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구단]

 

2008/02/22 [12:56] ⓒ pluskorea

▲  조선말 원구단과 황궁우,고종황제(왼쪽부터)-황궁우만 복원되고 원구단 자리에는 삼성의 조선호텔이 들어서 있다

 

▲  원구단내 황궁우가 찍힌 1905년 6월 16일자 소인이 찍힌 한일늑약 시기의 우편엽서

 

 

민족성지 '환구단'은 하늘민족의 자부심!: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권병주 기자  | 기사입력 2006/11/24 [02:17]
서울시청 맞은편의, 소공동 조선호텔 후원에는 세인들에게는 낮선 고 건축물이 있다. 규모도 작거니와 호텔의 정원인 듯 보여지는 3층 팔각정은 황궁우(黃穹宇)라 불린다. 23일 오후1시경부터, 이곳에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 60여명이 모여 개천절 범민족 경축대회를 열었다. 익히 잘 알려진 박영록 전 신민당 부총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팔순이 넘은 연세에도 컨테이너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며, 후배 정치인에게 청렴의 본을 보여 귀감이 되고 있는 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곳에 모여 있는지 행사에 참여하여 보았다.
 
▲  원구단 원형 모습   © 권병주

이곳을 일러 ‘원구단’ 이라고도 부른다. 지나는 행인들도 잘 모르는 이름 이라고들 한다. 또는 들어는 본 것 같다고도 한다. 원구단이란 무엇을 하던 장소이며 언제부터 있었는가?
 
‘원구단’이란? 하늘의 자손인 우리민족이 오랜 상고시대부터 매년10월 상순에 국중 대회를 열어 둥근 단을 쌓고, 단군께서 친히 하늘에 제사를 올려, 국태민안을 기원하여 왔는데, 이 제천단이 바로 ‘원구단’ 이라 한다.
 
이 ‘원구단’ 천제의 유례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등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고려사’에 의하면 서기983년인 고려 성종2년 정월에 황천상제인 삼신과, 흑제, 적제, 청제, 백제, 황제, 의 오방위의 신위를 모시고 왕이 친히 ‘원구제’ 를 드렸으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3년인 1394년과 세종 원년인 1419년에 ‘원구제’를 올렸고, 세조 임금때는 천제를 나라의 최대 행사로 제도화하여 세조 3년인 1457년부터 매년 ‘원구제’를 올렸으나, 천자가 아닌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중국의 압력과 사대주의자들의 강압에 의해 1464년 ‘원구제’를 마지막으로 중단 되었다가, 이로부터 433년이 지난 후 고종때에 이르러 천제를 복원해야 한다는, 의정 심순택의 상소를 가납하여, 팔도의 가장 명당 명소, 길지인 소공동에 원구단을 세우고, 천제제천권 회복과 함께,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 즉위의식을 올리고, 자주 독립국임을 만천하에 선포 하였던 곳 이다.
 
그러나 또다시 일제와 부일파들이 이를 시기 질투하여, 천제는 천조대신의 만세일개인 일본 천황만이 지낼 수 있다며, ‘원구단’을 헐고는 그 자리에 철도 호텔을 지었던 것이다.
 
▲  현제는 황궁우와 석고단만이 남아있다.   © 권병주

하늘의 자손이요, 단군의 후예인 천손들이 천제를 빼앗기고, 오늘날까지 일본 천황이 단군 제천권을 대신 행사해오고 있다. 가장 성스러운 제천단이 일본의 호텔로 둔갑하였고, 이후 철도호텔 자리에, 조선호텔이 세워진 것이다.
 
‘원구단’은 1967년 사적 제157호로 지정되었으며, 일제로부터 훼손된 원구단의 원형복원은 요원한 상태다.  남아있는 ‘황궁우’와 ‘석고단’ 만이 민족적 정기와 하늘민족의 부활을 꿈꾸며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호텔의 정원 역할을 하고 있어,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하는 선각자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원구단천제복원회’의 박영록 총재는, 남은 일생을 원구단의 복원과 천제복원에 매진하며, 지난 2004년 5월 2일 제1회 제천권회복 범민족 천제 봉헌식을 거행하게 되었고, 지난해와 올해에 이어, 전체 복원과 원구단 복원을 위해 꾸준히 활동 해오고 있는 것이다.
 
상고시대부터 내려온 제천 행사는 장엄하고 화려한 행사였고, 국가의 민족적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 이었을 것이나, 세월이 흐른 지금, 역사와 전통은 잊혀지고, 이를 되살리고자 하는 연로한 노인들만의 안타까운 민족정신 운동으로 그치고 있다.
 
▲  황궁우의 석조 조형물만이 말없이 원구단을  내려다보고있다.© 권병주

박영록 총재는 말한다. “원구단의 복원은 단지 건축물의 복원이 아니다. 이는 역사가 바로서는 것이며, 이러한 단군역사가 없다면, 우리의 뿌리도 없는 것이다. 동북공정은 이러한 우리의 역사를 외곡 하는 것이다” “현제 삼성일가가 차지하고 있는 조선호텔 자리는, 민족의 성지이며, 원구단의 옛 터이다. 우리의 단군천제를 빼앗아간 일본은 108년 동안 천제를 이어오고 있으며, 중국 또한 2008년 올림픽 성공을 기원하는 천제를 올리며, 한국이 자신들의 제후국임을 주장하는데, 정작 천제를 지내야할 천손 장자국은 천재 재천권 마져 상납한 체 500년이 넘게 하늘민족의 권리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삼성은 8천억 원을 사회에 헌납한다며, 국가를 위한 기업임을 알리기도 하였다. 그러한 삼성이 민족 성지인 원구단의 복원에는 어떠한 입장인지 자뭇 궁금할 뿐이다.
 
▲  황궁우의 정문을 통해 밖으로 나갈수는 없다. 정문 밖에는  호텔의 커피숖 대형 유리가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 권병주

▲ 열변을  토하는 박영록 총재    © 권병주
▲  돌로만든 북이 놓여있는 석고단   © 권병주
<저작권자 ⓒ pluskorea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선도]

 

입력 2006. 10. 13. 18:26수정 2006. 10. 13. 18:26

[책]''홍익인간 이화세계'' 잊혀진 우리 仙道문화사 (daum.net)

유교, 불교, 도교는 우리에게 오랫동안 낯익었지만, 사실상 외래 문화다. 그렇다면 유·불·도 3교 이전에 우리 고유의 정신문화는 없었을까. 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한국 선도의 역사와 문화'는 우리의 잊힌 정신 문화를 '선도(仙道)'로 파악하고, 그 역사와 문화를 지난한 작업을 통해 찾아 모아 소개하고 있다. 단군 연구로 유명한 박성수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등 5명의 역사학 전공자들이 2년여 결집해 선도문화의 유구한 역사적 전개 과정을 상고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통사적으로 체계화시켰다.

 

선도란, 한민족 고유의 정치·경제·사회·종교를 두루 포괄하고 있던 일종의 심신 수행법. 개인완성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 국가를 유지해 주는 사회적 규범이요, 인재양성 체계였다. 고구려의 조의선인, 신라의 화랑도, 백제의 대선이 개인수련과 함께 사회적인 실천으로 전쟁에도 나섰던 국가적 인재양성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선도문화의 핵심은 홍익인간, 이화세계다. 고대 중국 사서에는 한민족을 "정직·성실·친절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돕지 않고 못 배기는 정의감 넘치는 사람들"로 서술했다. 한마디로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들이다. 이것은 외래 3교가 들어오기 전의 평가로서,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닐 터, 곧 선도가 만들어낸 정신문화가 아닐 수 없다.

책은 총 7장으로 구성돼 있다. 1장 총설에는 한국 선도에 관한 역사적 인물과 유적들을 새롭게 소개한다. 특히 근대 사학자 단재 신채호가 처음으로 말한 선도에 주목하며 그의 사서에 나타나는 문헌적 근거들과 함께, 연개소문이 원주 치악산에서 수련한 내용을 담은 '갓쉰동 이야기'의 전문을 전한다.

2·3장에서는 단군조선 전후 역사를 다룬 '부도지' '한단고기'와 같은 여러 선도 사서들을 적극 수용하고 있다. 또한 '다물(되물리자)'이라는 순수 우리말에서 나온 다물주의는 고구려의 정치이념이었는데 그 뿌리는 선도와 단군에 있다고 밝힌다. 특히 우리 고유의 경전으로 전해지는 '천부경'과 '삼일신고'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과 함께 개천절에 거행하는 천제의식에 대해서도 그 뿌리를 고대의 국가의례이자 한민족 고유의 선도수행이었다고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4·5장은 조선시대 선도의 흐름을 소상히 밝히고, 6·7장은 조선 말 이후 선도 단체들의 활약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책은 우리의 귀중한 정신유산이요, 보물을 되찾았다는 느낌을 준다.

정성수 기자

 

 

  • 수정 2019-10-20 17:20 등록 2007-04-25 18:51

“나도 살고 남도 살려 ‘기찬 세상’ 열어야죠” (hani.co.kr)

창립 40돌 맞은 ‘국선도’ 최고 지도자 허경무 도종사

기자조현

스승 청산선사 ‘예언’ 따라 1996년부터 도맥 이어
은거 10년 만에 “하늘마음 되찾는 게 도다” 설파
잠적한 스승 생사 물음에 “내 마음 속에 계시다”

충남 공주시 이인면 목동리 시골길을 따라 저수지 위 산으로 접어드니 코끼리의 긴 코가 저수지의 생명수를 들이키며 기운을 모으고 있는 산세다. 국선도의 도운 허경무(60) 도종사가 머무는 천선원이다. 도종사는 차돌 같은 강인한 인상을 지닌 그의 스승 청산선사와 달리 어머니처럼 자애로운 모습이다. 솥뚜껑처럼 큰손으로 악수를 할 때도 느껴지는 것은 강인함보다 부드러운 기운이다.

그는 창립 40돌을 맞은 국선도의 최고 지도자다. 국선도는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에게 전해져내려온 선도를 수련하고 67년 하산해 이 땅에 단전호흡 바람을 불러일으킨 청산선사 고경민에 의해 드러났다. 1970년 ‘무술의 고수’를 찾아갔던 그는 사형인 신력사 청원 선사 박진후, 청화선사 김종무, 철선녀 김단화 등을 뒤이어 청산의 문하생이 되었다. 1975년 스승은 미국에 데려간 그에게 자신은 84년이 되면 세상과 인연을 끝내고 다시 입산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병자년(96년)이 되면 한국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말 그대로 청산이 84년 종적을 감춘 뒤에도 미국에서 홀로 정진하던 그는 96년에 귀국했다. 3명의 제자(선사) 가운데 막내가 세상에 나와 지도한다는 국선도의 전통에 따라 99년 도종사에 취임한 그는 세계국선도연맹을 창설했다.

최고지도자가 된 뒤에도 은인자중하며 수련 체계화 등 내실을 기하는데만 주력해오던 그가 마침내 “하늘 마음을 회복하는 게 국선도”라며 국선도의 본뜻을 알리고 나섰다. 그의 스승 청산이 기나 단(丹)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를 단번에 알려주기 위해 기적적인 시범을 보여주면서 수련의 외적인 위력을 주로 보여주었다면, 그는 ‘수련의 진정한 목적’을 보다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국선도의 ‘선’자가 신선 선(仙)이 아니라 하늘사람 선( )인 이유를 선명히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가 도맥을 이은 과정 자체가 신비한데도 그는 신비의 베일을 스스로 벗는다. 하늘을 날고 바위를 깨고, 물과 불 속을 오가거나 자신의 도술이나 힘을 뽐내며 헛된 자아를 실현하는 게 국선도가 아니라 하늘마음을 회복해 그 마음에 따라 육신을 다스리면서 자유롭고 평안하게 살며 남에게 유익을 주는 길이 바로 국선도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道)와 술(術)을 구분할줄 알아야한다고 했다. 그는 남을 속여 이기는 게 술이라면, 청산의 가르침인 ‘선도일화 구활창생’( 道一和 救活蒼生·하늘사람 진리에 하나가 되어 하늘 안의 모든 생명체를 구하리)의 마음이 도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주로 기를 모으고 축적하는데 집착하는데서 한발 나아가 좋은 기운을 내보낼 수 있는 도인이 되라고 주문한다.

“관 속에 모래가 흘러가면 관이 거칠어지고, 기름이 흐르면 관이 매끄러워집니다. 어진 마음과 사랑은 내보내면 내보낼수록 더 나오는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하면 기운을 뺏긴다지만 남을 살리는 말을 하면 기운이 더 나는 것입니다.”

그는 기가 훼손되는 것도 욕심 때문이라고 했다. 과욕 때문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이 먹기 때문에 오히려 기가 막힌다는 것이다. 운동도 자신을 과시하려고 하면 독성이 생겨 몸을 망치게 된다고 했다. 그는 또 누구나 자신의 호흡과 신체에 맞게 수련하도록 권한다.

“사람은 하나의 기계에 넣고 찍어내야 할 부품이 아니기에 100이면 100사람이 각자 특성에 맞게 수련해 각자의 특성이 드러나도록 해야 하지요.”

선도가 ‘자연의 도’임을 상기시키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강한 체질을 가진 사람만이 아니라 기운이 허약한 사람도 얼마든지 국선도 수련을 할 수 있고, 오히려 약자가 심신의 건강을 회복해 더 큰 유익함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인터뷰 말미에 입산 이후 알려진 게 없는 청산선사의 생사 여부를 물었다. 청산이 살아있다면 현재 71살이다. 그는 직답 대신 “지리산 백궁선원(국선도 수련원)에서 사부님의 사진에 나만이 절을 하지 않자 모두가 저를 쳐다보며 ‘사부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영정 사진에 절을 하지 않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고 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사부님이 계시다”고만 말했다. 대신 사부와 수많은 역대 스승의 기를 모아 ‘기찬 세상’을 위한 기운을 내보낸다.

“우선 자신부터 용서하고 사랑해 보세요.”

자신의 기부터 살려주고, 나아가 남의 기를 살려주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의 기를 살리는 국선도 창립 40돌을 기념하는 세미나와 공연 등 행사가 28일 오전 10시30분부터 대전시 대덕연구단지 한국전력연구원에서 열린다.

공주/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입력 2007-09-10 14:44

 
‘한국의 종교 전통은 유불선(儒佛仙)’이란 익숙한 상식이 틀렸다는 도발적인 선언이 제기됐다. 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는 최근‘유불선의 틀을 깨라’는 부제가 붙은 신간 ‘최준식의 한국 종교사 바로보기’(한울아카데미)에서 “한국 종교사에서 도교(선도·仙道)는 없었다”며 “유불선이 한국의 종교 전통이 된 것은 그동안 지식인들이 중국의 종교 전통을 아무 생각 없이 가져다 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종교전통에서 ‘선’보다 중요한 것은 ‘무(巫)’이므로, ‘유불선’의 ‘선’은 ‘무’로 대체돼야 한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우선 한국 도교와 중국 도교의 역사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한국에는 중국과 같은 도교의 실체가 없었다고 강조한다. 어떤 조직을 종교집단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하는 대표적인 조건 중 하나는 체제에 사제 집단(혹은 조직)이 있느냐는 것인데, 한국의 도교에는 사제나 수도자라 할 만한 집단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사제나 조직이 없으니 도교 사원이나 경전도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도교가 맥을 추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최 교수는 이를 “무당의 번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중국에서 복을 빌어주고, 신의 뜻을 알아주며, 병도 고쳐준 도교 도사의 역할을 한국에서는 무당이 했다는 것이다. 또 신을 불러내 축제를 벌이거나, 천신에게 제를 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기우제를 지내는 일처럼 중국의 도사가 수행했던 일의 대부분이 무당이 했던 일과 겹친다고 설명한다. 그렇다고 최 교수가 한국 종교의 공식을 ‘유불선’ 대신 ‘유불무’로 대체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한국사에서 유교가 전면에 나선 것은 조선 이후이기 때문에 시대순으로 종교를 공식화한다면 ‘무불유’ 또는 ‘무유불’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이와 함께 무교를 유교와 불교의 아래에 위치시킨 ‘유불/무’의 공식도 제안한다. 무교는 불교나 유교처럼 확실한 교리나 체제, 조직 등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은 채, 기층의 위치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울러 각 종교의 성쇠 등을 모두 고려해 한국의 종교를 공식화할 경우 삼국∼고려시대는 ‘불유/무’, 조선 전기에는 ‘유불/무’, 동학과 증산교·원불교 등의 신종교가 일어나고 기독교가 유입된 조선 후기∼일제에는 ‘유불신기/무’, 그리고 광복 뒤 지금까지는 ‘기불유신/무’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시각을 기반으로 최 교수는 한국의 종교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몇번의 전환점을 맞으며, 한국인의 삶과 문화에 다양한 차원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설명한다. 즉 불교가 327년 한반도에 들어온 사건과 기독교가 200년 전(개신교는 100년전) 에 수입된 사건이 한국 사회에 대대적인 변화를 가져온 큰 전환점이라면, 조선 전기 성리학을 받아들이고 국교로 삼은 것은 작은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내재적인 시각으로 볼 때 이렇게 들어온 외산 종교가 통일 신라 전후기와 19세기말 신민족 종교 운동기에 각각 한국인의 창의성에 의해 재해석되고 심화돼 새로운 단계로 발전했다고 말한다. 첫번째 전환점인 통일신라 전후기에 원효를 비롯한 걸출한 승려들이 대거 출현하고, 불교 문화가 정점에 달했다면 두번째 전환점인 19세기말에는 동학, 증산교, 원불교 등의 신민족 종교가 등장해 한국인들의 정신세계를 한 차원 높였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특히 19세기 말 등장한 신민족 종교는 한국의 전통종교였던‘무유불도(巫儒佛道)’를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결과물”이라며 “이런 점에서 이 시기는 ‘한국종교의 르네상스기’ 또는 ‘한국의 종교 개혁기’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글/송호수(철학박사) | 기사입력 2018/09/12 [13:47]

송호수 철학박사가 파헤친 '한민족 뿌리 사상' 집중공개:사건의내막 (sagunin.com)

“맹자·공자·노자는 동이족 출신 한민족이었다“

 
 
소련 민족학자 R.S.M 자리가시노바 "동이족, 신석기시대 고도문화"
동이족들 주변 국가 따라오지 못하는 수준 높은 독자적 문화 가져




일본 학자 오향청언(吾鄕淸彦)씨가 쓴 책을 보면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25권은 단군 조선이 중원 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 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한나라의 한(漢)이라는 국호 자체도 옛날 3한 조선의 한(韓)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빌려 간 것에 불과하다" 고 말이다. 우리의 역사가 대충 어느 정도 변조가 되었는가를 피부로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한사군(漢四郡) 문제만 보더라도 있지도 않았던 한사군을 평양에, 그것도 세 군데나 되는 평양 중에서 대동강의 평양만 있었다 하고 또 위만(衛滿)이 조선을 지배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일본 사람들이 "보아라. 너희 조선족은 역사의 시초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지 않았느냐. 너희는 항상 피지배 민족이었지 언제 독립 국가였느냐"고 하면서 우리나라를 영원히 자기네 속국으로 만들기 위한 당위론을 제시하는 전략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다.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는 동이족



단군 이전에 환웅천황(桓雄天皇)의 역사 시대가 18대 1565 년 동안 있었고 또 그 이전에 환인천제(桓因天帝) 시대가 7대 3301 년이 있어서, 금년까지 9183년이라는 사실이 '삼성기'(三聖紀)에 자세히 적혀 있다.

그렇다면 '삼성기'의 문헌사적 고증이 문제가 되겠다. 이 책을 쓴 안함로(安含老)는 서기 600년경 신라 시대 사람인데 삼국유사가 나온 것이 1200~1400년경이니까, 그보다 훨씬 더 먼저 기록된 것이다. 이러한 '삼성기'의 기록을 그대로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나라 역사의 연조는 9천 년이 넘는다고 하겠다.



그럼 9천 년이란 역사를 어떻게 입증하느냐, 그러한 문헌 하나만 가지고 이것을 어떻게 외국학자들이 수긍할 수 있도록 하느냐는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이것이 합리화될 수 있는 외국 학자들의 논문이 이미 나와 있다.

일본에 와서 발표한 소련의 여류 민족학자 R.S.M 자리가시노바 씨는 "구석기 시대에 인류가 살았고 신석기 시대 초에 이미 독자적인 고도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신석기 시대 초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1만 2천 년 전이다. 그러므로 이 때 이미 우리 동이족들은 주변 국가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수준 높은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와 적대 관계에 있는 공산국가의 학자가 발표했다는 말이다. 


또 하나 있다. 역시 공산국가인 중공의 유명한 고고학자 당란이, 1977년 7월14일 자 중국 '광명일보' 를 통해 발표한 내용을 보면 "산동반도 지역에서 남한 넓이만한 광대한 지역에 이르는 대문구 문명권(大汶口文明圈)을 발견했는데, 이곳을 발굴하니까 문자가 나오고 그 곳을 통치한 소호씨(少昊氏)란 통치자 이름까지 나왔으며, 이것을 방사선 탄소 측정을 해보니까 지금으로부터 5785년 전 것"이라고 한다.


5785년 전이라고 하면 단군 건국보다 약 1500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 이미 산동 반도에는 문자를 사용한 고도의 문명국가가 있었는데, 그 통치자인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가 동이족이라는 사실이 중국 고전에 기록되어 있다.


'고사변'(古史辯)만 보더라도, 이 책은 우리가 쓴 책이 아니고 중국에서 나온 책이다. 백화문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면 "소호씨는 동이계야(東夷系也),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나온다. 뿐만 아니라 태호 복희씨(太호伏犧氏), 여와씨(女蝸氏), 소호금천씨가 전부 동이족이라는 것을, 중국사람 자기네 손에 의해 밝힌 것이다. 또 며칠 전에 <조선일보>에 한 번 나온 적이 있다.


요령성에서 5천 년 전의 여신묘가 발굴됐는데 이 묘는 무덤이 아니라 사당이다. 그리고 궁터도 발굴했다는데 이것들은 앞서 말한 당란이 발표한 유적보다 700년이나 더 이후의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러 가지 사실을 놓고 볼 때 '삼성기'의 기록이 객관성이 있고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다면, 더 이상 무슨 반증이 필요하겠는가?


아사달은 지금의 하얼빈



소호가 다스린 나라의 서울은 요동 반도에 있고, 산동 반도까지 다시 말해서 발해만 안쪽의 그 광활한 지역을 단군 이전에 벌써 통치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5천 년 전의 거대한 궁터가 발굴되었다면 이는 부족시대 미개 사회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강력한 정치 세력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중국 역사를 말하는 사람들이 주(周)나라 이전은 다 신화시대로 몰아붙였지만 은허에서 갑골문이 발굴된 이래, 또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볼 때 요(堯), 순(舜), 하(夏), 은(殷) 등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신농씨(神農氏), 황제(黃帝)를 신화적 인물에서 역사적 인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입장에 놓여 있다. 그렇지만 이런 사실들은 이미 '시전'(詩傳)' 서전'(書傳) '맹자'(孟子)를 보면 다 나와 있다. 그 가운데 정문으로 적혀 있다. 때문에 우리가 문헌을 볼 때에는 상당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식자우환이라고, 조금 안다는 학자들이 그 시대의 변천과 상황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을 신화니 비과학적이니 하면서 호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로 청동기 시대에 관한 것이 있다. 지금 고고학자들이 역사를 보는 시야는 걸핏하면 청동기를 가지고 자(尺)질을 하는데, 즉 청동기 개시 년도에 따라 한 국가의 역사 시대가 결정된다는 얘기인데, 현재 사학계에서는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상한을 3천 년밖에 안 보고 있다. 그러니까 3천 년 이전에는 국가라는 게 있을 수가 없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한강 이남에서 우리 학자들이 발굴해 낸 유물들이 3천 년 이상 소급을 못 하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군 조선의 근거지는 도대체 어디인가? 백두산 아래 아사달이다. 아사달은 그럼 어디냐? 바로 지금의 하얼빈인데, 그 지역을 발굴하고 있는 북한의 학자나 소련 학자들이 발표하는 내용을 한번 들어보자. 지난 1978년 8월14일자 북한 '중앙통신'이 밝힌 바에 따르면 "우리 조선족이 청동기를 사용한 것은 서기전 2천 년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이다. 그때 농가의 유적도 발굴했고 농기구와 오곡 씨앗까지 발굴했다" 고 했다.


그런가 하면 소련 학계는, 세계에서 가장 활발히 한국학을 연구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발간한 유 엠 푸진이 쓴 '고조선' 이란 책을 보면 "조선족은 4천 년 전부터 청동기를 사용했다. 단군왕검이 있던 유적지도 발굴했고 단군 조선 시대 중앙 행정기관의 유적지도 발굴했다" 고 했다.



이렇듯 국내의 여러 문헌뿐만 아니라 국외의 학자들이 연구하고 발굴해서 우리의 역사 상한을, 그리고 단군 조선의 건국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해 주는데도, 우리가 여기 앉아서 휴전선 이북을 못 가본다고 해서, 가서 발굴을 못해 보았다고 해서, 우리의 청동기가 3천 년 이상 소급할 수 없다고 우기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일찍이 남북 5만 리 동서 2만 리라고 하는 광활한 지역을, 한웅천황 시대가 1,565년 동안 단군 조선 시대가 2096년 동안 지속되면서 통치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은 예사로이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한웅천황 시대까지는 그만두고라도, 단군조선 시대만 해도 2096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하는 것은 동서양 역사를  통틀어서, 아니 인류 역사가 생긴 이래 한 개의 왕조가 2천 년간 지속된 그러한 역사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와 국경을 같이하고 있는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다. 하, 은, 주는 동이족이니까 말할 필요도 없고, 그 이후로 300년 이상 지속한 왕조가 단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같은 시대의 중국 역대 왕조는 300년도 채 못 가 전부 망해 버렸는데, 같은 시대의 우리나라는 2천 년이라는 긴 역사를 간직한 채 그 넓은 지역을 어떻게 통치할 수 있었느냐. 해답은 간단하다.



맹자·유교의 5륜…그 출처는 동이족 “민족사상 원형은 홍익인간”
대만대 서량지 교수 “공자는 동이족 혈통” "은나라는 동이족" 주장



홍익인간(弘益人間)은 위대한 철학


그것은 위대한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위대한 철학, 그 철학은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우리나라 교육법 제1조에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교육하라고 되어 있다. 지난번 고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지방 강연에서, 대한민국 교육법 제1조가 뭐냐고 하니까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서글픈 일이다.   



30~40년간 교직에 있으면서 교육 이념이 무엇인지, 홍익인간이란 용어가 어디서 나왔으며 그 내용이 무엇인지 하는 것쯤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홍익인간이라는 용어는 삼국유사에 최초로 등장한다. 환인이 환웅을 불러 놓고 삼위산과 태백산 그 일대가 홍익인간 할 수 있는 곳이니 너희가 가서 다스리라 하면서, 무리 3천명과 통치자의 신표로 천부삼인 (天符三印)을 주어서 보냈다고 '삼국유사' 첫머리에 나온다. 이렇듯 홍익인간이란 용어의 출처는 환인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런데 요사이 툭하면 단군을 팔고 다니는 사람들이 단군의 홍익인간을 떠들어대지만, 실은 환인으로부터 홍익인간이 나와서 환웅 이후 단군이 계승하고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그래서 교육법 제1조가 홍익인간이다. 

법 얘기가 나왔으니 우리나라 헌법 전문을 살펴본다. 제일 먼저 "유구한 민족사 빛나는 문화 그리고..." 로 시작은 잘했는데 맨 끝이 좋지 않다. 1980년이 무언가? 이건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가 1980년밖에 안 되었다는 얘기다. 자유중국 헌법에도 서기를 쓰지 않고 중화민국 75년이라고 쓰며 기독교 목사인 유태인도 연하장을 보내는 데 서기를 쓰지 않고 이스라엘 년도 5700년 이렇게 쓰는데 우리나라는 왜, 국통이 없는가? 1980년이 왜 들어가는가?



또 한 가지, "3 1 운동의 숭고한 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해 놓았는데 기미년의 선언서를 보면 연도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 조선건국 4252년, 이렇게 되어 있다. 그 조선은 바로 단군조선이지 딴 조선이 아니다. 그런데도 헌법 전문 맨 끝에는 1980년이니, 앞뒤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는 얘기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사람을 크게 이롭게 할 내용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살펴본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조화경(造化經), 교화경(敎化經), 치화경(治化經), 이 삼화개천경(三化思想開天經)이 바로 홍익인간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다른 말로 조화경을 '천부경'(天符經), 교화경을 '삼일신고'(三一神誥)라 하며 치화경을 '참전계경'(參佺戒經)이라고 하는데 이 3대 경서가 그 기본이다. 우리나라 1만 년 역사의 뿌리가 곧 이 3대경전이지 그 밖에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 모든 것이, 중국에서 말하는 소위 유교 사상 도교 사상이 파생되어 나갔다. 구체적으로 반증을 제시한다. '맹자'에 나오는 유교의 5륜은 아무리 유교에서 썼다고 해도, 미국에서 국어로 쓰는 영어가 미어가 아닌 영어이듯, 그 출처는 동이족이다. 순(舜)임금이 글(契)을 불러 가지고 사도(司徒:문교장관)를 명하고 인간에게 윤리를 가르치라고 해서 글이 만든 게 바로 5륜이다. 글은 동이족이다. 그리고 순임금도 '맹자'에 보면 "저풍(諸馮)에서 태어나 부하(負夏) 땅에 옮겨 살다가 명조에서 죽었다. 그는 동이족이다" 고 했다. 그러니까 오륜을 선포한 글(契)이나 오륜을 선포케 명령한 임금 순 역시 동이족이다. 따라서 말할 것도 없이 삼강오륜의 출처는 동이 문화다.



공자는 동이족의 혈통


공자는 어떤가. 공자는 동이족의 혈통으로 은나라 왕족인 송미자(宋微子)의 후손인데, 현재 홍콩 대학의 임혜상 교수나 대만 대학의 서량지 교수도 "은나라는 동이족이다" 하였고 '고사변' 에도 같은 얘기가 실려 있다. 또 공자 자신도 '논어' 에서 말하기를 "술이부작"(術而不作) 이라 하여 "나는 요와 순의 사상을 계승해서 서술했을 뿐이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고 밝혔다.


중국의 고전 '초사' 를 보면 "황제(黃帝)는 백 (白民)에서 태어나고...그는 동이족에 속한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니 황제의 5세손인 요임금이 동이족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동이족인 요와 순임금의 사상은 동이 사상이고, 이를 계승한 역시 동이계인 공자의 유교가, 우리의 홍익인간 사상에서 파생되지 않았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도교도 역시 마찬가지다. 노자(老子)가 황제의 사상을 이어 받았다고 해서 황노지교(黃老之敎)라고 한다. 동이족인 황제의 사상, 즉 동이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 노자의 도교이고 보면, 비록 중국 대륙에 오래 머물러 있는 동안 다소 변질되어 고구려 시대 때 역수입되어 들어왔다고 해도 역시 그 뿌리는 우리의 홍익인간 사상이다.


그렇다면 불교 사상은 또 어떤가. 석가 이전에 우리나라의 전불시대(前佛時代)에 대해서는 아도화상의 비문과 '삼국유사' 그리고 지공선사(指空禪師)의 천보산 희암사 중수문에 다 나와 있다.


석가 자신도 '대방광 불화엄경' 보살 주척품에서 말하기를 "해동 금강산에 법기(法起)라는 보살이 있어서 1200 대중을 거느리고 법을 설하고 있다. 그 불법이 거기에 “예로부터 있었다(從昔己來)"고 증언하고 있다. 이는 석가 출현 이전에 우리나라에 이미 전불시대 즉 가섭불(迦舌佛)시대가 있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섭불이 앉아 법을 설한 연좌석(宴坐石)이 신라의 월성 동편 용궁 남쪽에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옥룡집'(玉龍集)과 '자장전'(慈藏傳)에 있다.


기독교 사상에 대해서도 말한다. 4700년 전에 나온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 편을 보면 동이족이 살고 있는 이 지역 즉 "동방은 이 지구가 형성될 때 최초로 문화가 발생한 곳(東方之域天地之所始生也)"이라고 적어 놓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구상 문화의 최초 원산지는 동이족이 살고 있는 동방지역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한 단면만 말하면 법률학자인 동경 대학의 나까다(中田薰) 교수가 '고전법에 근거한 문화동원론고(文化東源論考)'에서 말하기를, 모세의 5경의 출처를 조사해보니까 함무라비 법전 속에서 나왔다고 했다. 나까다 교수는, 모세하고 함무라비 사이에 500년의 연조가 있지만, 모세의 5경은 함무라비 법전을 계승한 것이고, 이는 또 수메르법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 수메르의 역사 시초가 지금으로부터 5500년 전인데, 남은 과제는 수메르족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문제다. 영국학자 크래머(Kraemer,1897-)와 일본의 우에노(上野景福) 교수가 발표한 것을 종합해 보면 "수메르족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자생한 민족이 절대 아니고 동방에서 이동해 왔다. 그것도 문자를 가지고 왔는데 바로 태호복희가 쓰던 팔괘부호(八卦符號)와 흡사한 문자를 가지고 5,500년 전에 서쪽으로 옮겨 왔다"는 것이다. 복희와, 수메르에서 최초로 우르(Ur)국을 건설한 왕조나 최초의 수메르 메소포타미아에 문화국을 건설한 엔릴(Enril) 영웅이나 거의 같은 시대다.



그러니까 5500년 전에 복희문화를 가지고 동이족이 서쪽으로 갔다는 얘기가 된다. 무엇이 그것을 입증하는가? 수메르 말이 우리말하고 같은 것이 많이 있다는 게 최근 미국에서 연구가 돼 있다.

뿐만 아니라 수메르라는 말 자체가, 곧 '소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송화강을 우수하, 음만 그대로 따면 속말수라고 부른다. 소머리강이다. 뿐만 아니라 '삼일신고' 신훈(神訓)에 나오는 "신(神)은 재무상일위(在無上一位)하사 유대덕대혜대력(有大德大慧大力)하사 생천(生天)하시며 주무수세계(主無數世界)하시고..." 하는 것이 바로 완벽한 기독교의 일신사상 그대로다.



모든 사상 뿌리 동방에서 시작


'참전계경' 총론에 보면 "여화신이 흙으로 사람 형상을 만들고 혼을 불어 넣어 7일 만에 이루어 마쳤다(女禍鍊造成而注之魂七日而成)" 하는 것은 기독교 창세기 2장 7절하고 꼭 같다. 여호와와 여와, 야희와 여희 등은 음도 같고 행적도 같다. 이러한 내용들이나 수두 제단에 치외법권 지대가 있다는 내용, 그리고 동지에 양을 잡아 붉은 피를 문설주에 바른다는 구약의 기록은 우리나라에서 동지에 붉은 팥죽을 끓여 문설주에 바르고 하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

그러한 풍속들이 여기서 건너가 전해 내려온 것이다. 서양 사상을 종합하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즉 인본주의와 신본주의 둘인데 소급해 올라가면 이 두 가지 사상이, 수메르 문화에서 나왔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이러한 신본과 인본사상은 우리의 신인사상이 둘로 나뉘어진 것이다. 이렇듯 지구상 모든 사상의 뿌리가 동방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빛은 동방에서!"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럼 세계적으로 보아서 9천년이 되는 역사 민족이 어디 있는가? 서양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수메르족이 5500년밖에 안 됐는데... 이런 역사가 없다. 제4빙하기 이전의 역사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몇억 년 전의. 유물이 지금 발굴된다고 해도 그건 지금 우리 인류하고는 관련지을 수 없다.





제4빙하기가 이 지구를 휩쓸고 간 뒤에 살아남았던 우리의 아담과 이브 설화는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이 최초에 천하(天河)의 동서에 있다가 칠월칠석날 만나 가지고 오색 인종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사기'의 기록을 보면 366 갑자에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한 갑자가 60년이니까 즉 21960년 전에 제4빙하기가 물러가고 제일 생명력이 강한 한 남성과 여인, 나반이와 아만이 즉 나반이와 아만이가 인류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이러한 판도에서 볼 때 "동방 지역은 천지지 소시생야라" 우리동방 동이족이 살고 있는 땅은 이 지구가 형성될 때 최초의 문화가 발생 된 곳이다 하는 점이 여실히 실증이 된다 하겠다.



또 '황제내경' 소문편에 보면 "침술도 역시 동방으로부터 전해왔다(石亦從東方來)"라고 했듯이 한의학이라는 것도 우리나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요새 한의학의 한자를 "한(漢)"에서 "한(韓)"으로 바꿨다고 하는데 당연히 그래야 한다. 진즉 바꿨어야 했다. 한문이라는 글자도 마찬가지다. 자꾸 이렇게 한문(漢文)이라고 쓰니까 중국 글이라고 생각하는데, 중국이 한(漢)나라라는 국호를 정할 때 이 한문이 있었기 때문에 정한 것이지, 없었다면 어떻게 한(漢)나라라는 국호가 생기겠는가? 그러니까 한나라가 있기 전에, 이미 이 글자 한문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럼 누가 만들었느냐? 글이라는 사람하고 창힐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는데 둘 다 동이족이었다. 동이족이 만들었으면 동이족 글이지 왜 중국글이라고 하는지 알 수 없다. 지금 이 지구상 모든 사상의 원천은 홍익인간 사상이다. 그 홍익인간 사상의  내용은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이다. 다시 말하면 조화경, 교화경, 치화경이 이 원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루마니아 사람 게오르규(Gheorghiu, 1916~)가 "홍익인간이란 단군의 통치 이념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법률이며 가장 완전한 법률" 이라고 지난 1986 년 4월 18 일자 프랑스의 유력한 주간지 '라프레스 프랑세스' 지를 통해 발표한 것이다.

신부 옷을 입고 성당에서 밥을 먹는 사람이 왜 모세의 10계가 최고라고 말하지 않고 이런 말을 했겠는가? 또 그는 우리나라에 왔다 가면서 "한국 민족이 낳은 홍익인간 사상은 미래 21세기의 태평양 시대를 주도할 세계의 지도 사상이다"고 역설했다. 그 이상 얼마나 평가를 내리겠는가?



중국적인 사대주의사관(事大主義史觀) 의해 우리 역사 많이 바뀌어
일본 사람들의 식민지 교육 정책 의해 우리 역사 엄청나게 변조돼



민족 사상, 엄청나게 오도돼


우리는 등하불명이라고, 지금 주걱을 들고 있으면서 주걱을 찾고 있다. 칸트, 헤겔을 찾고 독일철학 어쩌니 하고 아까운 시간만 다 허비하고 있으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보배는 왜 하나도 개발 못 하고 있는가? 서양 사람들이 먼저 눈을 뜨고 "미래의 세계를 지배할 보배, 최고의 이념이 여기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홍익인간 사상"이라고 하는데 우리 자신은 그걸 모르고 외국 사상 속에 무엇이 있는 줄 알고 방황하고 앉아 있을 뿐이다. 그 사람들을 불러다가 자문이나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인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상들은 실로 홍익인간 사상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지, 결코 홍익인간 사상하고 대립된 사상이 아니다. 가령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유교나 불교 기독교라는 것은 홍익인간 사상과 대립적인 존재가 아니고, 홍익인간 사상의 내재적인 사상이다" 하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는,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상황이 대단히 여의지 않고 또 다른 나라와 달리 적어도 2천 년 동안 외래 세력에 밀려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아볼 수 없게 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기록에 담겨져 있는 우리 민족 사상사적인 내용이 너무나 엄청나게 오도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말을 바꾸어 이야기하자면, 중국적인 사대주의 사관(事大主義史觀)에 의해서 우리의 역사가 많이 바뀌었고, 그 이후에는 일본 사람들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의해 우리의 역사가 엄청나게 변조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서구 문화의 홍수에 밀려서 바른 사관을 잡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분통 스러운 것은 이 문제가 언제 바로 잡혀질지 기약이 없다는 점이다.


왜 이렇게 비관적일 수밖에 없느냐 하면, 현재 우리나라 각 대학의 강단에 서있는 사학과 교수들의 대다수가 일제하에 만들어졌던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또 그 밑에서 배운 사람들의 절대 다수가 각 중·고등학교에서 그러한 사관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역사적인 상황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어렴푸시라도 알고 있는 이들이, 과연 우리 국민들 가운데 얼마나 될까 하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다.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원류를 찾아서|신동아 (donga.com)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원류를 찾아서

문화탐험가 윤명철의 바이칼 기행

  • 윤명철 < 동국대 교수·역사학 >
  • 입력2005-03-23 14:32:00
 
  • 세계수(世界樹)와 새숭배 신앙의 근원인 바이칼의 샤머니즘, 강강술래와 비슷한 동작에 우주의 율려를 노래하는 부랴트 샤먼의 무가(巫歌), 백야의 땅 위에서 벌어지는 굿판…. 거기엔 고구려·백제·신라의 원형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여름날의 시베리아는 아름다움 그 자체다. 신선하고, 푸르고, 환한 아름다움이다. 겨울날이라면 새하얗다 못해 푸른 기가 도는 하얀 눈들이 천지를 뒤덮고, 늘상 제 빛을 지닌 수십 미터 침엽수들도 눈에 치여 빼꼼히 눈만 내놓고 있을 텐데.

비행기가 달린다. 눈이 달린다. 마음이 달린다. 시베리아와의 첫만남은 하늘에서 이루어졌다.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러시아의 이르쿠츠크로 향하는 비행기는 산맥의 길이가 1000km에 달하며 최고봉인 문쿠사르디크산의 높이가 3491m나 되는 거대한 지대 위를 헤엄치듯 출렁거리며 달렸다. 러시아 여인의 흰 피부 같은 산의 살결이 구름의 깨어지고 갈라진 틈으로 드러난다. 끝이 없는 수해(樹海)의 수평선에서 초록의 물결들이 넘실거린다.

언젠가 뗏목으로 대양을 횡단하다가 태풍의 뒤끝을 만나 정처없이 표류할 때였다. 사방에서 파도가 밀려오는 그 장엄함에 기가 질리면서 “아! 바다와 산이 같을 수도 있구나”하고 소리쳤다. 그런데 이젠 하늘에서 산맥의 골과 마루를 채운 나무들의 물결을 보면서 다시 한번 “아! 산과 바다가 같을 수 있구나”고 중얼거린다.

6월이 이제 반을 넘어 여름의 한가운데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데도 끝을 모르는 나무의 바다에는 눈덩이들이 아직도 곳곳에 쌓여 있거나 파도의 갈기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산 능선이 수십킬로미터씩 이어지는데도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사는 흔적을 발견하기가 영 쉽지 않다. 거의 길도 나 있지 않은 데다가, 때때로 사행천(蛇行川)만 풀밭 사이로 가늘게 흐르면서 햇살에 반사되고 있을 뿐이다.

놀랍게도 원시림 같은 산정의 높고 낮은 곳곳에 호수가 있고, 물이 차 있다. 대접 모양도 있고, 조롱박 모양도 있고, 옹달샘처럼 동그란 모양도 있다. 우리에겐 남과 북, 두 군데밖에 없는 천지(天池)가 여기서는 연꽃잎에 굴러다니는 물방울들처럼 산 곳곳에 있다. 늘상 천지의 신령스러움에 감동받으면서 자라온 나는 경이로움에 마음이 정결해진다.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

몽골의 쌍발여객기가 이르쿠츠크 공항의 한적한 활주로에 착륙했다. 금발의 늘씬한 러시아 여군의 얼음 같은 미소와 더딘 통관수속이 우리를 맞았다.

시내의 분위기는 예상보다 활달하고 밝았다. 여인들의 복장이 시원하고 노출이 심하여 눈길을 끈다. 쾌활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인상들이다. 반면에 사내들은 왠지 주눅이 들어 풀죽은 인상들이다.

백화점에는 물건이 풍성하고, 백인·몽골인·고려인 등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물건을 사고파는 정경이 단일민족의 눈에는 매우 이채롭다.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선입견만 없다면 편안하고 활력이 넘치고 아름다운 도시라는 인상이다.

거리 한복판에 전차선로가 죽죽 그어져 있고, 그 위로 발그레한 색의 긴 전차가 러시아인들의 여유있는 웃음을 싣고 천천히 지나간다.

이 도시는 코사크족을 앞세운 러시아의 침략으로 그 문이 열렸고, 1661년에 몽골과 중국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요새로서 출발했다. 중국과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도시가 점점 커지다가 결국 1764년에는 총독이 다스리는 행정도시가 됐다. 그런데 1825년에 성페테르스부르크에서 차르의 왕정통치에 반대하는 귀족들이 데카브리스트(12월당)의 난을 일으켰다. 거사가 실패한 뒤에 많은 귀족(128명)들이 이곳에 유배됐다. 그들은 엄청나게 긴 고행의 거리를 지나 이곳에 유배돼 일부는 한을 달래다가 즈나멘스키 수도원에 묻혔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 이곳을 사랑하게 되었고, 향수를 달래면서 아름다운 건물들을 짓고 정착했다. 그래서 이 도시는 ‘유형자들의 수도’라고 불렸다. 그 흔적들이 지금도 남아 이르쿠츠크를 유럽문화가 살아 숨쉬는 ‘시베리아의 파리’로 만들었다. 250만 명이 살고 있는 이 도시는 340년이란 긴 세월을 보내면서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데카브리스트 기념관과 독특한 형식의 목조건물들을 거리에 세워놓았다. 이를테면 마르크스 거리는 환한 붉은 벽돌로 쌓은 나지막한 건물들이 격조 높게 늘어서 있는 고풍스러운 도시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귀족여인들이 활보하는 듯한 환상에 빠져본다.

앙가라강의 전설

앙가라강으로 나갔다. 강변은 더운 여름날 이르쿠츠크 시민들이 피서하는 장소다. 러시아인의 시베리아 개척을 기념하는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강을 바라보며 서 있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춤을 추기도 하고, 젊은 연인들은 파라솔 안에 앉아 콜라를 마시거나 팔짱을 낀 채 환한 미소를 띠고 우아하게 거닐고 있다.

앙가라는 시내를 관통하는 강이다. 폭이 그다지 넓지는 않지만 좁지도 않고, 시원스럽고 인간에게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준다. 몇 척의 배들이 떠다니고 있다.

대략 336개의 하천이 바이칼호로 흘러들지만, 그 물이 빠져나가는 곳은 오로지 앙가라강뿐이다. 그 길이도 1779km에 달하는 긴 강이다. 이러한 신비로움 때문인지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세계적 휴양도시인 리스트비얀카에는 호수와 앙가라강이 맞닿은 한가운데에 큰 바위가 있다. ‘샤먼 바위’로 불리는 이 바위는 부랴트 샤먼이 바이칼 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장소인데, 때로는 범죄자를 처벌하는 데도 이용하였다. 해가 질 무렵에 죄인을 바위 위에 올려놓고 가서 다음날 아침에 돌아와 그 범죄자가 없으면 바이칼 신이 수장시킨 것이라 믿고, 만약에 살아 있으면 무죄라 여기고 살려주었다고 한다.

이 강에는 또 다른 흥미있는 전설이 있다. 바이칼 할아버지는 336명의 아들과 어여쁜 외동딸 앙가라를 두고 있었다. 바이칼은 앙가라를 이르쿠트라는 청년에게 시집보내려고 마음을 먹었다(이르쿠트는 물결이 사나운 강이다. 이르쿠츠크라는 도시 이름이 바로 이 강 이름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바이칼에 사는 갈매기들은 앙가라에게 멀리 북쪽에 있는 예니세이라는 용사가 더 멋있다고 자랑하였다(예니세이강은 앙가라강이 흘러 들어가 만난 다음에 멀리 북극해로 빠져나간다). 그때부터 앙가라는 예니세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를 눈치챈 바이칼은 딸을 감시하였고, 마침내 그녀는 아버지가 잠든 사이에 몰래 도망을 치려 했다. 바이칼은 잠에서 깨어나 놀라서 큰 바위를 집어던져 앙가라의 하얀 목을 맞혔고 그녀는 그만 죽어버렸다. 지금도 앙가라는 늘 예니세이를 그리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한다. 이는 바이칼 주변의 자연현상을 의인화하여 설명한 흥미로운 전설이다.

宇宙木 숭배 신앙

서둘러 시내를 빠져나갔다. 아름답고 우아한 시내가 싫은 게 아니라, 깊이 있는 문화와 아름다운 여인들이 싫은 게 아니라 어서 빨리 바이칼과 가까워지고 싶어서다.

큰 건물이 점점 드물어지고 검은 통나무집들이며 남루한 건물, 조그만 가게들이 가끔씩 나타나는가 싶더니 일직선으로 시야가 확 트인다. 버스는 몇 시간째 내내 달리고 있지만 길은 끝이 없다.

이게 바로 타이가다. 낙엽송, 자작나무, 가문비나무, 흑전나무 등이 수해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우리의 몸뚱이 옆으로는 백양나무와 자작나무들이 나름대로 자리를 양보하면서 숲을 이루어 멀리 끝간 데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우린 영락없이 수해, 숲의 바다에서 항해하고 있는 것이다. 자칫하면 표류할 수도 있는….

자작나무의 비릿하고 야릇한 내음이 공중에 떠다닌다. 사람의 혼을 홀린다는 그 향기가 이곳에선 지천으로 흘러다니고 있다. 어디서나 숲은 아름다움보다는 생기를, 눈길보다는 마음을 더 움직이게 한다.

타이가의 주인은 숲과 나무다. 숲에서 바람이 일고, 물이 흐른다. 나무에 먹을 것이 달려 있고, 그 사이사이에서 바브츠카(하얀나비)들이 날고 있다. 이곳의 나무들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상태로 하늘을 향해, 땅을 향해 아래위로 곧추 서 있다.

이러한 자연환경에서는 수풀신앙이나 수목숭배신앙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수풀이란 인간에게는 감추어진 장소다. 밖에 사는 인간에게는 피안의 영역이고 신들의 거주지다. 신들의 내밀한 속삭임이 바람결에 들려오는 곳이다. 그래서 늘 역사와 신화에서 수풀은 신비로운 자태로 등장한다.

신라는 특히 수풀과 관련이 깊다. 박혁거세는 나정 옆의 수풀 사이에서 백마가 낳고 간 알에서 깨어나 신라의 시조가 됐다. 경주김씨의 시조인 알지는 수도의 시림에서 발견된 궤짝에서 나왔다. 국호이면서 수도 이름이기도 했던 계림은 바로 이 시림의 알지신화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신화가 영남지방에서는 골매기 신앙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수풀은 나무들로 채워져 있기에 나무는 더욱더 숭배의 대상이 된다. 특히 나무들이 그 존재를 구현하고 있는 타이가에서는 더부살이하는 모든 존재물들에게 숭배의 대상, 신령스러운 대상이 될 수 있다. 고대세계에서 끝없이 솟은 나무는 날개를 잃어버린 인간에게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유일한 존재요, 인간이 살을 부비면서 체온을 주고받으면서 하늘과 교신할 수 있는 곳이다. 더구나 나무는 자체로 생명을 지니고 있으니 늘 실존에 불안한 인간이 얼마나 의지하고 싶었겠는가?

사람들은 그 나무를 세계수라고 하고 우주목이라고도 부르면서 몸과 마음을 던지고 머리를 조아리곤 했다. 큰 나무가 없는 몽골 같은 평원에서는 오보에라는 돌무더기를 쌓아놓고, 그 꼭대기에 마른나무를 세워놓기도 했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은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다. 그리고 웅녀가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정안수 떠놓고 빈 곳도 신단수 앞이다. 곳곳에 솟대가 서 있는 것도 역시 나무신앙의 한 변형이다. 신라고분 천마총에서 발견된, 흰말에 그려진 말다래도 신단수인 바로 자작나무 껍질이다.

달리는 차를 세우고, 숲속으로 들어가 천천히 흙을 밟는다. ‘꾹’ 밟히는 감촉이 흙 안에 뭔가 차 있는 듯한 느낌이다. 색깔이 거무칙칙하다. 어쩜 선연한 황토색의 우리 땅과 이리도 다를까? 나무들이 썩어서 만들어진 흙이기 때문일 것이다.

수풀이 끝나더니 갑자기 드넓은 평원이 나타난다. 물기를 머금고, 생생한 풀이 그저 온 세상의 전부인 듯 내 갈색 눈을 채운다. 수십 킬로미터를 지나가도 집 한채 눈에 띄지 않는다. 가슴이 확 뚫린다. 머릿속에 거미줄처럼 남아 있는 너절한 관념의 찌꺼기들이, 하찮은 사건의 후유증들이 단번에 날아가버린다. 늘 막힌 공간에, 재단된 넓이에 길들여진 시야는 오히려 방향을 못 잡은 채 허둥거리는 듯하다. 몸이 몸임을 느끼지 못한다. 몸뚱이의 무게와 부피를 느낄 수 없다. 그저 한줄기 바람, 한줄기 초록의 기운이 느껴질 뿐이다.

중간중간에 길 옆으로 타이가의 삼림이 자리를 잡으며 선을 이루고 있다. 수평의 면에 수직의 선을 긋는 백양나무 숲이 없다면 인간은 그 광활함에 짓눌려 정신적인 방황을 할지도 모른다.

진초록의 평원 한가운데에 까만 점들이 뭉쳐 있다. 수백 마리의 양떼가 입을 오물거리면서 풀을 뜯으면서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수십 마리의 말떼도 풀을 뜯으며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몇 마리는 겅중겅중 뛰면서 무리 주위를 맴돌고 있다. 말의 다리가 길쭉하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몸도 실하고, 덩치가 크다. 늘씬한 느낌이 든다. 몽골초원의 말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 확 느껴진다.

사람들의 윤기있는 환호성을 싣고 차는 평원을 달린다. 갑자기 군데군데 그림자가 지며 풀밭의 곳곳이 더 짙어진다.

우리의 한국 하늘은 산의 자태에 따라 조각난 채로 늘 머리 위에서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다. 하지만 평원의 하늘은 너르고, 구름도 말떼처럼 덩어리를 이룬 채 달린다. 구름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그림자를 진하게 드리운 듯하더니 차 유리에 방울방울 무늬들이 돋아난다.

번쩍번쩍. 녹색의 평원에 날카로운 선들이 급하게 그어진다. 번갯불이 평원 저쪽을 반점처럼 훤하게 밝히더니 빗줄기가 언뜻언뜻 나신을 드러낸다. 침엽수의 가는 이파리들은 불꽃을 일으킨다. 바늘에 찔린 손마디처럼 빨간 핏방울이 솟아오른다. 우레가 치고 폭우가 쏟아진다. 부딪힘이 없는, 걸림이 없는, 정제하는 관이 없는 무한 속에서 거대한 공명의 울림이 대평원을 채운다.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천둥소리다. 이미 인간의 소리들이 범람하다보니 인간의 귀, 인간의 마음은 자연의 소리, 창조의 소리, 법열의 소리를 멀리한 지 오래다. 옛 자연인들은 천둥소리가 들릴 때 세상이 열리는 소리로 알고, 그래서 우주가 그려진 북을 치면서 천둥소리를 흉내냈다.

구름이 걷히면서 빗줄기가 버스보다 멀리 사라지고, 물기를 머금은 평원은 새롭게 빛났다. 초원의 풀잎들은 물방울이 맺혀 수억만 개의 햇살로 빛나고, 때때로 차창을 스쳐가는 백양나무들은 더 새하얘진 몸뚱이에 이파리들이 푸르다못해 검푸른 빛을 띤다.

창밖으로 물기가 촉촉하게 배인 풀밭을 보다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초원의 한가운데에 연한 보랏빛 안개가 낮게 피어오르고 있다. 야생화가 밭을 이루면서, 그것도 이랑과 고랑이 있는 우리네 밭이 아니라 끝과 선이 불분명한 평원의 밭을 이루고 있다. 그 별 같은 점점의 작은 꽃들이 모여 풀의 평원이 아니라 꽃들의 초원, 꽃들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왼쪽으로도 하얀 민들레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고, 코리나야 슬레포타란 이름의 노란꽃들이 별들의 부스러기처럼 흩어져 있다.

불현듯 타이가의 겨울 정경이 궁금해진다. 말 그대로, 느낌 그대로 시베리아의 추위와 음습함과 어둠이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길을 채우고 있었을까? 타이가의 눈은 어떠한 색깔을 지니고, 어떤 모습으로 낙하를 하고 비상할까?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은 사연 많은 살춤을 추는 어린 무당의 몸짓처럼 처연할까? 신들린 남자 샤먼처럼 신비롭고 의연한 모습일까?

소설 ‘유정’의 무대

시베리아는 내게 정말 각별한 곳이다. 인간의 아름다움, 숭고한 희생정신, 책임감 있는 사랑에 대해서 절절하게 느끼게 한 무대가 바로 이곳 시베리아다. 겉표지에 소박한 삽화가 그려진 톨스토이의 ‘부활’을 펼치면서 카튜샤를 쫓아가는 네플류도프(30년이 지난 세월임에도 그들의 이름은 아직도 내 마음에 담겨 있다)의 마음으로 시베리아를 헤맸다. 남들보다 좀더 복잡하고, 좀더 진지한 열혈청년인 고등학교 1학년생에게 시베리아는 유형장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가보고 싶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빠졌을 때 시베리아는 나와 너무 가까이 있었다. 그는 옴스크에 유형당하면서 시베리아의 겨울과 여름 그리고 하늘과 평원 타이가를 체험하고 인간과 대자연의 섭리를 절절히 체험하였던 것이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가 영화로 만들어지고, ‘Some where my love’의 멜로디 속에서 라라를 태운 썰매가 질주할 때 시베리아는 비로소 아름다운 설경으로 다가왔다.

이광수도 이곳 시베리아의 바이칼을 무대로 1933년에 ‘유정’을 썼다. 최석과 남정임이 순백의 사랑을 뿜어내던 곳은 여기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으리라. 이르쿠츠크에서 멀지 않은 삼림에 두 별들의 무덤이 있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이광수는 왜 최석을 바이칼로 떠나게 했으며, 그를 사모하는 정임과 딸 순임으로 하여금 최석을 쫓아 이 먼 지역까지 오게 했을까? 순백의 자연과 순수한 사랑이라는 두 주제의 어울림도 있지만 그외에 또 다른 무엇이 있지는 않았을까?

반도적인 현실과 조각난 삶에 넌덜머리가 난 춘원은 아마도 사람들을 멀리 더 큰 세상으로 데려가서, 거칠고 웅장한 자연과 삶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최석의 부인으로 대변되는 봉건적이고, 잔일에 열을 올리면서 제 살을 뜯어먹는 사람들과 현실에 순수의 삶과 열정의 세상, 그것을 용납하는 대자연이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반도의 사람들로 하여금 광야의 의미를 절실하게 깨우치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두 연인을 그 곳에 묻어두고 온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처럼 누군가가 와서 그들의 무덤을 찾아주려니 기대하면서.

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아름답고 순수하기는 하나 난세를 살아가고 세파를 극복하기에는 너무 점잖고 힘이 없다. ‘유정’의 주인공을 맡아 예명을 받은 영화배우 남정임이 유방암을 못 이겨 요절한 것은 우연일까. 그래도 지금은 오히려 그런 사랑, 그런 순수가 그립다. 사람들이 점점 짐승과 기계의 잡종이 돼가는 현실 속에서.

확실히 그 시대에 호흡했던 사람들은 경험의 폭이 크고, 훨씬 진지했으며, 삶의 무게도 요즘의 우리들과는 달랐던 것 같다. 그들의 사고, 자유로움, 순수함이 그립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대평원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식민지 백성에게 넓이란, 무한한 평원이란 자유 그 자체였을 테니까.

실제로 그들은 독립전쟁을 벌이기 위해서 광활한 땅을 택했다. 반도의 산골을 버리고 만주로 건너간 그들은 이 참에 아예 만주라는 옛 땅을 회복하고, 멀리 서로 북으로 뻗어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었는지도 모르겠다.

독립군들은 독한 일본인 밀정과 비정한 중국관헌, 잔인한 마적떼를 피해가면서 시베리아까지 흘러 들어왔다. 조선공산주의 운동사에서도 이 지역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식민지 백성들이었지만 적어도 세계를 무대로, 그리고 이러한 시베리아를 자신들의 삶 속에 진리를 추구하는 도량으로 여기면서 살았던 것이다. 잿빛 늑대의 신비로운 털빛과 울음소리는 나라 잃은 백성들의 가슴을 어떻게 후벼팠을까? 바이칼의 얼음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어떤 상념에 젖어들었을까?

이 타이가와 대평원이 펼쳐지는 시베리아의 넓이와 대자연의 장엄함보다도 더욱 무겁고 너르고, 깊이 있고, 숱한 인간들의 이야기가 서려 있는 것이 바로 역사다.

빈 땅, 시베리아의 역사

우리는 바이칼을 만나러 가고 있다. 여섯 시간째 한국제 중고버스에 실려 타이가의 대평원을 지나 바이칼을 만나러 가고 있다. 왜 만나려는지, 꼭 보아야 하는지 아직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본능적으로 만남의 필요성을 느꼈고, 한번 그 특이하고 신성한 울림이 있는 이름을 듣는 것으로, 또 그곳이 나의 볼기에 몽골반점이라는 멍자욱을 남긴 삼신할매의 손길 혹은 탯줄을 묻은 땅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심증을 믿고 이렇게 찾아와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란 미래학이다. 과거를 만나고 미래를 만나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 현재 역사의 무대에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저녁 9시가 넘었는데도 해가 뜨겁다. 버스는 힘겨운 내색을 하면서도 열심히 달리고 있다. 바이칼 주변에 오면 해발 1000m가 훨씬 넘는 거대한 산악지대가 된다. 대평원의 넓이 때문일까, 경사도를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버스는 높은 길을 나름대로 힘들게 달려온 것이다.

우린 늘 편안하고 안온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사계절의 순환과 계절풍, 홍수와 한발 등 일정한 규칙을 가진 예측 가능한 세계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인간을 압도할 만한 크기나 넓이, 현상들을 가진 자연을 경험해 보지 않았다.

만약 먼 조상들처럼 만주벌판과 몽골의 초원을 달리고, 찬바람이 휘휘 휘몰아치는 시베리아의 평원과 타이가의 수풀 속을 헤매고 다녀보았다면, 자연과 역사에 어리광을 피우는 태도는 취하지 않았을 텐데. 그 어리광 때문에 결국 근대에 이르러 고난의 삶을 자초한 것은 아닌가? 스스로가 한(恨)이 많다고 자처했으니 티베트의 고원 몽골초원, 만주의 대삼림지대 등에서 삶을 영위한 다른 몽골로이드들이 보기에 얼마나 우스웠을까? 그들처럼 강인한 정신과 크고 건강한 세계관을 지니면서 타고난 좋은 환경에서 땅과 역사를 잘 가꾸어왔다면, 우린 어쩌면 세계사에 남을 위대한 문명을 창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 이 초원을 달리면서 고구려인과 광개토대왕을 계속 떠올리는 걸까? 그가 왔을 가능성 때문에? 물론 그의 기마군단이 이곳에 말 발자국을 남겼을 수도 있다. 바이칼 지역의 오르혼섬을 점령했다는 전설의 고구려 장군은 대왕의 휘하군단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러한 세계를 보고, 그것이 고구려정신에, 신세계 건설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 때문이다.

시베리아(Siberia)는 빈 땅이라는 의미다. 사실은 빈 땅이라기보다는 버려진 땅이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부터, 50만년 전부터 인류는 이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바이칼지역 바트순탄(Batsuntan)산맥에 있는 동굴 안에서 9세 가량의 네안데르탈계 소년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르쿠츠크시에서 80km정도 남동쪽으로 떨어진 말타(Malta)유적에서는 구석기시대 말기의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또 부레(Buret)유적에서는 맘모스의 상아를 깎아서 새, 나체 여성, 임부상 등을 부조하였는데, 이는 다산과 풍요를 비는 주술적인 의미가 짙다.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6000년 전부터 시작되어 많은 유적들이 아시아지역에서 발견되었다. 대다수가 예니세이강 중류, 특히 일찍부터 철을 채취한 야철술이 발달한 미누신스크 분지에서 주로 발견되었다. 앙가라 유역의 이르쿠츠크와 브라츠크 주변지역, 레나강 상류 지역의 묘에서는 활과 화살, 토기, 마제석부, 연옥제, 돌도끼 등이 나왔다. 이들 신석기문화는 아파나시예프(Afanasiyev), 안드로노포(Andronovo), 카라수크(Karasuk)로 이어지는 청동기문화에 계승되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는 우리의 청동기문화가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배웠다.

바이칼지역의 기하문 토기는 북만주의 송화강과 눈강 유역에서 화려한 꽃을 피운 다음에 만주를 거쳐 한반도 서북부, 한반도 남부 및 일본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특히 바이칼 유역은 연옥의 산지인데, 멀리까지 교역하였다. 그 가공기술이 발해만 유역의, 우리와 관계깊은 홍산문화(BC 4000∼BC 2300)에 전수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렇게 문화가 발달해서인지 시베리아-예니세이강 중류, 앙가라강-레나강 상류 지역은 동부유럽평원과 우랄산맥지역과 함께 시베리아 3대 예술의 중심지로서 암각화가 많다. 동심원을 주로 표현하고, 사냥장면을 그린 암각화는 연해주를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내려와 울주군의 암각화들에 영향을 준 듯하다. 최근에는 한국암각화회원 등 학자들이 이 지역을 방문하면서 상호 연관성을 연구하고 있다.

한편 바이칼에 살았던 몽골리안들은 신석기시대를 기점으로 아무르강을 따라 북만주지역으로 들어오고, 일부는 몽골초원을 경유하여 중국 동북부 발해지역과 중국 서북부 등지로 남하한다. 이러한 문화이동과 현상들 때문에 바이칼지역은 우리 문화의 원류로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우리가 이곳을 찾은 목적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러한 민족의 뿌리를 찾는 작업이다. 망망대해의 한가운데 떠 있는 뗏목을 찾는 것처럼 지난한 작업이지만, 가능성은 늘 열려 있다. 지금 내 검은색 가죽지갑 안에는 단군영정이 들어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기후의 변동으로 사람들이 살지 않는 땅, 얼음과 눈보라, 빼곡하게 들어찬 타이가 숲으로 변신해 버렸다. 그리고 야쿠트, 부랴트, 에벤키, 퉁구스 등 몽골로이드의 여러 소수 종족들만 번갈아가며 혹은 지역을 달리하면서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거주해 왔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보내오다가 17세기에 이르러 러시아의 개척과 약탈이 시작되었고, 후에 다시 모피상들과 유형자들이 정착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던 것이다.

유르타에서 맞는 호수의 밤

이제 오르혼(Olkhon)섬이 가까워지고 있다. 칭기스칸의 무덤이 있다는 전설이 있고,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원향인 신비의 섬이다. 거리의 이동은 시간의 이동, 역사의 이동으로 전화하고 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에 차는 20호 남짓한 마을을 지나 오르혼섬으로 건너가는 메레에쓰 선착장에 닿았다. 거의 10시가 다 돼가는 시각이다. 눈빛 같은 백무지개가 호수 위에서 하늘로 오작교처럼 걸려 있다. 햇살이 축축해지고, 바이칼의 물빛에 젖은 풀들도 습기를 머금어 퍽이나 부드럽고 목가적으로 보인다. 풀을 뜯어먹는 얼룩소 한 마리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어둠을 불러들이고 있다. 바이칼의 호반에 어둠이 스며들고 있다. 드디어 바이칼의 물을 몸에 적셨다.

생나무의 송진 냄새가 가시지 않은 배를 타고 오르혼섬에 닿자마자 곧 잠이 든 모양이다. 웅성거리는 분위기에 눈을 떠보니 황량한 언덕과 마른 고사목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햇살의 흔적에 나신을 드러내며 불안의 신화를 노래하는 듯한 곳이다. 유르타(몽골의 겔과 같은 이동식 주거) 몇 채가 하얀빛으로 썰렁하게 원형을 이루었다.

전기도 없어서 주위는 캄캄했다. 아무리 백야라만 이미 날을 넘겨 12시가 넘은 시각이다. 달은 아직 뜨지 않았다. 우리가 얼마나 당황하고, 놀랐냐 하면 바로 그 아래에서 바이칼의 물이 빛나고 있는 사실도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았을 정도다. 망연자실한 우리들은 어둠 속에 방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홀린 듯 넋나간 표정을 짓던 사람들의 입에서 불평이 쏟아져 나온다.

“우린 선사시대에 와 있는 거야.”

“우린 지금 쥐라기공원에 있는 거야.”

얼마나 급조한 건물인지 한 유르타에는 아예 난로도 없었다. 주먹만한 휴대용 가스버너 2대만 놓여 있었다. 거의 블랙코미디 수준에 이르는 일들이 현실로 나타났다. 식당에 끌려 들어간 사람들은 다시 한번 경악했다. 새벽 3시 반에 몽골의 초원을 출발하고, 오후 3시에 러시아식당에서 대충 점심을 때운 사람들 앞에 놓인 것은 그 유명한 러시아 흑빵조각뿐이었다. 마실 물조차 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바이칼 호반의 유르타에서 자작나무 잎으로 만든 마사지용 비를 사용하여 사우나를 하면서, 모닥불에다 양바비큐 요리를 먹는 꿈을 갖고 왔는데. 이렇게 맞이한 바이칼의 기묘한 첫밤은 유르타의 어설픈 침상 위에서 깊어갔다.

호수의 밤은 고요다. 침엽수의 끝에 별빛이 걸려 파르르 떨고 있다. 하늘의 그림자가 호수 위를 배회한다. 건너편 산이 별빛에 하얀 몸을 언뜻언뜻 드러내고 있다. 유르타의 생나무 냄새가 터무니없이 큰 천장 구멍을 통해서 배어든 바이칼의 밤 내음과 빚어져 추위에 떠는 우리의 코를 감동케 한다.

밤이라 그런지 호수의 무게, 역사의 무게가 진중하게 감지된다. 갈색 곰이 할퀸 호수의 밤, 잿빛 늑대의 울음소리가 물결을 일으키는 바이칼 호반에서 우리는 이제 잠이 든다. 고요가 고요를 삼키는 곳. 바이칼의 고요를 안고 편안하게 잠을 이룬다.

새벽이 날 깨웠다. 백야의 북국에도 새벽은 있다. 그믐달이 처연하고, 육감적으로 흰빛을 토한다. 바이칼은 기가 꽉 차 있다. 만져지는, 가슴으로 만져지는, 머리칼로 만져지는, 콧김과 입술로 만져지는 생(生), 푸른 덩어리로 꽉 차 있다. 북국에도 샛별은 햇살을 대신해 어둠과 마주하면서 여전히 빛을 발한다.

바이칼은 소리 없이, 생명의 소리를 지르고 있다. 환한, 발그레한 안개의 몸으로 색깔과 마음을 하늘과 수풀과 우리들에게 내보이고 있다. 환한 살결 위로 신비로움이 퐁퐁 뛰어다니고 말간 물속으로 백야가 흘린 햇살이 스며든다. 생명의 기쁨이 하늘로 솟구친다. 바이칼은 두께와 부피가 없다. 밝고 맑고 환할 뿐이다. 이 신비함은 어떻게 생겨난 건가? 독특하고 생동감 있는 이름 때문인가, 아니면 오랫동안 씨앗을 뿌리고 키우며 열매를 간직해 온 역사 때문인가, 아니면 끝을 모르는 깊이 때문인가? 바이칼이 무게로, 깊이로 마음을 채워간다.

바이칼이란 독특한 울림을 지닌 이 이름은 태생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이곳에 오래 전부터 살았으며, 바이칼의 주인이라 불린 사람들이 브랴트족이다. 그들은 몽골의 한 갈래다. 우리와 외모가 비슷하고 유사한 신앙과 풍속을 지닌, 우리처럼 하늘과 물의 신령함을 아는 사람들이다. 혈통적으로도 우리와 관련이 깊을 가능성이 높다. 한 부랴트 샤먼이 오르혼섬의 메마른 구릉을 달리면서 나직하게 말해 주었다.

“원이름은 ‘바이갈 달라이’다.”

그 아름다운 소리는 바이칼의 대자연을 찬미하고 신의 섭리가 담겨 있는 대서사시의 호리병 꼭지를 열라는 계시다. ‘바(베)이’는 멈추다, ‘갈’은 불, 그리고 ‘달라이’는 몽골말로 바다라는 의미다. 러시아인들이 ‘갈’ 발음이 안되니까 ‘칼’로 부른 것이다. 그러니까 ‘불이 멈춘 바다’ 그것이 바로 바이칼의 태생인 것이다. 그게 2500만년 전의 일이다.

불과 물의 만남은 또 다른 생명의 씨앗을 잉태하는 법. 나무와 풀들이 자라고, 늑대와 사슴 곰들이 살았고, 물 속에는 강물을 타고 온 수달과 멀리 북극해에서 온 물개, 오물 등 각종 물고기들이 살았다. 이렇게 온갖 생명의 씨앗들이 바이칼과 주변에 뿌려지고, 그래서 바이칼은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 되었다. 사람들은 바이칼에 오면 막연하게 생명의 기운을 느끼고, 신비함에 몸을 떨며, 왠지 낯설지 않은 곳, 언젠가 한번은 온 듯하다는 친숙한 느낌을 지닌다.

과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바이칼의 비밀을 풀고 싶어했다. 그러다가 극히 최근에 들어서서야 물결의 껍질을 하나씩 벗기면서 물속으로 들어가 그 내밀함의 실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길이가 636km, 최대너비 79km, 면적 3만1500km2. 초승달 모양으로 북동에서 남서쪽으로 길쭉하게 뻗어 있다. 둘레는 2200km로 담수호로서는 가장 넓고, 최대심도가 1742m로 가장 깊은 호수다. 1990년 6월에는 미소 합동조사단이 420m의 깊이에서 뜨거운 물이 솟는 구멍을 발견하였다.

바이칼은 북방 땅에 삶과 문화의 둥지를 틀었던 모든 종족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사연과 의미를 간직한 공간이다. 그래서 제각기 이름을 지어서 불렀다. 부랴트보다 먼저 살았던 야쿠트인들은 자신들을 ‘사하’라고 칭하면서, 이 호수를 ‘바이쿨’로 불렀다. 풍부한 호수라는 의미인데, 물고기와 새가 많기 때문이다.

퉁구스인들은 ‘라무’라고 불렀는데 비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흉노족(후에 훈족)들은 바이칼을 ‘텡기스’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천지(天池)인 것이다. 텡글은 알타이어의 투르크 계통에서는 하늘을 의미한다. 흉노의 왕은 그래서 하늘의 자식 즉 ‘텡리(텡그리 등)고도’라고 부른다. 육당이 단군의 또 다른 표현인 당굴의 어원을 텡그리에서 찾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먼 곳, 서역을 지나 알타이를 넘고 초원을 수천 킬로미터 지나서 있는 아라비아인들은 바흘아하바카(먼 북동쪽의 호수)라고 불렀다. 중국인들도 베이해(北海)라고 불렀는데, 옛날 이야기(15세기 무렵)에는 이 곳에 중국인 포로들도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확인할 수는 없지만 고구려의 장수가 오르혼섬을 정벌했다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물론 칭기즈칸의 무덤이 있다는 충격적인 전설과 함께.

우리는 아득하게 생각하는 이 시베리아지역의 바이칼이 사실은 인류의 역사, 몽골로이드의 역사에서 보면 혈통이라는 인연상으로도 가깝고,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문화의 접촉 면에서도 멀지 않고, 사실 거리로도 그리 먼 곳은 아니다. 한번의 이동거리가 몇백 킬로미터 몇천 킬로미터씩 되고, 이동시간을 한달, 1년 단위로 하는 북방 유목민에게 바이칼과 북만주 그리고 남만주는 영 만날 수 없는 공간이 아니라 초원의 길로 연이어진 공간이기 때문이다.

바이칼과 백두산 천지는 쌍생아

언덕에서 바라보면 시야는 온통 물이다. 바이칼은 물 그 자체다. 말간 물, 환한 파란빛이 도는 물, 연하고 부드러운 물이다. 안개조차 음습하거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호수라면 육지와 짝을 이루는 물이다. 육지의 물이 담겨 있고, 육지의 다른 한 부분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바다가 호수와 다른 것은, 단순한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독립성과 자기 완결성이다. 그래서 경외심과 위대함을 느낀다. 그런데 바이칼은 바다 같은 호수다.

사람들은 바이칼에 대해서 지레 겁을 먹고 찾아오는 경향이 많다. 특히 조그만 반도 땅에서 온 우리들에게 바이칼이란 하나의 나라다. 거기다가 시베리아라는 얼음과 유형장, 소련 등등 어둡고 슬픈 무거운 이미지가 겹쳐 바이칼은 압도적이고, 강력한 느낌을 줄 것이라고 믿어왔다. 일리야 레핀은 혁명이 성공한 후에 유형장에서 돌아온 혁명가들의 처참하고 허무한 몰골을 소름끼치도록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내 눈과 마음을 채우는 바이칼은 아름다운 생명의 덩어리다. 사람들과 더불어 생명을 나누고 받으며 존재하는 믿음직한 연인이다.

북국에 사는 종족에는 물(primitive water)과 관련된 신화가 많다. 바이칼은 물이고, 물은 현실이고 생명이기 때문이다. 바이칼은 그들의 삶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미우나 고우나 같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

바이칼은 북방세계의 모든 것이 탄생하는 자궁이다. 그래서 신성한 하늘에 있는 연못이다. 그리고 남쪽에도 있으니 그것이 백두산의 천지다. 이렇게 북방사람들에게 천지는 북과 남에 각각 하나씩 있는 쌍생아다.

다만 남천지는 바이칼보다는 관념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규모는 작지만 가장 높은 산인 백두산의 꼭대기에 물이 깊게 차 있고, 신성한 기운을 뿜어내며, 화산 활동의 흔적이 밖으로 드러나 있어 경외심을 한껏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대삼림과 높은 고원으로 둘러싸여 사람들이 범접하기 힘든 위치에 있다.

아마 북방에서 남진해온 종족들에게 백두산의 천지는 바이칼을 떠올리는 의미의 장소며, 그래서 백두산(태백산·불함산·도태산·개마산 등)이란 명칭과 아울러 천지는 이 지역에 정착한 집단에게 존재의 근원을 의탁한 신성한 장소였던 것이다. 이제 남천지의 백성인 우리들은 역으로 또 하나의 원향인 북천지를 향해서 이렇게 온 것이다.

그런데 광개토대왕군은 이 오르혼섬을 보았을까? 바이칼의 푸른 물을 보았을까? 순례자의 발길로 이곳을 찾고 이 물에 목을 축이면서 하늘을 우러렀을까? 장수대왕이 세운 광개토대왕릉비의 첫 구절에 따르면 주몽은 나라를 세우러 가면서 “난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이라고 선언하였다. 그 물의 신인 하백의 원 터가 이곳 바이칼이 아니었을까? 동명왕의 어머니인 유화, 그 어머니의 어머니들은 이곳에서 내려왔을까?

나무꾼과 선녀 설화

바이칼을 무대로 한 부랴트인의 설화에 강원도 금강산에서 전해 내려온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와 유사한 것이 있다.

호리도리라는 노총각이 어느날 바이칼에 가서 말없이 너른 물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때 오리, 갈매기, 백조 등 물새들이 어울려 놀고 있는 파란 물결 위에 유난히도 곱고 아름다운 백조 한 마리가 날갯짓을 하면서 내려오더니 물위에 사뿐히 앉아 어여쁜 선녀로 변하였다. 그러더니 찬란한 옷을 훨훨 벗어 호숫가에 놓고, 눈부신 알몸으로 물속에서 즐겁게 헤엄을 쳤다. 호리도리 청년은 바위 뒤에 숨어서 넋을 잃은 채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곤 살금살금 기어가 선녀의 옷을 훔쳐서는 풀숲의 은밀한 곳에 숨겨버렸다. 선녀는 당황하고 놀라 어쩔 줄 몰랐다. 부끄러운 몸을 감추면서 울면서 옷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청년은 이때다 싶어서 선녀에게 다가가 달래면서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였다. 그 선녀는 다름 아닌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원 세조)의 미희인 텡그리고아(天美)가 변해서 된 선녀였다. 정을 나눈 선녀와 호리도리는 결혼해서 아들을 열하나나 낳고 잘 살았다. 그래서 호리라는 성을 가진 11지파의 선조가 되었다.

호리는 고구려의 선주 국가인 고리족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설도 있다.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처럼 아기자기하거나 감칠맛이 부족하고, 극적인 반전도 없으며, 하늘과 물을 이어주는 모습도 없다.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두레박의 낭만과 그속에 숨어 숨을 죽인 채 하늘로 비상하는 나무꾼의 아슬아슬함도 없다. 하지만 이러한 하늘과 늘 이어지기를 원하는 인간의 바람은 곳곳에 천지와 하늘의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

바이칼은 어디든, 고개를 돌려보는 어느 곳이든, 밟고 살결을 스치는 어느 곳이든 기가 가득차 있다. 지구상의 어느 곳보다도 원시성과 야생이 살아 있다. 잔인하리만치 무성하고 격렬한 내부의 정열을 감춘 원시림의 흔적이 곳곳에 있다. 길이가 600여 km, 폭이 80km에 달하는 거대한 호수를 둘러싸고 높고 험한 산맥이 뻗어 있다. 오르혼섬에서 멀리 바라다보이는 서쪽의 호수 주변에도 거대한 산덩어리들이 남북으로 달리고 있다. 6월의 여름날, 백야가 지속되는데도 잔설이 남아 있는 것은 산이 깊고 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고귀하고 소중한 원시성이 사라지는 곳이 늘고 있다. 마구 베어낸 탓이다. 바이칼에는 구릉이 많다. 한점의 이파리도 없이, 잔가지도 없고, 그저 드러나지 않은 뿌리와 몸통, 약간의 줄기가 공중으로 뻗은 나목들이 드문드문 서 있다. 우연처럼, 정말 우연처럼 이미 생을 마감한 듯이 보이는 고목들이 흰 나목이 되어 너른 면에서 수직의 선을 긋고 있다.

그 구릉의 평면이 끝나 수평의 선이 생긴 곳에는 푸른 물이 걸려 출렁거린다. 하늘과 호수가 하나가 되어 면의 끝에서 또 하나의 너른 면, 가없는 면을 이루고 있다. 바이칼의 수면은 늘 언제나 그대로이지는 않다. 때에 따라, 필요에 따라, 더 큰 자연의 손길을 좇아 몸과 마음의 모습을 달리한다. 안개도 찼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물빛은 파랗고 환하다.

저수량은 2만2000kℓ에다, 1700여m의 깊이니 그속에 얼마나 많은 사연과 생물, 크고 작은 자연의 흐름이 차 있겠는가. 2500만년 동안 생성되고 쌓인 역사의 업이 얼마나 대단하고 무겁겠는가? 그래서인지 말갛고 파란 물위에는 신비함이 늘 안개처럼 깔려 있다. 그런데도 부드럽고 편안하고, 환한 느낌을 준다.

바이칼의 백야

오르혼섬의 서쪽 건너편에는 하얀 몸을 드러낸 산맥이 호수를 따라 펼쳐져 있다. 해발고도 1500∼2000m인 바이칼 산맥이다. 화강암인 듯 산의 몸이 하얗게 빛난다. 그리고 산 능선의 머리쯤에는 또 하나의 하얀색이 두께가 불규칙한 선을 이루고 있다. 6월 중순의 여름에도 이곳 바이칼의 산맥은 겨울의 눈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12월에서 5월 초순까지 얼음이 언다고 하나 6월초까지 얼음이 남아 있어서 러시아 당국은 비행기를 동원하여 폭격을 했고, 그 여파로 이르쿠츠크시에 홍수가 났다는 기사를 보았다.

저녁이다. 바이칼은 늘 해와 더불어 있는 곳이다. 여름에는 늘 해가 있는 듯하다. 밤 9시가 넘어도 해가 쨍쨍 내리쬐고, 바이칼의 파란 물위에는 하얀 햇살이 일렁거린다. 저녁바람을 쐬면서 석양을 바라보고 싶었다. 파란 수면 위로 번지는 황혼의 불그레한 살결이 어떻게 변하는지 눈으로 만져보고 싶었다. 손을 담가 한 움큼 떠서 이곳 사람들처럼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해가 지는 것을 느낄 겨를도 없이 시간은 흘러가고, 11시가 넘어서야 어둠이 스멀스멀 젖는 줄 모르게 배어든다. 그리고 잠시 덜 익은 어둠 속에서 잠을 청하다 보면 어느새 새벽이 다가와 해가 떠 있다. 봄 여름철에 해가 길 때는 백야현상이 있고, 그 때문에 싫건 좋건 해와 같이할 수밖에 없으니 온대지방이나 열대지방 사람들이 느끼고 맞이하는 해와는 크게 다를밖에 없다.

반면에 겨울이 가까워지고 깊어지면 해는 사라지고 어둠이 세계를 채운다. 사람들은 해가 없거나 희미한 해그림자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러니 해에 대한 그리움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더욱 절실하다. 칠흑 같은 어둠의 의미도 밝음을 맞이하기 위한, 밝음을 잉태하기 위한, 신체를 쉬게 하기 위한 시간과 공간이 아니다. 그저 그 자체가 완결성을 지닌 세계다. 때문에 이들에게 해와 어둠은 시간의 의미가 아니라 세계의 의미, 관념이 아니라 생활과 실존의 의미, 생존과 식별의 의미다. 그래서 북국의 신화에는 백신(白神) 흑신(黑神)이 동시에 등장한다.

북방종족들은 거의 대부분이 하늘과 해를 숭배하고 있다. 흉노, 몽골, 선비, 거란, 여진 등과 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우리 민족국가들은 더 말할 나위조차 없다. 동명(東明)이라는 말 자체가 해와 밝음을 의미한다. 부여와 고구려 초기의 왕들의 성이 해씨다. 그들은 국동대혈에서 해를 맞이하는 동맹의식을 거행했고 스스로를 일월의 아들, 천제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백두산은 흰 산, 즉 해가 있고 빛이 있는 산이라는 의미다. 신라의 박혁거세, 왕의 칭호인 불거내(弗矩內) 등은 다 빛을 의미하는 말이다.

백야현상은 사람의 생리현상에도 여러가지 영향을 끼친다. 불과 며칠 있는 동안에도 심리적으로 혼란을 일으키고, 컨디션에도 이상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대대로 살아온 사람들은 적응이 돼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하지만, 역시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다르다. 생활습관도 다르고, 문화도 이색적인 것이 많다. 호흡 긴 동화와 신비한 전설, 신화가 많은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여인들의 살빛이 희고, 노출이 심한 것도 부족한 해를 그리워하는 신체적 요구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러한 묘한 환경 속에서 나타난 종교가 샤머니즘이다. 엑스터시(忘我 脫我 恍惚) 상태에서 초자연적인 존재와 직접 접촉하면서 특별한 이적을 일으키는 샤먼이 중심되는 종교 현상을 말한다.

17세기에 들어서 시베리아를 정복하는 코사크 군대와 모피 장사꾼들의 행렬이 길고 추운 평원에 이어지고, 그 행렬의 중간중간 혹은 끄트머리에 학자들이 따라 붙었다. 왕성한 지적 호기심과 침략이나 약탈을 도우려는 애국심 때문에 그들은 원주민의 독특한 종교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기독교와 크게 다른 점에 당황하면서 연구를 하고, 이를 샤머니즘이라고 불렀다.

샤먼이란 말은 퉁구스, 부랴트, 야쿠트족에서만 쓰이는 사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로 바이칼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원향이다. 그래서 곳곳에 신비롭고 기이한 신들, 상징적인 문양과 묘한 기호들, 악기들로 꽉 차 있다.

바이칼에서 가장 대표적인 신은 불한(칸)신이다. 불한에는 천신(天神)의 의미도 있고, 부처의 의미도 있다. 불한산은 몽골의 시조와도 관련이 깊다. 볼테치노(푸른늑대)와 아내인 고아바랄(고운 사슴)은 큰 물을 건너서 오논강의 근원지인 불한산 속의 초원에서 바다치한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불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보면 밝음, 해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한 또는 칸은 칭기즈칸 계민가한(돌궐의 왕), 거서간, 마립간(신라의 왕)에서 나타나듯 왕을 뜻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불한신을 찾아 호숫가의 한 마을로 접어들었다. 보쉬트에는 약 1500명 정도의 주민이 어업을 주로 하면서 살고 있다. 겨울에는 영하 30∼40도까지 내려가고 눈은 많이 쌓이지 않는다고 한다.

쿠후지르 마을의 중앙로인 바이칼거리의 초등학교 안에는 오르혼섬의 역사민속박물관이 있는데, 정말 다양하고 실제적인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바이칼에 서식하는 동물·식물·어패류를 비롯해 부랴트인 등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사냥도구·고기잡이도구, 그리고 종교용 의기들도 있다. 석기 유물들도 다양하게 전시돼 있어서 오르혼섬이 이미 선사시대부터 인간들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마을을 벗어나 뒷산으로 가니 바다 같은 호수가 보인다. 바람이 불어 시원하게 머리칼을 날리는 그곳에 조금 너른 공터가 있고, 그 끝에 벼랑과 만나는 곳에 두어 그루의 마른 나무가 서 있다. 당나무처럼 갖가지 색깔의 천조각들이 매달려 있어 신목(神木)임을 알려준다.

호수 쪽을 보니 별안간 눈이 부셔 눈까풀이 파르르 떨리며 시야를 고정하기가 난감해졌다. 아침에 본 바이칼의 물빛이 떠올라 워낙 맑고 푸른 물이라 햇살에 반사돼 쏘는 빛인가 했는데, 의외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아” 하는 신음과 환희가 섞인 듯한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온다.

순백! 맑고 투명하고, 작열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바람결에 바스라져 날릴 것 같고, 손바닥에, 옷깃에 묻어날 것 같은 순백의 덩어리가 파란 물위에 뜬 채 하나의 세계로 존재하고 있다. 걸음을 옮긴다. 흰색 갈색이 바랜 듯 섞인 젖소들이 풀을 뜯으며 어슬렁거리고 있다. 바로 그 앞에는 장방형 선을 그리면서 흙의 일부가 파헤쳐져 있다. 제사유적을 발굴하던 자리란다.

위에서 보니 모래사장이 이어지다가 다시 벼랑이 솟구쳐 오르면서 좁게 오므라진 땅을 통해서 섬과 물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곶(串) 같은 형태의 바위 봉우리가 돌출되어 있다. 뾰족한 봉우리와 날카로운 능선을 지닌 바위덩어리다. 주위에서 오로지 그 덩어리만 새하얗게 빛을 내뿜고 있다. 그 아래에는 양털로 짠 양탄자의 무늬 같은 잔물결들이 일렁거린다. 파랑과 연두색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메마른 백색의 분위기가 어우러져 물빛이 햇살을 받아 일렁거리고 있다. 마실 마음조차 지닐 수 없도록 곱고 투명한 물빛이다. 마음을 정화하고 맑게 하기에 이처럼 적당한 장소가 다시 있기는 힘들 것 같다.

해골이 나뒹구는 동굴

벼랑을 타고 아래로 급하게 내려간다. 경사진 곳의 한 중간에 당나무가 서 있다. 살찐 녹색의 이파리들이 무성하게 달린 10m 높이는 족히 돼보이는 나무가 있고, 두께 4∼5cm의 눈빛 같은 자작나무 두 그루가 받쳐진 모습으로 묶여 있다. 갖가지 색깔의 천들이 묶여진 세르게라고 불리며 우리의 성황당목과 같다. 오색천이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끼는데, 유달리 파란색 계통이 많다.

파란색은 하늘을 의미한다. 어둡고 칙칙한 숲속이나 습기가 많거나 음산한 기운이 도는 곳이면 귀기가 어릴 듯한 모습이지만 너무나 밝고 명징한 분위기 때문인지 밝고 환한 신령스런 분위기가 감돌아 명랑한 느낌마저 들었다.

호반으로 내려서자 바위산이 눈에 꽉 들어찬다. 바로 미즈반도의 불칸(부랴트발음으로는 불한이다)바위다. 그 안에 13번째의 신이 살고 있다고 한다. 무당들이 제사를 지내는 동굴이 있다. 불한이라는 낱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고, 어원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브랴트인들은 부처를 표현하는 말이라고 한다.

바이칼 사람들은 여름에는 배를 띄워 오물 같은 맛있는 생선을 잡고, 겨울에는 얼음 위를 달리면서 구멍을 뚫고 네르파 같은 물개를 잡는 어부들이다. 그들이 신앙을 갖고 있고, 특히 신령스러운 현상을 지닌 자연을 숭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다른 것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데, 이 분위기는 신성을 부여하기에 얼마나 완벽한 장소인가.

포개지고 굴러다니는 바위돌들이 새하얗다. 사람들이 흩어져서 하얀 바위의 이곳 저곳에 붙어 흔적을 남긴다. 찾는다는 미명으로 사실은 이곳 저곳을 밟아보고 만져보고 살결을 부벼대며 이곳 불한신의 신령스러움을 묻혀오려는 행위 같다.

우리가 접근한 쪽의 반대편, 물이 바로 아래에서 찰랑거리는 벼랑의 중간쯤에 굴이 있었다. 샤먼스카비쉐가라는 이 동굴은 폭이 2m가 조금 넘고, 높이가 2.5m 로 불규칙한 형태의 입구와 내부를 가진 동굴이다. 흡사 고분 속 같은 내부에는 평평한 터가 없고 안쪽으로도 무너져내린 흔적이 역력하다. 원래는 무너지기 전에 양쪽으로 뚫려 있어서 한쪽의 좁은 구멍으로 햇빛이 비쳐들게 돼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를 비롯한 부여족의 설화에서 흔히 나오는 햇빛(日光) 감응 모티브의 무대가 될 만한 곳이다. 유화부인은 어두운 방에 유폐되어 있다가 빛에 쬐여 임신을 하고 알을 낳았다. 그 알을 깨고 나온 인물이 바로 주몽이다.

북방종족들의 신화에서 알은 태양을 상징한다. 해와 천신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사람이 들어오는 입구와 빛으로 상징되는 천신이 천강하는 입구가 달라야 한다. 때문에 신화적 굴은 한쪽뿐만 아니라 양쪽으로 뚫려 있어야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의 동쪽 외곽에 있는 국동대혈도 양쪽이 뚫려 있는 엄청난 크기의 동굴이다. 겔과 유르타도 천장이 뚫려 있어 신들이 해와 별빛을 타고 내려온다면 이 천장을 통할 수밖에 없다. 모든 신앙이 그렇듯이 이들의 생활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전에는 이 동굴 안에 여자무당의 해골과 개 해골이 굴러다녔다고 한다. 그녀가 밤이 새도록 바이칼의 물소리를 어둠속에 버무려 들으며 기도를 한 후에 뚫린 구멍으로 새벽빛을 보고 나와 바라본 물 빛깔은?

이 바위로 내려오기 전에 있는 수풀은 신성한 곳이었단다. 무당이 죽으면 시신을 들고 이 숲속에 들어가 화장을 해서 재를 뿌린다고 한다. 그리고 돌아보지도 않고 돌아온다고 한다.

섬의 북쪽에서는 십수년 전에 마지막 샤먼이 죽었을 때, 알몸으로 묶여 숲속의 제단에 받쳐졌으며 화장을 했다. 브랴트인들은 땅속에 매장을 하면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곳들을 매우 신성하게 여겨 주변의 나무와 덤불에 세멜가라는 부적을 매달았다.

환한 물결과 맑은 하늘, 약간의 건조한 안개가 남아 있는 묘한 분위기 그리고 순백의 바위산과 제의장소인 동굴, 오색천을 나부끼는 세르게. 이 미즈반도의 불칸 바위로 가는 무당들의 모습. 달빛이 비치는 밤중에도, 백야의 힘을 잃은 햇살을 어깨에 걸치면서, 아니면 늘 어둠에 잠겨있는 겨울날에도 그들은 어둠속을 허우적거리면서도 이 불칸바위를 찾아 발길을 옮기곤 했을 것이다.

호수 위의 고도 오르혼섬

오아시스가 사막의 한가운데 물의 섬이라면, 오르혼은 호수 한가운데 있는 흙과 바위의 섬이다. 사람들은 사막의 광대함 황량함 건조함 때문에 감동받고, 그 안에 아늑하고 푸근하고, 찰랑거리는 물이 있는 오아시스에 더 진한 감동을 받는다.

이곳은 풀도 거의 자라지 않아 밋밋하다. 건조하고 메마른 먼지가 일어날 것 같아 입을 마음놓고 벌린 채 숨쉬기조차 거북한 곳이다. 오르혼이란 이름은 부랴트 언어로 메마르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곳의 자연환경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다. 오이홍섬이라고도 하는데, ‘오이’는 ‘숲’이며 ‘홍’은 ‘작은’ 이란 뜻이 있어 오이홍은 ‘작은 숲’이란 의미도 된다.

바이칼호 안에는 25개의 섬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섬이 이 오르혼섬이다. 사실은 독립된 섬, 절해의 고도라기보다는 바이칼 주변의 육지와 연결돼 육지 분위기가 물씬 밴 섬이다. 서쪽에 붙어 있는데, 섬과 육지의 대안과는 20여km에 불과한 곳도 있다.

여름에는 거의 비가 안 온다. 서쪽에서 비를 머금은 구름이 다가오더라도 프리모르스키의 바람막이 지역에만 약간의 빗방울을 떨어뜨리고 만다. 그러니 섬에는 거의 비가 안 온다고 하는 편이 맞다. 대신 바람이 많이 부는데 ‘사르마’라는 바람은 시속 160km의 엄청난 속도로 섬을 휩쓸고 다닌다. 마찬가지로 겨울에도 눈이 별로 많이 오지 않는다.

자연현상으로만 보면 오르혼섬은 메마르고 황량하기조차한, 바람이 불면 먼지 때문에 목이 상할지도 모른다는 근심을 갖게 한다. 그럼에도 수상한 선입관을 지닌 탓인지 이 섬에서는 모든 것이 신비하고 뭔가 의미를 간직한 듯이 여겨진다. 뜨겁게 익어가는 얼굴 위로 스치는 바람 한줄기마저도 예사롭지 않고, 힘겹게 터덜거리며 달리는 차의 유리창을 스쳐 지나는 황량한 정경들도 뭔가 대단한 사연을 지닌 듯 느껴진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양떼를 몰고 다니다가 멀리서 마주치는 살빛이 누런 부랴트인이나 마을에서 만나는 창백한 러시아인들도 왠지 우리와는 다른 점이 적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현대문명의 하수구에 빠져 허우적거린다는 콤플렉스 때문이리라. 이러한 분위기다보니 섬에서는 마음이 진지해지다못해, 무겁고 때로는 육체적인 피로와 함께 피곤함마저 든다.

구릉이 산처럼 이어지는데, 도로는 구릉 사이의 능선 부분을 사선으로 휘감고 돌면서 뻗어 있다. 나무는 물론이고, 커다란 바위도 큰 돌도 없다. 심지어는 자그마한 돌멩이조차 별로 없어 혹시 거대한 신이 마음먹고 이 섬을 싹 청소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말끔하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때때로 사람 크기만한 바위 같은 돌들이 도로 옆이나 구릉의 한가운데에 드문드문 놓여 있다. 텅빈 공간에 놓여 있는 몇 개의 덩어리들, 그것은 돌이든 사람이든 나무장승이든 어쩔 수 없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섬의 돌덩어리들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오르혼에서는 대자연의 아름다움 외에도 무엇인가가 있는 것을 느낀다. 신령스러운 기운이랄까? 호수를 감싸고 있는 또 다른 무엇인가가 우리의 마음을 휘젓는다. 아마도 범상치 않은 이곳의 역사가 한몫을 하는 듯하다.

따지고보면 이곳의 역사는 대자연에 비견될 만큼 거대한 흐름을 갖고 있다. 이 근처에서 일어나 동서로 종횡무진하면서 세계제국의 토대를 건설한 칭기즈칸의 무덤이 이 섬에 있다는 전설이 있다. 북방의 종족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직접 간접으로 이 지역을 거쳐가거나 살았다. 고구려의 조상격인 고리족의 원거주지가 이곳이라는 설(최근 강원대 주채혁 교수가 주장하고 있다)도 있다. 우리가 본 쿠르간 도시유적은 잘 쌓아진 성터며 위치로 볼 때 심상치 않은 감정을 일으킨다.

유목지대에서는 수다한 하늘의 별들만큼, 막막한 초원을 채운 풀만큼 많은 부족들이 역사 이래 생겨나고 스러졌다. 이들은 필요에 따라 뭉치고 또 흩어지면서, 자신들을 나타내는 이름을 가졌는데, 때로는 그 이름이 많은 부족들을 통합한 대표적인 이름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워낙 이동하면서 피가 섞였기 때문에 혈통을 따져볼 때 과연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얼굴이 누렇고 형태와 골격도 유사한 몽골로이드들이다. 더구나 비슷한 자연환경에서 살아오며 사는 방식도 그리 다르지 않아서인지 생활 풍속이나 습관, 언어는 물론이고,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신화도 매우 흡사한 것이 많다.

하지만 그들은 공존하기가 힘들었는지, 기회가 없었는지 모르지만 원주민인 퉁구스, 에벤키, 야쿠트, 부랴트 등은 번갈아가면서 이곳의 주인노릇을 하였다.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초원에서 방목을 하는 유목인들이 부단하게 이동을 하면서 만나고 부딪히고 타협하고, 때로는 종족의 운명을 걸고 싸웠으니 얼마나 기가 막힌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을까?

바이칼 전체를 보면 지금도 많은 부족들이 주변의 곳곳에서 살고 있다. 오르혼섬은 스탈린시대에는 수용소였으나 현재는 4000여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부랴트인들은 500여 명 정도가 양치기를 하며 살고 있다.

바이칼호에 서식하는 물개

바이칼호엔 180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며, 그중 75%가 이 호수에만 있다. 바이칼 바다표범과 해면(海綿)도 있다. 어업이 발달하여 곳곳에 어항이 있는데, 특히 리스트비앙카, 바부슈킨, 우스티마르구진 등이 비교적 큰 어항이다. 북쪽 연안에는 바이칼-아무르 간 철도(BAM)가 지나는데 겨울에는 얼음 위에 기차의 선로가 놓이기도 했다. 남쪽 연안과 남서쪽 연안에는 우리가 탄 시베리아 철도가 지나며, 그 중심도시가 이르쿠츠크다.

바이칼에는 네르파라는 담수물개가 유명하다. 북극해와 3220km 떨어진 이곳에 어떻게 해서 물개들이 서식하는지는 알 수 없다. 길이가 1.5m에 무게가 130kg인 네르파는 4개의 흰 대리석 섬들로 이루어진 우쉬카니 군도에 특히 많이 산다. 은빛 가죽이 아름다워 사냥꾼들 침을 흘리게 하는데, 약 10여 만 마리가 있지만 1년에 6000마리까지만 사냥할 수 있게 제한한다. 물개사냥꾼들은 불한을 호수의 신으로 숭배하고, 항해를 할 때는 보드카를 바치면서 안전을 기원한다. 호수 위의 카우보이인 사냥꾼들은 겨울에는 말이 끄는 썰매를 타고 얼음낚시를 한다.

특산물인 오물이란 물고기는 20cm 정도 크기인데, 몸 성분의 40%가 지방이다. 몸을 통해 글자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투명한 것도 있다. 주민들은 훈제를 해서 두고두고 겨울에도 먹는다. 민가에 들어가 살펴보니 뜰안 담쪽 구석에 벽돌창고를 지어놓고(처음에는 화장실인지 알았다) 집안의 난방시설과 땅속에 묻어놓은 토관을 통해 연결해 놓았다. 불을 때면 연기가 자동적으로 흘러나와 곶감처럼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오물을 말렸다. 연기에 그을린 기름투성이의 오물은 그냥 씹어먹어도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는 맛있는 물고기다.

또 바이칼 호수가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이유를 밝혀주는 물고기들도 있다. 이곳 주민들은 모피를 생산해서 돈을 벌기도 한다. 특히 러시아인들은 초기에 이 모피 때문에 정착을 했을 정도로 질 좋은 모피가 많이 생산된다. 여우, 흑담비, 다람쥐, 곰, 범 등 아주 다양하다. 특히 담비는 이 지역뿐만 아니라 대흥안령 지역에서도 생산되어, 고구려인들은 이를 구해 중국 남방지역에 파는 중계무역을 하기도 했다.

오르혼섬을 찾은 우리는 이 섬이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원향이므로 당연히 샤먼을 만나고 싶었다. 그를 마중하기 위해 나는 뼈에 금 간 다리를 이끌며 황량한 오르혼섬의 내부를 달렸다. 첫만남은 대낮, 햇살이 뜨거운 황량하고 메마른 구릉 위에서였다. 무릎에 닿을 정도의 작은 나무마저도 한 그루 없다. 때때로 덤불 같은 나무들이 뭉쳐 있고, 들꽃들이 질기고 강인한 눈초리로 낯선 이들을 바라보는 황량한 구릉지대다. 멀리 높아 보이는 구릉의 꼭대기에는 오로지 하늘이 있을 뿐독수리 한 마리가 지친 듯 크고 천천히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그와 나의 만남은 범상한 것은 아니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가진 본능적인 순수함과 격의없는 태도로 나를 대했지만, 나 역시 이곳에서는 바이칼의 마음으로 움직이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교감이 이루어졌다.

그는 발렌타인이라는 러시아 이름과 박수라는 부랴트 이름을 지니고 있다. 부랴트인은 우리보다 더 몽골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얼굴이 둥근 편이다. 그는 현재 학교 교사이고, 지역 박물관의 관장이다. 그러면서 샤먼이다. 우리의 통념으로 보면 이해가 안되지만 이곳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샤먼이 해야 하는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가 교사 역할이다. 다만 어린 학생들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 전체에게 우주의 섭리와 자연의 운행, 사람이 할 도리, 그리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지혜와 지식을 전해주는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러니 지적으로 최고의 엘리트가 샤먼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서구식 교육과 서구식 종교만을 우월한 것으로 인식하는 우리의 인식이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이다.

메마른 오르혼의 구릉 위를 스쳐오는 바람이 그의 머리칼에서 뭔가 웅얼거리고 스쳐간다. 그의 두터운 입술은 바이칼의 역사와 자연 하늘과 땅의 역사에 대해서 시를 읊어대었다.

“오르혼의 하늘에 독수리가 날고 있다/ 이 새들의 집은 산의 꼭대기에 있다/ 높다란 산 위에서 그들이 세계를 살펴보고 있다/ 여러 소리들이 있는 초원에서 유목민들이 양을 키우고 있다/ 이 땅 위에 흉노 선비 오환 퉁구스 에벤키 키르기스 등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또 다른 오르혼의 역사를 이야기했다. 그와 걷고 있는데 구릉의 곳곳에 하얀 돌멩이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바닷가의 모래사장에 커다란 조개껍데기들이 놓여 있는 것 같다. 다가가서 보니 모두가 해골과 뼈들이다.

바람에 쓸리고, 햇빛에 타고, 빗줄기에 인성분마저 녹아버려 허옇게 변색한 여러 동물의 해골들이 불규칙하게 나뒹굴고 있다. 부랴트인들이 하늘과 신들에게 성스러운 제사를 지내는 의미가 담긴 장소다.

새 숭배신앙

그들은 말과 소를 잡아 하늘에 바치는 의식을 행한다. 그 다음에는 둘러앉아 고기를 같이 먹고, 해골과 뼈는 거두어 이곳에 놓아둔다고 한다. 마치 산골처(散骨處)인 것 같다. 구멍이 숭숭 뚫린 말과 소의 해골이 아래쪽 물가를 향해서 가지런히 놓여 있다. 마치 그 자리에 있기 위해서 제사에 희생물이 된 것처럼. 그런데 어떤 것들은 불규칙하게 마구 굴러다니고 있고, 뼈다귀는 함부로 내던져진 듯한 인상이 든다.

마치 이리떼에게 습격을 당한 공동묘지의 을씨년스러운 정경이다. 아마도 늑대나 독수리들이 배회하다가 먹을 것이 생겨 한바탕 휘젓고 다니면서 잔치를 벌인 흔적이리라. 풍장이나 조장도 따지고보면 이와 동일한 모습이리라. 우주와 쉽게 합일되고, 공평하게 나누어 갖는 지혜이리라.

손끝을 뻗어 대보니 뼈에 힘이 없고, 푸석푸석 소리가 울려나오는 듯하다. 모든 진이 다 빠져나가 버려 칠흑 같은 밤이 된다 해도 희미한 인불조차 나올 것 같지 않다. 부랴트인에게는 신성한 장소의 의미있는 광경일지 모르지만, 만약 우리가 밤에 이 광경을 보았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황량한 구릉, 나무 한그루 없어 모든 움직임이 드러나는 선, 백야의 희끄무레한 달빛 아래 한쪽에는 바이칼의 물이 어슴프레 몸과 살결을 드러낸다. 그 어둠도 밝음도 아닌 묘한 분위기 에서 해골과 뼈다구들이 하얗게 빛나고 있다. 이때 구릉 저쪽 위의 긴 선에서 잿빛늑대의 실루엣이 울음소리와 함께 나에게 다가온다면.

부랴트인의 신앙심은 우리들의 그것과 다르다. 절집이나 교회에 가서 건물과 조상들에게 의지하고, 매개자인 그들이 마치 절대자인 양 거들먹대는 권력의 인질이 돼 우주의 본질과 멀어지고 인간에게서 소외되는 우리와 다르다. 그들은 늘 우리가 신령스럽다고 여기는 것들을 마음에 두고 있다. 길을 걸을 때, 양떼를 몰 때, 석양을 바라볼 때, 바이칼의 환한 물빛을 바라볼 때 하늘과 물, 자신을 생각한다. 그들의 신앙이란 별다르지 않다. 유별나지 않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다. 남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틈 나는 대로, 필요한 대로, 흐르는 물길처럼, 바람결처럼 절로 마음을 보내고 손짓 몸짓을 하며, 스스로를 정화하고자 한다.

구릉과 초원을 달리다보면 길가에 서 있는 세르게가 눈에 띈다. 나무를 깎아 1개, 혹은 3개를 연이어 세워놓고, 몸통엔 천조각과 색끈을 묶어 바람에 날린다. 나무끝에는 새를 깎아 앉혀놓은 것도 있는데, 이 새는 독수리다. 이곳에서는 태양의 새인 까마귀가 지옥의 사자이기 때문에 흉조로 여기고, 대신 독수리를 길조로 여긴다. 사람의 혼령을 주기도 하고 뺏어버리기도 하는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새다. 불한신의 두 아들이 독수리이고, 독수리는 제왕이다.

이러한 새숭배 신앙은 과거에는 동북아시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신앙형태였다. 천둥새라고 불리운 곳도 있다. 심지어는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에게서도 독수리 신앙의 흔적이 보인다. 특히 우리는 솟대라고 해서 마을의 입구나 성스러운 장소의 앞에 세워놓았다. 어떤 것은 몽고의 오보에와도 유사한 형태다. 돌무덤을 쌓아놓고 가운데 나무를 세운 것도 있지만, 단독으로 서 있는 것도 있어 약간 차이가 있다.

첫날 섬으로 들어와 밤길을 달리다가 갑자기 누군가가 차를 세우는 바람에 약간 긴장을 하면서 차를 멈췄다. 그리고 부랴트인과 러시아인인 블라디미르, 세르게이가 서로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는 장면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어두움 속에서 잠시 대화가 이루어지고 세르게이가 동전 몇 개를 던지는 것으로 이 일은 마감되었다.

마을에 특히 외지인이 들어올 때에는 이 세르게(바리사) 앞에서 일종의 예를 표해야 하는 것이다. 동전 몇 개도 좋고, 물 한 병도 좋고, 과자 한 개라도 좋은 것이다. 이 의식(?)을 항하면서 우린 오르혼섬이 일상의 공간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이러한 세르게는 계속 만들고 있는 듯, 어떤 것은 낡고, 오래됐을 뿐 아니라 천도 바래고 너덜너덜하지만, 어떤 곳에는 새로 깎아 격식을 차려서 잘 만들어놓기도 하였다. 오히려 신비감이 떨어질 정도의 새것도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이종교의 침입

서부유럽의 백인들이 아프리카의 대륙 곳곳을, 또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를 점령하고, 인도양을 넘어 아시아로 탐욕의 혀를 날름거릴 때, 러시아인들은 동쪽으로 초원과 얼음땅을 가로질러 시베리아로 들어왔다. 사람이 사는 이곳을 빈 땅이라고 부르면서, 마치 유럽인들이 인디언의 오랜 터전을 신대륙이라고 부르면서 침략한 것과 똑같이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동으로 동으로 전진했다. 과거에는 동에서 서로 전진하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 심장부 평원을 몽골로이드가 차지했는데, 이젠 그들의 후예들이, 백인의 사주와 지도를 받아 동으로 동으로 힘을 뻗쳤다. 흑해로 흘러드는 돈강 유역의 짙푸른 초원에서, 흑해의 드넓은 주변 평원에서 말을 달리던 스키타이문화의 계승자들은 다시 이곳을 찾았다. 백인들은 그 군사력과 말잔등 뒤에 숨어서 쫓아와 이곳을 차지하였다.

러시아의 차르는 선교사들을 보냈고,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감에 불타 이 땅의 많은 종족들에게 차르에 대한 충성과 기독교를 강요하였다. 야쿠트, 브랴트, 퉁구스, 보구트, 돌칸, 축치 등 시베리아의 곳곳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 종족들은 일대 혼란과 붕괴에 직면하였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자연이 있고, 그들의 우주 속에서 자신들의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무난하게 타협하면서도 자기 것을 지켜나가는 지혜와 아량이 있었다. 그런데 타협과 공존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터의 주인인 그들이 아니라, 오히려 침략자들이었다. 이러한 시베리아적인, 아니 세계사적인 운명이 바이칼 주변에 살고 있는 부랴트인들에게도 닥쳐왔다. 가혹한 시련이 그들의 역사를 뒤덮기 시작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났다. 기독교 선교사가 바이칼에 있는 샤먼(무당) 5명을 잡아 태워 죽이려 하였다. 5명을 한데 몰아넣고 불을 질렀는데, 4명은 한명이라도 살리자고 마음먹고, 선택한 한 무당을 가운데 놓고 자신들의 몸으로 덮어버렸다.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가운데 샤먼들의 비명소리가 바이칼에 울려퍼졌다. 부랴트인들의 가슴에는 피눈물이 흘렀다. 이윽고 시간이 지나자 불길은 소진되고, 하얀 연기가 힘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여들어 사위어가는 불길에 통한의 눈물을 떨어뜨리며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려 했다. 그때 타버린 시신들 틈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들렸다. 4명이 품었던 한 명은 기적적으로 숨을 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살아남은 한 명이 바로 가운데 나무 하나를 상징하고 있다. 살이 지글지글 타는 냄새 속에서 부랴트의 신앙을 지켰던 것이다.

스탈린은 집권하면서 시베리아를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유형당했던 얼음의 땅을 공산주의자들이 유린했다. 스탈린은 대대적인 소수민족 억압정책을 썼고, 부랴트인들을 조직적으로 탄압했다. 1934년 붉은군대를 동원해서 시작된 이 탄압에서 불과 2년 동안에 종교지도자를 포함하여 2만명이라는 믿기지 않을 숫자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지구상에서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한때는 전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를 경영했던 종족의 한 갈래가 영원히 사라질 뻔했던 것이다.

또 스탈린은 태생적으로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역마살을 종족의 혈통적 숙명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 콜호스라는 집단농장으로 몰아넣었다. 말이나 양조차 자유롭게 방목시키는 그들을 우리 속에 가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집집마다 모셔놓고 있는 크라스니이 우골록이라는 기도장소도 파괴하였다. 공산주의가 아니면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은 붉은 만행의 시대였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도 그들의 수작에 의해 만주에서 갑자기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실려 며칠씩 이동하다가 팽개쳐졌다. 공산주의자들의 이러한 만행이 오늘날 구소련의 영토 곳곳에 카레이스키라는 고려인들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이후에 브랴트인들은 권리를 어느 정도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교도 존중을 받아 샤먼들은 다시 세상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도 우리처럼 이런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1991년에 이르러 바이칼 주변의 부랴트인들은 서로 연락해 넓지는 않지만, 구릉이 있고, 그 사이로 평원과 길이 있는 불한신이 살고 있는 오르혼섬의 평원으로 몰려들었다.

부활한 불한신

약 6000여 명의 그들은 세르게를 다시 만들어 세우고 오랜만에 하늘을 향해 제사를 올렸다. 서러운 눈물을 흘리면서 수 십년간 끊겼던 제사를 올렸다. 무능해서, 두려워서 의무를 게을리한 자신들을 질책하면서. 상징적 숫자인 9마리의 양이 희생물로 선택되었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파란 하늘에는 햇살이 쨍쨍 내리쬐고, 그 햇살을 타고 불한의 아들인 독수리들이 비상을 하였다. 부랴트인들은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자신들을 확인하고 자신들의 존재를 우주와 시베리아와 바이칼에 알렸던 것이다.

세르게에는 많은 공양물들이 얹혀져 있다. 과자, 물병, 천 그리고 동전과 종이돈들이 얹혀져 있다. 우리도 한국동전 몇 개를 꺼내 올려놓았다. 이 샤먼은 이곳 세르게의 사연과 부랴트의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고 복합적인 표정으로 길게 말을 마쳤다. 그리고 카메라를 든 나의 마른 손을 진중하게 잡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당신들을 다 보호해 주시기 빕니다.”

우리랑 내내 길을 같이한 러시아여인 악센다는 이러한 사실을 알자 흥분된 어조로 “백인과 부랴트인. 도대체 어느 편이 더 문명인가요” 하고 말을 던진다. 지구는 하나다. 하나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역시 하나다. 우리 모두가 결국은 같은 존재이고, 남이란 또 다른 남일 뿐이다. ‘일중다 다중일(一中多 多中一)’이란 화엄의 깊디깊은 가르침을 진리로서 깨닫지는 못해도, 생활 속에서 그리고 환경이란 공동운명의 테두리 안에서 지구는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게 되었다.

모두가 공존하려면 이제 우리는 지구인으로서 좀더 너그럽고, 남을 아우르는 정신을 지녀야 한다. 남의 생각과 생활방식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좀더 나누어 갖는 마음가짐과 자세가 필요하다.

시베리아의 석양은, 바이칼의 석양은 어떠할까? 일렁거리는 호수에 번지는 백야의 햇빛은 어떤 색으로 번져갈까? 지중해의 고요한 한가운데, 흑해의 거칠게 파도치는 겨울바다에서 맞이하는 석양의 번뇌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바이칼은 여명도 석양도 아름답다는 한 러시아 사내의 은근한 말을 떠올리며 10시가 다 되어가는 호수 위에 눈길을 주어본다. 시간은 애초에 잡히는 것이 아니다. 나눌 수 있는 덩어리가 아니다. 햇살도 어둠도 마찬가지다. 어둠의 자락은 서서히 풀어헤치다가 호수 위의 포근한 안개결로 희미하게 스며든다. 백야의 바랜 햇살이 은은하게 내려 나무와 풀밭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토해낸다. 희디 흰 석회면에서 푸르고 붉고 노란 물감들이 만나 고구려의 아름다운 벽화를 만들 듯, 자작나무의 흰 몸뚱이에서 파란 물빛과 푸른 풀빛이 백야의 바이칼에 신비함으로 번져간다.

샤먼은 굿판을 벌일 터를 골랐다. 전에는 자작나무의 희디흰 몸뚱이와 향으로 꽉 차 있던 수풀이 휑하니 비어 있고, 구릉과 풀밭만 남아 있는 모습을 보더니 마음이 혼란스러운 듯했다. 그의 눈빛은 아쉬움으로 물결치듯 흔들린다. 마음을 고쳐먹고, 주위를 한바퀴 돌아보더니, 손을 들어 달을 가리키듯 한 곳을 지적한다.

그는 발그레한 빛을 띤 부랴트의 전통의상으로 갈아입고, 북을 든 채 텅 빈 구릉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빈 공간에, 애당초 비었던 허무의 공간이 아니라, 뭔가가 있었던 공(空)의 장에 몇 그루의 나무들이 온갖 인연의 껍질들을 다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무심하게 서 있는 곳이다. 공허는 어쩌면 더 많은 것을 채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채 덜 넘어간 백야의 햇살이 그 흰 살갗에 안타깝게 머물면서 샤먼의 춤을 기다리고 있다.

장작들이 쌓인다. 낙엽송과 자작나무의 부러진 몸뚱이들이 서로를 의지하면서 자그마하고 소담한 동산을 이룬다. 내 바지 뒷주머니에서 빠져나온 수첩에서 한장을 찢어 성냥으로 불을 붙인다. 얄궂은 문명의 쏘시개와 원시의 나뭇가지들이 만나 불꽃을 일으킨다. 불이 만개한 꽃잎처럼 활짝 일어나 석양빛으로 날름날름 거린다. 풀이 타들어간다. 불길에 풀빛이 스며든다. 백야의 햇살이 불길에 휩싸이더니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어둠이 깔린다. 어둠을 밝히려고 지핀 불길이 오히려 어둠의 존재를 명확하게 부각시킨다. 이 불은 바이칼의 서늘한 밤기운을 떨치려고, 스며드는 한기를 녹이려고 피운 것은 아니다.

영화(迎火)! 신들을 맞이하는 불빛이다. 청사초롱처럼 멀리 창공을 지나 이곳을 찾아 강림하는 귀한 손님들의 길을 비추려고 밝히는 등불이다. 아름다운 불, 하늘의 자식들이 어버이의 밤길을 도우려 핀 아름다운 효심의 불길이 바이칼의 밤을 은은하게 익혀가고 있다. 한결 바람이 스칠 때마다 신불이 자작나무 껍질처럼 아스라지면서 흩어지고, 발갛게 익어가는 얼굴들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모두 둘러앉았다. 가운데 신불을 모셔놓고, 샤먼과 나는 구릉과 호수과 나목을 바라보며 앉았다. 사람들은 둥글게 원을 그리고 있다. 해의 테처럼, 샤먼의 가죽 북처럼, 인디언 전사의 머리띠처럼, 새깃을 꽂은 고구려병사의 절풍테처럼 둥글게 앉았다. 원은 모두를 하나로 묶고, 시작과 끝이 없어서 좋다. ‘천부경’의 ‘일시무시일 일종무종일(一始無始一, 一終無終一).’ 신불의 경건함과 하늘의 정도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간다.

강강술래와 비슷한 巫歌

한국인·부랴트인·몽골인·러시아인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세속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하늘의 뜻을 알고자 하늘의 사제가 된 사람들, 우주의 섭리를 깨우치고 우주와 하나가 되고자 수행하는 도인들, 모두 하나가 되어 원을 이루고 있다. 불길 너머로 물색이 익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흔들리는 그림자들 속에서 시베리아의 그림자, 바이칼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이윽고 일어난 샤먼은 나에게 자기 옷깃을 붙들라고 한다. 그가 한걸음 옮길 때마다 나 또한 걸음을 떼야 하고, 그를 따라 둥근 원을 몇 바퀴 돌았다. 이제 어둠이 제자리를 찾았다, 빛과 어둠, 해와 달의 만남을 즐기는 시간은 지나가 버렸다. 색과 색이 춤을 추면서 섞이는 공간도 사라졌다. 칠흑 같은 어둠만이 엄숙하게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다.

샤먼은 헤세(북)를 왼손에 들고 하늘로 치켜올렸다가 내리면서 손에 쥔 타이브르(북채)로 두들긴다. 하늘이 울린다. 바이칼이 울린다. 우리들의 마음이 울린다. 그리고 노래를 부른다. 그의 신비스러운 무가(巫歌)가 우리들이 만든 원 안을 맴돌다가, 하늘로 호수 위로 퍼져나간다. 그의 무가는 하늘을 찬양하는 신령스러운 노래였다. 그 노래를 들으면 하늘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하늘과 샤먼과 인간의 탄생을 노래한 다음에 우리는 그의 손에 이끌려 또 다른 무가를 불러야 했다. 모두 일어나 손에 손을 잡았다. 그리고 왼쪽으로 빙빙 돌았다. 샤먼이 하늘을 찬양하고, 바이칼의 위대함을 노래하는 내용의 선창이 끝나면, 모두들 함께 잡은 손을 앞으로 쳐올리면서 ‘세’하고 후렴을 매겼다. 어쩜 강강수월래와 이리도 비슷한지.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로, 불길의 그림자가 일렁거리는 풀밭 위로, 검푸른 몸을 드러낸 바이칼의 물로 장중한 울림이 퍼진다. ‘옴마니반메홈’처럼 진리를 추구하는 법의 소리로 모두의 마음속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에밀레종의 애달픈 소리처럼 삶에 찌들고 자연을 멀리하고 메마른 우리들의 가슴에 애잔함을 적신다. 신이 지핀 듯 샤먼은 노래를 부른다. 그의 소리가 소지(燒紙)처럼 불붙어 하늘로 재를 날린다.

자연 속에서 샤먼은 우아하고 신성스럽고, 마음이 여여한 도인이다. 우주의 소리를 듣고, 자연의 소리로 법문을 전하면 된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샤먼의 운명은 뭇 인간과 더불어 주어진 업을 소진시켜야 하는 보살의 운명과 같다. 도시의 저잣거리에서, 자질구레한 인연의 타래들을 풀어주어야 하므로 더불어 더러워지지 않으면 안된다. 더욱이 핍박당하는 사람들의, 종족들의 샤먼은 사회운동가의 모습마저 지녀야 한다.

만신을 모시는 진짜 무당

인연의 타래가 굵고 복잡해서, 해야 할 일이 많아서인지 그는 많은 것들을 몸에 지니고 있다. 북도 들고 있고 손바닥보다 조금 큰 목기도 지니고 있는데 밑바닥에는 검은 물감으로 기하학적인 문양과 상징적인 그림을 그려 넣었다.

그가 설명한 바에 따르면 세상을 만들고 보호해주고 없애기도 하는 신의 모습이란다. 결국 창조주 절대자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부처나 예수와는 다른 창조주를 알고 있는 것이다.

허리에는 천을 꼬아서 만든 띠를 둘러 매고, 이것 저것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니히리트라고 부르는 손바닥만한 옥제 도끼, 라마승들이 지니고 다니는 놋쇠요령, 일본신사에 매달린 와니구치도 있고, 흑해에서 자란 소라로 만든 고동도 매달려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샤먼은 세상의 모든 것과 통한다고 믿고 있다. 세상의 모든 신과 교통하는 그에게는 종교의 구분이 무의미할 뿐이다. 모두가 하늘의 것, 우주의 울림으로 여긴다. 그는 잡신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만신을 모시는 진짜 무당이다.

만유일체, 시유불성. 우주의 삼라만상이 결국은 하나라는 법문을 몸뚱이에 매단 물건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그는 논리와는 무관한, 우리와는 다른 논리체계를 갖춘 선승이다. 그는 표의문자나 표음문자로 중생들에게 법문을 펴지 않고 소리와 몸짓으로, 기성과 춤으로 우주와 역사를 설명한다.

샤먼이 되는 길은 험난하고 고통스럽다. 우주와 역사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 인연을 맺은 인간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을 구원하는 엄청난 일을 하려면 뼈를 깎고 살을 저며내는 고통을 참아내야만 한다. 그래서 완성된 샤먼이 되려면 9단계를 거쳐야 한다. 19대 선조의 이름까지 외우고 있다는 그는 이미 신성성이 훼손된 불한바위 같은 장소는 사용하지 않고, 다른 샤먼들처럼 바이칼에 자기만의 장소를 만들어놓고 기도의 장소로 사용한다고 한다. 샤먼은 독특한 죽음을 맞는다고 한다. 난 그에게 말을 건넨다.

“바이칼도 슬플 때는 눈물을 흘리는가?”

그의 답변이 바이칼의 어둠속에 흔적을 남긴다. 아, 원효의 무애행이 바이칼의 물결 위에서 한판 굿을 펼치는구나.

밤이 새까맣게 익는다. 허옇게 곰팡이 슨 깜부기 같던 하늘이 칠흑처럼 까매졌다. 샤먼의 소리가 바이칼의 물위로 스며들고, 그들의 역사가 다시 어둠으로 묻어 나와 우리가 된다.

다음날 우리는 차를 타고 오르혼섬을 빠져나왔다. 바이칼은 떠나는 나는 탈진하면서 눈물을 죽죽 빗물처럼 흘렸다. 일종의 무병이었을까? 아니면 바이칼이 내게 흠뻑 퍼준 기운 때문이었을까? 아마 그 신비함과의 만남과 이별, 또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샤먼은 내게 선물을 주었다. 40∼50m의 속까지 보이는 맑은 물에서 건져낸 자그마한 돌멩이에 그의 이름과 기원을 부랴트 글자로 써서. 동반자에 대한 우정의 표시다.

우리는 배를 타고 건너 옐렌치 마을을 지나 이르쿠츠크로 귀환한다. 바이칼은 자연과 역사의 만남이 이루어진 인류역사 초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여러가지 의미로 우리에겐 잃어버린 원향이다. 코리나야 슬레포타의 노란꽃들이 들판에서 출렁거리고 있다. 바브츠카(나비)의 하얀 날갯짓이 옛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의 옷자락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제 머지않아 문명의 세계로 돌아가고, 곧 이 곳을 잊을지도 모른다. 자작나무 끝에 걸리던 그림자, 별빛, 수목들을, 그리고 바이칼의 투명하고 환한 물빛들을.

하지만 바이칼은 여전히 지구의 머리에서 맑은 물을 찰랑거리면서 생명의 기운과 옛날 인류의 역사를 우리 같은 순례자들에게 알려주고 있으리라.

 

[민족종교]

 
김지하 시인  | 기사입력 2008/07/07 [11:46]

'촛불'은 후천개벽(문명전환)의 시작: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지금은 후천개벽의 기운이 다방면으로 무르익은 문명전체의 대전환

 
지금은 후천개벽의 기운이 다방면으로 무르익은 때다. 즉 문명권 전체의 대전환의 때다. 인류와 지구 또는 우주의 지화점(至化点) 즉 '오메가 포인트'다. 이 대전환의 주체가 나타날 때다. 인류사와 자연사, 생명사가 이 전환의 주체를 손 모아 기다리고 있다.
 
19세기 한반도의 남조선 사상사, 남쪽조선에서 세계와 인류를 구할 새 민중사상사가 창조될 것이라는 전설에 따라 출현한 동학, 정역, 남학, 증산, 원불교 등이 바로 그 대전환과 새 세상의 도래를 예언한 후천개벽의 변혁사상이다. 이 변혁의 길에 대한 가르침은 기독교와 불교 등의 비폭력과 평화의 상상에도 이미 있다.
 
그리고 후천개벽의 남조선 사상사에는 그것이 거의 핵심내용을 이룬다. 그 한복판의 '혼돈적 질서'의 세상이 동학에서는 '지극한 기운-혼원지일기'로, 정역에서는 '여율(율려의 전복된 개념)'로, 증산에서는 '천지공사와 천지굿'으로 원불교의 소태산 사상에서는 '일원상법신불과 정신개벽운동'으로 제시되었다.
   
서양과학문명의 발전에 따른 소통양식의 대변혁과 문화의 혁신과정에서 디지털 네트워크라는 사이버소통방식이 하나의 새로운 후천적 문화양식으로 등장했고, 우리나라에서는 미국, 유럽, 일본, 중국과는 또 다르게 우리나라, 그것도 일반 청소년, 여성, 서민 일반에게서 개방적인 쌍방향 소통과 논쟁으로 가득찬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독특한 정신문화를 형성하여 이미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바로 최근 '촛불'의 등장배경이다. 촛불은 2002년 월드컵 응원문화의 발전과정에서 축제 형식으로 등장해서 올해 쇠고기 문제와 대운하 문제의 정치 아젠다에 대한 직접민주주의 운동으로 그 차원을 높였다. 축제와 정치의 결합, 숭고한 새 '문화혁명'의 한 형태는 '정치적 상상력'의 한 양식이다.
  
그러나 그 근저에는 후천개벽운동으로서의 거대한 네오르네상스의 역동이 뜀뛰고 있다. 한민족은 고대 축제 때에 사흘밤 사흘낮을 춤추고 노래 부른 민족으로 이름나 있다. (중국 기록) 영고, 무천, 동맹의 축제 때와 고려 시에도 팔관이나 국중대회에서 계승된다.
  
이 천의무봉의 신기, 신명, 신바람이 이후 976회의 외국침략에 억압되어 <한(恨)>이라는 이름의 그늘진 내상으로 침전되어서 오늘에 이르렀다. 2002년에 바로 이 억압된 신기가 한의 일방적 지배를 뚫고 폭발한 것이다. 이 역사적 굴곡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촛불은 해명되지 않으며 제대로 접수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신기, 신바람이 <풍류>라는 이름의 문화적 축적의 기본이요 <신시>라는 이름의 시장과 경제, 호혜와 교환의 자연생명존중과 인간친교통합의 성스러운 시장의 추동력이요, <화백>이란 이름의 직접민주주의와 대의적 단상 단하의 합좌기구를 통한 장기간에 걸친 토론을 거쳐 전원일치에 도달하는 "직접-대의"의 결합구조의 기원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지금 살아난 것이다.  
 
▲ 1863년 동학 1세 교조인 수운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해월 신사는 1년 뒤 스승이 관에 체포돼 순교하자 쫓겨다니면서도 경전과 교단을 정비하고, 교조신원운동과 동학농민혁명을 지휘하다 1898년 체포돼 역시 처형당했다.

 


해월 최시형은 개벽이 후천을 중심으로 하되 (달걀은 그 속에 들어 있는 병아리가 주인공이다) 선천의 어미(기존 지식인, 종교인, 정치인)가 새롭게 권리를 정립함으로써 선후천이 협동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거대한 고대회복. 새로운 땟길(문예부흥)로서의 혁명(문화혁명)이요 우주와 역사변동이다.
  
수운 최제우의 동학은 '등불이 물 위에 밝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고 기둥은 낡았으나 아직도 힘이 남았다' 또는 "인의예지는 공자 성인의 가르침이니 버리지 말고 수심정기(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르게 하는 한국 고대 이래의 선도사상)는 내가 다시 정하는 바이니 따르라"고 했다.
  
동학의 조직이 포(包)와 접(接)의 이중구조로 돼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치다. 접은 후천 동학꾼의 기초 조직이고 포는 유불선 명망가들(유학자,스님,산에서 수련하는 도사)의 전선조직인 것이다.
  
경전도 한문과 한글 두 종류가 있고 주문도 두 종류다. 모두 다 식자층과 민중, 어른들과 아이들, 나성 가부장과 여성 주부들 대상으로 이중화되어 있고 둘 사이의 공동해석을 겨냥하는 해월 최서형 선생 등의 수많은 현실적 통합해석과 가르침들이 있다.
  
원불교에서도 소태산 선생의 진리(계시)와 실천적 삶의 직결된 관계(백지혈인의 기적 직후 며칠 만에 가장 현실적 문제인 저축조합으로 운동을 시작하는 역사) 또는 일원상 법신불의 대혼돈 원리가 모은 운동을 통해서 또한 개간사업, 교육사업을 통해서 질서화하는 것. 또는 일원상 법신불의 수양원리에 입각해서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의 개별적, 다층적인 정신 개벽운동을 전개하는 복합관계 등이 그것이다.
 
강증산의 주장도 이와 비슷하니 동서양 모든 종교 신들의 원탁회의인 통일신단을 기초로 해서 최초의 세계 정치기구인 UN의 이상적 모델이 세계 조화 정부라는 '혼돈적 질서'를 추구했다. 그리고 중요하게는 동학과 같은 동세개벽(폭력용인)이 아닌 정세개벽(비폭력 평화변혁)으로 나아가되 개벽은 개벽인 점 등이다.
  
나는 이제 결론 부분에 왔다. 유모차 타고 나온 아기, 젊은 어머니들, 초등학교 중학교 여학생들. 그 어여쁘고 아름다운 촛불의 춤과 노래. 이 문화와 유희를 통한 생활 정치ㆍ생명 정치의 현실 변혁에의 요구와 지식인, 종교인 등의 도움이 연결된 이 몇 달 간의 촛불 -촛불에 대한 폭력의 훼손 과정- 뒤를 이은 종교에의 비폭력 평화 촛불시위의 과정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남조선 사상사의 두 번째 큰 흐름인 '정역(正易)'은 1879년에서 1885년 사이에 충청도 연산땅 김일부(金日夫) 선생에 의해 공표된 후천개벽기 한국과 민중과 아이들과 백성들과 세계 인류 전체와 지구 우주 중생 모두의 신비과학, 즉 역(易) 철학이다.
 
정역에는 후천 개벽기인 '기위친정(己位親政)', '십일일언(十一一言)', '십오일언(十五一言)'이라는 세 마디가 나온다. 기위친정은 개벽이 시작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천대받던 것들이 임금처럼 정치를 담당하게 되는 큰 전환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럼 십일일언은 무엇일까? 이는 이제껏 매만 맞고 구박만 받던 나이 스물 미만의 청소년 어린이들과 젊은 여성들이 정치를 담당한다는 뜻이다. 바로 고대정치다.
 
십오일언은 무엇일까? 바로 이러한 때에는 기존의 지식인과 종교인, 정치인은 뒤로 물러나 교육, 문화, 종교에 몰두하면서 청소년과 여성의 정치를 음으로 돕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십일일언과 십오일언 둘 다 뒷부분에 일언(一言), 즉 한 마디가 똑같이 붙어있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십일'의 청소년ㆍ여성 정치와 '십오'의 중년ㆍ남성ㆍ전문 지식인의 지혜와 경험, 영성적 능력이 이심전심으로 언어, 즉 '진리'를 통해 소통한다는 것이다.
  
미국 예일대 사회학자인 제프리 알렉산더 교수가 "종교적 상징인 촛불과 순수의 상징인 10대 소녀가 만나 이 운동을 만들었다는 것은 대단히 환상적인 일이다"라고 극찬한다. 이것은 개벽의 시작이다. 시작이다.
 
 
김지하 (김영일)
출생1941년 2월 4일출신지전라남도 목포직업시인,대학교수학력서울대학교데뷔1969년 시 '황톳길' 발표경력2008년 3월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석좌교수
2007년 9월 동국대학교 생태환경연구센터 석좌교수수상2006년 제10회 만해대상
2005년 제10회 시와 시학상 작품상대표작옹치격, 황통, 밥, 율려란 무엇인가, 사이버 시대와 시의 운명, 탈춤의 민족미학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 생명과 평화의 길
  •  

수정 2007-10-29 18:52 등록 2007-10-29 18:52

“한국 민족종교를 세계적 정신문화로” (hani.co.kr)

23일 ‘민족종교 국제학술대회’열려
“다양한 문화 포용하는 주체성 필요”

천도교, 원불교, 증산도 등 한국의 민족종교들이 세계 종교의 싹을 틔울 수 있을까.

 

한국민족종교협의회(회장·한양원)가 지난 23일 서울 한국언론회관에서 연 ‘민족종교 국제학술대회’(사진)에서 리처드 맥브라이드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 교수는 “그렇다”고 일단 긍정적으로 답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민족 종교가 한국인이 아닌 런던의 비즈니스맨과 프랑스의 농부들에게 무엇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묻는다. 그는 또 “오늘날의 자유주의적인 구호인 세계화, 생태학, 세계평화 등을 넘어 서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거기엔 근시안에 머문 한국의 민족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질타도 배어있다.

그러나 맥브라이드 교수는 개벽사상과 인간을 신성한 존재로 변화시킬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신선사상, 마음의 수양과 수심, 조화와 포용, 홍익인간, 개인적으로 수련하는 기(氣) 등 독특한 한국적 정신문화의 세계화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

윤이흠 서울대 명예교수는 “영국인과 프랑스인들이 세계화를 위해 자신의 국가와 국민의 주체성을 포기하기로 한다면 웃어버리고 말 것”이라면서 “한국민족 정체성에 입각해 세계사회의 정회원이라는 주체적 각성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또 이날 발표에 나선 이서행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한국 민족종교의 특성으로 통합과 포용을 꼽았다. 그는 “민족종교가 사상 면에서는 유불선 삼교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듯이 한마디로 민족종교는 통합진리론이라는 한국사상 전통의 특성을 가장 구체적으로 대변한다”면서 “고대로부터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전통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형성된 포용적 태도를 현명한 각성 위에서 활용한다면 보다 현명한 현실대처 방향을 찾는 역사적 힘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글 조연현 기자

 

 

 

한국 창종종교의 흐름과 계보 | 외래종교 혹은 민족의식을 뿌리로 탄생

동학 유물 100여 점을 보존하고 있는 상주의 동학교당.

 

인간은 한계를 통해서 성장한다.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에 안주할 수 없는 것이 정신의 본질이다. 역사에 도전하고 문화를 개혁하며 계급을 혁명하는 것은 그런 인간정신의 자연스러운 표현이자 시도다. 이러한 노력은 형이상학과 종교의 영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전통적인 세계관으로 풀이되지 못하고 기존의 가치가 세상을 규명하지 못할 때, 인간은 좌절하거나 더러는 이를 돌파하려 한다. 인류의 지성과 문명이 인간의 문제를 해명해준다면 철학적인 번민과 종교적인 고뇌는 없어도 될 것이다. 시대마다 당대의 문제를 경험하는 것은 어쩔 수 없고 그에 맞추어 새로운 이상을 세우는 일도 당연하다.

어떤 믿음이 종교의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는 집단과 의식과 교의를 지녀야 한다. 민족의 정서를 관통하는 무속의 세계관이 종교가 되지 못한 것은 그만큼 강력한 집단의식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이래 외래 종교가 들어오면서 우리 민족도 강력한 종교를 체험했고 이 땅에서 새로운 종교도 태어난다.

종교는 또 다른 사회 시스템이다. 기존의 권력과는 다른 형태의 권위를 조직하고 스스로 결집된 힘을 갖춘다. 그래서 세속의 눈에 종교가 권력으로 비칠 때도 있고 두려움을 갖는 경우도 있다. 세상의 모순이 커질수록 그 해답을 구하기 위한 종교의 힘은 커지고 더러는 현실 권력과 맞서기도 한다. 우리 역사는 그것을 반복해서 경험해왔다.

 

세상에 절망이 넘치고 있다는 방증

진각종 신도들이 ‘옴마니반메훔’ 진언을 외우며 수행하고 있다.

 

거리에 넘치는 교회와 종교단체를 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크게 종교에 의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는 민족의 정서가 종교적이거나 세상에 절망이 넘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 땅의 모순은 이 땅의 종교를 만들어냈다. 더러는 외래 종교의 뿌리에 우리의 가치를 접목하기도 했고, 어떤 것은 민족의식의 심연에서 싹을 틔우기도 했다.

새로운 가치와 이념이 생길 때 이는 기존 질서와 당연히 충돌한다. 종교에서도 당연히 발생하는 일이다. 갓 생겨난 종교는 이단으로 혹은 사이비로 비난받으며 스스로 조직해나간다.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지 못하면 창종주와 함께 그 종교의 생명도 끝나고 만다.

이 땅에서 태어나 활착에 성공하거나 번창한 종교는 몇 가지 모습을 띤다. 첫째는 외래 종교를 기반으로 한국적인 가르침을 펼치는 데 성공한 예로, 불교와 기독교를 모태로 종파적인 특징을 세운 경우다. 기독교의 틀 안에는 통일교가 대표적이고 천부교·영생교 등을 찾아볼 수 있다. 불교의 경우 천태종과 진각종·총지종 등이 이에 해당한다. 미미하지만 도교와 유교를 바탕으로 한 종파도 있다.

둘째는 민족 정서를 기반으로 종교를 세운 경우다. 천도교와 대종교·증산도·대순진리회 등이 이 경우에 속한다. 그밖에도 한국적인 종교로 분류할 수 있는 종파가 있으나 미약하거나 반사회적이라는 비난 속에 교세를 크게 펼치지 못하고 있다.
새롭게 등장한 종교적 가르침이 보편성보다 특수성을 강조하고 개방적이기보다 폐쇄적이라면 그 생명이 길지 못할 것이다. 그 한계를 뚫고 세계화에 성공한 것이 통일교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라는 긴 교명을 가진 통일교는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됐다. 이는 그 뿌리가 기독교에 있음을 나타낸다.

 

통일교, 한계 극복 세계화에 성공
통일교는 기존 교단의 비난과 교의 비판을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펼치는 데 성공했다. 구원과 선교의 목적을 국내에만 묶어두지 않고 국가의 한계를 벗어나 적극적으로 교세를 펼침으로 세계화할 수 있었다. 자신의 한계도 벗어날 수 있었다. 청파동의 작은 교회에서 시작한 한국적인 구원의 원리는 일본과 미국에서도 뿌리내릴 수 있었고 결국 세계 200개 가까운 나라에서 종교활동을 펴고 있다. 한국에서 시작했지만 이미 세계화에 성공한 것이다.

세계평화통일 가정연합이 주최한 합동결혼식이 경기 가평군 설악면 천주청평수련원에서 열리고 있다.

 

기존의 가치 속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실천과 종교적 실행을 찾아내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종파로 거듭나는 데 성공한 경우가 있다. 불교에 뿌리를 둔 천태종·진각종·총지종 등이 이에 해당한다.

천태종은 그 역사만으로 보면 중국 수나라 천태산에 머물던 지자(智者) 대사를 종파의 개조로 삼는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창종했지만 그 맥이 사라졌다가 근세에 상월 원각 조사를 거쳐 거듭났다. 알 수 없는 철학보다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을 펼쳐 성공할 수 있었다.

진각종과 총지종은 밀교라는 불교의 독특한 영역에서 종파적 가르침을 시작했다. 비현실적이고 교리 중심의 종교에서 벗어나 실천할 수 있고 현실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실천을 모색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성공한 유형이다.

천태종과 진각종은 금강대학과 위덕대학을 세울 정도로 성장했고 그 교세를 꾸준히 펼치고 있다. 기성의 불교교단이 과거를 돌아보고 있을 때 이들은 현실과 미래를 주목한 것이 종파가 성장할 수 있었던 힘이다. 종교가 종도의 헌신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을 찾아나서서 신뢰를 얻고 힘을 모으는 데 성공한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순수하게 한국 땅에서 태어난 종교는 독특하다. 민족 정서에 뿌리박아 외래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세계관으로 세상의 변혁을 시도했다. 구한말의 혼돈 속에서 잉태되어 민족의 활로를 종교에서 찾으려 했던 특이한 동기에서 출발한 종교다. 원불교·천도교·대종교·증산도·대순진리회·보천교 등이 이에 속하고 그밖에도 태극도·성덕도·청우일신회·천존회·순천도·갱정유도 등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거나 근근이 명맥을 잇고 있다.

구한말의 혼란은 자연스럽게 말세관으로 이어졌다. 저항력을 갖출 틈이 없이 밀어닥친 외부의 충격은 곧 세상이 망할 것 같은 걱정으로 집단을 이끌었다. 질서가 무력해지고 권력이 붕괴되며 가치가 의미를 잃어 가자 기존의 세상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었다.

몇몇 종교적인 천재는 현실을 구원할 대안을 제시했다. 인간이 하늘님이라고 일깨운 최제우와 일원의 근본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박중빈, 신명을 되찾을 것을 가르친 강일순, 삼일철학을 펼친 나철, 정역으로 세상을 바꿀 것을 말한 김항은 구한말의 시대상황이 낳은 종교적 개혁자들이다. 그들은 개벽(開闢)이라는 독특한 세계관을 퍼뜨렸고 평등이라는 보편적인 인간관을 이야기했다. 일정 부분 민족에게 희망을 전했고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민족정신을 종교적 보편성으로 이끌지 못한 경우 반짝 떠올랐던 민족종교들은 속절없이 사라졌다. 게다가 일제는 민족정신 아래 종교적 무리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천도교는 동양의 정신으로 평등한 인간 세상의 구현을 꿈꿨지만 현실의 벽 앞에서 잠시 멈췄고 대종교와 보천교 등은 일제의 억압 속에서 힘을 키우지 못하고 좌절했다. 민족에 바탕을 둔 이들의 종교적 실험은 여타 한국 종교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상제에서 비롯한 증산계열의 종교들도 당대를 관통하던 수운(水雲) 최제우와 동학의 종교적 가르침과 꾸준히 교류하며 발전해왔다.

민족종교 중에서 큰 산맥을 이루는 것은 동학계열과 증산계열의 종교다. 동학을 바탕으로 발생한 종교는 시천교와 상제교를 비롯해 대종교·수운교·인천교·동학교·대동교·백백교·천법교·무궁교 등 10여 개 종교가 있었다. 일제가 사교로 규정하거나 불온집단으로 치부해 사라진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천도교를 제외하고는 종교적인 보편성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기에 격변하는 시대환경을 넘지 못했던 점을 교세 쇠락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시대 변화를 배경으로 태어난 종교가 시대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다는 역설적인 이유 때문에 사라지고 만 것이다.

 

최제우·박중빈, 종교적 개혁자들

증산도 경전인 도전(道典)이 7개 국어로 번역 출간됐다.

 

증산교에 뿌리를 둔 종교도 여럿 있다. 대순진리회·증산도·보천교·무극대도교·미륵불교·동화교·태을교·용화교 등 지금도 활동하는 다수의 종단이 있다. 증산계열의 몇몇 종단은 최근 들어 급격한 교세 확장이 눈에 띈다. 현실의 모순이 너무 깊어 실제적인 개벽을 원하는 이가 그만큼 많아졌기 때문이다. 대순진리회는 일찍부터 교육과 포교에 눈을 돌려 꾸준히 발전해가고 있다. 시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는 일에 게으르지 않은 결과다.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불교적인 교의를 받아들여 종교를 세운 것이 원불교다. 소태산(少太山) 박중빈 종사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기치로 시작된 원불교는 일제 강점기에 절망하지 않고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종교가 특수성을 벗고 보편세계로 나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교의와 체제와 의식을 만드는 데 성공하여 신생종교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원불교는 일찍부터 사회사업에 힘을 모았다. 소리 없이 곳곳에 학교를 짓고 복지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종조가 가난한 농부를 위해 간척사업을 하고 저축조합을 만들었던 사례를 잊지 않고 지속한 결과다. 종교가 세상의 추앙을 받기보다 세상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한 노력은 원불교의 역사를 통해 살필 수 있다.

종교를 비롯한 인간의 형이상학적 노력은 시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우리 시대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이 시대의 종교를 보면 어렴풋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종교는 한국적 문제에 대한 반영이다. 우리가 어떤 역사를 살아왔고 무엇을 꿈꾸고 있으며 어디로 가고 싶은지 우리의 종교 속에 그 전모가 담겨 있다. 그것이 특수성의 굴레를 벗지 못하면 보편성이라는 더 큰 세상으로 나가지 못할 것이다. 종교가 구원보다 굴레를 던지는 상황 속으로 빠질 수도 있다. 오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한국에서 태어나 펼쳐지고 있는 종교를 통해 돌아보자. 그 속에서 구원과 영광을 찾을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다.

<김천〈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입력 2008. 1. 10. 10:03수정 2008. 1. 10. 10:03

◇한국민족종교협의회는 지난해 12월 중국 연변대학에서 한국민족종교운동사와 관련한 세미나를 갖고 일제강점기 민족종교였던 청림교와 원종교의 항일행적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사진은 세미나 장면.

한국의 민족종교인 청림교(靑林敎)와 원종교(元宗敎)는 일제강점기 중국 동북지역에서 어느 종교 못지않게 일제에 치열하게 저항하며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에 앞장섰지만,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 못 이겨 해체되고 만다. 그러나 국내에는 이들 종교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심지어 민족종단에서도 그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원종교 창시자 김중건.

한국민족종교협의회(회장 한양원)는 지난해 12월 중국 연변대학에서 '한국민족종교운동사'의 중국어 번역사업 일환으로 학술세미나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조선족 학자들의 논문을 통해 청림교와 원종교의 실체가 비교적 상세히 드러났다. 협의회 한 관계자는 "이름도 듣지 못했던 이들 종교가 항일운동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놀랍고 고무됐다"고 말했다.

허영길 조선족자치주 박물관 연구실장은 '청림교의 성격과 반일활동에 대하여'라는 주제의 세미나 논문에서 용정시와 화룡시 공안국 서류, 관련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 청림교의 교의와 반일활동, 일제의 탄압 등을 소상히 밝혔다.

 

논문에 따르면 청림교는 동학의 한 갈래다. 1900년 초 동학농민봉기가 일제와 조선봉건통치세력의 잔혹한 탄압으로 실패하자 남정(호 청림)이 최수운의 동학과 당시 민중 속에 유행하던 정감록 사상을 결합해 청림교를 창교하게 된다. 훗날 단군신앙도 갖게 된다. 1904년 남정 사망 후 교세가 쇠락했지만, 2세 교주 한병수가 연길현 세린하 대구동에서 '야단(野團)'을 조직해 반일무장투쟁을 전개하고, 3세 교주 태두섭을 거치면서 청림교는 일제가 '가장 견인한 민족독립운동단체'로 경계할 정도로 부상한다.

동학의 강령 주문을 외우고 하느님을 지성껏 모시면 '무극대도'를 깨닫고 후천개벽을 실현해 지상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는 청림교 교의에는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 압박과 착취를 받아 헐벗고 굶주리는 조선 민중의 염원이 그대로 반영돼 교세가 크게 흥성했다. 이들은 열심히 '멸왜기도'를 드렸고 '일제필망 독립필성'을 선전했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청림교도들은 용정 3·13반일민족독립운동에 적극 참가했으며, 일제에 대항해 젊은 신도 2만명을 군사훈련시키기도 했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 때에는 북로군정서와 연합해 일제침략군에 타격을 가했으며 병력과 군수품을 지원했다. 이들은 또 2개의 학교를 세워 독립사상과 민족의식 고취에 나섰다.

뒤늦게 청림교의 반일행적을 파악한 일제는 1944년 12월과 1945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청림교인 검거에 들어가 120여명의 반일인사를 체포·고문했다. 이 중 16명은 비인간적 학대로 옥사하거나 석방 후 1개월도 못돼 숨졌다. 나머지도 3년에서 장기형에 이르는 혹형을 언도받았고, 절반가량은 반불구자가 돼 방면됐다.

이들은 광복 후 뭇사람의 존경을 받아야 했지만 당사자는 물론 그 후손들마저 멸시와 박해를 받았다. 좌익사상의 영향으로 '봉건미신' 등의 오해를 받았기 때문인데, 허 실장은 "이는 바로잡아야 할 역사"라고 말했다.

 

한편 박창욱 연변대 민족연구원 교수는 '동학계 원종교 김중건의 교단 창립 기본정신'이라는 논문에서 원종교와 창시자 김중건에 대해 밝히고 있다.

원종교는 1912년 조선 근대의 독특한 철학가이자 사상가였던 소래 김중건(1899∼1933)에 의해 창립된다. 함남 영흥 출신으로 노장(老莊)철학을 하며 개화사상에 심취해 있던 소래는 1909년 서울에 가서 천도교에 투신해 구세구국의 진리를 모색하던 중 천도교 수령들의 사치와 일부 친일 행적에 실망한다.

이 기간에 '천기대경(天機大經)'을 지어 자신의 독특한 극원(極元)철학을 구사하며 구세(求世)사상인 '대공화(大共和) 무국(無國)론'을 편다. 특히 여기에는 억압받고 고통받는 농민을 해방하고 농촌을 개조하려는 반일 민족해방 사상이 관철돼 있다. 그가 원종교를 만든 것은 일본 헌병의 눈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1920년 5월 소래는 화룡현 장인강에서 대진단을 꾸려 반일활동을 했으나, 일제의 간도대토벌 때문에 실패하자 각지에 학교를 건립해 반일 민족운동과 원종사상의 선전에 힘썼다. '북간도 민족종교별 조선인 학교수 및 학생수'(1926년)에 따르면 원종교는 9개 학교, 304명의 학생을 육성해 천도교나 대종교보다 학교수는 앞섰고 학생수는 둘째를 기록하고 있다.

소래는 1928년 활동무대를 연변에서 흑룡강성 영안현 팔도하자로 옮겨 '대공화 무국론'의 첫 단계인 농촌주의촌을 건립하고 조선 반일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70여가구의 골간 농민을 대상으로 군대를 모집하고 무기도 사들여 반일대오를 훈련시켰으며, 동시에 항일구국군과 연계해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했으나 1933년 구국군 내 별동대에 의해 암살당한다. 뒤이어 일본 침략군이 농촌주의촌을 토벌하면서 '농촌주의' 운동도 수포로 돌아간다. 소래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돼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추모되고 있다.

민족종교협의회 이찬구 박사는 "일제강점기 한국 사회세력은 조선 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애써 창안한 대항 이데올로기를 외면한 채 신종교를 '유사종교'라든가 '사이비종교'라며 무시하고 억압한 측면이 있다"며 "청림교와 원종교의 항일운동은 2003년 민족종교협의회에서 발행한 '한국민족종교운동사'에도 포함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로, 연변대에서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한국민족종교운동사'에 새로 포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hulk@segye.com

 

 

 

입력 2008-06-20 03:03업데이트 2009-09-24 20:52

“민족종교, 독립군자금 모금 항일운동”|동아일보 (donga.com)

 
일제강점기, 전통 민족종교의 항일독립운동 양상과 의미 등을 고찰하기 위한 학술대회가 열린다.

한국민족종교협의회가 26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개최하는 제5회 민족종교 국제학술대회 ‘일제강점기 민족종교의 항일운동’.

이경우 한국신종교학회장이 ‘일제강점기 민족종교의 계통별 항일운동 개략’, 김훈 베이징대 교수가 ‘북간도 지역에서 청림교의 반일운동과 성격’, 성주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이 ‘일제강점기 민족종교의 비밀결사와 군자금 모급운동’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한다.

한양원 민족종교협의회장은 “천도교 대종교 등 전통 민족종교들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꿋꿋하게 항일운동을 전개했지만 이 같은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면서 “항일운동 양상을 제대로 알려 그 위상을 재정립하기 위해 이번 학술대회를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학술대회에선 천도교와 태을교 등 민족 종교의 비밀 결사대가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독립군이나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한 사실, 동학과 단군신앙을 바탕으로 북간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청림교의 전모 등 민족 종교에 관한 새로운 사실이 발표된다. 02-741-4091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 수정 2007-10-29 18:49등록 2007-10-29 18:49

일제는 왜 민족종교를 탄압했는가 (hani.co.kr)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지 못한 채 주변 강국의 것만을 우상시하는 사대주의 사가들에 의해 우리 것이 폄하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특히 민족 종교는 우리 민족의 사상과 정서를 대변했지만 일제를 거치며 유사종교나 사이비종교로 알려지게 됐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서울대 윤이흠 명예교수(종교학과)가 〈일제의 한국 민족종교 말살책〉(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에서 그 실상을 밝혔다. 이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종교는 천도교와 보천교, 대종교다. 천도교는 개신교 신자가 불과 20만 명에 불과했던 1920년대 신자 300백만 명이었을 만큼 이 땅의 대표 종교였다. 또 보천교도 한 때 수백만의 신도를 자랑했다. 대종교도 만주 일대에서 수많은 민족학교를 세워 민족혼을 되살려냈다. 그러나 일본 불교를 등에 업은 불교와 미국과 유럽 등 제국의 지원을 받는 개신교, 가톨릭과 달리 민족종교는 이 땅의 힘없는 민중 외엔 기댈 데가 없었다. 그래서 일제는 가톨릭, 개신교, 불교는 ‘종교’로 예우했지만, 민족종교는 ‘유사 종교’ 취급을 하면서 분열시키고 탄압해 철저히 무너뜨렸다.

그것은 한민족의 정신을 담은 민족종교들이 민족운동의 원천이고 고갱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한반도에서뿐 아니라 민족종교가 쫓겨 간 만주지역까지 쫓아가 민족종교를 탄압했고, 거대한 민족종교들은 내부 분열이 일어나도록 원격 조정해 와해시켰다. 당시 신문들도 일제의 인식에 동조해 민족종교들을 유사종교로 여겼다.

일제는 3·1운동 뒤 최대 종교였던 천도교를 최린 등 일본 유학생 출신의 요인들을 포섭해 분열시켰다. 또한 이른바 혁신 세력을 통해 종교단체에서 민중교회와 사회개혁운동 단체로 전향하도록 유도해 영성적 권위를 잃고 사회문화운동단체의 성격을 띠게 했다.

또 일제는 보천교와 손을 잡고 결성한 시국대동단 활동을 도우면서 보천교의 친일을 유도해 보천교를 민중으로부터 격리시켰고, 대종교의 경우 1942년 3세교주 윤세복 등 20명의 교단간부를 체포해 이 가운데 10명이 옥사케 해 사실상 교단 자체를 와해시켰다.

지은이는 우리 사회에서 사교와 공포의 표본으로 여기는 백백교의 경우도 일제의 말살책과 조작으로 인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조연현 기자

 

 

[주역]

  • 수정 2019-10-19 20:29 등록 2007-08-21 14:35

8·15 예언하고 춤추다 6·25 내다보고 피눈물 (hani.co.kr)

주역 대가 야산 발자취 탐방
47년 홍역학회 창립, 회원 무려 1만2천명

부여에 있는 스승 야산선사 묘비를 찾은 대산 김석진 선생.

 

동양에서 ‘만학의 제왕’으로 꼽히는 주역을 배우는 동호인 100여명이 18~19일 ‘주역의 길 스승의 길’을 따라나섰다. 대표적인 주역 공부 모임인 동방문화진흥회 회원들이 자신들의 스승인 대산 김석진 선생(79)이 주역을 배웠던 곳들을 순례한 것이다. 대산은 주역에 통달해 이주역으로 불렸던 야산 이달(1889~1958)의 제자로, 야산이 세운 홍역학을 계승하기 위해 20년 전 동방문화진흥회를 창립해 주역을 전해왔다. 홍역학은 태극사상으로 모든 것을 하나로 모으자는 취지다. 대산은 19살 때 야산을 찾아간 뒤 줄곧 야산을 따라다니면서 주역을 배웠기에 그가 머물던 터는 곧 야산의 숨결이 배어있는 유적지다.

▶천하면 귀해지고 귀하면 천해지는 이치

서울, 대전, 대구, 제주 등 각지에서 온 회원들이 모인 곳은 충남 논산시 벌곡면 대둔산. 해방 뒤 야산이 머물며 주역을 세상에 전하기 시작한 석천암을 순례하기 위해서였다. 대산이 처음 야산을 만나 주역의 길로 들어선 것도 바로 석천암이다.

소학교 6년 과정을 마치고 사서삼경을 공부하던 대산은 친구들처럼 신학문을 계속 공부하고 싶어 그 뜻을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러자 곧은 한학자였던 할아버지 청하 선생은 ‘인기아취(人棄我取·다른 사람이 버린 것을 나는 취함)하라’고 했다. ‘천즉귀(賤卽貴·천하면 귀해지고), 귀즉천(貴卽賤·귀하면 천해지는 것)이니, 지금은 한문이 천하지만 반드시 귀해질 때가 있을 터이니, 오로지 한문공부에 힘쓰라’는 것이었다.

 

 석천암서 스승의 묘소까지

▶쌀 서말 짊어지고 스승 만나러 험로 올라
태안 안면도 삼봉용굴에서 대산과 주역 동호인들이 해신제를 지내고 있다.

 

그래서 1946년 겨울 쌀 서말을 등에 지고 석천암으로 향했다. 찌는 더위에 대둔산의 좁은 고갯길을 오르니, 쌀 서말을 감당키 어려운 약골임에도 오직 스승을 만나기를 발원하며 험로를 올랐을 대산의 간절한 마음이 절절히 느껴진다.

한 시간 가량을 올라 석천암에 다다르니 하늘을 가리는 암벽 구멍에서 솟아나는 바람과 생명수가 땀에 젖은 몸을 씼어준다. 암자는 불사한 흔적이 없어 야산이 머물던 60여년 전이나 별다름이 없어 보인다. 청년 대산이 올라오니 열대여섯 명의 문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고, 그 가운데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야산이 앉아 있었다. 그로부터 대산의 60년 주역 인생이 시작되었다.

▶일제 때 회유와 협박 물리치고 민족 해방 기원

대산의 스승 야산은 시대를 예지하는 이인이었다. 암울한 일제 때 일인들의 회유와 협박을 물리치고 민족 해방을 기원하다 8·15 광복을 예언하면서 제자들 앞에서 춤을 추면서도, 다시 6·25의 비극을 내다보며 비통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야산은 거부하기 어려운 시대의 큰 흐름 속에서도 변화의 학문인 주역의 이치를 통해 진리를 깨우치고 시대의 어둠을 밝히도록 이끌고자했다. 그는 석천암에서 통강(전문을 모두 외움) 제자 108명을 길러내고, 47년 홍역학회를 창립했다. 당시 회원이 무려 1만2천명에 이르렀다.

순례단은 석천암을 떠나 논산 개태사로 향한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후백제를 물리친 뜰에 세워진 개태사엔 땅에 묻혀졌던 돌미륵이 발굴돼 모셔져 있고, 창훈각엔 불상과 단군 영정이 나란히 앉아있다. 야산은 108 제자와 함께 이곳을 찾아 후천 세계를 열 신명행사를 가졌다.

▶음률 넣은 한문 독송이 산하에 낭랑히

이어 대산의 고향 함적골과 대산이 서당을 열어 후학을 가르쳤던 모름티를 거쳐 부여의 야산 묘소에 이른다. 묘소 입구의 비문 가운데 ‘우리에게 생명의 변화를 깨우쳐주신 야산 선생’이란 대목이 유난히 눈에 띈다. 스승을 다시 뵌 듯 깊게 고개를 숙이는 대산의 뒤로 스승이 깨우친 진리를 깨닫고 싶은 회원들이 간절한 바람을 모아 홍역학 발문을 읽는다. 음률을 넣은 한문 독송이 산하를 울려 퍼진다. 그 일부의 뜻을 풀자면 이렇다.

‘천지는 서로 통하고 막히며, 만나고 또 순환하여 되돌아오는 이치로 이루어지고, 사람은 서로 만나 사랑하고 이를 변치 않는 도리로 지켜나가면서 얻고 잃음의 작용이 이루어지느니라. …배움에 뜻이 있는 자들이 이를 높이 들어 올린다면 이 바른 법도를 다시 세우는 데에 어찌 어려움이 있으리오?’

▶비를 세우면서 산이 다시 이어졌으니 우연인가 기연인가
주역의 대가 야산.

 

야산의 자택이 있던 인근에서 하룻밤을 묵은 순례객들은 일어나자마자 지역민들이 세운 야산선사 사적비를 참배했다. 사적지는 일제가 용의 꼬리의 혈맥을 끊고 신궁을 지으려던 곳에 있다. 주역의 원리를 통해 후천 세계는 동북간방인 이 땅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던 야산의 비를 세우면서 산의 맥을 끊은 도로 위에 흙을 덮어 다시 산이 연결됐으니 우연인가 기연인가.

순례단은 야산이 유(교)·불(교)·선(도) 3도를 회통시키려는 염원으로 후학을 양성했던 충남 부여군 운산면 옥교리 옥가실 마을에 들렀다. 야산은 이곳에 단황척강비를 세웠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조상을 폄하해 ‘단군’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고 ‘단황’으로 일컬었다. 일제 식민과 한국전쟁 등 우리 민족 최대의 시련기 속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도 진리로 민족과 세상을 건지려는 원대한 꿈을 잃지 않은 스승의 서원에 순례객들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6.25를 피한 안면도서 세상의 희망을 기원하다

 

▶한국전쟁 예견하고 300호 이끌고 안면도로

순례의 대미는 태안군 안면도. 안면도는 6·25를 예견한 야산이 300호를 이끌고 난리를 피했던 곳이다. 전쟁 3년 전 이미 이를 예견한 야산은 “내가 지위도 권력도 능력도 없으면서 어찌 큰 송사인 전쟁을 좌지우지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다만 300호쯤 이끌고 숨어보자는 것이니 따라갈 사람은 서둘러 가도록 해라”고 했다. 그 때 그를 따라나선 가구가 정확히 300호였다고 한다.

야산은 안면도에 도착하자마자 제자들을 이끌고 삼봉용굴로 가 제사를 지냈다. 삼봉해수욕장 옆 모래 위 바위섬엔 정말 용이 살았을 법한 용굴이 있고, 용이 승천하며 갈긴 똥이라는 전설이 있는 자국까지도 선명하다. 용굴에선 야산으로부터 주역을 배운 뒤 이곳 안면도에서 살아온 양덕근 할아버지(79)가 눈빛이 형용했던 야산의 모습을 전해주었다.

▶닫힌 진리의 문 열고, 닫힌 세상과 희망 열기 위한 것

대산은 이곳에서 해신제를 올리면서 순례자들의 호와 이름을 적어 연결한 긴 한지를 태워 올린다. 불붙은 한지가 마치 비상하는 용꼬리처럼 요동친다. 대산은 후학들을 향한 야산의 절절한 당부를 전한다.

“내가 홍역학을 창립할 때 모든 것을 한데 모아놓고 자물쇠를 잠갔다. 내가 두려워할만한 사람이 나와 열쇠를 따고 들어와야 한다. 이제 그 자물쇠를 열자가 누구냐?”

대산은 우리가 주역을 배우는 것도 닫힌 진리의 문을 열고, 닫힌 세상과 희망을 열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대산의 쩌렁쩌렁한 목소리 뒤로 끝없는 창해가 이미 열려 있다.

글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사진 영상미디어팀 이규호 피디 recrom295@news.hani.co.kr

5살 때 이미 김시습의 화신으로 극찬 백발백중 예지력으로 큰돈 벌어 독립운동자금무소유 삶으로 일관…사학자 이이화씨가 아들 경북 금릉군 구성면 마들이에서 태어난 야산은 5살 때 이미 김시습의 화신으로 극찬을 받을 만큼 영민했다. 15~19살 때 삼도봉 등에서 수도해 득도한 뒤 세상을 나온 뒤에는 미친 사람 행세를 했다. 당대의 도인이던 강증산은 말년에 임종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오는 성인이 있으면 가는 성인도 있는 법이다. 너희들이 앞으로 모르겠거든 야산선생집 벼름박(벽)을 보도록 하여라”고 했다는 말이 전한다.
야산은 28살 때 금강산에서 백일공부를 마치고 스스로 ‘달’이라고 칭했다. 선천시대엔 양(陽)이 주장하고, 후천시대는 음(陰)이 주장하니, 음을 상징하는 달로 이름한 것이었다. 그는 후천시대엔 달력도 달라져야 한다면서 경원력을 만드는 등 후천시대를 대비했다. 일제의 수탈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야산은 36살 때 대구에서 미두와 금광사업을 했는데, 백발백중의 예지력으로 큰 돈을 벌어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내기도 했다. 또 41살 때는 강원도 철원에 수십만 평을 매입해 농장을 짓고 고향 김천에 내려와 빈민 20여 가구를 이주시켜 공동체 생활을 했다. 야산은 자신이 먹고 자는 것 외에 조금도 개인적으로 소유물을 챙기지 않는 무소유의 삶을 살았으며, 길가에서 헐벗은 걸인들에게 입은 옷을 모두 벗어 입혀주곤 했다. 사학자 이이화씨가 그의 아들이다. 야산의 가르침은 1985년부터 주역을 가르쳐온 대산 김석진에 의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고, 현재 대산의 제자이자 야산의 두 친손자인 이전 이응국이 대전 동방문화진흥회에서, 청고 이응문이 서울 흥사단과 대구 대연학당 등에서 각각 주역을 전하고 있다. 조연현 기자

 

 

  • 수정 2019-10-19 11:23등록 2007-06-04 20:25

주역 수련대회 ‘물은 생명, 오염땐 재앙’ (hani.co.kr)

동방문화진흥회 신명행사 열려

기자조현

전문직 등 300여명 참석 주역 외우기·밤샘수행 함께
설립자 김석진 선생 강의때 정치 연관한 질문도 나와

 

지난 2~3일 서울 남산 속에 있는 서울국제유스호스텔엔 동양학의 최고봉이라는 주역을 공부하는 이들이 모였다. 무려 300여명이 모여 신묘한 주역의 조화를 드러냈다. 공자의 후신으로까지 일컬어지는 야산 이달 선사(1889~1958)의 뜻을 이은 동방문화진흥회 회원들의 수련대회인 신명행사였다. 신명행사란 주역 중풍손괘에서 따온 것으로 ‘신의 명을 받들어 밝음을 회복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모임 참석자들은 대법관과 고위 공직자 출신을 비롯해 교수, 교사, 한의사, 약사, 재야 학자 등 대부분이 전문직이나 지식인들이었다. 유교의 급속한 쇠퇴와 함께 동양학의 전통이 거의 끊긴 것이 아니냐는 세간의 인식에도 여전히 동양 정신의 진수인 주역에 대한 지식인들의 관심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해준 셈이다.

이 행사의 주관자는 동방문화진흥회 설립자인 대산 김석진(79) 선생이었다. 대산은 열아홉살 때부터 야산이 세상을 뜨기까지 곁에서 주역을 배웠고, 서울 흥사단 강의 등을 통해 끊길 뻔한 야산의 주역 맥을 되살려냈다.

대산은 이번 신명행사에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유가의 전통을 보여주었다. 이 가운데 주역 통강은 주역 64괘 384효 풀이 등 전문 2만자를 옛 선비들이 하던 대로 외워보이는 것이다. 이번엔 대구 대연학당 소속인 전재규(33·한의사), 최근욱(36·한의사)씨 2명이 통강했다. 지금까지 통강을 통과한 이들은 이 회에서도 20여명에 불과하다. 또 밤 12시부터 새벽 5시까지 불교 선승들의 참선과 비슷한 관(觀)수행이 있었다. 아침엔 현재와 미래를 점쳐주는 득괘(주역 괘를 뽑아주는 것)를 통해 상황이 어려우면 삼가고 겸허하며 더욱 인격도야에 애쓰고, 때가 도래했으면 기회를 살리는 지혜를 발휘하도록 경책했다.

이 행사에서 대산은 노구임에도 2시간 주역 강의에서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은 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잔기침 한 번 없이 열강을 하고, 밤샘 관 수행을 몸소 이끌었다.

그가 한 강의는 주역의 수풍정(水風井)괘에 대한 것이었다. ‘물과 환경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정해년 신명행사’라는 이번 행사에 맞춘 것이었다. 대산은 “우주 만물이 생겨날 때 가장 먼저 생긴 것이 물일 만큼 물은 그 자체가 생명”이라면서 “옛부터 정치의 성패도 물을 어떻게 백성이 잘 마시고 활용할 수 있게 하느냐에 달렸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예전엔 사람들이 총칼에 죽었지만, 앞으로는 물이 오염되고 빙하가 녹아 전쟁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현재 한나라당 대선 후보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경부대운하 공약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산이 신명행사의 주제를 ‘물’로 잡은 것부터 심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대산의 강의 말미에 한 대학교수가 일어나 “이명박 후보가 한강과 낙동강을 이어 운하를 파겠다고 하는데, 백성이 한천식(寒泉食·시원한 물을 마심)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대산은 “물 문제가 보통 문제가 아니다”고만 답했다. 이날 강의 도중 대산은 노무현 대통령의 코드 정치도 비판적으로 언급했다. 하지만 물문제에 대해선 물은 ‘개발수단’이기보다는 ‘지켜야할 생명수’란 점을 명백히 했다. 이명박 후보쪽이 주장하는 대운하에 대해 그가 즉답을 피했지만 결과적으로 지식인들의 경각심을 높인 셈이다.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08-03-25 19:25

[이사람] 역학 점괘 따라 365일 술술 풀어가세요 (hani.co.kr)

주역달력 펴낸 이응문 동방문화진흥회장

기자조현

불규칙 윤달 태음력-태양력 단점 보완
“민심 벗어나는 대운하는 실패할 것”

 

옛부터 우주 운행법칙의 변화와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살 계책을 마련하지 못하는 사람을 철부지(節不知)라고 했고, 이를 잘 알아 대비하는 사람을 ‘철 들었다’고 했다. 옛사람들이 철을 알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 달력이었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다가올 기후를 앞서 알아 씨앗을 뿌리고, 또 장마와 가뭄, 밀물과 썰물 등 우주운행에 따른 변화에 대비하는 데 달력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했다.

주역의 원리에 따라 태양력과 태음력의 단점을 보완한 새로운 달력이 있다. 근대 동양학의 왕도인 주역에 달통해 ‘이주역’으로 불리던 ‘한국 주역학의 종장’ 야산 이달 선사(1880~1958)가 만든 ‘경원력’이다. 이를 바탕으로 최근 야산의 친손자인 청고 이응문(48)씨가 달력을 펴냈다. 최근 주역의 본산격인 동방문화진흥회장을 맡은 그가 야산이 후천 원년으로 삼은 1948년에서 60년이 지난 뒤에야 조부의 뜻을 실현해 보인 것이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써온 달력은 태양력과 태음력이에요. 그러나 서양에서부터 온 태양력은 이용하기는 쉽지만, 1, 2, 3월 등 달들에 아무런 의미가 없고, 역(易)의 원리를 응용한 동양의 태음태양력은 윤달이 불규칙하게 들어있어서 쓰기에 번거로움이 많았지요.”

야산은 일제시대의 종말을 앞둔 44년 선천(先天)시대가 끝나고 후천(後天)시대가 열릴 것이라면서 새 달력을 내어놓았다. 기존 달력에서 44년은 ‘갑신(甲申)년’이었으나 그는 ‘경신(庚申)년’으로 바꿨다. 원(元)년이 경신년이라해서 ‘경원(庚元)력’으로 불린다. 야산은 민주공화제가 시작되는 48년을 후천시대의 시작으로 삼았다. 44년이 경신년이므로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순서에 따라 48년은 기존 달력에선 ‘무자(戊子)년’이지만 새 달력으로는 ‘갑자(甲子)년’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경원력으로는 올해도 갑자년이다.

경원력에선 또 그날 그날의 주역괘가 있다. 3월 25일은 ‘귀매’(歸妹)괘이고, 26일은 풍(豊)괘이며, 27일은 려(旅)괘다. 귀매괘는 남녀의 애정문제로 장애를 일으킬 수 있고, 풍괘는 정신과 종교적으로는 길하나 물질적으로는 좋지 않을 수 있으며, 려괘는 사람을 접대하는 데 좋다고 풀이할 수 있다.

야산은 경원력을 만들기 직전 문경새재의 신선봉 인근 조령에서 100일 기도를 올렸다. 조령은 한반도대운하 계획에서 25㎞의 초대형터널 굴착이 예정돼 있어 최대 논란을 빚고 있는 곳이다. 이 운하 구상에 대해 이 회장은 “순임금의 신하 우는 집 앞을 지나면서도 세 번이나 자기 집안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오직 지극한 일심으로 정성을 들인 끝에 아버지가 실패한 치수에 성공할 수 있었다”면서 “옛날부터 치수는 국가의 성패를 가르는 일이어서 국가와 백성을 위한 간절한 정성의 마음이 아니라 개인의 명리와 이해타산에 의해 그런 일을 벌인다면 모두 함께 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사학자 이이화씨의 친조카이기도 한 이 회장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다 3학년 때 중퇴하고, 85년부터 야산의 학맥을 이은 대산 김석진(80)씨 문하에서 동양 경전을 섭렵해 수제자가 됐다. 그는 26일 오후 7시 서울 대학로 흥사단에서 경원력에 대해 공개시민강좌를 연다. (02)2237-9137.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입력 2007-12-11 03:01업데이트 2009-09-26 01:15

‘주역’의 구성 원리를 분석한 ‘수역’을 펴낸 옹산 김상봉 씨가 주역 64괘의 회전대칭구조가 양자역학의 초대칭성의 원리와 어떻게 부응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훈구 기자
복희 8괘를 디지털코드로 옮긴 것. 양효(―)를 1로, 음효(--)를 0으로 대체하고 괘상에서 위에서 아래로 가는 순서를 디지털수상에선 왼쪽에서 오른쪽 순서로 바꿔 배열한다.
 
북한에서 태어나 열일곱 살에 1기 국가장학생으로 뽑혀 6·25전쟁 중 동독으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서 학문의 자유를 맛본 그는 기계공학 석사 논문을 마친 스물네 살에 자유를 찾아 서독으로 망명했다. 뮌헨에서 정밀공학을 더 공부하다 운명처럼 만난 남한 음대생과 결혼한 뒤 서른 살에 남한으로 이주한다. 이후 테크노크라트로 변신한 그는 상공부 산하 한국정밀기기센터 유럽사무소장과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로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산업화의 첨병으로 활약했다.

공학도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 온 그가 동양 최고의 비경(秘經)으로 꼽히는 ‘주역’의 비밀을 파헤친 책을 냈다. ‘21세기 주역과 과학의 획기적 만남’이란 부제가 붙은 ‘수역(數易·은행나무 출판사)의 저자 옹산 김상봉(72)이다.

“성장기의 대부분을 서양에서 보낸 나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서양 과학의 신봉자였소. 독일서 산 햇수만 20년이고 지금도 웬만한 과학책은 모두 독일어 책으로 읽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일선에서 은퇴한 뒤 시인이자 불교학자인 야석 박희선(1923∼1998)을 만나면서 그동안 내 삶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1996년부터 계룡산 산자락에 들어가 동양의 지혜를 현대 과학으로 풀어 내는 작업에 매달리게 됐습니다.”

야석은 2개의 분단국가를 가로지르면서 동서양을 넘나든 그의 업(業)을 풀어내는 길로 동양 역학(易學)과 서양 역학(力學)의 접목을 권했다. 옹산은 그 첫 작업으로 단군시대부터 전해졌다는 ‘천부경’의 지혜를 3이란 숫자의 세계관으로 풀어 내는 일에 착수했다. 그런 작업 도중 양과 음으로 이뤄진 2의 세계관을 담은 ‘주역’을 먼저 풀어야 3의 세계관을 해명할 수 있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게 ‘수역’이다. 주역을 연구하는 이들은 경문(經文) 풀이에 골몰해 왔다. 그러나 옹산은 그것을 건너뛰고 곧바로 64괘의 구성 원리 분석에 집중했다. 그는 양효(―)와 음효(--)를 1과 0에 대응시키는 3자리 디지털 부호로 변환시키고 다시 이를 적과 청을 활용한 3칸짜리 컬러 도상으로 변환시켜 주역의 괘가 음양대칭 대각대칭 회전대칭 등 다양한 대칭구조가 복합된 중층구조라고 분석했다. 또 주역 64괘가 32쌍의 대칭구조이며 그것도 단순히 음양이 아니라 회전대칭 구조로 이뤄졌다는 점도 밝혀냈다.

이는 주역에 대한 막연한 직관적 이해를 명쾌한 구조로 분석해낸 것으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연구였다.

“역은 복희의 8괘, 주문왕의 64괘, 공자의 유가역, 한말의 상수(象數)역으로 변천해 왔습니다. 8괘가 기초적 부호(符號)역이라면 8괘를 각각 상괘와 하괘로 짝지어 만든 64괘는 하늘의 뜻을 점치는 신도(神道)역이었습니다. 공자는 이를 인간세계에 적용한 인도(人道)역으로 풀어냈고 상수역은 이를 자연세계에 적용하도록 발전시킨 것입니다. 제가 개발한 수역은 그 상수역을 극대화함으로써 삼라만상의 원리를 규명하는 기초를 마련한 것이지요.”

옹산의 연구는 사실상 ‘주역’의 DNA 구조를 밝혀낸 것에 비견할 수 있을 듯하다. 그는 이를 토대로 2개 괘의 이층구조로 이뤄진 주역의 괘상을 32층 구조까지 확대해 그 괘가 280조에 이르는 2효다층괘상이 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했다.

“지금까지 주역 연구가 수학으로 봐서 미분의 원리를 적용했다면 저의 수역은 적분의 원리를 적용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의 다음 과제는 2의 사상을 능가하는 천부경의 3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내는 것이다. 그는 “흑과 백 또는 빨강과 파랑으로 이뤄진 ‘주역’의 태극과 달리 한국의 전통적 태극은 빨강 파랑 노랑의 3원색으로 이뤄졌다”는 말로 그 연구의 단초를 소개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철학과 사상]

중앙일보 입력 2001.03.15 00:00

[다석 유영모를 다시본다] 1. 다석과 제자들 | 중앙일보 (joongang.co.kr)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1890~1981)는 인도의 간디와 견줄만한 '큰 사상가' 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평생 나서기를 꺼려하며 수도(修道)와 교육에만 힘쓴 '은둔자' 로 산 탓에 그의 사상은 지금껏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오히려 함석헌.김교신의 스승으로 더 알려져 있다.

다석은 서른여덟살이던 1928년부터 YMCA 연경반(硏經班)을 지도하며 가르침에 나섰다. 35년간 지속된 이 강좌를 통해 다석은 기독교와 불교.유교.노장사상 등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독특한 사유체계를 이룩한다.

그를 한국 종교다원주의의 시발점으로 보는 이유다. 지난 13일은 그가 탄생한 지 1백11주년이자, 그의 제자 함석헌의 탄생 1백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를 계기로 중앙일보는 다석의 사상과 족적을 재조명하고, 다석이 후대에 미친 영향을 재평가하는 시리즈를 다섯 차례에 걸쳐 싣는다.

다석의 가르침에 깊은 영향을 받은 1세대 제자들은 네댓명 정도다. 나이로는 11년 차이지만 3월 13일 생일이 같은 씨알 함석헌(1901~1989)이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다석은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장으로 있을 때 함석헌을 처음 만났다. 1922년 다석의 나이 서른 두살 때로 함석헌은 이 학교 3학년 편입생이었다.

다석이 보기에 이 때 함석헌은 비범한 데가 있었던 모양이다. 함석헌은 당시 회고담에 "내가 이번에 오산에 왔던 것은 함 자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던가 봐" 라고 했다고 적었다. 함석헌에 대한 다석의 지극한 관심이 드러나는 일화다.

다석이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떠날 때 역까지 가방을 들고 배웅했던 것도 함석헌이었다. 이 때 헤어졌던 두 사람은 해방이후 함석헌이 월남(47년)하면서 서울에서 재회했다.

함석헌은 다석의 제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다석이 가장 아낀 제자는 따로 있었다.

김교신(1901~1945)이었다. 김교신은 일제시대 양정고등보통학교(지금의 양정고)교사로 있으면서 『성서조선(聖書朝鮮)』 등을 간행한 무교회주의자였다. 김교신은 함석헌과 동경(東京)고등사범학교 동기동창이다.

다석은 『성서조선』에 기고하면서 김교신을 알게 됐다. 그는 김교신의 사람 됨됨이에 매료돼 평소 가장 신뢰할 만한 제자로 생각했다. 다석은 "사람은 죽었다 살아나야 진정한 삶을 깨닫는다" 며 56년 4월 26일 자신의 상징적 죽음의 의식을 갖는데, 이 날짜를 잡은 것도 김교신이 죽은 날(4월 25일)을 의식해 그 다음날로 택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김교신을 배려하는 마음이 컸다.

다석의 애제자 중 아직 살아서 맹렬히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사람은 김흥호(82)와 박영호(67)다. 20대에 다석을 만난 김흥호는 지금도 다석을 닮고자 하루 일식(一食)을 실천하고 있는 '산 다석' 같은 사람이다.

다석이란 호는 그가 하루에 한끼 저녁만 먹는다는 뜻이다. 이화여대 교수 및 교목실장을 지낸 그는 지금도 매주 이화여대 교회 주일학교에서 다석의 가르침(동양고전과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벌써 30년째. 수강생 중에 현직 대학교수들도 많다.

다석사상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박영호는 1세대 중 막내다. 59년부터 81년까지 20여년간 다석을 가장 가깝게 모신 사람으로 '마침보람(졸업증)' 까지 받았다.

'농사를 짓고 살아야 한다' 는 가르침을 받들어 경기도 의왕시에서 농사를 지으며 다석의 사상을 집성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10년전 성천문화재단을 설립해 다석 사상을 전수하는데 힘쓰고 있는 류달영도 직접 다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밖에도 다석으로부터 가르침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수다하다. 대한적십자사 서영훈 총재, 숭실대 안병욱 교수를 비롯해 김홍근 등 다석사상연구회의 멤버들, 사상적 재조명 작업에 앞장서고 있는 외국어대 이기상.가톨릭대 정양모 교수 등도 넓게 보아 제자들이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소중한 제자들은 그 가르침을 귀담아 들고자 지금도 배움터를 찾고 있는 '씨알(민중)' 들이다.

13일 1백11주기 기념식은 그런 씨알들이 모여 뜻을 기리는 정말로 조촐한 행사였다.

정재왈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중앙일보 입력 2001.04.12 00:00

[다석 유영모를 다시본다] 5·끝 다석과 함석헌… | 중앙일보 (joongang.co.kr)

 

다석 유영모와 제자인 함석헌을 잇는 상징적인 가교(架橋)는 씨알사상이다.

그러나 씨알사상의 씨가 다석에게서 싹을 틔웠음에도 불구하고 제자가 너무 승(勝)한 나머지 세상 사람들에게는 ‘씨알사상=함석헌’으로 각인돼 있다.

함석헌의 호가 씨알인데다 그가 농사를 짓던 천안의 농장(씨알농장)과 잡지(씨알의 소리)의 이름에도 씨알이란 단어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기 때문이다.

우선 씨알의 뜻에 대한 함석헌의 회고와 풀이를 들어보자.

“오늘 씨알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그것에 대해 좀 설명을 부득이 해야겠습니다.… 씨알이란 흔히 쓰는 말로 하면 백성이란 말인데 요새 말로 민중이요 영어로 하면 피플(People)입니다.

이를 순 우리말로 해 보자는 것입니다.”(『씨알의 소리』 1980년 5 ·6월 합병호)

이러면서 함석헌은 그 유래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런데 그것도 내가 시작한 것도 아니고 유영모 선생님이 옛날 유교 경전 중의 대학(大學)이라는 책을 풀이해 가르쳐주시면서 ‘대학지도 (大學之道),재명명덕(在明明德),재친민(在親民),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에서 재친민의 민을 번역하다가 민이란 뜻의 순수한 우리말이 없으니까 뭐라 할까 ‘씨알’이면 좋을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함석헌은 1957년 천안에서 농장을 할 때나 70년 잡지를 낼 때도 이를 그대로 썼다.

그러나 지금와서 씨알이라는 말이 누구에서 비롯됐냐를 따지는 일은 그 본질을 훼손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씨알사상의 출발점은 하나였으되 그에 대한 입장에서 두 사람은 일정한 차이를 보이는 등 나름의 독자성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다석의 씨알사상이 종교적 차원의 형이상학적인 명제였다면,함석헌의 그것은 보다 현실참여적인 실천적 명제였다.

다석의 씨알사상에 대한 제자 박영호의 풀이다. “다석의 씨알은 형이상학적으로는 하느님의 아들인 ‘얼의 나’(얼나)를,형이하학적으로는 평민이나 민초(民草)를 말한다. 정신적으로는 지극히 높은 하느님과 하나되고 육체적으로는 지극히 낮은 땅과 하나 됨을 이른다.

바로 자유의 진리정신과 평등의 서민정신이 하나를 이룬 것이다.” 그 사상의 원형을 예수와 석가,노자에게서 찾은 다석은 ‘영원한 생명(씨알)’을 깨닫는 게 인생의 목표여야 한다고 설파했다.

반면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실천적 행동을 통해 민주주의가 이상적으로 구현되는 게 목적이라 했다.

그런 점에서 현실학문이었던 공맹(孔孟)철학의 입장과 비교될 수 있다.

한신대 신학과의 김경재 교수는 “다석이 전체와 객체의 동일성에 주목했다면 함석헌은 여기에 진화론과 기독교 사상을 가미해 보다 역동적인 생명철학을 구축했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김교수는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극단적 개인주의와 집단적 전체주의(세계화)가 대립하는 지금 어떻게 둘의 공존과 통합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인 해답을 제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반 사람들이 유영모나 함석헌을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의 사상에 정통한 몇몇 전문가들은 ‘세계적’ 운운하지만 대중에겐 낯설기 그지없다.서강대 철학과 정인재 교수는 “우리사회가 급격히 근대화하면서 사상계에서 소외된 부분이 바로 유명모와 함석헌이었다”며 “동서양을 아우르는 포괄적 사상이 요청되는되는 오늘날 두 사람이 남긴 선구적 업적은 빠른 시일내에 반드시 재조명돼야 한다”고 밝혔다.

정재왈 기자

 

 

 

송고시간2016-06-26 08:00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유별난 시대가 유별난 인격을 통해 차원 높고 격조 있는 사상을 낳았다"

함석헌학회장인 김영호 인하대 명예교수는 함석헌(1901∼1989) 선생이 격변의 20세기를 살며 갖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한국 사상사에 큰 획을 그을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불행한 역사적 배경이 오히려 내면적 깨달음의 토양이 됐다는 것이다. 물론 격랑에 휩쓸리지 않는 올곧은 정신이 아니었다면 타협이나 변절로 귀결됐을 터다.

김 명예교수가 최근 펴낸 '함석헌사상 깊이읽기'는 함석헌 선생의 저작 가운데 사상의 핵심이 깃든 글들을 모아 해설을 덧붙인 책이다.

그의 생애와 사상, 실천을 한 데 모은 입문서이자 '사상 사전' 역할도 하도록 구성했다. '사상의 형성'(1권), '생각과 실천'(2권), '씨알·생명·평화'(3권) 등 주제에 따라 세 권에 나눠 담았다.

 

함석헌 선생의 사유는 방대한 분야에 걸쳐 있지만 주된 가치관은 종교와 역사를 축으로 삼았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에 바탕을 두고 장로교·무교회주의·퀘이커교로 이행하는 신앙 편력을 보였다. 민족사를 고난의 역사로 규정하고 한민족을 '수난의 여왕'으로 표현한 '고난사관', 역사의 주체를 지배층에서 민중으로 대치한 '민중사관', 역사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사이에도 신이 관여한다는 '섭리사관' 등 복합적 역사관으로 세상을 봤다.

30대까지가 사상의 기반을 마련한 시기였다면 40대부터는 비폭력·평화사상을 핵심으로 문명비판과 사회개혁에 몰두했다. 스승인 유영모 선생의 '씨알' 개념을 독창적 사상체계로 발전시켰고 국가·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세계주의를 주창했다. 현실의 모순을 실천으로 깨는 데도 힘을 쏟았다.

대략 반세기 전에 확립된 함석헌의 사상은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을까. 김 명예교수는 "과학과 기술은 더 발달했지만 인간에게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의식과 정신 차원의 진전이 있었다고 볼 근거가 없다. 오히려 퇴보, 퇴행했다"며 "함석헌이 역설하는 개혁은 우리 사회만이 아니라 세계와 인류가 다 함께 공유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글들은 함석헌 선생의 '전집' 20권과 '저작집' 30권에서 주로 발췌했다. 1962년 미국을 방문해 펜실베이니아주의 시골마을에서 쓴 미발표 서사시 '한국의 도전'이 부록으로 실렸다.

한길사. 각권 632∼720쪽. 2만∼2만2천원.

dada@yna.co.kr

 

 

 

입력 : 2009.07.16 17:41

한국과 일본의 철학자들이 다석 유영모(1890~1981)와 씨알 함석헌(1901~1989)이 제창한 씨알사상을 본격 조명하는 자리가 국내 최초로 마련된다. 씨알재단은 교토포럼과 함께 오는 19일부터 23일까지 목포대에서 씨알사상을 주제로 한 제1회 한·일 철학포럼을 개최한다. 씨알사상은 지난해 서울대에서 열린 세계철학대회에서 동서문명의 만남 속에 형성된 민주와 평화의 철학으로 주목받았다. 이를 계기로 씨알재단의 씨알사상연구소(소장 박재순)와 일본 교토포럼의 공공철학공동연구소(소장 김태창)는 씨알사상을 중심으로 한·일 간 철학교류를 지속적으로 하기로 했다. 공공철학을 추구하는 교토포럼과 공공철학공동연구소는 공공철학으로서의 씨알사상에 깊은 관심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포럼에서는 한·일 양국의 학자 26명(한국 17명, 일본 9명)이 다른 일정 없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발제와 토론을 통해 씨알사상을 집중 조명할 예정이다. 두 단체는 두 번째 포럼을 12월 일본에서 연 뒤 포럼을 정례화할 예정이다.

 

 

  • 수정 2019-10-19 11:23등록 2008-02-28 21:43

유영모·함석헌 ‘씨알철학’ 본격 조명 (hani.co.kr)

올해 사유탐색 행사 잇따라
7월 세계철학대회 특별세션
5월 ‘사상포럼’ 만들어 첫 대회

기자강성만
  •  
함석헌(1901~1989·오른쪽)

 

나를 ‘하나님’으로 보는 주체적 인간관은 민초들을 역사의 주인으로 끌어올리는 씨알사상을 낳았다. 다석 유영모(1890~1981)가 이 사상의 모태라면 신천 함석헌(1901~1989)은 이 사상을 널리 알렸다. 함석헌의 스승인 다석은 특권적인 양반사상이 나라를 망쳤다고 보고 씨알(민중)을 주체로 세우고 섬기는 사상을 제시했다. 함석헌은 씨알을 역사와 우주의 중심과 주체로 세우면서 씨알의 철학운동을 펼쳤다.

동양과 서양 사상의 접합을 통해 민의 존귀함을 깨우치려 했던 두 한국 사상가의 사유에 대한 조명이 올해 본격화된다. 올해는 특히 두 사상가의 사유를 한데 묶어 탐색하는 행사들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지난 10월 다석재단과 씨알사상연구소의 회원들이 씨알재단을 함께 꾸린 탓도 크다.

가장 관심이 가는 행사는 오는 7월 30일에서 8월 5일까지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철학대회다. 둘의 사상이 ‘철학의 올림픽’이라는 이 대회의 특별세션에서 다뤄진다. 이는 한국 현대 철학의 계보 속에 두 사람의 사유가 당당하게 자리잡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박재순 씨알사상연구소 소장은 이 세션에서 20여 명의 연구자들이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 소장을 포함해 ‘우리말로 철학하기’를 강조해 온 이기상 한국외국어대 교수, ‘함석헌의 바울’이 되겠다는 김상봉 전남대 교수,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 김해암 코넬대 교수, 김경재 한신대 명예 교수, 서유석 호원대 교수 등이 발표자로 나선다.

박 소장은 “세계 근현대사를 살필 때 동·서양의 정신이 창조적으로 만난 경우가 한국을 제외하고는 매우 드물다”면서 유영모와 함석헌은 이런 만남에서 가장 주목할 필요가 있는 사상가라고 밝혔다. 유영모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유·불·도를 회통하는 한국적이고 세계적인 사상을 형성했으며 함석헌은 기독교와 민족 정신의 참된 만남을 고민했으며 또한 민주화라는 시대 정신을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것이다.

이기상 교수는 “유영모와 함석헌은 최수운 한용운과 같이 우리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 사상가이면서 우리말로 사유한 철학자”라고 두 사람 철학의 의미를 풀었다. 다석은 자작시 3천수 가운데 1700수를 우리말로 지었고 함석헌은 자신의 사유를 민중들에게 어떻게 쉽게 이해시킬 수 있는지 고심했다고 했다.

씨알재단은 오는 5월에는 두 사상가를 연구하는 학자와 생명평화단체 중심으로 ‘씨알사상포럼’을 만들어 첫 행사를 열기로 했다. 공공성의 철학을 추구해온 일본 교토 철학 포럼의 대표인 김태창 박사가 ‘공공성의 철학적 토대와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을 주제로 발표하기로 했다.

다음달 11일에는 종교계와 생명평화운동 활동가 등이 참여하는 씨알생명평화 문화제를 연다. 7월에는 씨알사상에 관심있는 국내외 학자들이 참여하는 생명평화축제를 열어 두 사람의 사상을 톨스토이, 간디 등의 생명평화철학과 견줘 살필 계획이다. (02)2279-5157.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 수정 2008-01-30 20:26 등록 2008-01-30 20:26

관념 아닌 현실에서 자아를 찾다 (hani.co.kr)

김상봉 교수, 학술대회서 함석헌철학 의의 구체화

학술대회서 함석헌철학 의의 구체화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는 2002년 펴낸 그의 저서 <나르시스의 꿈>에서 한국 철학의 역사는 함석헌(1901~89)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규정했다. 함석헌이 지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우리말로 씌어진 최초의 철학책이라고도 했다.

왜 그런가? 데카르트 이후 서양철학의 근본 개념인 ‘반성’과 ‘자기인식’이 이 땅에서 철학적 사유의 중심이 된 게 바로 함석헌에 이르러서라는 게 그의 평가다. 이 사상가는 또 나의 존재 의미를 묻는 동시에 우리 역사·민족의 삶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파악하려 했다는 점에서 박제된 철학이 아니라 살아있는 철학의 출발을 알렸다고도 했다.

김 교수는 26일 한국칸트학회 주최로 동국대에서 열린 학술대회 ‘20세기 한국철학에서 주체와 타자의 문제’에서 함석헌 철학의 의의를 좀 더 구체화했다.

 

서양은 추상적 순수자아 추구한 반면 개별자아 정립 힘써‘신에 대한 믿음은 인간에 대한 믿음’ 해석으로 민족 사유

그는 이날 발표한 글 ‘함석헌과 주체성의 문제’에서 우선 함석헌과 서양철학의 자아론을 비교했다. “데카르트에서 후설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의식철학은 자기를 언제나 추상적 보편성 속에서 파악한다.” 서양 철학자들에게 자아는 구체적 개성이 사상된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순수자아라는 것이다. 하지만 함석헌에게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자아를 정립하는 것이” 절박한 과제였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 차이의 연원을 역사에서 찾았다. 식민 지배로 현실적 자유를 빼앗긴 이들에게 인식론적 자유, 즉 생각하는 한 남이 아닌 자기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절반의 의미 밖에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개별적 자아의 인격성을 온전히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자아나 자유를 상실해 본 적이 없는 서양에서 문제는 “현존하는 자아의 불완전성을 지양하여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것일 뿐”이다. 서양에서 “자아나 자유는 늘 거기 있기 때문에” 여기서 추구되는 자아란 불완전성을 지양하여 완전성에 도달한 순수자아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함석헌에게 있어 ‘자아 찾기’는 한갓 관념의 일이 아니라 가장 치열한 구체적 현실의 일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함석헌의 독보적 깨달음 가운데 하나로, 그가 보편자를 차이 속에서 설명하려고 했던 점을 들었다. 이런 대목에서다. “나에게까지 뚫리지 못한 종교, 나와 하나님을 맞대주지 못하는 종교, 참 종교 아니다. 나의 종교가 종교다. 교도(敎徒) 있는 것은 종교 아니다. 참 종교는 한 사람의 신자를 가질 뿐이다.”(함석헌 글 ‘씨알의 설움’에서) 함석헌은 여기서 “종교를 모든 사람이 획일적으로 보편자에게 종속하는 사건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보편자를 드러낼 때 비로소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보편자를 철저히 개성적 차이 속에서 말한 셈이다. 차이를 통한 보편자 해체에 열중해 온 니체 이후 현대철학자들과는 분명 다른 사유이다. “함석헌은 보편을 말하되, 그것을 차이 속에서 말함으로써 차이와 동일성, 또는 보편성과 개별성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다른 길을 보여준다.”

김 교수는 함석헌 사유의 또다른 고유성으로 그가 신에 대한 믿음을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해석하고 있는 점을 들었다. “나를 믿고 이웃을 믿음으로써만” 신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이렇게 믿음으로 하나 된 만남의 지평을 ‘나라’나 ‘민’ 혹은 ‘씨알’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때문에 씨알에게로 갈때 하나님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김 교수가 “씨알들 속에서 그들과 하나될 때 비로소 전체와 하나 되며 그렇게 전체와 하나 됨을 통해서만 참된 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정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대회에서 김상환 서울대 교수는 글 ‘박동환 타자성의 문제’를 통해 박동환 전 연세대 철학과 교수의 사유를 고찰했다. 박 전 교수는 ‘3표’라는 용어를 써어 서양과 동양 그리고 주변부 지역에서 각각 구조화된 사유의 패턴을 정리했다. 김 교수는 ‘3표론’의 비교철학적 작업의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동서 주류사상사와 주변부의 토착적 사유 사이에서 상호 분석과 반증의 절차가 있을 때, “기존 사상사의 환원과 순화를 의도하는 해체론을 완성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국적 사유의 고유한 특성을 살리는 이론적 실천도 역시 비교철학적 구도 안에서 펼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 함석헌은 =비폭력 인권 운동을 전개한 종교지도자이자 재야운동가. ‘씨알사상’이라는 비폭력, 민주, 평화 이념을 제창하였다. 일제 때 옥고를 치렀으며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반독재 운동에 참여해 수차례 투옥당했다. 1970년 진보적 평론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였으나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다. 일본 유학 시절 초창기 한국 무교회주의 기독교 운동을 하였고, 말년에는 퀘이커 신자가 되었다. 대표 저서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뜻으로 본 한국역사> 등이 있다.
 
 
 
  • 수정 2007-12-10 18:32 등록 2007-12-10 18:32

유영모·함석헌의 얼을 만난다 (hani.co.kr)

1월 ‘씨알사상’ 전문강좌

근현대 한국이 낳은 사상가인 다석 유영모(1890~1981)와 바보새 함석헌(1901~89·사진)의 얼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전문강좌가 마련됐다.

지난 10월 출범한 씨알재단(이사장 김원호)은 내년 1월 5일부터 3월 8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 9시 서울 장충동 우리함께회관 5층에서 ‘유영모·함석헌 삶과 씨알사상’을 주제로 제1기 씨알사상 전문강좌를 개설한다. 이 강좌에선 유영모·함석헌의 제자들이 강사로 나서 씨알사상의 종교적·역사적 배경 등을 소개하게 된다.

다석의 사상을 여러 권의 책으로 소개해온 박영호 씨알재단 자문위원이 ‘유영모의 삶과 정신’을 강의하는 것을 비롯해 씨알사상연구회장 김성수 박사가 ‘함석헌의 삶과 정신’, 씨알사상연구소장 박재순 목사가 ‘씨알사상의 기본이해’, 다석학회장 정양모 신부가 ‘유영모의 기독론’ 등을 강의한다. 또 성공회대 교수 윤정현 신부가 ‘씨알사상과 종교이해’, 한신대 명예교수 김경재 목사가 ‘씨알사상과 역사이해’, 이규성 이화여대 교수가 ‘씨알사상과 세계이해’, 씨알평화 상임이사 김진 목사가 ‘씨알사상과 상생평화’를 강의한다. crlife.org (02)2279-5157.

조현 기자

 

유영모. 함석헌의 씨알사상 전파총력

‘씨알’ 새달 5일 창립

서울신문 기사일자 : 2007-09-27    23 면

 

다석 유영모(1890∼1981)와 바보새 함석헌(1901∼1989)은 기독교와 과학정신·동양종교사상을 아우르며 영성과 평화를 함께 바라본 종교인이면서 ‘삶의 철학자’로 통한다. 오산학교 설립자이자 3·1독립운동 주역인 이승훈의 제자 유영모는 ‘특권 양반사상이 나라를 망쳤다.’는 판단 아래 민중을 주체로 세워 섬기는 민주사상을 제시한 인물.“진인(眞人)의 경지인 노자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을 햇볕에 그을린 농부의 얼굴에서 본 뒤 땀흘려 일하고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고자 농촌으로 들어가 살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민주화와 비폭력 평화운동의 사상가인 함석헌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런 두 사람이 줄곧 강조한 것은 바로 씨알, 즉 민중이다.

 

유영모와 함석헌은 3월13일 한날에 태어나고 사망 날짜도 2월3일과 4일로 하루 차이였다. 같은 생각과 삶 만큼이나 나고죽는 날까지도 같았던 이들이다.

 

종교계·학계 등 인사 대거 참여

 

두 사람이 생전 강조한 이 씨알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재단법인 씨알(이사장 김원호 유미특허법인대표)이 다음달 5일 오후 4시 장충동 우리함께빌딩 2층 강당에서 창립식을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한다. 지난 8월30일 창립이사회를 연 데 이어 지난 18일 서울시로부터 재단법인 인가를 받았었다.

 

재단법인 씨알은 유영모, 함석헌의 씨알사상을 널리 알리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씨알들의 정신문화운동과 환경조성, 씨알사상 전승발전을 위한 기반조성, 씨알상 제정운영을 통한 씨알 삶 따라살기 등이 그 일들이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의 정신을 따르는 학계·종교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상임이사 박재순 목사를 비롯해 이사인 김철호 KAIST 경영대학 초빙교수, 육순종 목사(성북교회 담임), 정양모신부(다석학회 회장), 감사인 김종생 목사(예장통합 사회봉사부 총무)가 그들이다. 여기에 정진섭 변호사, 김흥호 목사(다석사상연구회회장), 류승국 교수(전 한국정신문화원장), 문동환 목사(한신대 명예교수), 서영훈 전 적십자사 총재, 원경선 풀무원 설립자, 유인걸 성천문화재단 이사장, 한승헌 전 감사원장, 김수중 한국양명학회회장, 김조년 한남대 교수, 박노자 오슬로대학 교수, 박영호 다석학회 고문, 변진흥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사무총장, 서유석 대한철학회 부회장, 송인창 동양철학회 회장,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명예교수, 이병창 한국철학사상연구회장, 이정배 한국조직신학회 회장도 들어 있다.

 

다석전집 출간·세계평화사상 연구사업 서둘러

 

이들이 가장 벼르는 것은 다석전집 출간. 다석일지를 포함한 유영모의 모든 저작물에 낱말풀이와 주해를 붙여 다석연구의 토대로 삼는다는 계획이다. 함석헌의 세계평화사상 연구사업도 큰 과제. 종교, 문명에의 근본적 반성과 성찰을 담고 있는 함석헌의 사상이 인문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보고 학술진흥재단과 공동진행할 계획을 세워놓았다.

 

두 사람의 철학은 흔히 성경말씀(계명, 아가페 사랑)뿐만 아니라 그리스철학과 서구 근대철학의 로고스(이성), 동아시아의 길(道), 한민족의 한 사상을 아우르는 종합적 사상으로 평가받는다. 따라서 두 사람의 복잡한 철학 연구에는 전문학자들의 모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견 수렴을 통해 매월, 격월, 혹은 절기별 각 분야 전문가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이와 관련해 내년 7월로 예정한 세계철학대회 ‘함석헌, 유영모 사상 발표회’는 가장 먼저 치러야 할 대규모 행사. 박재순, 김성수, 김영호, 김흡영, 박노자, 박영호, 양현혜, 윤정현, 이규성, 이기상, 이정배, 정대현, 김경재, 정양모, 허우성의 발제를 한글과 영문으로 출판할 계획이다.

 

씨알상 제정·‘사상 발표회´ 추진

 

유영모와 함석헌의 씨알사상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이들을 격려하기 위한 씨알상을 제정, 매년 말 수여하며 두 사람의 생몰일에 즈음해 씨알생명평화문화제도 정기적으로 열어나간다.

 

한편 다음달 5일 창립식 자리에서는 강연회가 열려 김흥호 목사(‘유영모와 함석헌’)와 류승국 교수(‘씨알사상에 대해’)가 발제할 예정이다. 재단법인 씨알의 김원호 이사장은 “한국의 근현대사는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진행과 민중 삶속으로의 깊숙한 기독교 유입의 특징을 갖는다.”면서 “유영모와 함석헌은 한국 근현대의 이런 문명사적 상황과 사명을 깊이 자각해 주체적이고 세계적인 정신과 철학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입력 : 2008-07-14 22:08:20 수정 : 2008-07-14 22:08:20

'지성의 향연' 서울서 펼쳐진다…세계철학대회 보름 앞으로 | 세계일보 (segye.com)

150개국 1700여명 참석… 갈등과 관용·세계화 등 놓고 토론

아시아선 첫 개최… 유가·도교·불교철학 정식분과로 채택 ‘주목’

 

 

◇이명현                 ◇피터 슬로터다이크 ◇비토리오 회슬레 ◇장 뤽 마리옹  ◇이삼열
5년마다 세계철학의 새로운 기운을 전하는 세계철학대회가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대회는 7월30일부터 8월5일까지 서울대와 코엑스에서 열린다.

제22차 서울 대회의 주제는 ‘오늘의 철학을 다시 생각하다(Rethinking Philosophy Today)’. 이번 대회는 전체강연, 기금강연, 심포지엄, 한국철학회 특별세션, 초청 발표, 라운드테이블, 학회모임, 분과 발표, 학생 발표 등으로 진행된다.

주요 행사인 전체강연은 실천철학, 형이상학, 인식론, 철학사 등 4개 핵심 주제를 아우른다. 5개 심포지엄은 ‘갈등과 관용’ ‘세계화와 코스모폴리타니즘’ ‘생명윤리, 환경윤리 그리고 미래세대’ ‘전통, 근대 그리고 탈근대’ ‘한국의 철학’ 등을 다룬다. 물론 미학, 윤리학, 인식론, 정치철학, 철학사, 형이상학 등을 오늘의 관점에서 반성하는 시간도 갖는다.

참가 예상 인원은 1784명에 이르고, 54개 분과 400여 세션에서 150개국 출신의 학자들이 논문을 발표한다.

철학과 학문의 거목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이다. 유럽 철학계를 대표하는 피터 슬로터다이크(독일), 독일 현대철학을 이끄는 소장학자 비토리오 회슬레, 영미 문학계의 거목 티모시 윌리엄슨(영국) 등이 눈에 띈다.

미국의 인지과학자 어네스트 르포어, 기독교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장 뤽 마리옹도 동참한다.

그러나 다른 차원에서도 새삼 서울 대회의 의미가 각별해진다. 새천년 들어서는 두 번째이고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점에서다. 서울 대회는 서양 일변도의 세계철학 흐름에서 벗어나 한국철학, 더 나아가 동양철학이 세계철학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러한 평가는 제21차 터키 이스탄불 대회에서 차기 결정지로 서울이 결정될 때부터 감지됐다. 그리스가 차기 주최국을 놓고 한국과 경합을 벌였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의 발상지 그리스가, 철학에서는 한참 뒤졌다고 평가받은 한국에 고배를 마신 것이다. 아시아에서 서양철학을 가장 먼저 수입한 일본과, 동양철학의 주요 국가인 중국보다 먼저 한국이 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도 의미 깊다.

서울 대회는 동양의 전통 사유인 유가·도가·불교 철학을 정식분과로 채택했다.

세계철학대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동아시아 철학이 독립 분과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는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시범 종목으로 채택된 태권도가 이후 세계 각지에서 크게 성장했던 경험과 비교될 수 있다.

이번 대회를 계기로 유럽철학, 영미철학, 동양철학이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한국철학회 특별 세션에는 한국 철학자들이 대거 참여해 퇴계 이황과 다산 정약용 등을 중심으로 한국 전통 철학을 토론한다.

서울 대회는 기존 서양철학계에도 흔치 않는 기회를 제공할 전망이다. 전쟁과 지구촌 생태위기를 경험한 서양으로서는 ‘공존의 삶’을 강조해온 동양식 ‘생각의 힘’에 고개를 숙일 만하다. ‘생각과 논리의 힘’마저 세계의 표준이라고 여겼던 기존 서양철학이 관성에서 탈피할 기회인 셈이다.

한국철학계로서도 소중한 시간이다. 한국의 사회 전반이 각종 현장에서 ‘철학의 빈곤’에 시달리지만 철학계가 크게 도움을 주지 못했던 상황을 타파할 각성의 시간이 제공되기 때문이다. 시대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문제에 대한 답을 내놓는 철학자의 역할과 그 영향이 우리 사회 곳곳에 전파되길 기대할 수 있다.

사회 일각에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학문’쯤으로 인식되는 철학이 다시 주목받을 수도 있다. 이런 견해에는 이명현 대회 조직위원장(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도 동의한다.

이 위원장은 대회에 앞서 “넓게 공부해 세계적인 철학자가 나오기를 기대한다”며 “이번 대회가 우리의 젊은 학자들에게 그 같은 장을 마련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박종현 기자

 

 

입력 2008-01-03 02:59업데이트 2009-09-25 22:21

“한국 철학의 진면목을 세계 학계에 알린다.”

 

올해 7월 30일∼8월 5일 서울대에서 열리는 제22차 세계철학대회. 동양에서 최초로 열리는 세계철학대회이자 올 한 해 국내 학계의 최대 행사가 될 이번 대회를 앞두고 국내 철학계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오늘의 철학을 다시 생각한다’를 전체주제로 잡은 이번 대회에는 프랑스의 알랭 바디우,독일의 페터 슬로터다이크오와 빗토리오 회슬레, 영국의 티모시 윌리엄스, 미국의 쥬디스 버틀러 등 세계적 철학자들이 참석한다.

이번 철학대회의 두드러진 특징은 동양 철학이 세계철학대회의 정규 분과로 포함됐다는 점. 기본적인 발표가 이뤄지는 일반 분과가 종전 51개에서 올해 대회부터 불교, 유교, 도가 철학을 포함한 54개 분과로 늘어난다.

3000여 명의 철학자가 참석하는 세계철학대회 공식 언어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등 5개 언어다. 논문 발표와 토론이 이들 언어 중 하나로 이뤄지는데 이번 대회에선 중국어와 한국어가 포함돼 7개로 늘어난다. 전체 강연과 심포지엄에 제공되는 통역도 영어 프랑스어 외에 중국어 한국어가 더해진다. 세계철학대회의 한국 개최를 통해 동양 철학의 위상만 높아지는 게 아니다. 세계 철학의 변방이었던 한국 철학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중국이 베이징 올림픽을 통해 스포츠와 정치 경제적 도약을 준비한다면 한국은 세계철학대회를 통해 문화적 도약을 펼칠 수 있는 셈이다.

우선 심포지엄 5개 주제 중 하나로 ‘한국의 철학’이 포함됐다. 길희성 서강대 명예교수, 김여수 경희대 교수, 이태수 서울대 교수, 이광세 미국 켄트주립대 교수, 승계호 미국 텍사스대 교수 등 5명의 발표자가 모두 한국인이다. 아직 주제가 확정되지 않았지만 일부는 청사진이 그려진 상태다.

이태수 교수는 19세기 말 개화기∼21세기 서양 철학이 한국에서 어떻게 수용됐고 그 과정에서 어떤 문제와 한계에 봉착했는지를 소개한다.

“유학을 배경으로 서양 철학을 수용했던 한국적 전통이 일제강점기 독일 철학 중심의 일본 내 서양 철학이 수입되면서 그 맥이 끊겼고, 광복 이후엔 분단과 냉전 상황으로 인해 다시 서양 철학 중 일부만 이해되는 편향이 발생했습니다. 1980년대 이후 20여 년간은 분석철학 위주의 미국 철학이 강세를 보였고 1990년대 이후 프랑스 철학의 수용은 특정 인물 위주로 편식된 측면이 있습니다.”

발표 주제를 정리하고 있는 김여수 교수는 “세계 문명의 중심부에서 떨어져 있는 한국 철학이 어떻게 특수성을 극복하고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시론(試論)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이광세 교수는 타협이나 절충이 아니라 여러 사상의 장점을 다원주의적으로 통합하려는 동양의 중도(中道)사상이 한국 철학에서 어떻게 접목됐는지를 동서 비교철학의 관점에서 조명할 예정이다.

그러나 문제점도 있다. 이들 발표자가 서양 철학 또는 비교철학 전공자여서 정통 한국 철학 소개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세계철학대회 한국조직위원회(의장 이명현 서울대 명예교수)에서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특별세션 형식으로 한국 대표 철학자들의 사상을 소개할 예정이다.

우선 조선조 유학을 대표하는 4대 사상가로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다산 정약용을 선정해 ‘궁극적 관심과 궁극적 실재(Ultimate Concern and Ultimate Reality)’라는 주제로 이들의 사상을 비교 분석하는 특별 세션을 준비 중이다. 기획을 맡은 곽신환 숭실대 교수는 “퇴계학과 율곡학이 상대적으로 이론에 천착했다면 우암학과 다산학은 현실적 실천의 문제로 맞대결을 펼쳤다”며 “종교와 철학이 맞물려 궁극적인 문제로 파고들었던 그들의 사상적 편차를 풀어내겠다”고 말했다.

인물 중심이 아니라 지역 중심의 사상을 소개하는 특별세션도 준비 중이다. 경남 진주를 중심으로 남명 조식의 학통을 계승한 남명학파, 경북 성주를 중심으로 한강 정구의 학맥을 잇는 한강학파, 하곡 정제두를 중심으로 독자적 양명학의 전통을 이어 간 강화학파 등이 그 후보다. 기획을 맡은 김석수 경북대 교수는 “퇴계나 율곡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명이 덜 이뤄진 한국 사상을 재발견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출 계획”이라고 말했다.

근현대 사상가로서는 다석 유영모와 씨ㅱ 함석헌이 가장 먼저 선택됐다. ‘우리 말과 글로 철학한 최초의 근현대 사상가’로서, 사제 간인 두 사람의 사상은 초청 세션으로 독립돼 발표가 이뤄진다. 씨ㅱ사상연구소(소장 박재순)가 주재하는 이 발표에는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이기상 한국외국어대 교수, 김상봉 전남대 교수,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 교수 등 20여 명이 참가한다. 박 소장은 “다석과 씨ㅱ의 사상은 동서 문명의 만남의 과정에서 형성된 독자적 철학이라는 점에서 세계사적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했다.

이번 대회에 소개될 한국 철학의 콘텐츠는 2월 말경 확정된다. 한국 철학의 위상을 높이고 그 의미와 가치를 세계 학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더 많은 철학자의 동참이 절실한 때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수정 2007-10-22 19:07 등록 2007-10-22 19:07

우리 사상이 세계 평화 ‘씨앗’ 될 수 있을까 (hani.co.kr)

평화재단, 24일 학술회의 개최

기자조현
최제우

원효 화쟁사상→ 갈등의 소통
최제우 동학사상→ 근대·보편성
함석헌 씨알사상→ 가치의 총체적 총합
한국 사상의 세계적 평화사상 가능성 제시

 

성자는 지혜를 얻은 사람이다. 그 지혜는 그를 따르는 종교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자신의 사상이 특정인들의 도그마가 되어버리는 것을 성자들이 추호도 원할 리 없다. 지금 서로 갈등하고 미워하고 갈라져서 괴로운 사람들을 위해 지혜의 샘을 아낌 없이 나눠주고 싶을 것이다.

평화재단이 오는 24일 오후 2~6시 서울 태평로 1가 한국언론회관 20층 국제회의장에서 ‘한국사상에서 찾는 평화와 통일’이란 전문가포럼을 여는 것도 우리의 난제를 푸는 데 성자의 지혜를 썩히지 말고 활용해보기 위함이다. 재단이사장 법륜 스님은 “세계적인 모순이 집약되어 있는 동북아, 그 안에 자리잡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더 깊고 풍성한 지혜가 필요하다”며 “이를 위해 한민족 역사 속에 존재했던 우리 고유의 평화 사상의 가치를 주목해 세계적인 평화사상으로서의 가능성을 확인해 보자”고 제안했다.

이번에 조명될 평화사상들은 원효의 불교사상과 최제우의 동학사상, 그리고 기독교사상을 대변하는 함석헌 사상이다. 세 발표자의 발표문을 미리 살펴보자.

원효의 ‘화쟁(和諍)과 일심(一心)’에 대해선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김석근 교수가 발표한다. 원효(617~686)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끊임없이 각축하고 항쟁하는 대립과 갈등의 시대를 살았다. 원효의 화쟁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 군대를 이 땅에서 축출하는 과정에서 계속된 전쟁과 살생을 넘어 하나가 되기 위한 몸부림에서 나왔다. 김 교수는 “뭇 경전의 부분적인 면을 통합해 온갖 물줄기를 한 맛의 진리의 바다로 돌아가게 하고, 불교의 지극한 공변한 뜻을 열어 모든 학파들의 서로 다른 쟁론을 화쟁시킨다”며 원효의 〈열반경종요〉를 인용해 원효의 사상을 설명한다. 그는 화쟁에 해당하는 오늘날의 용어를 ‘소통’으로 본다. 화쟁은 서로 다른 주장들을 모아서 서로 소통시킨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정치적으로 제도적으로 통일되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다 해결되지는 않고 마음의 앙금은 아주 오래 남을 수 있다”며 “화쟁과 일심은 ‘어제까지 적으로 싸우다 오늘은 한 지붕 밑에 같이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원효가 제시한 인간 마음의 통일”이라고 밝혔다.

근대 우리나라의 변혁의 물꼬를 텄던 수운 최제우의 동학에 대해선 동학사상을 연구하는 ‘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인 박맹수 원광대 교수가 발표한다. 박 교수는 “수운이 말하는 서학이란 천주교만이 아니라 서양학문과 서양문명 전체를 가리키는데, 수운은 서학을 배척하기는커녕 서학이 지닌 근대성과 보편성을 널리 인정했다”며 “다만 그것이 지닌 제국주의적이며 침략주의적인 성격을 극복함으로써 조선 사람들에게 알맞으면서 조선의 역사와 전통에 어울리는 가장 주체적인 사상을 만들어보고자 했던 민초들의 열화와 같은 소망을 집대성한 사상적 창조의 결과물이 바로 동학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동학은 우리의 고유사상이던 풍류도와 대승불교 전통, 유학, 서학 등을 아울렀다”며 “모든 사상과 두루 소통하면서 뭇 생명을 다 살려내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사상”이라고 말했다.

함석헌의 사상은 〈함석헌 평전〉의 저자인 김성수 박사가 발표한다. 1947년 “내 생각은 말고 어서 가거라”는 노모의 음성을 들으며 북한을 탈출해 죽을 때까지 사랑하는 어머니와 맏아들, 맏딸을 다시 만나지 못한 채 숨을 거둔 함석헌은 일본 식민과 분단과 독재의 아픔을 온몸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김 박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면서도 서구기독교가 로마 콘스탄틴 대제 이후 지배 이념화하고, 정치 제도권과 결탁함으로써 일반 씨알과 생활을 함께했던 예수정신의 본래 의미를 상실했다고 보았던 함석헌은 1940년 1년간 일제 감옥에 수감된 동안 노자와 장자를 읽고 노장의 평화사상이 인류 전체의 향상된 질적인 삶을 위해, 물질과 군사력을 앞세운 제국주의나 물량주의를 맹신하는 자본주의 가치들을 대체할 수 있고, 대체해야 한다고 믿었다”고 전한다. 김 박사는 또 “편식이 몸의 건강을 해치는 것처럼 편향적 사상이나 편견적인 생각은 인간의 건강하고 총체적인 정신발전을 저해한다”며 “함석헌의 삶과 사상은 민족정신과 세계정신, 동양과 서양,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이성과 신앙, 과학과 종교, 세속도시, 즉 종교의 세속화와 신의 도시 등의 가치를 크게 하나로 통일하는 총체적 종합을 추구하려는 데 있었고, 이런 종합적 가치는 곧 한반도의 평화통일뿐 아니라 세계 평화를 이루는 필수적 씨앗”이라고 밝혔다. (02)581-0581.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입력 2007. 7. 11. 19:31수정 2007. 7. 11. 19:31

[한겨레] "우리 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고 확신합니다."(윤구병 변산공동체 대표)

"(그의) 데이터(자료)에 충실한 철학은 지금 지구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서양으로 역수출할 수 있다고 봅니다."(최화 경희대 철학과 교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가 이 나라에 존재했다니 다소 생소하다. 하지만 윤 대표는 그렇게 생각한다. 자신에게 사상이라는 게 있다면 그 모든 것은 이 스승에게서 물려받았다고 여긴다.

 

서양 형이상학의 거목 박홍규(1919~1994) 교수의 유고집 다섯 권(민음사)이 12년 만에 완간됐다. 5권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강독〉이 나옴으로써 박 교수 타계 이후 13년 만에 유고집이 완성된 것이다. 1·2권인 〈희랍철학논고〉와 〈형이상학강의1〉은 1995년에, 3·4권인 〈형이상학강의2〉와 〈플라톤 후기 철학 강의〉는 2004년에 나왔다.

1946년부터 35년 동안 서울대 철학과에 재직한 박 교수는 살아생전 저서를 내지 않았다. "스스로 공부가 모자란다고 생각하셨습니다."(윤 대표)

박 교수는 논문도 쓰려 하지 않았다. 그는 석·박사 학위는커녕 학사 학위도 없다. 서울대 교수 재직 동안 쓴 7편의 논문도 주로 부교수, 정교수가 되기 위한 '요식적인' 글이었다. 김남두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이렇게 회고했다. "논문도 직접 쓰지 않으시고 선생님은 불러 주고 학생들이 받아 썼습니다." 논문이나 책을 쓰기에는 생각이 너무 많으셨다고 김 교수는 덧붙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유를 끊어내는 일을 학생들이 맡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제자들이 그의 강의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우리만 들으면 안 될 강의"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유고집은 이 녹음테이프를 풀어낸 것이다. 지금은 내로라 하는 중진 철학자 이정우 소운서원 원장, 이태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 등이 대학원 재학 시절 스승과 함께 철학의 근본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주고받는 문답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그의 철학은 왜 위대한가?

"학생 가운데 한 명이 추상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박 교수가 바로 '자네 안경을 벗고 그 이론을 가지고 안경을 설명해 보라'고 했습니다."(윤 대표) 데이터가 뒷받침되지 않은 철학은 의미가 없다는 게 박 교수 사유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 실증철학을 높이 평가했다. 수학과 심리학, 생물학 등을 두루 섭렵한 뒤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삼아 사유를 풀어놓는 철학 방식에 높은 점수를 준 것이다.

 

그가 보기에 '코기토'(cogito·나는 생각한다) 개념을 들고 나온 데카르트(1596~1650)는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사람이고,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갈릴레이(1564~1642)는 "개방적이고 비판적"이다. 왜냐하면 '데이터' 없이 생각만 하는 사람은 중세의 수도사처럼 보수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실험을 했다. 변하는 데이터에 맞춰 학설도 계속 수정할 수밖에 없다. '보수'에 머무를 수 없는 이유다.

"(박 교수는) 데이터에서 출발한 뒤 추상화 과정을 거쳐 원리로 가는 것이 플라톤 이후 학문 정신이라고 보았습니다."(최 교수) 윤 대표는 박 교수의 기획을 이렇게 요약했다. "박 교수는 공간과 시간적 사유를 겸한 플라톤(기원전 429?~347)의 사상과, 공간적 사고를 펼친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와 시간적 사고를 펼친 베르그송(1859~1941)의 거대한 사상을 이어받아 이를 종합하려 했습니다."

최 교수는 박 교수 사상의 또 다른 특질로 "무궁무진한 사유의 유연성과 지칠 줄 모르는 분석력"을 꼽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제대로 읽는 법' 곧 분석력을 강조했다. 플라톤 저작의 번역이 늦어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공부가 덜 되었다고 판단한 스승이 말렸기 때문이다. 경직성과 습관성도 경계했다.

그 때문에 박 교수가 칸트를 비판하는 중요한 논점 중의 하나가 주관이라는 생명체 기능 속에 범주라는 경직된 틀을 놓았다는 것이라고 최 교수는 밝혔다.

유고집의 마지막 권은 1981년 3월부터 1983년 12월까지 3년에 걸쳐 매주 토요일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를 대학원생들에게 강독한 내용이다. 박 교수는 베르그송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라고 사유했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정태적 형이상학'과 반대 지점에 있었으나, 생물학 등 자연과학의 결과를 토대로 삼아 철학적 사유를 펼친 점 등을 들며 그를 플라톤 철학의 적자로 보았다.

후학들은 유고집을 프랑스어나 영어로 번역해 서양에 박 교수 철학을 역수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오는 10월에는 프랑스의 베르그송 연구자들을 초청해 〈창조적 진화〉 출간 100년 기념 학술대회도 열기로 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 단편 선집 출간 | 서울신문 (seoul.co.kr)

입력 :2008-01-31 00:00ㅣ 수정 : 2008-01-31 00:00 

‘뤼시스’ 등 플라톤 전집 43권 번역 추진

2000년 3월 설립 이래 정암학당은 줄곧 소크라테스 전후 시대 원전을 읽어왔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주로 공부하되 아리스토텔레스, 호메로스, 스토아학파 등의 글도 함께 다뤘다.‘공부는 길고 결실은 더딘’ 학당의 연구는 2005년 6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아카넷 펴냄)으로 첫 열매를 맺었다.

‘선집’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서양고대철학 분과와의 합작품이다. 한철연 회장을 맡기도 했던 이정호(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교수) 정암학당 이사장이 다리를 놨다. 양쪽의 인적 구성이 대부분 겹치면서 자연스레 학당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했고,2002년 5월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을 단일 주제로 한 국내 최초의 학술발표회(한철연 주최)도 열었다.‘선집’은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제논, 데모크리토스 등 고대 문헌들에 흩어져 있는 100명 넘는 초기 사상가들의 단편들을 채집·번역한 책이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저술 중에 온전히 남아 있는 책이 한 권도 없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지만 책 출간 사실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이 교수는 “‘선집’은 동양의 사서삼경 같은 책으로 서양철학의 뿌리에 해당하는 매우 중요한 책”이라면서도 “책 출간으로 금방 유명해질 줄 알았는데 아무도 안 알아주더라.”며 웃었다.

‘아무도 안 알아주는’ 학당의 작업은 플라톤 전집 번역으로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4월 ‘뤼시스’ ‘크리티아스’ ‘알키비아데스 1·2’의 동시 출간을 시작으로 ‘크라튈로스’ ‘메넥세노스’ ‘에우튀데모스’ 등 최근까지 모두 6권(이제이북스 펴냄)을 내놨다. 그간 플라톤 대화편의 국내 원전 번역은 그리스 철학의 원로인 박종현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공로로 상당수 세상에 나온 바 있다. 정암학당은 2011년까지 43권 분량으로 전편 번역을 추진하되, 고등학생도 몰입할 수 있을 만큼 가독성을 염두에 둔다는 계획이다.‘플라톤 과업’을 모두 끝내면 학당의 작업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헬레니즘 철학 번역으로 넘어간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인문학의 밑바탕을 까는 수도사들 | 서울신문 (seoul.co.kr)

입력 :2008-01-31 00:00ㅣ 수정 : 2008-01-31 00:00 

그리스 로마 원전 연구와 번역 현실 문제 개입·반추 동력 마련

“한국 인문학에 ‘슬로건’은 있지만 ‘베이스’는 없습니다. 우리는 ‘1차 자료 번역’이란 인문학의 베이스를 놓는 수도사들입니다.”

 

▲ 이정호(오른쪽) 정암학당 이사장과 김인곤 학당장은 오직 고대철학 1차 자료 번역을 학문적 사명감으로 알고 매달려왔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쓴 학당 현판(‘그리스 로마 원전을 연구하는 사단법인 정암학당’)은 새달 19일 횡성 학당에 걸릴 예정이다.

 
이정호(57·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정암학당 이사장은 학당 연구원들을 ‘수도사’에 빗댔다. 주목받고 인기 있는 연구 대신 인문학 밑바탕을 까는 비인기 학문(고대철학 원전 번역)을 택해 “연구실에 처박혔다.”는 뜻이다.“그저 숨어서 공부하는 사람들인데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미화되기 싫다.”며 언론 노출도 꺼렸다. 학문적 명예욕이 아닌 사명감을 좇아 좁은 연구실에 유폐된 사람들.‘수도사적 학문태도´란 그들 스스로의 표현이야말로 정암학당의 어제와 오늘을 그대로 요약해준다.

“우리를 밟고 가라”

그리스철학 연구집단 정암학당이 최근 사단법인화했다. 원전 강독을 시작한 지 10여년 만이다. 지난해 12월 법인인가를 받았고, 올 1월 법인등기를 마쳤다.2월19일에는 현판식도 갖는다. 현판엔 ‘그리스 로마 원전을 연구하는 사단법인 정암학당’이라 새겼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글씨를 쓴 현판은 정암학당의 정체성 그 자체다. 원전 연구·번역 외엔 다른 연구도, 사업도 하지 않는다. 지난해 4월부터 펴내고 있는 플라톤 전집(최근 나온 ‘에우튀데모스’와 ‘메넥세노스’까지 현재 6권 출간)은 오로지 정체성에만 복무해 일궈낸 땀의 결실이다.

2000년 3월 이정호 교수가 선친의 재산을 밑천으로 설립한 정암학당은 1997년 시작한 강독모임을 뿌리로 한다. 그리스철학 연구자 몇 명이 매주 한 차례씩 모여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공부했다. 때마침 진보 철학자들의 모임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한철연) 소장 학자들이 서양고대철학 분과를 만들면서 이 교수의 강독모임과 인적 결합을 맺었고, 한동안 단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원전을 읽었다.

학당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업에 매달려온 이유는 서양 고대철학이 모든 인문학 사유의 원형질이란 믿음 때문이다.30일 서울 혜화동 정암학당에서 만난 이 교수는 “현실의 반성적 지표를 찾을 때 문제의식의 모태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고대철학에 가 닿는다.”고 말했다.

“우리말로 번역된 1차 자료는 2차,3차 우리식 사유로 발전하는 근본 바탕이 되지만, 영어와 일어 중역을 거치며 오염된 원전은 2차,3차 사유까지 왜곡시켜 왔다.”는 지적도 뼈아프다. 이 교수는 “1차 자료가 없어 연구를 못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게 우리 목표”라고 했다. 정암학당의 진담반 농담반 모토는 ‘우리를 밟고 가라.’다.

학당의 고전연구는 현실과 동떨어진 학자적 관심사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연구자들에게 고대철학은 첨예한 현실 문제에 적극 개입하고 반추하게 만드는 동력이다. 이 교수는 “신자유주의적 즉물성이 품위 있는 삶을 갈수록 방해하는 지금, 고전철학의 인문적 가치야말로 삶을 버티게 만드는 힘”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11월 이 교수와 김인곤(51) 학당장은 삼성 비자금 사태의 엄정한 특검수사를 촉구한 ‘철학자앙가주망네트워크’에 이름을 올렸다. 학문적 관심은 고대에 두지만 시선은 늘 현실에 밀착시켜온 학당의 연구태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오역 줄이기 위한 집중 공동작업

정확한 번역을 위한 학당의 공동작업은 학계에서 유명하다. 책임연구자가 최대한 완성도 높은 초역을 해오면, 나머지 연구자들은 원문과 번역문을 놓고 한 자 한 자 타당성을 검증한다. 의견이 일치할 때까지 최종 번역어 합의를 유보한 채 토론을 거듭하고, 그 과정에서 얼굴을 붉히며 싸우기도 한다. 방학 때면 강원도 횡성에 마련된 학당에서 합숙하며 집중독해를 병행한다. 그리스어 원전 해독능력이 충분치 않은 일반 대학에선 시도하기 힘든 작업방식이다.“정암학당이 학문공동체를 표방하지만 매우 전문적인 집단일 수밖에 없다.”고 김 학당장이 말하는 이유다. 섣불리 학당을 대중화했다가는 대중이 읽을 수 있는 1차 자료는 영원히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여타 생계활동 없이 번역작업에만 몰두해온 연구원들은 자연히 가난하다. 학당에서 연구를 맡아 진행해도 고작 70만원을 받는 게 전부다. 지금까진 이 대부분을 이 교수의 사재에서 충당했다. 학당의 사단법인화는 무엇보다 연구원들 20여명의 시급한 생활안정을 고려해 추진됐다. 이 교수는 “97년 강독모임부터 활동해온 김 학당장의 경우 대학 출강도 안 나가고 번역에만 헌신해왔다.”면서 “연구원들에게 최소한의 공부 여건을 만들어 주려면 학당이 외부의 물적·형식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학당은 법인 설립을 계기로 학술진흥재단의 연구비 지원을 기대하고 있다. 새달 19일 ‘사단법인 정암학당’은 강원도 횡성 학당에서 1차 이사회를 연다.

글ㆍ사진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더오래]K뷰티의 뿌리..쑥과 마늘로 백색 피부 가꾼 웅녀 (daum.net)

송의호입력 2021. 10. 14. 11:00수정 2021. 10. 14. 22:18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111)

한국 문화가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OED)에 최근 한류와 관련된 단어 20여 개가 새로 실렸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옥스퍼드대 출판부가 펴내는 이 사전은 지난 9월 업데이트를 하면서 한국 문화와 관련된 단어를 대거 포함했다. OED는 “한국 대중문화가 국제적 인기를 누리는 요즘 K팝, K드라마, K뷰티, K푸드, K스타일 등 여기저기 접두사 K가 붙는 것처럼 보인다”고 소개했다.

OED의 지적처럼 K뷰티(K-Beauty)는 한국에서 만들어진 화장품을 지칭하는 용어다. 한국 화장품 산업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코로나19 대유행 속 K뷰티는 요즘 세계시장에서 어떤 반응을 얻고 있을까. 산업통상자원부의 8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한국 화장품 수출액은 6억90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20.8% 증가했다. 9월에도 화장품 수출실적은 8억8100만 달러로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K뷰티의 선전은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한민족은 역사 시작부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DNA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원은 고조선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민족은 흰 피부의 소유자를 귀인으로 받아들이고, 흰옷을 선호하는 백의민족이다. [중앙포토]


10월 3일 개천절이 지났다.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는 한민족의 기원을 되새기는 날이다. 한민족은 홍익인간을 내세우며 나라를 세웠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겠다는 다짐이다. 『삼국유사』 고조선 편에는 아름다움의 역사가 행간에 실려 있다. 2000년 전 단군왕검은 아사달을 서울로 삼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시대다. 단군신화에 따르면 한민족의 첫 주거지는 단목(檀木, 박달나무) 근처라고 한다. 아모레퍼시픽의 태평양박물관 관장을 지내고 『한국화장문화사』를 쓴 전완길은 이를 “한민족은 향나무인 박달나무를 신성하게 여기는 등 향료가 생활과 밀접했음을 의미한다”며 “당시 한민족은 향유·향료를 발견해 사용한 것은 물론 피부를 희고 아름답게 가꾸었던 듯하다”고 보았다.

단군성전의 모습. [중앙포토]


그럼, 환웅이 곰과 호랑이에게 준 쑥과 마늘의 용도는 무엇일까. 식품학자는 쑥과 마늘을 양념으로 보고 의학사가는 약재로 말한다. 하지만 쑥과 마늘을 미용 재료로도 볼 수 있다. 쑥과 마늘은 피부를 희게 하는 미용 재료로 사용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민간의 미용 처방을 보면 쑥을 달인 물에 목욕하면 피부가 건강해지고 아울러 미백(美白)을 기대할 수 있다. 또 짓찧은 마늘을 꿀에 섞어 얼굴에 골고루 펴 바른 뒤 씻어내면 살갗의 미백효과는 물론 잡티·기미·주근깨 등을 제거할 수도 있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주면서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도록 한 것은 백색 피부 가꾸기를 시험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곰과 호랑이는 신화인 만큼 두 동물의 기질을 지닌 여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환웅과 백색 피부를 가꾼 웅녀 사이에서 태어난 이가 바로 단군왕검이다. 이후 한민족은 흰 피부의 소유자를 귀인(貴人)으로 받아들이고, 흰옷을 선호하는 백의민족이 되었다. 그러니 한민족이 백색 피부 등 아름다움에 관심을 두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나아가 그걸 세계인에게 보급해 널리 인간을 아름답게 하려는 홍익인간 정신이 오늘날 K뷰티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대구한의대 교수ㆍ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