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고구려(13) 15대 미천대제(미천왕, 300년-331년) 302년 09월 현도군 침략, 311년 08월 서안평 점령, 313년 10월 낙랑군 침략, 314년 09월 대방군 침략, 315년 02월 현도성 점령, 320년 12월 요동 침공. 본문
1. 고구려(13) 15대 미천대제(미천왕, 300년-331년) 302년 09월 현도군 침략, 311년 08월 서안평 점령, 313년 10월 낙랑군 침략, 314년 09월 대방군 침략, 315년 02월 현도성 점령, 320년 12월 요동 침공.
대야발 2025. 11. 15. 15:26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미천왕(美川王)
미천왕, 왕위에 오르기 전에 도망하여 곤궁하게 지내다 ( 300년 08월 )
미천왕(美川王)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한다은 이름이 을불(乙弗) 우불(憂弗)이라고도 한다.이고 서천왕의 아들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咄固)의 아들이다. 앞서 봉상왕이 동생 돌고가 다른 마음이 있다고 의심하여 그를 죽이니, 아들 을불은 해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처음에 수실촌(水室村) 사람 음모(陰牟)의 집에 가서 고용살이를 하였다. 음모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매우 고되게 부렸다. 그 집 옆의 연못에 개구리가 울면, 을불을 시켜 밤에 기와나 돌을 던져 그 소리를 못 내게 하고, 낮에는 그를 독촉하여 땔나무를 해오게 하여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하였다. 〔을불은〕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1년 만에 그 집을 떠나, 동촌(東村) 사람 재모(再牟)와 함께 소금 장사를 하였다. 배를 타고 압록(鴨渌)에 이르러 소금을 내려놓고 강 동쪽 사수촌(思收村) 사람의 집에 머물렀다. 그 집의 할멈이 소금을 달라고 하므로 한 말 정도 주었다. 재차 달라고 하여 주지 않았더니, 그 할멈이 원망스럽고 성이 나서 소금 속에 몰래 신을 넣어 두었다. 을불은 알지 못하고 짐을 지고 길을 떠났는데, 할멈이 쫓아와 신을 찾아내고는 신을 숨겼다고 꾸며서 압록재(鴨淥宰)에게 고소하였다. 압록재는 신 값으로 소금을 빼앗아 할멈에게 주고 태형(笞刑)을 가하고 놓아주었다. 이에 용모가 마르고 여위었으며 의복이 남루하여 사람들이 그를 보고도 그가 왕손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이때 국상 창조리가 장차 왕을 폐하려고 먼저 북부의 조불(祖弗)과 동부의 소우(蕭友) 등을 보내 산과 들을 물색하여 을불을 찾게 하였다. 〔그들이〕 비류하 강가에 이르러 한 장부가 배 위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용모가 비록 초췌하나 행동거지가 보통 사람과 달랐다.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이라 짐작하고 나아가 절을 하며 말하기를, “지금 국왕이 무도하여 국상과 여러 신하들이 함께 은밀히 왕을 폐할 것을 꾀하고 있습니다. 왕손(王孫)께서는 행실이 검소하시고 인자하셔서 사람을 사랑하시므로 대대로 이어진 업[祖業]을 이을 수 있다고 하여, 신(臣)들을 보내 맞이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을불이 의심하여 말하기를, “나는 야인이지 왕손이 아닙니다. 다시 자세히 살펴보십시오.”라고 하였다. 소우 등이 말하기를, “지금의 임금은 인심을 잃은 지 오래되어 진실로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신하들이 간절히 왕손을 기대하는 것이니 청컨대 의심하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마침내 받들어 모시고 돌아가니 창조리가 기뻐하며 조맥(鳥陌) 남쪽 집에 모셔두고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
창조리가 을불을 왕으로 추대하다 ( 300년 09월 )
〔원년(300)〕 가을 9월에 왕이 후산(侯山) 북쪽에서 사냥을 하였다. 국상 창조리가 그를 따라갔는데,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와 마음을 같이 하는 자는 나를 따라 하라.”라고 하고, 갈댓잎을 관(冠)에 꽂으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꽂았다. 창조리가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같은 것을 알고, 드디어 함께 왕을 폐위하여 별실에 가두고 병사로 주위를 지키게 하고, 왕손을 모셔다가 옥새와 인수를 바치어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누런 안개가 일어나다 ( 300년 10월 )
〔원년(300)〕 겨울 10월에 누런 안개로 사방이 막혔다.
서북풍이 불다 ( 300년 11월 )
〔원년(300)〕 11월에 바람이 서북쪽에서 불어와서 엿새 동안이나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다.
혜성이 나타나다 ( 300년 12월 )
〔원년(300)〕 12월에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현도군을 침략하고 잡아 온 포로를 평양에 두다 ( 302년 09월 )
3년(302) 가을 9월에 왕이 병력 30,000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략하여 8,000명을 포로로 잡아 이들을 평양으로 옮겼다.
서안평을 점령하다 ( 311년 08월 )
12년(311)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낙랑군을 침략하다 ( 313년 10월 )
14년(313) 겨울 10월에 낙랑군(樂浪郡)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사유를 태자로 삼다 ( 314년 01월 )
15년(314) 봄 정월에 왕자 사유(斯由)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대방군을 침략하다 ( 314년 09월 )
〔15년(314)〕 가을 9월에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하였다.
현도성을 공격하다 ( 315년 02월 )
16년(315) 봄 2월에 현도성(玄菟城)을 공격하여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혜성이 나타나다 ( 315년 08월 )
〔16년(315)〕 가을 8월에 혜성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최비가 도망쳐오고, 모용외가 공격해 오다 ( 319년 12월 )
20년(319) 겨울 12월에 진(晉)의 평주자사 최비(崔毖)가 도망쳐 왔다. 처음에 최비가 은밀히 우리와 단씨(段氏), 우문씨(宇文氏)에게 말하여 함께 모용외를 공격하게 하였다. 세 나라가 나아가 극성(棘城)을 공격하자 모용외가 성문을 닫고 지키며 오직 우문씨에게만 소고기와 술을 보내 대접하였다. 두 나라는 우문씨가 모용외와 모의가 있다고 의심하고 각기 병력을 이끌고 돌아갔다. 우문씨의 대인(大人) 실독관(悉獨官)이 말하기를, “두 나라는 비록 돌아갔지만 나는 홀로 이를 빼앗겠다.”라고 하였다. 모용외는 그 아들 황(皝)과 장사(長史) 배의(裵嶷)에게 정예 병력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그를 따랐다. 실독관이 크게 패하고 자신만 겨우 도망하였다. 최비가 이를 듣고 그 형의 아들 최도(崔燾)로 하여금 극성(棘城)으로 가서 거짓으로 축하하게 하였다. 모용외가 군사를 이끌고 맞이하니, 최도가 두려워서 자복하였다. 모용외가 최도를 돌려보내고 최비에게 일러 말하기를,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고, 달아나는 것이 하책이다.”라 하고, 병력을 이끌고 그를 따라갔다. 최비는 수십 기의 기병과 함께 집을 버리고 〔우리에게〕 도망쳐오고, 그 무리는 모두 모용외에게 항복하였다. 모용외가 아들 모용인(慕容仁)을 요동에 진수(鎭戍)하게 하니 관부(官府)와 저잣거리가 예전과 같이 평온해졌다. 우리의 장수 여노(如孥)는 하성(河城)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모용외가 장군 장통(張統)을 보내 습격해서 그를 사로잡고, 그 무리 1천여 가를 포로로 잡아 극성으로 돌아갔다. 왕이 자주 병력을 보내 요동을 침략하였다. 모용외가 모용한(慕容翰)과 모용인(慕容仁)을 보내 이를 쳤다. 왕이 화해[盟]를 청하니 모용한과 모용인이 돌아갔다.
요동을 침공하다 ( 320년 12월 )
21년(320) 겨울 12월에 병력을 보내 요동을 침략하니 모용인이 막아 싸워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석륵에게 호시를 보내다 ( 330년 )
31년(330)에 후조(後趙)의 석륵(石勒)에게 사신을 보내 호시(楛矢)를 주었다.
미천왕이 사망하다 ( 331년 02월 )
32년(331) 봄 2월에 왕이 서거하였다. 미천의 들에 장사지내고 이름을 미천왕이라 하였다.(1)
■ 미천왕의 요동 승전과 선비족 축출
『서기 197년 발기의 반란 이후부터 서기 370년 고국원왕의 말년까지는 고구려의 중쇠 시대였다. 하지만 미천왕 시대는 이 시기에서 가장 나은 시기였다.
필자는 예전에 환인현에 체류한 적이 있다. 그때 그곳의 문인이자 만주족인 왕자평에게 들은 말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고구려때 우굴로란 대왕이 있었다. 신분이 낮을 때에 처지가 불우해서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걸식하면서 가죽으로 신을 만들어 신었다. 지금도 만주에서 가죽신을 우굴로(우굴로는 만주 노동자의 신)라고 하는 것은 그 대왕의 이름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렇게 걸식할 정도로 곤궁하면서도 대왕은 요동을 경영할 뜻을 늘 품고 살았다. 그래서 요동 각지에서 걸식할 때에, 산천의 형세와 도로의 원근을 알기 위해 풀씨를 갖고 다니며 길가에 뿌렸다. 자신이 다닌 길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지금도 요동 각지의 길가에 우굴로란 풀이 많다."
우굴로가 을불과 음이 같고 또 고구려 제왕 중에 초년에 걸식한 이는 을불뿐이므로, 우구로는 아마 미천왕 을불의 소싯적 이름이 아닌가 생각한다.
미천왕은 서기 300년부터 331년까지 31년간 재위한 제왕이다. 그 31년간의 역사는 선비족 모용씨와 혈전을 벌인 역사다. 축소된 〈고구려 본기〉와 과장된 《진서》를 종합한 뒤 그중에서 진실에 가까운 것을 골라 왕의 역사를 서술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1) 현도군의 회복
왕자 수성이 회복한 요동이 연우왕 때 또다시 한나라의 소유가 됐다는 점은 앞에서 서술했다. 즉위한 이듬해에 현도군을 공격한 미천왕은 8천 명을 포로로 잡아 평양에 옮기고, 재위 16년에 마침내 현도성을 점령했다.
2) 낙랑군의 회복
한무제 때 한사군의 하나였던 낙랑군은 대대로 이동이 매우 잦았다. 대체로 요동 땅에 잠정적으로 설치한 것으로, 평양의 낙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고구려 본기〉 동천왕 편에 나오듯, 위나라 군대가 낙랑으로 물러날 때에 동천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고 평양 천도 이후에도 위나라 · 진나라의 낙랑태수가 여전히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중국의 낙랑이 조선의 평양인 남낙랑이었다면, 이는 평양이 고구려의 도읍인 동시에 중국 낙랑군의 군청 소재지였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모순적인 역사적 사실이 있었겠는가
미천왕이 낙랑을 점령한 것은 재위 14년째인 서기 313년이었다. 당시 진나라 사람인 장통이 낙랑 · 대방 두 군(대방도 요동에 잠정적으로 설치된 군이다. 장단이나 봉산의 '대방국'과는 다르다)을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미천왕이 장통을 공격하자, 항거할 힘이 없는 장통은 모용외의 부장인 낙랑왕 모용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모용준은 구원하러 나왔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자 모용준은 장통을 꾀어 천여호의 민가를 데리고 모용외에게 투항하도록 했다. 이에 모용외는 류성 즉 지금의 금주 등지에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태수에 임명했다. 한편, 요동의 낙랑은 고구려의 소유가 됐다.
3) 요동 승전
요동군청 소재지는 양평 즉 지금의 요양이었다. 《진서》에서는 "미천왕이 요동을 공격하다가 자주 패배하자 화친을 구걸했다"고 했지만, 《양서》에서는 "을불이 요동을 자주 침략했다. 모용외가 막을 수 없었다"라고 하여 모용외가 미천왕에게 항상 패배했다고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두 기록이 상호 모순된다.
《진서》는 당태종 때 지어진 책이다. 당태종은 요동이 중국의 요동이었던 것처럼 위조함으로써 자국 신민을 고무하고 고구려에 대한 전쟁 열기를 일으키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이전 왕조의 역사서인 《사기》 · 《한서》 · 《후한서》 · 《삼국지》 등에 적힌 조선 관련 기사, 특히 고구려 관련 기사를 상당 부분 조작했다. 이 정도였으니 자기 시대에 편찬한 《진서》는 어떠했겠는가. 따라서 《양서》에 기록된 내용이 진실일 것이다. 당시는 현도와 낙랑이 정복된 뒤였으니, 겨우 몇 개 현만 남은 요동도 고구려에게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충분한 증거가 없으므로 이 정도로만 언급한다.
4) 극성 전투
서기 320년, 미천왕은 선비족 우문씨 · 단씨 및 진나라 평주자사 최비와 연합하여 모용외의 서울인 극성을 쳤다. 그러자 모용외는 네 나라를 이간시켰다. 이 때문에 미천왕과 단씨는 물러나고, 우문씨와 최비는 모용외와 싸우다가 대패했다. 이에 최비는 고구려에 투항하고, 고구려 장수 여노자는 사성을 지키다가 모용외의 장수인 장통에게 패했다. 이상은 《진서》에 기록된 내용이다. 사실인 것 같지만, 모용외를 여러 차례 격파한 명장인 고노자가 장통에게 사로잡혔다는 말은 의심스럽다. 또 고노자가 봉상왕 5년 이후로 〈고구려 본기〉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그가 그 즈음에 사망했다는 뜻인데, 그런 그가 근 40년 만에 갑자기 출현하는 것은 이상하다. 따라서 위의 내용은 조작된 기록일 것이다.』(2)
■ 미천왕(서기 300~330년) 때까지 지금의 요서 지역으로 진출하는 시기
윤내현교수는 미천왕 때인 서기 315년에 고구려는 지금의 요서 지역에 있었던 중국의 군현을 모두 축출하여 지금의 난하 유역까지를 그 판도에 넣고 있었다고 보았다.
『지금까지 필자는 고구려가 그 말기에 수 당과 충돌하기 전까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대외관계 기록(주로 전쟁기록)을 살펴보면서 고구려 대외전쟁의 기본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 대외전쟁의 성격을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었다.
첫번째 단계는 추모왕(서기 전 37~20년) 때부터 민중왕(서기 44~47년) 때까지로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지반을 확립하는 시기였다.
두번째 단계는 모본왕(서기 48~52년) 때부터 미천왕(서기 300~330년) 때까지로서 지금의 요서 지역으로 진출하는 시기였다. 이 기간에 고구려는 남쪽의 백제나 신라와는 거의 마찰이 없었다. 백제와는 동족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화평을 유지하였고, 신라와는 신하나라 관계를 맺음으로써 갈등의 요인을 없앴다.
세번째 단계는 고국원왕(서기 331~370년) 때부터로서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침공한 시기였다. 이 기간에는 중국에 있었던 나라들에 자주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관계를 유지하였다.
고구려의 대외정책에 보이는 이러한 분명한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고구려가 지금의 요서 지역으로 진출하던 시기는 중국에 서한과 동한이라는 거대한 통일제국이 있던 시기였으며, 고구려의 대외전쟁이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향하던 시대는 중국이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흥망과 혼란이 거듭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일반 상식으로 본다면 중국이 분열되어 혼란하던 시기에 고구려는 서쪽으로 진출을 계속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를 중단하고 전쟁 방향을 남쪽으로 옮겼다.
이는 고구려가 지금의 요서 지역으로 진출했던 것은 맹목적인 영토 확장이 아니었고 다른 목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고구려는 서쪽 방향에서 추구했던 목표가 이미 달성되었으므로 그 전쟁 방향을 남쪽으로 옮겼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방향 전환이 있기 직전 미천왕 때인 서기 315년에 고구려는 지금의 요서 지역에 있었던 중국의 군현을 모두 축출하여 지금의 난하 유역까지를 그 판도에 넣고 있었다.
이 지역은 원래 고조선의 영토였으나 고조선 말기에 위만조선이 차지했고 그 뒤를 이어 서한이 차지하여 한사군을 설치했던 곳이다. ......
이러한 고구려 사람들의 의식은 바로 고조선의 천하질서를 재건해야 한다는 다물이념으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단순히 영토만의 병합이 아니라 통치질서와 사상의 재건까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3)
<주>
(2)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270~273쪽(제5편(2) 고구려의 중쇠와 북부여의 멸망 제2장 고구려와 선비족의 전쟁 6. 미천왕의 요동 승전과 선비족 축출)
(3)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324-3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