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고구려(11) 12대 중천대제(중천왕, 248년-270년), 13대 서천대제(서천왕, 270-292년) 280년 10월 달가가 숙신을 정벌 본문
1. 고구려(11) 12대 중천대제(중천왕, 248년-270년), 13대 서천대제(서천왕, 270-292년) 280년 10월 달가가 숙신을 정벌
대야발 2025. 11. 12. 16:35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중천왕(中川王)
중천왕이 즉위하다 ( 248년 09월 )
중천왕(中川王) 중양(中壤)이라고도 한다.은 이름이 연불(然弗)이고 동천왕의 아들이다. 외모가 준수하고 뛰어나며 지략이 있었다. 동천왕 17년(243)에 왕태자로 세워졌고, 22년(248) 가을 9월에 왕이 서거하니 태자가 즉위하였다.
연씨를 왕후로 삼다 ( 248년 10월 )
〔원년(248)〕 겨울 10월에 연씨(椽氏)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
중천왕의 동생들이 모반을 하다 ( 248년 11월 )
〔원년(248)〕 11월에 왕의 동생인 예물(預物)과 사구(奢句) 등이 반역을 도모하였다가 형벌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명림어수에게 병마의 일을 겸하게 하다 ( 250년 02월 )
3년(250) 봄 2월에 왕이 상(相) 명림어수(明臨於漱)에게 명하여 내외의 병마(兵馬) 업무를 겸하여 맡아보게 하였다.
관나부인을 바다에 던지다 ( 251년 04월 )
4년(251) 여름 4월에 왕이 관나부인(貫那夫人)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서해(西海)에 던져버렸다. 관나부인은 얼굴이 매우 아름답고 고우며 머리카락 길이가 9척이나 되었는데, 왕이 그를 사랑하여 장차 소후(小后)로 세우려 하였다. 왕후 연씨는 그녀가 왕의 총애를 독차지할 것을 두려워하여 왕에게 말하기를, “제가 듣건대 서쪽의 위(魏)가 장발(長髮)을 구하는데 천금을 주고 산다고 합니다. 예전에 우리 선왕이 중국에 예물을 보내지 않아서 전란을 당하고 달아나 사직을 거의 잃을 뻔했습니다. 지금 왕께서 저들이 바라는 바에 따라 사신 한 명을 보내 장발의 미인을 바친다면, 저들은 필시 흔쾌히 받아들이고 다시 침략해오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뜻을 알고 묵묵히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부인이 그 말을 듣고 그 해(害)가 가해질 것을 두려워하여 도리어 왕에게 왕후를 참소하여 말하기를, “왕후가 늘 저를 욕하며 말하기를, ‘시골 여자[田舎之女]가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느냐! 만일 스스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생각해보건대 왕후가 대왕의 출타를 틈타 저에게 해를 가하려고 하는 것이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후에 왕이 기구(箕丘)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니, 부인이 가죽 주머니를 들고 〔왕을〕 맞이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왕후가 저를 여기에 넣어 바다에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저의 미천한 목숨에 은혜를 베푸셔서 집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어찌 감히 다시 〔대왕의〕 곁에서 모시기를 바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은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화가 나 부인에게 일러 말하기를, “네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고 싶구나?”라고 하고, 사람을 시켜 그를 던져버렸다.
명림어수가 죽어 음우로 국상을 삼다 ( 254년 04월 )
7년(254) 여름 4월에 국상 명림어수(明臨於漱)가 죽어 비류(沸流) 패자(沛者) 음우(陰友)를 국상으로 삼았다.
지진이 일어나다 ( 254년 07월 )
〔7년(254)〕 가을 7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약로를 왕태자로 삼다 ( 255년 )
8년(255)에 왕자 약로(藥盧)를 세워 왕태자로 삼고 나라 안에 사면을 행하였다.
연나 명림홀도를 부마도위로 삼다 ( 256년 11월 )
9년(256) 겨울 11월에 연나(椽那) 명림홀도(明臨笏覩)를 공주에게 장가들여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삼았다.
눈이 오지 않고 큰 전염병이 돌다 ( 256년 12월 )
〔9년(256)〕 12월에 눈이 오지 않고 큰 전염병이 돌았다.
두눌 골짜기에서 사냥을 하고, 위나라의 침공을 양맥 골짜기에서 물리치다 ( 259년 12월 )
12년(259) 겨울 12월에 왕이 두눌(杜訥) 골짜기에서 사냥을 하였다. 위(魏)의 장수 위지해(尉遲楷) 이름이 장릉(長陵)의 이름을 범하였다.가 병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왕이 정예 기병 5,000명을 선발하여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싸워서 이를 물리쳤는데, 베어버린 머리가 8천여 급이었다.
졸본에 가서 시조 사당에 제사지내다 ( 260년 09월 )
13년(260) 가을 9월에 왕이 졸본으로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기구에서 사냥하다 ( 262년 07월 )
15년(262) 가을 7월에 왕이 기구(箕丘)에서 사냥을 하다가 흰 노루를 잡았다.
천둥이 치고 지진이 일어나다 ( 262년 11월 )
〔15년(262)〕 겨울 11월에 천둥이 치고 지진이 일어났다.
중천왕이 사망하다 ( 270년 10월 )
23년(270) 겨울 10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중천(中川)의 들에 장사지내고 이름을 중천왕이라 하였다.(1)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서천왕(西川王)
서천왕이 즉위하다 ( 270년 10월 )
서천왕(西川王) 서양(西壤)이라고도 한다.은 이름이 약로(藥盧)약우(若友)라고도 한다.이고 중천왕의 둘째 아들이다. 성품이 총명하고 인자하여 나라 사람들이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중천왕 8년(255)에 태자로 세워졌고, 23년(270) 겨울 10월에 왕이 돌아가셔서 태자가 즉위하였다.
우수의 딸을 왕후로 삼다 ( 271년 01월 )
2년(271) 봄 정월에 서부 대사자 우수(于漱)의 딸을 왕후로 삼았다.
국상 음우가 사망하다 ( 271년 07월 )
〔2년(271)〕 가을 7월에 국상 음우(陰友)가 죽었다.
상루를 국상으로 삼다 ( 271년 09월 )
〔2년(271)〕 9월에 상루(尙婁)를 국상으로 삼았다. 상루는 음우의 아들이다.
지진이 일어나다 ( 271년 12월 )
〔2년(271)〕 겨울 12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서리가 내리다 ( 272년 04월 )
3년(272)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크게 가물다 ( 272년 06월 )
〔3년(272)〕 6월에 크게 가물었다.
일식이 일어나다 ( 273년 07월 01일 )
4년(273) 가을 7월 정유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백성을 구제하다 ( 273년 07월 )
〔4년(273)〕 백성이 굶주려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신성에 사냥을 가다 ( 276년 04월 )
7년(276) 여름 4월에 왕이 신성(新城) 신성은 나라 동북의 큰 진(鎭)이라고도 한다.에 가서 사냥하다가 흰 사슴을 잡았다.
신성에서 돌아오다 ( 276년 08월 )
〔7년(276)〕 가을 8월에 왕이 신성(新城)에서 돌아왔다.
신작이 모이다 ( 276년 09월 )
〔7년(276)〕 9월에 신작(神雀)들이 궁궐 뜰에 모여들었다.
달가가 숙신을 정벌하다 ( 280년 10월 )
11년(280) 겨울 10월에 숙신(肅愼)이 침략해 와서 변경의 백성을 살해하니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과인이 보잘것없는 몸으로 나라의 일을 잘못 이어받아 덕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을 떨치지 못하여 이웃의 적이 우리 강역을 어지럽히는 데 이르렀다. 지략이 있는 신하와 용맹한 장수를 얻어 적을 멀리 쳐서 깨뜨리고 싶으니, 그대들은 뛰어난 지략과 특이한 계략이 있어 장수가 될 만한 재주가 있는 자를 각기 천거하라.”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왕의 동생 달가(達賈)가 용감하고 지략이 있어 감히 대장(大將)으로 삼을 만합니다.” 하였다. 왕이 이에 달가를 보내 가서 적을 치게 하였다. 달가는 뛰어난 지략으로 불의에 쳐서 단로성(檀盧城)을 빼앗고 추장을 죽였으며, 6백여 가(家)를 부여 남쪽의 오천(烏川)으로 옮기고, 부락 6~7곳에서 항복을 받아 부용(附庸)으로 삼았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달가를 안국군(安國君)으로 삼고 내외의 병마 업무를 맡아보게 하고 겸하여 양맥과 숙신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게 하였다.
서천왕의 동생들이 반역을 꾀하다 ( 286년 02월 )
17년(286) 봄 2월에 왕의 동생 일우(逸友)와 소발(素勃) 등 두 사람이 반역을 꾀하였다. 병을 사칭하고 온탕으로 가서 자기 무리들과 놀고 즐기는데 절제가 없으며 나오는 말은 도리에 어긋나고 불순하였다. 왕이 거짓으로 재상[相]의 벼슬을 내린다고 그들을 부른 후, 그들이 오자 힘센 장사로 하여금 잡아서 죽이게 하였다.
신성에 행차하다 ( 288년 04월 )
19년(288) 여름 4월에 왕이 신성에 행차하였다. 해곡(海谷) 태수가 고래의 눈[鯨魚目]을 바쳤는데 밤에 빛이 났다.
사냥을 가다 ( 288년 08월 )
〔19년(288)〕 가을 8월에 왕이 동쪽으로 사냥을 나가서 흰 사슴을 잡았다.
지진이 일어나다 ( 288년 09월 )
〔19년(288)〕 9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신성에서 돌아오다 ( 288년 11월 )
〔19년(288)〕 겨울 11월에 왕이 신성(新城)에서 돌아왔다.
서천왕이 사망하다 ( 292년 )
23년(292) 왕이 서거하였다. 서천(西川)의 들에 장사지내고 이름을 서천왕이라 하였다.(2)
■ 고구려의 예족 진압과 명장 달가의 참혹한 죽음
단재 신채호선생은 〈고구려 본기〉의 숙신은 예족이라고 보았다.
『선비족이 북부여에 침입하기 6년 전인 서기 280년, 고구려에서는 예족(〈고구려 본기〉의 숙신)의 반란이 있었다. 예족은 본래 수렵에 종사하는 야만족이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북부여에 복속했다가, 북부여가 조세를 과중하게 거둔다는 이유로 배반하고 고구려에 붙었지만, 고구려가 요동을 잃고 쇠약해지자 반란을 일으키고 국경을 침입했다. 이로 인한 인민의 사상과 가축의 상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를 크게 걱정한 서천왕이 장군감을 구하자, 많은 신하들이 왕제인 달가를 추천했다. 달가는 절묘한 계략으로 예족의 소굴을 습격하여 추장과 600여 호를 포로로 잡아 부여 남쪽인 오천에 옮기고 각각의 부락을 복속시켰다. 그러자 서천왕은 달가를 안국군에 책봉했다.
서천왕이 주고 아들 봉상왕이 즉위했다. 그는 천성적으로 시기심과 의심이 많았다. 달가가 항렬로는 왕의 숙부이지만 전국적인 명성이 대단하기 때문에, 죄목을 만들어 그를 사형에 처했다.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며 "안국군이 아니면 우리는 예맥의 반란 때 이미 죽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3)
<주>
(1)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17r_0030_0010
(2)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17r_0040_0010
(3)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265~266쪽(《조선상고사》 제5편(2) 고구려의 중쇠와 북부여의 멸망 제2장 고구려와 선비족의 전쟁 1. 선비족 모용씨의 강성 2. 북부여의 멸망과 의려왕의 자살 3. 고구려의 예족 진압과 명장 달가의 참혹한 죽음)
<참고자료>
고구려판 장희빈과 중천태왕의 사냥터 (1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15/02/23
중천태왕이 후궁을 던져 죽인 西河는 어디인가? (2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15/03/11
뜨거운 사랑을 나눈 고구리 중천태왕과 신라 김옥모 태후 (3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15/03/30
고구리 중천태왕의 황후가 된 신라 태후 김옥모 (4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15/04/17
김씨가 처음으로 신라에서 왕이 된 이유는? (5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15/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