

여러나라시대/고구려(고려)

1. 고구려(3) 3대 대무신열제(大武神烈帝, 대무신제, 대주류왕, 대무신왕, 18년-44년) 22년 02월 부여 정벌, 26년 10월 개마국 정벌, 26년 12월 구다국 투항, 28년 07월 후한 요동태수의 침입을 물리침, 32년 04월 낙랑국 정벌, 37년 낙랑을 멸망시킴.

대야발 2025. 11. 4. 17:43

 

 

 

 

「광개토대왕릉비」

 

아!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우셨다. 왕은 북부여에서 나셨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알을 가르고 세상에 내려오시니, 날 때부터 성스러우셨다. □□□□□□ 명(命)에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어 왕께서 나루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들이 떠올라라." 이 말씀에 따라 즉시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들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을 건너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 (왕은) 왕위에 낙이 없자 (하늘로) 사신을 보내시니, 황룡이 내려와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에 서서 승천하셨다. 세자로서 고명(顧命)을 이어받은 유류왕은 도(道)로써 나라를 다스렸고, 대주류왕(대무신왕)은 왕업을 계승하여 단단히 하셨다.

  • 원문: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郎.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郎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即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 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履龍首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 紹承基業.(1)

 

 

《삼국사기》 권 제14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大武神王) 

 

대무신왕이 즉위하다 ( 18년 10월 )

대무신왕(大武神王)이 즉위하였다.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무휼(無恤)이고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장성하여서는 영웅다운 호걸[雄傑]로 큰 지략이 있었다. 유리왕이 재위 33년 갑술년(14)에 〔그를〕 세워 태자로 삼았는데, 그때 나이가 11세였다. 〔유리명왕이 죽자〕 이때에 이르러 즉위하니, 어머니는 송씨(松氏)로 다물국왕(多勿國王) 송양(松讓)의 딸이었다.

 

 

지진이 일어나 사면하다 ( 19년 01월 )

2년(19) 봄 정월에 경도(京都)에 지진이 일어나 크게 사면하였다.

 

 

백제인이 투항해 오다 ( 19년 01월 )

〔2년(19) 1월에〕 백제 백성 1천여 호가 투항해 왔다.

 

 

동명왕묘를 세우다 ( 20년 03월 )

3년(20) 봄 3월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골구천에서 거루를 얻다 ( 20년 09월 )

〔3년(20)〕 가을 9월에 왕이 골구천(骨句川)에서 사냥하다가 신령스러운 말[神馬]을 얻어 이름을 거루(駏䮫)라 하였다.

 

 

부여왕이 까마귀를 보내오다 ( 20년 10월 )

〔3년(20)〕 겨울 10월에 부여왕(扶餘王) 대소(帶素)가 사신을 파견하여 붉은 까마귀를 보내 왔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처음에 부여 사람이 이 까마귀를 얻어 왕에게 바쳤는데, 어떤 이가 〔왕에게〕 말하기를, “까마귀는 검은 것입니다. 지금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니 두 나라를 아우를 징조입니다. 왕께서 고구려를 얻으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소가 기뻐하며 그것을 보내고, 아울러 어떤 사람의 말도 알려 주었다. 왕이 여러 신하와 함께 의논하여 답하여 말하기를, “검은 것은 북방의 색인데, 지금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습니다. 또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징표[瑞物]인데 임금께서 〔그것을〕 얻었으되 갖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보내주셨으니, 두 나라의 존망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소가 그 말을 듣고 놀라며 후회하였다.

 

 

부여를 정벌하러 가는 길에 인재들을 얻다 ( 21년 12월 )

4년(21) 겨울 12월에 왕은 군사를 내어 부여를 치려함에 비류수(沸流水) 가[上]에 다다랐다. 멀리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여인이 솥을 들고 노니는 것 같았다. 다가가서 보니 단지 솥만 있었다. 그것으로 밥을 짓게 하자 불을 피우지 않고도 스스로 열이 났으므로, 밥을 지어 한 무리의 군대를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이때〕 홀연히 한 장부가 나타나 말하기를, “이 솥은 저희 집안의 물건입니다. 제 누이가 잃어버렸는데 왕께서 지금 이를 얻으셨으니, 청컨대 〔솥을〕 짊어지고 따르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에게〕 부정씨(負鼎氏)라는 성씨를 주었다. 이물림(利勿林)에 이르러 잠을 자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렸다. 동틀 무렵 사람을 시켜 찾아보게 하니, 금으로 된 옥새[金壐]와 병장기 등을 얻었다.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주신 것이다.”라고 하고 절한 다음 받았다. 길을 떠나려 함에 한 사람이 있었으니 키는 9척 정도에 얼굴이 희고 눈에 광채가 있었다. 〔그는〕 왕에게 절하며 말하기를, “신은 북명 사람 괴유(怪由)입니다. 제가 듣건대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정벌하신다하니, 신이 청컨대 따라가서 부여왕의 머리를 베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이를 허락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신은 적곡(赤谷) 사람 마로(麻盧)입니다. 청컨대 긴 창으로 인도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또 이를 허락하였다.

 

 

부여왕을 죽이고 회군하다 ( 22년 02월 )

5년(22) 봄 2월에 왕이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 땅은 진창길이 많아 왕이 평지를 골라 군영을 만들고 안장을 풀어 병졸을 쉬게 하였는데, 두려워하는 태도가 없었다. 부여왕은 온 나라를 동원하여 출전해서 〔고구려가〕 방비하지 않는 사이에 엄습하려고 말을 채찍질하여 전진하다, 진창에 빠져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게 되었다. 왕이 이에 괴유에게 지시하여 괴유가 칼을 빼서 울부짖으며 공격하니 〔부여의〕 많은 군대가 뿔뿔이 흩어져 버티지 못하였다. 〔괴유가〕 곧바로 나아가 부여왕을 붙잡아 머리를 베었다. 부여 사람들이 이미 왕을 잃어 기력이 꺾였음에도 스스로 굽히지 않고 여러 겹으로 〔고구려군을〕 에워쌌다. 왕은 군량이 다하여 병사들이 굶주리므로 어찌할 바를 몰라 두려워하다가, 이에 하늘에 영험을 비니 갑자기 큰 안개가 피어나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도 7일간 사람과 사물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왕이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게 하여 무기를 쥐여 군영 안팎에 세워 가짜 병사[疑兵]를 만들어 놓고, 샛길을 따라 군사들을 숨겨 밤에 나왔다. 〔이때〕 골구천의 신령스러운 말과 비류원(沸流源)의 큰 솥을 잃어버렸다. 이물림에 이르러 병사들이 굶주려 일어나지 못하므로, 들짐승을 잡아서 음식으로 주었다. 왕이 이윽고 나라에 이르러 여러 신하를 모아 잔치를 베풀며 말하기를, “내가 덕이 없어 경솔하게 부여를 쳐서 비록 그 왕을 죽였으나, 아직 그 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하였고 또 우리의 군사와 물자를 많이 잃었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왕이〕 친히 죽은 이를 조문하고 아픈 이를 문안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로써 나라 사람들이 왕의 덕과 의(義)에 감격하여, 모두 나랏일에 몸을 바치기로 약속하였다.

 

 

거루가 부여말을 거느리고 돌아오다 ( 22년 03월 )

〔5년(22)〕 3월에 신령스러운 말 거루가 부여의 말 100필을 거느리고 함께 학반령 아래 차회곡(車廻谷)으로 왔다.

 

 

갈사국이 세워지다 ( 22년 04월 )

〔5년(22)〕 여름 4월에 부여왕 대소의 아우가 갈사수(曷思水)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이 사람은 부여왕 금와의 막내아들로 역사책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처음에 대소가 죽임을 당하자 〔그는〕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따르는 사람 1백여 명과 함께 압록곡에 이르렀다. 〔그는〕 해두국왕[海頭王]이 사냥하러 나온 것을 보고서 마침내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빼앗아 이곳에 이르러 비로소 도읍하였는데, 이 사람이 갈사국왕[曷思王]이다.

 

 

부여 왕실이 내투하자 연나부에 두다 ( 22년 07월 )

〔5년(22)〕 가을 7월에 부여왕의 사촌 동생이 나라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 선왕이 돌아가시고 나라가 망하여 백성들이 기댈 데 없는데, 왕의 아우는 도피하여 갈사수에 도읍하였다. 나 역시 못나고 어리석어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1만여 명과 함께 투항해 오니, 왕은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掾那部)에 두었다. 그의 등에 줄무늬가 있었으므로 낙씨(絡氏)라는 성씨를 주었다.

 

 

괴유가 사망하다 ( 22년 10월 )

〔5년(22)〕 겨울 10월에 괴유가 사망하였다. 처음 병세가 매우 위중하여 왕이 친히 가서 안부를 물었다. 괴유가 말하기를, “신은 북명의 미천한 사람으로서 여러 차례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비록 죽어도 산 것과 같아 은혜에 보답할 일을 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좋게 여기고 또 큰 공로가 있었으므로, 북명산(北溟山) 남쪽에 장사지내고, 담당 관사에 명하여 때에 따라 제사지내게 하였다.

 

 

을두지를 우보로 삼다 ( 25년 02월 )

8년(25) 봄 2월에 을두지(乙豆智)를 우보(右輔)로 삼고 군무와 국정[軍國]의 일을 맡겼다.

 

 

개마국을 정벌하다 ( 26년 10월 )

9년(26) 겨울 10월에 왕이 친히 개마국(蓋馬國)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이고 백성들을 위로하여 편안케 하였다. 〔개마국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고, 단지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구다국이 투항하다 ( 26년 12월 )

〔9년(26)〕 12월에 구다국(句茶國)의 왕이 개마국이 멸망한 것을 듣고 해(害)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 이로써 개척한 영토가 점차 넓어졌다.

 

 

좌보와 우보를 임명하다 ( 27년 01월 )

10년(27) 봄 정월에 을두지를 좌보(左輔)로 삼고, 송옥구(松屋句)를 우보로 삼았다.

 

 

후한 요동태수의 침입을 물리치다 ( 28년 07월 )

11년(28) 가을 7월에 한(漢)의 요동태수(遼東太守)가 병력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왕이 여러 신하를 모아 싸우고 지키는 계책을 물었다. 우보 송옥구(松屋句)가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덕을 믿는 자는 번창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중국은 흉년이라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음에도 명분도 없이 출병하였습니다. 이는 임금과 신하들이 결정한 책략이 아니라 필시 변방의 장수가 이익을 노리고 멋대로 우리나라를 침략한 것입니다. 하늘을 거역하고 인심에 어긋나니 군사는 반드시 성공할 수 없습니다. 험한 곳에 기대어 기묘한 계책을 내면 반드시 그들을 깨뜨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좌보 을두지가 말하기를, “작은 적(敵)은 강해도 큰 적에게 잡히는 법입니다. 신이 대왕의 병력과 한(漢)의 병력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많을지 헤아려 보건대, 꾀로써 칠 수는 있으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꾀로서 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라고 하였다. 〔을두지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지금 한의 병력은 멀리서 와 싸우고 있는데,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성을 닫고 스스로 굳게 지키다 그 군사들이 약해지기를 기다려 나가 공격하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러하다 여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에 들어가 수십일 동안 굳게 지켰는데 한의 병력이 에워싸고 풀어주지 않았다. 왕은 힘이 다하고 병사들이 지치자 을두지에게 일러 말하기를, “형세가 지킬 수 없는 지경이니 어찌해야 하는가?”라고 하였다. 을두지가 말하기를, “한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암석 지대에 있어 샘물[水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오래도록 에워싸 우리가 곤란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연못의 잉어를 잡아서 수초로 싸고, 맛이 좋은 술 약간을 함께 한의 군대에게 보내어 대접케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에 따랐다. 글을 주어 말하기를, “과인이 우매하여 상국(上國)에 죄를 얻어, 장군으로 하여금 백만 군대를 거느리고 저희 국경[㢢境]에서 이슬을 맞게 하였습니다. 후의를 받들 게 없어 문득 변변치 못한 물품을 써서 좌우에 음식을 올립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한의 장수는 성 안에 물이 있어서 재빨리 성을 빼앗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곧 답하여 말하기를, “우리 황제께서 신을 둔하다 하지 않으시고 영을 내려 군대를 출동시켜 대왕의 죄를 묻게 하셨는데, 국경에 다다른 지 열흘이 지나도록 요령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보내주신 〔글의〕 뜻을 들으니 말이 순리를 따르고 또 공손하여, 감히 핑계 대지 않고 황제께 알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병력을〕 이끌고 물러갔다.

 

 

매구곡 사람이 투항하다 ( 30년 07월 )

13년(30) 가을 7월에 매구곡(買溝谷) 사람 상수(尙須)가 그 동생 위수(尉須) 및 사촌 동생[堂弟] 우도(于刀) 등과 함께 투항해 왔다.

 

 

천둥이 쳤으나 눈은 오지 않다 ( 31년 11월 )

14년(31) 겨울 11월에 천둥이 쳤으나 눈은 오지 않았다.

 

 

탐학한 대신들을 축출하다 ( 32년 03월 )

15년(32) 봄 3월에 대신 구도(仇都)·일구(逸苟)·분구(焚求) 등 세 명을 내쳐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이 세 명은 비류부장(沸流部長)이 되었는데 바탕이 욕심이 많고 야비하여, 남의 처첩과 우마, 재화를 빼앗아 하고 싶은 바를 제멋대로 하며, 주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를 채찍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분하고 원망스러워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동명왕[東明]의 옛 신하들이라 차마 극형[極法]에 처하지 못하고 내쳤을 뿐이었다. 마침내 남부(南部) 사자(使者) 추발소(鄒㪍素)를 대신 부장으로 삼았다. 발소가 이윽고 부임하여 따로 큰 집을 짓고 거처하였는데, 구도 등을 죄인이라 당(堂)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구도 등이 〔추발소〕 앞에 이르러 고하여 말하기를, “저희들은 소인인 까닭에 왕께서 정하신 법[王法]을 범하여 부끄럽고 후회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공께서 잘못을 용서하여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해주신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발소가 그들을 끌어 올려 같이 앉아 말하기를, “사람이 잘못이 없을 수 없습니다. 잘못하여도 고칠 수 있다면 선(善)함이 매우 큰 것입니다.”라고 하고, 이에 그들과 더불어 친구가 되었다. 구도 등이 감격하고 부끄러워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왕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발소가 위엄을 쓰지 않고 지혜로 그릇된 일을 징계할 수 있었으니, 유능하다고 일컬을 만하다.”라고 하며 대실씨(大室氏)라는 성씨를 주었다.

 

 

낙랑국을 정벌하다 ( 32년 04월 )

〔15년(32)〕 여름 4월에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에 놀러 갔을 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나왔다가 그를 보고서 물어 말하기를, “그대의 낯빛을 보니 예사 사람이 아니오. 어찌 북국(北國)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최리가〕 마침내 함께 돌아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호동이 나라로 돌아와 몰래 사람을 보내 최씨의 딸에게 알려 말하기를, “만일 〔그대〕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수면, 내가 예로써 맞이할 것이요, 그렇지 않는다면 〔맞이하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어서 만약 적병이 있으면 저절로 소리가 났다. 그런 까닭에 이를 부수게 한 것이다. 이에 최씨의 딸이 예리한 칼을 가지고 몰래 창고 안에 들어가 북의 면(面)과 나팔의 주둥이를 쪼개고 호동에게 알렸다. 호동은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최리는 북과 나팔이 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대비하지 못하였다. 우리 병사가 엄습하여 성 아래에 다다른 연후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마침내 딸을 죽이고 나와 항복하였다.혹은 말하기를, “낙랑을 멸망시키고자 마침내 혼인을 청하여 그 딸을 맞이하여 아들의 처로 삼고, 후에 본국으로 돌아가 병장기를 파괴하게 하였다.”라고 한다 

 

 

왕자 호동이 자결하다 ( 32년 11월 )

〔15년(32)〕 겨울 11월에 왕자 호동이 자결하였다. 호동은 왕의 둘째 왕비인 갈사국왕[曷思王]의 손녀에게서 태어났다. 얼굴이 아름답고 고와 왕이 그를 매우 아꼈던 까닭에 호동이라 이름하였다. 첫째 왕비는 〔호동이〕 대를 이을 자리를 빼앗아 태자가 될까 두려워하여, 이에 왕에게 참소하여 말하기를, “호동이 저[妾]를 예로써 대하지 않으니 아마 〔저에게〕 음란한 짓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당신은 [호동이] 다른 사람의 아이라고 미워하는 것이오?”라고 하니, 왕비는 왕이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을 알고, 장차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아뢰어 말하기를, “청컨대 대왕께서 몰래 살펴보시고, 만일 이런 일이 없다면 제가 스스로 죄를 인정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왕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장차 죄를 주려고 하였다. 어떤 이가 호동에게 일러 말하기를, “당신께서는 어찌 스스로 해명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였다. 〔호동이〕 답하여 말하기를, “내가 만일 해명하면 이는 어머니의 그릇됨을 드러내어 왕께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효도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곧 칼 위에 엎어져 죽었다.

 

 

호동의 자결에 대한 사론

논하여 말한다. 지금 왕이 거짓으로 헐뜯는 말을 믿고 잘못이 없는 아끼는 아들을 죽였으니, 그 어질지 못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호동도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들이 그 아비에게 책망을 들을 때는 마땅히 순(舜)이 고수(瞽瞍)에게 한 것처럼 하여 작은 몽둥이면 맞고 큰 몽둥이면 달아나서, 아버지가 불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호동이 이렇게 나갈 줄 알지 못하여 죽을 자리가 아닌 데서 사망하였으니, 작은 일을 삼가는 데 잡혀 큰 도의에 어두웠다고 이를 만하다. 그것은 공자(公子) 신생(申生)의 일에 비유할 만한가.

 

 

왕자 해우를 태자로 삼다 ( 32년 12월 )

〔15년(32)〕 12월에 왕자 해우(解憂)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후한에 조공하니 광무제가 왕호를 회복시키다 ( 32년 12월 )

〔15년(32) 12월〕 사신을 한(漢)에 보내 조공하였다. 광무제(光武帝)가 그 왕호를 회복시켰다. 이때가 건무(建武) 8년이었다.

 

 

낙랑을 멸망시키다 ( 37년 )

20년(37)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우박이 내리다 ( 41년 03월 )

24년(41) 봄 3월에 경도(京都)에 우박이 내렸다.

 

 

서리가 곡식을 해치다 ( 41년 07월 )

〔24년(41)〕 가을 7월에 서리가 떨어져 곡식을 해쳤다.

 

 

매화가 피다 ( 41년 08월 )

〔24년(41)〕 8월에 매화가 피었다.

 

 

후한 광무제가 낙랑을 정벌하다 ( 44년 09월 )

27년(44) 가을 9월에 한나라의 광무제가 병력을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薩水) 이남이 한(漢)에 속하게 되었다.

 

 

왕이 죽으니 대무신왕이라 부르다 ( 44년 10월 )

〔27년(44)〕 겨울 10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대수촌(大獸村) 들판에 장사지내고 이름을 대무신왕이라 하였다.(2)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

 

대무신열제 20년(단기2370년. 37년)

열제께서 낙랑국을 기습하여 멸하셨다. 이리하여 동압록 이남이 우리에게 속하였으나 다만 해성 이남의 바다 가까이 있는 여러 성은 아직 항복시키지 못했다.(3)

 

 

 

대주류왕

 

단재 신채호선생은 광개토왕비문에 따라 '대무신왕'은 '대주류왕'으로 써야 한다고 보았다. 무(武)·주류(朱留)·무휼은 다 ‘무뢰’로 읽어야 한다. 이것은 우박 혹은 신(神)이란 뜻이라고 한다. 

 

추모왕에 이어 아들 유류왕이 등극하고, 유류왕에 이어 아들 대주류왕이 등극했다. 유류는 〈고구려 본기〉에 나오는 유리명왕()의 유리()다. 유류·유리(琉璃)·유리(類利)는 다 ‘누리’로 읽어야 하는데, 세(世)란 뜻이고 명(明)이란 뜻이다. 대주류왕은 〈고구려 본기〉의 대무신왕 무휼이다. 무(武)·주류(朱留)·무휼은 다 ‘무뢰’로 읽어야 한다. 이것은 우박 혹은 신(神)이란 뜻이다. 유리()와 명()을 시호로 이해해서 유리명왕이라고 하고 유리()를 이름으로 이해한 것은 〈고구려 본기〉의 잘못이다. 또 무()와 신()을 시호로 이해해서 대무신왕이라고 하고, 무휼을 이름으로 이해한 것 역시 〈고구려 본기〉의 잘못이다. 여기서는 광개토왕비문에 따라 유리()·대무신을 유류·대주류로 쓰기로 한다.』(4)

 

 

 

 남동부여와 북동부여

역사서에 나오는 갈사국은 남동부여이고, 동부여는 북동부여다. 《후한서》나 《삼국지》 등의 〈옥저 열전〉에 나오는 불내예(不耐濊)는 북동부여이고, 〈예(濊) 열전〉에 나오는 불내예는 남동부여다.』(5)

 

 

 

대주류왕의 낙랑 정복

 

이맥선생은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서 대무신열제 20년(서기 37년)에 낙랑국을 멸하셨다고 하였다.

 

대무신열제 20년(단기2370년. 37년)

열제께서 낙랑국을 기습하여 멸하셨다. 이리하여 동압록 이남이 우리에게 속하였으나 다만 해성 이남의 바다 가까이 있는 여러 성은 아직 항복시키지 못했다.(3)

 

단재 신채호선생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호동이 대주류왕 4년에 태어났는데 대주류왕 15년 11살에 낙랑국 왕 최리의 사위가 되고, 같은 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는 신라 말에 고구려사의 연대를 삭감하고 사실을 이리저리 옮겼기 때문에 생긴 모순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호동이 큰 공을 세우자, 왕후는 그가 태자가 될까봐 “호동이 나를 강간하려 했다”며 대주류왕에게 무고했다. 이 때문에 호동은 자살했다. 한 쌍의 선남선녀가 동일한 비극을 당한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대주류왕 4년 4월(21년 5월 1일~5월 30일_옮긴이)에 대소의 사촌동생이 갈사왕(남동부여왕)이 되었고, 대주류왕 즉위 15년 4월(32년 4월 29일~5월 28일_옮긴이)에 호동이 최리의 사위가 되었으며, 같은 해 11월(32년 12월 21일~33년 1월 19일_옮긴이)에 호동이 왕후의 참언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갈사왕이 있은 뒤에 대주류왕이 그 손녀와 결혼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런 뒤에 그 손녀가 호동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설령 대주류왕 4년 4월 즉 갈사국 건국 원년 4월에 대주류왕이 갈사왕의 손녀와 결혼했고 그 달에 태기가 있어 다음 해 정월에 호동을 낳았다 할지라도, 대주류왕 15년에 호동은 많아봤자 겨우 열한 살이다.

열한 살짜리가 어떻게 남의 서방이 되고 아내를 꾀어 일국을 멸망시킬 계획을 실행할 수 있으랴. 또 열한 살짜리가 어떻게 큰어머니 강간의 혐의로 부왕의 의심을 받아 자살까지 할 수 있으랴. 동부여는 원래 북갈사에 도읍을 두었으니, 여기 나오는 갈사왕이 분립 이전의 동부여왕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일은 대소왕 시대의 일이 된다. 대소왕이 대주류에게 딸을 주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위와 같은 모순이 생긴 것은, 신라 말에 고구려사의 연대를 삭감하고 사실을 이리저리 옮겼기 때문이다. 〈고구려 본기〉에서는 대주류왕 20년에 “낙랑을 쳐서 멸망시켰다”고 했다. 따라서 똑같은 낙랑을 이전에 멸망시켰을 리 없으므로, 호동의 결혼과 자살은 대주류왕 20년의 사건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까지 서술한 북부여·북동부여·고구려 삼국은 모두 신조선의 옛 땅에서 흥기한 나라들이다.(6)

 

 

 

[질문과 답변] 삼국사기 대무신왕조 15년,20년,27년조에 관해

https://youtu.be/NdUtW3KEmc8?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주>

 

(1) 광개토대왕릉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 삼국사기 < 한국 고대 사료 DB

 

(3)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561쪽~563쪽

 

(4)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위즈덤하우스, 169쪽-170쪽(《조선상고사》 제4편 열국쟁웅시대(중국과의 격전시대) 제2장 열국의 분립 2.고구려의 발흥 2) 동부여와 고구려의 알력)

 

(5)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시공사, 172쪽(《조선상고사》 제4편 열국쟁웅시대(중국과의 격전시대) 제2장 열국의 분립 2.고구려의 발흥 3) 대주류왕의 동부여 정복)

 

(6)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시공사, 173쪽~175쪽(《조선상고사》 제4편 열국쟁웅시대(중국과의 격전시대) 제2장 열국의 분립 2.고구려의 발흥 3) 대주류왕의 낙랑 정복)

 

 

 

<참고자료>

 

 

고구려에서 통일한국의 미래 찾는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윤명철.2008/05/04

 

 

우리 민족의 정체성 확립과 고구려 정신: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08/04/21

 

 

고구려는 중국을 지배한 '흉노의 선우':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8/04/02

 

 

[대담]우리에게 고구려는 무엇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08/03/21

 

 

'아시아의 대제국 고구려..' 사실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8/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