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고구려(12) 14대 봉상제(봉상왕, 292년-300년) 293년 08월 모용외의 1차 침입을 고노자가 물리침, 296년 08월 모용외의 2차 침입도 물리침. 본문
1. 고구려(12) 14대 봉상제(봉상왕, 292년-300년) 293년 08월 모용외의 1차 침입을 고노자가 물리침, 296년 08월 모용외의 2차 침입도 물리침.
대야발 2025. 11. 15. 12:18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봉상왕(烽上王)
봉상왕이 즉위하다. ( 292년 )
봉상왕(烽上王) 치갈(雉葛)이라고도 한다.은 이름이 상부(相夫)삽시루(歃矢婁)라고도 한다.이고 서천왕의 태자이다.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자하며 의심과 시기가 많았다. 서천왕이 23년(292)에 돌아가시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왕이 안국군 달가를 죽이다 ( 292년 03월 )
원년(292) 봄 3월에 안국군(安國君) 달가(逹賈)를 죽였다. 왕은 달가가 아버지의 항렬에 있고 큰 공과 업적이 있어 백성이 우러러보자, 그를 의심하여 음모를 꾸며 죽였다.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안국군이 아니었다면 백성들이 양맥(梁貊), 숙신(肅愼)의 난을 피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지금 그가 죽었으니 장차 누구에게 의탁할 것인가?”라고 하며 눈물을 흘리고 서로 조문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지진이 일어나다 ( 292년 09월 )
〔원년(292)〕 가을 9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모용외가 침략해오다 ( 293년 08월 )
2년(293) 가을 8월에 모용외(慕容廆)가 침략해왔다. 왕이 신성(新城)으로 가서 적을 피하고자 하였다. 행차가 곡림(鵠林)에 이르렀는데 모용외가 왕이 나간 것을 알고 병력을 이끌고 이를 추격하였다. 거의 따라잡게 되자 왕이 두려워하였다. 이때 신성재(新城宰) 북부(北部) 소형(小兄) 고노자(高奴子)가 기병 500기를 거느리고 왕을 맞이하러 왔다가 적을 만나 그들을 힘껏 공격하니, 모용외의 군대가 패하여 물러갔다. 왕이 기뻐하고 고노자에게 벼슬을 올려 대형(大兄)으로 삼고, 겸하여 곡림을 주어 식읍으로 삼게 했다.
동생 돌고가 죽고, 그의 아들 을불이 달아나다 ( 293년 09월 )
〔2년(293)〕 9월에 왕이 그 아우 돌고(咄固)가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독약을 내려 자결하게 하였다. 나라 사람들은 돌고가 죄가 없다고 여겨 이를 애통해 하였다.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은 성 밖[野]으로 나아가 달아났다.
상루가 죽고 창조리가 국상이 되다 ( 294년 09월 )
3년(294) 가을 9월에 국상(國相) 상루(尙婁)가 죽자, 남부(南部)의 대사자(大使者) 창조리(倉助利)를 국상으로 삼고, 벼슬을 올려 대주부(大主簿)로 삼았다.
모용외가 침략해오고, 고노자를 신성태수로 삼다 ( 296년 08월 )
5년(296) 가을 8월에 모용외가 침략해왔다.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였다. 파는 사람 중에 갑자기 죽는 자가 있고, 또 무덤 안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므로 귀신이 있는가 두려워하여 곧 물러갔다.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모용씨는 병마(兵馬)가 우수하고 강하여 우리의 강역을 거듭 침범하니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국상 창조리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북부 대형 고노자(高奴子)는 현명하고 또 용감합니다. 대왕께서 만일 적을 방어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려면, 고노자 말고는 쓸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고노자를 신성태수로 삼았는데 백성을 잘 다스려 위세와 명성이 있었으므로, 모용외가 다시 쳐들어오지 않았다.
서리와 우박이 내리다 ( 298년 09월 )
7년(298) 가을 9월에 서리와 우박이 곡식을 해쳐 백성이 굶주렸다.
왕이 궁실을 더 짓다 ( 298년 10월 )
〔7년(298)〕 겨울 10월에 왕이 궁실을 더 지었는데 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하였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 괴로워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자주 시정을 건의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을불을 찾아 죽이려 하다 ( 298년 11월 )
〔7년(298)〕 11월에 왕이 사람을 시켜 을불(乙弗)을 찾아서 죽이려 하였으나 그러지 못하였다.
귀신이 봉산에서 울고, 객성이 달을 범하다 ( 299년 09월 )
8년(299) 가을 9월에 귀신이 봉산(烽山)에서 울었다. 객성이 달을 범하였다.
천둥과 지진이 일어나다 ( 299년 12월 )
〔8년(299)〕 겨울 12월에 천둥이 치고 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이 일어나고, 가물어 흉년이 되다 ( 300년 01월 )
9년(300) 봄 정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2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창조리가 봉상왕을 폐위하고, 봉상왕이 사망하다 ( 300년 08월 )
〔9년(300)〕 8월에 왕이 나라 안의 남녀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였다. 백성들이 먹을 것이 모자라고 일이 괴로워 이로 인해 유망(流亡)하였다. 창조리가 간언하여 말하기를, “하늘의 재난이 거듭 닥쳐 올해 곡식이 익지 않아서 백성들이 살 곳을 잃어버렸습니다. 장정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노인과 어린아이는 구렁텅이에 굴러다닙니다. 이는 진실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며, 삼가 두려워하고 수양하며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 대왕께서 일찍이 이를 생각하지 않고 굶주린 사람들을 몰아 나무와 돌로 하는 공사에 고달프게 하는 것은 백성의 부모가 된 의미에 매우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웃에 강하고 굳센 적이 있는데, 만일 우리가 피폐한 틈을 타서 〔그들이〕 쳐들어온다면 사직과 백성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이를 깊이 헤아리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임금이란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바이다. 궁실이 장엄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 지금 국상은 과인을 비방하여 백성의 칭찬을 얻고자 하는구나.”라고 하였다. 창조리가 말하기를, “임금이 백성을 걱정하지 않으면 인자하지 못한 것이고, 신하가 임금에게 간언하지 않으면 충성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신은 재주가 없음에도 국상의 자리에 있으니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감히 칭찬을 구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을 것인가? 다시 말하지 말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창조리는 왕이 고치지 못할 것을 알고, 또 해(害)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물러 나와서 여러 신하들과 함께 모의하여 왕을 폐하고, 을불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았다. 왕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으로 알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고, 두 아들도 따라서 죽었다. 봉산(烽山)의 들에 장사지내고 이름을 봉상왕이라 하였다.(1)
■ 모용외의 패퇴와 봉상왕의 폭정
『모용외는 일세의 영웅이었다. 진나라의 정치가 부패해지자, 앞으로 중국에서 대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한 그는 전 중국을 병탄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그는 동쪽의 고구려를 복속시키지 못하면 배후의 우환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북부여를 멸망시킨 뒤 그 승세를 몰아 고구려에 침입하겠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었다. 그렇지만 안국군 달가의 명성때문에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달가가 죽었다.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한 모용외는 서기 292년에 경무장 병력을 거느리고 고구려 신성을 공격했다. 이때 마침, 봉상왕은 신성에 행차해 있었다. 모용외가 이를 정탐하고 성을 포위하니, 봉상왕은 매우 위급해졌다. 신성재이자 북부소형인 고노자가 기병 500명으로 모용외의 군대를 기습하고 대파하여 왕을 구했다. 왕은 고노자의 작위를 북부대형으로 올렸다.
3년 뒤 모용외가 또 침입했다. 그의 부대는 졸본에 들어가 서천왕의 무덤을 파헤쳤다. 고구려 구원병이 이들을 격퇴했다. 왕이 모용씨의 잦은 침입을 걱정하자, 신가인 창조리가 "북부대형이자 신성재인 고노자가 지략과 용맹이 출중한 장수인데, 대왕이 고노자를 두고 어찌 선비족을 근심합니까?"라고 말하고, 고노자를 신성태수로 삼도록 왕에게 권유했다. 고노자가 백성을 아끼고 병사를 조련하여 모용외의 침략군을 수차례 격파하니, 이로써 국경이 평안해졌다.
이 때문에 모용외의 군대가 침략하지 못하자, 교만해진 봉상왕은 인민이 여러 해의 흉년과 가뭄으로 굶주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인력을 징발하여 궁궐을 건축했다. 이로 인해 인민들이 주거지를 이탈하면서 호구가 감소했다. 서기 300년에는 왕이 신하들의 간언을 거부하고 15세 이상의 남녀를 건축 부역에 총동원했다. 그러자 신가인 창조리가 다음과 같이 간절하게 충언했다. "천재지변이 잦아 농사가 안 돼서, 백성들 중에서 장정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노약자들은 구렁텅이에 빠져 죽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은 이를 돌보지 않고 굶주린 백성들을 죄다 토목사업에 부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임금이 할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북방에서는 모용씨라는 강적이 날마다 우리의 빈틈을 엿보고 있습니다. 대왕은 생각해보소서. 임금이 백성을 아끼지 않으면 인이 아니고, 신하가 임금에게 간언하지 않으면 충이 아닙니다. 신이 신가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숨길 수 없어 말씀을 올리느 것입니다."
그러자 왕은 "임금은 백성이 올려다보는 바다. 임금이 사는 궁궐이 장엄하지 않으면 백성이 무엇을 쳐다보겠소? 신가는 백성에게서 명예를 구하려 하지 말라. 신가는 백성을 위해서 죽고 싶은가? 다시는 말하지 말라"고 말했다. 봉상왕이 고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창조리는 동지들과 함께 은밀히 모의하여 왕을 폐위시키려 했다.』(2)
<주>
(2)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266~268쪽(《조선상고사》 제5편(2) 고구려의 중쇠와 북부여의 멸망 제2장 고구려와 선비족의 전쟁 4. 모용외의 패퇴와 봉상왕의 폭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