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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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商, 기원전 1600년경 ~ 기원전 1046년경)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왕조이다. 반경(盤庚)이 마지막으로 옮긴 수도가 은(殷)이기 때문에 은나라로 부르기도 한다.
명칭[편집]
'주(周)'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은(殷)'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탓에 '은'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나, 스스로 나라 이름을 칭할 때 '은'나라를 세운 '부족' 이름인 '상(商)'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으므로, 학계에서는 '상'으로 통일해 부른다.
'상(商)'나라는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는데, '반경왕'이 마지막으로 옮긴 수도가 '은(殷)'이었으므로, '은(殷)'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개요[편집]
상나라 시조에 관한 의견은 분분한데, 기록에 의하면 전설상 인물인 황제(黃帝)의 후손 탕왕(湯王)이 세웠다고 전한다. 탕왕은 하나라의 마지막 왕이자 폭군인 걸왕을 무찌르고 상나라를 개국하였다.
마지막 왕은 무희 달기와 함께 백성을 잔혹하게 다룬 30대 주왕(紂王)이며, 주(周)나라 시조인 서주 무왕(西周 武王)에 의해 멸망하였다.
19세기 말까지 전설상 왕조로만 다루었으나 20세기 초 은허(殷墟)가 발굴되고 고고학적 증거가 나타나면서 실재하는 왕조로 인정했다.
출토된 청동기나, 갑골문자(甲骨文字)를 독해함으로써 선사 사회부터 역사시대로 옮겨진 은나라 사회의 실태가 해명되기에 이르렀다.[1]
역사[편집]
창업 이전[편집]
전설상 상 왕조의 시조는 설로 되어 있다. 설은 유융씨의 딸이자 제곡 차비인 간적이 제비의 알을 먹었기 때문에 낳은 아이로 되어 있다. 설은 순 때에 우의 치수를 도운 공적이 인정되어 순에 의해 상에 봉해져 자씨 성(子姓)을 받았다.
그 후 설의 자손은 대대로 하나라를 섬겼다. 또 설로부터 탕까지의 14대 사이에 8차례 수도를 옮겼다고 한다.
역대 치세[편집]
설로부터 13대째의 탕은 박(현재의 허난성 상추시)을 수도로 삼고 있었다. 탕은 현인 이윤의 도움을 빌려 하왕걸을 쓰러뜨리고 제후들에게 추천되어 왕이 되었다.
상나라 4대 왕인 태갑은 폭군이었기 때문에 이윤에게 추방되었다. 후에 태갑이 반성했고 이윤은 이를 허락했다. 이후 태갑은 선정을 베풀어 태종(太宗)으로 칭해졌다.
옹기 때에 왕조는 잠시 쇠약해졌다. 옹기의 다음 왕인 태무는 현인 이척을 임용해 선정을 베푸려 노력했고 상 왕조는 부흥했다. 태무의 공적을 칭송해 태무는 중종(中宗)으로 칭해졌다.
중종의 사후에 다시 왕조는 쇠약해졌다. 조을은 현인 무현을 임용해 선정을 하려고 노력했고 상 왕조는 부흥했다.
조을의 사후에 다시 왕조는 쇠약해졌다. 반경은 은허로 천도했고 탕 때의 선정을 부활시켰다.
반경의 사후에 다시 왕조는 쇠약해졌다. 무정은 현인 부열을 임용해 상 왕조의 중흥을 완수했다. 무정의 공적을 칭송해 무정은 고종(高宗)으로 칭해졌다.
상나라 고종 이후의 왕은 대체로 어리석은 폭군이었다. 상 왕조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즉위 후 달기라는 미녀에게 빠지고 폭정을 실시했고, 백읍고가 아버지 희창을 위해 알현하고 원숭이를 바쳤는데 달기의 모함에 의해 주왕(紂王)에게 살해 당하고 부친은 사면을 위해 주왕(紂王)에게 살해 당한 백읍고의 육병을 먹은 뒤 귀가하고 먹은 육병을 토했고 임종 전에 상 왕조를 멸망할 대책을 세운 후 그의 아들인 희발(姬發)이 상나라의 여러 제후들을 모아서 주왕을 주살하고 상 왕조는 멸망했다.
멸망 후[편집]
주왕의 아들인 무경은 주의 무왕에 의해 상나라의 옛 땅에 봉해졌다. 무왕의 사후에 무경은 무왕의 형제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해 주살당했다. 그 후, 무경의 백부의 미자계(주왕의 형)가 송에 봉해져 상 왕조의 제사를 계속했다.
상나라의 도읍지[편집]
상나라 도읍지 변천표국왕당시의 지명현재의 지명선상(先商) 시대조상(早商) 시대만상(晩商) 시대
설(契) | 박(亳) | 일설로는 현재 랴오닝성 서부에 이르는 허베이성 동북부 일대, 일설로는 현재 허난성 뤄양시 옌스시 스샹거우 유적(尸鄕溝遺跡) |
번(蕃) | 일설로는 현재 베이징시, 허베이성 북부 지둥 평원(冀東平原) 일대 | |
소명(昭明) | 지석(砥石) | 일설로는 현재 허베이성 스자좡(石家莊) 이남, 허베이성 싱타이시 이북 지역. |
상(商) | 일설로는 현재 장하(漳河) 일대, 일설로는 현재 산시성 샹뤄시 샹저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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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토(相土) | 상구(商丘) | 일설로는 현재 허베이성 중부, 허난성 북부. |
“태산(泰山) 아래” | 일설로는 태행산(太行山) 기슭. | |
상구 | 윗줄과 동일. | |
왕해(王亥) | 은(殷) | 해당하는 현재 위치는 불명. |
상갑미(上甲微)(망(芒) 33년 ~ 공갑(孔甲) 9년) | 업(鄴) | 현재 허베이성 한단시 린장현 장하 유역 |
“상후(商侯 =은후(殷侯))”(공갑 9년 ~ 걸(桀) 15년) | 상구(商丘 ※=商邱) | 윗줄과 동일. |
태을(大乙) 탕(湯) — 대무(大戊) 밀(密)(걸 15년 ~ 중정(中丁) 원년) | 박 | 일설로는 현재 허난성 정저우시 상성 유적(商城遺址) |
중정 장(莊), 복임(卜壬) 발(發)(중정 원년 ~ 하단갑(河亶甲) 원년) | 오(囂) | 일설로는 현재 허난성 싱양시 동북쪽 오창(敖倉) 혹은 오산(敖山), 일설로는 현재 산둥성 기몽산 구(沂蒙山區), 일설로는 현재 허난성 정저우시 상성 유적(商城遺址) |
전갑(戔甲) 정(整)(하단갑 원년 ~ 조을(祖乙) 원년 혹은 2년) | 상(相) | 일설로는 현재 허난성 안양시 네이황현 동남쪽. |
차을(且乙) 등(滕) ~ 차정(且丁) 신(新)(조을 원년 혹은 2년 ~ 남경(南庚) 3년) | 비(庇) | 일설로는 현재 산둥성 윈청현 북쪽. |
형(邢) | 일설로는 현재 허베이성 싱타이시 | |
남경 경(更), 상갑(象甲) 화(和)(남경 3년 ~ 반경(盤庚) 15년?) | 엄(奄) | 일설로는 현재 산둥성 지닝시 취푸시 |
반경(般庚) 순(旬) | 은(殷) | 현재 허난성 안양시 서북 은허 유적(殷墟遺址) |
제신(帝辛) 수(受) | 조가(朝歌) | 현재 허난성 허비시 치현 차오거 진 |
역대 군주[편집]
사회와 문화[편집]
은대의 국가는 왕이 거주하는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그 주위에는 농업생활을 영위하는 여러 촌락이 전개되어 있었으며, 왕이나 귀족은 농민을 지배하여 곡물을 조세로 징수해서 일족(一族) 및 예속되어 있는 가내노예나 각종 기술자들을 부양했다. 농민은 하나의 대가족 집단이 하나의 마을을 구성하고 마을의 경작지에서 영농을 하고 있었다. 이 혈연 촌락은 족장의 통솔 밑에 어느 정도의 자위조직(自衛組織)도 가지고 공동작업에 종사하여, 자율적인 생활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지배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농민을 장악하기보다는 족장들을 장악하고, 족장들을 통해서 촌락을 지배했다.[1]
은나라 시대의 정치는 신권정치로서 제사·정벌·권농·목축 등 주요한 국사는 신의 뜻을 묻는 점(占)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사회는 부권적(父權的) 씨족제로서 처음은 형제 상속이었으나 곧 부자상속으로 되었다. 귀족은 더없이 정교한 청동기·백도(白陶)·옥기(玉器)를 사용하고 있었다. 농민은 목제 농기구나 석제 농기구를 사용하여 보리·수수·기장 등을 재배하고, 양잠을 하였으며, 말·양·돼지·소 등을 사육했다.[2] 인신공양 풍습 또한 존재하였다.[3]
정치[편집]
상나라 사람들은 제(帝)가 우주의 지배자이며 그 의지에 따라 모든 미래가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점을 쳐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신정 정치가 이루어졌다. 갑골문은 상제의 의향을 묻기 위한 행위의 기록을 의미하는 것으로 상제에 대한 제사와 조상 숭배가 합쳐져서 상나라는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제정일치 국가의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상나라 시기에 정교한 청동기가 발달되었는데 이러한 청동기는 바로 신정적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신정적 권위는 쇠퇴하고 세속적 권위를 강화해 간 왕권이 성장하였다.
행정[편집]
상나라는 읍제(邑制)국가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읍이란 씨족 집단을 중심으로 성벽을 갖춘 국가를 의미한다. 읍은 대읍과 족읍, 소읍으로 나뉘는데, 대읍은 상나라 왕이, 족읍은 상나라 왕과 연합관계에 있던 씨족의 우두머리, 소읍은 씨족의 우두머리와 연합관계에 있던 동족집단의 우두머리가 각각 통치하였다. 이처럼 누층적으로 구성된 읍들 사이와 정치적 연합관계를 봉건(封建)관계라고 부른다.
유적과 유물[편집]
갑골문 귀갑(甲骨文 龟甲)
대표적인 유적으로 은허가 있다.
은허[편집]
19세기 말에는 허난성(河南省)에서 은허, 즉 은나라 수도의 유적으로 알려진 곳에서 갑골문자가 새겨진 귀갑(龜甲)과 우골(牛骨)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은왕조의 계도(系圖)는 한대(漢代)의 사마천이 《사기》(史記) 속에 기술하였는데, 갑골문자 속에 나타난 여러 왕의 이름과 그 세계(世系)가 《사기》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은허에서 출토되는 갑골문에 의하여 은나라 왕의 존재가 인정되고, 특히 은허로 도읍을 옮긴 후, 반경의 동생인 왕 무정(武丁) 이후의 은나라 후반기의 실재가 확인되었다. 은허로 수도를 옮긴 후의 은나라 후반기의 실제 연대는 기원전 14세기 말부터 기원전 11세기 중엽이다.[2]
갑골문자[편집]
1899년에 갑골문(甲骨文)이 발견됨으로써 그 실존이 알려졌는데, '갑골'이란 거북의 뱃가죽뼈, 짐승의 뼈 혹은 소의 어깨뼈를 말한다. 갑골문이란, 갑골의 안쪽 면에 불에 달군 나무를 눌러 급속히 팽창시키면 표면에 국부적인 균열이 생기는데, 그 균열의 상태를 보아 점을 치고 거기에 점친 날짜와 점쟁이의 이름, 점친 내용과 결과 등을 새겨 넣은 글을 말한다. 갑골문의 주요 내용은 주로 조상신이나 자연신에 대한 제사의 여부, 전쟁의 가부, 농사의 풍흉, 바람과 비의 유무, 수렵이나 재해의 유무 등 왕의 통치와 관련된 다양한 사안들이었다.
연구 및 기타[편집]
상인(商人)라는 말은 상나라 사람들이 나라가 멸망한 후에 생업을 위해 각지를 떠돌아 다니며 물건을 팔았던 것에서 유래한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구체적으로 몇 년인지를 추정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중국의 하상주단대공정은 이 사건을 기원전 1046년의 일로 보고 있다. 예전의 설로는 죽서기년에 무왕에서 유왕(서주의 마지막 왕)까지 257년이는 기술이 있어 유왕이 죽은 것이 기원전 771년의 일이므로 상나라가 멸망한 것은 기원전 1027년이 된다. 또 한서에는 주는 867년 동안 계속되었다는 기술이 있어 이것으로부터 기원전 1123년의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상나라 멸망을 가장 오래전으로 보는 것은 기원전 1127년, 가장 나중으로 보는 것은 기원전 1018년이다.
"은(殷)은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 기자 조선으로 이어져"
고대사학자 심백강 인터뷰, "고조선은 중국 북경을 지배했다"(下)
글이상흔조선pub 기자 |2014-10-22
심백강 원장의 인터뷰에 등장하는 주요 지명을 표시한 하북성 동부 일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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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오임신이 저술한 <회도산해경광주>. <산해경>은 한나라 이전인 선진(先秦) 시대의 사료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다. 이 책 '해내경' 편에 고조선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심 원장은 "중국의 여러 학자들이 '해내경'은 조선기’(朝鮮記)라고 했는데, 고조선사와 관련된 직접사료를 확보한 것"이라고 말했다. |
심백강 원장이 최근 펴낸 《사고전서 사료로 보는 한사군의 낙랑》과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 심 원장은 계속해서 <사고전서>의 삼국시대 관련 사료를 펴낼 계획이다. |
요녕성 우하량 홍산문화 유적에서 발굴된 삼원 구조의 원형제단(좌)과 내몽고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발굴된 대규모 적석총 유적. / 이미지 출처: 우실하 저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소나무) |
홍산문화 여신묘 유적지에서 발굴된 여신상. 오른쪽은 두상이고, 왼쪽은 복원한 반가부좌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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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섬서성 함양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두로 영은비' 중의 조선국 기록 부분. |
갑골문자(좌)와 이보다 앞서는 골각문자(우). |
심백강 원장이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 있는 '백이 숙제가 독서하던 곳'이라는 표지석 옆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심 원장은 "고죽국은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세운 나라"라고 말했다. |
출처; 漢字를 한국인이 만들었다고? - 미래한국 Weekly (futurekorea.co.kr)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4.09.05 16:27
인터넷과 SNS 상에는 종종 ‘한자는 한(韓)민족이 창제했다’는 내용의 글들이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뜬금없어 보이는 이 주장은 그저 과도한 민족주의의 산물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게 된다.
호기심을 가지고 연구를 지속해 보면 한자가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시기에 과연 중국(中國)이라는 문화적 정체성이 존재하기나 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쉽게 생각해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3천 년 전에 그려진 암각화가 발견됐다고 해서 그것을 앵글로색슨 문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코미디라는 것과 같다. 같은 이유로 영국인들은 영어 알파벳을 자신들이 만들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한자는 한(漢)나라 때 만들어지지 않았다!
한자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날 중국대륙이라 불리는 지역에 5천 년 전 중화(中華)라고 부를 만한 문명은 없었다. 우리가 중화라고 부르는 문명의 개념은 사실 한(漢)대에 정립됐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한 무제가 서역의 돌궐과 북방 흉노를 물리치고 동으로는 고조선을 멸하면서 중국은 오늘날 ‘중국’이라는 호칭에 맞는 위상을 정립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바로 그 업적을 기리고자 집필된 역사서다.
문제는 한자(漢字)가 그 이름대로 한(漢)나라 때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자의 기원에 대해서는 팔괘설(八卦說)을 비롯해 실로 다양한 이론들이 있지만 검증은 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자는 전설에 따라 황제시대에 네 개의 눈을 가진 창힐이라는 자가 새의 발자국을 보고 모방했다는 전승이 차라리 믿을 만하다.
한자의 기원에 대한 논쟁이 붙은 것은 한자가 동이족에 의해 창제됐을 가능성에 대해 중국 학계가 이를 상당 부분 인정하면서부터였다. 그로부터 ‘동이족은 한민족을 일컫는 것이니 동이족이 한자를 만들었다면 한국인의 조상들이 한자를 만들었다’는 논리로 ‘한자 한국인 창제설’이 주장되기에 이른다. 이 주장의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원로 국어학자 진태하 명예교수(인제대 국어학)다.
문제는 ‘한자 동이족 창제설’에서의 동이족이 반드시 한국인의 조상들만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흔히 진(秦)나라 이전, 즉 선진(先秦)시대라 불리는 시기의 동이족은 중국 동부와 남부에 자리 잡은 쌀 농경문화의 제족이었다.
이 동이족을 처음 거론한 주체는 바로 3천 년 전의 은(殷)나라였다. 동이(東夷)라는 글자의 상형문은 쌀가마(東)를 옆에다 두고 쭈그려 앉은 사람(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은(殷) 대에 사용한 상형문이 이미 한자로서 문법 체계가 완성돼 있다는 점에서 한자의 기원과 활용은 은나라 이전으로 소급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사실이었다. 은대 이전이면 하(夏)의 시대고 하나라는 아직 그 정체성이 확실히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학자들은 한자의 고대음가가 지금의 북경어와는 달리 광동어와 유사하거나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것은 스웨덴 출신의 19세기 언어학자 칼그렌(Karlgren)이 중국어의 시경(詩經)을 연구하다가 음률들이 문장 안에서 서로 맞지 않는 현상에 주목하고 이를 다른 원전에 사용된 용례로부터 유추해 맞추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그렇게 재구성된 음가는 놀랍게도 북경어가 아니라 상해와 같은 광동어였다.
그렇다면 한자는 고대 광동어를 기록한 것이며 광동어의 주체는 과거 한족(漢族)이 아닌 오(吳) 월(越) 초(楚)와 같은 이들이었고 그들이 바로 은나라가 ‘동이’라고 불렀던 이들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자의 동이족 창제설’은 그러한 발견에 기반을 뒀다.
아울러 진한시대 이전의 유물들이 보여주는 바는 동이족의 문화가 오늘날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본류라고 여기는 화하(華夏)의 것들보다 우수하다는 점이다. 이로부터 한자의 창제 역시 동이족의 문화로부터 유래했을 거라는 데 중국학자들은 의심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동이족’은 누구였던가
이제 과연 이 한자가 창제된, 적어도 5천 년 이전의 시기에 우리 한민족은 동이족과 어떤 관계에 있었느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답을 아는 이는 없다. 고조선을 제외하고 사료로 확인할 수 있는 한민족의 역사는 남한에서 BC 1세기 삼한시대 이전으로 올라가지 못한다. 우리는 삼한 이전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그렇다고 신라, 백제, 가야인들이 살던 한강 이남의 한반도에 삼한 이전이라고 사람들이 살지 않았을 리도 없다. 만일 동이족이 우리 민족의 조상이라면 이 부분이 밝혀져야 한다. BC 1세기 이전 남한에서 활동했던 한인(韓人)들의 조상은 누구인가. 그들은 중국에서 한자를 창제하고 동이문화권을 형성한 주체들과 동일한 이들인가, 아니면 다른 이들인가. 대답할 수 있는 역사학자는 역시 아무도 없다.
다만 20세기 후반 언어학과 유전자 인류학은 이러한 문제에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 줬다. 일본 교토대학의 연구팀 조사에 의하면 한반도 중남부의 고대 한국인 유전자는 고대 일본인들, 그리고 고대 중국 동남부인들과 그 거리가 가장 가깝다. 우리는 당연히 지리적 여건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유전자 거리가 말해주는 중국 동남부인들, 즉 고대에 동이족이라고 불렸던 이들은 사실 오늘날 베트남과 말레이를 중심으로 하는 오스트로아시아(Austroasiatic)계다.
대만의 고산족들도 이 부류에 속한다.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하와이 원주민들이 바로 이들의 후손이다.
그래서 한자 창제 기원 논쟁은 복잡해진다. 만일 한국인의 조상이 동이족이 맞고 이들이 중국 동남부의 고대인들과 같다면 우리는 조상님들의 얼굴을 저 북방 몽골리언이 아니라 남태평양 마오리족의 얼굴이나 말레이시아 또는 베트남인들의 얼굴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현실은 그것이 ‘맞다’고 말해준다. 한국인의 유전자 가운데 약 40% 이상은 남방계다. 이 남방계 몽골리언 유전자가 북방보다 오래됐다. 한국인은 스스로 믿고 싶은 바처럼 단일민족은 아니며 과거 남지나해를 타고 올라오는 쿠로시오 해류로 인해 남방계 민족들이 일본과 한반도에 무수히 오고갔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물론 다른 가설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1만 년 전 황해와 제주도는 대륙 평원으로 연결돼 대만 부근까지 육지로 연결돼 있었다. 여기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는 1만 년 전으로 소급되는 제주 고산리 토기가 말해준다. 1만 년 전 해빙기로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거대한 황해평원은 바다로 변해갔고 사람들은 북쪽 한반도와 중국 동남부, 일본 등지로 흩어져 갔다. 이들이 한국인의 유전자 속에 등장하는 남방계 인자라면 우리는 아주 중요한 하나의 문화적 힌트를 얻게 된다.
3천 년 전 돌[石]이라는 글자를 중국인들이 시(shi)가 아니라 딱(tak)이라고 읽었고, 곰[熊]을 숑(xiong)이 아니라 굼(gum)으로, 흑(黑)을 허이(hei)가 아니라 커먹(khmek)으로 읽었던 것은 우리가 그 발음을 차용한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그러한 기본 어휘는 차용되지 않는다. 그러한 문제의식이 올바른 ‘한자 한민족 창제설’에 진지하게 도전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하나라의 성립
전설의 힘이 실체로 확인되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나라의 성립 - 전설의 힘이 실체로 확인되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 안정애)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상나라의 건국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상나라의 건국 - 갑골문, 은허의 세계로 안내하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 안정애)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주나라의 건국
독특한 지배체제, 봉건제도를 채택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주나라의 건국 - 독특한 지배체제, 봉건제도를 채택하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 안정애)
세계사 다이제스트 100
갑골 문자의 발견
은 왕조(기원전 1600년경)
[네이버 지식백과] 갑골 문자의 발견 - 은 왕조(기원전 1600년경) (세계사 다이제스트 100, 2010. 8. 13., 김희보)
중국사
상족의 기원과 건국
[네이버 지식백과] 상족의 기원과 건국 (중국사, 2008. 6. 20., 미래엔)
동이족은 문자를 만들었을까?
원시 상형문 시대
[네이버 지식백과] 동이족은 문자를 만들었을까? - 원시 상형문 시대 (한자의 역사를 따라 걷다, 2005. 11. 7., 김경일)
한자의 역사를 따라 걷다
중국, 전설까지 역사로 만드는 나라
갑골문 시대
[네이버 지식백과] 중국, 전설까지 역사로 만드는 나라
- 갑골문 시대 (한자의 역사를 따라 걷다, 2005. 11. 7., 바다출판사)
중국, 전설까지 역사로 만드는 나라 (naver.com)
한자의 역사를 따라 걷다
은나라 지식인들, 글꼴을 디자인하다
갑골문 시대
[네이버 지식백과] 은나라 지식인들, 글꼴을 디자인하다 - 갑골문 시대 (한자의 역사를 따라 걷다, 2005. 11. 7., 바다출판사)
한자의 역사를 따라 걷다
갑골문, 쓰기 예술의 첫 장을 열다
갑골문 시대
[네이버 지식백과] 갑골문, 쓰기 예술의 첫 장을 열다 - 갑골문 시대 (한자의 역사를 따라 걷다, 2005. 11. 7., 김경일)
한자의 역사를 따라 걷다
동양문화의 밑그림이 그려지다
갑골문 시대
[네이버 지식백과] 동양문화의 밑그림이 그려지다- 갑골문 시대 (한자의 역사를 따라 걷다, 2005. 11. 7., 바다출판사)
중원의 새로운 주인
금문 시대
[네이버 지식백과] 중원의 새로운 주인 - 금문 시대 (한자의 역사를 따라 걷다, 2005. 11. 7., 김경일)
주나라, 은나라의 갑골문을 공식 문자로 채택하다
금문 시대
[네이버 지식백과] 주나라, 은나라의 갑골문을 공식 문자로 채택하다 - 금문 시대 (한자의 역사를 따라 걷다, 2005. 11. 7., 김경일)
권3. 은본기
한글 번역문[ 卷三. 殷本紀 ]
[네이버 지식백과] 권3. 은본기 [卷三. 殷本紀] - 한자 원문 (사기: 본기, 2013. 5. 1., 사마천, 김영수)
유네스코 세계유산
은허[ Yinxu ]
[네이버 지식백과] 은허 [Yinxu] (유네스코 세계유산, 유네스코한국위원회(번역 감수))
출처; 유네스코세계유산
[이덕일의 한국통사] 중국의 역사 공정 5종류, 역사 공정하는 이유 동이족 국가 은나라 유물 발견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상나라역사 사맹화로 국민들 무지하게 만드는 풍토 #7
2020. 2. 27.
https://youtu.be/pSHBBmum3qE?list=PLRAmvpNm4pml8NIIK7JWgvQxl79k6Tuyt
[현장답사] 동이족이 세운 중국 최초의 상업국가를 기린 상업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상문화경구(상조사)
2020. 4. 14.
https://youtu.be/U1Iq0IIl0jQ?list=PLRAmvpNm4pml8NIIK7JWgvQxl79k6Tuyt
[현장답사] 중국 최초의 상업 도시 동이족이 만들다
https://youtu.be/9v9lu7hKCYw?list=PLRAmvpNm4pmk-9thWqaZWsYbtqUc1ohN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