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조선족자치주]
출처; 옌볜 조선족 자치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옌볜 조선족 자치주(중국어 간체자: 延边朝鲜族自治州, 정체자: 延邊朝鮮族自治州, 병음: yánbiān cháoxiǎnzú zìzhìzhōu 옌볜차오셴쭈쯔즈저우[*]), 또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중화인민공화국 동북 지역 지린성(吉林省)의 자치주이다. 중심지는 옌지시(延吉市)이며 면적은 43,474km2, 인구는 2009년 기준으로 217만 9천명이다.
이 곳은 80만명의 한국계 중국인이 거주하는 중국 최대의 조선족 거주 지역이다. 자치주 전체 인구 가운데 조선족 인구 비율은 36.7%이며, 조선족이 전체인구의 2%에 불과한 둔화 시를 제외한 옌볜 지역의 조선족 인구비율은 46.5%이다.
지리[편집]
남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북도와 량강도, 동쪽은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지방, 북쪽은 헤이룽장성 무단장, 서쪽은 지린성 바이산에 접해 있다. 백두산은 이 지역의 남서쪽 끝에 있으며 하이란장강(海兰江)과 가야허강(嘎呀河) 등 주요 하천이 남쪽으로 흘러 두만강에 합류한다. 수계는 쑹화강(송화강) 수계와 무단강(목단강) 수계, 두만강 수계가 주이며 라즈돌나야강(쑤이펀허) 수계도 존재한다.
역사[편집]
옌볜 조선족 자치주 성립 60주년 기념식
이 곳은 고대에는 부여와 북옥저, 고구려, 발해의 영역이었다. 지금의 둔화 시에 있던 동모산(東牟山)은 발해 건국의 출발지였다. 이 지역은 발해의 중심지였던 만큼 현재도 발해 관련 유적들이 많은데,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1949년에 발견된 정혜공주묘(둔화 시 류딩 산(六顶山) 고분군 제1구역 2호분)와 1980년에 정효공주묘가 발견된 허룽 시(和龙市)의 룽터우 산 고분군(龙頭山古墳群) 등이 있다.
19세기 중반부터 조선의 함경도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 이 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881년, 옌볜(延边)지역의 조선인은 약 1만명이었다. 1907년에는 옌지(延吉)에만 조선인 가구수가 5만호(戶)에 이르렀는데 한족(漢族)은 조선인의 4분의 1도 되지 않았고, 3·1 운동 전인 1916년에 옌볜의 조선인은 이 지역 총인구 26만 5천명 중 약 20만명이었다. 1930년에는 옌지시, 허룽시, 훈춘시, 왕칭현 등 4개 현의 조선인은 39만명으로 해당 지역 총인구의 76.4%를 차지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1952년에 9월 3일에 조선민족 자치구(중국어 간체자: 自治区)가 설치되었는데, 자치구 성립 직후였던 1954년에 이 지역의 총인구 85만4천명 중 조선인은 53만명으로서 전체의 62%였다. 1955년에 조선족 비율이 2%에 불과한 둔화 현이 편입됨과 동시에 자치주(自治州)로 격하되었다. 조선족 자치주가 성립된 9월 3일을 기념하여 자치주 차원의 공휴일로 지정하였으며, 매년 9.3절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 있다. 2012년 9월 3일 옌볜조선족자치주 성립 60주년을 맞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주요 인사들과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몽골 등 세계 각국의 주요 인사들을 초청하여, 옌지시 체육관에서 약 3만 명이 참여하는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민족[편집]
옌지시
옌볜에 가장 많은 성씨는 김(金)씨이다.
옌볜조선족자치주의 민족구성 (2010년 11월)[1]민족이름한족조선족만주족회족몽고족징포족토가족좡족묘족시버족기타민족인구수인구 비율(%)소수민족 인구중 비율(%)
1465758 | 736991 | 57212 | 6370 | 3036 | 194 | 188 | 177 | 154 | 130 | 606 |
64.55 | 32.45 | 2.52 | 0.28 | 0.13 | 0.01 | 0.01 | 0.01 | 0.01 | 0.01 | 0.03 |
--- | 91.55 | 7.11 | 0.79 | 0.38 | 0.02 | 0.02 | 0.02 | 0.02 | 0.02 | 0.08 |
행정 구역[편집]
옌볜조선족자치주 현급구역#이름한자면적(km2)인구(명)
현급시 | ||||
1 | 옌지시 | 延吉市 | 1332 | 48.9만 |
2 | 투먼시 | 图们市 | 1142.3 | 13.7만 |
3 | 룽징시 | 龙井市 | 2208 | 18.8만 |
4 | 허룽시 | 和龙市 | 5069 | 22만 |
5 | 둔화시 | 敦化市 | 11957 | 48만 |
6 | 훈춘시 | 珲春市 | 5145 | 25만 |
현 | ||||
7 | 왕칭현 | 汪清县 | 9016 | 25.4만 |
8 | 안투현 | 安图县 | 7444 | 21.6만 |
- 경제개발구 : 도문시 경제개발구 - 연길시 경제개발구 - 돈화시 경제개발구 - 안도현 백두산관광 경제개발구 - 훈춘 변경경제합작구
[현장영상] "조선족 탄압말라!" '탈중공연합회', 中공산당 '맹비난'
한승곤 입력 2021. 07. 02. 09:46 댓글 554개
출처; https://news.v.daum.net/v/20210702094620824
연변조선족자치주 상주인구 194만 1700명
기사입력 : 2021.05.27 09:28
연변조선족자치주 상주인구 194만 1700명 – 인터넷신문- 동포투데이 (dspdaily.com)
“조선족, 고구려와 관련 없어”… 中 박물관, 버젓이 역사 왜곡
유원모 기자입력 2018-01-17 03:00 수정 2018-01-17 03:00
동북아역사재단, 동북3성 박물관 분석
중국의 동북공정 주장 다수 발견… 고조선 부정… 단군조선 언급도 안해
한국 고대사 계통체계 전면적 무시… 中박물관 年7억명 방문… 왜곡 우려
http://news.donga.com/3/all/20180117/88200778/1#csidx3b6cfdb33129a47a0758ec248b87847
조선족 자치주 공짜로 주어진 것 아니다
입력 2004.10.18. 11:39 수정 2004.10.18. 11:39
조선족 자치주 공짜로 주어진 것 아니다 (daum.net)
'중국 조선족 걸출 인물' 20인은 누구인가
송고시간2014-01-13 13:59
<'중국 조선족 걸출 인물' 20인은 누구인가> | 연합뉴스 (yna.co.kr)
중국동포들, 그들이 남북한의 중화제가 될수도…
입력 2009.03.28 07:04 | 수정 2009.03.28 13:46
[예용범 칼럼] <일산제일교회>예용범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3/27/2009032701114.html
[Why] 한국 경험한 조선족 이혼율 중국 1위에 불황까지…속으로 곪아가는 연길(延吉)
한국서 건너온 밤문화 기승 30~40대 이혼녀들 노래방 도우미·마사지 종사
경기 불황에 따른 脫연길 가속 중국 정부의 은근한 조선족 억제책도 한몫
문갑식 기자
입력 2009.03.28 07:04 | 수정 2009.03.28 14:22
[Why] 한국 경험한 조선족 이혼율 중국 1위에 불황까지…속으로 곪아가는 연길(延吉) - 조선일보 (chosun.com)
中 대학입시서 조선족 학생들 '두각'
2008.07.05 10:01
월평균 1만명 입국… 중국동포가 98%
입력 2008-05-15 02:58수정 2009-09-25 02:39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05150132
[BOOK책갈피] 조선족이 바라 본 동북공정의 실체
[중앙일보] 입력 2008.04.05 00:56 수정 2008.08.01 13:28 | 종합 25면 지면보기
출처;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100150
엘리트 中동포가 몰려온다
입력 2008-03-27 03:01수정 2009-09-25 10:03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03270080
[中 11기 전인대 개막] 제11기 전인대 조선족 대표·위원들
기사일자 : 2008-03-06 16 면
서울신문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306016003
국내 단 둘뿐인 ‘조선족 창구 은행원’의 코리안 드림
입력 2008-02-05 03:00수정 2009-09-25 17:11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02050046
‘연변의 윤동주 소녀’ 연세대 장학생 입학
조선족 4세 한국화양 “한국어·문학 전도사 되겠다”
한겨레 2007.12.29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60111.html
[이지운특파원 베이징은 지금] 가슴 설레는 무연고 조선족동포
서울신문 기사일자 : 2007-11-10 11 면
|베이징 이지운특파원|“드디어 부자가 될 수 있는 열쇠를 받았습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1110011008
“조선족과 교류는 민족의식 깨우는 일”
경상북도 해외자문위원 조선족 동포 김화근씨
한겨레신문 2007년 10월 15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42896.html
연변, 동북아 정보기술 허브 잰걸음
2007년 9월11일 한겨레신문
연변, 동북아 정보기술 허브 잰걸음 : 중국 : 국제 : 뉴스 : 한겨레 (hani.co.kr)
떠오르는 '신조선족'
신조선족’의 도전…‘코리안드림’ 넘어 세계로 진출
한겨레신문 2007년 9월 7일 금요일 16쪽
일본·미·러에 4만~5만명씩 이주…아프리카·남미까지
“한국 푼돈보다 중국 목돈 가능성 주목…이젠 경쟁상대”
유강문 기자
‘신조선족’의 도전…‘코리안드림’ 넘어 세계로 진출 : 중국 : 국제 : 뉴스 : 한겨레 (hani.co.kr)
중국서 만난 독립운동가 '아리랑' 김산·김철수의 손자
<한국일보 2007년 8월 15일 수요일 11쪽>
"좌익멍에 벗고 조부의 조국애 인정받아 기뻐""기념비석 파괴 위협 등 우익 비난 안타까워… 항일독립운동가 정신 후세에 적극 알릴 것"
중국서 만난 독립운동가 '아리랑' 김산·김철수의 손자 (daum.net)
유기농 식탁도 중국산 해일 주의보
입력 2005. 10. 03. 20:12 수정 2005. 10. 03. 20:12 댓글 0개
[르포]중국 동북공정 대상지 흑룡강성을 가다
2005 08/24 뉴스메이커 592호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sec_id=115&art_id=8169
[아! 만주⑯] 정암촌: 연변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충청도 사람들을 만나다!(2) - 월드코리안뉴스 (worldkorean.net)
[간도]
출처; 간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간도(間島, 중국어 간체자: 间岛, 병음: Jiāndǎo 젠다오[*])는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 북쪽의 조선인 거주 지역을 일컫는 말로, 간도의 범위에 관하여는 여러 이견이 있다. 일반적으로 간도라 하면 현재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지역을 가리키며, 두만강 북쪽인 연변 지역을 동간도, 그 서쪽인 압록강 북쪽 지역을 '서간도'라 부르기도 한다. 무단장 시 무단강 쪽 간도를 '북간도'라 부르기도 한다
간도(間島)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사이섬(사잇섬)으로, 그 어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그 가운데 '사잇섬'이란 말 뜻에 비추어 '간도'가 본래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하중도(河中島)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가 두 강의 북안(北岸)을 가리키는 말로 그 의미가 확장·변형된 것이라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1]
19세기 말, 조선과 청나라가 백두산정계비에 쓰여진 "토문(土門)"을 서로 달리 해석하면서 이 지역(동간도)에 대한 귀속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조선은 정계비의 위치상 '토문은 두만강과 별개의 강이다'고 주장하였고, 1903년에는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하여 간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시도하기도 했다.
역사[편집]
18세기까지[편집]
간도(間島)는 고대에는 북옥저와 백산말갈을 복속한 고구려, 발해의 영역이었다가 이후에는 여진족이 흩어져 살았다. 조선은 건국 초 세종대왕 집권기에 압록강과 두만강 남쪽의 여진족을 쫓아내거나 귀화시켜 4군과 6진을 설치했으나, 두 강의 북쪽으로 영토를 밀어올리지는 않은것으로 추정된다.
1616년에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운 후 1644년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면서, 만주족(여진족의 후신)의 상당수가 군사들을 따라 이 지역에서 중국 본토로 옮겨갔다. 이 과정에서 본래 만주족들이 살던 지역이 공동화(空洞化)되자, 청(淸)은 강희제 집권기인 1677년에 '흥경 이동, 이통주 이남, 백두산·압록강·두만강 이북 지역'을 청조의 발상지라 하여 봉금지(封禁地)로 정하고 만주족이 아닌 타민족의 거주와 개간, 삼림 벌채, 인삼 채취 등을 엄금하였다.[2] 1636년에 병자호란을 겪으며 청의 위세를 실감한 조선 역시 압록강과 두만강의 북쪽 연안에 대한 도강을 엄금하고 '월강죄'로 다스렸다.[3]
간도는 두만강과 그 지류인 해란강(海蘭江), 가야하(嘎呀河, 알아하), 훈춘하(琿春河, 혼춘하) 등 여러 물길의 연안을 중심으로 한 분지와 구릉으로서 땅이 기름지고 산림이 무성한 땅이었으나, 만주족은 농경보다 유목·수렵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은 오랫동안 개간되지 못했다. 게다가 청 제국의 봉금정책으로 인해 150년 가까이 이 땅은 청조 통치자들을 위한 수렵지이자 삼(蔘) 등 약재의 채집지로 독점적으로 이용되는 상황이었다.
19세기 이후[편집]
19세기에 들어서 서슬퍼런 봉금령도 부패와 혼란으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1800년 조선은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정조가 사망하면서 세도정치의 전횡과 부패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청나라 역시 건륭제 말년에 화신의 전횡과 부패로 국정이 문란해지면서 백련교도의 난(1796년 - 1804년) 등 거듭되는 반란이 일어나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19세기 초부터 세도정치의 학정(虐政)과 지방 수령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조선의 농민들이 봉금령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관권(官權)이 미치지 않는 두만강 이북으로 건너가 이주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청나라가 아편전쟁(1840년 - 1842년 / 1856년 - 1860년)과 태평천국의 난(1851년 - 1864년)으로 혼란에 빠져 월강에 대한 단속이 느슨해지고 조선의 함경도 지방에서 1869년(기사대흉년), 1870년(경오대흉년) 대흉년이 들자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을 건너 단속 자체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청의 봉금령은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 단속을 피해 간도에서 연해주로 다시 이주하는 주민들도 있었지만 이주민은 줄어들기는커녕 갈수록 늘어났다.
1881년에는 청나라가 '봉금령'을 폐지하였고, 1883년에 조선이 '월강금지령'을 폐지한 데 이어 1885년에 청나라가 조선인에 대한 만주 이주 금지령을 철폐하면서 조선인의 간도 유입 현상은 더욱 증가하였다.
20세기 초에도 일본 제국의 침략과 수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또는 항일 운동을 위해서 많은 조선인들이 이 곳으로 계속 이주했다. 1932년에 일본 제국은 만주에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세우고 간도를 관할하는 젠다오 성(間島省, 간도성)을 설치했다. 간도는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 하에 들어갔고, 현재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장백 조선족 자치현 등이 중국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어 있다.
백두산 정계비[편집]
1712년(숙종 38년), 백두산 천지(天池)의 남동쪽 4 km 지점에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확인하는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졌다. 정계비에는 조·청 양국의 경계를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라 하고, 정계비는 그 분수령에 세워졌음을 명기하였다.[4] [5] 그러나, 청(淸)의 목극등(穆克登)이 사계(査界)를 한 이후에 조선 측은 '정계비로부터 동쪽 수계(水界)까지' 설책(設柵)을 하는 과정에서 목극등이 정한 수계가 두만강이 아닌 쑹화강(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문제를 발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파견한 북평사는 설책 공사를 중지하라고 하였지만, 정계(定界)에 참여한 이들이 정계를 잘못한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워 목극등이 정한 수원(水源)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새롭게 설책하였다.[6] 조선 조정은 이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를 청나라가 알게 되면 목극등이 견책 받고 다른 청나라 사신이 와서 영토가 축소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이런 상황을 그대로 두었다.[7] [8] [9] [10]
영유권 분쟁[편집]
19세기 말의 상황[편집]
1800년대 초부터 조선의 함경도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 간도(間島)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1881년에는 연변 지역의 조선인이 1만명에 이르렀다.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에 연해주를 빼앗긴 청나라는 만주 개발을 위해 1881년 '봉금령'을 폐지하고 본토 주민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간도에 있던 조선인과 청인 사이에 마찰이 생기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간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이에 조선은 1883년에 '월강금지령'을 폐지하고 어윤중·김우식에게 정계비와 그 주변 지형을 조사하게 하여 쑹화강(송화강)의 한 지류로 토문강이 있음을 확인한 뒤, 간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양국의 기본적인 국경선이 두만강이라는 전제하에 도문(圖們)과 토문(土門)은 모두 만주어에서 그 음이 유사하기 때문에 취한 것(借字, 차자)이므로 '토문은 곧 두만강을 지칭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과 청나라는 을유년(1885년)과 정해년(1887년)에 백두산과 그 동쪽의 국경을 명확히 획정하기 위한 감계(勘界) 회담을 가졌으나, 서로의 주장이 엇갈려 모두 결렬되었다.[11]
20세기 이후[편집]
1903년(광무 7년) 대한제국은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동시에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간도에 파견(1903년 10월 - 1905년 5월)하기도 했다. 당시 청나라는 의화단 사건의 여파로 만주 일대를 러시아 제국에 점령당하다시피 한 상태였다. 이러한 러시아 제국의 남진은 1905년에 발발한 러일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일본 제국은 1907년 8월 23일, 간도에 헌병과 경찰을 들여보내 용정(龍井)에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하였으나, 1909년 9월 4일 청나라와 간도 협약을 체결하여 이 지역에 대한 청나라의 법적 권한을 인정하고 파출소를 철수하였다.(간도 협약이 체결된 당일, 청나라와 일본 제국은 만주 5안건 협약을 체결하였다.)
1962년 10월 1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중 변계 조약을 체결하여 백두산과 두만강 상류의 국경선을 명확히 획정하고, 두만강 이북 지역에 대한 영토권이 중화인민공화국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2000년대에는 한국 사회에서 간도 협약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시한이 100년이기 때문에 2009년 9월에 그 시효가 완성된다는 일방적 주장이 신뢰할 만한 근거 제시 없이 사실인냥 유포되는 소동이 있기도 했다.[12] [13]
'옛 간도땅' 중국 동북 3성 인구 10년간 1100만명 감소 왜?
입력 2021. 05. 12. 15:32 댓글 11개
중국 전체 인구 늘었지만, 동북 3성은 인구 급감
중국 당국, 동북 3성 산아제한 전면 완화 검토
출처; '옛 간도땅' 중국 동북 3성 인구 10년간 1100만명 감소 왜? (daum.net)
출처; 만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연해주]
출처; 프리모르스키 변경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프리모르스키 변경주(러시아어: Примо́рский край, 영어: Primorsky Krai, 문화어: 연해 변강(沿海 邊疆))는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러시아의 변경주이다. 프리모르스키는 러시아어로 "바다와 접해 있다"를 뜻한다. 한자로 훈차해서 연해주(沿海州)라고도 불린다. 행정 중심지는 블라디보스토크이다. 면적은 16만 5,900 km2, 인구는 191만 3,037명(2018년 기준)이다.
상징[편집]
지리[편집]
프리모르스키 변경주는 서북쪽으로 중국, 서남쪽으로 한반도, 동쪽과 남쪽으로 동해와 접한다.
- 국경의 길이 - 3,000km 이상, 해상국경 1350km 포함된다.
- 최고점 - 아닉 산 (1,933m)
- 큰도시 - 블라디보스토크 (613,400명), 나홋카 (174,600명), 우수리스크 (156,000명), 아르툠 (111,500명)
- 호수 - 한카호(о́зеро Ха́нка, 興凱湖)가 중국과 러시아 양국에 걸쳐 있다.
역사[편집]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연해주에 최초로 살았던 사람들은 고아시아인들과 퉁구스인들이었다. 5~6만 년 전의 구석기 시대에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나나이, 우데게, 에벤키 같이 퉁구스어를 사용하는 부족들이 아직도 연해주와 아무르주에 거주하고 있다.
698년부터 926년까지는 발해가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발해는 연해주 외에도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통치했으며, 만주와 이 지역의 일부를 통치하였던 고구려의 후예와 퉁구스 계통의 말갈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115년부터 1234년까지 극동 러시아의 남쪽 부분은 보다 강력한 제국인 여진족의 금나라가 지배하였다. 여진족은 퉁구스계의 민족이다. 유목과 농업이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금나라는 또한 야금, 조선(造船) 등의 산업이 있었다. 금나라는 발해와 마찬가지로 송, 고려,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북부 중국을 점령한 금나라는 꽤 강한 국력을 과시하였다.
금나라는 몽골 제국 칭기즈 칸의 침입으로 멸망하였고, 이후 300년 이상 이 지역은 비옥한 토지와 독특한 동식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지역과 만주를 기반으로 활동한 만주족(금나라 여진족의 후신)이 17세기 초 중국 대륙을 정벌하고 청나라를 건설하면서 청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17세기 중엽 러시아 제국이 아무르강 방면으로 남하하면서 청나라와 충돌하였다.(청-러시아 국경 분쟁 참고) 1689년에 양국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해 스타노보이산맥을 국경으로 정하고, 연해주는 계속 청나라에 속했다. 그러나, 제2차 아편 전쟁(1856년 - 1860년)으로 청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러시아 제국은 남진하여 1858년 하바롭스크를 건설하였다.
니콜라이 무라피요프-아무르스키 백작에게 있어서 러시아가 해안지방을 획득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러시아는 1858년 체결한 아이훈 조약으로 아무르강(헤이룽 강, 黑龍江)의 이북 지역을, 1860년에 체결한 베이징 조약으로 우수리강 동쪽인 연해주를 차지하였다.
1859년부터 1882년 사이에 95개의 정착지가 건설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도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당시 인구의 3분의 2 이상은 농업, 수렵, 생선 교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19세기 말엽에 석탄 채굴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또한 케일, 녹용, 목재, 게, 건어물, 해삼 등도 수출되기 시작하였다. 1905년에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랄산맥 아래의 첼랴빈스크까지 개통되었다.
니콜라옙스크 일본영사관의 불탄 자리(1920년 6월 촬영)
1920년 3월 12일에는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붉은 군대는 일본군과 백군을 전멸시켰다.[1][2]
러시아 내전이 끝난 1922년부터 이 지역의 발전은 러시아를 새로 차지하게 된 볼셰비키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어업과 광업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고 철도와 해운업 역시 발달했다.
주민[편집]
거의 대부분이 러시아인이나,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한국인(주로 고려인, 일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출신), 일본인, 중국인, 우데게족, 오로치족, 나나이족, 폴란드인, 타타르족, 독일인, 유대인, 아제르바이잔인, 아르메니아인 등 여러 소수민족들이 거주한다.
“고려인 한 서린 땅… 정부는 왜 연해주 유적 방치하나”
입력 : 2018-12-16 23:20 ㅣ 수정 : 2018-12-17 02:52
‘고려인 3세’ 송지나 러 극동연방대 교수
박물관 사실상 버려져… 학계도 무관심
안중근·조명희 기념비 사후 관리 부실
“여행업계, 고증없이 사실화 안타까워… 한국 정부가 직접 유적 발굴·관리해야”
[강찬호의 직격 인터뷰] “푸틴, 100년간 개발 다짐…박 대통령 9월 EEF 참석하시길”
[중앙일보] 입력 2016.07.01 00:49 수정 2016.07.01 01:11
[강찬호의 직격 인터뷰] “푸틴, 100년간 개발 다짐…박 대통령 9월 EEF 참석하시길” | 중앙일보 (joins.com)
한-러, 연해주 농업개발 공동연구 추진
입력시간 | 2016.06.02 19:00 | 피용익 기자 yoniki@
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JA11&newsid=03496486612677784&DCD=A00101&OutLnkChk=Y
[단독] 러 연해주 농산물 국내 반입, 대규모 곡물유통시설 추진
입력 2015-06-03 06:00:00, 수정 2015-06-03 06:00:00
이동필 농식품 장관 인터뷰
식량안보 차원… 관세 혜택도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5/06/02/20150602004673.html
"南 기술·北 인력·러 자원 합치면 연해주는 기회의 땅"
[세계초대석] 해외농지 개발 앞장선 이동필 농식품부 장관
입력 2015-06-03 06:00:00, 수정 2015-06-03 09:41:55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5/06/02/20150602003704.html?OutUrl=daum
“통일은 중간목표, 연해주를 넘어 시베리아로 세계로”
기사승인 2015. 03. 30. 07:54
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50329010017693&ref=view_rel
“푸틴, 연말까지 연해주에 자족국가 경제특구 만든다”
기사승인 2015. 03. 30. 07:53
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50329010017288
남북통일 전진기지 러 연해주 대농장을 가다
기사승인 2015. 03. 23. 08:34
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50322010012887&ref=view_rel
다국적 동포들이 어울려 사는 연해주의 재래시장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8.04.15 11:05
남.북한, 조선족, 고려인 등 5개국 동포의 생활터전
출처;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080415110517536&cp=yonhap
러시아 고려인의 역사
강제이주때 한인 지식인 2500여명 처형
문화일보 2007-08-14 화요일 16쪽
구정은기자 koje@munhwa.com
강제이주 때 한인 지식인 2500여명 처형 - munhwa.com
오마이뉴스
하바롭스크에서 만난 북조선 사람
06.11.14 11:32l최종 업데이트 06.11.14 12:37l
아무르 강을 따라 내려가면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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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1시, 러시아 경찰에 봉변을 당하다
- 블라디보스토크의 매력, 햇살·해변·항구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73234&CMPT_CD=SEARCH
러시아 소장 한인관련 자료 해제집 발간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4.06.03 12:41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view.html?cateid=1046&newsid=20040603124142895&cp=yonhap
[한 글자로 본 중국]
한 글자로 본 중국
黑龍江
아골타의 꿈, 누르하치의 기개가 서린 땅
- 글 · 사진 김용한
입력2017-08-13 09:00:01
http://shindonga.donga.com/Series/3/990423/13/1023998/1
한 글자로 본 중국 | 헤이룽장성
黑 검은 용이 휘도는 白山黑水의 땅
- 글 · 사진 김용한|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입력2017-08-13 09:00:01
http://shindonga.donga.com/Series/3/990423/13/1024194/4
한 글자로 본 중국 | 마지막 회 |
蒙 말발굽 소리 사라진 칭기즈칸의 고향
《네이멍구자치구》
- 글·사진 김용한|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입력2017-10-15 09:00:01
출처; http://shindonga.donga.com/Series/3/990423/13/1092675/5
<참고자료>
만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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