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22 18:04

日 최초 통일국 '야마토 정권' 한민족이 세웠다…'이두'로 증명

<앵커>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토 정권이 언어학적으로 한민족이 세운 국가라는 사실이 증명됐습니다. 우리 고어 연구에 평생을 바친 한 국어학자가 우리의 고대 표기법인 이두로 이를 모두 풀어냈습니다.

TBC 정병훈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4세기 전반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야마토 정권, 일본 학자들도 야마토라는 말이 어디서 왔는지 답을 내놓지 못했는데 이 말이 우리 고어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평생을 우리 고어인 갑골음 연구에 바친 국어학자 최춘태 박사는 이두로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의 마한 세력이 건너가 세운 나라임을 언어학적으로 풀어냈습니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미마나는 당시 우리 음으로 삼한의 하나인 마한과 같고 이는 임나 그리고 현재 일본에서 야마토로 읽는 대화, 왜, 미마대와 바로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최춘태/국어학 박사 : 그러니까 결국 '彌摩(彌摩那의 미마)'는 '마라가라'로 읽혔고 그 동음으로 앞 선 '라'가 사라져 '마가라'로 읽혔습니다. 그 '마라가라'에 해당하는 국명이 마한(馬韓)밖에 없습니다.]

 

이두로 쓰이면서 글자는 다 달라졌지만, 모두 우리 고어인 '마라가라'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입니다. 일본 지명에서 나라현이나 이바라키현 등 우리말에서 유래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당시 일본 지배층의 말과 글이 우리 것이라면 한민족이 지배한 지역라는 설명입니다.

 

[최춘태/ 국어학 박사 : 갑골음을 쓴 민족은 오로지 우리 한민족밖에 없기 때문에 갑골음으로 풀이된 지명은 곧 우리 선조가 그곳에서 개척했다고 보면 됩니다.]

 

그동안 일본이 자신들이 고대 한반도 경영의 증거로 든 임나도, 실제는 한민족이 세운 야마토 정권이 그리워한 임의 나라인 모국, 즉 마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고분에서 수많은 한반도계 유물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도 당시 지배층 말이 한민족의 말이었음이 증명되면서 한민족이 일본을 경영한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출처 : SBS 뉴스, 日 최초 통일국 '야마토 정권' 한민족이 세웠다…'이두'로 증명 (sbs.co.kr)

 

日 최초 통일국 '야마토 정권' 한민족이 세웠다…'이두'로 증명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토 정권이 언어학적으로 한민족이 세운 국가라는 사실이 증명됐습니다. 우리 고어 연구에 평생을 바친 한 국어학자가 우리의 고대 표기법인 이두로 이를 모두 풀어

news.sbs.co.kr

 

김재호 승인 2023.07.04 17:29

백제의 야마토왜와 일본화 과정

최재석 지음 | 만권당 | 612쪽

야마토왜는 어떻게 건국되었는가?
『일본서기』를 통해 고대 한일관계사의 진실을 파헤친다!

 

‘백제의 야마토왜(大和倭)와 백제 야마토왜의 일본으로의 변신 과정’을 다룬 책으로, 일본 고대사 연구에 대한 열 편의 논고를 모은 책이다. 1990년에 출간된 『백제의 야마토왜와 일본화 과정』의 신판이다.

저자인 고(故) 최재석 교수는 『일본서기』와 『고사기』 등을 집중 분석해 “적어도 서기 670년까지의 일본사는 일본의 역사가 아닌 한국의 역사, 한국 고대사의 일부”였음을 밝혀냈다. 이를 위해 그는 먼저 백제인의 대규모 일본열도 이주 과정과 일본 개척사, 그리고 그들이 야마토라는 나라를 건국하게 된 과정을 소개한다.

 

이어 백제가 야마토왜를 어떻게 통치, 경영했으며, 백제 멸망 후 야마토왜는 어떻게 일본으로 변신했는지 보여준다. 한국 고대사의 강역이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북쪽으로는 압록·두만강을 건너 만주땅까지, 남쪽으로는 일본열도까지 펼쳐져 있었다는 진실을 밝혀주는 의미 있는 책이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출처; 백제의 야마토왜와 일본화 과정 - 교수신문 (kyosu.net)

 

백제의 야마토왜와 일본화 과정 - 교수신문

야마토왜는 어떻게 건국되었는가?『일본서기』를 통해 고대 한일관계사의 진실을 파헤친다!‘백제의 야마토왜(大和倭)와 백제 야마토왜의 일본으로의 변신 과정’을 다룬 책으로, 일본 고대사

www.kyosu.net

 

 

 

입력 : 2019.02.09 07:00 수정 : 2019.02.10 10:17

일본 기쿠치성에서 발견된 백제불상과 백제성씨 '진(秦)'씨 목간

일본 구마모토현 백제계 성인 기쿠치성 저수지에서 확인된 금동불상. 보주나 항아리, 그릇을 공손히 받든 이른바 봉지보주형 보살상이다. 오른쪽은 발굴품을 토대로 일본에서 제작된 복원품이다.|이장웅 한성백제 박물관 학예연구사 제공

 

백제계 망명 관리의 지도 아래 축성된 성에서 발견된 백제 금동보살입상과 백제 성씨인 ‘진씨(秦氏)’ 목간….

지난 2007년 일본 구마모토현(熊本縣) 북부의 야마가시(山鹿市) 기쿠치성(鞠智城) 북부 저수지에서 의미심장한 유물들이 발견됐다. 저수지 북쪽 1.5m 지하에서 발굴된 유물 중 손꼽히는 것이 바로 금동보살입상 1점과 ‘秦人忍□五斗’라는 글자가 새겨진 목간 1점이다. 그러나 한국학계에서 이 유물들과 관련된 연구는 없었고, 따라서 제대로 공개된 적도 없다,

11일 한성백제박물관 강당에서 동아시아비교문화연구회와 한성백제박물관 공동주최로 열리는 ‘기쿠치성이 전해주는 백제의 흔적’ 학술대회는 이 두 유물의 성격과 의미에 관한 논문들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발표되는 의미있는 자리이다. 먼저 기쿠치성을 20여년간 발굴한 구마모토현 문화재과 소속의 야노 유스케(矢野裕介)는 ‘고대산성 중 기쿠치성’ 논문에서 “기쿠치성 내부에서 출토된 백제계 금동보살입상은 기쿠치성이 백제 망명 관리의 지도 아래 축성됐음을 알려주는 자료”라고 밝혔다.

기쿠치성은 백제가 멸망한 후 나·당 연합군의 침공을 염려한 일본이 북규슈(北九州) 등의 지역에서 경비를 강화하려고 세운 성 중 하나이다. 663년 백제부흥군은 왜와 연합을 이뤄 나·당 연합군과 이른바 백강 전투를 벌였지만 대패하고 만다. 그러자 일본은 신라와 당나라로부터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됐고, 이에 대비하고자 쓰시마(對馬)와 이키(壹岐), 북규슈에 방어성을 쌓게 된다. 이 중 규슈 지방의 중앙부에 자리잡고 있는 기쿠치성은 나·당 연합군을 막기위한 방위망 중 최남단의 성이다. 이 성을 비롯한 북규슈 일대의 성들은 백제계 망명인들의 지도 아래 축성된 것이다.

기쿠치 성 저수지에서 불상과 함께 출토된 ‘秦人忍□五斗’ 명문 목간. 백제 망명객인 진(秦)씨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진(秦)씨는 일본에서는 ‘하타’씨로 일컬어진다. |이장웅씨 제공

 

야노 유스케는 “예컨대 ‘나가토성(長門城)과 오노성(大野城) 및 기성(椽城) 등의 축성은 달솔(백제 16관등 중 2등) 답본춘초와 달솔 억례복류 등 백제 망명 고위 관리가 맡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설명했다. 야노는 “기쿠치성에서 출토된 고구려·백제계 수막새와 원형의 홈을 지닌 백제 계통의 초석 양식, 그리고 저수지에서 확인된 금동보살입상과 ‘진인(秦人)’ 명문으로 보아 이 성 역시 백제계 인물의 지도 아래 성이 축성된 것이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야노는 “기쿠치성을 비롯한 방어성들은 백제 망명관리의 지도 아래 한반도의 최첨단 기술로 축성된 성”이라고 부연설명했다.

홍성화 건국대 교수(동아시아비교문화연구회장)는 ‘백제와 히고(肥後) 지역’ 발표문에서 기쿠치성 저수지에서 확인된 ‘진인인□오두(秦人忍□五斗)’ 명문 목간에 특히 주목했다. 진(秦)씨는 일본에서는 하타(秦)씨로 읽는다.

일본학자가 작성한 이른바 ‘조선식’ 산성의 지도. 북규슈와 대마도, 교토, 나라, 오사카 등에 집중되어 있다.|이장웅 학예사의 논문에서

 

<신찬성씨록>(815년 편찬된 일본 고대 씨족의 일람서)은 “하타(秦)씨는 진시황제의 3세손인 효무왕에서 나왔고…궁월군(弓月君)이라 칭하는 융통왕이 응신 14년(413년) 127개 현의 백성을 데리고 귀화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진시황’ 운운은 하타(진·秦)씨가 진(秦)과 같은 성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신찬성씨록>이 편찬된 후대에 그렇게 견강부회된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일본서기> 응신 14년조를 보면 추론이 가능하다. <일본서기>는 “413년 궁월군(弓月君)이 120개 현의 인부를 이끌고 백제로부터 귀화했다”고 했다. 따라서 일본의 하타(秦)씨는 진시황의 후예가 아니라 백제계 귀화인인 궁월군의 후예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홍교수는 일본의 성씨 중 하타(波多)씨도 백제계 성인 하타(秦)씨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홍 교수는 “백제 망명객이 축조한 것으로 보이는 기쿠치성에서 하타(秦)씨와 관련된 목간이 출토됨으로써 백제와의 관련성을 더욱 높여주었다”고 밝혔다.

백제계 망명객의 지도편달 아래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기쿠치성. 일본은 백제멸망후 나·당연합군의 남하를 두려워한 나머지 북규슈 등에 방어성들을 구축했다. 축성에는 수준높은 백제 망명객들의 지도가 뒷받침됐다. |홍성화 교수 제공

 

이장웅 한성백제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기구치성 출토 불상과 백제불상’ 논문에서 ‘진인(秦人)’명 목간과 함께 발굴된 금동보살상에 주목하면서 “이 불상은 ‘백제계 금동보살입상’이 틀림없다”고 밝혔다.

불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두 손으로 무언가를 쥐고 있는 형태로 발굴됐다. 신체의 옆면은 S자형이다. 아래쪽에는 불상을 받침대에 꽂아 고정할 수 있도록 뾰족한 돌기가 붙어있다. 돌기를 포함한 전체높이는 12.7㎝ 정도이다. 일본학계에서도 이 불상은 백제 멸망 직후인 7세기 후반 제작된 백제계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거의 조명되지 않았다.

기쿠치성 저수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야노 유스케의 논문에서

 

이장웅 학예사는 “이 불상은 백제계 봉지보주형 보살상”이라고 추정했다. ‘봉지보주형 보살상’은 보주(구슬)나 호(壺·항아리), 합(盒·그릇)을 가슴 앞에서 두 팔로 받들고 있는 보살상을 통칭한다. 이런 봉지보주형 보살상으로는 백제 땅인 부여 규암면 신리 출토 금동보살입상과 서산 마애삼존불의 우협시 보살, 태안 마애삼존불의 본존 보살 등이 유명하다. 이장웅 학예사는 “1985년까지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11사례의 봉지보살형 보살상 중 9례가 백제 땅에서 확인됐다”고 전했다. 이장웅 학예사는 또 “중국 남조 양나라에서 창안된 봉지보주형 보살상이 당시 활발한 교류관계를 맺고 있던 백제로 전해졌으며, 이것이 백제 망명객들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말했다. 6세기 후반 백제풍을 모체로 한 일본 법륭사(호류지·法隆寺) 금동석가삼존불이 백제-왜 교류의 시발점이다.

봉지보주형 보살상이 유행하던 시기의 백제에서는 <법화경>에 근거한 관음보살의 복덕구제를 기대하는 신앙과 <청관음경>에 의거한 악병고액(惡病苦厄)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하는 관음청래신앙이 유포되고 있었다. 보주는 세계를 밝게 비추며 온갖 병고를 없애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존재라 여겨졌다. 이장웅 학예사는 “보주는 특히 반야(般若·지혜)를 상징하는 성물로 복덕구제의 신이한 능력을 지녔으니 보주를 받든 보살상은 백제에서도 관음보살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홍성화 교수(동아시아 비교문화연구회장)는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백제계 기쿠치성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출처;[단독]일본 기쿠치성에서 발견된 백제불상과 백제성씨 '진(秦)'씨 목간 - 경향신문 (khan.co.kr)

 

[단독]일본 기쿠치성에서 발견된 백제불상과 백제성씨 '진(秦)'씨 목간

백제계 망명 관리의 지도 아래 축성된 성에서 발견된 백제 금동보살입상과 백제 성씨인 ‘진씨(...

www.khan.co.kr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08-05-14 17:50

천황제 기둥은 주술적 ‘신도’

정혜선 연구원이 본 일본

한국인의 일본사

 

보편적 진리보다 현세 집착
뿌리 같은 한국과 ‘정반대’

 

한국과 일본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르다. 지구상에서 일본과 가장 비슷한 나라가 한국이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일본과 가장 다른 나라가 한국이라는 말도 통용된다.

왜 그런가? <한국인의 일본사>(현암사 펴냄)는 바로 그런 의문에 답하려는 책이다. 일본 도쿄대 문학부 조선사연구실에서 공부한 저자 정혜선 성균관대 인문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시종 ‘왜 일본은 한국과 다른가?’에 초점을 맞추고 문학, 철학, 종교, 예술 분야를 오가며 일본사회의 밑바닥 심성과 풍토를 파헤치고 이웃나라들과 비교한다. 연대기적 일반역사서가 아니다. 그리하여 그는 뜻밖에도 자신이 모르고 무관심했던, “일본과 정반대의 문화를 지닌” 경이로운 한국문화에도 새롭게 눈뜬다. 일본을 알아야 한국도 제대로 알 수 있다는 얘기다.

 

1949~53년 오사카대 고하마 모토쓰구 교수는 일본 전국의 5만6천여명의 두개골을 조사해 본 결과 현대 일본인의 원류가 아이누인과 한반도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하니하라 가즈오 도쿄대 교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일본 고대국가 형성기인 7세기께 조몬인(석기시대 일본 선주민) 직계자손과 이주민(주로 한반도 출신) 계통의 인구 구성비가 1 대 9.6이라는 추정치를 얻어냈다. <총 균 쇠> <제3의 침팬지> 등을 쓴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일본인의 뿌리는 한국”이라고 단정했다. 물론 뿌리가 그렇다는 것일 뿐 두 나라는 전혀 다른 길을 갔다. 일본정치사상사의 권위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은 문명사에서 완전한 예외”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지은이가 이 ‘다름’의 원천이자 “일본을 근원적으로 이해하는 통로”로 지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정령신앙(애니미즘)에서 출발한 ‘신도(神道)’다. 일본 전국에는 8만여개의 신사가 있고, 1억2천만 인구 가운데 1억1천만이 신사를 정기적으로 드나들면서 800만을 헤아리는 신들을 믿고 있다. 그 신들의 정상에 ‘천황’가의 수호신인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가 있다. 정 연구원은 일본 신도를 주술적인 원시종교가 단절없이 지금까지 한 국가의 주류종교로 존속하는 거의 유일한 예로 파악한다. 일본에서는 부처조차도 수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일본 불교는 불교적 진리보다는 현세의 이익을 가져오는 신으로서 수용되어(신불습합), 주술적 종교로서 일본사회의 신도적 풍토에 적응했다. 결국에는 장례식, 조상숭배, 주술적 기도처럼 기존의 신도적 의례를 대신하여 각종의 종교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로써 얻는 경제이익을 사원 경영의 재원으로 돌리는 일종의 종교 비즈니스 조직으로 살아남았다.” 불교의 신도화다.

 

일본의 유교·주자학도 마찬가지 길을 갔다. 핵심 개념인 ‘이(理)’나 ‘천리(天理)’는 17~8세기 유학자 오규 소라이에 이르면 완전히 소멸, 탈락하고 현세적 실천윤리로 변질된다. 외래 고등종교가 토속종교를 제압하는 일반적 패턴과는 다르다.

 

‘천황’제가 살아남은 것도 신도 때문이다. 다른 세계가 “생과 사, 선악, 도덕, 보편가치 등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면서” 인간성을 왜곡하는 사회에 대해 분노할 때도 일본은 거기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일본은 대신 자아를 집단에서 찾으면서 집단에 대한 충성으로 치달았다. “남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형식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다. 본질에 관심이 없을 때 모든 관심과 에너지는 형식에 집중될 것이다.” 일본 미학의 특성이다. 가업으로 이어지는 일본적 장인정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정 연구원는 신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를 일본의 자연환경, 지리적 특성에서 찾았다. 지진과 화산과 태풍의 거대한 위력에 언제나 노출돼 있는 불안한 삶, 그리고 그 결과로 형성된 일본적 풍토를 외부침략으로부터 지켜준 섬나라라는 특성이다. 또 높은 산들로 나뉜 험준한 지형은 한국 중국과 같은 중앙집권 체제의 확립을 방해했고, 그 결과 정치와 종교가 미분화상태로 남았으며 그것은 또 절대진리나 보편가치 추구를 가로막았다.

 

교통 통신 발달로 향후 일본적 특성은 약화될 수밖에 없지만, “‘천황이 건재한 신의 나라’라는, 일본이 역사적으로 발전시켜 온 유일한 정체성”에 집착하는 우익들의 위험한 준동을 저지할 사회세력은 대단히 미약하다. 그걸 “좌절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힘뿐”이라고 지은이는 생각한다. 힘은 주변과의 연대에서 나온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천황제 기둥은 주술적 ‘신도’ (hani.co.kr)

 

천황제 기둥은 주술적 ‘신도’

보편적 진리보다 현세 집착 뿌리 같은 한국과 ‘정반대’ 한국과 일본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르다. 지구상에서 일본과 가장 비슷한 나라가 한국이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일본과 가장 다른

www.hani.co.kr

 

 

 

윤설영입력 2017. 9. 20. 16:22수정 2017. 9. 20. 17:16

"백제의 후손" 아키히토 일왕, 고구려 신사를 찾은 까닭은

일왕 부부, 사이타마현 고마(高麗)신사 찾아
고구려에서 온 도래인 역사 등 듣고 참배해
86세 생일 때 "백제의 후손" 밝히는 등 역사에 관심
내년 퇴위 앞두고 '화해 메시지' 해석 나와
 

"백제의 후손" 아키히토 일왕, 고구려 신사를 찾은 까닭은

“고구려는 몇 년에 멸망했습니까” 20일 오후 사이타마(埼玉)현 히다카(日高)시에 있는 고마(高麗)신사를 둘러보던 아히키토(明仁) 일왕은 신사 관리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고마신사는 1300여년

v.daum.net

 

 

 

입력 2015. 6. 22. 03:00수정 2015. 6. 22. 13:54

무령왕릉 지석의 '사마왕', 일본서기 기록과 완전 일치

[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6>日서 태어난 백제 무령왕
[동아일보]
 
1971년 무령왕릉 발굴과 함께 출토된 석판 지석. 가로 41.5cm, 세로 5cm, 두께 3.5cm인 석판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점선 안 한자)이 나이 62세 되는 계묘년(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셨다”고 적혀 있다. 이 지석을 통해 지석의 주인이 무령왕임이 밝혀지게 됐다(위쪽 사진). 아래쪽 사진은 무령왕릉 내부 평면도. 입구로 들어가 벽돌로 축성한 좁고 어두운 널길(연도)을 따라 들어가면 좀 더 넓은 널방(묘실)이 나오는데, 이곳에 무령왕과 왕비의 관이 놓여 있는 구조다. 동아일보DB
옛 문헌에는 백제인들이 왜(倭)로 갈 때 이용하던 주요 해상로로 쓰시마(對馬)∼이키(壹岐)∼가카라시마(加唐島)를 표지(標識) 섬으로 삼고 갔다는 기록이 많다.

2년 전인 2013년 6월 일본 규슈 국립박물관은 한일 역사학자들을 모아 옛날 백제인들과 왜인들이 오가던 이 바닷길을 검증하는 시도를 했었다. 그 결과 문헌 기록이 맞다는 결론을 얻었다. 실제 이키 섬을 출발하면 앞에 보이는 섬은 가카라시마뿐이다. 가카라시마는 수천 년 동안 우리 선조들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갈 때 나침반 역할을 했던 중요한 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 섬사람들에게는 전설처럼 ‘먼 옛날에 어떤 여인이 이 섬에서 아기를 낳고 샘물을 마셨다, 그때 태어난 아기는 훗날 매우 귀한 분이 되었다’는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다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에 그 ‘귀한 분’이 바로 ‘백제 무령왕’이라는 기록이 나오게 된다. 일본서기의 내용을 현대식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461년 4월 백제 개로왕(蓋鹵王·재위 455∼475년)이 일본 유랴쿠 천황(雄略天皇·재위 456∼479년)에게 백제 여인을 왕비로 추천해 보냈는데 그녀가 입궁하기 전 간통한 사실이 알려졌다. 유랴쿠 천황은 그녀를 죽인다.

개로왕은 동생 곤지에게 분노한 일왕을 달래고 나라 운영을 보좌하라고 지시한다. 곤지는 ‘임금의 명은 어길 수 없지만 형님의 여인(군부·君婦)을 주시면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개로왕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부인을 곤지에게 내주며 ‘여인이 산달이 가까워오고 있다. 만일 가는 도중에 아이를 낳으면 부디 배에 태워 속히 돌려보내도록 하여라’라고 했다.

개로왕과 곤지 두 사람은 작별인사를 나누고 곤지는 왜로 가는 항해에 나선다. 그러다 결국 임신한 여인이 곧 산통을 느꼈고 배는 가카라시마에 정박했다. 곧 아이가 태어났고 아이의 이름은 섬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사마(斯麻)’라 하였다. 일행이 배 한 척을 내어 아이를 돌려보내니 이가 곧 무령왕이다.”

일본어에서 한자 ‘사(斯)’는 ‘시’로 발음되기 때문에 시마 왕으로 읽으며 이는 곧 섬에서 태어난 ‘도왕(島王)’이라는 뜻이다.

일본서기의 내용들은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신뢰를 받지 못했다. 특히 왜왕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동생을 보내면서 임신한 자신의 부인을 딸려 보냈다는 대목은 현대적 시각으론 도저히 이해가 안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김현구 전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시 한국과 일본에는 임신한 부인을 총신(寵臣·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에게 하사하는 풍습이 있었다. 따라서 개로왕이 임신한 부인을 동생 곤지에게 하사했다는 기록도 못 믿을 이유가 없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일본서기의 기록은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발굴된 무령왕릉 지석에 무령왕 이름이 ‘일본서기’와 완전히 일치하는 ‘사마(斯麻)’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곤지가 일본으로 가는 길에 태어난 아이가 무령왕이라는 이야기나 무령왕이 일본에서 태어난 뒤 귀국해 즉위했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시계를 돌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되는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그해 7월 한여름 전국은 긴 장마로 신음하고 있었다. 삼국시대 백제 고분군이 밀집해 있던 충남 공주시 서북쪽 송산리(오늘날 금성동) 언덕에서는 문화재 발굴단이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7월 6일 배수로 공사를 하느라 무심코 땅을 파던 한 인부의 삽에 뭔가 단단한 물체가 부딪쳤다. 손으로 헤집어 보니 흙을 구워 만든 벽돌이었다. 그런데 한두 개가 아니었다. 조금씩 더 파고 들어가 보니 이 벽돌은 거대한 아치형 구조물의 일부였다. 처음엔 다들 기존에 발굴한 6호 고분의 연장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이 구조물이 또 다른 무덤의 입구라는 것을 알고 현장은 충격에 빠진다.

 

1971년 7월 8일 발굴단이 무령왕릉 입구를 막은 벽돌을 치우고 무덤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워낙 서두르다 보니 흰 종이 위에 북어 세 마리와 수박 한 통, 막걸리를 올려놓은 것이 전부였다. 동아일보DB
이튿날 서둘러 김원용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하여 문화재관리국 학예직들로 발굴단이 구성되어 공주에 집결했다.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자 무덤은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는 벽돌 구조물로 막혀 있었고 그 틈을 석회가 단단히 봉하고 있었다. 석회를 제거하고 입구 아래까지 내려간 시간이 오후 4시. 누구의 무덤인지는 모르겠으나 백제 왕릉급이 분명해 보이는 옛 무덤 앞에서 발굴단은 왕의 영면(永眠)을 방해하는 것을 사죄하는 위령제를 올렸다. 위령제라고 해봐야 흰 종이 위에 북어 세 마리, 수박 한 통, 막걸리를 올려놓는 게 전부였다.

맨 윗단의 벽돌 두 장을 제거하는 순간 마치 한증막처럼 흰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1400년 넘게 밀폐 상태로 있던 무덤 내부의 찬 공기가 바깥의 더운 공기와 만나 일어난 현상이었다.

숨을 죽이고 들어간 발굴단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컴컴하고 깊은 연도(羨道·고분 입구에서 시신을 안치한 방까지 이르는 길)였다. 연도 중간쯤 엽전이 올려져 있는 석판으로 다가가자 석판 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

발굴단은 다시 한번 놀랐다. 사마왕은 다름 아닌 백제 무령왕(武寧王·461∼523)이었기 때문이다.(이상은 권오영 씨의 책 ‘무령왕릉’에 나온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4년 전 무령왕릉이 140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후손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은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긴장과 박진감이 넘친다.

일제강점기 전국 각지의 고분이 파헤쳐지고 도굴꾼들이 활개를 치던 상황에서도 용케 완전한 형태로 살아남은 고분이 있다는 것 자체도 신기했지만 무덤의 주인이 꺼져가던 백제의 맥박을 다시 힘차게 돌려놓았던 무령왕이었다는 게 알려지자 한여름 전국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당시에는 먹고살기에도 바빴던 형편이라 조상들이 남긴 숭고한 문화유산을 감당할 수준이 못 됐다는 게 권오영 씨의 말이다.

“지석(誌石)을 통해 무덤 주인이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라는 발표가 나오자 현장은 집단 패닉 상태에 빠졌다. … 보도진들은 앞다투어 무덤 안으로 들어가려 했고 무덤 안에 들어가 유물을 촬영하다가 청동 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는 불상사마저 일어났다. 밀려오는 구경꾼들을 통제해야 할 경찰마저 ‘나도 한번 구경하자’며 앞장설 정도였다.”

하기야 그때만 해도 그만큼 중요한 유적을 우리 손으로 발굴 조사한 경험도 없을뿐더러 발굴 조사와 관련된 행정조치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을 터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한국 못지않게 무령왕릉 발굴 소식에 흥분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 언론들은 발굴 시점부터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이듬해까지 현장 답사기를 싣고 관련 심포지엄을 열면서 발굴의 의미를 찾고자 부산했다. 발굴 직후 아사히신문은 ‘백제 왕릉 발굴조사는 역사적인 대발굴’이라면서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백제 성왕의 아버지이면서 일본서기에도 이름이 나오는 백제의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라고 판명됐다’고 대서특필했다.

동시에 갑자기 일본인들의 눈길이 쏠린 곳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무령왕이 태어난 섬 가카라시마였다. 기자는 이달 초 가카라시마를 향해 길을 나섰다.

:: 지석(誌石) ::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이나 업적, 자손 등을 기록하여 묻은 판석이나 도판을 말한다. 무덤의 내역을 밝힐 수 있기 때문에 고분 발굴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출처; 무령왕릉 지석의 '사마왕', 일본서기 기록과 완전 일치 (daum.net)

 

무령왕릉 지석의 '사마왕', 일본서기 기록과 완전 일치

[동아일보] 1971년 무령왕릉 발굴과 함께 출토된 석판 지석. 가로 41.5cm, 세로 5cm, 두께 3.5cm인 석판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점선 안 한자)이 나이 62세 되는 계묘년(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셨다

v.daum.net

 

 

 

日王 “간무천황 생모가 무령왕 후손”… 백제와의 인연 인정

입력 2015-06-25 03:00업데이트 2015-06-25 03:00

 

[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8>日왕실에 흐르는 백제인의 피

일본 교토 시 오에 마을 이세코 산에 있는 고야신립 황후의 능. 울창한 숲 한가운데 있는 데다 마을 입구나 교토 관광책자 등에 능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판과 설명이 없어 찾아가기가 상당히 어렵다(위 사진). 능 앞에 선 이노우에 미쓰오 교토산업대 고대사연구소장(아래 사진 왼쪽)과 나카노 아키라 아사히신문 기자. 교토=하정민 기자 dew@donga.com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를 몇 달 앞둔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68세 생일을 맞아 왕실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자리에서 폭탄 발언을 한다.

“나 자신으로서는 간무 천황(50대 천황·737∼806·재위 781∼806년)의 생모(生母)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의 말은 월드컵 공동 개최라는 한일 간의 대형 축제를 앞두고 한국과 일본이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한 것이었지만 일본 내에서 금기로 통하던 천황가(家)의 백제 유래설을 천황 스스로가 깼다는 점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천황가가 백제 왕실과 밀접했다는 주장은 일부 한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꾸준히 제기되어 왔지만 천황 스스로가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는 점, 8세기 후반에서 9세기에 걸쳐 재위했던 간무(桓武) 천황과 어머니를 구체적으로 거론했다는 점, 간무 천황 어머니가 무령왕 자손이었다는 ‘속일본기’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자신도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밝힌 점 등은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에서 천황 발언에 대한 후폭풍은 별로 없었다. 일본에서는 아사히신문만이 발언을 보도했고 나머지는 모두 잠잠했다. 천황계는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전해져 내려와 일본에서 자생했다는 황국사관(皇國史觀)에 젖어 있던 우익들이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정치적 발언이므로 일희일비할 필요 없다”고 일축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3년 뒤인 2004년 8월 3일에는 아키히토 일왕의 5촌 당숙이자 일본 왕족인 아사카노 마사히코(朝香誠彦) 씨가 수행원과 친척 2명만 데리고 무령왕릉(충남 공주)을 찾아 참배하고 간 사실이 이튿날 공주시의 발표로 알려졌다. 이들을 안내한 이석호 전 부여문화원장은 당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백제 무령왕의 후손인 일본 왕족들의 무령왕릉에 대한 관심이 매우 크다. 이번 참배는 일본 내 여론을 의식해 비공식적으로 이뤄졌다”고 전했다.

이렇듯 일본 천황가와 백제의 인연은 단순한 전설이나 일부의 주장이 아니라 일본 왕실 스스로가 인정하는 대목이라는 점에서 한일 교류의 역사가 그렇게 간단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한국과 일본이 더 가까워지려면 보다 오랜 역사로부터 비롯된 깊은 인연에 주목할 이유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 간무 천황의 생모 고야신립

그렇다면 아키히토 일왕이 언급한 간무 천황의 생모는 누구일까. 또 무령왕과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일까.

‘속일본기’(789년)는 이렇게 전한다.

‘황태후의 성은 화씨(和氏)이고 이름은 신립(新笠)이다.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 태자다. 황후는 용모가 덕스럽고 정숙하여 일찍이 명성을 드러냈다. 고닌(光仁) 천황이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혼인하여 맞아들였다. …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이라는 사람은 하백(河伯)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인데 황태후는 곧 그 후손이다.’

여기서 언급된 고닌 천황은 간무 천황의 아버지이다. 그의 부인이자 간무 천황의 생모는 고야신립(高野新笠·다카노노 니가사)이다. 기자는 일본에 있는 그의 흔적을 찾기 위해 4월 말 교토에 있는 무덤을 찾아갔다. 능은 교토 시내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40분가량 떨어진 오에(大枝) 마을 이세코(伊勢講) 산 중턱에 있었다.

계절상 봄이었지만 낮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는 때 이른 더위가 한창이던 4월 22일 오후 이곳으로 기자를 안내한 사람은 고대 한일 교류 연구에서 일본 내 최고 권위자로 불리는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토산업대 고대사연구소장(75)이었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한일 고대문화 교류 흔적을 취재해 연재할 것이라는 사실에 흥미를 가진 아사히신문 오사카 지국 사회부 나카노 아키라 기자(44)도 동행했다.

산 입구에 있는 계단 몇 개를 오르자 빽빽한 대나무 숲이 일행을 에워쌌다. 그 광경이 장관이어서 굳이 대나무로 유명한 교토 근교 관광지 아라시야마를 갈 필요가 없다고 느낄 정도였다. 5분쯤 산을 더 오르자 무덤이 나타났다.

고야신립이 묻힌 능은 둥근 봉분이 밖으로 드러나 있는 한국식과는 많이 달랐다. 능 바로 앞에 일반인들의 출입을 제한한 작은 철문이 있고 능 중앙에 돌로 된 도리이(鳥居·두 개의 나무 기둥을 세우고 윗부분을 나무 가로대로 연결한 문. 흔히 일본 신사 정문에 서 있다) 형태의 구조물과 그 양측의 작은 석등 2개를 다시 한 번 철문으로 감싼 일종의 이중 잠금 구조였다.

두 철문 사이의 공간에는 오른편에 비석이, 왼편에는 제법 큰 기와지붕 아래 걸린 나무 편액이 있었다. 비석에는 ‘光仁天皇皇后高野新笠大枝陵(광인천황황후고야신립대지릉)’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광인천황’이란 남편 고닌 천황을 뜻한다. 편액에는 ‘天高知日之子姬尊(천고지일지자희존)’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유일한 존재’라는 뜻으로 모친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아들 간무 천황이 어머니 사후 직접 내린 시호였다.

이노우에 소장은 “시호에 ‘태양 일(日)’자를 쓰는 것은 고구려 시조이자 태양왕 후손인 주몽의 후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간무 천황도 어머니가 백제계임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기에 이런 시호를 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신사 입구에서 자주 보던 도리이 형태의 문이 무덤 안에 있다는 것도 특이했다. 이에 대해 이노우에 소장은 “일본인들은 도리이를 현세와 내세를 구분 짓는 상징물로 여긴다. 즉, 도리이를 통과한다는 것은 혼탁한 현세를 건너 신성한 내세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그만큼 이 무덤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취재를 거절한 히라노 신사

위패 모신 신사는 취재 거절 고야신립의 위패를 모신 히라노신사. 3월 초부터 신사의 역사와 관련한 취재 요청을 했으나 “우리는 한국과 관련이 없다”며 거절했다. 교토=하정민 기자 dew@donga.com

교토에는 또 고야신립의 위패를 모신 ‘히라노(平野)신사’가 있다. 나라에서 헤이안(교토의 옛 이름)으로 천도를 단행한 간무 천황이 수도를 옮기면서(794년) 어머니의 혼이 담긴 위패까지 함께 옮겨 신사를 만들었다. 이때 그는 어머니에게 태황태후(太皇太后)라는 최고의 지위를 내린다.

히라노신사는 서울 광화문에 빗댈 수 있는 교토 기차역에서 시내버스로 30분 정도 북쪽에 있었다. 교토 시내 여러 신사 중 벚꽃이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곳이다.

특히 65대 가잔(花山·968∼1008) 천황은 이곳에서 직접 벚꽃 식수를 하기도 했다. 3월 말∼4월 초 벚꽃 절정기에는 신사 안에 전통상품, 기념품, 각종 먹거리 등을 파는 노천 가게가 대거 들어선다. 흐드러진 벚꽃 아래 한국식 포장마차와 유사한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이를 찾는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기자가 찾은 때에는 대부분 벚꽃이 진 상태였다. 벚꽃도 관광객도 거의 없는 신사는 입구에서부터 다소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5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신사 본관이 나타난다. 구도신(久度神), 후루아키신(古開神), 이마키신(今木神), 히메신(比賣神)을 모시는 신전이 있는데 이 중 히메신이 바로 고야신립을 모신 것이다.

기자는 3월 초부터 히라노신사 측에 백제와의 인연과 관련한 취재를 요청했으나 “우리 신사가 백제 또는 한국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강조하고 싶다. 따라서 취재에 응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한국과의 관련성을 묻지 않을 테니 그냥 신사의 유래와 현재에 대한 질문 몇 개만 받아 달라는 요청도 거부했다.

신사를 걸어 나오는 뒷맛이 썼다.

:: 속일본기(續日本紀) ::


697년부터 791년까지 94년간의 역사를 40권 분량으로 다룬 책. 일본서기(720년)에 이어 두 번째로 만들어졌으며 일본 고대사 연구의 필수 자료로 평가받는다.

 

 

강동민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08/08 [15:54] 

일본인들 조상은 한국인, 가라가미가 입증

일본(日本)과 우리나라와의 관계

 

약 1만5천년 전에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자마자 지금의 일본 북해도 쪽으로 넘어간 우리선조들이 있었다. 일본은 그들을 “아이누(아사달= 태양족)족”이라고 한다. 그들은 먹을 것이 부족하여 오늘날의 형태처럼 크지 못하고 몸집이 작게 되었다. 짐승이나 나무도 영양이 부족하면 덩치가 작아지고 분재처럼 된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에는 우리 고대 언어가 녹아있다.

 

 

이들은 연해주 쪽에서 넘어간 숙신(肅愼)과 오로(挹婁)족으로 일본 열도로 전달한 새로운 지식 가운데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불을 다루는 기술이었다. 추운지방에서 생활해온 숙신과 읍루(오로)부족들은 일찍부터 고열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기술을 터득했으며, 중국 고대역사에 우리민족의 치우천왕이 광석을 캐내어 쇠(鐵)와 구리(銅)를 생산하여 여러 가지 갑주(甲冑)와 무기(武器)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의 옛날이었다.

또한 이들이 일본열도에 그러한 기술을 전달한 시기가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전 승문중기(繩文中期)의 일본 토기에 고열의 화기를 마음먹은 대로 활용할 수 있었다는 증거가 다양한 형태와 신비스런 문양에서 찾을 수 있다.

경북 고령의 우가야인들이 BC 2000년경 처음으로 일본 나라(奈良)에서 다스릴 때는 약 73대(2100년) 동안이었는데 그때는 “라마터(태양의 밝은 터)”였으며, 이 말이 변하여 요즈음은 “야마도(大和)”로 변하였고, 본래의 뜻을 모르는 일본 사람들은 ‘야마도 정신!’ 하면 즉 경북 고령의 ‘우가야 정신!’이 되는 것임을 모르는 채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일본 역사책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나오는 하느님이란 말은 ‘가야(라), 신라, 백제, 고구려’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일본 신화는 모두가 한국 쪽에서 건너간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인데,

첫째가 가야(라)에서 건너간 우가야 이고(BC 2000년경),

둘째가 포항에서 해류타고 시마네현 이즈모(出雲)로 건너간 연오랑(연일만 오씨 = 스사노오노 미코도 AD 157년)이며,

셋째가 김해 김수로왕의 아들 7형제와 둘째 딸(비미호 = 히미꼬)이 건너간 규슈 가고시마의 “韓國岳 = 가라구니 다께” 쪽으로 건너가서 나라를 세우는 이야기들이다.

이때가 처음으로 수로왕의 아들딸들이 일본 왜(규슈 가고시마)로 건너갔으니 AD 103년이며, 규슈(일본 왜) 쪽에서 나라를 세우고 첫 번째 왕으로 제일 큰누나(제사장 = 무당)를 왕으로 추대하여 모셨다고 AD 183년 ‘위지왜인전’에 기록하였다.
 
즉 어떤 쪽이든지 가야(라)와 연결되어 있다.

일본은 서기 670년쯤부터 <일본 : 日本>이라는 한자로 국호(國號)를 나타내게 됐는데, 그 당시는 <닛뽕>이라고 읽은 것이 아니고 <라마터 → 야마터 → 야마도 : 만옆집의 발음기호 참고>라고 읽었다.

<야마터>는 가야(伽倻)의 본가(本家)인 우가야(上伽倻)의 이름인데, 현재의 경북 고령지방에 있던 나라로서 “위지(魏志)”에는 야마국(邪馬國)이라고 적혀 있다.

즉 일본열도를 개척하여 나라를 처음 세운 사람들은 우가야를 종주국으로 하는 가야(라)족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천황이 제주(祭主)가 되어 직접 모시는 조상제(祖上祭)를 가라가미마쯔리(韓神祭 = 加羅神祭)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며, 봄에 그 제사를 지내는 2월 11일은 일본의 건국기념일(建國記念日)로 제정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대일본지명사서(大日本地名辭書)의 국호론(國號論)에도 “일본(日本 = 야마터)이라는 국호는 원래 삼한(마한, 진한, 변한<고구려, 백제, 신라>) 사람들이 쓰던 말인데 그 이름이 너무 아름다워 만년에 변치 않을 국호로 삼는다.”라고 명기(明記)되어 있다.

일본말의 바탕은 경상도 말과 사투리가 약 80%이고 나머지 20%가 북한과 충청도와 전라도 그리고 제주도 말이다.

일본은 가야족이 세운 나라이므로 경상도 사투리가 일본말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경상도 사투리의 특징은 말을 하면서 <마>소리를 많이 사용하는데 다음은 알기 쉬운 예로
 


우리말 표준

경상도 사투리

일본말

그래도






그래도마

~캐도(그래도)

~캐도마(그래도마)

게레도

게레도모

~게도

~게도모


 
* 경상도 사람의 말 습성(習性), 예(例): (마-, 니 이재 왔노-. 마, 마, 이리 앉으라카이)
* 위와 같은 말을, 일본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 안따 이마 기다노-, 마, 마, 고고니 오가께나사이)
 
일본의 가장 오래된 사서인 고사기(서기 712년에 완성)에는 초대 진무천황(神武天皇)이 자기를 꼬임수로 죽이려던 적(敵)을 자기 자신의 꾀에 빠져 죽게 하고나서 그 기쁨을 노래하며 비웃은 가사가 실려 있는데, 그것도 경상도 사투리로 적혀있음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우리 표준말

진무천황의 가사(歌詞. 단어번호 1057)

고소하다

고시야



 
* 말뜻 : 원래는 <맛좋다. 시원하다>라는 뜻인데, 상대방이 잘못된 것을 보며 냉소(冷笑)하는 표현으로 자주 쓰인다.

* 원문 : 疊疊(引音)志夜胡志夜 此者伊能碁布曾(此五字以音) (첩첩지야호지야 차자이능기포증)

* 종래 일본학자들의 번역 : 아아 시야 고시야 : 이는 비웃음의 뜻이다.(틀린 뜻)
* 우리 옛 고어를 이용한 번역 : 시원하다 매우 시원하다.(고소하다. 꼬시다 = 경상도 말)

  (胡志夜 = 고시야. 꼬시다)
 
이 낱말은 경상도 사투리로 <꼬시라>라고 하는 것인데, <라>줄 소리가 <아>줄 소리로 바뀌기 쉬운 습성 때문에 <꼬시야>가 되었으며(예 : 가라 → 가야. 그런 거라 → 그런 거야) 된소리(硬音) <꼬>를 표기할 글씨가 없는 일본말로는 <고시야>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사기>에 있는 가사원문에는 <伊能碁布曾 : 이능기포증>이라는 문구도 함께 있는데, 원편찬자는 그 다섯 한자를 음독(音讀)하라고 지시해 놓았는데 우리말로는 <이는 기쁘죠>를 나타낸 것이며, 그 노래 가사 원문에도 <此者嘲笑者也: 이는 조소하는 사람을 말한다>라고 쓰여 있어 그것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또한 우리말이 일본말의 뿌리라는 것을 언어학자가 아닌 사람도 쉽게 알 수 있도록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양국(兩國)의 말에 쓰여 지고 있는 의성어(擬聲語)와 의태어(擬態語)의 비교이다.

받침이 없는 일본말에서는 받침소리를 탈락시키거나, 모음을 덧붙여서 표기하며, 중모음(重母音)과 음모음(陰母音)인 <의>. <어>. <애> 는 단순 모음으로 바꿔 쓰여진다.

우리만 “슬슬” → 스루스루, “졸졸” → 조로조로, “쭐쭐” → 쯔루쯔루, “쿨쿨” → 구-구-, “벌벌” → 부루부루, “쫄쫄” → 쪼로쪼로, “쑥쑥” → 스꾸스꾸, “터벅터벅” → 도보도보, “쪼끔쪼끔” → 쪼꼬쪼꼬.
 
이와 같이 간단한 예만 들어봐도 우리가 까맣게 모르고 지내온 잊혀진 역사를 되찾게 해 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동경에서 서남쪽으로 약 70km 가면 “오이소(사이타마현) 역”이 있다.

‘오이소 오이소(오세요 오세요) 어서 오이소(빨리 오세요)’라는 경상도 사투리가 역 이름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보장왕의 막내아들 ‘약광(若光)왕자’가 1799명을 이끌고 동경 쪽으로 입항하여 ‘나를 따르라 잘 먹고 잘 살도록 해주겠다!’ 그래서 그를 따라 작은 고을(고려군 : 高麗郡. 716년)을 만들었고, 이렇게 하여 그 마을 전체가 고려 고등학교(야구 명문), 고려 아파트, 고려 절(고마 진자) 등이 지금도 건재하며, 고려(고구려의 준말) 신사의 주지스님은 약광 왕자의 60세 후손됨이 자랑스럽다고 한다.

오사카는 백제(8명의 왕과 4명의 후를 책봉하는 큰 나라)의 ‘불면후(佛面侯)’가 다스리던 장소답게 백제절, 백제 다리, 백제 초등학교, 백제 버스정류장..... 즉 백제라는 말은 부여로부터 나온 나라이니 “큰 나라”라는 뜻의 “구다라”라고 한다.

백제는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부인 ‘소서노’의 두 아들 온조와 비류가 백제를 세우는데 중국 발해만 대능하 지역에서 최초 건국되었다가 ‘산동성’지역에서 자리 잡고 ‘한반도와 일본지역’을 왕래하며 대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백제왕 중에서도 ‘비류계’는 AD 348년경 한반도로 들어오고, 온조계는 대륙 백제와 일본(비류계)으로 왕복하며 힘을 합쳐 고구려에 대항하였으나(AD 391년), 광개토 대왕에게 백제의 최대 수군기지인 ‘관미성(현 중국의 발해 쪽 지역)’이 탈취 당하게 되었다.
 
이 내용을 ‘광개토 대왕의 비문’에는 이렇게 ’신묘년(辛卯年)‘ 기사로 적혀 있다.

.........而倭以辛卯年 來到海 破百殘 (隨)(波)(新)羅 以爲臣民...........

AD 391년 요서백제 전투에서 광개토대왕에게 백제 최대의 수군기지인 관미성(삼국사기 392)이 탈취 당하게 되다.

AD 396년 고구려 광개토 대왕에게 ‘웅진성’ 마저 기습당하여 일본에서 온 백제동맹군(응신천왕으로 봄)은 오사카 근기지방으로 달아나게 되고, 반면에 백제 아신왕은 호태왕에게 ‘영위노객(永爲奴客)이 되겠다는 서약을 한 후 항복하여 ’백잔국‘으로 살아남게 된다.
 
막강한 고구려의 후원을 받게 된 신라는 사기가 충전하고 심리적 여유가 생겨 왜에 볼모로 가있던 왕자를 찾아오자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부도지의 저자 박제상’이 자기의 목숨을 회생하고 ‘미사헌’을 구출해 낸 것은 서기 418년의 일이다.

왕자를 되찾는데 성공한 신라조정은 그동안 겪었던 수모의 대가로 신라 수군이 세도내해(瀨戶內海)에 깊숙이 침입해 지금의 오사카(大阪) 연안에 나타난 것은 ‘오진천황22년’이었다.

오사카로부터 약 40km 거리에 있는 ‘아카시포’에서 항복한 천황은 ‘기비국’의 6개 지역을 ‘신라’에 주었다고 <일본서기>에 적혀 있고, ‘오진천황’은 항복을 다짐하기 위해 “백마의 목을 쳐서 묻었는데 그 이름을 <백마총>이라고 한다.

이 사실을 처음으로 근세 한국 사람에게 알린 것은 ‘임진왜란’ 이후 ‘제2회 조선 통신사 오윤경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갔던 이경직’이다.

그는 서기 1676년 막부(幕府)관리의 소개로 일본연대기(日本年代記) 내의 기록을 보고 현장 답사 확인까지 했었다고 한다.

일본 국학의 시조격인 ‘마스시다 겐린’이 저술한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을 읽고 ‘고고학자 한치윤’은 그의 저서 ‘해동역사(海東繹史)의 통일본시말(通日本始末)’ 속에 그 내용을 명기해 놓았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역사학자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도 기록되어 있고, 문헌비고(文獻備考)와 여지고(與地考) 등의 편집자인 ‘신경준의 선암산고(旋庵散考)’에도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신라 식민지 지역 이름으로는 지금도 남아있는 1. 세라고을(世羅郡) : 히로시마현 2. 조선 산성 : 오까야마현 소샤시(가야고을<加夜郡> = 가야고호리)의 표기사실을 화명초(倭名抄)에서 찾으면 간단하다. (일본지명사서 <日本地名辭書> 참조)

기비국(吉備國)의 이름 어원은 ‘님의 나라 = 君國 = 기미구니 = 기미국 = 기비국’이며 이때가 서기 420년 경이다.

<고사기> 오진기(應神紀)에 가야 왕자가 츠루가(敦賀)에 왔다고 하였고, <일본서기> 스이닌기(垂仁紀) 3년 조에 신라왕자 도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서기 647년에 신라 김춘추는 일본 정부를 방문하여 많은 토론을 하였는데 ‘일본서기’에 ‘미남이고 활달하며 말도 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와 백제 그리고 고구려의 표준말은 같았다. 그러나 사투리는 요즘처럼 많이 달랐다.
 
우리 고어 중에 <섬(島)을 시마(신라 말), 사마(백제 말)>라고 하였고, 대마도가 큰 섬 두 개로 이루어졌다고 하여 “두시마”였는데, 660년 한반도 백제가 망하면서 서기 670년경부터 모음 세 개(ㅓ. ㅐ. ㅡ)가 빠지기 시작하여, 발음이 우리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고 일본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두시마라고 발음할 수가 없고 “쓰시마”로 발음하면서 소리 나는 대로 기록하기를 “대마도(對馬島)”로 기록하고 있다.

10년 전(1971년) 충남 공주에서 백제 무령왕(25대 : 462~523)의 무덤이 발굴되었는데, 비석의 내용 중 “사마왕”이란 이름이 있었다.

무령왕의 다른 이름은 융(隆) 또는 여융(餘隆)이라고도 하였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무령왕의 어머니가 무령왕을 임신한 몸으로 규슈의 속국으로 가다가 후꾸오까 앞 ‘가기라시마<각라도>’에서 무령왕을 낳았다고 하여 ‘섬돌이<사마>’라는 아명으로 정했음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당시는 백제가 일본에서 천황가를 좌지우지 하고 있을 때였다.
 
538년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이 오경박사(五經博士)를 파견하여 불상과 불경을 일본에 보낸 이후 불교가 크게 보급됨에 따라 한문으로 된 불경을 손쉽게 읽기 위해 승려들이 한자의 반쪽만(변)으로 읽을 수 있는 “가다가나(片假名)”를 만들어 쓰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쪽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로 받침이 많이 생기고 탁음, 찢어지는 음 등이 보충되어 서로 더욱더 발음의 차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일본 학자들은 “나라시대(奈良時代 : 서기 720~784년)까지 일본 말에는 모음이 여덟 개였는데 다섯으로 줄었다.”고 말은 하고 있으나 그 이유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언어는 한번 정착하면 쉽게 바꾸어지지 않기 때문에, 모음이 셋이 빠진 채로 보충을 시키지 못하여 오늘날까지 오게 되다보니, 우리는 <냄비>를 말하면 일본사람은 “애”모음 대신‘ㅏ’를 넣어 <나베>라고 하고, 연기가 굴뚝에서 <떠 나부낀다>를 “어”모음이 안되니 “ㅏ”로 바꾸어 <다나부끼>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애” 발음을 하는 곳이 있으니, 유일하게 천황가에서 일년에 두 번씩 천황이 직접 참석하는 행사의 축문을 읽을 때는 달라진다.

예 : ........“.아지매 오게”라고 읽으면서 “아지매(ㅏ+ㅣ = ㅐ)”는 신라에서 온 말인데 “천. 지. 인”을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천황의 의복 어깨에 <삼족오> 문장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지금 일본 천황의 성씨는 “김”씨인데 첫 번째는 덴치천황이 덴무천황을 야습할 때 암호가 “김”이었으며, 두 번째는 한문으로 “군(君)”을 쓰고 읽기는 <김이 가네>라고 읽으며, 사전에는 “장차 천황이 될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세 번째는 일본의 국가(國歌)가 ‘기미가요(천황의 나라 = 김씨의 나라라는 뜻)’이다.
 
이렇게 한국과 일본은 같은 뿌리를 가진 민족인데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일본 군부의 무자비한 정책 실수와 역사 왜곡, 날조 등으로 불신이 팽배해졌다.

옛날 신라의 4대왕인 석탈해가 태어난 곳은 ‘시마네현 이즈모’인데 여기를 ‘완하국’ ‘정명국’ ‘화하국’이라고 하였으며, ‘이즈모(出雲)’의 본래 뜻은 ‘이두뫼’라는 말인데 중국 송나라 때의 ‘태평어람’에는 ‘투마(投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즈모’출신으로는 ‘일본 스모의 시조’인 <노미노 스꾸네>가 노미마을(野見鄕)의 토기생산 기술자이며 석씨였고, 또 지금은 토기 생산에 종사하지 않음으로 우리의 출신지인 ‘스가(썩 일찍 도착한 사람 = 석씨) 벌(原)을 성씨로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소서’ 라고 조정에 청원한 사람도 있었는데, 그가 바로 학문의 신으로 받들여 지고 있는 <스가하라 미치자네(管原道眞. 이하 “스가하라” = 管原 = 淸地原(청지원) = 스가의 벌>의 조상이다.

‘스가’를 성씨로 삼았던 후손들은 오늘날 일본 각지에 살고 있는데, 현재 그들의 성씨를 ‘세끼 = 關(관)’, ‘席(석)’, ‘積(적)’, ‘堰(언)’, ‘勢木(세목)’, ‘石(석)’ 등 여러 한자로 표기하고 있다.

한반도의 석씨는 한국의 총 274가지 성씨 가운데 겨우 110위를 차지하는 희귀한 성이지만, 일본에서는 총 20만 가지의 성씨 가운데 100위 안에 드는 큰 성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석탈해(昔脫解)는 본시 왜의 동북천리에 있는 ‘다바나국(多婆那國) 사람이며, 그곳은 지금의 시마네현 이즈모(出雲)를 말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 사람들은 “일본열도 밖에 있는 사람들과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천손(天孫)이다.”라는 비과학적인 주장을 해왔지만, 2003년 6월 23일자 일본 교-도-통신(共同通信)의 기사내용을 보면, 동경대학 의학부 인류 유전학 교실 <도꾸나가 가쓰오(德永勝士) 교수>는 일본 본토인과 가장 가까운 집단이 한국인과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으로 추정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돗도리대학(鳥取大學)의 <이노우에다까오(井上貴央) 교수>도 DNA 분석결과가 동경대학과 같았다.

약 1만년 전부터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민족이 일본 사람들의 조상이란 것은 천황이 받들어 제사지내는 가라가미(韓神)로 입증되며, 유전학적 연구로도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황국주의 사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완고한 일본 학자들이 많다.

그들은 한․일 고대사는 물론, 현대사마저 날조하고 왜곡하기를 떡 먹듯이 하며, 일본말의 뿌리가 우리말이라는 사실조차 부정하고 있으니 참으로 불쌍한 처지에 놓여있다.
왜냐하면 저들의 국어사전에 “일본말의 뿌리는 한국말이 아니다”라는 것을 전제로 편찬돼 있기 때문에 애꿎은 일본 아이들이 얼마나 잘못된 교육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말 <너>는 상대(相對)를 부르는 이인칭(二人稱)인데, 일본사전에는 <나>로 되어 있다. 물론 모음 <ㅓ>를 표기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모음 <ㅏ>로 대치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사전에 <나>는 일인칭이라고 적혀 있는데 문제가 있다.

인간사회의 질서는 자기 스스로와 상대를 분간하는데서 비롯되는데, 이 세상 어느 곳에 일인칭과 이인칭이 똑같다는 민족이 있을까?

참으로 어이없는 오류인데 일본 학자들은 그런 모순된 표기가 사전(辭典)에 실려 있는 이유에 대하여 한마디 설명도 하지 않고 있다.

즉 우리민족으로부터 말과 글 그리고 모든 문화를,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자연스럽게 흐르듯이 물려받은(싱가폴 초대수상 리콴류의 자서전 참고) 것을 숨기려 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상기에 기술한 모든 내용은 고 박병식 선생에게서 공부한 내용과 저서를 참고하였다.)
hanminjock1944@hanmail.net

*필자/강동민. 한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 칼럼니스트

출처; 일본인들 조상은 한국인, 가라가미가 입증 (breaknews.com)

 

일본인들 조상은 한국인, 가라가미가 입증

약1만5천년전에마지막빙하기가끝나자마자지금의일본북해도쪽으로넘어간우리선조들이있었다.일본은그들을“아이누(아사달=태양족)족”이라고한다.그

www.breaknews.com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7/22 [16:43]

천오백년 전 일본인의 모습은 어떤가?

독도문제..양직공도의 왜국 사신은 거지차림으로 맨발의 청춘

 

최근 일본 정부는 독도가 자기네 영토라는 것을 교과서에 명기하겠다하여 한.일간에 외교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참으로 역사왜곡에 능한 뻔뻔한 일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무런 기록의 근거도 없는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면서 교과서를 통하여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죽도는 일본 땅이다”라고 교육하겠다는 그 파렴치한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역사의 진실에 대해 많이 아는 필자는 일본의 이러한 행위를 볼 때마다 조소를 금할 길이 없다. 그 이유는 일본이 저런 우스꽝스러운 짓을 할 때마다 1,500년 전에 현 일본의 전신인 왜국 사신의 모습을 그려놓은 양직공도라는 그림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화민족이다. 그러나 일본은 그러한 역사 자체가 없는 민족이다. 일본서기에 기술되어 있듯이 일본은 백제의 일개 담로에서 시작되어 A.D 405년에야 백제왕족인 응신(應神)왕에 의해 처음으로 야마토왜(大和倭)란 국가 형태를 갖추고, 백제의 왕족들이 왜왕을 할 정도로 백제의 영향 아래 있었던 일개 분국이었던 것이다.

왜 왕실이야 백제의 왕족이었으니 백제와 거의 대등한 문화수준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대부분 피지배계층인 왜인들은 당시 그야말로 야만인 그 자체였다. 필자가 야만인이라고 일본을 폄하하는 말을 하자 일본을 찬양하는 일부 친일파 독자들은 “당신이 뭘 안다고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단정해 말할 수 있느냐? 당시에 당신이 살아봤느냐 아니면 그 당시 사진이 있느냐?”며 항변할 수 있다.

우선 대답을 말하자면 “그렇다. 필자는 1,500년 전 왜인의 모습을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봐서 알고 있다. 그 그림에는 왜인들이 무식한 야만인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 그림이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필자가 일본의 조상인 왜인들은 야만인이란 표현을 함부로 쓰는 것일까?

양직공도에 그려진 왜국사신의 모습은? 

그 그림이란 현재 중국 남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양직공도(梁職貢圖)라는 그림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에 남북조시대의 남조의 한 나라인 중국 양(梁)나라의 원제(元帝) 가 무제(502~549)의 재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편집한 것으로,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들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 나라에 대한 짤막한 해설까지 첨부한 그림이었다. 먼저 왜국 사신을 그린 그림을 보면 아래와 같다. 
▲&nbsp;&nbsp;양직공도에 그려진 왜국 사신의 모습. 머리에 천을 감고 몸에는 옷감을&nbsp;두르고 있으며 각반을 차고 더욱 가관인 것은 맨발의 청춘이다.


원래 사신이란 그 나라의 국왕을 대신해서 외국에 가는 법이다. 오늘날에도 외국에 나가는 대사는 장관급에 해당하는 직급이다. 예나 지금이나 외교사절은 거의 장관급이나 아무리 낮아도 차관급 정도는 되리라 본다. 그런데 중국에 외교 사신으로 나타난 장차관급인 왜국 사신의 모습을 보자면, 완전 거지 모습으로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왜국 사신은 키가 작고 헝겊조각을 머리에 두르고, 몸에는 재단되어 봉제된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을 그냥 둘둘 감고 있는 상태에서 종아리에는 각반을 차고 있다. 그리고 더욱 가관인 것은 맨발인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외국 사신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는가? 장.차관급인 사신의 모습이 저 모양이니 왜국의 수준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국 사신의 모습이 백제인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해서 일본학자들은 왜국의 사신도가 악의적으로 잘못 그려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양원제가 최초 35개국의 사신도를 그렸다 하는데 왜국에만 유독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그렇게 우스꽝스럽게 그렸겠는가!!! 다른 나라의 사신들의 복장과 모습은 왜국의 사신처럼 우스꽝스럽지가 않고 화려하고 정중하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바로 왜국사신의 복장이다. 먼저 머리에 헝겊을 두른 것은 인도식 터번과 비슷한 것으로 인도지방과 같이 더운 지방에서 사용하는 복식이다. 그리고 몸에 옷을 입지 않고 헝겊을 두른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이 거의 옷을 입지 않고 지낸다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특히 사신이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인 것은 그 나라의 기후가 신발이 필요 없는 즉 겨울이 없는 남방지방으로 보아야 한다.
 
이 사신의 모습은 현 일본의 전통의상과 무관하지 않다. 일본인의 전통의상은 여성의 경우 "기모노"요, 남자는 알몸에 "훈도시"이다. "기모노"는 팬티도 입지 않은 알몸에다 천 조각을 둘둘 감아 허리끈을 질끈 잡아 맨 것이고, "훈도시"란 것은 일본 씨름인 "스모" 선수들이 입고 나오는 애들 기저귀 같이 거시기만 겨우 가린 것이다.

남자는 길에서 볼일(?)을 볼 때 훈도시를 옆으로 비집기만 하면 되고, 기모노 여인은 앞섶만 들추면 된다. 이때 맨땅에 눕혀진 여인의 엉덩이를 보호하기 위해 항시 꺼내어 엉덩이 방석으로 쓰기 위한 걸 갖고 다닌 것이 바로 기모노 차림의 등허리에 찬 손수건만한 방석인 것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현 일본의 지리적 위치는 북위 30도~40도 사이이다. 이 일본의 위치를 놓고 사신의 복장을 논한다면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본의 위도 상 위치로 볼 때 어떻게 머리에 터번을 쓰고 거의 옷을 입지 않으며 신발을 안 신을 수가 있단 말인가? 이것은 왜국이 현 일본열도가 아니라 훨씬 더 남방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참고로 사서에 나국(裸國) 즉 벌거벗고 사는 나라가 나오는데 이는 현 캄보디아 근처를 말하는 것이라 한다.

서울대 박창범교수가 <일본서기>의 일식을 분석한 자료를 보면, A.D 709년 이전의 10개의 일식 기록에서 왜국의 위치는 남지나해상으로 결집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결집도가 매우 높아 실제로 관측된 자료로 보고 있다. 이 과학적 근거와 양직공도의 왜국사신의 모습을 보면 일치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현 일본의 전신인 왜의 위치는 현 일본열도가 아니라 남지나해상의 어딘가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이론에서 사서의 기록을 더듬어 보면 왜는 절강성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nbsp;&nbsp;좌측은 709년 이전의 야마토왜 시대로 남지나해상으로 결집되고, &nbsp; 우측은&nbsp; 1,189년 이후로 일본열도로 결집된다

19세기말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여 지배하기 위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이란 엉터리 이론을 만들어냈다. 그 이론의 뼈대는 왜가 가야지방인 임나에 일본부를 두어 200백년간 지배했다는 것으로, 예전에도 조선 땅은 일본의 식민지였으니 지금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임나일본부설은 여러 근거로 인해 허구임이 밝혀졌다.

이 나라 식민사학계가 망국의 반도사관을 고집하는 한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허구의 임나일본부설을 학술적으로 부정하려면, 우리의 이론부터 제대로 갖추어 대응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의 사학 이론이 처음부터 엉터리 허구이다 보니 역시 엉터리인 임나일본부설을 확실하게 제압을 못하기 때문이다.

양직공도에서 보다시피 우리는 일본의 전신인 왜국의 사신의 모습을 통해 당시 왜국의 문화 수준을 잘 알 수 있다. 그런 수준 이하의 왜가 가야지방을 지배했다는 것이 말이나 될 법한 이야기인가? 그리고 양직공도에서도 백제는 한반도에 있지 않고 대륙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일본의 전신인 왜가 대륙 남부나 남지나해상에 있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임나일본부설은 허구가 되는 것이다. 
 


양직공도의 백제에 대한 기록은? 

양직공도에 백제 사신의 모습은 발을 약간 왼편을 향하여 나란히 하고 있다. 단아한 용모에 관(冠)을 쓰는 좌임(左扉)의 대수포(大袖袍)를 무릎을 약간 덮을 정도로 착용하고 그 아래에 바지를 입었으며, 검은 신을 신고 양손은 모은 채 가리고 있다. 백제의 복식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자료이며, 특히 삼국시대 백제 사신의 모습과 이에 대한 기술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nbsp;양직공도에 그려진 백제사신의 모습. 우아하고 단정하고 화려하다

 
그러나 양직공도가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백제 사신의 모습보다 거기에 적혀있는 해설로 백제의 실체를 잘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백제에 대한 해설문구와 그에 대한 번역은 아래와 같으며, 필자의 중요한 내용의 설명을 덧붙인다.

百濟舊來夷馬韓之屬 晉末來駒驪略有遼東樂浪亦有遼西晉平縣 自晋已來常修蕃貢, 義熙中, 其王餘腆, 宋元嘉中其王餘毗, 齊永明中其王餘太, 皆受中國官爵,
梁初以太 除征東將軍, 尋爲高句驪所破, 普通二年, 其王餘隆 遣使奉表云, 累破高麗,
號所治城曰固麻, 謂邑檐魯 於中國郡縣 有二十二檐魯, 分子弟宗族爲之. 旁小國有 叛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等附之.
言語衣服略同高麗, 行不張拱 拜不申足, 以帽爲冠, 襦曰複袗, 袴曰褌. 其言參諸夏, 亦秦韓之遺俗.

“백제는 옛 래이로 마한의 무리다. 진나라 말기에 고구려가 일찌기 요동과 낙랑을 경략하고,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현에 있었다. 진나라 이래로 백제는 번공(蕃貢)으로 항상 수교를 하고 통하였다. 의희 연간(405-418)에 부여전(전지왕), 송 원가(424-453)에는 부여비(비류왕), 제 영명(483-493)에 부여태(동성왕) 모두 중국의 관작을 받았다.

양나라 초에 부여태(동성왕)가 정동장군을 제수 받았다. 얼마 뒤 고구려를 격파했다. 보통 2년(521년)에 부여융(무녕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여러 번 고구려를 무찔렀다고 했다.

백제는 도성을 고마라 하고 읍을 담로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에는 22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주변의 소국으로는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신라), 지미, 마연, 상기문, 하침라 등이 부속되어 있다.

언어와 의복은 고구려와 거의 같지만, 걸을 때 두 팔을 벌리지 않는 것과 절할 때 한 쪽 다리를 펴지 않는다. 모자를 관이라 부르고, 저고리를 복삼, 바지를 곤이라 한다. 언어에는 하나라의 말이 뒤섞여 있으니, 이것 또한 진한의 습속이 남은 때문이라고 한다.”

양직공도에서는 백제국의 출자(出自)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첫째 : “백제는 옛 래이로 마한의 무리다(百濟舊來夷 馬韓之屬).”라는 문구이다. 래이라 함은 옛날부터 산동성에 살고 있는 이족(夷族)를 가르키는 말로, 사전(書傳) 권5 하서(夏書)에 보면 “양주에는 도이가 있고, 청주에는 래이가 있고, 서주에는 회이가 있으며, 량주에는 화이가 있다 (揚州之島夷 靑州之萊夷 徐州之淮夷 梁州之和夷)”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의 청주는 대륙의 산동성을 말함이다. 

▲&nbsp;기원 전&nbsp; 6~7세기의 중국을 그렸다는&nbsp;일본의 지도. 산동성에 분명히 래이(萊夷)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양서 백제전>에서는 이를 더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百濟國其先 東夷有三韓國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韓辰韓 各 12國 馬韓 54國 百濟卽一也” 즉 동이에 3한국이 있었는데, 백제는 마한 소속 54개국 중의 하나인 백제(伯濟)가 그 모체라는 것이다. 마한은 황하와 회수 주변에 있었으며 나중에 백제에 병합된다.

먼저 마한이 형성되는 이전의 상황과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하>에 보면, 22세 색불루 단군 때 3한을 3조선(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바꿔 불렀다. 이 중 진조선은 천왕이 직접 다스리고, 여원홍이 마한이 되어 막조선을 통치케 하고, 서우여를 번한으로 삼아 번조선을 통치케 하였다.

막조선이 언제 망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진조선은 B.C 239년 해모수의 쿠데타로 망하게 된다. 진조선과 막조선은 해모수의 북부여와 최씨 낙랑국으로 발전한다. 번조선에서는 기자의 후손이 마지막 6대에 걸쳐 왕이 되어 통치하였는데, 번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箕準)은 B.C 195년 연나라 출신 위만에게 패해 왕위를 빼앗기고 남하하여 한(韓)을 세우게 된다. 

여기서 번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이 어디로 갔느냐가 우리 역사의 가장 핵심 포인트이다. 매국식민사학자들은 대동강 평양에 있던 단군조선을 기자조선이 무너뜨리고, 기자조선은 위만조선에게 망했다고 한다. 이 때 기자조선의 왕 기준이 남하하여 한반도 남부에 삼한을 세우는데 이를 마한/진한/변한이라 하며, 삼한이 백제/가야/신라로 발전했다고 교과서에 적어 놓고 있다. 실로 엄청난 역사왜곡인 것이다.

식민사학계는 반도사관을 정착시키기 위해 기자조선/위만조선을 대동강 평양으로 끌고 오려다보니 진조선/막조선이 발전한 북부여와 낙랑국을 우리 역사에서 지워버리는 패륜을 범하게 된다. 번조선의 수도는 하북성 창려(진황도시)였다. 그곳을 위만에게 빼앗기자 기준이 남하한 곳은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번조선의 영토였던 중국대륙 동부지대로 중심인 황하와 회수 사이로 간 것이었다.

기준은 해대(海岱)의 해(海) 지방으로 남하하여 옛날에 기자가 살았던 하남성 서화와 안휘성 몽성 지역에서 한(韓)의 왕이 되었는데 진국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유.연.제.노.오.월 지역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여러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마한의 54국의 한 나라였던 백제(伯濟)가-->백제(百濟)로 발전되며, 변한 12국의 하나였던 사로(泗盧)가-->사로(斯盧)-->신라(新羅)로 되고, 비미국과 구노국은 왜(倭)로 발전된다.

海라는 지방은 산동성 동남부와 강소성 북부의 지역이고, 대(岱)는 태산을 말함이다. 따라서 해대(海岱)라 함은 산동성과 강소성 일대를 말함이다. 참고로 황하와 양자강 사이에 흐르는 회수(淮水)라는 강 이름은 기준의 준(準)자에서 따온 것이라고 민족사학자 오재성선생은 설명한다. <삼국지>에 회당작준 견전세국전주(淮當作準 見前歲國傳注)라는 주가 있어 회수의 기원이 기준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백제는 백가제해(百家濟海)의 준말로 "백가(百家)가 바다(海)를 건너왔다(濟)."라고 해석을 하여 고구려에서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세운 것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백가가 제수(濟水 : 황하의 지류)와 해(海 : 산동성 동남쪽과 강소성 북부)에 있었다."라고 해석을 하여 백가제해(百家濟海)라고 할 수도 있다고 민족사학자 신완순선생은 설명한다.

그 이유는 백제는 래이(萊夷)였고 마한(馬韓)의 종족이며, 래이와 마한은 지금의 산동성과 산서성 하북성 인근에 걸쳐서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여러 사서에 나오는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라는 직위가 가능하며, 산서성의 요서와 대방군에 관한 설명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2) 둘째 : 다음은 “진나라 말에 고구려에 요동과 낙랑이 있고, (백제) 또한 요서.진평현을 두었다(晉末來駒驪略有遼東樂浪亦有遼西晉平縣)”라는 문구이다. 우리 역사를 무조건 축소왜곡하려는 식민사학계는 이 문구의 해석을 “진나라 말에 고구려가 요동에 있고, 낙랑 또한 요서와 진평현을 두었다.”라고 해석하여 요서.진평은 백제와는 상관없이 낙랑의 영토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전혀 근거 없음이 드러난다.

우선 진(서진 265~316, 동진317~420)말기라 함은 서기 400년경을 말함으로 그 때는 낙랑이 이미 멸망하고 없었을 때다. 따라서 여기서의 낙랑은 당시 존재한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요동.요서와 같이 낙랑이라는 지명을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또한 같은 양나라의 사서인 <양서 권54 열전48 백제조>에는 “晉時駒驪略有遼東, 百濟亦据有遼西晉平郡矣自置百濟郡)”라는 문구가 있는데 거기에는 낙랑 대신에 백제가 자치백제군으로 요서와 진평군을 두었다고 뚜렷이 명기되어 있어 그러하다.

식민사학계는 여기서 고구려의 요동이라 함은 현 요녕성 요하 동쪽인 만주를 가르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현 요하는 11세기 요나라가 성립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그 전에는 요동.요서의 기준이 달랐다. 당시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점은 산서성 태행산맥 안에 있는 요(遼)라는 지명으로, 중국 사서에서 말하는 요동이라함은 현 북경지역을 중심으로 한 하북성 일대를 말함이요, 요서라 함은 산서성 일대를 말함이다.

백제의 요서 진출을 최초로 기록한 사서는 양나라 이전 왕조인 송나라(420~479)의 사서인 <송서 백제전>으로 “高句麗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治所謂之晋平郡晋平懸)”라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백제는 산동성을 기반으로 하다가 나중에 요서 지역인 산서성까지 진출하고 복건성인 진평에도 백제군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nbsp;&nbsp;요동 요서&nbsp;구분의 기준은&nbsp;산서성 태행산맥 내에 있는 요(遼)라는 지명이다. 즉 원래 요동은 동이족의 근거지였다.

 
백제가 설치한 진평군에 대해서는 <중국역사지명사전>이 설명하고 있다. “진평군은 태시(泰始) 4년(468년) 지금의 복건성 복주(福州)시에 설치되었으나 471년 진안군으로 개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복건성 복주는 대만과 마주보는 곳이다. 백제가 요서.진평에 백제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송서>와 <양서> 이외에 <남제서>와 <구당서>에도 기록되어 있고,  <통전 권185 백제전>은 “663년 백제 멸망 시 요서지역의 백제군은 돌궐과 말갈에 의해 소멸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한민국 사학계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하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목에 힘주어 강조하면서서 교과서에도 수록했으면서도, 백제가 산서성(요서)과 복건성(진평)에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했다는 기록에는 잘못된 기록이라며 오히려 이를 부정하고 있으니 참으로 나라를 팔아먹을 친일식민사학계라 아니할 수 없다. 

▲&nbsp;&nbsp;백제가 백제군을 설치한 진평은 복건성 복주(福州) 지역이다.&nbsp;&nbsp;빨간 원 위가 복주이다.
▲&nbsp;백제는 대륙 동부를 본부로 하여&nbsp;한반도,&nbsp;일본열도, 대만(탐라), 필리핀 등 동남 아시아와 광서자치주(흑치)에 담로를 설치했다.
 
 
3) 셋째 : “백제에는 22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는 기록이다. 백제의 주요 담로는 왜국(광동성 일대), 흑치국(광서장족자치구), 탐라국(대만) 이외에 한반도 일본열도 등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필리핀 월남 인도네시아 버마 태국 등 동남아시아에도 담로를 설치했다고 한다.

여하튼 일본의 왕실족보인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많은 왜왕을 백제왕족이 했고, 흑치상지는 왕족인 부여(夫餘)씨였는데 흑치국의 제후였기에 흑치란 성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주변의 소국으로는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신라), 지미, 마연, 상기문, 하침라 등이 부속되어 있다”는 기록이다. 여기서 반파/탁/다라/상기문은 왜 관련 지명으로 보여지며, 전라/지미는 확인이 어려우며, 하침라는 탐라(대만)으로 보여진다.

1929년 낙양 북망산의 한 고분에서 흑치상지의 묘지석이 발견되었는데 그 묘지명은 천여자에 이르는 방대한 것으로, 그의 가계의 내력에 관한 것이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부군(府君)은 이름은 상지(常之)이고 자(字)는 항원(恒元)으로 백제인이다. 그 조상은 부여씨(夫餘氏)로부터 나왔는데 흑치(黑齒)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를 씨로 삼았다. 그 가문은 대대로 달솔(達率)을 역임하였으니, 달솔이란 직책은 지금의 병부상서와 같으며, 본국에서는 2품 관등에 해당한다. 증조부는 이름이 문대(文大)이고, 할아버지는 덕현(德顯)이며, 아버지는 사차(沙次)로서, 모두 관등이 달솔에 이르렀다.”

묘지석에서 보듯 흑치상지의 가계는 백제왕가의 일원으로 그의 증조부부터 달솔이라는 벼슬로 22담로의 하나인 흑치국의 제후(왕)로 분봉(分封)된 것이었다. 대를 이어 흑치국의 왕위를 계승했으며 언제인지는 모르나 흑치를 성씨로 삼게 되었다는 기록이다. 또한 중국장수전전의 기록에는 흑치상지(?∼689년)에 대하여 “흑치상지는 당 고종 이치, 측천무후 때 명장으로 백제(지금 광동성 흠현 서북) 서부인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광동성 흠현 서북은 현재 광서장족자치구 흠주 서북 옹령현 백제향(百濟鄕)을 말하는 것으로, 그곳에는 아직도 백제허(百濟虛)라는 불리고 있으며 아직도 백제를 여러 명칭에 붙여 쓰고 있다. 그들은 百濟虛라고 적어놓고 중국식 발음으로 읽지 않고 우리식 발음인 대백제(DaiBaekJae)라고 읽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nbsp;&nbsp;&nbsp;백제의 서부인인 흑치상지의 고향은 광서장족자치구 흠현 백제향 출신이다.

 

▲&nbsp;&nbsp;광서장족자치구의 흠주와 옹령 사이에 백제라는 지명이 지도상에 보인다.

 
이렇듯 22개 담로(제후국)를 거느렸다면 백제는 일개 왕국이 아닌 대왕국(황제국)이었던 것이다. 백제의 왕들이 대왕(황제)이었는지는 공주에서 발견된 무녕왕릉의 지석에 명문으로 뚜렷이 남아 있다. 지석에는 백제 사마왕이 523년 62세의 나이로 붕(崩)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어 무녕왕이 대왕(황제)임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에서도 천자(황제)의 죽음에만 붕(崩)자를 쓰고, 제후(왕)의 죽음에는 훙(薨)자를 쓴다. 그 이유는 공자가 <예기>에서 사람의 죽음에 대해 “천자가 죽으면 崩, 제후는 薨, 대부는 졸(卒), 선비는 불록(不錄) 서인은 사(死)”라고 교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흑치상지의 묘비에는 제후에게 쓰는 훙(薨)으로 기록되어 있다. 

▲&nbsp;&nbsp;충남 공주에서 발견된 백제 사마왕의 지석에 62세에 붕(崩)했다고 기록되어있다.

4) 넷째 : 여기서 가장 중요한 기록은 사라(斯羅)가 백제에 부속되어 있었다는 기록이다. 사라는 신라의 옛 이름이란 것은 중국 기록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양서 신라전>에 의하면 “위나라 때는 사로, 송나라 때는 신라 또는 사라라고 불렀다 (魏時曰斯盧 宋時曰新羅 又曰斯羅)”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국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건국 이래 국호를 정하지 못하고 사로(斯盧) 사라(斯羅) 신라(新羅) 등으로 불리고, 존호(尊號)를 왕이 아닌 거서간,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 등으로 부르다, 22대 지증왕 4년(A.D 503년)부터 국호를 신라라 하고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사용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신라는 중국의 사서와 <삼국사기>를 보더라도 지증왕 이전에는 백제의 속국이기 때문에 왕이란 칭호를 쓰지 못하고 간(干)이란 칭호를 쓴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백제가 강성할 때(근초고왕~근구수왕)에는 백제의 속국이었다가, 고구려가 강성할 때(광개토태왕~장수왕)에는 고구려의 속국으로 되며, 다시 백제의 중흥기인 동성왕 때는 백제의 속국이었다가 지증왕 때부터 독자적인 자립국가로 태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5) 다섯째 : 백제의 언어에는 하나라 말이 뒤섞여있다 했는데 말이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의 좁은 땅덩어리 내에서도 경상도 사람은 대대로 경상도 말을 쓰고, 전라도 사람은 대대로 전라도 말을 쓰는 법이다. 백제의 언어가 하나라 말과 뒤섞여있다는 의미는 이는 하나라의 영역과 백제의 영역이 상당부분 겹쳐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단고기 단군세기>에 따르면, “4세 오사구단군 때 하나라 왕이 백성들에게 덕을 잃어버리니 단제께서 식달에게 명하여 람.진.변의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하를 정벌케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13세 흘달단군 때 은나라 사람이 하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이 구원을 청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만일 단군조선이 저 멀리 대동강 평양에 있었다면 이런 기록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단군조선의 번한은 분명 하나라와 접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실제로 중국 대학교재의 지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나라의 작은 영토 주위로 서이(견이), 북이(北夷), 구이(九夷), 회이(淮夷), 유/묘(有/苗) 등 동이족(東夷族)들이 뺑 둘러싸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구이 지역은 후에 기준이 위만에게 패해 왕위를 넘겨주고 남하하여 한(韓)을 세운 곳으로 나중에 백제가 이 지역을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옛 구이의 땅 즉 번한(조선)의 땅에서 백제가 생겨났으니 양직공도에서 백제의 말에 하나라의 말이 뒤섞여 있다고 한 것이다. 백제가 만일 한반도 충청/전라도에 있었다면 어떻게 하(夏)나라 말과 뒤섞일 수 있겠는가!!! 이 문구 하나만 보아도 백제의 주무대는 대륙 동.중부임을 알 수 있다 하겠다. 양직공도는 참으로 중요한 자료를 우리에게 주었다 하겠다. 
▲&nbsp;&nbsp;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 주변은 단군조선이 둘러싸고 있었다.&nbsp; 이 구이 지역을&nbsp;나중에 백제가 차지한다.

 
이렇듯 양직공도의 백제사신도의 명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역사적 사실이 실로 엄청나다 하겠다. 비록 백제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지만 백제의 거의 모든 것을 설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국적인 반도사관을 주장하는 대한민국의 식민사학계는 다른 것 제쳐두고 양직공도에 적혀있는 백제의 개요를 설명한 문구부터 다시 공부해서 교과서를 반드시 수정해야 할 것이다.

일본 정부는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 아무런 역사적 근거도 없이도 그러한 것을 교과서에 명기하겠다고 한다. 그건 미래의 일본의 국익을 위해 자라나는 학생들을 그렇게 교육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인류 문명의 모태가 되고 대륙을 지배한 위대한 조상들의 유구한 역사를 생매장한 상태에서 아직도 꺼내지 않고 있다. 즉 국민들의 정신이 썩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정신이 썩어가고 있는 나라가 언제까지 유지되겠는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조상의 역사를 복원하여 국민들에게 정신적 교육 자료로 삼아야 이 나라의 미래가 활짝 열릴 것이고, 감히 일본 따위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엉터리 주장을 하지 못할 것이다. 

 
▲&nbsp;&nbsp;동이족의 분포도.

 

<저작권자 ⓒ pluskorea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천오백년 전 일본인의 모습은 어떤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천오백년 전 일본인의 모습은 어떤가?

최근일본정부는독도가자기네영토라는것을교과서에명기하겠다하여한.일간에외교분쟁을일으키고있다.참으로역사왜곡에능한뻔뻔한일본이라아니할수

www.pluskorea.net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6/25 [02:08]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왜 왕가 정체는?

670년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기 전 왜는 백제와 어떤 관계인가?

본 글은 장문이라 아래와 같이 3부로 나뉘어 연재됩니다.
(1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왜왕가의 정체는?
(2부) 칠지도와 응신을 통해본 왜왕가의 비밀은?
(3부) 백제의 분국인 왜의 위치는 어디인가?

강력한 해양대제국 백제는 당나라 소정방의 13만 대군과 신라의 기습으로 의자왕이 붙잡히고 660년 한순간에 나라가 망한다. 그러나 왕족인 복신과 도침 흑치상지 등이 주도한 부흥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200여성을 차지함으로서 백제성의 거의 대부분을 회복하자 당나라는 40만 대군을 출병시킨다. 복신은 왜왕에게 의자왕의 비보를 전하고, 부여풍왕자의 귀국을 청하면서 원병을 요청한다.    

왜국에 가있던 왕자 부여풍이 돌아와 왕위에 올라 백제는 다시 부활하는 듯 했다. 그러나 백제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까지 죽이려다 오히려 복신이 부여풍에게 처형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결국 왜병은 백강 어귀에서 당나라에게 4번 싸워 다 패하고 만다. 배 400척이 불타고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덮어 해수가 붉어졌다고 <삼국사기>는 적고있다. 전투에 패한 부여풍 왕은 고구려로 도망을 간다. 이 때가 663년으로 <일본서기>는 이 해를 백제 멸망의 해로 적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왕자가 왜국에 있다가 돌아와 백제왕이 되고, 복신이 왜국에 원병을 청하자 조건 없이 군대가 왔고,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백강에서 전투를 벌인다. <구당서>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의 왕자가 왜군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대에 투항했다는 내용이 있다. 백제 왕자가 뭐길래 왜군을 거느리고 지휘하는가?

그리고는 <일본서기>에 이상한 기록을 남겼다. “백제 주유성이 마침내 당에 항복하였다. 이 때에 국인이 서로 말하길 “주유가 항복하였다.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또 갈 수가 있겠는가? (이하생략)”(百濟州柔城, 始降於唐, 是時, 國人相謂之曰, 州柔降矣, 事无奈何, 百濟之名, 絶于今日, 丘墓之所, 豈能復往...) 

그리고 668년 고구려까지 멸망하고 고구려의 부흥운동까지 실패하자, 670년 12월 왜국(倭國)은 일본(日本)으로 국호를 고친다. 그들 말이 “해돋이와 가까운 곳이어서 그와 같이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고 <삼국사기>에 적혀있다.

백제와 왜국과의 관계가 도대체 어떤 사이이기에, 백제의 요청에 의해 아무 조건 없이 원병을 보내고, 백제의 왕자가 왜군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대에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고, 백제가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이라는 이런 기록을 <일본서기>에 남긴단 말인가? 지금부터 백제와 왜국과의 관계를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nbsp;&nbsp;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인 주류성(周留城).&nbsp; 일본서기에는 州柔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부흥운동과 왜국의 지원

백제 멸망 시인 660년의 왜왕은 제명(齊明)여왕이었다. 제명여왕은 백제에서 온 사신으로부터 의자왕이 잡혀갔다는 비보를 접하자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즉각 군대파병을 결정하고 이를 위해 군선을 건조하게 한다. 우선 수천 명의 왜병을 보내 복신의 군대에 합류시킨다.

백제부흥군의 군세가 얼마나 강했던지 신라군은 연패하여 많은 장수들이 처벌을 당한다. 급기야는 무열왕 김춘추마저 전사한다. <삼국사기>에는 661년 무열왕의 죽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6월 대관사의 우물물이 변하여 피가 되고, 금마군에서는 땅에서 피가 흘러 넓이가 5보쯤 되었다. 왕이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열왕 김춘추가 죽고, 한달 뒤 왜의 제명여왕도 68세의 나이로 죽는다. 제명왕은 백제 복국을 유언으로 남기고 이를 위해 왜에 와있던 부여풍 왕자를 귀국케 한다. 662년 1월 왜국은 복신에게 화살 10만본, 군복용 면포 1천필, 군복용 견사 1백근, 솜 1천근, 가죽 1천장, 종자용 벼 3천석을 보내 부흥운동을 돕는다. 부여풍은 662년 5월 군선 170척과 군사 17,000명을 이끌고 귀국한다.

부여풍 왕은 복신을 반역혐의로 참형하고 그의 목을 소금물에 절이는 해형(醢刑)에 처한다. 부흥군의 내부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이 때 당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던 왕자 부여융이 당나라로부터 백제왕을 제수 받고는 나타난다. 부여융은 당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기면서 제후국이라도 백제라는 국호와 사직을 보존하려고 했으나 나중에 당나라에게 철저히 이용당했음이 들어난다. 

흑치상지는 복신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가 부여융의 설득을 받자 당군에 투항해 버린다. 이로서 백제부흥군은 급격히 힘이 약해진다. 한편 왜국에서는 군선의 건조가 완료되자 왜군 27,000명이 400척의 군선에 나누어 타고 백강으로 향한다. 당나라 군선 170척과 4차례의 수전을 치뤘으나 참패를 당하고 400척이 전멸하고 만다.

<일본서기>에는 백강이 백촌강(白村江)으로 나오며, <중국장수전전>에 보면 백강이 양자강이남 호남성 기양으로 나온다. 지금은 상강(湘江)으로 부르고 있으며, 기양과 백수 사이로 동정호로 흘러드는 큰 강으로 호남성의 대표적인 강이며 가장 큰 강이다. 이곳은 당시 왜가 위치하고 있던 광동성과 가까운 곳이고, 또한 호남성은 아마 백제의 서도(西都)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어 이 기록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기록으로 보인다. 당시 백강은 산동성 백마하와 지금의 상강 두 군데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동도(東都)인 산동성의 백강이란 이름을 서도(西都)인 호남성으로 가지고 간 것이 아닐까 한다.

▲&nbsp;&nbsp;중국장수전전에는 백제와 왜의 연합군과 전투를 벌인 백강이 호남성 기양으로 나온다.&nbsp; 이곳은 왜의 근거지인 광동성과도 가깝고, 흑치상지의 고향인 백제서부하고도 가까워, 백제의 서도(西都)로 추정되는 곳이다.


665년 당 고종은 유인원장군을 보내 웅진성에서 신라의 문무왕과 백제의 부여융을 모이게 하여 백마의 피로서 서약을 맺게 한다. 이로써 백제는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지고 당과 신라의 식민통치에 환멸을 느낀 많은 백제인들이 중국과 왜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된다.

왜왕가는 백제와 어떤 관계인가?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든다. 아니 왜 왜국은 온 국력을 기울여 아무 조건 없이 백제를 도왔을까? 당나라가 왜로 직접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백제가 멸망한다고 당장 왜국에 위기가 오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런 대가도 없는 그리고 국익에 전혀 보탬도 되지 않는 백제의 전쟁에 왜국은 왜 대군을 보내 참여하게 되는 것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다른 이유가 없다. 단 한 가지 이유라면 왜왕가는 백제왕가의 혈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본왕가의 혈통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2001년 일본의 아키히토(明仁)왕이 “옛 칸무(桓武: 781~806)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라고 공식 발언한 것이다.

이 발언은 만세일계(萬世一係)라고 믿고 있는 일본왕가의 혈통에 대해 일왕 자신의 입으로 고대에 백제왕족의 피가 왜왕가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확인시켜준 것이었다. 즉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의 직계후손 중 화을계는 일본조정에서 기록을 담당하는 중신이었고, 화을계의 딸이 고야신립으로 칸무왕의 생모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일왕의 발언대로 칸무왕의 생모가 백제 무녕왕의 자손이라는 것하고, 백제부흥운동을 도운 제명/천지왕하고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그 정도의 혈연관계 때문에 제명/천지왕이 군수물자도 저렇게 많이 보내고 대병을 보내 무조건 백제를 구원하려 했을까? 독자들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필자는 아끼히도 일왕이 거짓말을 한 것으로 본다. 분명 일왕이 한 말 이외에도 백제왕실의 피가 일본 왕가에 있다. 그것을 규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백제부흥운동을 도운 제명여왕과 그녀의 아들 천지(天智)왕인 것이다. 지금부터 제명여왕과 천지왕의 혈통을 찾아 가보기로 한다.

우리에게 의자왕의 누이로 알려져 있는 제명여왕은 2번이나 왜왕위에 오른 인물로 이름은 보황녀(寶皇女)라고 <일본서기>에 기록이 되어있다. 남편인 서명(舒明)왕의 뒤를 이어 여왕에 올라 황극(皇極 642~645)왕이 되었다가, 시동생인 효덕(孝德)왕에게 양위했다가, 효덕의 사후 다시 37대 제명(齊明 655~661)왕에 오른다. 백제를 구원할 전쟁 준비를 하던 중 661년 68세의 나이로 죽자 아들인 천지(天智)왕이 그 뒤를 잇는다.

<일본서기>에서 제명여왕을 보황녀(寶皇女)라 한 것은 황제의 딸로 이름이 보(寶)란 말이다. 백제황가는 대대로 외자 이름을 쓴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제명여왕의 이름은 부여보(夫餘寶)이다. 여하튼 그녀는 남동생인 백제 의자왕이 당나라에 잡혀갔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고 복신의 지원요청에 의해 무조건 군대파병을 결정한다.

이 때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 왕자는 백제에서 파견한 일궁부(日宮府)의 대사로 있으면서  655년 1월 고모를 다시 왕위에 올려놓은 후 측근에서 보좌하기 위해 일궁부대사의 자리를 아우인 부여용에게 맡기고는 실질적인 야마토왜(大和倭)의 행정부를 이끌던 인물이었다. 백제 의자왕이 잡혀가자 부여풍은 왕위에 오르기 위해 왜병을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제명여왕의 남편인 서명왕은 민달왕의 손자이고, 민달왕은 계체왕의 손자이다. 일왕실의 직계계보를 정리해 보면 즉 26대 계체(繼體)왕 --> 29대 흠명(欽明)왕 --> 30대 민달(敏達)왕 --> (彦人大兄王子) --> 34대 서명(舒明)왕 --> 38대 천지(天智)왕으로 혈통이 이어지고 있다. 즉 실질적으로 왜군을 백제에 파견한 천지왕은 계체왕의 5세손이며, 민달왕의 증손자이며, 서명왕의 아들로 백제왕족이었던 것이다.  

일본 고대왕실의 족보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의 황족항목에 따르면, “대원진인(大原眞人)은 민달왕의 손자이며 백제왕족이다.(大原眞人, 出自 諡敏達孫 百濟王也).”라는 기록이 있다. 대원진인이 백제왕족이면 민달왕도 백제왕족이다. 따라서 민달왕의 조부되는 계체왕과 손자되는 서명왕도 백제왕족인 것이다. 천지왕은 서명왕의 아들이므로 그도 당연히 백제왕족이다.

신찬성씨록에는 26대 계체왕 때 왜왕실의 성이 바뀐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도 계체왕은 어느 왕의 몇째 아들이라는 기록도 없이, 그저 막연하게 남대적(南大迹=계체)왕은 응신왕의 5세손이며 언주인왕(彦主人王)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찬성씨록의 기록대로 왜왕실의 성이 계체왕 때 바뀐 것이다.

신찬성씨록으로 본 백제왕족인 왜왕들

1) 26대 계체왕 (繼體 507~531)
왜왕가를 백제왕족으로 새로 연 인물이다. 일본의 국보 2호인 인물화상경의 남제왕(男弟王)의 주인공이다. <일본서기>에 82세로 죽었다고 되어있어 무녕대왕의 동생인지 여부는 분명치 않으나, 일본학자들도 남제왕이 계체왕이라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형제국관계의 동생나라의 왕인 것임은 틀림없다 하겠다. 

▲&nbsp;33대 추고왕의 백제관련 기록인 부상략기


2) 29대 흠명왕 (欽明 539-572)
백제 26대 성왕은 직접 백제와 왜국을 넘나들었으며, 554년 이후에는 왕자인 위덕왕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고 완전히 백제를 떠나 왜국으로 건너가 왜왕인 킨메이왕(欽明, 흠명왕)으로 군림했다는 주장도 있다. (홍윤기교수 ‘일본 고대사 문제점의 새로운 규명’ [일본학] 24집, 동국대 일본학연구소 발행 논문집, 2005.12.)  

3) 30대 민달왕 (敏達 572-585)
즉위하자마자 백제의 대정(大井)에 궁을 지었다. 홍윤기교수에 따르면, 일본의 우에다 박사는 2007년 5월 14일 자택에서 815년 일본왕실에서 편찬한 <신찬성씨록>을 직접 꺼내서 보여주며 “일본 제30대 민달왕의 생부는 백제 제26대 성왕이며, 민달왕은 백제 제27대 위덕왕의 친동생이다. 백제 제24대 동성왕과 제25대 무령왕은 두 분 모두 일본에서 모국 백제로 귀국하여 백제왕이 되었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고 증언했다 한다.

4) 33대 추고여왕 (推古 592-628)
흠명왕의 딸로 오빠인 민달왕의 왕후가 되고 나중에 추고여왕으로 등극한다. 스이코 여왕은 찬란한 백제의 불교문화인 일본 '아스카 문화'를 일으킨다. 13세기에 편찬된 <부상략기>에 따르면, “여왕 원년 1월, 한창 건축 중이던 아스카데라 찰주를 세우는 법요 때 만조백관이 모두 백제 옷을 입었고 구경하던 사람들이 기뻐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5) 34대 서명왕 (舒明 629∼641)
민달왕의 손자로 의자왕의 누이인 부여보(나중에 황극왕과 제명왕)를 왕후로 맞아들인다. 11년 7월 “금년에 대궁(百濟宮) 및 대사(百濟大寺)를 만들겠다.”고 말하였고, 백제천(百濟川) 곁을 궁처로 하였다.
13년 10월 백제궁에서 승하하고, 궁 북쪽에 빈궁을 설치하였다. 이를 백제의 대빈(大殯)이라 한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의 저명한 사학자인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교수는 "조메이천황은 '구다라천황(百濟天皇)'이라고 불리었을 것이다." 라고 1970년 '신찬성씨록연구'를 발표했다.

 
위에서 보다시피 왜왕실의 혈통이 계체왕 때부터 백제왕족으로 확실히 바뀐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계체왕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기록을 남겼을까? 지금부터 왜왕가의 혈통을 바꾼 계체왕에 대해서 인물화상경을 통해 알아보기로 하자. (계체왕 이전의 왜왕의 혈통에 대해서는 나중에 응신대왕을 설명하면서 하기로 한다.)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이란 무엇인가?

일본 와가야마현 하시모토시에 있는 스다하찌만(隅田八幡)신사에 보관되다가, 1951년 일본정부로부터 국보 2호로 지정되어 현재 동경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인물화상경’이라는 유물이 있다. 이 거울에는 9인의 인물상과 48자의 명문이 뚜렷이 새겨져 있는데, 이 명문은 한일 고대사의 사실(史實)을 밝히는 중요한 금석문 자료의 하나이다. 

▲&nbsp;&nbsp;&nbsp;일본의 국보 2호인 '인물화상경'이 보관되어 있던 스다하찌만 신사

 

 
명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으며, 이 명문에 대한 일본 학계의 통설인 후꾸야마(福山)교수의 판독은 다음과 같다. “癸未年 八月 日十, 大王年, 男弟王, 在意紫沙加宮時, 斯痲念長壽
遺開中費直 穢人今州利 二人等, 取白上同二百旱, 作此竟”

“대왕년 계해년 팔월 십일에 사마(斯痲)는 의자사가궁에 있는 남제왕(男弟王)의 장수를 위해, 개중비직 예인 금주리와 다른 한 사람을 시켜 양질의 백동 이백간으로 이 경을 만들었다.” 

▲&nbsp;&nbsp;&nbsp;백제 무녕대왕이 남제왕에게 장수를 기원하며 하사한 인물화상경.&nbsp;한일고대사의 비밀이 담겨져 있었다.


일본 학계에서도 남제왕은 26대 계체왕이 확실시된다고 했다. 후꾸야마교수는 고사에 나오는 계체왕의 휘(이름)인 남대적(南大迹)는 놀랍게도 남제(男弟)의 훈인 ‘오오도’로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 계체왕은 남대적(南大迹 오오도)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타 사서에는 ‘오오도’와 발음이 비슷한 ‘오호도’의 여러 한자표기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이는 기타 사서의 기록에서 남제(오오도)를 고의로 지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후꾸야마교수는 계미년을 A.D 503년으로 단정했다. 그러나 거울을 남제왕(오오도)에게 하사한 대왕인 사마가 누구인지를 밝혀내지는 못했었다. 그러던 중 원광대학교 정치학과 소진철교수가 거울의 사마(斯痲)는 1971년 공주에서 발견된 백제 무녕왕릉의 지석에 있는 사마(斯痲)와 같은 이름이라는 것을 밝혀냈고, 이 거울은 무녕대왕이 남동생 격인 계체왕에게 하사한 일종의 신임장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무녕대왕의 즉위 다음해인 계미년(A.D 503년)에 무녕왕은 아우격인 남제왕(계체왕)에게 거울을 하사하면서 장수를 기원한 것이다. 무녕왕은 자신의 연호를 쓰지 않고 간지기년(干支紀年)을 사용했다는 것이 무녕왕릉의 지석과 인물화상경에 동시에 나타났다. 당시 거울(鏡)이나 칼(刀)을 하사함은 오늘날의 임명장이나 신임장과 같은 의미로 봐야 한다.

거울이 만들어진 503년으로부터 4년 후인 507년 남제왕의 신상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왜의 25대 무열왕이 후사없이 타계하자, 백제계 호족들에 의해 계체왕이 옹립되고, 수백향황녀를 왕후로 맞아들인다. 재야사학자 문정창씨는 이 수백향왕후의 출자(出自)를 <일본서기>에 자세히 적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그녀를 무녕왕의 딸로 보아 계체왕이 무녕왕의 사위이고, 흠명왕이 외손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하튼 계체왕으로부터 시작된 일본왕실의 혈통은 만세일계(萬世一係)의 전통을 세워가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현 일왕실의 혈통은 결국 백제 왕실의 혈통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2001년 아끼히도 현 일왕은 “옛 칸무(桓武: 781~806)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라고 공식 발언할 수 있단 말인가! 분명 아끼히도 일왕은 일왕가의 핵심을 말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사학계의 가장 큰 금기사항은 일본의 역사를 언급하는 것으로 어떠한 경우라도 그것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 한국의 사학계는 일제 때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한 조선사편수회의 맥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아직도 이 나리 식민사학계는 일제치하이기 때문이다.

일왕실의 혈통을 밝히는 일은 백제의 역사를 밝히는 일로 지금까지 잘못된 역사왜곡을 밝히는 일이기도 하다.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없애버린 백제 왕실의 비밀은 언제쯤 제대로 밝혀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본의 건국은 백제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일본은 아직도 백제왕가의 비밀이 밝혀지기를 극도로 꺼리고 있다.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왜 왕가 정체는?: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왜 왕가 정체는?

본글은장문이라아래와같이3부로나뉘어연재됩니다.(1부)백제부흥군을지원한왜왕가의정체는?(2부)칠지도와응신을통해본왜왕가의비밀은?(3부)백제의분국

www.pluskorea.net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7/02 [00:52]

칠지도와 응신으로 본 왜왕가의 비밀은?

일본 최초의 국가인 야마토왜를 세운 응신왕도 백제 왕족

  

본 글은 아래 3부작의 (2부)입니다. 
(1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왜왕가의 정체는?
(2부) 칠지도와 응신으로 본 왜왕가의 비밀은?
(3부) 백제의 분국인 왜의 위치는 어디인가?

2007년 하반기에 MBC에서 <태왕사신기>라는 24부작 판타지 역사드라마를 방영했다. 이 드라마는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군주였던 광개토태왕의 일대기를 그린다하여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드라마 제작비는 대략 약 450억원이 들었다고 발표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의 역사드라마에 일본 자금이 들어와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제작사측은 MBC에 24부작을 50여억원에 팔고, 나머지는 해외 수출 특히 일본 수출로 제작비를 충당하겠다는 의도였다. 일본 흥행이 성공해서 제작사가 돈을 벌었는지 손해를 받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여하튼 한국의 역사드라마 제작을 일본 자금으로 했다는 불상사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결국 드라마의 내용 즉 광개토태왕의 진실된 역사가 일본에 의해 훼손되어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잘못 전해진 것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제2의 광개토태왕 비문훼손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태왕사신기라는 드라마에 일본 자금이 개입되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아는 국민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러다보니 이 드라마가 연말에 시청자가 뽑은 드라마대상을 받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것은 이 나라 매국식민사학자들이 역사의 진실을 국민들에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우리나라 국민들의 역사인식의 수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의 자금이 <태왕사신기>에 들어온 이유는 단순한 상업적인 목적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일본의 배급사가 한국의 역사드라마가 일본에서 흥행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그 큰 돈을 투자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전혀 되지 않는다. 일본은 다른 목적이 있어 자금을 집어넣고는, 흥행을 위해서 일본 아줌마들에게 큰 인기가 있는 배용준을 캐스팅하라고 주문한다. 

상식적으로 볼 때, 배용준을 캐스팅해서 겨울연가와 같이 돈이 적게 들어가는 현대극으로   만들어도 일본에서는 흥행이 된다. 단지 흥행이 목적이었다면 돈이 많이 들어가는 역사드라마를 만들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왜 일본은 한국의 역사드라마에 엄청난 자금을 집어넣었을까?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당시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라이벌이었던 야마토왜국 응신왕에 대한 비밀이 한국드라마에서 언급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은 자금을 집어넣고는 금기시되어있는 응신왕에 대한 이야기를 아예 드라마에서 빼버렸다. 최초 백제 아신왕 역으로 캐스팅되었던 송일국씨가 도중하차된 것이 그 이유라 하겠다.

광개토태왕 당시 중국은 5호16국으로 잘게 쪼개져 있어 고구려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광개토태왕의 유일한 적수는 바로 중국대륙의 동부를 지배하고 있던 백제뿐이었다. 당시 백제는 왜의 응신왕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아신왕과 응신왕에 대한 이야기가 태왕사신기에서 빠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이 밝혀지기를 꺼린 응신왕이란 과연 어떤 인물인지 지금부터 하나하나 밝혀보기로 하겠다.

왜왕가의 혈통을 이룬 응신이란 인물은?

지난 주 (1부)에서는 응신왕의 5대손인 26대 왜왕인 계체왕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내려오는 현 일본왕실의 혈통에 대해 알아보았다. 일본왕실의 족보인 신찬성씨록과 일본의 국보인 인물화상경을 통해본 왜왕가의 핏줄은 백제에서 건너간 왕족임이 확실히 밝혀졌다. 그렇다면 계체왕 이전의 25명의 왜왕의 혈통은 어떠한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본서기>를 보면 신대(神代)를 거쳐, 1대왕인 신무(神武)왕으로부터 14대 중애(仲哀)왕까지 나오고 다음 신공왕후의 대를 거쳐, 15대 응신왕이 집권하여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왜를 세우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야마토왜국은 응신으로부터 시작하여 25대 무열왕까지 11명의 왕이 있었고, 무열왕이 후사 없이 죽자 백제 무녕대왕의 남동생 격인 계체왕이 추대된다.

그러한 응신왕의 혈통이 어떠한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실제로 <일본서기>를 보면 화려한 수사구어를 가진 일왕의 명칭이 15대 응신조에 와서 간단히 된 것은 왕조의 교체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응신왕의 즉위는 2주갑(120년)을 올린 390년으로 보아야 옳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있다.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왜를 세운 사람이 응신왕이면 그 이전에는 국가라는 형태가 없었다는 말인데 어떻게 응신왕이 15대 왕이 될 수 있는지?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그 이전의 14명의 왕과 신공왕후는 허구의 인물이란 말인가? 아니면 야마토왜 이전에 다른 형태의 국가가 있었단 말인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일본서기>의 초기 왕통에 대한 기록은 사실상 허구로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일본 역사에 있어 신(神)자가 사용된 왕은 1대 신무(神武)왕, 10대 숭신(崇神)왕, 신공(神功)왕후, 15대 응신(應神)왕 이렇게 네명 뿐이다. 이들은 모두 건국자 또는 정복자를 의미한다.

중국의 <남사>와 <양서> 왜전에 보면 “진 안제 때 왜왕 찬이 있었고, 찬이 죽자 동생 미가 섰고, 미가 죽자 아들 제가 섰고, 제가 죽자 아들 여가 섰고, 여가 죽자 동생 무가 섰다.(晋安帝時 有倭王讚, 讚死 立弟彌, 彌死 立子濟, 濟死 立子與, 與死 立弟武)”는 기록이 있다. 진안제의 재위기간은 AD 396~418년이다. 따라서 왜왕 찬은 응신왕이다. 참고로 맨 마지막 立弟武의 무는 무녕왕을 밀함이다.

<일본서기 신대 하의 제11단 신황승운>에 보면 신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협야(狹野)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협야는 ‘사노’로 발음되며 바로 찬(讚)의 음인  ‘산’에서 온 것이고,  이 찬(讚)을 훈독하면 응신의 이름인 호무다(譽田)의 ‘호무(譽)’와 일치한다. 즉 왜왕 찬(산)이란 이름을 음으로 읽으면 1대 신무왕의 협야(사노)가 되고, 훈으로 읽으면 호무다의 호무 즉 응신이 되는 것이다. 참고로 응신(應神)의 일본식 이름은 호무다(譽田)로 <신찬성씨록>에 보면 진(眞 또는 眞人)씨의 시조가 된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1대 신무왕은 바로 15대 응신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게서에 따르면 숭신왕은 담담허존이고, 신공왕후 이후 120년은 공백기(실제로는 백제왕의 직할통치기)이며 응신왕이 곧 시조인 천무왕이라는 이론이 있을 정도로 왜(일본)의 역사는 아주 짧다 하겠다. 결국 일본서기의 응신 이전의 14명의 왕은 허구의 왕이던가, 아니면 조그만 부족의 부족장이었기 때문에 <일본서기>를 편찬하면서 일본(왜)의 역사를 길게 하기 위해 조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14대 중애왕의 왕후였던 신공왕후가 섭정하여 69년 100세의 나이로 죽고 태자 응신이 즉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5대 응신왕은 신공왕후의 섭정 3년에 태자가 되고, 신공왕후의 사후 AD 270년 70세에 등극하여 110세에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응신왕은 66년간을 태자라는 신분으로만 있었고, 신공왕후는 아들 나이가 70살이 되도록 섭정한 모후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믿어야 하는지? 

▲&nbsp;&nbsp;&nbsp;1991년 출판되어 일본서기 속의 노래인 와가(和歌)가 한국어임을 밝힌 책


김성호선생은 1982년 <비류백제와 일본국가의 기원>에서 응신대왕을 비류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묘사하는 이론을 펼친 적이 있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론이라 그냥 흘려버리기에는 아까운 이론이었으나, 필자는 김성호선생의 이론은 두 가지 관점에서 오류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백제를 한반도로, 왜를 현 일본열도로 설정하여 역사의 이야기를 전개한 것이고
둘째는 온조백제(십제)와 비류백제(백제)를 별개의 국가로 본 것이다.

이 두 가지 점만 보완되었더라면 김성호선생의 이론은 천하제일의 이론이 아닌가 한다. 분명 현 일본열도는 백제와 관련 있던 당시 왜국의 땅이 아니다. 그 이유는 백제의 주무대는 한반도가 아닌 중국대륙의 동부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백제와 왜의 유기적인 교류도 결국 중국대륙에서 일어난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부에서 설명)

그리고 온조백제와 비류백제를 별개의 국가로 볼 것이 아니라 비류의 죽음 이후 하나의 백제 안에 온조계와 비류계가 공존하고 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실제로 백제에서 비류계로 분류되는 왕은 8대 고이왕, 9대 책계왕, 10대 분서왕, 12대 계왕, 22대 문주왕, 23대 삼근왕, 24대 동성대왕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김성호선생의 <비류백제와 일본국가의 기원>을 연구한 ‘잃어버린 한국고대사연구회’의 홍순주회장이 최인호씨의 <제4의 제국>이란 책과 TV 다큐멘타리를 비판한 주장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온조계는 북부여 해모수 계열이라 해(解)씨이고, 비류계는 졸본부여 계통으로 진(眞)씨를 쓴다. (이 이론대로라면 비류와 온조의 부계가 다르다) 온조계인 13대 근초고왕은 전왕인 계왕(비류계)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다. (중국 사서에는 당태종이 대륙백제의 역사를 말살하였기 때문에 선비족 모용수가 세운 전연이 부여족을 침략한 기사로 위장되어 있다고 한다).

계왕의 아들인 진정과 손자인 응신은 근초고왕을 피해 가야로 옮겨갔다가, 왜로 건너가 왜에 정착하며 세력을 규합한다. 근초고왕에게 계속 저항하던 비류계 진정/응신 세력은 1차로 AD 368년 근구수태자에게 밀려 가야인와 함께 왜로 도피하고, 2차로는 AD 396년 고구려 광개토태왕에게 패하여 응신 세력이 자신의 본거지 왜로 달아나, AD 405년 야마토 왜(大和倭) 정부를 세우게 된다.

가야인들은 광개토태왕의 공격 이전 수십년 전에 이미 북방 기마민족으로 표현되는 비류계 백제인인 진정/응신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참고로 <일본서기>에서는 응신의 아버지인 진정이 아라사등(阿羅斯等)과 동일 인물로서 아라가야왕으로 나온다. 그래서 AD 400년 호태왕 비문의 종발성 전투에서는 가야 + 왜의 연합군이 고구려 + 신라의 연합군과 대결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비류계 세력이 백제를 떠나 가야의 외래 지배세력이 되었기 때문에 현지 원주민인 가야 세력과 겹치게(Overlapping)되어 결과적으로 이 최인호씨의 “제4의 제국”이란 다큐멘타리에서는 응신을 토박이 가야인으로 착각하였고 이들 제4의 제국인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nbsp;&nbsp;비류계 진정과 응신은 온조계 근초고왕에게 쫓겨 가야로 도망온다. 근구수태자가 계속 추격하자 왜로 간다.


금관 가야국에서 초대 김수로 왕처럼 갑자기 외부에서 나타나 귀지설화의 주인공이 되어 의문시 되었던 그리고 현지 가야 지방을 정벌한 북방 기마민족의 정체는 온조계 근초고왕 세력에게 왕권을 빼앗긴 비류계 진정과 응신으로 대변되는 백제인이었다.

AD 350년 경 이들에게 패하여 왜로 이동한 첫번째 가야 세력이 숭신왕 계열의 가야민족이라고 추정되며, AD 396년 경 광개토태왕이 왜의 응신과 연합한 아신왕의 백제를 침공하였을 때 응신이 자신의 지배아래 있었던 가야인들과 함께 두번째로 왜로 이동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백제의 아신왕은 광개토태왕에게 백년노객이 되겠다는 맹세와 함께 항복해 버리고, 응신은 패해 왜로 돌아왔으나 앞으로 광개토태왕 때문에 백제로 돌아갈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A.D 405년 아예 왜 땅에 눌러앉아 국가를 세우게 된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왜(大和倭)인 것이다.

이러한 응신왕의 역사적 사실인 응신왕 = 백제인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일본은 태왕사신기에 엄청난 자금을 집어넣고는 응신왕의 이야기를 드라마에서 아예 빼버리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태왕사신기는 광개토태왕의 전쟁이야기인 아신왕과 응신왕의 이야기를 언급하지도 못하고, 두 자매 사이에서 방황하는 연애쟁이로 묘사된 것이다.

▲&nbsp;&nbsp;가야를 집중 조명한 최인호씨의 소설 '제4의 제국'

 
칠지도는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신임장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대왕을 꼽으라면 단연 13대 근초고대왕과 24대 동성대왕이다.  근초고왕은 당시 동북아의 강자인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국세를 확장하였다. 그리고 대륙 깊숙이 요서.진평지역 뿐만 아니라 대륙 남부인 왜 땅까지 정벌하는 등 많은 담로(식민지)를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그 식민지 중의 하나가 바로 왜(倭)였다.

근초고왕은 계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르고는 계왕의 아들인 진정과 응신을 계속 추격한다. 최초 가야지방으로 들어간 진정/응신 세력은 근구수태자의 공격을 받자 다시 왜 땅으로 쫓겨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 백제는 천하무적이었다. 왜로 도망간 응신은 같이 왜로 들어간 가야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반격의 기반을 마련한다.

백제 역시 왜로 들어간 응신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왜에 식민지(담로)를 건설한다. 이렇게 왜에 식민지를 건설한 백제는 왕자를 보내 왜왕으로 삼아 통치하게 한다. 부왕 근초고왕으로부터 왜왕으로 임명된 인물은 근구수태자였다. 그러면서 그 신임장으로 하사한 것이 그 유명한 칠지도이다. 칠지도란 과연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일본 나라현 이소노가미(石上) 신궁(神宮)에는 고대로부터 전해지고 있는 한자루의 희귀한 칼이 있는데 그 이름은 칠지도(七支刀)라 한다. 이 칼은 75cm 되는 주 몸체 양 옆에 각각 3개의 가지칼(支刀)이 있는데  그 형태는 사슴뿔이나 나뭇가지 모양의 창(槍)과도 같은 이상한 형태의 칼이다.

이병도도 이런 형태의 칼을 중국에서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 칼이 주목을 받은 것은 형태도 형태이지만, 바로 그 칼에 새겨져 있는 명문 때문이다. 명문은 앞면에 34자 뒷면에 27자 도합 61자이다. 이 중 7자는 글자의 훼손이 심해 전혀 알아볼 수 없으며, 다른 8자는 글자의 획이 확실치 않을 뿐 글자체는 그런대로 알아 볼 수 있었다.

(앞면) 泰X四年 X月十六日 丙午正陽 
         造百鍊銅七支刀 生辟白兵 
         宜供供 侯王XXXX作

(뒷면) 先世以來 末有此刀 百慈王世X 
         寄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일본학자들의 통설(通說)은  '泰X'를  중국 황제의 연호로 단정하고 동진의‘太和’라는 연호를 끌어들였다. 이는 369년으로 <일본서기> 신공기 52년조의 ‘칠지도헌상’의 기사와 맞는다는 억지 이론이다. 여하튼 일본 금석 명문해석의 대가인 후꾸야마(福山)교수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태화 4년 정월 십일일의 순양일중의 때에 백련의 철로 칠지도를 만든다. 이것으로서 백병을 벽제(辟除)하고 후왕의 공용(供用)에 마땅하고.....만든다.
선세(先世) 이래 아직 본 일이 없는 이 칼을 백제왕과 왕세자는 같이 삶을 임금의 은혜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왜왕의 상지(上旨)에 의해서 만드니 길이 후세에 전할 것이다.

후꾸야먀교수의 해석은 있지도 않은 중국의 연호를 끌어들여 <일본서기의 신공기>를 합리화하는 해석이다. 학자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해석으로 상상에 불과한 것이다. 일본의 사학을  따르는 이병도조차 “칠지도 명문의 泰자 아래 글자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중국 연호가 아닌 백제의 연호이다.”라는 단호한 주장을 했다.   

▲&nbsp;&nbsp;&nbsp;나라현 이소노가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 백제대왕이 왜왕에게 하사하는 신임장의 증표이다.


칠지도의 명문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하행문(下行文)의 형식으로 되어있다. 즉 대왕(황제)인 백제왕이 후왕(제후)인 왜왕 지(旨)에게 하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泰X 四年’은 중국의 연호가 아니다. 여러 해석이 있으나 원광대 정치학과 소진철교수의 해석이 가장 눈길을 끌고 정확한 것으로 본다.  

泰X사년 X월십육일 병오일의 정오에 무쇠를 백번이나 두들겨서 칠지도를 만든다.
이 칼은 백병(재앙)을 피할 수 있어 마땅히 후왕에게 줄만하다.

선세이래 아무도 이런 칼을 가진 적이 없는데 백자왕은 세세로
기생성음(吉祥語)하므로 왜왕 지를 위해서 이 칼을 만든다. 후세에 길이 전할 것이다.

소교수는 백제왕이 만일 중국의 연호를 쓰는 제후급의 왕이었다면 왜왕 지를 후왕으로 부르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왜왕 지(旨)는 외자를 이름으로 쓰는 백제왕가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여러 근거를 이유로 칠지도는 백제의 대왕인 근초고왕이 왜로 떠나가는 제후왕인 왜왕 지를 위하여 제작 하사한 것으로 본다. 참고로 백제대왕들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백제의 고문서가 1996년 9월 일본 큐슈 미야자끼현의 미카도(神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독자들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아니 사학과 교수도 아닌 정치학과 교수가 어떻게 백제와 왜의 역사에 대해 논할 수 있느냐? 그거 믿을 수 있는 학설이냐?”라는 것인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소진철교수의 이론은 백제와 왜의 역사적 관계를 정치학 교수의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사학과 교수들보다 더 신빙성이 있다 하겠다.

한국의 사학계는 일제 때 조선사편수회를 계승하며 그 이론인 반도사관을 그대로 추종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일본의 역사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절대 금기사항으로 되어 있다. 즉 한국의 식민사학계는 일본이 정신적 이론적 고향이기 때문에 일본에게 불리한 이런 주장을 절대로 할 수가 없으며,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폄하하면서도 일본 역사에 대해서는 불리한 이론을  말하지 않는 특수성이 있다. 

백제와 왜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일본 학계는 백제가 왜의 신속을 받았거나, 서로 문화를 주고받은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우리 학계는 백제가 왜에 선진 문명을 전수해준 정도로 보거나, 삼국이 모두 왜와 막연하게 상당히 깊은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고 있다. 상세한 내용은 금기사항이라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일본(왜)의 고대유물인 ‘칠지도’와 ‘인물화상경’의 연구로 백제와 왜는 대왕국과 후국 즉 황제와 제후의 정치적 관계였다고 소교수는 설명하고 있다. 이 연구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된 양국 관계의 기록과도 일치하고 있어, 특히 일본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백제와 왜의 관계를 새로운 시각에서 재정립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왜는 백제의 담로로부터 출발

일본(왜)의 출발은 담로로부터의 출발로 보인다. <일본서기>의 신대 제4단 육팔주생성(六八州生成)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아이를 낳을 때에 이르러서 먼저 담로주(淡路州)를 포(胞)로 하였다. 뜻이 불쾌하여 고명(故名)으로는 담로주라 하니 다음으로 대일본(야마토)라 한다." 이 문구는 일본의 역사는 (백제의) 담로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아달라왕 4년(157년) 동해의 빈(濱)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가 있어 부부가 되어 살았는데, 세오녀가 후에 신공왕후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즉 세오녀 = 신공왕후 = 비미호(卑彌呼)의 관계가 성립된다고 김성호선생과 문정창선생은 주장한다. 두 사람의 이름에 다 까마귀 오(烏)자가 있음을 눈여겨 볼 일이다.

13대 근초고왕 때는 왜왕으로 근구수태자가, 14대 근구수왕 때는 침류태자가, 15대 침류왕 때는 아신태자가 왜왕으로 갔다. 즉 대대로 태자들은 백제의 왕위에 오르기 전에 왜에서 정치 실습을 미리 한 것으로 보인다. 아신태자가 왜에 간 것을 두고 <일본서기>에서는 “응신 15년 백제왕이 아직기를 보내 양마 2필을 바쳤다”고 은유적으로 기술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 일본에 백조삼능이라는 능이 있는데, 이 능의 주인은 바로 근초고왕, 근구수왕, 침류왕이라 한다. 당시 왜는 일본열도가 아니라 대륙의 남부나 큰 섬에 있었으므로, 이 능은 나중에 이장했거나 가묘로 보여진다. 여하튼 백제의 두 영웅인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 응신을 정벌하다가 오히려 반격을 당해 왜 땅에서 붕어한다.

침류왕이 붕어하자 백제에서는 아신태자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숙부인 진사가 왕위에 오른다. 이에 격분한 아신태자는 응신과 결탁하여 왜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로 온다. 아신은 응신에게 도움을 청하며 아신은 백제의 왕에 그리고 응신은 왜왕에 나누어 오르기로 서로 밀약을 맺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결국 숙부인 진사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아신왕은 빼앗긴 북방의 요새인 관미성을 되찾으려 했으나 광개토태왕에게 매번 패하고 만다.

396년 병신년은 당시 동북아의 정세가 뒤바뀌는 해였다. 광개토태왕은 직접 수군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백제의 수도를 공격했다. 백제의 주력군을 북방경계선에 배치한 아신왕은 광개토태왕의 후방기습공격에 허를 찔려 패하고 만다. 결국 아차산에서 백년노객이 되겠다는 맹세와 함께 광개토태왕에게 항복하고 만다. 

 
응신은 정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변복을 하고 가야로 들어갔다가 왜로 도망간다. 이것을 <일본서기>에서 기록하기를, “16년 왕인이 왔다. 태자의 스승으로 하였다. 여러 전적을 왕인에게서 배웠다.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왕인은 서수(書首) 등의 시조다.”라는 기록인데 응신(應神)과 왕인(王仁)은 일본 발음으로 다 ‘오오진’으로 발음되어 동일인물이라고 김성호선생은 지적했다. 

백제의 아신왕이 고구려 태왕에게 항복하는 절대절명의 국가적 위기 속에서 <일본서기>처럼 백제가 한가로이 왕인을 보내 문물을 전했다는 것은 솔직히 이해하기 곤란한 면이 있다. 그래서 정황적으로 볼 때 김성호선생의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 기원>의 내용은 상당 부분 맞을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태왕의 가공할 위력 때문에 응신은 백제로 돌아갈 꿈을 접고, 아신왕이 붕어하는 해 인 A.D 405년 왜 땅에서 독자적으로 나라를 세우는데 이것이 바로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왜(大和倭)인 것이다. 즉 일본의 역사는 바로 백제왕족인 응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는 계속 백제왕족과 그 후손이 왕위에 오르면서 오늘날까지 내려온 것이다.

▲&nbsp;&nbsp;법륭사의 비밀문서인 '성예초'에는 백제 성왕이 왜왕을&nbsp;겸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백제 근초고왕은 귀족인 진모진을 왜에 파견하여 일본 최초의 백제조복(朝服)을 만들게 한다. <부상략기> 기록에 따르면, 당시 15대 오오진(응신)왕이 일본왕 최초로 백제조복을 입었으며, 그 후에 대대로 일본왕들이 입었고, 33대 스이코여왕 등극 때에는 참여한 만조백관 모두가 백제 옷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백제와 왜와의 명령체계는 백제대왕 → 백제왕자 → 실권자 소가씨(또는 왜왕)이었다. <일본서기>기록에 따르면  당대 최고실권자인 소가우마코(蘇我馬子)는 일본에 온 백제왕자에게 향응을 제공하고, 백제왕자와 친히 대화(보고)했다는 기록을 볼 때 백제왕이 대리인인 백제왕자를  통해 왜국을 간접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소가(蘇我)씨 가문은 당대 실권자로서 사실상 최고권력을 약 100년간 누리는데, 미즈노 유우의 저서 <천황가의 비밀>에 “이 소가씨 가문은 본래 한국에서 건너온 가문이다”라고 되어있다. 왜왕도 백제왕족이고 최고실권자도 백제귀족이면 당시 백제의 일본에 대한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와 왜국의 정치적 관계는 단순한 중앙정부와 지방정권이라기 보다는 매우 가까운 형제국 이상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즉 “왜국(일본)은 작은 백제”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일본인은 百濟라는 글자를 발음대로 ‘햐꾸사이’라고 발음하지 않고 ‘구다라’라는 고어로 발음하고 있다. ’구다라‘는 대국(大國)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아직도 왜 그렇게 발음하는지 그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고 있다.

▲&nbsp;&nbsp;&nbsp;&nbsp;&nbsp;백제가 멸망한 이후 8세기 중반 의자왕의 아들 부여용(扶餘勇)의 자손들이 만든 백제왕신사.&nbsp;역대 백제왕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아직도 일본에는 백제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의 긴키(近畿)지방의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와 백제사(百濟寺)가 가장 유명하다. 백제왕신사는 백제가 멸망한 이후 8세기 중반 의자왕의 아들 부여용(扶餘勇)의 자손들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역대 백제왕들의 위패가 모셔졌다고 한다. 그리고 오오사카(大阪)에는 백제역(百濟驛), 백제천(百濟川), 백제교(百濟橋), 백제대교(百濟大橋) 등이 있으며 나라(奈良)에도 백제촌(百濟村) 등이 있다. 

 
고구려계와 신라계도 왜왕이 된 적이 있다.

백제계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계도 왜왕에 오른 적이 있다. 5세기 초반 고구려, 신라, 왜국 간에 다년간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고구려계의 왜왕으로는 18대 반정(反正)왕이 있다. <일본서기>에 반정왕은 담로궁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고구려 군이 왜군을 추적하여 담로도에 쳐들어가 승리한 고구려의 세력이 백제계 이중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다. 

고구려계 반정왕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라계 윤공(允恭)에게 제거당한 것으로 보인다. 19대 윤공왕은 씨성(氏姓)을 바로잡아 고구려세력을 제거한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윤공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고 걱정하여 사절단과 조물을 보내고 그들이 행한 상례 등을 보면 윤공왕이 신라계였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민족사학자 문정창선생은 설명한다.

신라계 윤공왕 이후 20대 안강왕이 죽은 후 윤공왕의 5자를 칭하는 백제계 대박뢰(大泊瀨)황자가 재빨리 행동을 개시하여 왕위에 오른다. 21대 웅략왕부터는 다시 백제계로 왕권이 넘어간다. 이가 곧 송나라 순제에게 상표문(上表文)을 바친 왜왕무(倭王武)로 나중에 백제로 돌아와 무녕왕이 된다.   

이와 같이 역사가 짧은 섬나라 일본이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상의 나라인 조선을 식민지배 하려면 조선의 역사말살이 필요했다. 이런 역사를 그대로 남겨두어 조선인들이 이러한 백제와 왜의 역사를 알게 된다면 조선을 영원히 식민지로 지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일왕 특명으로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는 정책을 펴게 되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설치되는 기관이 바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였다.

그런데 해방 6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 한국의 사학계는 일제시대 조선사편수회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조상의 역사를 엉터리로 왜곡하고 있다. 단군은 아직까지도 신화이며, 삼국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반도사관이 아직도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다보니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에 전혀 대응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의 역사 이론 자체가 엉터리인데 어떻게 중국과 일본의 이론이 잘못된 것이라도 말할 수 있겠는가!!!

위에서 설명한 백제와 왜의 모든 상황은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아닌 중국대륙에서 일어난 상황이었다. 다음 주에  ‘백제의 분국인 왜의 위치는 어디?’가 연재됩니다.

칠지도와 응신으로 본 왜왕가의 비밀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칠지도와 응신으로 본 왜왕가의 비밀은?

본글은아래3부작의(2부)입니다.(1부)백제부흥군을지원한왜왕가의정체는?(2부)칠지도와응신으로본왜왕가의비밀은?(3부)백제의분국인왜의위치는어디인가

www.pluskorea.net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7/08 [12:58]  

백제의 분국(分國)인 왜의 위치는 어디?

왜의 위치는 일본열도가 아닌 양자강 이남의 대륙과 큰 섬

 

본 글은 아래 3부작의 (3부)입니다. 
(1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왜왕가의 정체는?
(2부) 칠지도와 응신으로 본 왜왕가의 비밀은?
(3부) 백제의 분국(分國)인 왜의 위치는 어디?

지금까지 (1부)와 (2부)에서 백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왜왕가(倭王家)에 대해 알아보았다시피, 백제와 왜의 관계는 일반적인 황제국과 제후국의 관계가 아닌 가까운 직계 혈통으로 맺어진 분국(分國)이라는 단어가 더 정확한 표현이라 하겠다. 더 나아가 왜왕은 백제의 왕족이었으므로 당연히 ‘왜 = 작은 백제’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작은 백제인 왜라는 나라는 도대체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을까? A.D 670년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기 전 일본은 왜 또는 왜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식민사학계에서는 이 왜의 위치를 일본열도로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매국적인 식민사학이론인 반도사관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는 왜가 당연히 일본열도에 있었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말해 일제가 망국의 사관인 반도사관을 이 땅에 정착시킨 이유가 바로 왜가 일본열도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일왕 특명으로 조선사편수회가 만들어지고 수많은 역사조작이 이루어진 것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으나, 그에 버금가는 다른 이유의 하나가 바로 왜의 위치를 일본열도로 정착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본은 서기 390년이 되어서야 응신왕에 의해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왜(大和倭)가 세워질 정도로 원래 역사가 짧은 민족이다. 왜는 응신왕 이후로 줄곧 백제의 왕실에 의해 통치되다가 (물론 잠시 고구려계와 신라계가 왜왕을 한 적도 있음), 백제와 고구려가 망하자 670년 국호를 일본으로 바꾼다. 따라서 670년 이전은 왜(倭)라 하고 이후는 일본(日本)으로 불러야 한다.

▲&nbsp;&nbsp;&nbsp; 663년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서기>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 국인이 서로 말하길&nbsp;&ldquo;주유가 항복하였다.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다.&nbsp;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또 갈 수가 있겠는가? " 왜는 백제의 분국이었던 것이다.

 
그러함에도 <중국 25사>에는 670년 이후 공식적인 외교문서 상에는 일본국이란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예전부터 통상적으로 쓰던 왜인(倭人)이란 명칭도 사서에 많이 등장한다. 1404년 명나라는 그동안 국가적인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던 현재의 일본(大和州)에게 "일본"이라는 국호를 주면서 동이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양자강 이남에 있었던 왜의 역사까지 현재 일본에 주어버린다.

따라서 민족사학자 오재성선생은 현재 일본의 역사를 아래와 같이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다 일본으로 부르고 있어 혼돈이 되고 있으나, 기간에 따라 아래와 같이 셋으로 분명하게 나누어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예로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도 ‘임진신일본란’으로 불러야 역사적으로 맞지 않겠는가라는 논리이다. 

1) 670년 이전의 왜(倭)의 시대 (대륙 남부에 위치)
2) 670 ~ 1404년의 일본(日本)의 시대 (대륙 --> 대만 --> 점차 열도로 옮아감)
3) 그리고 1404년 이후의 신일본(新日本)의 시대 (현 일본열도에 정착)


<한단고기> 기록으로 본 왜의 기원

왜(일본)의 역사를 알려면 <일본서기>를 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건 모르고 하는 소리로 필자가 일본서기를 정독해 본 결과 일본서기에는 왜의 기원조차 제대로 기록이 되어 있지 않고 15대 응신왕 전후의 왕통이 많이 조작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게다가 670년 국호를 일본으로 바꾼 사실도 기록이 되어있지 않다. 한마디로 <일본서기>는 그 신빙성이 의심되는 사서인지라 그것을 진짜 왜의 역사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많다고 하겠다. 

<한단고기>가 일본에서 출간되어 그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자 많은 일본인들이 환호성을 올리며 기뻐했다. 일본인들의 조상의 뿌리를 잘 밝혀주어 일본민족이 역사 없는 민족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 책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한단고기로 인해 일본의 기원을 약 1,000년 가까이 끌어 올릴 수 있게 되었다고 여긴 것이다. 과연 그런지 살펴보기로 하자.

<한단고기 단군세기> “36세 매륵단군 갑인 38년(B.C 667년) 협야후 배반명(陜野侯 裵幋命)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엔 삼도(三島)가 모두 평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고조선이 바다의 도적인 왜를 정벌한 기사로 인정해 일본인들의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삼도란 본시 일본열도를 나타내는 말로 여겼기 때문에 평정당하고 안 당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때까지 열도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1대 신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일본서기>에 협야(狹野 사노)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로 인해 1대 신무왕이 응신왕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다. 비록 협야의 협자가 陜과 狹으로 서로 다르지만 같은 인물이라는 가정 하에, 여하튼 <한단고기>로 인해 그 같은 주장을 불식시키고 일본의 기원을 B.C 7세기까지 끌어 올릴 수 있다고 본 것이기에 환호를 올렸던 것이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고주몽와 함께 동부여를 탈출해 졸본으로 같이 오는 사람들 중의 한명인 “협보(陜父)는 남한으로 도망쳐 마한의 산중에 살았다. (중략) 협보는 장혁을 알고 무리를 유혹하여 양곡을 도둑질하여 배에 싣고 패수를 따라 내려와 해포로부터 몰래 항해하여 곧바로 구야한국(拘耶韓國)에 이르니 곧 가라해(加羅海)의 북안이다. 여기서 수개월 동안 살다가 아소산으로 옮겨가서 기거했다. 이를 다파라국(多婆羅國)의 시조라 한다. 


뒤에 임나를 병합하여 연정을 세워 이를 통치케 하다.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뭍에 있었다. 처음 변진구야국의 사람들이 모여 산 적이 있었는데 이를 구야한국이라 한다. 다파라를 다라한국이라고도 한다. 홀본으로부터 와서 고구려와 일치감치 친교를 갖고 있었으므로 늘 열제의 통제를 받았다. 다라국은 안라국과 이웃하며 성이 같다. (이하생략)”

왜의 위치에 대해 <한단고기>에 적혀 있다. 우선 협보(陜父)가 구야한국으로 가기 전 남한으로 도망쳐 마한의 산중에 살았다는 마한은 기준이 위만에게 패해 남하해 세운 한(韓)이 있던 곳이다. 번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은 연나라에서 온 정치망명객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조상인 기자가 살던 땅인 서화(하남성)와 몽성(안휘성) 근처인 해대(海岱; 대는 태산)의 해(海) 지방으로 남하하여 한(삼한)의 왕이 되었는데 진국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유.연.제.노.오.월(대륙의 동부) 지역에 고구려.백제.신라와 왜가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50여국의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이중 사로(泗盧)-->사로(斯盧)-->신라(新羅)로 되고, 백제(伯濟)-->백제(百濟)로 발전된다. 비미국과 구노국은 나중에 왜(倭)로 발전된다. 

▲&nbsp;양자강 이남 오.월의 위치가&nbsp;왜가 있던 곳. 양자강 이남 월 지역에 회계라는 지명이 보인다.


참고로 사로의 泗는 泗水 지역으로 장보고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이고, 海 지방은 산동성 동남부와 강소성 북부가 만나는 지역이다. 황하와 양자강 사이에 흐르는 회수(淮水)라는 강이름은 기준의 준(準)자에서 따온 것이라고 민족사학자 오재성선생은 설명한다. <삼국지>에 회당작준 견전세국전주(淮當作準 見前歲國傳注)라는 주가 있어 회수의 기원이 기준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아주 중요한 기록은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뭍에 있었다.”로 이것으로만 봐도 왜는 분명 육지(뭍)와 섬(바다)에 걸쳐 있었지, 결코 섬나라인 일본열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임나는 한반도 남부가 절대 될 수가 없기에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은 한단고기로 인해 허구라는 것이 밝혀졌다 하겠다.  


“왜는 회계군(會稽郡)의 동쪽 동야현의 동쪽에 있으며 배로 9,000리를 건너 나패(那覇)에 이른다. 또 다시 천리를 건너서 근도(根島)에 이르른다. 근도는 역시 저도(柢島)라고도 한다. 때에 구노인(狗奴人)은 여왕과 서로 싸워 길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 구야한국으로 가고자 하는 자는 진도(津島) 가라산(加羅山) 지가도(志加島)로부터 비로서 말로호자(末盧戶資)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동쪽 경계는 곧 구야한국의 땅이다. (중략)

오.월(吳.越)은 본래 구려(九黎)의 옛 읍이며, 산월(山越)과 좌월(左越)은 모두 그 후예가 나뉘어 산 땅이다. 항상 왜와 왕래하며 무역하여 이익을 얻는 자가 매우 많았다. 진 때 서불(徐巿)은 동야현의 해상으로부터 곧바로 나패에 이르러 종도(種島)를 거쳐 뢰호내해(瀨戶內海)를 따라 처음으로 기이(紀伊)에 이르렀다. 이세(伊勢)에 옛날 서복(徐福)의 무덤이 있었다. 단주(亶州)는 서복이 있던 곳이라고도”

<한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서 왜의 위치를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 회계군은 절강성에 있는 지명으로 그 동쪽인 동야현의 동쪽이 바로 왜였던 것이다. 회계군이란 기록은 아래에 나오는 <중국 25사>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오.월은 왜와 항상 왕래하는 곳이라 했다. 오와 월은 대륙의 남부지방(현 광서장족자치구, 광동성, 복건성, 절강성)을 통칭하는 지역이다. 즉 오.월이란 양자강 이남에서 대륙의 동남부 지역을 말함이다. 

진사황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쪽으로 배를 타고 떠난 인물인 서복의 무덤이 현재 일본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서복은 현 일본 열도에 간 적이 없기 때문에 그 무덤들은 가짜임에 틀림없다. <한단고기>에도 나와 있듯이 서복은 분명 절강성과 복건성/광동성 앞바다에서 왔다리 갔다리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서복이 일본열도에 왔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일본은 현 일본열도에 서복의 무덤을 만들었던 것이다. 즉 왜의 위치가 대륙 남부가 아니고 일본열도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한 짓이나 어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겠는가?

이어서 <한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를 보면, “일본은 옛날 이국에 있었나니 역시 이세라고도 한다. 왜와 이웃하였다. 이도국은 축자에 있으며 곧 일향국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에 속하며 그 남동은 안라에 속한다. 안라는 본래 홀본사람이다. 북쪽에 아소산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에 들어갔는데 고구려와 이미 친교를 맺었다. ...(중략)...

때에 왜인들은 갈리어서 산도에 근거하여 살며 각각 100여국이 있었다. 그 가운데 구야한국이 가장 크니 본래 구야본국 사람이 다스렸던 곳이다. 해상 선박은 모두 종도에 모여 교역했으니 오.위.만.월의 무리들 모두 통상했다. 처음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대마국에 이르는데 사방이 400여리쯤 된다. 또 다시 바다를 건너 천여리쯤 가면 일기국에 이르는데 여기는 사방 300여리쯤이다. 본래 사이기국이라 했다. 여러 작은 섬들이 모두 조공했다. (이하 생략)

이 기록에서 이상한 점은 일본이 왜와 이웃한 별개의 나라로 나온다는 사실이다. 대진국(발해)이 존재했을 당시에는 왜가 이미 670년에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고 한참이 지난 후인데 일본과 왜가 이웃했다고 하니 이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여하튼 양자강 이남 대륙의 동남부인 오.월과 통상했다고 하니 거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왜(일본)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겠다. 현재의 일본열도를 여기에 대입하는 것은 분명한 넌센스라고 할 수 있다.

<중국 25사> 기록으로 본 왜의 위치

중국 25사의 기록에 보면 분명 왜는 고구려/백제/신라와 함께 동이(東夷)에 포함되어 있다. 즉 같은 계통의 민족이란 말이다. 실제로 현 일본인들이 쓰는 일본어는 어순이 우리와 같은 우랄알타이어계로 중국어를 쓰는 지나족과는 어순이 확연히 구별된다 하겠다.

그리고 왜왕들은 백제왕족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함인가? 필자는 지금까지 백제의 위치를 대륙의 산동성으로 비정했다. 산동성에 있던 백제가 왜와 그렇게 밀접한 관계를 가지려면 왜의 위치는 현 일본열도가 아니라 백제와 가까운 대륙으로 와야 한다. 그리고 역사 기록도 왜가 대륙 남부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동이 왜가 대륙 남부에 있었다는 역사 기록을 놓고 지금의 일본열도에서 배를 타고 양자강 이남에 진출하여 오랫동안 광대한 지역을 다스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참으로 일본인들은 역사 날조에 능한 민족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만일 열도에 있으면서 대륙을 경영할 정도의 항해술을 가졌더라면 아마 당시 왜는 세계를 제패하고도 남음이 있었으리라!!! 분명한 것은 670년 이전의 왜는 일본열도와 전혀 상관없는 국가였던 것이다. 역사의 기록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나라를 중심으로 왜의 위치를 표시한 기록도 있지만 너무 광범위해 방위를 알기 어려운 점이 있어 인용치 않겠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나마 확실한 지명을 중심으로 해서 왜의 위치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삼국지 동이전>과 <진서> <남제서>에 “왜인은 대방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倭人在帶方東南大海中)”라고 기록하였고, <양서>의 동이전에는“왜는 스스로 태백의 후손이라 말하고 그들의 풍속은 모두 문신을 하였으며 대방에서 거리가 12,000리에 있고 대개 회계의 동쪽에 있다 (倭者自云太佰之後俗皆文身去帶方萬二千里大抵在會稽之東)”고 기록하였다. 

여기서의 회계란 지명은 절강성에 있는 지명으로, “왜는 회계군(會稽郡)의 동쪽 동야현의 동쪽에 있다”는 위의 <한단고기>의 기록과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왜인의 풍습은 몸에 문신을 하는 것이라 기록했는데, 실제로 홍콩 주변의 광동성 주민들의 풍습도 몸에 문신을 많이 하고 있다. 그리고 기준이 되는 대방의 위치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한국의 매국식민사학계는 한사군의 하나였던 이 대방의 위치를 반도사관에 찌들어 황해도로 비정하고 있다 (물론 인접한 석문이 어디라는 정확한 설명도 없다). 그러나 그 대방의 위치는 결코 한반도의 황해도가 될 수 없다. 대방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있으나 가장 확실한 것 하나만 들기로 하겠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 보면 “문무왕이 백제의 옛 땅을 점령하여 차지하니 당 고종이 크게 노하여 군사를 보내어 토벌케 하였다. 그리하여 당군은 말갈병과 함께 석문(石門)의 들에 진영을 만들고, 신라왕(문무)은 장군 의복. 춘장 등을 보내어 방어케 하였는데 대방(帶方)의 들에 군영을 설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대목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후 당나라와 전투를 벌여 당나라를 백제 땅에서 몰아내는 광경이다. 여기서 석문(石門)이라 함은 현 하북성의 성도인 석가장(石家庄)이고, 대방은 석문 아래로 접한 곳으로 황하와 가까운 곳이며 초기 백제의 도읍지와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 

사서 기록의 기준이 되는 대방의 위치를 확실히 알고 나면 왜의 위치가 보인다. 대방의 동남쪽이면 대충 가까운 곳부터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순이다. 여기서 백제와 신라의 영역을 빼면 절강성 쪽이 된다. 게다가 절강성은 회계군이 있는 곳이므로 그 조건이 충족된다 하겠다.  

▲&nbsp;&nbsp;&nbsp;왜의 기준이 되는&nbsp;대방은 하북성에 석문(석가장)과 붙어잇는 곳.&nbsp; 대방의 동남쪽에 왜가 있었다.


이렇게 대방의 위치를 통해 왜의 위치를 확실히 밝혔음에도 “아직도 왜는 일본열도로 일본열도도 대방의 동남쪽은 동남쪽이다”라고 우기는 식민사학자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 만일 일본열도가 왜였다면 많은 사서의 기록이 왜는 대방의 동남쪽이 아니라 대방의 동쪽 대해중이라고 해야 방위상으로 맞지 않을까? 여하튼 이런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펴는 일본족(?)들을 위해 아래와 같이 "왜"에 대한 사서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겠다. 

(1) 삼국지 동이전
회계 주애 회계동치지동 담이(會稽 朱崖 會稽東治之東 憺耳)가 함께 있으며,  이 모두 대방(帶方)의 동남쪽에 있다.

(2) 후한서
회계동야지동 회계동야현 주애 이주 단주 봉래가 담이(會稽東冶之東 會稽東冶縣 朱崖 夷州 亶洲 蓬萊가 憺耳)와 함께 기록되었다.

(3) 양  서
회계지동(會稽之東) 주애(朱崖)와 함께 담이(憺耳)가 기록되어 있고, 대방지왜(帶方至倭)가 기록하고 있다. 

(4) 북  사
회계동여담이(會稽東與憺耳)의 기록이 있고 이주(夷州)의 기록이 있는데 낙랑대방 에서 떨어져 있었다고 하였다. 

(5) 남  사
주애(朱崖)와 함께 담이(憺耳)가 기록되어 있다. 

위 사서의 내용 중 ‘왜’ 관련 지명을 최고(最古)의 중국고지도인 ‘우적도’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우측부터 보면
- 회계(會稽)는 양자강 이남 절강성에
- 남월(憺耳本南越地 - "담이는 본래 남월지 이다"),
- 해남도에 있는 주애(朱崖),
- 진번(珍, 眞番 - "파담이진번군(罷憺耳眞番郡)")
- 이주(夷州)는 "대만"이다. 
 

▲ &nbsp; &nbsp; &copy; 성훈


어떻게 왜(倭)와 관련된 이러한 지명이 양자강 이남에 남아 있는가? 결국 이 지역은 A.D 670년 왜가 일본으로 국호를 변경하기 전 왜의 땅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왜인의 두드러진 풍습중 하나가 ‘斷髮文身(용문신)’ 습관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시아에서 문신습관은 홍콩지역이 제일 많이 남아 있다. 그러한 홍콩 주위에 주애, 담이, 이주, 회계, 남월, 주산, 태 등 왜와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겠는가!!! 

▲&nbsp; 양자강 이남 오.월 지역에 있는 왜의 지명들.


왜가 대륙 남부 또는 큰 섬에 있었다는 가장 확실한 근거로는 <천하고금대총편람도>를 들 수 있겠다. 이 지도는 1666년 제작된 지도로 현재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지도에 보면 대마도와 일본국이 현 일본 열도에 그려져 있지 않고, 중국의 양자강 이남 동부 해안 대만 땅에 그려져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nbsp;&nbsp;1666년 제작된 <천하고금대총편람도>에 일본국의 위치가&nbsp;현 대만&nbsp;위치에 그려져 있다.

 
일식기록분석으로 본 왜의 위치

사서의 기록으로 일본(왜)이 언제 대륙에서 일본 열도로 갔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아래 박창범 교수의 일본서기의 일식기록분석이 주는 결론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하겠다. 박창범교수는 편의상 일본사서의 일식기록을 시대별로 아래와 같이 분류하였다.

ㄱ) 709년 이전의 야마토시대의 일식 10개
ㄴ) 710 ~ 792년의 나라시대의 일식 36개
ㄷ) 794 ~ 1,183년의 헤이안(平安)/후지하라(藤原)시대의 일식 132개

ㄹ) 1,189 ~ 1,326년의 카마쿠라(鎌倉)시대의 일식 38개
ㅁ) 1,343 ~ 1,599년의 일식 80개
ㅂ) 1,600 ~ 1,899년의 일식 119개

이 6개의 시대구분 중
ㄱ)의 결집 위치는 남지나해상이고,  결집도가 매우 높아 실제로 관측된 자료로 보인다.
ㄴ) 일본의 전 역사기간 중 가장 결집도도 낮고, 결집 위치도 일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실제 관측에 의한 자료로 보기 어렵다.
ㄷ) 만주 지역에 약간의 집중이 되고 있으나 결집도가 아주 낮다.

ㄹ) + ㅁ) + ㅂ) 시대는 결집도도 높고, 정확히 일본 열도나 가까운 곳으로 결집위치가 나타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ㄱ)으로 A.D 709년 이전의 야마토시대의 일식 10개를 분석한 것인데, 결집도가 높아 실제로 관측된 자료로 보인다 하는데 그 위치가 현 일본열도가 아닌 남지나 해상인 것이다. 그런데 이는 <중국 25사>나 <한단고기>에 나오는 왜의 위치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nbsp;&nbsp;박창범교수의 일본사서 일식기록분석. 좌측 상단이 ㄱ) 야마토시대는 남지나해상으로 결집되며,&nbsp; &nbsp;ㄴ)과 ㄷ)은 불확실하다.&nbsp; &nbsp;ㄹ) 부터는&nbsp;열도로 결집된다.


기타 기록으로 본 왜의 위치

그리고 신라와 왜 사이에 특이한 기록이 있다. 왜에서 신라로 온 호공(瓠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신라에서는 호공을 대보(大輔)에 임명을 한다. 참고로 대보는 지금으로 치면 국무총리 정도의 직위로 脫解王도 대보에 있다가 왕이 된다. 현재의 일본인이 한국에 와서 국무총리를 할 수 있다고 보는가? 상식적으로 이것은 동족일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다. 결국 동이 5국 즉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 왜는 전부 같은 민족 즉 동족(同族)인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왜가 신라를 무려 30번 넘게 침공한다. 만일 왜가 일본열도에 있었다면 배타고 이러한 해외원정 전쟁을 그렇게 자주 할 수가 없다. 결국 이는 신라와 왜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실제로 아래의 <삼국사기> 기록에 보면  왜가 신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기록으로 보인다. 

지마이사금 10년 “왜인이 동쪽 변방을 침략하였다.”
내해이사금 13년 “왜인이 국경을 침범했다.”
조분이사금  4년 “왜병이 동쪽 변두리를 침략하였다.”
실성이사금  6년 “왜인이 동쪽 변방과 남쪽변방을 침범했다.”
눌지이사금 10년 “왜병이 와서 동쪽 변방을 침범했다.” 
                24년 “남쪽 변두리를 침범하고 동쪽 변두리를 침범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일본열도는 지진이 잦은 곳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지진이 있었다는 기록은 몇 번 있으나 지진의 피해 정도가 기록된 것이 단 하나도 없다. 이는 시각적으로 보이는 지진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로 경미한 지진인 것이다. 왜가 만일 현 일본열도에 있었다면, 관동대지진이나 고베 지진 같은 엄청난 재앙을 가져온 지진의 기록이 안 씌어졌을 리가 없다.

즉 <일본서기>는 일본열도에 살지 않았던 사람들인 왜인(倭人)들의 기록인 것이다. 따라서 왜는 열도에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대륙에 있던 왜는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륙에서 대만으로 쫓겨 간 것으로 보인다. 마치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모택동에게 밀려 쫓겨 가듯이.... 명나라 초기까지 대륙에서 왜구의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왜의 본토수복 작전이 아니겠는가? 현 대만에는 A.D 1,600년 이전의 역사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 일본의 고대사는 분명 조작된 것이 많다. 그토록 역사를 조작해서라도 자기네 역사를 새로 만들려는 일본민족의 처절한 몸부림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역사가 짧다보니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보이나, 이러한 일본의 의도에 동조하며 자기네 역사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의 행동은 솔직히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다.

그렇다면 대륙에 있던 왜가 열도로 오기 전 열도에는 누가 있었을까? 일본의 원래 원주민으로 알려져 있고 현재 홋까이도오(北海島)로 쫓겨가 살면서 곰을 숭상한다는 아이누(倭奴)족은 언제 어디에서 열도로 건너간 종족들일까? 그리고 아스카 문화로 대표되는 일본의 고대 문화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한반도의 역사를 보면 고조선--> B.C 195년부터는 낙랑국 --> A.D 32년부터는 고구려 --> A.D 503년부터는 동신라 순으로 주인이 바뀐다. 따라서 고조선/낙랑국/고구려/동신라 시대에 일본 열도로 문화가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낙랑(樂浪)국의 문화가 나라(奈良)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시대 고구려와 동신라의 문화가 일본열도로도 전해지고, 왜의 주인이었던 백제계가 대륙 남부에서 열도로 오면서 독자적인 일본의 문화가 발달하게 되나 그 근본은 역시 백제 문화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원래 일본민족의 조상인 ‘왜’는 670년 이전까지는 대륙에서 고구려/백제/신라와 함께 활동하던 같은 민족이었다. 명나라는 역사과대망상소설인 삼국연의(三國演義)를 보급하면서 동이의 역사를 한반도로 밀어내려고 했고, 일본민족은 독자적인 역사를 가지고 싶었던 이해관계의 합치로 양자강 이남의 ‘왜’의 역사를 명나라 때 지금의 일본지역으로 넘김으로써 동이역사의 말살을 시도 한 것은 아닌지?

역사적 사실이 이럼에도 일본인들은 당시 왜는 일본열도에 있으면서 양자강 이남으로 가서 대륙을 지배했다는 엉터리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왜의 항해술로 보아 있을 수도 없는 일이며, 사서의 기록이나 천문학적 분석으로나 관습/역사적 인물 등을 통해서 보더라도, 670년 이전 ‘왜’가 지금의 일본 열도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는 분명 같은 동이의 일부였으며, 양자강 이남에 있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래서 일본민족은 우리상고사의 비밀이 밝혀지면 자기들의 조작된 역사가 송두리 채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의 상고사를 그토록 왜곡/조작하려고 노력하는지 모르겠다. 일본민족이 예전에도 열도에 있었다는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제 때 조작된 반도사관에 우리는 아직까지 농락당하고 있다. 반도사관을 탈피해야만 왜와 백제/신라와의 모든 역사 기록이 제대로 읽혀지고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망국적인 반도사관을 훌훌 털고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찾아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백제의 분국(分國)인 왜의 위치는 어디?: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백제의 분국(分國)인 왜의 위치는 어디?

본글은아래3부작의(3부)입니다.(1부)백제부흥군을지원한왜왕가의정체는?(2부)칠지도와응신으로본왜왕가의비밀은?(3부)백제의분국(分國)인왜의위치는어

www.pluskorea.net

 

 

7세기 이전 倭人(와인)은 일본열도인이 아니다

東夷倭人는 朝鮮과 韓의 후예이며 진번군의 동쪽이며 귀주성 동쪽에 있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倭人이 일본열도인이 아니라는 말은 믿을수 없다고 할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삼국사기의 倭人과 지나18사 東夷倭는 일본열도인이 아니다.
이런말을 하면 잘못된 것으로 치부할 것이다

그러나 2가지 검증 방법으로 해볼수 있다. 
지나18사 동이전이 삼국사기 권46을 입증하고 있으니 이를 검증하면 고구려 백제 그리고 사로신라와 왜의 위치도 검증된다.


또 하나 삼국지 후한서 동이전으로 각국가의 배열도를 만들고 각각의 지명을 대입하고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우적도로 1차 찾아보고 2차로 우적도의 범위의 지나지도에서 그 위치를 찾아본다
또 하나 삼국지 倭人전과 사기 월왕구천전을 대입하여 倭人의 정의를 내릴수 있다
또 하나 한서에서 眞番과 南越의 儋耳의 기록으로 우적도에서 그 위치를 찾는다
또 하나 삼국지 倭人傳의 卑彌國과 狗奴國과 韓傳에서 卑彌國과 狗盧國으로 연관성을 찾는다.
또 하나 삼국지 후한서에서 倭의 지명으로 儋耳 朱崖 澶洲 夷洲 會稽 등 지명이 우적도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결과 우적도에서 倭는 眞番의 동쪽 남월 주애 단주 이주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高句麗 백제의 남으로 오월, 북으로 유연제로를 통치하고 그 사이에 최치원의 신라가 있었다. 또한 진번의 동쪽이므로 번조선인이고 한의 일부이므로 동이 즉 우리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나18사 동이전과 삼국사기와 사기 우적도 등으로 삼국시대 倭사는 결코 일본열도로 왜곡될 수가 없다. 


이렇게 외쳐도 절대로 검증을 하지도 않고 지금까지의 역사교육으로 일관하려는 것은 일제시대 역사를 배운 잔존 세력들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연구를 하는 모든 사람들은 지나18사 동이전이 삼국사기 권46을 입증하는지 검증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삼국사기를 유연제로-오월과 한반도에 대입하여 18사동이와 공통부분의 위치와 비공통부분으로 정리하여 그 위치를 찾고 공통부분과 비공통부분이 하나되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   

        
분명히 東夷倭가 일본열도인이 아니고 귀주성 남월 동쪽 사람이라는 것은 천동설때 지동설만큼이나 충격적이라 할수 있다. 또 그들은 조선인이고 한의 후예라는 것도 경천동지할 일이다.

이렇게 된데는  15세기 조선국가사관이나 원명청의 국가사관 일본열도의 국가사관으로 삼국시대 倭가 일본열도인 것처럼 만들므로 인하여 우리역사가 정립하지 못하고 우리 사서마저 비판대상이 되어 왔다. 조선시대에 역사책을 쓴 모든 사람들이 일본열도인을 삼국시대 倭로 잘못 풀이함으로서 스스로 우리사서를 부정적으로 보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宋元明淸의 동이역사 밀어내기와 자국내 秦漢隋唐의 일통론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한 작업에 고려의 국가사관, 조선과 대한의 국가사관에 스스로를 한반도로 확정시키면서 倭를 일본열도역사로 인정하고 삼국사기와 18사동이전을 한반도역사로 확정하면서 왜곡의 길을 거러오게 되었다. 
 

일본열도가 국호 일본을 시작한것이 그들이 쓴 조선통신사에 의하면 1403년 명나라가 일본이라는 국호를 인정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현대의 우리는 경상도와 일본열도의 역사로 오인하는데서 풀리지를 않고 있다.

삼국사기와 지나18사동이전의 倭를 밝히지 않으면 秦唐間 우리역사는 정리될 수가 없다.
그래서 검증을 하여야 함에도 검증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검증에 동참을 호소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거짓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출처;우리역사의진실
http://www.coo21.rgro.net/bbs/zboard.php?id=hanoul&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52

 

 

日王, 한국말로 신라神 모신다

日王, 한국말로 신라神 모신다

일본 神道의 비밀

  • 洪潤基 < 문학박사·한일역사문학연구회장 >
  • 입력2004-11-17 14:00:00
 
  • 왜 일본에서는 신라를 철저하게 미워하고 배타시해 왔을까. 이 큰 의문점 때문에 필자는 오랜 세월 일본 속의 신라 연구에 집중해왔다. 일본왕실이 9세기 초엽부터 역사 문서에 공공연하게 신라를 적대시해온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결론적으로 그 미스터리는 일본의 국가종교가 된 ‘일본 신도(日本 神道)’의 뿌리가 다름 아닌 고대신라의 신도(神道)였다는 사실을 일본왕실이 숨기려 발버둥친 데 있다. 필자는 그 역사의 내막을 일본 고대 문헌 등을 통해 낱낱이 고증 분석했다.
고대 일본이 신라를 배격하며 적대시한 사실은 일본왕실 문서에 그 증거가 나타나 있다. 천황가의 법령 주석서인 30권짜리 ‘영집해(令集解)’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고기(古記)’에 전하는 바에 따르자면, 일본천황의 치세 때에 조서를 내려서 묻기를 ‘이웃나라’와 ‘달갑지 않은 나라’는 어찌 구별하는가. 답하기를 ‘이웃나라는 큰 당나라이며, 달갑지 않은 나라는 신라이로다.”(제3권)

이 문서에서 인용한 책 ‘고기’는 서기 738년에 씌어진 역사 기록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문서기록상 ‘영집해’(859∼876년 성립)가 작성된 9세기가 아닌 이미 8세기 초부터 일본은 신라를 배격해온 것이다. 이에 대해 저명한 사학자 오오와 이와오(大和岩雄, 1928∼)씨는 이렇게 지적한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을 ‘귀화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고대 역사책 ‘일본서기’(720년 편찬)에서도 3국(신라·백제·고구려)을 뚜렷하게 구별하고 있다. 3국을 문화의 선진국이라고 인정하고 있지만 단지 백제로부터의 문물 도래만을 강조하며, 달갑지 않은 나라(이하‘蕃國’이라고 칭함)로 취급한 것은 주로 신라였다. 신라를 번국으로 삼은 것은, 통일신라(668년 백제와 고구려를 모두 정복한 시기 이후)가 되기 이전부터 신라를 적국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 시대 이후부터는 신라가 한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했으므로, 신라와 조선과 번국을 일체화하는 해석도 생겨났겠지만,‘일본서기’가 씌어진 무렵의 ‘달갑지 않은 나라(번국)는 신라이로다’는 다분히 신라를 적국으로 여기는 관점에서 생긴 것이다.”(‘新羅蕃國視에 대하여’, 1978)



쉽게 말해 오오와 이와오의 견해는, 백제인 계열의 일본왕실이 신라를 미워한 것은 신라가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킨 데서만 기인하는 게 아니라 이미 그 이전의 시대부터였다는 것이다.

우리의 ‘삼국사기’에도 나오듯이 신라·백제·고구려가 서로 적대시하며 전쟁을 했기 때문에 백제인 계열의 일본왕실이 신라를 곱게 봤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백제인 계열의 일본왕실에서 본국 백제의 멸망 이전부터 신라를 적대시한 또다른 이유도 있다.

그 역사적 배경은 538년 백제 성왕이 백제인 계열의 왜왕인 킨메이(欽明, 538∼571년 재위)천황에게 백제불교를 전파시킨 일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백제불교가 들어가기 이전까지의 일본 땅에서는 신라의 신도(神道)가 왜왕실을 중심으로 국가 종교로서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일본왕실에 백제 불교가 전파됨으로써, 신라 신도와 백제불교는 서로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급기야 신도와 불교의 종교전쟁(587년)으로 비화되고마는 사태까지 발생했던 것이다.

▼ 신라 신도와 백제불교의 종교전쟁▼ 여기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백제 계열의 왜왕 킨메이천황과 그의 아들 비타쓰(敏達, 572∼585년 재위)천황이 백제인이라는 사실을 간략하게 고증해둔다.

즉 킨메이천황의 친아들인 “비타쓰천황은 백제 왕족이다”라는 역사 기록이 일본왕실 족보인 ‘신찬성씨록’(815년 편찬)에 씌어져 있다. 더구나 비타쓰천황은 왜왕실에서 최초로‘백제궁(百濟宮)’을 지었다는 사실이 ‘일본서기’와 ‘부상략기’등 역사서에 실려 있다. 당시 백제왕궁을 세운 장소는 나라(奈良)의 ‘백제대정(百濟大井)’이란 곳이다.

아무튼 킨메이천황 초기에 백제 성왕(523∼554년 재위)이 불경과 불상 등을 보내 백제인 왜왕실에서도 불교를 믿으라고 권했다.

이때 최고 대신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 505∼570년)가 백제 성왕이 보낸 불상을 킨메이천황으로부터 물려받아 자기 저택에 모셨다. 백제인이었던 소가노 이나메 대신은 자택을 불당으로 개축하여 ‘코우겐지(向原寺)’라고 이름짓고 백제 불교 포교에 앞장섰다.

불상을 처음 본 사람들은 이 새로운 종교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신도에서는 사당(신사)에 신의 위패 등이 있을 따름이지 불상처럼 눈에 보이는 실체는 없었던 것이다. 즉 지금까지의 신도신앙에서 불교로 신앙 대상을 바꾸는 바람이 일었던 것이다.

이에 크게 당황한 것은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 496∼570년) 대련이었다. 당시 왜왕실 조정은 ‘대신’직 다음의 제2인자 직위가 ‘대련’직이었으며, 대련은 군사와 경찰, 치안권을 관장하고 있었다.

이 모노노베노 가문은 백제로부터 불교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조정에서 신도를 장악하고 천황을 보필하던 국신파(國神派)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그는 백제불교가 들어오자 불만을 품고 곧 킨메이천황에게 불교를 배척하는 내용의 상주를 하면서, 국신(國神)이 불교에 대해 진노한다고 경고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천하의 왕께서는, 항상 천지 사직의 180신을 춘하추동에 걸쳐 제사드리는 것이 그 일이옵니다. 이제 처음으로 외국신(부처-필자 주)을 예배한다는 것은 모름지기 국신의 진노를 사는 일입니다.”(‘일본서기’)

이와 같이 상주하자 킨메이천황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원하는 사람인 이나메 대신에게 불상을 맡겨서 시험 삼아 예배시키도록 하겠소.”

이런 까닭에 소가노 이나메 대신이 불상을 자택으로 가져가 코우겐지라는 사찰을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모노노베노 오코시가 신라계 신(饒速日命)의 후손이라는 것이 ‘신찬성씨록’에 밝혀져 있다. 이에 의하면 모노노베노 오코시의 할아버지인 모노노베노 메(物部目)가 신라신의 12대손으로 나와 있으므로, 모노노베노 오코시는 신라신의 14대손인 것이다.

이로써 살펴보더라도 백제불교가 일본으로 건너오기 전까지는 백제인 왜왕실에서도 신라신도를 받들어 춘하추동으로 천지사직 180신에 대한 제사를 왕실에서 거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런 상황에서도 백제불교가 밀고 들어왔다는 것은 당시 본국 백제가 백제계 왜왕실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일본 역사에서는 신도와 불교가 충돌하게 된 사건을 이른바‘숭불논쟁(崇佛論爭)’이라 부른다. 이 숭불논쟁은 결코 말싸움으로 끝나지 않았다. 끝내 큰 종교전쟁으로까지 확대되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이후 벌어진 종교전쟁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넘어가기로 한다. 신라계 국신파인 모노노베노 오코시 대련의 아들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 515∼587년) 대련과 백제계 숭불파인 소가노 이나메 대신의 아들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550∼626년) 대신은 아버지대의 불화를 이어받아 결국 끔찍한 혈투를 벌이게 된다.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이 코우겐지 사찰을 불지르고 불상을 파괴하는 훼불사건을 일으킨 것이 570년의 일. 그뿐 아니라 585년에는 소가노 우마코 대련이 역시 자기 집에 세운 불교사찰인 이시카와정사(石川精舍)를,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이 또다시 불질러버렸다. 이렇게 연거푸 훼불사건이 일어나자 587년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왕실 실권파로서 관군을 편성해 신라 신도파인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의 반항군과 전쟁을 일으킨다. 이 전쟁에서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전사하고 만다.

이후 숭불파인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왜왕실에서 백제불교를 중흥시키기에 이른다. 물론 불교 중흥과정에서 머지않아 신라불교와 고구려불교도 건너와 왜왕실에 참여하게 된다.

또한 불교가 번성한다고 해서 신도가 결코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다.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고 해서 일본왕실에서는 신도와 불교가 서로 사이좋게 손잡고 일체감 속에 번창해가는 일본적인 특성도 보이는 것이다. 즉 신사와 사찰이 협동하며 공존하는 특성을 보이게 된 것이다.

사진 4 일본 신도의 주체인 신라신 소잔오존을 제신(祭神)으로 받드는 대표적 신사가 쿄우토의 야사카신사(八坂神社)다. 야사카신사는 해마다 7월17일부터 24일까지 ‘기온마쓰리’를 거행해 소잔오존의 ‘신령’을 위령한다. 일본에서‘마쓰리’라는 제사 축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 스사노오노미코토(소잔오존)에게 제사드리는 축제다.

야사카신사의 제사 축제 때 소잔오존의 신령을 모신 큰 수레들이 자그마치 20대나 기나긴 행렬을 이루며 쿄우토 번화가를 행진한다. 신령의 수레(야마 14대, 호코 6대)가 행진하는데, 이때 수레꾼들이 “왔쇼이, 왔쇼이!” 하고 우렁찬 구령을 외쳐댄다. 소잔오존이 왜나라에 건너오셨다는 뜻으로 경상도 말 “왔서에”의 구음변화가 바로 “왔쇼이”다. 이 점에 대해 일본 학자의 견해를 들어보자.

“마쓰리에서는 으레 수레꾼들이 ‘왔쇼이, 왔쇼이!’하는 구령을 지르게 마련이다. 오늘날 이것은 전국적인 구령이 되었다. 이것은 고대 조선어로서‘오셨다’는 의미라고 한다.”(重金碩之, ‘風習事典’, 1982)

아무튼 일본에서는 소잔오존에게 제사드리는 쿄우토의 ‘야사카신사’가 그 총본사이며, 그 밑으로 전국 각지에 2000 곳이 넘는 ‘야사카신사’들이 산재하고 있다. 말하자면 일본신도에서는, 전국 각 고장의 야사카신사에서 신라신 소잔오존을 일본 제1의 개국신으로 떠받들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사진4 참조)

소잔오존이 신라에서 처음 건너왔던 ‘이즈모’ 땅에는 소잔오존과 그의 처 ‘쿠시이나다히매’를 함께 제사지내는 옛 신사 ‘야에가키신사(마쓰에 시)’가 있다는 것도 밝혀둔다.

또 소잔오존을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으로 받들어오는 대표적인 신사는 오우미(近江)의 유명한‘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이다.(사진5 참조)

이 지역 역시 고대 신라인들의 옛터전으로서, 신라 고분(핫케쓰 고분군)이 있으며, 수많은 스에키(신라 도기)며 각종 유물들이 출토된 바 있다.

이외에 신라신사(新羅神社)라는 명칭의 신사들도 아직 일본 각지에 존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마죠우의 신라신사, 다지미의 신라신사, 히매지의 신라신사 등이 유명하다. 신라명신을 제사드리는 신라신사를 감추기 위해 신국(辛國, 카라쿠니)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단 ‘신국신사’도 전국 각지에 허다하다. 그런가 하면 이두식으로 ‘신라’를 가리키는 ‘시라기(白木)’의 신라신사 등 일본의 군국주의체제에서 명칭이 바뀐 곳들도 여러 곳에 있다.

신라 천일창(天日槍) 왕자를 제신으로 모신 신사들도 전국 도처에 허다하며, 또한 신라인 진씨(秦氏)가문이 신라 농신(農神)에게 제사드리는 큰 규모의 신사들이 쿄우토의 대표적인 신사들이라는 것도 밝히고 싶다. 이를테면 오늘의 일본 쿄우토의 대표적인 신사들인 후시미(伏見)의 이나리대사(稻荷大社)를 비롯해서 마쓰오대사(松尼大社), 카미카모신사(上駕茂神社), 시모카모신사(下駕茂神社) 등 대규모의 신사들이 신라인의 고대 신사라는 사실이다.

사진 5 마지막으로 한반도의 농업이 일본에 건너갔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알려주는 곡식 용어를 짚어보기로 한다. 소잔오존의 신화에는 보식신(保食神, 우케모치노카미)이라는 여신이 등장한다.

보식신은 입에서 밥이 나오고, 또한 크고 작은 물고기가 입에서 나오는 여신이다. 이 보식신을 더럽다고 하면서 월야견존(쓰쿠요미노미코토) 신이 칼로 쳐죽여 버렸다. 그랬더니 죽은 보식신의 몸에서 여러가지 농작물들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즉 머리에서 말(馬)이 나오고, 이마에서 ‘조’가 나오고, 눈에서 ‘뉘’가 나오고, 배에서는‘벼’가, 음부에서는 ‘팥’과 ‘보리’ 등이 나왔다. 이에 대해서 오오노 스즈무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보식신의 신화에 대해서 신체 각 부위와 생겨난 생산물을 조선어로 바꿔놓으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大野晋, ‘日本語の世界’)

merre(머리, 頭)→ mer(말, 馬)

che(자, )→ choh(조, 栗)

nun(눈, 眼)→ nui(뉘, 稗)

pei(배, 腹)→pyo¨(벼, 稻)

po¨ti(보지, 女陰)→p‘et(팥, 小豆)

마쓰모토 세이쵸우도 일본의 농작물 명칭이 조선어에서 발생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살해당한 보식신의 신체 각 부분으로부터 여러 종류의 농작물이 생겨났다. 그런데 그 농작물의 종류가 조선어인 경우 그 명칭과 신체의 부분이 일치하는 것이다.”(‘日本史謎と鍵’, 1976)

이와 같은 것은 일본 고대사의 신화가 신라신뿐 아니라 신라의 각종 농업문화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신라 신도가 일본 신도의 뿌리라는 사실이 한일간에 구체적으로 연구된 일이 없다는 것이 큰 유감이다. 이제 필자는 장기간에 걸쳐 일본에서 직접 연구해온, 일본 속의 신라신도와 신라문화를 본격적으로 규명해 나가려고 한다.

끝으로 신라신 소잔오명(스사노오노미코토)을 일본의 이두식 한자 표기(만요우가나)에서는 수좌지남명(須佐之男命)으로 명기하고 있다는 점도 굳이 밝혀둔다.

아무튼 538년 이전의 왜왕실에서 불교의 발자취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당시까지는 백제인 왜왕실에서도 신도를 존중해왔다. 엄밀하게 지적한다면, 이 신도는 고조선의 단군 숭배 등 천신(天神)신앙이 그 원류였다고 본다. 구태여 ‘신라신도’라고 분명한 구별을 한 것은 아니다.

집약적으로 표현하자면 단군 후손인 고조선의 신도가 일본의 야요이시대(BC 3년∼AD 3년)에 일본열도로 전파되었던 것이다. 즉 벼농사에서부터 대장간의 철기 생산, 금속공예, 베틀의 직조 등에 이르기까지 고대한국의 온갖 산업문화가 일본으로 유입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천신신앙인 신도도 일본에 스며들게 되었다.

우리 고대문화가 일본문화의 원류라는 사실은 지금까지 일본의 저명한 학자들이 진솔하게 시인해왔다.

이를테면 카큐슈우인대의 오오노 스즈무(大野 晋, 1919∼) 교수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왜인에게 금속 사용법을 가르치고, 야금·금공 기술을 전했으며, 염색·피혁제조·베틀 직조·기와 제조·의학·역법·천문학·조불(造佛)·사찰 건축·조탑 등 모든 것을 가르쳤다”(‘日本語の 世界’, 1980)고 밝혔다.

하늘신의 자손들이 지상으로 내려왔다는, 일본의 천손강림 신화도 조선의 건국신화에서 유래했다고 말한다.

“일본의 천손강림 신화가 조선 각국의 건국신화와 현저하게 유사한 것을 보이고 있다.…조선반도 남쪽에서 벼농사를 하고, 그곳에서 금속기를 만들어 생활하고 있던 종족이 천손강림 신화와 금속기 등을 일본으로 가져왔다고 본다.”(앞의 책)

당시 농경을 비롯한 온갖 산업문화를 가지고 건너간 한반도 사람들이, 미개한 일본땅에 정착하면서 그 선주민들을 지배하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기에 일본의 여러 권위 있는 사학자들은 일본 천황가가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마쓰모토 세이쵸우(松本淸張)씨가‘한일동족설’을 매우 설득력 있게 밝힌 것은 꽤 유명하다.

“도대체 일본인의 원주민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 모름지기 인도네시아인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가령 이들 원주민을 ‘야요이인’이라고 치자. 그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곳에, 조선에서 건너온 민족이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조선의 ‘이즈모(出雲)’ 민족이다. 이 이즈모 민족이 제1차 도래민족으로서 야요이시대 전기 경부터 상당수 건너와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뒤를 이어 조선에서 천손족(天孫族), 기마(騎馬)민족이라고도 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건너왔다.… 그러므로 모두들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이 조선문화를 흡수한 것이 아니라, 본래 서로가 똑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또 한가지 극언(極言)한다면,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조선의 분국(分國)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쓰시마(對馬島)해협이 있어서, 조선이 동란을 겪을 때(신라·백제·고구려 등 3국의 전쟁시기-필자 주) 일본은 독립하여 더욱 더 일본적으로 되어 갔다. 일본적이라는 것은 선주 민족의 풍습을 퍼내 거기다가 융합시켰다고 본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과도 같다.”(‘東京新聞’, 1972년 4월1일자 조간)

마쓰모토 세이쵸우가 지적한 ‘이즈모’ 민족은 ‘신라’족을 가리키는 것이며, 천손족은 단군신화를 비롯해 고구려신화, 신라신화, 가야신화 등을 가진 우리 민족 전체를 통틀어 가리킨다. 또한 기마민족의 경우도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등 고대 만주 땅에서 살다가 한반도로 이주한 우리 민족 전체를 일컫는 것이기도 하다.

또 저명한 고고학자 미카미 쓰구오(三上次男)의 연구를 인용해, 토우쿄우대 사학과의 이노우에 미쓰사타(井上光貞) 교수는 기마민족의 일본 정복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미카미씨에 따르면 부여며 고구려, 백제 등의 지배자는 수렵민족적인 기마민족이다. 그뿐 아니라 일본 국가를 성립시킨 주체의 대부분도 그와 같은 성질의 민족이 이룬 것이라고 보아도 차질이 없을 것이다. 야요이시대에 조성된 북큐우슈우의 ‘고인돌’은 똑같은 시기의 남한에서도 행해졌던 묘제(墓制)인데, 이는 남한에서 갓 발생했던 계급사회의 지배자가 북큐우슈우로 이동했다는 것을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기마민족이 큐우슈우로 쳐들어왔을 가능성은 기원전 2세기경의 일이라면 이상할 것이 없다.”(‘日本國家の起源, 1967)

아무튼 불교가 전파되기 이전 고대 왜왕실에서 신라 신도 제사를 지켜왔다는 것은 역사 기록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6세기경의 고대 역사기록인 ‘구사기(舊事記)’의 ‘천손본기(天孫本紀)’에는 신라 신도 제사를 담당해온 모노노베노(物部) 가문에 대한 상세한 계보가 밝혀져 있다.

그런데 이 제사 때는 놀랍다고나 할까, 아니 당연하다고 할까, 경상도 말인‘신라어’로 강신(降神)의 축문을 외운다. 긴 축문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경상도 말은 다음과 같다. 원문은 물론 한자어인데, ‘아지매 여신(女神)’이 신라로부터 천황가 제사 자리에 오라고 부르는 초혼(招魂)이다.

아지매 오게, 오, 오, 오, 오, 오게

阿知女, 於介, 於, 於, 於, 於, 於介

일본말로 이 축문의 한자어들을 읽을 때에는 경상도 말이 그대로 나타난다. 이 축문의 한자 표기는‘이두(향찰)’식인 것이다. 이를 일본에서는‘만요우카나’식이라고 부른다. 위의 이두식 축문을 우리나라 말로 읽는다면 ‘아지녀 어개, 어, 어, 어, 어, 어개’로 전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말이 된다.

이렇게 천황가의 축문이 경상도 말로 읽힌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천황가의 신도 뿌리가 경상도 말을 사용하는 신라 신도와 맞닿아 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축문에 나오는 ‘아지매(阿知女)’란 무슨 뜻인가. 경상도 방언으로 ‘아주머니’라는 말인데 지금도 경상도 사람들은 아주머니를 아지매라고 표현한다. 오늘날 부인에 대한 존칭어인‘아주머니(아지매)’는 고대 신라에서 신분이 고귀한 여성, 신성한 여성, 즉 ‘여신’을 존칭하던 대명사였다고 본다.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또 하나의 증거가 있다. 일본 고대사에서는 ‘여신’이나 귀족 출신의 젊은 여성을 가리키는 말로 ‘오미나(をみな)’라는 여성대명사가 사용됐다.

일본 고대신화에서 태초의 개국신(開國神)인 ‘이자나기노미코트’가 최초의 처녀 여신 ‘이자나미노미코토’에게 ‘여자’라는 말을 쓸 때 ‘오미나’라고 부른 것이 그 최초다. 이 ‘오미나’는 본래 우리나라의 옛말인‘에미나’에서 나온 말이다.

고대 한국에서는‘여자’를‘에미나’로 불렀다. 그 흔적은 함경도며 강원도, 경상도 등 동해권 지방에서 아직도 통용되는‘에미나’라는 말에서도 잘 살펴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오늘날 일반 명사로서 ‘온나(おんな, 女)’라는 말을 쓰고 있다. 바로 이 ‘온나’의 어원이 귀족 여성을 칭하는 ‘오미나’라는 것은 일찍부터 저명한 일본어 학자들도 지적하고 있었다.

“오미나(をみな, 女)는 온나(おんな)이며 또한 매(め)라고도 부른다. 여신(女神)을 ‘오미나가미(をみながみ)’로도 부른다.”(金澤庄三郞, ‘廣辭林’, 1925)

경상도 방언에서는 또한 ‘어머니’를 ‘어매’라고 하는데, 여기서 매(女)는 ‘아지매’의 매와 통한다. 또한 이 매에서 뒷날 어미 모(母) 자를 이루는‘모’의 발음도 나왔다고 본다.

사진 1 현재의 일본 천황가에서도 신라신인 ‘소노카미(園神)’와 백제신인 ‘카라카미(韓神)’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물론 일본 천황가 내부 사항은 일체 공개되지 않고 있어서, 일본의 전문학자들도 근래에는 천황가 제사에 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고대부터 일본의 천황들이 왕궁에서 제사를 모신 최고의 신은 신라신인 원신(園神, そのかみ)과 백제신인 한신(韓神, からかみ)이었다는 점이다. 그 사실은 일본 고대 천황가 문서에 상세하게 밝혀져 있다.

‘엥기시키(延喜式, 연희식)’라는 이 천황가 문서는 서기 905년 다이고천황(897∼930년 재위)의 명에 따라 집필이 시작된 이후 927년에 완성되었다. 장장 23년에 걸쳐 완성된 이 문서는 일본 천황가의 모든 왕실제도와 규범이 50권 분량으로 편찬한 중요한 역사 기록이다.

왕명에 의해서 이것을 작성한 주체는 후지와라노 토키히라(871∼909년) 대신과 그의 아우 후지와라노 타다히라(880∼949년) 대신 형제다. 왕실 귀족가문의 두 형제는 천황의 최측근으로서, 좌대신과 태정대신 등 최고 장관직에 있었던 백제계 인물들이다.

이 ‘연희식’의 제1권 신기(神祇)편에는 서두에 천황궁에서 모시는 사당의 3신이 나온다. 가장 앞에는 신라신을 모신 ‘원신사(園神社, 소노카미노야시로)’가 나오고 두번째로 ‘한신사(韓神社, 카라카미노야시로)’가 등장한다.(사진 1 참조)

또한 이 기록에 잇대어서 살펴보면, 천황들이 모셔온 왕실의 신은 모두 285신에 이른다. 그 순서도 맨 앞에 신라계 신사인 원신사에서 모시는 한 분의 신이 나오고, 뒤이어 백제계 신사인 한신사에서 모시는 두 분의 신이 등장한다. 그 다음으로 신라계의 여러 신들을 모신 신사가 줄을 잇는다. ‘카모신사(賀茂神社)’ ‘마쓰오대사(松尾大社)’ ‘이나리대사(稻荷大社)’ 등이 그것이다. 다음으로는 백제신 네 분을 모신 ‘히라노신사(平野神社)’ 등도 등장한다.

이것은 ‘연희식’ 편찬 당시 천황들이 백제 계열의 왕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신들을 모신 신사와 백제신들을 모신 신사들의 서열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또 천황가 신화(神話)의 신들이 대부분 신라신이었으며, 일본 고대사(‘고사기’‘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신들도 신라신이 주도적이었다는 점과 관계가 깊다.

그런데 일본의 신통보는 신라신과 백제신의 계보를 한 조상신의 후손신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712년 일본 역사상 최초로 편찬된 ‘고사기(古事記)’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대년신(大年神)이 신활수비신의 딸인 이노비매와 혼인하여 낳은 자식은 대국어혼신(大國御魂神), 다음은 한신(韓神), 다음은 증부리신(曾富理神), 다음은 백일신(白日神), 다음은 성신(聖神)이다.”

‘대년신’이란 신라신인 ‘소잔오존(素盞烏尊,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아들신이다. 이 대년신에게서 태어난 다섯 아들 신들은 당연히 신라계일 터인데, 제2자인 한신(韓神)만은 백제신이다. 어째서 신라신의 자식들 중에 백제신이 들어 있는지는 앞으로의 연구 과제다. 단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둘 것이 있다. 일본 최초의 역사책 ‘고사기’를 쓴 안만려(安萬侶, 야스마로, 723년 사망)는 조정에서 내무장관격인 ‘민부경’으로서, 백제 계열의 조신이었다.

아무튼 한신은 일본 천황가 제사에 신라신과 함께 모시는 백제신이거니와, ‘증부리신’은 신라신 원신(園神)을 가리키는 또다른 표현이다.‘증부리신’은 일본어로 ‘소호리’의 신, 즉 ‘서울’의 신이다. 증부리신으로도 불리는 원신이 신라신이라는 것은 일본의 권위 있는 사학자들의 통설이며, 쿄우토대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1927∼) 교수는 다음과 같이 논술했다.

“역사책 ‘고사기’에는 대년신과 이노비매 사이에서 태어난 5신들 중에서, 한신과 증부리신 등 조선의 신들이 등장하고 있다. 증부리신이라는 것은 소시머리(ソシモリ, 牛頭)와 연관이 있는, 신라(新羅) 연고를 가진 신의 이름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한신(韓神)은 원신(園神)과 나란히 조정의 왕궁 안에 모신 신으로 존숭되고 있고, 궁정의 진혼제 전야에 제사드리며, 그곳에서 ‘카구라(神樂)’도 연주하게 된다. 그러기에 9세기 중엽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카구라우타(神樂歌, 천황가 제사의식 때 축문 악보에 실린 제사 노래)’의 가사에는‘나 한신은 한(韓)을 뫼셔오노라’고 노래부르는 것이다.”(‘日本神話’, 1970)

사진 2 지금도 일본 천황은 토우쿄우의 천황궁 안에서 ‘신상제(新嘗祭, 니이나메사이)’를 지낸다. 해마다 11월23일 거행되는 천신 제사다. 역대 일본 천황들은 대신들과 신관을 거느리고 직접 신상제 제사를 지내왔다. 이때 어김없이 신라의 아지매(阿知女) 여신을 초혼하며, “아지매, 오게, 오, 오, 오, 오, 오게”의 축문을 연거푸 외우는 것이다. 이 축문이 담긴 것을 통틀어 신악가(神樂歌)라고 일컫는다.

제사 첫머리에 신라신과 백제신을 모신 신전 앞에서 장작불을 피우고 ‘아지매’를 초혼하는 의식인‘아지매노와자(阿知女法)’로 의식을 치르는 것을 가리켜 천황가 제사의 ‘신악(神樂, 카구라)’이라고 일컫는다. 이때 2명의 대신이 신전 좌우에 서서 엄숙하게 ‘아지매’여신의 초혼사 축문을 차례차례 외친다.

(본방) 아지매 오, 오, 오, 오.

(말방) 오게

아지매 오, 오, 오, 오.

(본방) 오게

오, 오, 오, 오,



(말방) 오

오게

이어서 신물(新物) 잡기 제사가 이어지면서 신악의 본축문인 한신(韓神)을 외우고, 악기를 연주하고, 신관이 근엄하게 춤을 춘다. 한신의 축문은 다음과 같다.

“미시마 무명 어깨에 걸치고, 나 한신도 한(韓)을 뫼셔오노라. 한(韓)을 뫼셔, 한(韓)을 뫼셔 오노라.

팔엽반을랑 손에다 쥐어잡고, 나 한신도 한을 뫼셔오노라. 한을 뫼셔, 한을 뫼셔 오노라.

(본방) 오게 아지매 오, 오, 오, 오

(말방) 오게.”

여기서 한신(韓神)은 당연히 백제신이며, 한(韓)은 한반도의 신을 뜻한다. 또 이 경우 한은 여신인 아지매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단군의 어머니인 웅녀신(熊女神)을 그 옛날 신라어(경상도 말)로 ‘아지매’로 호칭한 게 아닌가 싶다.

이는 ‘일본서기’의 스이닝(垂仁, 3세기경)천황 당시의 역사 기사에서 “신라왕자 천일창(天日槍)이 곰신단(熊神籬, 쿠마노 히모로기)을 가지고 신라로부터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하는 기사에서 유추해볼 수 있는데, 에도시대(1607∼1867년)의 저명한 고증학자 토우테이칸(藤貞幹, 1732∼1797년)은 곰신단에 대해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곰신단(쿠마노 히모로기)의 히모로기(ひもろぎ)는 신라어다.”(‘衝口發’)

즉 ‘히모로기’는 제사 모시는 신단이라는 신라어(경상도 말)라고 한다. 오늘날 이 말은 그 자취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신라의 천일창 왕자가 ‘곰의 신단’을 모시고, 왜왕실로 건너왔다고 하는 것은, 당시 스이닝천황에게 단군의 어머니신인 웅녀신에 대한 제사를 모시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그 이유는 스이닝천황과 그의 부왕인 스진(崇信, 2세기경)천황이 신라인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저서 ‘일본문화사’(서문당, 1999)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스진천황은 재위 당시 신라신인 대국주신(大國主神, 大物主神으로도 부름)을 나라(奈良) 땅 미와산(三輪山)에 신당을 차리고 제사지냈던 것이 밝혀졌다. 현재도 대국주신은 나라의 미와산 오오미와신사(大神神社)에서 모시고 있다는 것을 밝혀 둔다.(사진 2 참조)

그렇다면 일본 천황가 제사 축문의 ‘한신’과 ‘한’에 대해서, 일본의 전문학자들은 어떻게 풀이하고 있을까. 우스다 징고로우(臼田甚五郞) 교수는 신악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진솔하게 지적하고 있다.

“한(韓)을 뫼셔온다는 제사 양식은 한국식(韓風)이다. 신 내리기의 신물(神物)잡기에서 연상되는 것은, 신성한 무녀(巫女, 일반적인 무당이 아니라 고대 왕실의 왕녀 등을 가리킴-필자 주)가 신(神)을 향응하는 이미지다. 이 신악가의 위치에서 고찰한다면, 신의 잔치도 신주(神酒)를 권하는 단계에 들어가면, 터주신(地主神)인 한신이 새로이 찾아오는 신인 천황(天皇) 및 천황가(天皇家)에 대해서 귀순 접대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상정된다.”(‘神樂歌’, 1992)

우스다 징고로우 교수의 지적을 부연해 설명하면 이렇다. 일본 천황가에서 모시고 있는 한신은 이미 일본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터주신이다. 이 터주신이 한반도에서 건너오는 신인 천황과 천황의 가족들을 지금의 천황가에다 기꺼이 모시는 것이 제사의 의미라는 것이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고대일본은 한반도의 정복자들이 건너와서 한반도의 조상신에게 제사지내며 살고 있는 곳이며, 또한 한반도에 있는 천황족들의 조상신들까지 초혼해서 기꺼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고대왕실은 말할 것도 없고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천황가의 조상신 제사는 철저하게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고대로부터 일본왕실의 제1차 주권(主權)은 제사권(祭司權)이고, 제2차 주권은 정사권(政司權)이다. 앞에서 이미 간략하게 밝혔거니와, 스진천황은 신라신 대국주신을 제사지내게 됨으로써, 신도 국가의 기틀을 세우고 비로소 반석 같은 정사(支配)의 터전을 이루었다. 그런 견지에서, 오오사카교육대 사학과의 토리고에 켄사브로우(鳥越憲三郞) 교수가 다음처럼 주장한 것은 공감할 만하다.

“지금까지의 역사학에서 빠져 있었던 큰 문제는 씨족이나 부족의 수호신, 즉 그들이 받들어 제사지내는 신사(神社)의 제신(祭神)과 그것에 관련되는 종교 관념이다. 이는 고대사에서뿐만이 아니라, 중세사·근세사에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특히 고대에서는 그 사회를 움직이는 인자(因子)가 바로 ‘종교관념’이었다. 그 종교관념을 내버려두고 고대사회를 규명하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神神の中の古代豪族’, 1974)

이와 같은 주장을 실증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앞에서 살펴본 신도와 불교의 종교전쟁이다. 그렇다면 백제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인 2세기경 일본에 유입된 신라신도는 어떻게 종교관념으로 착근되었을까.

여기에는 신라 출신으로 왜의 지배자가 된 스진천황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스진천황에 대해 토우쿄우대 에카미 나미오(江上波夫, 1906∼) 교수는“스진천황은 고구려계 기마민족의 후손으로 남하하여 가야지방에 살고 있던 사람으로, 일본 최초의 정복왕이다”(‘기마민족국가론’, 1948)고 내세운 바 있다. 일본 패전 직후인 1948년 5월에 발표한 그의 주장은 소위 ‘임나일본부설’을 그 배후에 깔고 있는 학설이다.

필자는 스진천황이 고구려계 가야 출신의 일본 정복왕이 아닌, 신라 출신의 일본 정복왕으로 보고 있다. 스진천황은 신라신인 대국주신(대물주신)을 나라(柰良) 땅 미와산에 모시고 일본고대 역사상 최초로 제사권을 발동한 사제왕(司祭王)이기도 하다. 필자는 또 신라인 집단인 이즈모(出雲)족 출신의 스진천황이 처음으로 그가 다스리던 국가를 한국말로 ‘나라(奈良)’라고 하여 이두식 표기를 했던 것으로 추찰한다.

이는 필자만의 주장은 아니다. 이미 1900년에 역사지리학자인 요시다 토우고(吉田東伍, 1864∼1918년) 박사는 “나라(奈良)는 이 고장을 점거하고 지배하던 이즈모족이 ‘국가’라는 뜻으로 지은 명칭”(‘大日本地名辭書’, 1900)이라고 밝혔다. 그는 ‘나라’라는 한글까지 사전에다 직접 쓰면서, 한국어의 발자취를 입증한 바 있다. 또한 일본 고어학자인 마쓰오카 시즈오(松罔靜雄) 교수도 ‘일본고어사전’(日本古語大辭典, 1937)에서 역시 똑같은 사실을 밝혔다.

그런데 여기서 한마디 더 짚고 넘어갈 사실이 있다. ‘일본서기’등 고대 역사책에는 초대 왕부터 제9대왕까지의 조작된 왕들을 써넣고 있고, 제10대 왕에 신라인 스진천황을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니까 무려 9명의 왕들을 날조해 놓은 것이다.

일본의 저명한 학자들에 의해서 그와 같이 허위 조작된 ‘궐사천황’들은 일찍부터 비판받아왔다. 그러나 아직도 국수적인 우익사관 신봉자들은 날조된 9명의 왕을 내세우고 있다. 일본 역사에서의 날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근래의 각종 역사교과서 왜곡뿐만이 아니라 구석기 유물마저 날조함으로써 세계적인 망신을 당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본인의 날조 역사 이면에는 한국에 대한 콤플렉스가 작용하고 있다. 일본이 한국보다 더 오랜 역사시대를 누렸다는 거짓을 꾸며내느라, 일본 역사를 한국보다 600년씩이나 위로 끌어올려 놓았던 것이며, 사실(史實)에 전혀 없는 9명의 왕들까지 날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참고로 왜왕실에 ‘천황호(天皇號)’가 등장한 것은 668년경이다. 712년에 최초의 일본 역사책 ‘고사기’가 등장할 때에 고대의 모든 왜왕의 왕호도 천황으로 일제히 통일시켜 표기한 것임도 밝혀둔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실질적으로 일본의 제1대 천황인 스진천황은 제사권과 정사권을 확립하는 한편, 일본의 선주민족을 신라의 산업문화권에 안주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즉 선진 신라의 벼농사와 농기구·칼 등을 제작하는 철기산업, 스에키(須惠器, 쇠처럼 단단한 그릇이라는 쇠그릇으로 ‘쇠기’라는 고대 신라어에서 생겨난 명칭-필자 주)라고 하여 흙을 구워서 만드는 도기산업, 베틀에 의한 직조산업 등 선진문화산업은 당시 미개한 일본 선주민들로 하여금 이즈모민족의 신도(神道)신앙에 만족스럽게 순응토록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런 흔적들은 일본 옛 문헌들에서도 곧잘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대장간’을 한자어로 ‘카라카누치(韓鍛治)’라고 하거나, 땅을 파는‘삽’을 한국 삽이라는 의미의‘카라사비(韓)’로 표현하거나 재기를 ‘카라스키(韓鋤)’로 부르는 데서 고대 한국의 문물이 건너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통치권자가 가지고 건너간 신화(神話)와 신도(神道)라는 종교다. 일본 신도의 종주국인 신라에서 ‘신궁(神宮)’이 처음으로 섰다는 사실(史實)은 일본 사학자들도 시인하고 있다. 신사(神社)나 신궁이 일본보다 훨씬 앞서서 신라에 있었다는 것은 ‘삼국사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BC 57년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우고 서기 4년에 서거했다. 그의 아들 남해(南海) 차차웅(次次雄)이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던 서기 6년, ‘시조묘((始祖廟)’를 세웠다. 이후 신라의 왕들은 대대로 왕위에 오르면 반드시 시조묘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제21대 왕인 소지마립간은 487년 2월에 경주 나정 땅인‘내을(奈乙)’에다‘신궁’을 세웠다. 이후 신라의 왕들은 왕위에 오르면 역시 신궁에 참배했던 것이다.

이렇게 신라의 왕들이 등극한 직후 시조묘와 신궁에 참배한 것은 제1차 주권인 제사권을 행사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로써 제2차 주권인 정사권(政事權)까지 확립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라에서 시조묘를 세움으로써 최초로 제사권을 행사한 남해 차차웅에 대해서는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라 성덕왕(702∼737년 재위) 때의 학자 김대문은 “차차웅은‘자충(慈充)’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은 신라어로 무당을 가리키는 것이나, 세인이 무당은 신에게 제사를 올리므로 이를 외경하여 칭하기를 자충이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서 ‘자충’이나 삼한(三韓) 시대의 천군(天君), 특히 단군(檀君) 등은 통치권자로서 천신에게 제사드리는 제사장(祭司長)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하면 좋을 것 같다.

왜왕실에서 신라인 스진천황이 신라신인 대국주신(대물주신)에게 몸소 제사지낸 것 역시 신라의 자충이나 삼한의 천군처럼 제사권을 행사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산업이 발달하지 못하고 더더구나 과학적 사고방식이 등장하기 이전의 고대사회에서는 통치권자가 주술적인 방법을 동원해가며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백성들에게 행사함으로써 통치기반을 지켜나갔을 것이다. 그런 견지에서 김열규 교수의 다음과 같은 견해도 공감이 간다.

“신석기시대에는 사람이 죽어도 그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영혼불멸의 사상이 있었으며, 인간과 영혼 사이를 연결해주는 주술사로서의 무당의 존재를 인정하는 샤머니즘(Shamanism)이 널리 유행하였다.

특히 샤머니즘은 주술적인 방법으로 악귀를 물리쳐 씨족원들을 환난으로부터 구제한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한국에서는 고조선의 단군이나, 삼한의 천군, 신라의 차차웅 등에서 주술사의 모습이 발견된다.”(‘韓國神話와 巫俗硏究’, 1977)

앞에서 우즈다 징고로우 교수가 지적한 ‘신성한 무녀’도 똑같은 맥락에서 살필 수 있다고 본다.

사진 3 스진천황이 종교와 함께 가지고 온 신화에도 신라신의 모습이 나타난다. 일본 개국의 대표신인 ‘소잔오존(素盞烏尊, 스사나오노미코토)’과 그의 누이인 ‘천조대신(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은 신라신이다.(사진3 참조)

그런데 일본 신도주의자들은 천조대신을 떠받드는 동시에 그녀의 남동생인 소잔오존을 ‘악(惡)왕자’라고 적대적으로 표현, 이른바 ‘악신(惡神)’으로 비하시켜왔다. 사실 그 이유는 자못 단순하다. 소잔오존은 하늘신의 터전(高天原)에서 지상으로 하강할 때 그의 고국인 ‘황금의 나라’ 신라땅 우두주(牛頭州)로 내려갔다는 것이 ‘일본서기’에 역력하게 실려 있기 때문이다. 즉 소잔오존은 어떻게 조작할 수 없는 신라신인 것이다. 반면에 소잔오존의 친누이인 천조대신의 경우는 그냥 하늘나라에 살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에도시대 후기에 앞장서서 신도주의 존왕론(尊王論)을 만든 국수주의자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 1776∼1843년) 등에 의해서, 천조대신은 국신(國神)으로 모셔져 정상에서 떠받들게 되었고, 모국인 신라에 갔다가 이즈모 땅으로 건너온 소잔오존은 배격당하기에 이른 것이다.

히라타 아쓰타네의 국수주의적 신도사관 조작이 얼마나 황당무계하고 터무니없는 짓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일본의 권위 있는 인명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그는 고증학적인 요소를 내버리고 신도적 요소를 발전시켜, 복고주의와 국수적·배외적(排外的) 입장에서 유교와 불교까지도 배격했다. 또한 국학사상을 중심으로 장대한 사상체계를 수립하기 위해서, 천지시원(天地始原)으로부터 현세와 내세에까지 고사(古史)와 고전(古傳)에다 새로운 해석을 첨가시키고 기독교며 심령술, 신선술까지도 이용했다. 그 때문에 그의 사상체계는 도리어 비합리적이며 신앙적으로 조작되었다.”(앞 ‘인명사전’)

히라타 아쓰타네 같은 국수주의자들의 장난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권위 있는 사학자들에 의해 신라신인 소잔오존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 최초로 과학적 역사학의 태두로 존경받던 토우쿄우대 사학과의 쿠메 쿠니타케(久米邦武, 1839∼1931년) 교수는 1907년에 쓴 ‘일본고대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소잔오존은 신라국의 군주로 관련지어서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으로서 숭배했다.… 소잔오존은 처음에 신라에 계셨고, 그곳은 우두주(牛頭州)인 소시머리((ソシモリ, 曾尸茂梨)로서 강원도 춘천부이다.… 소잔오존을 뒷날에 부르기를 우두천황(牛頭天王) 또는 신라명신(新羅明神)으로서 … 지금도 쿄우토(京都) 굴지의 사당인 야사카신사(八坂神社)에 모시며 끊임없이 사람들의 존숭을 받고 있다.”(‘日本古代史’, 1907)

소잔오존(스사노오노미코토)이 신라신이며 일본의 이즈모(出雲) 땅으로 건너가 일본 개국신으로서 눈부신 활동을 했다는 내용은 이 책의 제6장 제22절부터 25절까지 상세히 다루고 있다. 또한 흥미진진한 한일동족론도 이 책에 담겨 있으나, 지면 관계상 생략하기로 한다.

한편으로 쿠메 쿠니타케 교수는 ‘일본고대사’라는 책을 쓰기 전인 1891년에 ‘신도는 제천의 고속(神道は祭天の古俗)’이라는 장편 논문을 발표하여 학계는 물론이고 세인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

이 논문은 신라신인 소잔오존이 이즈모 땅에서 행한 족적, 한일 동족론에 대한 규명, 그리고 일본천황들이 제사지내는 신은 ‘천조대신’이 아니라 고구려의 동맹(東盟)의 신을 비롯해 부여의 영고(迎鼓)의 신, 예의 무천(舞天)의 신 등 고조선의 천신들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이었다.

이 논문이 발표된 뒤 쿠메 쿠니타케 교수는 자택에서 국수주의자들로부터 기습 테러를 당하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일본 신도의 뿌리가 고조선과 신라의 신도에 있다는 사실은, 당시까지 국수적 신도주의자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숨겨져온 것이었다. 국수적 신도사관에 의해 ‘대일본제국’의 천황국가론에 일대 타격이 된 이 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학문의 자유는 유린당하기 시작했다. 그 필화사건 때문에 쿠메 쿠니타케 씨는 토우쿄우대 교수직에서 추방당하는 등 불행을 겪었지만, 16년이 지난 후에는 일본 역사의 명저로 꼽히는 ‘일본고대사’와 ‘나라사’를 동시에 써냄으로써 자신의 소신을 꺾지 않았다.

소잔오존이 신라신이라는 사실은 그 이후에도 현대 일본의 여러 학자들이 시인하고 있으며, 오늘날 나카가와 토모요시(中川友義) 교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출처; 日王, 한국말로 신라神 모신다|신동아 (donga.com)

 

日王, 한국말로 신라神 모신다|신동아

 

shindonga.donga.com

 

 

옛날엔 한국이 일본에 주기만 했다고?

등록 2007-12-13 00:00 수정 2020-05-02 04:25

옛날엔 한국이 일본에 주기만 했다고? (hani.co.kr)

 

옛날엔 한국이 일본에 주기만 했다고?

undefined

h21.hani.co.kr

 

 

 

입력 2002-02-03 17:43업데이트 2009-09-18 15:55

[과학]"일본인 80% 한반도 등 대륙 혈통"|동아일보 (donga.com)

 

[과학]"일본인 80% 한반도 등 대륙 혈통"

월드컵 공동 개최를 앞두고 아키히도 일왕이 고대 천황은 백제왕의 후손이라고 밝혀 ‘한일 간 핏줄 커넥션’이

www.donga.com

 

 

입력 1998. 5. 31. 11:49수정 1998. 5. 31. 11:49

日 기토라고분 천문도 고구려에서 관측된 별자리 확인

 
 

日 기토라고분 천문도 고구려에서 관측된 별자리 확인

(도쿄=연합) 李洪奇특파원 = 일본의 나라(奈良)縣 아스카(明日香)의 기토라고분석실(7세기말∼8세기초)에서 지난 3월 발견된 천정벽화 천문도가 옛 고구려 지역에서 관측된 별자리를 토대로 그려

v.daum.net

 

 

 

[한국통사] 백제와 가야계가 편찬한 일본서기 한국만이 해석 가능 | 일본서기와 고사기 역사서에 관한 이해

2020. 9. 21.

https://youtu.be/JOE7MtDjDrk?list=PLRAmvpNm4pmlDhz8fprvBChZ3EzECz9IQ 

 

 

부여의 다른 이름이 왜이다ㅣ왜의 실체에 관한 고찰 1ㅣ김산호 이사장ㅣ2018 공동춘계학술대회ㅣSTB상생방송

2020. 2. 18.

https://youtu.be/veZlelN0_3k?list=PLRAmvpNm4pmlDhz8fprvBChZ3EzECz9IQ 

 

 

 

 

 

<참고자료>

 

왜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한국고대사 | 한국의 벼농사, 금속문명이 일본으로 전해지다. - Daum 카페

 

 

일본 땅에 단군신앙이 살아있다. (prehistory.co.kr)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