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데이

[기후변화 리포트] 지구 망치는 인류

그린란드 누크 부근의 피요르드. 기후변화로 그린란드의 빙하 녹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중앙포토]

 

우리와 해부학적으로 같은 호모사피엔스는 약 20만 년 전에 지구상에 등장했다. 그런데 인류는 이보다 훨씬 짧은 약 1만 년 전에야 신석기 농업을 시작했고, 7000년 전에야 문명을  탄생시켰다. 지난 1만 년 동안을 지질학적으로 홀로세(Holocene)라 한다. 인류는 홀로세 전에 구석기 삶을 영위했다. 인류가 오랫동안 문명을 탄생시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온은 1만 년 전까지 엄청나게 요동친 후, 매우 평온한 상태가 되었다. [Arctic Climate Impact Assessment]

 

지난 10만 년 동안 북반구 고위도의 기온 변화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 기간 대부분을 차지하는 빙하기에는 중고위도 지역까지 빙하 지역이 확장됐고, 해양으로부터 수증기 증발이 적어 사막이 넓어졌다. 지금보다도 열대와 고위도 지역 간의 기온 차가 커서 바람이 몹시 강했다. 우리 조상들은 오늘날의 이상기후보다 열 배는 더 심한 변덕스럽고 혹독한 기후에 맞서야 했다. 태풍이 매년 한 번 한반도를 지나간다면, 엄청난 복구 노력 후 피해가 있긴 해도 추수가 가능하다. 만약 태풍이 매년 열 번 휩쓸고 지나가면 농업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빙하기에는 농업을 할 수 없는 조건이었으므로 사냥꾼과 채집자로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7만 3500년 전에 인도네시아 토바 화산이 폭발했다. 최근 가장 강했던 1991년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폭발보다 2800배 더 강력했다고 한다. 피나투보 화산 폭발로 성층권으로 분출된 황산 에어로졸에 의해 햇빛이 차단돼  다음 해에 전 지구적으로 기온이 0.5℃ 하강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한 결과로 보면, 토바 화산 폭발은 전 지구 평균 기온을 무려 12℃나 떨어뜨렸다. 그 당시 인류는 심각한 위기에 몰려 멸종에 가깝게 갔다는 사실이 최근 DNA 분석으로 확인되고 있다. 당시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다른 지역에 비해 안정되고 삶의 조건이 나은 아프리카 사바나에 살아남았다.

7만 년 전 아프리카 벗어나 이동 시작

인류는 7만 년 전 아프리카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섰다. 이 인류 여정의 시작은 공교롭게도 해양의 물이 거대한 얼음으로 바뀐 빙하시대가 열어준 길을 따라 진행됐다. 우리 조상은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주로 아시아 해안을 따라가는 남쪽 경로를 택했다. 5만 년 전에 아시아와 호주에 도달했다. 빙하기 말기인 2만 년 전, 빙하 규모가 절정에 이르렀다. 그 당시 해수면은 오늘날보다 120m나 아래에 있어 아시아와 북미 대륙이 붙어 있었다. 이 연결로를 따라 1만 5000년 전 북미 대륙에 몽골족이 처음 이주했다. 인류는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극한의 기후조건에 내성을 가지게 되어 그 어떤 기후에서도 살아갈 수 있게 됐다.

2만 년 전부터는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빙하가 빠른 속도로 후퇴했다. 마침내 1만 년 전에 빙하기를 뒤로하고, 현재의 따뜻한 간빙기인 홀로세에 진입하였다. 이때도 간혹 참혹한 홍수와 문명을 무너뜨린 가뭄과 같은 사건들이 있긴 했지만, 그전보다 기후 변동성이 극히 작은 안정된 시기였다. 이 홀로세에 진입하자 인류는 계절에 따른 식량 생산 과정을 예측할 수 있어 작물을 경작했으며 가축을 키우고 비로소 정착했다.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홀로세 전에도 인류는 오랫동안 생존해왔지만, 매우 적은 인구만이 극단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남았다. 홀로세의 기후조건은 인류에게 이상적인 상태였다. 농경을 시작한 결과 잉여와 축적이 생겨났다. 수렵과 채집 생활할 때와는 다른 인구의 조밀화가 일어나면서 도시와 국가가 생겨날 여지를 만들어 주었다. 이런 과정에서 문자도 생겨나고 소위 ‘문명’이 탄생했다. 1만 년 전부터 기후가 안정됐지만, 문명의 탄생까지는 약 300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왜 그래야 했을까?

메소포타미아·이집트·인더스·황하 4대 고대 문명의 공통점은 큰 강 하구 주변에 발달한 비옥한 퇴적층에서 탄생했다는 점이다. 문명이 발생하려면 다른 일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정도로 식량을 생산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4대 문명이 번영을 누리기 시작한 시대가 모두 6000~7000년 전인데, 놀랍게도 해수면 상승이 일단락된 약 7000년 전과 시점이 일치한다.

2만 년 전부터 빙하기에서 간빙기로 변화가 일어났고, 이 기간은 1만 년 동안 지속하였다. 이때 해수면 고도는 대륙 빙하가 녹아 빠르게 상승했다. 해수면 상승 속도는 가장 빠를 때 100년에 250㎝에 달할 정도였다. 지난 100년 동안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은 20㎝ 수준이었다. 이와는 한 자릿수 이상 차이가 나는 엄청난 규모의 변동이었다. 1만 년 전부터는 기온이 안정했지만, 그 후 3000년 동안에도 해수면 고도는 100년에 약 1m씩 상승했다. 해양은 대기보다 열용량이 커서 외부 변화에 대한 반응이 느리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비로소 7000년 전에 대륙의 가장자리가 완전히 물에 잠겨, 세계지도가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되었다.

해수면이 높아지는 상황에서는 강 하구 대단위 농업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훌륭한 도시를 만들어도 시간이 흐르면 내륙 쪽으로 이전해야 했을 것이다. 도시를 옮기려면 엄청난 노동력도 필요하고 그만큼 문명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에너지를 헛되이 소비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4대 문명은 해수면 고도가 안정화된 이후에야 탄생할 수 있었다.

해수면 상승 안정된 후 4대 문명 생겨

홀로세는 인류 문명을 탄생시키고 발전시키기에 가장 바람직한 조건을 제공했다. 홀로세 동안에 현대 사회와 경제 발전의 기반이 되는 유용한 생태계가 모두 정착되고 확장됐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홀로세의 시작은 믿을 수 있는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쇼핑몰을 설립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산림·경작지·산호초·목초지·물고기·포유류·박테리아·빙하와 공기의 질, 기온과 담수 가용성을 믿을 수 있는 쇼핑몰인 홀로세에서 공급받고 있다. 우리가 얻는 물, 우리가 누리는 기후, 우리가 먹는 식량, 우리가 의존하는 지구시스템과 생물 다양성은 홀로세의 환경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 만일 빙하기와 같은 난폭한 기후가 오늘날에도 나타나 홀로세를 떠난다면, 75억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없고 다양한 문명을 지속시킬 수 없다.

홀로세 동안에도 자연적인 기후변동이 있었지만, 수백 년의 시간 규모에서 기온이 단지 최대 약 1℃ 정도만 흔들렸다. 인류는 이러한 변화에도 힘겹게 적응해야 했다. 지구 평균 기온이 약 1℃ 정도 낮아진 13~19세기의 소빙하기 동안에도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곤궁한 처지에 놓였었다. 인류는 수억 년 동안 지표 아래 묻혀 있던 화석연료를 태워 오늘날의 번영을 이뤘다. 이 번영은 과거 7000년에 걸친 문명을 지탱해 왔던 안정한 기후를 붕괴시킬 정도로 위협이 되고 있다. 우리는 지난 100년 만에 0.85℃의 기온 상승을 일으켰고, 최근 들어 해수면 고도를 100년에 1m 이상의 속도로 빠르게 상승시키고 있다. 2℃ 더 따뜻했던 12만 년 전 간빙기 때, 해수면 고도가 지금보다 4~8m 더 높았다. 온실가스를 줄이지 않으면 맞이하게 될 4℃ 상승에서, 어떻게 인류를 먹여 살리며, 해안 대도시를 방어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인류 문명이 인간 지성의 필연적 결과라고 생각하는 오만을 저지르고 있지만, 지구 역사를 보면 이 역시 좋은 기후 조건을 만난 덕에 일어난 우연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류는 자연적 기후변화의 적응을 넘어 오히려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주체가 되었다. 우리 스스로 안정된 기후를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상태로 내몰아 위험에 빠지고 있다. 인류에 의한 지구 위기가 없다면 다가올 몇 천 년 동안 현재처럼 좋은 조건에서 생존할 수 있다. 이것이 홀로세를 지속할 수 있게 지켜내야 할 절박하고 충분한 이유이다.

빙하 코어에서 기온·온실가스 산출

[중앙포토]

 

극지방에 눈이 내리면 그 무게에 눌려 먼저 내린 눈은 얼음으로 변한다. 수만 년 동안 눈이 내리고 얼기를 반복하면서 빙하가 만들어진다. 이걸 시추하면 기둥 모양의 얼음을 얻을 수 있는데 이를 빙하 코어라 한다. 빙하 코어 안 공기 방울에는 그 당시의 대기 성분을 담고 있다. 이를 분석해 남극과 그린란드 빙하에서 각각 지난 80만 년과 10만 년 동안 기온·온실가스·먼지·화산재·꽃가루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산소 원자 질량수는 대부분 16이지만 18인 경우도 있다. 덴마크의 과학자 윌리 단스가드는 빙하에서 무거운 산소(18-산소)와 가벼운 산소(16-산소)의 비율이 기온에 따라 체계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밝혔다. 기온이 낮으면 빙하에는 18-산소/16-산소 비율이 낮아지지만, 기온이 높으면 18-산소/16-산소 비율이 높아진다. 즉, 산소의 두 질량비로 과거 기온을 산출할 수 있다.

조천호

국립기상과학원장

문명은 지성의 산물? 간빙기 맞아 덕보고 있는 것 | 중앙일보 (joongang.co.kr)

 

 

뜨거웠다, 차가웠다 반복하는 지구…5000년 前에는 지금보다 더 더웠다 | 한국경제 (hankyung.com)

윤희은 기자
입력2019.04.05 17:43 수정2019.04.06 02:14 지면A20
 
미래 환경 예측 위해 '홀로세 기후 최적기' 연구 활발

2100년엔 서울에 야자수 나무?
자연적 기온상승에 산업화 겹쳐
2100년 평균 3~5℃ 상승 전망도
2100년 대한민국은 아열대 국가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야자수가 자라고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 한반도의 최남단인 제주도는 동남아시아처럼 덥고 습한 날씨가 이어진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지금 수준으로 유지된다는 가정하에 실시한 시뮬레이션 결과다.
지구 온도 5000년 전 수준 도달하나

1700년께 소빙기가 끝나면서 지구의 온도는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1900년대 중반부터는 본격적인 현대 온난기에 진입했다. 온도가 오르는 구간에서 이산화탄소 배출까지 늘면서 온도 상승세가 가팔라졌다. 2100년이 되면 평균기온이 지금보다 3~5도가량 높아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산화탄소는 지표면이 머금고 있는 열에너지가 우주로 빠져나가는 것을 방해한다. 지구 온난화 원인 중 60% 정도를 차지한다. 지구의 온도를 높이는 원리가 온실과 비슷해 ‘온실효과’란 용어가 생겼다. 메탄과 수증기도 이산화탄소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온실 기체로 꼽힌다.
온난화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는 추세다. 세계기상기구(WMO)에 따르면 기상관측 이래 가장 더웠던 해는 2016년(평균기온 14.96도)이다. 2위는 2015년(14.88도), 3위는 2017년(14.84도)이며 4위가 지난해(14.7도)였다. 최근 4년이 1~4위를 모두 차지했다.
한반도 역시 비슷한 흐름이다. 국립기상과학원에 따르면 한반도의 최근 30년 기온은 1912~1941년보다 1.4도 높아졌다. 20세기 초와 비교해 여름은 19일 길어졌고 겨울은 18일 짧아졌다.
 
 
하지만 최근 100년이 지구 역사상 가장 더웠던 시기라고 보기는 어렵다. 9000~5000년 전 지금보다 기온이 2~3도가량 높은 ‘홀로세 기후 최적기’가 존재했다. 한반도의 홀로세 기후 최적기는 약 7600~4800년 전으로 추정된다. 과학계는 이 시기가 2100년 이후의 기후와 상당히 비슷할 것으로 보고 있다. 홀로세 기후 최적기를 분석해 미래 기후가 어떻게 바뀔지를 예측하려는 시도가 잇따르는 이유다.
그다음에 찾아온 ‘중세 온난기’는 1300~900년 전이다. 평균기온은 9.5~10도 수준으로 지금보다 다소 낮지만, 해당 시기 전후 한랭기 때보다는 기후가 높았다. 중세 온난기의 원인으론 태양 활동의 강화, 화산 활동 감소, 해류의 변화 등이 꼽힌다. 한 가지 요인 때문이라기보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줬다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400년 전 소빙기 재출현에 관심
 
 
지구가 지금과 같은 속도로 꾸준히 온난화를 지속할 것이라고 보는 학자는 의외로 많지 않다. 기후에는 일종의 주기가 있기 때문에 급격히 온도가 올라간 뒤에는 필연적으로 소빙기가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역사 기록에 남아있는 가장 최근의 소빙기는 400~300년 전이다. 당시 평균기온은 8~8.5도 수준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한반도 기온보다 평균 5도 정도 낮았다. 소빙기의 근거는 극지방에 있는 빙하 높이다. 알래스카나 아이슬란드에서 측정한 빙하의 높이는 1560년, 1750년, 1850년 무렵 최고에 달했다고 기록돼 있다. 1789년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의 이유 중 하나로 ‘강추위’가 꼽히는 것도 당시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큰 한파가 들이닥쳤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소빙기의 원인 역시 지구 온난화와 관련이 있다. 지구가 따뜻해져 빙하가 녹으면 극지방과 중위도 지방의 기온차가 작아진다. 이렇게 되면 찬 공기를 가둬놓는 제트기류가 약해지고, 이를 틈타 북극의 추운 공기가 제트기류를 뚫고 다른 지역까지 흘러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일시적인 혹한기가 찾아온다.
 
일부 기후학자는 최근 급격한 온난화에 접어든 점을 고려해 30여 년 정도의 소빙기가 찾아올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400~300년 전처럼 북극의 추운 공기가 남쪽으로 이동해 뜨거운 지구를 식혀줄 것이란 관측이다. 근거로 삼을 수 있는 데이터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그 신뢰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임재수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기후는 10년이 됐든 100년이 됐든 급격하게 올라가면 일정 수준으로 떨어지는 주기성이 있다”며 “다만 데이터가 최근 100년 수준에 머물러 있다 보니 단기 사이클은 예측할 수 있어도 중장기적인 예측은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등록 2018-12-14 06:01수정 2019-02-22 15:11

문명은 구석기시대에 시작되었다 : 한겨레 (hani.co.kr)

[책과 생각]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②구석기시대 문명

문명은 갑작스러운 발명품이 아니다. 후기 구석기시대 현생인류가 등장하면서 천천히 걸어온 과정에서 발달한 것이다. 마치 겨울에 뿌린 씨앗이 봄여름에 꽃을 피우듯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일구어낸 인간의 진화가 이어진 것이다.
터키 남부에서 발견된 1만5000년 전에 만들어진 대형 신전 괴베클리 유적. 사냥과 채집을 하며 떠돌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기념하고 장례를 지내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여서 거대한 제사터를 만든 것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구석기시대라고 하면 보통 우리는 미개한 원시인이 돌을 깨 돌칼이나 돌망치를 만드는 모습을 떠올린다. 문명은 토기를 사용하며 마을을 일군 신석기시대부터 시작해, 5000년 전 거대한 신전과 도시를 세우고 글자를 사용한 4대 문명에서 꽃을 피운 걸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 이런 선입견을 깨부수는 여러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터키 남부에서 발견된 대형 신전인 1만5000년 전에 만들어진 괴베클리 유적과 동아시아에서 2만년 전에 발견된 토기가 그 좋은 증거이다. 구석기시대에서 나왔다고는 선뜻 믿기 어려운 유적이 계속 발견되면서 이제 고대 문명의 기원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있다.
극적인 변화를 유도한 대표적인 유적은 1994년부터 지난 20여년간 조사된 괴베클리 유적이다. 이 유적은 인공적으로 쌓은 높이 15m에 너비 300m 정도의 넓은 언덕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고학자들이 이 유적을 발굴해보니 200여개 돌기둥과 돌담으로 만든 원형 제단을 발견했다. 돌기둥 각각은 고도의 석조기술을 사용하여 티(T)자형으로 세심하게 조각하여서 세운 것이었다. 돌기둥 하나가 보통 10톤 정도이며 큰 것은 50톤이 넘는다. 겉에는 황소, 여우, 새 등이 새겨졌는데, 아주 사실적이어서 유라시아 초원 일대에서 3000년 전에 유행한 동물장식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괴베클리 유적은 수십 차례에 걸쳐서 연대측정을 한 결과 1만3000년~1만년에 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전체의 5% 정도만 조사되었으니 대체로 구석기시대 후기인 1만5000년 전부터 이미 사용했다고 보아도 틀림없을 것이다. 당시는 금속도 몰랐고 바퀴 같은 운송수단은커녕 제대로 된 마을도 없었던 시절이다. 사냥과 채집을 하며 떠돌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기념하고 장례를 지내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여서 거대한 제사터를 만든 것이다. 상식을 깬 발견을 두고 고고학자들은 회의적인 시각을 쉽게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괴베클리에 대한 국제적인 공동연구로 다양한 인물 조각상과 해골들이 발견되었고, 그 연대도 확인됐다. 명실상부한 인류 최초의 구석기시대 신전이라는 점을 인정받아 2018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괴베클리 유적의 돌기둥 각각은 고도의 석조기술을 사용하여 티(T)자형으로 세심하게 조각하여서 세운 것이었다. 돌기둥 하나가 보통 10톤 정도이며 큰 것은 50톤이 넘는다. 겉에는 황소, 여우, 새 등이 새겨졌는데, 아주 사실적이어서 유라시아 초원 일대에서 3000년 전에 유행한 동물장식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출처 위키피디아
 
유라시아의 서쪽에서 괴베클리가 나올 때 동아시아에서는 세계에서 최초로 토기를 사용했다. 토기는 빙하기가 끝나고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면서 사용한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토기가 1960년대 일본 열도를 필두로 1990년대 러시아 극동지역, 2000년대 중국 송화강 중류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에 고고학자들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토기는 신석기시대가 되어야 등장한다는 것이 고고학계의 상식이었다. 심지어 토기가 발견된 곳은 세계 문명사에서 변방으로 꼽히던 동아시아지역이었다. 러시아에서 구석기시대의 토기를 처음 보고한 메드베데프 교수는 1980년대 하바롭스크 근처의 구석기시대 유적인 가샤를 발굴할 때 구석기 유적과 함께 자꾸 토기가 출토되어서 고민했다고 한다. 고민 끝에 그 결과를 발표하자 바이칼 일대에서 발굴을 한 다른 고고학자도 구석기시대 발굴을 하다 토기를 발견했는데, 본인이 실수를 한 줄 알고 발표를 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이후 1990년대 러시아가 개방되어 그 연구가 알려졌고, 급기야 2012년에는 중국 셴런퉁 유적에서 2만년 전 토기가 발견되었다는 연구가 <사이언스>에 실렸다. 이제 후기 구석기시대 토기는 상식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구석기시대의 지층에서 토기가 발견된 확실한 사례는 아직 없다. 다만, 제주도 고산리에서 비슷한 형태의 토기가 출토된 바가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발견될 것으로 기대한다.
중국 셴런퉁 유적에서 발견된 2만년 전 토기. 강인욱 제공
 
공동체로 빙하기 극복한 구석기인
도대체 빙하기가 끝나지도 않은 구석기시대에 이런 문명의 여러 요소가 발달한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 답은 바로 3만년 전에 번성했던 현생인류에 있다. 3만년을 기점으로 그 전에 번성했던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고 현생인류는 살아남았다. 네안데르탈인이 특별히 미개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네안데르탈인의 뇌 용적은 현대인과 큰 차이가 없고 신체 구조도 비슷해서 현대인의 옷을 입히면 큰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다만 현생인류는 인간들끼리 서로 접촉하고 소통하는 다양한 시도를 하여 사회적인 진화를 이룩했다는 차이가 있었다. 공동체를 이루어서 다양한 정보를 교환하고 협력하여 위기를 극복했던 것이다.
옥스퍼드대학의 로버트 던바 교수는 후기 구석기시대에 현생인류가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로 노래와 춤, 신화(스토리텔링), 종교(샤머니즘)를 꼽았다. 괴베클리 신전은 각지에 흩어져 살던 수렵민들이 한데 모여서 조상을 기억하는 신전을 만들고 축제를 벌이며 공동체를 강화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괴베클리의 돌 하나를 세우기 위해서는 최소한 500여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실제 근친혼의 위험이 없이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적어도 500여명의 사람이 한 집단을 이루어야 한다는 연구와도 일치한다. 이외에도 2~3만년 전 프랑스 알타미라와 라스코 동굴벽화, 5천개의 장식이 발견된 러시아 순기리 무덤 유적 등은 구석기 사람들의 종교 및 축제 문화가 얼마나 높은 수준이었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1만5000년 전 빙하기가 끝나가며 기후가 급변할 때에 사람들은 더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고 주변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빠르게 환경에 대처했다. 반면, 변화에 뒤처지고 소통하지 못했던 네안데르탈인은 멸종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동아시아 구석기시대의 토기도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단합을 한 증거이다. 다른 어떤 그릇보다 토기는 조리에 유리하다. 사람들은 같이 모여서 불을 사용하여 토기로 음식을 만들어 잔치하며 공동체 의식을 강화했다. 메드베데프 교수가 발굴한 토기가 발견된 가샤 유적 바로 앞에는 사카치-알리안이라는 암각화가 있다. 이 암각화엔 다양한 샤먼(주술사)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런 동아시아의 샤머니즘 종교와 문화는 1만5000년을 전후해 베링해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간 현생인류와 함께 건너갔다. 사실, 1950년대 이래로 중국과 신대륙 마야문명의 종교와 문화에서 많은 유사성이 보인다고 지적됐는데, 그 유사성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샤먼(주술사)이 새겨진 사카치-알리안 암각화. 사진 강인욱
4대 문명론은 제국주의의 발명품이다
완전히 빙하기가 끝난 1만년을 기점으로 현재와 같은 따뜻한 날씨가 되면서 사람들은 마을을 만들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초기 농사는 우리 생각과 달리 위험한 모험이었다. 초기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체구도 훨씬 작아졌고, 영양 상태도 불량했다. 식량 대부분을 일부 곡식에만 의존했고 흉년에 쉽게 대처할 정도의 농사기술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때까지 각자 떠돌며 살던 사람들이 모여서 살게 되었으니 전에 없었던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조선 시대 사람들이 아파트에 모여 사는 셈이었다. 이런 어려움을 소통과 공동체 의식으로 극복해나갔다. 괴베클리 이후인 지금으로부터 약 9500년 전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에 형성된 인류 최초의 마을 차탈회위크가 그 상황을 보여준다. 서로 밀집해 집을 만들어 살았던 차탈회위크 사람들은 집 안에서 제사를 지내고 벽화를 그려서 자신들의 신화를 보존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을 기억하고 공동체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9500년 전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에 형성된 인류 최초의 마을 차탈회위크 유적. 서로 밀집해 집을 만들어 살았던 차탈회위크 사람들은 집 안에서 제사를 지내고 벽화를 그려서 자신들의 신화를 보존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을 기억하고 공동체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진 강인욱
 
문명은 갑작스러운 발명품이 아니다. 후기 구석기시대 현생인류가 등장하면서 천천히 걸어온 과정에서 발달한 것이다. 마치 겨울에 뿌린 씨앗이 봄여름에 꽃을 피우듯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일구어낸 인간의 진화가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4대 문명만을 기억하고 있을까. 사실 4대 문명론은 20세기 초반 제국주의가 전 세계를 활보할 때 만들어진 것이다. 4대 문명으로 유명한 지역들은 공통적으로 서구 열강들이 자기 앞마당처럼 마음대로 조사하던 지역이었다. 문명은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발달했고, 나머지 지역은 여전히 미개하게 살았다는 생각은 사실 일부 발달한 선진국이 다른 후진국을 침략하여 식민지화한다는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다양한 연구로 고대 문명은 구석기시대를 거쳐서 빙하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현생인류 공동의 자산이라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 그동안 변방으로만 치부되었던 세계 곳곳에서 인류 문명사를 새롭게 쓸 자료들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다.강인욱 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

출처; 문명은 구석기시대에 시작되었다 : 책&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hani.co.kr)

 

 

9000년 전 인류 조상, '화장 장례' 치렀다..화장터 발견(연구) (daum.net)

송현서입력 2020. 8. 13. 14:16수정 2020. 8. 13. 14:16
 

[서울신문 나우뉴스]

9000년 전 장례 풍습을 알 수 있는 화장터(사진)가 이스라엘에서 발견됐다

 

이스라엘에서 무려 9000년 전 선조들의 장례 풍습을 짐작할 수 있는 귀중한 유적지가 발견됐다고 뉴사이언티스트 등 해외 과학 전문매체의 12일 보도했다.

발굴 조사를 이끈 프랑스국립과학센터의 패니 보칸틴 박사 연구진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석기시대 문화유적지인 베이사모운에서 발견된 유적지는 깊이 60㎝의 지하에서 발견됐으며 폭 80㎝ 규모의 U자 형태 구덩이다.

연구진은 이 구덩이가 기원전 7200~6400년, 지금으로부터 약 9000년 전 신석기 시대 당시의 화장(火葬) 장례 풍습을 입증하는 귀중한 유적지라고 설명했다.

네안데르탈인 등 인류의 조상은 본래 주검을 고스란히 매장하는 장례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시신을 매장하는 장례 역사는 약 7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주검을 곧바로 매장하지 않고 화장하는 풍습은 매장보다 훨씬 뒤늦게 생겨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장에서 발견된 유골 조각 일부. 왼쪽 어깨뼈에 날카로운 것에 찔렸다 회복된 흔적이 남아있다
이스라엘 베이사모운 유적지

 

이번에 발견된 구덩이에서는 다량의 재와 새까많게 탄 유골 355조각이 발견됐다. 유골은 모두 한 사람의 것으로, 비교적 젊은 사람의 것으로 추정됐지만 성별은 확인되지 않았다. 왼쪽 어깨뼈에 날카로운 것에 찔렸다가 회복된 흔적이 있었지만 비교적 깨끗하게 아물어 사인(死因)으로 지목되지는 않았다.

타다 만 유골 조각과 함께 발견된 재는 유골을 태울 때 쓴 나무의 잔해로 확인됐다. 다만 시신이 장작더미 위, 아래, 중심 중 어느 위치에서 화장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연구진에 따르면 과거 선조들의 매장 풍습은 매우 정교했다. 예컨대 시신을 묻고 돌아갔다가 다시 무덤으로 돌아와 두개골을 따로 제거하고, 이 위에 석회나 진흙을 덮어 새로운 얼굴을 만든 뒤 다른 두개골과 함께 다시 매장하는 방식 등이다. 현재 못지않게 여러 단계의 장례 절차를 거쳐야 했던 것.

연구진은 당시 선조들이 화장 절차를 선택한 것은 시신을 화장함으로써 장례 절차가 이전보다 짧아지고 간소해질 수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한편 이번에 발견된 유적지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화장 장례 문화의 흔적은 아니다. 알래스카에서는 1만 1500년 전 어린이의 화장된 유골을 발견됐었다.

자세한 연구결과는 미국에서 발행되는 국제 학술지 플로스원(PLOS ONE) 최신호에 실렸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인류는 신석기 시대부터 지구 환경 파괴했다 (사이언스紙)
 
 
인류는 신석기 시대부터 지구의 자연환경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겨온 것으로 확인됐다.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등 국제 연구진이 전 세계 고고학자 255명과 협력해 약 1만 년 전부터 170년 전까지 세계 토지 이용을 조사해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고 30일(현지시간) 발표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이 연구는 ‘아키오글로브 프로젝트’(ArchaeoGLOBE Project)라는 이름의 크라우드소싱(집단 협업) 운동 덕분에 가능했다. 이는 인류사를 다루는 전 세계 고고학자들에게 설문지를 보내 정보를 얻은 것이다.

연구진은 총 255명이 응답한 정보를 통해 약 1만 년에 달하는 오랜 기간 전 세계 700여 지역의 토지가 어떻게 이용됐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인간은 농경으로 지구상에 남긴 흔적은 신석기 시대인 1만 년 전부터 8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고대 인간들이 수렵채집 외에도 농경을 통해 지구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킨 것을 보여준다.

이뿐만 아니라 최근 일부 학자가 주장하는 ‘인류세’ 개념이 훨씬 오래전부터 시작됐음을 시사한다. 인류세는 인류의 자연환경 파괴로 인해 지구의 환경 체계가 급격히 변했고 그 탓에 지구 환경과 맞서 싸우게 된 시대를 뜻한다.

 
 
하지만 이번 연구에서는 이동경작과 목축농업이 이미 4000년 전 세계 토지 면적의 40% 이상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토지 경작은 2000년 전까지 전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흔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이전 연구와 모순되는 데 인류는 생각보다 1000년 일찍 땅을 일궈온 것이다.

연구에 참여한 마이클 바턴 애리조나주립대 교수는 “인간이 오랜 기간에 걸쳐 지구의 자연환경과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미래에 어떻게 기후변화 등의 문제에 대처할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최선의 방법 중 하나”라면서 “지구의 환경 변화는 최근 문제가 아니다”고 말했다.
 


고대 사람들의 활동은 지구상에 다양한 방법으로 기록돼 있고 화석으로도 남아 있다. 이에 대해 바턴 교수는 그들의 환경적 성공과 실패를 연구하면 미래에 긍정적인 변화를 어떻게 일으킬 수 있을지 더 좋은 아이디어를 얻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바턴 교수는 이번 연구가 미래에 인간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측하기 위해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컴퓨터 모델에도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정확한 예측은 현재와 과거의 비교에 의존하는 데 지금까지 자료는 인간의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이번 연구는 발견했다.

또다른 연구 참여자인 미국 필드자연사박물관의 인류학 큐레이터 게리 파인먼 박사는 대규모 자료 덕분에 우리는 적어도 3000년 전 전 세계에서 토지 사용에 의한 환경적 영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면서 이는 인간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약 1만2000년 전 인간은 주로 수렵과 채집을 했는데 이는 농부들이 일반적으로 토지를 경작하는 것처럼 자연환경과 집중적으로 상호작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이제 우리는 3000년 전 지구 곳곳에서 실제로 침해적인 농경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자세한 연구 결과는 세계적 학술지 ‘사이언스’ 최신호(30일자)에 게재됐다.

사진=사이언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9천년 전 초기 농경사회서도 이미 도시문제 겪어 | 연합뉴스 (yna.co.kr)

송고시간2019-06-18 17:10

엄남석 기자기자 페이지

터키 차탈회위크 신석기 유적 유골 분석 결과

차탈회위크 발굴 현장

[스콧 해도우 제공]

 

(서울=연합뉴스) 엄남석 기자 = 약 9천년 전의 고대 농경사회에서 이미 인구 과밀과 이에 따른 폭력, 전염병, 거주환경 악화 등 현대 도시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과 외신 등에 따르면 이 대학 인류학 교수 클라크 라슨 교수가 이끄는 국제 연구팀은 터키 남중부 중앙아나톨리아 지역의 신석기시대 초기 도시 유적 '차탈회위크(Çatalhöyük)'에서 발굴된 742구의 인간 유골에 관한 연구결과를 미국 국립과학원 회보(PNAS) 최신호에 실었다.

연구팀은 25년에 걸친 연구를 토대로 한 논문에서 차탈회위크가 B.C. 7100년께 작은 정착촌으로 시작됐지만 이후 B.C. 6700~6500년께 인구가 3천500~8천명으로 늘어나며 절정에 달하면서 각종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분석했다.

 
 

차탈회위크는 1958년에 처음 발굴됐다. 빙하시대가 끝난 뒤 수렵채집 문화에서 농경시대로 전환되면서 총 13ha(약 4만평)에 걸쳐 21m 깊이로 형성돼 있으며 1천150년에 걸쳐 주거지로 이용됐다.

진흙 벽돌로 아파트처럼 복층으로 만든 주거지는 옆집과 바로 붙여 빽빽하게 지어졌으며, 쓰레기 구덩이와 동물 우리도 주거공간 바로 옆에 만들어져 감염병 확산 등 위생문제를 초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차탈회위크에서 발굴돼 분석된 유해 중 3분의 1이 뼈에 감염병 흔적을 가진 데서도 입증됐다.

차탈회위크 유적에서 성인 유골을 발굴 중인 고고학자

[스콧 해도우 제공]

 

인구 과밀은 잦은 폭력사태도 촉발했을 것으로 분석됐다.

발굴된 93개의 두개골 중 25개가 골절 흔적을 갖고 있었으며 이 중 12개는 골절 흔적이 한 곳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대부분의 골절흔이 대부분 위나 뒷부분이어서 정면이 아닌 곳에서 공격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됐다.

라슨 교수는 보도자료를 통해 "차탈회위크는 원시 도시사회 중 하나로 주민들은 작은 지역에 많은 사람을 모아놓고 오랫동안 생활하게 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겪었다"고 설명했다.

차탈회위크는 절정기 이후 인구가 줄어들다 B.C. 5950년 무렵 폐허가 됐다. 인구과밀에 따른 주거환경 악화나 건조한 기후로 농사를 짓는 것이 어려워진 것이 원인이 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omns@yna.co.kr

 

 

9000년 전 평등사회 … 계급도 남녀 차별도 없었다 | 중앙일보 (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17.07.31 01:00

 

문명의 뿌리를 찾아서 <상>

터키 남부 차탈회이위크 신석기 시대 유적을 찾은 한국 학술교류단. 유적지 보호를 위해 거대한 돔이 설치돼 있다.

 

이희수 한양대(문화인류학) 교수는 “대사건의 현장”이라는 한마디로 정리했다. 세계 최초의 계획도시로 꼽히는 터키 남부 차탈회이위크 유적을 보고나서다. 고도 1000m 아나톨리아 고원에 자리 잡은 차탈회이위크는 신석기 시대 인류의 생활상을 대변하는 곳이다. 수렵·채취에 의존하던 인류의 농경 정착 과정을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그리고 보존 상태가 훌륭한 곳으로 평가돼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지난 21일 현장을 찾았다. 25년째 발굴단을 이끌고 있는 이안 호더(69) 미 스탠퍼드대(고고학) 교수가 한국 방문객을 맞았다. 그가 먼저 유적 앞에 재현한 9000년 전 거주지 모형으로 방문단을 안내했다.

“당시 사람들은 지붕 위로 걸어 다녔습니다. 집 위에 집을 짓는 독특한 구조지요. 지붕 아래로 낸 나무 사다리를 타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방 남쪽에 화로를 만들어 조리와 난방을 했고, 북쪽에 조상의 시신을 묻는 무덤을 만들었어요. 한 방에서 유골 62구를 발굴한 적도 있습니다. 또 벽면에는 황소나 사슴, 표범과 멧돼지 등의 형상을 그렸어요. 일상과 제의(祭儀)가 동일한 공간에서 이뤄진 것이죠.”

차탈회이위크 유적지 벽화를 재연한 모습. 야생 황소를 사냥하고, 길들이는 모습이다.

 
기원전 7500~5700년 시대 유적이다.“전성기 때 8000여 명이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진흙 벽돌을 쌓아 집을 지었다. 한 집에서 수백 년 살았다. 더 이상 살 수 없으면 흙으로 메우고 그 위에 새집을 올렸다. 최대 25개 가구를 올려 쌓았다. 그렇게 쌓다 보니 유적 자체가 언덕 모양이 됐다.”
 집마다 크기가 비슷한데.“가로·세로 2~4m, 높이 3m 남짓이다. 나무로 지붕과 들보를 만들었다. 방마다 구조·규모가 같다. 매우 평등한(egalitarian) 사회였다. 벽화에 나타난 동물을 볼 때 가축화 초기 흔적도 확인할 수 있다.”
 평등사회라고 보는 근거가 있나.“방의 크기가 균일하다는 게 첫째 증거다. 둘째, 관공서(public house)가 발견되지 않았다. 지도자(리더)나 CEO가 없었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의 지위가 동일했다. 마을 자체가 공동체 리더십으로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한 방에서 나온 유골 치아를 DNA 분석했는데 한 집안의 것이 아니었다. 혈연이 아닌 마을 단위로 공유생활을 했다. 폭력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남녀 역할 분담도 없었다.”

앙카라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에 있는 신석기인 거주지 모형.

 
남녀 또한 평등했다고 볼 수 있나.“그렇다. 모계사회도, 부계사회도 아니었다. 당시 식생활을 조사한 결과 남녀 차이가 없었다. 같은 노동을 했다는 의미다. 발견된 유골의 성비도 동일했다. 공동육아로 마을이 유지된 것이다. 각 집은 작은 구멍으로 연결됐는데, 이곳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을 기다리며 산 것 같다.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사회체제가 매우 복잡했다.”

유적지 모형 뒤로 인공 언덕 두 개가 보였다. 호더 교수를 따라 발굴 현장을 찾았다. 높이 20m의 남쪽 언덕 아래로 기원전 7100~6100년 시대의 밀집 거주지가 수직으로 펼쳐졌다. 전후좌우 위아래로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마치 거대한 벌집, 혹은 개미집처럼 보였다. 이곳에서 선사시대 다양한 도구와 토기, 밀·보리 등 곡식 낱알, 소·양·염소 등 가축 사육 흔적이 발견됐다. 언덕 상층부에선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여성상(像·지모신·사진)도 다수 출토됐다. 해당 유물은 터키 수도 앙카라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 초입에 전시돼 있다.

 

차탈회이위크 남북 양쪽 언덕에는 통틀어 약 1만 가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작은 개천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두 마을 사이에서 교혼(交婚)이 이뤄지며 대단위 촌락이 형성됐을 것이란 해석도 있다.

호더 교수는 특히 무덤의 제의성, 벽화의 상징성을 강조했다. 집집마다 마련한 무덤은 먼저 간 조상을 기억하려는 역사(history) 행위였으며, 동물벽화는 고대 4대 문명이 발생하기 훨씬 이전부터 인류가 종교적 상징에 눈을 떴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등 4대 문명은 기원전 3500년 무렵부터 시작됐다.

 

김종일 서울대(고고미술사) 교수는 “차탈회이위크 유적은 20세기 세계 고고학의 주요 이정표다. 종교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돌려놓은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예컨대 마르크스 이론에 따르면 종교는 사회의 계급적 모순을 은폐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지극히 평등사회였던 이곳에서 종교의 맹아(萌芽)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호더 교수는 “신석기시대 사회 또한 강력한 신념 체계로 묶여 있었다”며 “주변 환경과 조화롭게 살아간 그들에게서 많은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이번 방문은 한국-터키 수교 60년을 기념하는 학술·문화교류 행사로 기획됐다. 세계 고고학계에서 주목받는 터키의 고대문명 유적을 순례했다. 이희수 교수는 “터키 동남부 괴베클리테페 유적에선 1만2000년 전의 대규모 신전이 발견돼 큰 충격을 주었다”며 “인류 문명의 기원과 전개를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고 설명했다.

터키=글·사진 박정호 문화전문기자 jhlogos@joongang.co.kr

 

 

 
 
 
 
▲ 1만 년 전 ‘인류 최초 신전’ 미스터리…수준 높은 기하학 설계(사진=길 해클리, 아비 고퍼)
 
터키 남동부 샨르우르파주(州)에는 1만1500년 전인 기원전 9500년부터 건축되기 시작한 인류 최초의 신전으로 추정되는 괴베클리 테페 유적이 있다. 당시 인류는 정착 농경 생활이 아닌 수렵 생활을 했기에 많은 고고학자는 오랫동안 왜 이런 거대 유적을 세울 필요가 있었는지를 두고 고민해 왔다. 그런데 이 신석기 유적에 관한 최신 연구는 고고학자의 고민을 더욱더 가중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유적의 단위인 원형 구덩이의 위치를 건축학적인 방법으로 분석한 결과, 초기에 지어진 세 구덩이의 각 중앙 지점은 완벽한 정삼각형을 그리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는 이 유적을 설계한 건축자에게 삼각형에 관한 상당히 정확한 지식이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대체 이 유적을 누가 설계했다는 것일까.

괴베클리 테페 유적을 둘러싼 미스터리

 
▲ 유적은 원형의 울타리를 기준으로 중앙에 두 개의 T자형의 돌기둥이 배치돼 있다.(사진=페르난도 고메즈-바프티스타)
 
기존 상식으로는 피라미드와 같이 거대한 유적이 건설되려면 인간의 정착화와 농경의 시작이 필요하다. 그리고 조직적인 건축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지도자로서의 왕과 같은 집권적 존재와 노동자에 대한 안정적 식량 공급이 필수인데 이 두 요소를 충족할 수 있는 것은 농경 문명뿐인 것으로 여겨졌다. 사실 괴베클리 테페 유적에 존재하는 거대한 수십 t의 돌기둥을 세우려면 최소 500명이 넘는 인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해야 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 터키 남동부의 인류는 기본적으로 수렵 생활을 했고 농경 생활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기존에는 괴베클리 테페 유적의 초기 건축물을 수렵 생활을 하던 여러 사람이 세대와 부족을 넘어 계속해서 만들어가는 방법으로 완성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또 조직적인 건설에는 신관과 같은 종교적 지도자가 선출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가설도 결정적인 근거는 부족했다. 대규모 노동자를 차출할 정도의 지도력을 지닌 신관의 존재는 농경 문명에서나 가능했다. 괴베클리 테페 유적의 주변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에 우선할 정도로 농경에 적합한 지역은 아니었다.

괴베클리 테페의 초기 유적은 고도의 기하학적 지식으로 만들어졌다

 
▲ 건축학적인 방법으로 구덩이 가운데 놓인 돌기둥의 위치를 분석한 결과, 공개된 그림에서처럼 세 개의 원형 울타리(B, C, D)와 각 돌기둥의 관계가 밑변(노란색 선)이 되는 선의 수직선(파란 점선)을 바탕으로 완벽한 정삼각형을 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길 해클리, 아비 고퍼)
 
하지만 새롭게 진행한 이번 연구에서는 이 문제를 더욱더 난해하게 할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텔아비브대 길 해클리 연구원과 아비 고퍼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은 이번 연구를 통해 괴베클리 테페의 초기 유적은 단일 계획 아래에서 한꺼번에 세워졌다고 주장했다. 근거가 된 부분은 초기 유적의 단위인 움푹 파인 곳에 세워진 돌기둥의 위치이다. 건축학적인 방법으로 구덩이 가운데 놓인 돌기둥의 위치를 분석한 결과, 공개된 그림에서처럼 세 개의 원형 울타리(B, C, D)와 각 돌기둥의 관계가 밑변(노란색 선)이 되는 선의 수직선(파란 점선)을 바탕으로 완벽한 정삼각형을 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근거가 맞는다면 초기 유적은 하나의 계획성을 지니고 지어진 것이 된다. 그리고 유적의 건설을 지휘한 사람은 기하학적 형상에 관한 고도의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자조차 존재하지 않는 수렵 생활을 했던 인류가 어떻게 삼각형의 법칙을 이해하고 고도의 측량을 바탕으로 도형을 그려냈는지는 알 수 없다.

돌기둥에 새긴 동물은 무엇을 의미할까

 
▲ 사진 속 돌기둥은 200개 이상 존재하며 이를 세우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들어갔다.(사진=독일 고고학 연구소)


 
▲ 돌기둥에는 사자와 소, 멧돼지, 여우, 가젤 그리고 당나귀와 같은 포유류, 뱀과 기타 파충류, 곤충을 비롯해 거미 등 절지동물 그리고 새(특히 독수리, 조장문화가 있었다)가 그려져 있다. (사진=독일 고고학 연구소)

 

또 이 유적이 계획성 있게 한꺼번에 건설된 경우 필요 인력은 최소 500명에서 최대 수천 명으로 치솟는다. 따라서 이들 연구자는 괴베클리 테페의 초기 유적이 수렵 생활을 하던 인류 자원의 거의 한계치를 투입해서 만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또 누가 수렵 생활을 하던 인류 부족을 하나로 묶어 그 자원과 노동력을 한계까지 공출시켰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정도의 노동력과 자원을 투입한 초기 유적도 탄소 측정을 사용한 분석을 통해 1000년 뒤쯤인 기원전 9000년 전후 버려진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 시대에는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유적이 만들어진 이유도 알 수 없다.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정보는 돌기둥에 기록된 여러 동물의 조각뿐이다. 돌기둥에는 사자와 소, 멧돼지, 여우, 가젤 그리고 당나귀와 같은 포유류, 뱀과 기타 파충류, 곤충을 비롯해 거미 등 절지동물 그리고 새(특히 독수리, 조장문화가 있었다)가 그려져 있다. 오늘날 황폐한 땅에 불과한 괴베클리 테페 주변도 1만1500년 전에는 숲이 펼쳐져 있어 많은 동물이 있었다. 수렵 생활을 하던 인류에게 동물은 더 친숙한 존재였을 것이다. 미래에 이들 동물에게서 뭔가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세한 연구 결과는 동료검토 학술지 ‘케임브리지 고고학 저널’(Cambridge Archaeological Journal) 30권 제2호에 실렸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서울=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카자흐스탄 북부 투르게이 대초원에 있는 고대의 거대한 지상화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690㎞ 상공에서 촬영한 위성사진이 공개됐다.

사각형, 십자, 선, 원 등 총 5개의 이들 거대한 지상화는 각각이 축구장 몇 개를 합쳐 놓은 크기로 공중에서만 확인할 수 있으며, 가장 오래된 것은 약 8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뉴욕타임스(NYT)가 3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카자흐스탄의 경제학자인 드미트리 데이(44)는 2007년 피라미드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뒤, 다른 곳에도 피라미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구글 어스를 통해 자신이 사는 코스타나이 인근을 살펴보다 이 지상화를 처음 발견했다.

 

그는 카자흐스탄의 고고학자들에게 이것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었지만, 대답은 그들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데이는 고고학자들과 현장을 찾았지만, 지상에서는 그것의 모양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땅을 파도 나오는 것은 없었다.

이곳에 언덕과 도랑 등 최소 260여개의 토목공사 흔적으로 이뤄진 거대 지상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지난해 이스탄불에서 열린 고고학회에서 처음 공개됐다.

 

위성사진을 제공한 NASA의 콤프턴 터커는 "이런 것을 본 적이 없다"며 "주목할 만한 것"이라고 말했다.

데이는 인터뷰에서 투르게이 지상화가 외계인이나 나치와 관련이 있다는 추측들을 일축하면서, 높은 곳에 직선으로 그려진 이 선들이 아침 해의 움직임을 추적한 관측소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카자흐스탄에서 질병을 연구하던 중 지난해 학회 발표를 관심 있게 지켜본 미국 피츠버그대학교의 로널드 라포트 명예교수는 데이를 찾아내 사진과 서류들을 보고 투르게이 지상화가 진짜이며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두 사람은 카자흐스탄 항공우주국에 사진 촬영을 요청하고, 유네스코에 긴급 보호를 요청해야 한다고 지역 당국을 압박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데이는 비옥한 대초원이 사냥터를 찾던 석기 시대 부족들의 목적지였다며, 기원전 7천∼5천 년 전 번성했던 마한드자르 문화 부족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과학자들은 유목 민족이 한 장소에 머물며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었다는 데 대해 의구심을 표했다.

하지만 캐나다 위니펙 대학의 고고학자인 페르시스 클락슨은 투르게이 지상화나 페루의 유명한 나스카 지상화로 인해 초기 유목민에 대한 관점이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mihee@yna.co.kr

 

 

 
 
 
 
▲ 세계서 가장 오래된 목조 우물의 모습.(사진=파르두비체대학 제공)
 
동유럽 체코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목조 우물이 약 70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우물은 인류가 나무로 만든 목조 구조물로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CNN 4일자 보도에 따르면, 체코 파르두비체대학 등 공동연구진이 지난해 자국 북서부 도시 오스트로프 인근 간선도로 공사 도중 발견된 나무 우물에 관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우물의 재질은 오크나무(떡갈나무나 졸참나무 따위)로, 기원전 5256년쯤 농민들이 만든 것으로 보인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이번 연구에서 연구진은 우물에 쓰인 나무의 나이테를 이용해 분석하는 ‘나이테연대측정법’(dendrochronology)으로 제작 연대를 알아냈다. 그 결과, 우물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재 구조물로 확인됐다.

이에 대해 연구에 참여한 파르두비체대학의 유물 복원 전문가인 카롤 바이어 연구원은 “우물은 오랜 세월 물속에 잠겨 있었던 덕분에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면서 “이 상태로 우물을 건조시키면 완전히 부서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연구진은 우물의 목재를 변형 없이 건조할 방법을 고안하고 있다. 설탕 성분을 사용해 목재 속 세포 조직을 강화할 것이라고 이들은 설명했다.

 
▲ 세계서 가장 오래된 목조 우물은 약 7000년 전에 만들어졌다.(사진=체코 멘델대학 제공)
 
우물은 높이 140㎝, 가로·세로 80·80㎝의 직육면체 구조다. 목조 구조물로서의 형태와 목재 표면에 남은 도구의 흔적은 가공이나 접합 부분에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발전한 기술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도구는 석기 이외에도 동물의 뼈와 뿔 그리고 경질의 나무를 사용했다. 이 시대에 이 지역에서 이렇게 기술이 발전한 사례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다고 연구진은 지적했다.

신석기시대 초기 우물이 체코에서 발견된 사례는 지난 4년 동안 세 번째로 그 중 이번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전해졌다.

자세한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고고학저널(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 3월호에 실릴 예정이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터키 선사 유적지서 8천500년 전 사람 이빨 장신구 출토 (daum.net)

입력 2019. 12. 14. 11:39
 
근동 지역서는 처음..장신구보다는 의식용인 듯
사람 이빨에 구멍을 뚫은 8천500년 전 장신구 [코펜하겐 대학 제공]

 

(서울=연합뉴스) 엄남석 기자 = 터키의 선사시대 유적지에서 8천500년 전 사람의 이빨에 구멍을 뚫어 장신구로 사용한 유물이 발견돼 학계에 보고됐다.

유럽에서는 후기 구석기나 신석기 시대 때 인간 치아를 장신구로 사용한 유물이 발견된 적이 있으나 근동에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덴마크 코펜하겐대학에 따르면 이 대학 고고학자 스콧 하도우 박사는 터키 신석기 유적지 '차탈회위크'(Çatalhöyük)에서 2013~2015년에 발굴된 이빨 장신구에 대한 분석결과를 학술지 '고고과학 저널 리포츠'(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 Reports)를 통해 발표됐다.

 

하도우 박사는 현미경과 방사선 촬영 분석 등을 통해 사람의 이빨에 의도적으로 구멍을 내 목걸이나 팔찌 등의 구슬로 활용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빨의 구멍은 동물 뼈나 돌 등으로 만든 구슬에 구멍을 낸 것과 마찬가지로 원뿔형 미세 도구를 활용했으며, 목걸이나 팔찌의 장신구로 오래 사용된 듯 마모 흔적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 이빨은 두 명의 죽은 성인에게서 각각 나온 것으로 추정되며, 씹는 면의 마모 정도를 볼 때 30~50세였을 것으로 추정됐다.

하도우 박사는 두 이빨 모두 주인이 살아있을 때 빠졌을 경우 남아 있을 수 있는 질환 흔적이 없어 사후에 뽑혔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차탈회위크에서는 2차 매장 풍습이 있어 인간의 치아나 뼈에 손을 대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데도 이번 이빨 장신구가 출토된 것은 단순히 미적 용도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이를 착용한 사람에게 심오한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도우 박사는 분석했다.

그는 "동물뼈나 이빨로 만든 장신구가 부장품 중에서 많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이 이빨 장신구가 비부장품에서 발굴된 것은 매우 흥미롭다"면서 "이는 인간의 뼈나 치아로 만든 것을 부장품에 넣지 않는 의도적 선택을 했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람 이빨 장신구가 특별한 의식 등에 사용된 것인지는 이빨의 주인이 당시 사회에서 어떤 인물인지 확인돼야 설명할 수 있는데, 현재는 샘플 수가 적어 차탈회위크나 근동의 다른 선사 유적지에서 더 많은 관련 유물이 출토돼야 가능할 것으로 지적됐다.

 

 

자작나무 타르에서 DNA 추출..전례없는 인체정보 획득
피부·머리카락·눈동자 색부터 음식·보유한 병균까지 파악
자작나무 껍질 속 타르 [AFP=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현혜란 기자 = "어두운 피부색과 파란색 눈동자를 가진 이 소녀는 5천700년 전 덴마크에서 헤이즐넛과 청둥오리를 주식으로 먹고 살았다."

덴마크 코펜하겐대 연구팀이 덴마크 남부 롤란섬에서 발견한 자작나무 껍질 속 타르에 남아있는 잇자국만으로 석기시대에 이곳에 살았던 어린 여성의 유전자 정보(DNA)를 파악해냈다고 영국 BBC, 미국 CNN 방송 등이 17일(현지시간) 전했다.

고대 인류의 유전체(게놈)가 유골이 아닌 곳에서 추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인간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 시대의 인간 DNA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결과라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신체적 특징을 봤을 때 유럽 대륙에서 건너온 수렵·채집인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이 소녀가 어떤 이유에서 자작나무에서 나온 타르를 베어 물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이 타르는 오늘날 껌과 같은 기능을 했을 수 있다.

자작나무 껍질 속에 들어있는 타르는 열을 가하면 늘어났다가 식으면 줄어드는 성질이 있어서 석기시대에 주로 접착제로 쓰였다. 하지만 치통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또는 이를 닦기 위해서 타르를 씹었다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이 소녀가 타르를 깨문 흔적에서는 '키스병'으로 알려진 단핵구증(mononucleosis)을 일으킬 수 있는 엡스타인바 바이러스 등 이 소녀가 보유한 병균뿐만 아니라 입안에 있던 미생물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네스 슈뢰더 부교수는 "미생물 분석을 통해 서로 다른 식습관을 갖고 있던 우리 조상들의 삶을 확인할 수 있다"며 "병원균이 어떻게 진화하고 확산했는지, 어떤 환경에서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다른 연구저자 타이스 젠슨은 "덴마크에서 가장 큰 석기시대 유적지에서 발견한 고고학적 유물들인 이곳에 살았던 인류가 천연자원을 폭넓게 사용해 신석기시대로 넘어갈 수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결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에 실렸다.

runran@yna.co.kr

 

 

5700년 전 껌서 DNA 추출…고대인류 전체 게놈 해독 성공 - 매일경제 (mk.co.kr)

 

사암으로 제작돼 조상숭배 의례 때 사용…"전세계 15점 중 하나"

이스라엘이 공개한 9천년 전 제작된 마스크

[AFP=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전성훈 기자 = 약 9천년 전 제작된 마스크가 이스라엘 당국에 의해 공개했다고 BBC 등 외신이 2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요르단강 서안의 헤브론 구시가지 주변 지역에서 발견된 이 마스크는 신석기 시대 분홍색과 노란색 사암(沙巖)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스라엘고대유물관리당국(IAA)은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인류가 농경·가축 사육을 시작하면서 종교의식이 급격히 증가하는 등 사회 구조 변화를 겪던 즈음이라고 제작추정 시기에 대해 설명했다.

 

IAA 고고학자 로닛 루푸는 "이 고대 마스크는 매우 사실주의적인 기법으로 제작됐다"며 "광대뼈와 완벽한 코까지 생생하게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고고학자는 해당 유물이 조상 숭배 의례 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이스라엘이 공개한 9천년 전 제작된 마스크

[신화=연합뉴스]

 

이러한 종류의 고대 마스크는 전 세계에서 단 15점에 불과할 정도로 희귀한데, 이 가운데 13점은 개인이 소장하고 있어 연구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IAA는 전했다.

발견 경위와 관련해선 당국이 올해 초 절도범으로부터 되찾았다고 한 이스라엘 언론이 보도했지만, 자세한 내막은 알려지지 않았다.

lucho@yna.co.kr

 

 

 
 
▲ 이집트서 7000년 전 ‘신석기 마을’ 발견…피라미드보다 오래돼


이집트 나일강 유역에서 약 7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의 흔적이 발견됐다.
 


미국 CNN 등 외신은 3일(현지시간) 이집트 고대유물부 성명을 인용해 고고학자들이 이집트 역사상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기원전 5000년 전인 신석기 시대에 형성된 이번 마을은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북쪽으로 약 140㎞ 떨어진 다칼리야주(州)의 비옥한 땅 텔 엘-사마라(Tell el-Samara)에서 발견됐다.

 
▲ 이번 마을은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북쪽으로 약 140㎞ 떨어진 다칼리야주(州)의 비옥한 땅 텔 엘-사마라에서 발견됐다.(사진=구글 지도)


이집트와 프랑스의 고고학자로 구성된 연구팀은 현지에서 발견된 저장고 터에서 동물의 뼈와 식물의 흔적을 확인했으며 도기와 석기의 파편도 발견했다. 발굴 조사는 지난 2015년부터 시작됐다.

연구팀은 “이 마을은 고대 이집트를 대표하는 기자 대피라미드의 건축이 시작된 시기보다 2500년 정도 빨리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앞으로도 발굴 작업을 계속 진행하고 출토된 유기물을 분석해 이집트 농업 역사의 기원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단서를 찾아낼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집트에서는 지난 7월 나일강 하구 알렉산드리아에서 뚜껑을 연 흔적이 전혀 없는 석관이 발견돼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었다. ‘정복왕’ 알렉산더 대왕의 무덤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집트 고위 관계자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열린 석관 속에는 왕족이 아닌 병사로 추정되는 미라 3구만이 오수에 잠긴 채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이집트 고대유물부(위), 구글 지도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강석기의 과학카페] 9000년 전 사냥개의 활약상 생생하게 묘사된 암각화 감상법 : 동아사이언스 (dongascience.com)

2018.01.09 20:30

 

 

개의 가축화와 초기 쓸모(가축화 이유)라는 주제는 고고학연구에서 길고도 복잡한 역사가 있다.

- 마리아 구아그닌 등, 지난해 11월 16일 ‘인류학적 고고학 저널’ 사이트의에 공개된 한 논문

 

지난주 금요일 ‘동아일보’ 과학면에 실린 ‘올해 무술년은 황금개의 해가 아닌 황금늑대의 해일수도...’라는 기사를 보며 좀 의아했다. 최근 수년 사이 고고학 및 고게놈학 연구 성과로 개의 기원이 기존 1만2000년에서 3만 여 년 전으로 한참 올라간 게 이제는 확고한 정설이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사 말미에는 “7000~9000년 전 개부터 진짜 ‘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라는 스페인 레이후안카를로스대 애비 드레이크 연구원의 코멘트가 인용됐기 때문이다.

 

개가 늑대에서 진화한 게 확실함에도(여전히 같은 종(학명 Canis lupus)으로 분류되고 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정반대이기 때문에 형태나 게놈보다는 행동이 ‘진짜 개’의 요건이란 뜻일까. 그렇다면 형태와 게놈의 증거인 3만 년 전과 드레이크 연구원이 추정하는 9000년 전(그나마 최대치) 사이 2만 여 년 동안은 어정쩡한 ‘늑대개’ 상태로 보냈다는 말인가.

 

 

네안데르탈인 멸종의 한 축?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인류학과 팻 시프먼 명예교수는 2015년 ‘The Invaders’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는데(최근 ‘침입종 인간’이란 제목으로 번역서가 나왔다), 흥미롭게도 ‘늑대개(wolf-dog)’란 용어를 만들어 썼다. 다만 그 맥락은 앞서 필자의 늑대개와 다르다. 즉 오늘날 벨기에 지역에서 발굴된 3만6000여 년 전 개과(科) 동물의 두개골 형태를 분석한 결과 늑대보다는 개에 가깝게 보이지만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 결과는 오늘날 늑대와 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따라서 이 계열은 멸종했을 가능성이 크다) 잠정적으로 늑대개라고 부른 것이다.

 

개와의 협력이 현생인류의 성공에 중요했다는 가설을 담고 있는 ‘침입종 인간’이 최근 번역출간됐다. 2015년 출간된 원서의 표지로 개가 늑대처럼 생긴 것으로 묘사돼 있다.- 아마존(amazone.com) 제공
 

즉 시프먼 교수에 따르면 유럽에 진출한 호모사피엔스(그래서 침입종이다)가 먼저 살고 있던 네안데르탈인을 몰아내고 주인이 되는 과정에서 늑대개가 큰 역할을 했는데, 인간과 협력해 사냥을 하면서 경쟁력에서 네안데르탈인을 압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진 뒤 사냥 동맹인 인류와 개의 삶에 가장 방해가 된 경쟁자가 늑대였고 따라서 그 뒤 늑대의 개체수도 급감했다.

 

즉 시프먼 교수에 따르면 유럽에 진출한 호모사피엔스(그래서 침입종이다)가 먼저 살고 있던 네안데르탈인을 몰아내고 주인이 되는 과정에서 늑대개가 큰 역할을 했는데, 인간과 협력해 사냥을 하면서 경쟁력에서 네안데르탈인을 압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진 뒤 사냥 동맹인 인류와 개의 삶에 가장 방해가 된 경쟁자가 늑대였고 따라서 그 뒤 늑대의 개체수도 급감했다.

 

‘진짜 개’라고 말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사람의 관심을 갈구하며 재롱을 떠는 반려동물이라면 사냥을 하는 개의 모습이 낯설 수도 있지만 사람과 한 편이 돼서 같은 종인 늑대에 맞서 먹잇감을 두고 경쟁해온 개의 모습 역시 ‘진짜 개’가 아닐까. 즉 시프먼 교수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3만 여 년 전 이미 개가 있었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뼈와 게놈 정보만 있을 뿐 3만 여 년 전 늑대개가 정말 호모사피엔스와 협력해 사냥을 했다는 물증은 없다. 그리고 행동은 발굴할 수 없다는 게 고고학의 치명적인 단점이다. 물론 뼈나 도구를 통해 행동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지만, 3만 여 년 전 인간과 개의 협력 사냥의 경우는 이마저도 빈약하다.

 

다양한 사냥 전략 구사

 

지난해 11월 16일 ‘인류학적 고고학 저널’ 사이트에는 이와 관련해 꽤 흥미로운 논문이 공개됐다. 8000~9000년 전 사람과 개가 함께 사냥하는 모습을 담은 암각화를 분석한 연구결과로 당시 정황이 워낙 생동감있게 묘사돼 있어서 사냥 장면을 직접 보는 듯하다. 논문을 읽으며 당시 개와 사람이 이 정도 수준으로 협력할 수 있었다면 공동 사냥의 역사는 한참 더 거슬러 올라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프먼 교수의 주장이 꽤 설득력이 있다는 말이다.

 

고고학에서 바위에 새겨지거나 그려진 암각화나 벽화는 당시 인류나 동물의 모습과 행동을 엿볼 수 있는 자료다. 특히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인 선사시대에는 그림의 가치가 더욱 소중하다.

지금은 황량한 사막지대인 사우디아라비아 북서부의 슈와이미스(Shuwaymis)와 주바(Jubbah)에는 거의 1만 년 전부터 수천 년에 걸쳐 제작된 1400점이 넘는 암각화가 발견됐다. 이곳은 수만 년 동안 혹독한 가뭄으로 사람이 살지 않았지만 기후가 좋아지면서 대략 1만 여 전 다시 사람이 유입됐다. 이들은 수렵채취인으로 수천 년을 보냈고 어느 순간부터 가축을 기르며 유목민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암각화 1400여 점에는 그 과정이 그려져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의뢰로 암각화를 정리하는 작업을 해온 독일 막스플랑크 인간역사과학연구소의 고고학자 마리아 구아그닌 박사는 7000~8000년 전 유목민으로 바뀌기 이전의 암각화에서 유난히 개가 많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슈와이미스의 암각화 39점에 등장하는 개는 156마리고 주바의 암각화 108점에는 193마리다. 반면 유목시대로 바뀐 이후에는 개의 출연빈도가 뚝 떨어졌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궁금해진 구아그닌 박사는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의 동물고고학자 안젤라 페리 박사를 방문했다.

 

이제부터 8000~9000년 전 개와 사람이 한 팀을 이뤄 사냥하는 장면을 담은 슈와이미스의 암각화를 하나씩 살펴보자. 실수를 피하기 위해 그림 번호는 논문을 따른다.

 

[그림3  케이넌 도그를 쏙 빼닮은 외모]

그림3_지중해 동부 레반트 지역의 토종견인 케이넌 도그(위)와 사우디아라비아 서북부의 9000년 전 암각화에 새겨진 개(아래)가 꽤 닮았다. - 인류학적 고고학 저널(Journal of Anthropological Archaeology) 제공

 

암각화에 그려진 개의 모습은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봐도 한 눈에 개임을 알 수 있다. 뾰족한 귀와 말린 꼬리, 짧은 주둥이가 늑대나 코요테 같은 다른 개속(Canis) 동물과는 뚜렷이 다르기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암각화에 등장하는 개 다수는 어깨나 가슴 쪽 돌을 깎지 않은 상태다. 이는 이 부분의 털 색깔이 다르다는 걸 부각시키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림 아래 사진 두 장은 암각화에 등장한 개다. 그림을 잘 보이게 하기 위해 깎은 부분은 밝은 색으로 처리했다.


연구자들은 암각화의 그려진 개의 모습이 지중해 동쪽 레반트 지역의 토종개인 케이넌 도그(Canaan dog)와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림 위의 사진 두 장이 케이넌 도그로 아래 암각화에 등장한 개와 비슷해 보이지 않는가. 케이넌 도그는 몸무게가 16~25kg인 중형견으로 레반트 지역에서 예로부터 양치기개로 길렀다.

 

흥미롭게도 게놈 분석 결과 케이넌 도그는 오래 전에 확립된 품종으로 나왔다. 연구자들은 암각화와 나오는 개가 케이넌 도그의 조상일 가능성도 있다고 언급했다. 즉 수렵채취인이 유목민이 되면서 사냥개도 양치기개로 ‘직업’을 바꾼 것이라는 말이다.

 

[그림4_사냥꾼 두 명과 사냥개 21마리]

그림4_개가 21마리나 등장하는 암각화로 아래는 원상태를 찍은 것이고 위는 파낸 부분을 흰색으로 칠해 눈에 잘 띄게 처리한 상태다. 이하 이미지는 처리한 상태만 보여준다. - ‘인류학적 고고학 저널’ 제공

 

한 장면에 가장 많은 개가 등장하는 암각화다. 왼쪽에 암말(말은 수년 천 뒤에야 가축이 된다)과 새끼가 보이고 바로 앞에 사냥꾼이 활로 암말을 겨누고 있고 주변을 개들이 둘러싸고 있다. 오른쪽에 또 다른 사냥꾼이 역시 활로 암말을 겨누고 있고 개 십여 마리가 사냥감을 향해 포진해 있다. 암말과 새끼의 입장에서는 절망적인 상황이다.

 

이 그림에서 주목할 장면은 개 세 마리가 목줄로 사냥꾼과 연결돼 있는 모습이다. 즉 사냥꾼은 목줄을 허리에 묶은 채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데 이 개들은 다른 개들과 뭐가 다른 것일까. 이에 대해 저자들은 몇 가지 추측을 하고 있다. 먼저 역할 분담론으로 이 개들은 후각이 특히 발달해 사냥감을 추적하는 게 일이기 때문에 괜히 사냥감에 덤벼들었다가 다치면 안 되므로 목줄로 묶어둔 것이라는 해석이다. 다음으로 사냥꾼을 사냥감이나 다른 포식자의 공격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보디가드론이다. 끝으로 나이가 들었거나 너무 어려 직접 사냥에 뛰어들기에는 무리인 개들을 챙긴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한편 꽤 덩치가 큰 어미와 새끼를 목표로 하는 사냥 행태는 개와 사람의 협력이 가져다주는 이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말은 워낙 빠르기 때문에 사람 혼자 사냥하기는 힘들고 덩치가 꽤 커서 개가 어미를 공격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개가, 새끼를 동반한 암말을 추격해 에워싸게 되면 어미는 새끼를 지키기 위해 도망치지 않기 때문에 사냥꾼의 손쉬운 표적이 된다. 그리고 개는 기회를 봐서 새끼를 물어 죽인다

 

[그림7_아이벡스 목을 물어]

그림7_개들이 아이벡스를 공격하는 장면이다. - ‘인류학적 고고학 저널’ 제공

 

염소의 근연종인 아이벡스(ibex) 두 마리(왼쪽과 가운데)가 개 여덟 마리에게 공격당하고 있는 장면이다. 아이벡스의 커다란 뿔이 잘 묘사돼 있다. 개들은 아이벡스의 목을 물어뜯고 있고 뿔의 방향으로 봤을 때 고개가 이미 돌아간 상태라 죽음이 임박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왼쪽 아이벡스의 경우 배도 공격을 받고 있다. 오른쪽 세 번째 아이벡스는 나중에 추가로 그린 것이다.

 

[그림8_재빠른 동물 사냥 전담]

그림8_개들이 가젤을 공격하는 장면이다. - ‘인류학적 고고학 저널’ 제공

 

이번엔 가젤(영양)이 역시 개에게 둘러싸여 목을 물어뜯기는 장면으로 그림7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처럼 덩치가 크지 않고 민첩한 동물들은 개가 혼자 사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개를 쫓아가기에 바쁜 사냥꾼은 개가 목을 물고 있는 사냥감에 다가가 명줄을 끊는 ‘마무리’를 하는 게 고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림10_정말 사자도 사냥했을까?]

사냥꾼과 개 두 마리가 커다란 수사자와 맞서고 있다. - ‘인류학적 고고학 저널’ 제공

 

이번 사냥감은 덩치가 커다란 사자다. 왼편 사냥꾼 한 명과 수캐 두 마리가 가운데 수사자와 마주하고 있다(생식기가 잘 묘사돼 있어 성별을 쉽게 판단할 수 있다). 그림에는 나오지 않지만 사자 뒤에도 개 다섯 마리가 더 있다. 이건 정말 사자 사냥 장면일까.

이에 대해 연구자들은 실제 장면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고 사냥꾼의 용맹함을 드러내기 위한 상징적인 장면일수도 있다고 해석했다. 다만 개를 동반한 사자 사냥을 언급한 문헌이 드물지 않다고 덧붙였다.

시프먼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호모사피엔스는 이종동물(개)과 연합해 동족인 네안데르탈인을 몰아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이번엔 개가 이종동물(사람)과 연합해 동족인 늑대를 거의 절멸시켰다. 이처럼 각자 서로를 이용해 동족을 배반한 전력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사람과 개가 이처럼 서로를 예외적인 존재로 여기며(채식주의자가 아닌 사람들도 대다수는 개고기를 안 먹는다!) 살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 필자소개
강석기.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4권, 2012~2015),『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2014)가 있고, 옮긴 책으로 『반물질』(2013), 『가슴이야기』(2014)가 있다.

 

 

흙살 드러낸 들판.. 얼굴 내민 도자기 (daum.net)

입력 2006. 4. 11. 01:31수정 2006. 4. 11. 01:31

[한겨레]

한때 '실크로드의 바그다드' 선사유적 이름 떨친 아나우이곳서 출토된 채문 도자기 기형이나 문양서 단연 압권주변 이라크 이란 인도 중국 도자기 비슷 '채도벨트' 형성

니사 유적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투르크메니스탄의 최신 건축술을 자랑하는 킵착 마스지드(사원)에 들렀다. 킵착 마을은 현 니야조프 대통령이 태어난 곳이다. 1948년 대지진 때 잃은 그의 부모와 형제를 기려 지은 이 대사원은 2005년 준공되었다. 사원 귀퉁이에는 1991년 옛 소련에서 독립한 것을 상징하는 91m 높이의 미나라(예배시간을 알리는 첨탑)가 우뚝 서있다.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탑이라고 한다. 카페트 특산지답게 바닥에는 2톤짜리 대형 카페트를 깔았다. 미흐랍(예배 방향을 가리키는 벽감) 상단에만 아랍어로 경전 한 구절이 새겨졌을뿐, 벽면은 온통 투르크메니스탄 말로 쓴 경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슬람 사원의 벽면 문자장식은 아랍어로만 하는 관례를 깬 것이 이채롭다. 이 나라는 탑을 쌓는 데 일가견이 있는 성싶다. 일찍이 호라즘 왕조의 수도였던 우르겐치에는 14세기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쿠드르그 티무르 미나라가 지어졌고, 1995년 유엔 185개국이 이 나라의 중립을 염원해 세운 7 높이의 아슈하바트탑도 유명하다.

 

빠듯한 오전 일정을 마치고 오후 3시 서둘러 국립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에서 특별히 눈에 띈 것은 카라 테페와 알틴 테페, 고누르 테페 등 기원전 4000∼2000년께 문화층에서 나온 각종 토기류와 메르브 고성의 게오르 카라 유지에서 출토된 불상머리(불두)와 불경을 넣은 항아리, 니사 고성에서 발굴된 여러 형태의 뿔잔 같은 유물들이다. 그러나 정작 만나고 싶었던 아나우 유적의 저 유명한 채도 유물은 한 점도 보이지 않는다. 어찌된 영문인가. 박물관 해설원도 시원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아마도 출토된 유물이 몽땅 바깥으로 흘러나간 데다 근간에 새 발굴작업이 없었던 탓이 아니겠는가 짐작할뿐이다. 실망과 우려 속에 오후 5시께 동쪽 20km 지점에 있는 유적 현장을 갔다.

한때 '실크로드의 바그다드'라고 불리운 아나우는 선사 유적으로 유명하다. 특히 초기 농경문화를 실증하는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어 일찍부터 동서 고고학계의 눈길을 끌어왔다. 오아시스 육로의 요충지에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나 사마르칸드와 비견되는 대도시로 부상한 아나우는 몽골군의 유린을 당한 데다 1948년 대지진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잡초만 우거진 들판을 한참 헤집고 들어가니 유적이 나타난다. 유적은 약 1km를 사이에 두고 높이 12∼1의 남·북 두 구릉으로 갈라져 있다. 우리가 닿은 곳은 북부 구릉인데, 둘레는 600m쯤 되며, 남부 구릉은 훨신 더 커 보였다. 지금 구릉은 아마 발굴 때 지층을 파내면서 쌓은 흙더미인 것 같다. 이 두 구릉을 중심으로 사방에 아득히 펼쳐진 평야가 바로 옛날 아나우의 텃자리다.

1880년대 러시아의 코모로프가 북부 구릉지대의 고고학 조사를 시작한 이래, 독일의 슈미트와 미국의 휴벨트 등 서양 고고학자들이 대대적인 발굴작업을 벌였다. 특히 1903∼04년 미국 카네기 재단 후원을 받은 펌펠리는 숱한 유물들을 발견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지금까지 발굴결과를 보면, 유적은 크게 신석기와 금속병용기를 구분해주는 상·하 두 개의 문화층(테페)으로 이뤄졌다. 하층에서는 탄화된 밀과 보리, 소와 양을 기른 흔적이 나타났고, 상층에서는 산양과 낙타 뼈, 많은 토기가 나왔다. 두 층에서 나온 짐승뼈만 500kg이 넘는다. 가장 주목된 유물은 상층에서 나온 갖가지 채도다. 이곳에서 출토된 채도는 양이나 질은 물론, 기형이나 문양에서도 단연 압권이어서 채도 문화 연구에 전기를 마련했다.

 

구릉 꼭대기에 올라보니 이곳저곳에서 흙더미를 마구 파낸 자취가 눈에 띈다. 어떤 곳은 흙살을 그대로 드러낸 점으로 보아 최근 파헤친 게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여러 색깔과 무늬의 채도 조각들이 나뒹군다. 낭떠러지 흙벽을 나무꼬챙이로 후벼내도 채도 조각과 짐승뼈가 묻어나온다. 박물관에서 진열창 너머로 눈동냥이나 하던 '역사의 별똥'(유물)을 손수 캐보고 만져보니 참 감개무량하다. 금방 '노다지'라도 캐낼 듯, 들뜬 기분을 가까스로 다독이면서 1시간 반 동안의 현장 답사를 마쳤다. 조각도 유물이라, 반출할 수 없어 몇 개만 모아놓고 카메라에 담았다.

채도란 질 좋은 진흙으로 기형을 만들어 약 1000도의 온도에서 구운 채색토기를 말한다. 대체로 붉은 바탕에 검정색과 누른색, 갈색 같은 여러 색깔, 여러 문양을 넣어 윤택하게 연마한 아름다운 토기다. 일명 '채문토기'라고도 한다. 바탕이 붉은 색인 것은 흙에 섞인 철분이 산화하기 때문이며, 채색은 여러 색깔의 유약을 입혀서 그렇다. 채도 문양은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기하학적 문양과 동물, 인간 등 형상 문양으로 구분된다. 기형은 농산물 저장용기나 생활도구 용도에 걸맞게 제작되었다.

채도는 신·구 대륙 농경지에서 널리 채용됨으로써 신석기 시대 주요 문화권의 하나인 '채도 문화권'을 이루었다. 특히 아시아 대륙의 동·서 여러 곳에서 채도 유적이 연이어 발견되면서 채도 문화권을 형성시킨 통로, 즉 '채도의 길'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가장 이른 것이 기원전 7000년께 이라크 자모르 채도이며, 다음으로 아나우 채도가 기원전 5000년, 중국의 앙소(仰韶) 채도가 기원전 3500년께를 헤아린다. 그 사이에 이란 시알크 채도와 인도 모헨죠다로 채도가 놓이는데, 각각 기원전 5500년과 3000년께로 연대를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약 3천∼4천년 시차를 두고 아시아 동서에 채도란 문명요소를 공유한 하나의 긴 문화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학계에서는 이 문화대가 자생적인 것인지, 교류에 의해서인지, 만약 교류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을 실현 가능케 한 공간매체로서의 길, 즉 '채도의 길'은 어떻게 이어졌을까란 문제를 둘러싸고 갑론을박 논쟁을 벌여왔다. 그 핵심은 앙소 채도를 비롯한 중국 채도의 자생 여부다.

1921년 중국 정부의 광물지질조사 고문이던 스웨덴 지질학자 안데르슨은 우연히 후난성 뤄양(낙양) 서쪽의 민지현 앙소촌에서 단단하고 아름다운 채도를 발견했다. 낯선 유물에 당황한 그는 미국 펌펠리 조사단이 쓴 <아나우 선사유적 보고서>를 구해 읽어본 뒤 유물 문양이나 기형, 낟알 등 반출품의 유사성을 근거로 이 앙소 채도는 서아시아(아나우) 채도의 영향을 받아 발생했다는 이른바 '앙소채도 서래설'을 내놓는다. 일찍이 18세기부터 기네의 '한자 서래설', 19세기 리히트호펜의 '중국문화 동투르키스탄 기원설', 포르의 '중국인 수메르 기원설' 등의 허망한 서구 기원설 '근거 찾기'에 집착했던 서구학계에게 안데르슨의 가설은 가뭄의 단비였다. 이제야 그럴싸한 '유물증거'를 찾은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양학계는 물론, 일부 서구학계조차도 반론을 제기해 결국 안데르슨설은 상당부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서래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편년상의 상차와 성형법, 기형·문양의 유사성을 들어 이 학설의 합리성을 고집하고 있다.

반면 이를 부정하는 학자들, 특히 중국 학자들은 서아시아와 중국 사이에 전래를 증명할 중간 마디에 해당하는 지역(중간환절 지역)의 관련 유물들이 보이지 않고, 두 지역이 채도를 만든 문화적 배경도 다르다는 이유를 들어 자생 설을 줄곧 견지해 왔다. 그러나 최근 그 중간환절에 해당하는 신장성 일대에서 채도가 속속 발견되면서 중국 학계에서는 적어도 상관성쯤은 인정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답사 때 우르무치 신장역사박물관에서 만난 쟈잉이(賈應逸) 교수도 이제는 '사상을 개방'해 자생설만 고집하지 말고 상관성에도 관심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반도의 경우 전형적인 채도는 아직 선보인 바 없지만, 그 변형인 홍도(紅陶)는 여러 점 출토되었다. 전래설이건 자생설이건 채도를 공통적 문명요소로 한 채도 문화대가 동·서로 길게 뻗어있으며, 그런 문화대는 그것을 관통한 '채도의 길'이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시안의 반파유적과 투르판 하미, 페르가나의 나만감, 시리아의 텔 카잘, 터키 트로이 등 중국~터키 곳곳에서 발견된 채도 유물을 현장이나 박물관에서 목격하면서, 우리는 이 길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속고갱이를 파먹고 내동댕이친 미과(美果)처럼, 황막한 들판에 버려진 아나우 유적은 7천년 전부터 채도 문화대의 한복판에서 '채도의 길'을 튼 주역이었음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었다.

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중국 앙소채도 톱니 무늬서아시아 토기서도 확인 서구전파설 입증?

선사시대의 채도는 실크로드 문명사의 기원을 캐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사료다. 역사서에 남지 않은 선사시대부터 동서 실크로드의 유구한 역사가 펼쳐졌음을 증언할 뿐 아니라 동서 문명 지역의 상호 교류 영향 관계의 시원을 밝힐 실마리도 숨겨놓고 있다.

중국의 선사 채도가 근대 서구학계에서 100년 가까이 실크로드 문화 전래의 주체인지를 놓고 논쟁의 대상이 된 것은 형태, 무늬, 색깔 등의 기본 구조가 서아시아 채도와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앙소채도에 흔히 보이는 톱니모양 무늬(거치문)는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등지의 채문토기에도 보이는 것이며, 점이나 격자무늬 표현 등도 중근동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확인된다. 특히 실크로드의 중국 쪽 입구인 간쑤성과 신장 지역의 채도는 파미르 서쪽의 서투르키스탄 쪽의 채도와 분명한 연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서구 학계의 통설은 채도의 탄생지를 인류 문명의 발상지인 티그리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농경지대로 보는 편이다. 이른바 오리엔트 기원설인데, 티그리스강 기슭의 니네베, 사마라를 비롯해 페르시아와 인도의 모헨조다로 유적, 투르크메니스탄의 아나우, 남러시아, 동유럽 등지에서 나온 숱한 채도유물들을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 연대적으로 중근동 지역의 채도는 기원전 7000~2000년께로 편년되어 중국 채도보다 2000~3000년 가량 앞선다는 데는 별 이견이 없다. 실제로 중국의 선사시대를 최초로 구획한 안데르손도 이를 바탕으로 중국 채도를 기원전 2500년께부터 동 500년께까지의 6기로 나누고, 앙소문화기를 기원전 2200년부터 기원전 1700년께까지로 고찰한 바 있다.

게다가 최근 신장성 하미 등 동투르키스탄 곳곳에서 서아시아풍의 채도가 속속 발굴되면서 중국 학계에서도 서구 전래설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조금씩 수정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투르크메니스탄 아나우나 게오크슐 유적의 채도는 앙소 채도와 기본적 문양 등에서 비슷한 구석이 많아 오아시스로를 통한 채도 동방 전파설을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신장성 서역 남도의 호탄 등지에서 나오는 옥이 장건의 서역 착공 이전부터 중국에 유명한 특산품으로 널리 전해졌던 것 또한 그 간접적 근거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앙소문화와 서아시아의 농경문화는 의식주 형태나 농작물 측면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 일방적인 전파설로만 단정 짓기에는 곤란한 부분이 많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참고자료>

 

Dead heads: Turkish site reveals more evidence of neolithic 'skull cult' | Archaeology | The Guardian

 

Hints of Skull Cult Found at World's Oldest Temple (nationalgeographic.com)

 

Göbekli Tepe - Wikipedia

 

List of largest monoliths - Wikipedia

 

요나구니 구조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경제학자 최초 ‘사이언스’논문 발표한 최정규 교수 : 과학 : 미래&과학 : 뉴스 : 한겨레 (hani.co.kr)

 

Band society - Wikipedia

 

Tribe - Wikipedia

 

Chiefdom - Wikipedia

 

황하 문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중국의 신석기 문화 목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Nanzhuangtou - Wikipedia

 

Peiligang culture - Wikipedia

 

페이리강 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허우리 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라오관타이 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베이신 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츠산 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Cishan culture - Wikipedia

 

Beifudi - Wikipedia

 

양사오 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장강 문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펑터우산 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Pengtoushan culture - Wikipedia

 

허무두 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마자방 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다시 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량주 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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