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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1. 고구려(10) 11대 동천제(東川帝, 동양대제, 동천왕, 227년-248년) 238년 위나라를 도와 공손연을 토벌, 242년 서안평을 공격, 245년 10월 신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 246년 08월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쳐들어옴, 247년 02월 평양성으로 천도. 본문

여러나라시대/고구려(고려)

1. 고구려(10) 11대 동천제(東川帝, 동양대제, 동천왕, 227년-248년) 238년 위나라를 도와 공손연을 토벌, 242년 서안평을 공격, 245년 10월 신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 246년 08월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쳐들어옴, 247년 02월 평양성으로 천도.

대야발 2025. 11. 11. 17:56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동천왕(東川王) 

 

동천왕이 왕위에 오르다 ( 227년 05월 )

동천왕(東川王) 동양(東襄)이라고도 한다.은 이름이 우위거(憂位居)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교체(郊彘)로, 산상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주통촌(酒桶村) 사람으로 〔왕궁에〕 들어와 산상왕의 소후(小后)가 되었는데, 역사에 그 족성(族姓)이 전해지지 않는다. 선왕 17년(213)에 태자로 세워졌고 이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왕은 성품이 관대하고 인자하였다. 왕후가 왕의 심성을 시험해보고자 왕이 나가 놀기를 기다렸다가 사람을 시켜 왕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자르게 하였다. 왕이 돌아와 말하기를, “말이 갈기가 없으니 불쌍하구나.”라고 하였다. 또 시종을 시켜 식사를 올릴 때 일부러 왕의 옷에 국을 엎지르게 하였으나 역시 화를 내지 않았다.

 

 

졸본에 가서 시조 사당에 제사지내다 ( 228년 02월 )

2년(228) 봄 2월에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우씨를 왕태후로 삼다 ( 228년 03월 )

〔2년(228)〕 3월에 우씨(于氏)를 봉하여 왕태후로 삼았다.

 

 

명림어수를 국상으로 삼다 ( 230년 07월 )

4년(230) 가을 7월에 국상 고우루(高優婁)가 죽었으므로 우태(于台) 명림어수(明臨於漱)를 국상으로 삼았다.

 

 

위나라가 사신을 보내오다 ( 234년 )

8년(234)에 위(魏)가 사신을 보내 화친하였다.

 

 

태후 우씨가 사망하다 ( 234년 09월 )

〔8년(234)〕 가을 9월에 태후 우씨(于氏)가 죽었다. 태후가 숨이 끊어지려 할 때에 유언하기를, “내가 도의에 어그러진 행동을 하였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國壤)을 뵙겠는가? 만일 여러 신하들이 〔나를〕 차마 구렁텅이에 빠뜨리지 못하겠다고 여긴다면 나를 산상왕릉 옆에 장사지내주기 바라오.”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말대로 장사지냈다. 무당[巫者]이 말하기를, “국양왕이 저에게 내려와서 말씀하기를,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분하고 화가 나는 것을 이기지 못해 결국 그와 싸웠다. 돌아와 생각해보니 얼굴이 두꺼워도 차마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없다. 네가 조정에 알려 물건으로 나를 가리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능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다.

 

 

오나라가 보낸 사신을 참수하여 위나라에 보내다 ( 236년 02월 )

10년(236) 봄 2월에 오(吳)나라 왕 손권(孫權)이 사신 호위(胡衛)를 보내 사이좋게 지내기를 청하였다. 왕은 그 사신을 잡아두었다가 가을 7월에 이르러 목을 베어 머리를 위(魏)에 보냈다.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 237년 )

11년(237)에 위(魏)에 사신을 보내 연호를 바꾼 것을 축하하였다. 이 해가 경초(景初) 원년이다.

 

 

위나라를 도와 공손연을 토벌하다 ( 238년 )

12년(238) 위(魏)의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니 왕이 주부(主簿)와 대가(大加)를 보내 병사 1,000명을 거느리고 이를 돕게 하였다.

 

 

서안평을 공격하다 ( 242년 )

16년(242)에 왕이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연불을 태자로 삼다 ( 243년 )

17년(243) 봄 정월에 왕자 연불(然弗)을 세워 왕태자로 삼고, 나라 안에 사면을 베풀었다.

 

 

동해인이 미녀를 바치다 ( 245년 03월 )

19년(245) 봄 3월에 동해(東海) 사람이 미녀를 바치므로 왕이 그를 후궁으로 받아들였다.

 

 

신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다 ( 245년 10월 )

〔19년(245)〕 겨울 10월에 군사를 내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위나라 관구검이 쳐들어오다 ( 246년 08월 )

20년(246) 가을 8월에 위(魏)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10,000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로부터 침략해왔다. 왕이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거느리고 비류수에서 싸워 패배시키니 베어버린 머리가 3천여 급(級)이었다. 또 병력을 이끌고 다시 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 싸워 또 패배시켰는데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것이 3천여 명이었다. 왕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위(魏)의 대병력이 도리어 우리의 적은 병력보다 못하고, 관구검이란 자는 위(魏)의 명장이지만 오늘은 목숨이 내 손안에 있구나.”라고 하고, 철기(鐵騎) 5,000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다. 관구검이 방진(方陣)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므로 우리 군사가 크게 궤멸하여 죽은 자가 1만 8천여 명이었다. 왕이 기병 1천여 기(騎)를 거느리고 압록원(鴨淥原)으로 달아났다.

 

 

밀우와 유유가 동천왕을 지키다 ( 246년 10월 )

〔20년(246)〕 겨울 10월에 관구검이 환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성 안을 도륙하였으며 장군 왕기(王頎)를 보내 왕을 추격하였다. 왕이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는데, 군사들은 흩어져 거의 다 없어지고, 오직 동부(東部)의 밀우(密友)만이 홀로 옆을 지키고 있다가 왕에게 말하기를, “지금 추격해오는 적병이 가까이 닥쳐오니, 이 형세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신이 결사적으로 막을 것이니 왕께서는 달아나소서.”라고 하였다. 마침내 결사대[死士]를 모아 그들과 함께 적진으로 가서 힘껏 싸웠다. 왕이 샛길로 달아나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군졸을 모아 스스로 방비하면서 말하기를, “밀우를 데려오는 사람에게는 후하게 상을 주겠다.”라고 하였다. 하부(下部)의 유옥구(劉屋句)가 앞으로 나아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이 가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전투가 벌어진 곳에 밀우가 땅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곧 업고 돌아왔다. 왕이 그를 무릎에 눕혔더니 한참 만에 깨어났다.

 

왕이 샛길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남옥저에 이르렀으나 위군(魏軍)은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이 계책이 궁하고 기세가 꺾이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동부 사람 유유(紐由)가 나서서 말하기를, “형세가 매우 위태롭고 급박하나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략이 있습니다. 청컨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나라 군사에게 대접하면서 틈을 엿보아 저들의 장수를 찔러 죽이겠습니다. 만일 신의 계략이 성공하면, 왕께서는 힘껏 공격하여 반드시 승리를 거두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유유가 위군에 들어가 거짓으로 항복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寡君]이 큰 나라에 죄를 얻고 도망쳐 바닷가에 이르렀는데 몸 둘 땅이 없어서 장차 진영 앞에서 항복을 청하고 죽음을 사구(司寇)에게 맡기려고 하는데, 먼저 소신(小臣)을 보내 변변치 못한 물건이라도 드려 부하들의 음식 거리나 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위(魏)의 장수가 이 말을 듣고 그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유유가 식기에 칼을 감추고 앞으로 나아가 칼을 빼서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으니, 위군이 마침내 혼란해졌다. 왕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빠르게 이들을 공격하니, 위군이 어지러워져서 싸우지 못하고 드디어 낙랑(樂浪)에서 퇴각하였다.

 

왕이 나라를 회복하고 공을 논하는데, 밀우와 유유를 제일(第一)로 삼았다. 밀우에게 거곡(巨谷)과 청목곡(靑木谷)을 주고, 유옥구에게 압록두눌하원(鴨淥杜訥河原)을 주어 식읍으로 삼게 했다. 유유를 추증하여 구사자(九使者)로 삼고, 그의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이 싸움에서 위(魏)의 장수가 숙신(肅愼)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그 공을 돌에 새기고, 또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을 새기고 돌아갔다.

 

처음에 신하 득래(得來)는 왕이 중국을 침략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여러 차례 간언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득래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땅에 장차 쑥이 나는 것을 보리라.”라고 하고 마침내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 관구검이 모든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그의 무덤을 허물지 말고, 〔무덤 주변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의 처와 자식을 포로로 잡았으나 모두 놓아서 보내주었다.

 

『괄지지(括地志)』에는 “불내성이 곧 국내성이다. 성을 돌로 쌓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이런 즉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가까이 접하였을 것이다. 『양서(梁書)』에는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을 토벌하자 왕이 장수를 보내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였는데 관구검이 침략해왔다.”라고 하였다. 『통감(通鑑)』에는 “득래가 왕에게 시정을 건의한 것은 왕 위궁(位宮) 때의 일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잘못이다.

 

 

평양성을 쌓고 종묘와 사직을 옮기다 ( 247년 02월 )

21년(247) 봄 2월에 왕이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라고 하였다.

 

 

신라와 화친을 맺다 ( 248년 02월 )

22년(248) 봄 2월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

 

 

동천왕이 사망하다. ( 248년 09월 )

〔22년(248)〕 가을 9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원(柴原)에 장사지냈다. 이름을 동천왕이라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왕의 은덕을 생각하여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가까운 신하로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따라 죽으려고 하는 자가 많았으나, 새 왕이 예(禮)가 아니라 하여 이를 금하였다. 장례일에 이르러 무덤에 와서 스스로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잡목[柴]을 베어 그 시체를 덮었으므로, 마침내 그 땅의 이름을 시원(柴原)이라 하였다.(1)

 

 

 

《태백일사》 고구려본기

 

평양 모란봉 중턱에 동천제가 하늘에 기원하던 조천석이 있고, 삭주 거문산 서쪽 기슭에 을파소 묘가 있고, 운산의 구봉산에 연개소문 묘가 있다.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동천제를 단군이라고도 하였다. 해마다 한맹 때가 되면 평양에서 삼신을 맞이하는 천제를 올렸다. 지금의 기림굴은 천제를 올리던 곳이다.

 

삼신을 크게 맞이하는 대영제전은 처음 동굴에서 행해졌다. 거기에 구제궁 조천석이 있는데, 길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었다. 또 삼륜구덕의 노래가 있어 이를 부르도록 장려하였다.

조의선인은 모두 선발된 사람인데, 사람들이 삼가 본보기로 삼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그들에게 영광을 더하여 왕의 사자와 동등하게 여겼겠는가?(2)

 

 

평양 모란봉

 

이맥선생은 평양 모란봉 중턱에 동천제가 하늘에 기원하던 조천석이 있다고 하였다.

 

평양 모란봉 중턱에 동천제가 하늘에 기원하던 조천석이 있고, 삭주 거문산 서쪽 기슭에 을파소 묘가 있고, 운산의 구봉산에 연개소문 묘가 있다.』(2)

 

 

 

 

《조선상고사》

 

 

고구려의 위나라 토벌과 서안평의 함락

 

 

서기 237년에 동천왕은 신가인 명림어수와 일치인 착자 · 대고 등을 보내 수만 병력을 거느리고 양수에 가서 공손연을 치도록 했다. 이때 위나라는 유주자사인 관구검에게 명령하여 역시 수만 병력을 거느리고 요하로 가도록 했다. 그러자 공손연은 곽흔 · 류포 등을 보내 고구려를 막고 비연 · 양조 등을 보내 위나라를 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위나라 군대가 패퇴하자 공손연은 연왕으로 자처하고 천자의 위엄을 갖추며 전력을 다해 고구려를 막았다.

 

이듬해에 위나라는 태위인 사마의에게 10만 병력을 지휘하도록 명령했다. 관구검이 요대를 쳐서 공손연의 수비 책임자인 비연 · 양조 등을 상대하는 사이에, 사마의는 북쪽으로 몰래 진군하여 공손연의 도읍인 챵평을 기습적으로 포위했다. 공손연의 정예 병력이 고구려를 방어하기 위해 죄다 양수에 나간 뒤라 양평이 텅 비어 있었을 때였다. 비연 등이 돌아와서 구원하려 했지만 대패했다. 성안에 포위되어 30여 일간 굶주린 공손연은 겹겹의 포위를 정면 돌파하려다가 붙들려서 참수를 당했다. 이렇게 해서 공손씨는 요동에 웅거한 지 3대 50년 만에 멸망했다.

 

이렇게 위나라가 공손씨를 손쉽게 멸망시킨 것은 고구려가 공손연의 후방을 견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삼국지》 〈동이 열전〉에는 "태위 사마선왕(사마의)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을 토벌하고, 위궁(산상왕)은 주부 대가를 파견하여 수천 명의 군사로 그의 군대를 돕도록 했다"고 적혀 있을 뿐이다. 〈명제 본기〉나 〈공손탁 열전〉에는 이에 관한 내용이 한 글자도 나오지 않는다. 이는 상내약외라는 중국 역사가들 특유의 필법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위나라가 사마선왕을 보내 공손연을 토벌하자, 왕은 주부 대가가 1천 명을 거느리고 그의 군대를 돕도록 했다"고 했다. 사마의를 사마선왕으로 부른 것을 보면, 이 기록이 《삼국지》 〈동이 열전〉을 그대로 베껴 쓴 것이 명백하다. 그런데 '수천 명'을 '1천 명'으로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와 그들의 역사에 관한 기록을 참고하여 이 문제를 위와 같이 정리하고자 한다.

 

위나라는 공손연을 멸망시키고 요동 전부를 굴복시킨 뒤, 고구려와의 맹약을 어기고 땅 한 덩이리도 고구려에 돌리지 않았다. 분노한 동천왕은 자주 병력을 동원하여 위나라를 토벌하고 서안평을 함락했다. 종래의 역사 기록에서는 압록강이 바다와 연결되는 입구에 서안평이 있었다고 했다. 이것은 《한서》 〈지리지〉에 근거한 것이다. 공손연의 전성기에 고구려와 오나라 · 위나라의 교류가 서안평을 통해 해로로 이루어졌으니, 이때의 서안평은 양수 부근이라고 봐야 한다. 고대의 지명은 다른 데로 옮겨지는 경우가 많았다.(3)

 

 

 

 관구검의 침입과 제2환도성(지금의 안고성) 함락

 

 

서기 245년, 동천왕의 잦은 침략에 불안을 느낀 위나라는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수만 병력을 거느리고 침입하도록 했다. 동천왕은 비류수에서 응전하여 관구검의 부대를 대파하고 3천여 병력을 벤 뒤, 양맥곡까지 추격하여 또다시 3천여 명을 베었다. 왕은 "위나라의 대군이 우리의 소수 병력만 못하다"며, 여러 장수들더러 후방에서 관전하도록 한 다음에, 자신이 몸소 철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진격했다. 우리 병력이 소수임을 보고 관구검 등이 죽도록 혈전하면서 계속 전진하자, 왕의 군대가 퇴각하니 후방 병력은 놀라 무너져 결국 참패했는데, 부상자가 1만 8천명이나 됐다.

 

왕이 천여 명의 기병과 함께 압록원으로 달아나자, 관구검은 환도성에 들어가 궁궐과 민가를 불사르고 파괴한 뒤 역대 문헌을 실어 위나라로 보냈다. 관구검은 장군인 왕기에게 왕을 추격하도록 했다. 왕이 죽령에 이르렀을 때에, 장수들은 다 흩어지고 오직 동부의 밀우만 왕을 호위했다. 추격병이 쫓아오고 형세가 위급해지자, 밀우는 결사대를 뽑아 위나라 군대와 싸웠다. 그 틈을 탕 왕은 산골짜기로 도망해서 흩어진 아군 병사들을 모아 험한 곳에서 수비했다. 그런 뒤 군중에 "밀우를 살려서 데려오는 자에게는 큰 상을 주겠다"는 영을 내렸다, 그러자 남부의 유옥구가 이 영에 따라 전장으로 나가, 땅에 엎어져 기진맥지하고 있는 밀우를 업고 돌아왔다. 왕은 다리 살을 베어 밀우에게 먹였다. 밀우는 한참 뒤에 깨어났다. 이에 왕은 밀우 등과 함께 남갈사로 달아났다.

 

위나라 군대의 추격은 쉼 없이 계속됐다. 북부의 유유는 "이렇게 국가의 흥망이 달린 판국에는 모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위기를 피할 수 없다"면서 음식을 들고 위나라 군영에 들어가 거짓 항복문서를 바쳤다. 그는 "저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바닷가로 쫓겨나 더는 갈 곳이 없어서 항복을 청하고자 합니다. 많지는 않지만 토산물을 군영에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유유는 위나라 장수와 접견하는 틈을 타서 식기 속에 감춘 칼을 빼내 위나라 장수를 찔러 죽였다. 이후 동천왕은 위나라 군대를 추격하라고 장수들에게 명령했다. 산산이 흩어진 위나라 군대는 다시는 전열을 이루지 못하고 요동의 낙랑으로 퇴주했다.

 

이 전쟁에 대한 기사는 김부식이 《삼국지》 및 《고기》의 여기저기서 발훼하여 〈고구려 본기〉에 넣은 것이기 때문에, 앞뒤 기사가 상호 모순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관구검이 1만 병력으로 고구려를 침입했다"고 하고 "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으로 응전했다"고 했다. 이것은 고구려 군대가 위나라 군대보다 갑절이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위나라의 대군이 우리의 소수 병력만 못하다"고 한 것은 무슨 말인가? 또 비류수에서 위나라 군사 3천여 명을 베고 양맥곡에서 위나라 군사 3천여 명을 또베었다는 것은, 1만 명의 위나라 군대가 6천여 명의 전사자를 냈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되면 위나라 군대가 다시 전열을 정비할 수 없었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되면 위나라 군대가 다시 전열을 정비할 수 없었을 텐데, "왕이 철기병 5천 명으로 추격하다가 대패했다"고 한 것은 무슨 말인가? 《삼국지》 〈관구검 열전〉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에 "논공행상을 시행하니, 제후에 책봉된 자가 1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로써, 출정한 군대의 숫자와 전쟁이 규모를 추정할 수 있다. 어찌 고작 1만 명만 보냈겠는가. 중국 역사학계의 상내약외 원칙을 지키고자 이 정도로 축소해서 기록한 것이다.

 

〈고구려 본기〉에서는 이 전쟁이 동천왕 20년(서기 245년)에 벌어졌다고 했다. 동천왕 20년은 위나라 제3대 황제 조방 때인 정시 8년이다. 《삼국지》 〈관구검 열전〉에서는"정시 연간에 ...... 현도군을 출발하여 고구려를 쳤으며, ...... 정시 6년에 다시 정복했다"고 했다. 《해동역사》에는 정시 5년 및 6년은 각각 동천왕 18년과 19년이다. 그러나 《삼국지》 본기에서는 정시 7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쳤다"고 했다. 이것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일치한다. 어느 쪽을 따라야 할까?』(4)

 

 

 

 

제2환도성 파괴 후 평양으로 천도

 

단재 신채호선생은 제2환도성 파괴때문에 지금의 대동강 위쪽에 있는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보았다.

 

제2환도성이 파괴되자, 동천왕이 품은 서북 정벌의 웅지는 차디찬 재로 변했다. 그래서 지금의 대동강 위쪽에 있는 평양으로 천도했으니, 이것이 고구려 남진의 시초다. 평양 천도 이후 두 가지 상황이 변했다.

 

종전에 남낙랑에 속한 소국들은 고구려에 복속하기는 했지만, 대주류왕이 최씨를 멸망시킨 데 대한 원한 때문에 복속과 배반을 되풀이했다. 그런데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가 되고 제왕의 거처와 군대의 본영이 이곳에 모이게 되자, 소국들은 기세가 눌려 점차 복속 쪽으로 기울었다.

 

평양 천도 이전에 고구려는 항상 서북쪽으로 전진하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흉노나 중국 등과의 충돌이 잦았다. 그런데 평양 천도 이후에는 백제 · 신라 · 가라 등과 접촉하게 되어, 북방보다는 남방과의 충돌이 많아졌다. 고구려가 서북쪽의 나라가 되지 않고 동남쪽의 나라가 된 것은 평야 천도에 기인한 것이다. 평양 천도는 제2환도성 파괴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2환도성의 파괴는 고대사에서 매우 특별한 대사건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5)

 

 

 

<주>

 

 

(1) 삼국사기 < 한국 고대 사료 DB

 

(2)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567쪽

 

(3)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251~257쪽(《조선상고사》 제5편(2) 고구려의 중쇠와 북부여의 멸망 제1장 고구려의 대 중국 패전 1. 발기의 반란과 제1환도성(지금의 개평)의 파괴 2. 동천왕의 제1환도성 회복(오 · 위 통지의 전말) 3. 공손연의 멸망과 고구려 · 위나라 양국의 충돌)

 

 

(4)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257~260쪽(《조선상고사》 제5편(2) 고구려의 중쇠와 북부여의 멸망 제1장 고구려의 대 중국 패전 4. 관구검의 침입과 제2환도성(지금의 안고성) 함락

 

 

(5)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260~261쪽(《조선상고사》 제5편(2) 고구려의 중쇠와 북부여의 멸망 제1장 고구려의 대 중국 패전 5. 제2환도성 파괴 후 평양으로 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