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고구려(7) 8대 신대제(新大帝, 신대왕, 165년-179년) 172년 11월 명림답부가 청야수성 전략으로 한나라 군대를 물리침. 본문
1. 고구려(7) 8대 신대제(新大帝, 신대왕, 165년-179년) 172년 11월 명림답부가 청야수성 전략으로 한나라 군대를 물리침.
대야발 2025. 11. 9. 17:34
《삼국사기》 권 제16고구려본기 제4 신대왕(新大王)
신대왕이 즉위하다 ( 165년 10월 )
신대왕(新大王)은 이름이 백고(伯固)고(固)는 구(句)로도 쓴다.이고, 태조대왕의 막내 동생이다. 용모가 영특하며 성품이 어질고 너그러웠다. 처음에 차대왕이 무도(無道)하여 신하와 백성이 따르지 않게 되자, 화란이 일어나 피해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산골짜기로 달아나 숨었다. 차대왕이 피살되기에 이르자 좌보(左輔) 어지류(菸支留)가 여러 신료[公]와 의논하여 사람을 보내 맞아들였다. 〔신대왕이〕 이르자 어지류가 무릎을 꿇고 국새(國璽)를 바치며 아뢰기를, “선왕이 불행하게도 나라를 버렸는데, 〔차대왕에게〕 비록 아들이 있지만 국가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무릇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어진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니, 삼가 절하며 머리를 조아려 왕위에 오르시기를 청하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는〕 엎드려 세 번을 사양한 다음 즉위하였다. 이때 나이가 77세였다.
신대왕이 사면령을 반포하다 ( 166년 01월 )
2년(166) 봄 정월에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 “과인은 외람되게도 왕의 친족으로 태어났지만 본디 임금으로서의 덕망이 없었다. 지난날 〔태조대왕께서〕 형제 사이에 우애 있는 정치를 부탁하였으나, 〔차대왕이〕 자손을 위해 물려준 계책을 자못 망가뜨렸다. 〔과인은〕 피해를 입을까 두렵고 안전하기가 어려워 여러 〔신료와 백성들을〕 떠나 멀리 도망해 숨었는데, 〔차대왕이 사망하였다는〕 흉흉한 소식을 듣기에 이르니 다만 마음이 꺾여 매우 슬플 뿐이었다. 어찌 백성들이 즐거이 받들고 여러 대신들이 즉위하라고 권할 줄 생각했겠는가? 그릇되게도 보잘것없는 몸으로 숭고한 자리에 있게 되니,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는 것이 깊은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도다. 마땅히 은덕을 베풀어 멀리 이르도록 하여 마침내 여러 사람과 더불어 스스로 새롭게 함으로써 나라 안에 대사면을 베풀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사면령을 듣고 환호하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기뻐하며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크시구나, 신대왕의 은덕이여!”라고 하였다.
처음 명림답부의 정변 때에 차대왕의 태자 추안(鄒安)이 도망하여 숨었다. 새 왕의 사면령을 듣고는 왕의 〔궁궐〕 문에 이르러 아뢰어 말하기를, “지난번 나라에 재화(災禍)가 있었을 때 신은 죽지도 못하고 산골짜기에 숨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정사를 듣고 감히 죄를 아룁니다. 만약 대왕께서 법에 따라 죄를 정하여 저잣거리[市朝]에 버려서 〔죽이시더라도〕 오직 명에 따르겠습니다. 혹시 죽이시지 않고 먼 곳으로 추방하신다면 죽은 자를 살려 백골에 살을 붙여주시는 은혜이니 〔이는〕 신이 원하는 바이지만 감히 바라지는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곧 〔그에게〕 구산뢰(狗山瀨)와 누두곡(婁豆谷) 두 곳을 하사하고 양국군(讓國君)에 봉하였다. 답부를 국상(國相)으로 삼고 작위를 올려 패자(沛者)로 삼고, 내외병마(內外兵馬)를 담당하고 아울러 양맥(梁貊) 부락을 통령하게 하였다. 좌·우보를 바꾸어 국상(國相)으로 삼은 것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졸본의 시조 사당에 제사지내다 ( 167년 09월 )
3년(167) 가을 9월에 왕이 졸본(卒本)에 가서 시조의 사당[始祖廟]에 제사를 지냈다.
도성으로 돌아오다 ( 167년 10월 )
〔3년(167)〕 겨울 10월에 왕이 졸본으로부터 〔도성에〕 도착하였다.
후한의 현도군에 속하기를 청하다 ( 168년 )
4년(168)에 한(漢)의 현도군(玄莬郡) 태수 경림(耿臨)이 침공해 와서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였다. 왕이 스스로 항복하여 현도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군사를 보내 공손탁의 부산적 토벌을 돕다 ( 169년 )
5년(169)에 왕이 대가(大加)인 우거(優居)와 주부(主簿)인 연인(然人) 등을 보내 병력을 이끌고 현도태수 공손탁(公孫度)을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토벌하였다.
명림답부가 청야수성 전략으로 한나라 군대를 물리치다 ( 172년 11월 )
8년(172) 겨울 11월에 한나라가 대규모 병력으로 우리나라로 쳐들어왔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은지 물었다. 많은 사람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한나라 군대는 〔병력이〕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가볍게 여기니,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는다면 저들은 우리가 무서워한다고 생각해 자주 침략해올 것입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는 이른바 ‘한 사람이 관문(關門)을 지키면 만 명도 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나라 군대가 비록 많지만 우리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니, 출병하여 저들을 방어하기를 청하옵니다.”라고 하였다. 명림답부(明臨答夫)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한(漢)은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아 지금 강력한 군대로 멀리 와서 싸우므로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 또 병력이 많으면 마땅히 싸워야 하고, 병력이 적으면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 병법[兵家]의 상식입니다. 지금 한나라 사람들은 1,000리나 군량을 옮겼기 때문에 오래 지탱하기 힘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해자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들판의 〔곡식을〕 비워놓고 저들을 기다린다면, 저들은 반드시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리고 곤궁해져서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날랜 병사로 저들을 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러하다고 여겨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한나라 사람들은 공격하였으나 이길 수 없고 병졸들이 굶주리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에 답부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저들을 추격하여 좌원(坐原) 에서 싸우니, 한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답부에게 좌원과 질산(質山)을 하사하여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신하들이 태자 책립을 청하다 ( 176년 01월 )
12년(176) 봄 정월에 여러 신하들이 태자를 책립하기를 청하였다.
왕자 남무를 태자로 삼다 ( 176년 03월 )
〔12년(176)〕 3월에 왕자 남무(男武)를 세워 왕태자로 삼았다.
일식이 일어나다 ( 178년 10월 )
14년(178) 겨울 10월 병자 그믐에 일식이 일어났다.
국상 명림답부가 사망하자, 신대왕이 친히 조문하다 ( 179년 09월 )
15년(179) 가을 9월에 국상인 명림답부가 사망하였는데, 나이가 113세였다. 왕이 친히 조문하며 애통해하였고, 조정에 나가는 것을 7일 동안 중단하였다. 이에 예를 갖추어 질산(質山)에 장사지내고, 묘지기[守墓] 20가(家)를 두었다.
신대왕이 사망하여 고국곡에 장사지내다 ( 179년 12월 )
〔15년(179)〕 겨울 12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고국곡(故國谷)에 장사지내고 이름을 신대왕이라 하였다.(1)
■ 국상과 패자
『차대왕을 죽인 명립답부는 차대왕 시대에 박해를 피해 산속에 숨어 있었던 백고(신대왕)를 왕으로 세웠다. 또 사면령을 내려 차대왕의 태자인 추안을 용서하고 양국군에 책봉하는 한편, 차대왕 때의 가혹한 형법을 폐지했다. 그러자 나라 사람들이 기꺼이 복종했다. '신가'가 되어 군국 대소사를 통할한 명립답부는 팔치와 발치를 겸직하고 예 · 양 같은 맥족의 부장들을 통솔했다. 그 위엄은 태조 때의 왕자 수성보다 더했다. 〈고구려본기〉에서는 "명림답부가 국상으로서 패자를 겸했다"고 하고, "좌 우보를 국상으로 바꾼 것이 이때가 시초였다"고 한다. 이것은 국상이 곧 신가라는 점, 패자가 팔치 즉 좌보라는 점을 모르고 건방지게 내린 해설이다.』(2)
■ 신대왕 4년(168년) 기사, 5년(169년) 기사, 8년(172년) 기사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신대왕 4년(168년) 기사에서는 "한나라 현도태수 경림이 침략하여 우리 병사 수백 명을 살상하자, 왕이 항복하고 현도에 복속하기를 청했다"고 했고, 5년(169년) 기사에서는 "왕이 주부인 연인과 대가인 우거를 보내 ...... 요동태수 공손탁을 도와 부산의 적을 치도록했다"고 했고, 8년(172년) 기사에서는 "한나라가 대군으로써 우리를 향하므로, ...... 명림답부가 좌원까지 추격하여 격파하고, 한나라 군대에서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고 했다. 여기서 앞의 두 가지는 《후한서》 및 《삼국지》에서, 뒤의 것은 우리나라의 《고기》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사략》에서는 "신대왕 5년에 한나라 현도태수 경림이 대군을 거느리고 침입하자 ...... 명림답부가 좌원에서 대파하여 ......"라고 했다. 이것은 《후한서》에서 "건령 2년(169년)에 현도태수 경림이 이 나라를 치고 수백 명의 머리를 베자, 백고가 항복하고 현도군에 복속하기를 청했다"고 한 것과 시기적으로 부합한다. 이것을 보면, 경림의 침략군이 명림답부에게 패배한 것이 명백하다.
그런데도 김부식은 이것을 두 개의 사실로 오인해서 앞의 것은 신대왕 4년 기사에, 뒤의 것은 신대왕 8년 기사에 넣었다. 《삼국지》에 따르면 공손탁은 한나라 헌제 때인 영평 원년에 비로소 요동태수가 되었다. 영평 원년은 서기 190년이며 신대왕 5년으로부터 약 20년 뒤다. 신대왕이 20년 뒤에 요동태수가 될 공손탁을 도울 수 없음이 명백한 데도, 시비를 가리지 못하는 김부식이 〈고구려본기〉 신대왕 편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 패주한 경림이 대첩을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또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공손탁을 신대왕의 종주국 군주로 기록했으니, 이런 점을 통해 중국 역사서에 조작이 많음을 알 수 있다. 《동국통감》에서는 현도태수 경림이 침략하다가 명림답부에게 패한 일을 신대왕 8년 때 사건으로 기록함으로써 《조선사략》의 기록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조선 왕조 초엽에는 《삼국사기》 외에 《삼한고기》 · 《해동고기》 등의 책들이 더러 있었다. 연도가 이렇게 차이를 보이는 것은, 고기들 간에 같은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2)
<자료출처>
(2)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241-243쪽(《조선상고사》 제5편(1) 고구려의 전성시대 제5장 차대왕의 피살과 명림답부의 집권 2. 명림답부의 집권과 외정)
<참고자료>
원수의 자식을 거둔 목도루-고구려 신대왕편 임동주 서울대 초빙교수: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9/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