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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2006년 9월 14일 고구려연구회 주최로 열린 '동북공정 분석과 평가' 토론회에서는 금·청나라 역사를 한민족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는 이른바 재야사학계의 논리가 강단사학계에서 처음 나온 것이었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입장을 들어보기 위해 는 20일 고구려연구회 이사장인 서길수 서경대 교수를 만났다.서 교수는 "중국은 한국사 해체 작업을 벌이고 있는데 '중국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 역사를 파악한다'는 반박만으로는 불충분하다"며 "우리도 중국사를 해체해 대응하자는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 "닫힌 반도사관으론 동북공정 못 막는다"오마이뉴스 김태경 기자 2006. 9. 22. 그는 "중국의 정사인 25사에 들어간 역사는 모두 중국사로 인정하는 것은 사대주의적 전통..

어떤 이유로 두 차례의 전쟁에서 대장들이 각각 네 명이었을까? 이는 백제도 부여나 고구려처럼 중·전·후·좌·우의 오군 제도를 썼기 때문이다. 동성대왕이 중군대원수가 되고 나머지 네 명은 각각 네 명의 원수가 되었던 것이다. 또 어떤 이유로 왕저근이나 사법명이 동성대왕의 신하로서 왕을 겸했을까? 이것도 조선의 옛 제도에 입각한 것이다. 대왕은 ‘신한’의 번역어로 국가 전체에 군림하는 천자의 칭호이고, 왕은 ‘한’의 번역어로 대왕을 보좌하는 소왕(小王)의 칭호였다. 중국 대륙의 국가 중에서 조선에 침입한 나라는 많았다. 하지만 군대 규모가 십만 명에 달한 것은 탁발씨의 북위가 처음이었다. 그런 대군을 격퇴한 것도 백제 동성대왕이 처음이었다. 《위서》에서는 북위의 국치를 숨길 목적으로 이를 기록하지 않았..
삼국사기를 보면 장수태왕이 천도한 곳은 85년 전 수도로 삼은 평양이다. 삼국사기 고국원왕 조는 평양 동쪽에 황성이 있다고 했으니, 평양은 황성의 서쪽에 있어야 한다. 황성은 지금의 지안이니, 평양은 지안 서쪽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북 평양은 지안의 남쪽에 있다. 따라서 ‘장수태왕이 천도한 평양은 이북 평양’이라는 국사 교과서의 주장은 삼국사기 내용과 완전 배치된다. 장수왕이 옮겨간 평양이 지안(황성)의 서쪽에 있다는 것은 요나라 역사서인 요사(遼史) 지리지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요사는 지금의 랴오닝(遼寧)성 랴오양(遼陽)시가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가 도읍을 옮긴 평양이라고 밝히고 있다. 요사는 장수태왕이 아닌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설명한다. “수도 평양은 이북 아닌 ..
'광개토대왕릉비'는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에 있는 고구려 제 19대 광개토대왕의 릉비입니다. 중국, 일본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碑)'라 부른다고 합니다. 비석은 대체로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묘비 제1면 1행에서 6행까지는 고구려의 건국부터 광개토대왕까지의 역사를 다룬 부분입니다.제1면 7행부터 3면 8행까지는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을 기술한 둘째 부분입니다.제3면 8행부터 제4면 9행까지는 능비의 건립 및 수묘인에 관한 부분입니다. 건국 역사와 광개토대왕의 생애아!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우셨다. 왕은 북부여에서 나셨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알을 가르고 세상에 내려오시니, 날 때부터 성스러우셨다. □□□□□□ 명(命)에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

일반적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비정하고 있는 반면, 대다수 국내 학자들은 장군총을 광개토왕릉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형구교수는 장군총은 통구 고분중에서 가장 전형적인 고구려식 피라미드라고 합니다. 기원 3, 4세기 고구려 중기에 오면 돌무지무덤에 3단·5단·7단식으로 층 수가 증가하면서 마치 계단식 피라미드형의 돌무덤으로 축조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장군총(將軍塚)과 태왕릉(太王陵)이다. 이 무덤에 대해 한국·중국·일본 등 세 나라 학계에서는 서로 “장군총이 광개토대왕릉(廣開土大王陵)이다”, “태왕릉이 광개토대왕릉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최근 정비된 광개토대왕릉비[왼쪽]와 태왕릉[오른쪽]태왕릉과 광개토대왕릉비와는 불과 200m 정도 떨어져 있다. 어떤 이는 이른바 장군총을 장수왕..

일반적으로 태왕릉은 광개토왕릉으로 알려져 있지만, 광개토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한편 일반적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비정하고 있는 반면, 대다수 국내 학자들은 장군총을 광개토왕릉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형구교수는 기원 3, 4세기 고구려 중기에 오면 돌무지무덤에 3단·5단·7단식으로 층 수가 증가하면서 마치 계단식 피라미드형의 돌무덤으로 축조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장군총(將軍塚)과 태왕릉(太王陵)이라고 합니다. 고구려 전기에 유행했던 돌무지무덤은 이미 앞에서 서술한 바 있는 발해연안의 신석기 내지 청동기시대에 동이족이 축조한 돌무덤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였다. 특히 대릉하 유역 건평현 우하량 유적의 홍산문화시기[기원전 3500년경]의 계단형(階段形) 돌무지무덤은..

북한이 남포시 룡강군 은덕지구에서 6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벽화무덤을 발굴했다. 조선중앙통신은 2020년 10월 17일 조선민족유산보존사 연구진이 이 지역 북쪽 산 중턱에서 사신도가 그려진 무덤을 새로 발굴했다고 전했다. 고고학학회 "고구려 매장풍습 연구에 큰 학술적 의의" 북한, '외칸돌칸흙무덤' 형식 고구려벽화무덤 발굴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북한이 남포시 용강군 은덕지구에서 고구려 벽화무덤을 발굴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8일 보도했다. 출토된 무덤은 안길(널길)과 안칸(널방 또는 묘실)으로 구성된 외칸돌칸 흙무덤이다. 2020.10.18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No Redistribu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