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3. 고조선 고고학 (14) B.C. 1세기 광주 신창동유적에서 벼 껍질, 현악기, 베틀, 문짝, 칠기(漆器), 목제 농기구, 수레바퀴, 비단 조각 등 출토 본문
3. 고조선 고고학 (14) B.C. 1세기 광주 신창동유적에서 벼 껍질, 현악기, 베틀, 문짝, 칠기(漆器), 목제 농기구, 수레바퀴, 비단 조각 등 출토
대야발 2025. 2. 1. 10:23
고고학자들에게 저습지(低濕地) 유적은 ‘대박’으로 통한다. 마치 타임캡슐처럼 저습지에서는 수천 년 전 유물이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심지어 썩기 쉬운 나무나 풀, 씨앗 등 온갖 유기물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런 보존은 유물이 포함된 연못이나 우물과 같은 습지 위에 흙이 뒤덮여 외부 공기를 완벽하게 차단해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조현종 전 국립광주박물관장(60)과 둘러본 광주 신창동 유적은 한국 저습지 발굴을 태동시킨 역사적인 장소다. 1992년부터 20년 넘게 발굴이 이어지고 있는 이 유적에서는 기원전 1세기 원삼국시대 유물이 총 2000여 점이나 출토됐다.
당시 사람들이 먹고 버린 벼 껍질부터 현악기, 베틀, 문짝, 칠기(漆器), 목제 농기구, 비단 조각, 심지어 그들이 배설한 기생충 알까지 나왔다. 이쯤 되면 미시생활사 복원의 ‘종합선물세트’와 다름없다. 조 전 관장은 고속도로와 국도 1호선 사이의 발굴 현장에서 “고고학자로서 운이 참 좋았다”며 오래전 기억을 더듬었다.
○ 국도 방향을 바꾼 역사적 발굴
1992년 5월 광주 신창동 국도 1호선 직선화 공사 현장. 도로 포장을 위한 건설 중장비로 부산한 현장에 조현종(당시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이 황급히 흙을 퍼 담았다. 그는 연구실에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흙을 채질한 뒤 물을 부었다. 물에 뜨거나 가라앉은 물질을 확인하다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 조각과 볍씨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점토대토기는 초기철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 양식. 오랫동안 품어온 의문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오래전부터 농경 유적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때까지 출토된 건 고작 불에 탄 쌀 몇 알이 전부였거든요. 영산강 유역 어딘가에 농경 유적이 있으리라는 짐작이 현실로 들어맞은 겁니다.”
그해 6월 공사는 전면 중단됐다. 국도 1호선은 유적을 피해 우회도로가 만들어졌다. 공사 중 발견된 유적으로 인해 국도 방향이 바뀐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문화재위원이던 김원룡 서울대 교수와 한병삼 국립중앙박물관장, 김기웅 경희대 교수가 진가를 알아보고 당국에 유적 보호를 강력히 요청한 결과였다.
김원룡은 한발 더 나아갔다. 당시 지건길 국립광주박물관장에게 “발굴을 즉각 중단하고 먼저 저습지 발굴기술부터 배워 오라”고 했다. 그때 한국 고고학계는 저습지 발굴 경험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조현종의 회고.
“발굴 중이던 유적을 중간에 덮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하지만 흠 없이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곧 수긍했습니다. 유적을 위해서도 저 개인을 위해서도 훌륭한 판단이었죠.” 조현종은 그해 12월 일본 나라문화재연구소로 떠나 저습지 발굴을 배운 뒤 1995년 5월 신창동 유적 발굴을 재개했다.
○ 삼한 최고(最古)의 수레를 발견하다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수레바퀴였군요!”
2000년 말 구라쿠 요시유키(工樂善通) 사야마이케(狹山池) 박물관장을 만난 조현종은 그가 그린 스케치 한 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해 중국 쓰촨(四川) 성에서 출토된 수레바퀴 유물을 묘사한 그림은 3년 전 신창동에서 나온 목기(木器) 형태와 흡사했다.
발굴팀은 해당 유물에 대한 정밀조사에 들어갔다. 당초 의례용 기물로 알았던 유물은 바퀴살과 바퀴축, 고삐를 고정하는 가로걸이대(車衡·거형)로 각각 밝혀졌다. 앞서 평양 낙랑고분에서 기원전 2세기의 수레 유물이 발견됐을 뿐, 삼한지역에서 최초로 출토된 기원전 1세기 수레 유물이었다. 학계는 흥분했다.
‘마한 사람들은 소나 말을 탈 줄 모른다(不知乘牛馬)’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을 토대로 당시 첨단의 수레 제조기술을 익힌 고조선 유이민(流離民) 집단이 삼한으로 이주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한반도 고대사 해석의 큰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대발견이었다.
저습지 특유의 지난한 발굴 작업 끝에 나온 값진 결과물이었다. 땅속에서 수천 년 묵은 유기물이 밖으로 나왔을 때 급작스러운 부식을 막으려면 약품 처리와 습기 유지 등 꼼꼼한 준비가 필수.
워낙 조심스럽게 발굴이 진행되다 보니 신창동 유적에서는 가로 25m, 세로 25m 넓이의 유구를 3m 깊이까지 파는 데 3년이나 걸렸다. 저습지가 아닌 일반 발굴 현장에선 같은 면적의 작업에 통상 2개월 정도가 걸린다.
국립광주박물관장에서 정년퇴직한 그에게 남은 과제를 물었다. “신창동에서 야자수 열매를 꼭 닮은 나무 그릇이 나왔습니다. 나는 이게 삼한이 멀리 동남아시아와 교류한 흔적이라고 믿어요. 동북아시아에만 국한하지 않고 시야를 넓혀서 연구해 보고 싶습니다.”(1)
동아일보, ‘자연의 타임캡슐’ 저습지… 수천년전 유기물까지 원형 그대로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1> 광주 신창동 유적 발굴한 조현종 前 광주박물관장,
9大 키워드로 알아본 ‘신창동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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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신창동 유적 출토 2000여 년 전 탄화미(위)와 각종 목기(가운데) 및 한국 최고의 비단(아래 왼쪽)과 현악기.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
1. 우리나라 최초의 저습지 유적 조사 = 영산강 변 구릉의 끝자락에 위치한 신창동 유적의 저습지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저습지 유적의 조사방법론을 적용해 발굴됐다. 유기물 보존이 양호한 환경인 이곳에서 2000여 년 전 우리 문화사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목기와 칠기, 토기류, 동·식물 유체 등 생생한 자료들이 출토됐다.
2. 세계 최대 벼 생산량 = 신창동에서는 벼와 조, 밀, 들깨, 오이, 삼 등의 다양한 재배작물과 155㎝ 두께의 벼껍질 압착층, 벼를 재배한 밭과 논이 확인됐다. 특히 밭벼의 재배는 우리나라 최초로 확인된 것이다. 신창동에서 확인된 벼껍질 압착층을 벼의 무게로 환산하면 500여t에 달한다.
중국이 자랑하는 신석기시대 농경유적인 허무두(河姆渡) 유적에서 확인된 벼껍질 압착층도 최대 두께 70㎝ (벼 무게로 환산 시 100t 정도)에 불과해 신창동 유적의 벼껍질 압착층은 현재까지 조사된 것 가운데 세계 최대의 벼 생산 자료다.
3. 경이로운 목기 = 신창동 저습지 유적에서 출토된 목기의 수량은 870여 점에 달한다. 무기·농기구·공구·용기·제의구·방직구·악기·수레 부속구·건축부재 및 기타 생활용품 등 종류도 다양하다. 농공구의 자루와 수레바퀴 등은 단단한 참나무를 사용하고 북은 울림이 좋은 버드나무를 이용하는 등 나무의 성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용도에 맞는 적절한 나무를 선정한 것이 특징이다.
4. 칠기의 메카 = 신창동 유적에서는 완성된 칠기뿐 아니라 칠기 제작을 알려주는 칠이 묻어 있는 천조각과 칠이 담긴 용기, 칠 주걱 등이 우리나라 최초로 출토됐다. 이는 2000여 년 전 신창동 일대에 고도의 칠기 제작 기술을 가진 집단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조선시대에 유적 주변에 위치한 영산강을 칠천(漆川)이라 칭했던 기록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5. 한국 최고의 비단과 베틀 = 신창동 유적에서는 옷감을 짜기 위한 실을 만드는 가락바퀴와 실의 탄력을 일정하게 하기 위한 실감개, 그리고 베를 촘촘하게 짜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인 바디가 출토됐다. 이중 바디는 우리나라 선사·고대 유물 중 유일한 것으로, 이 시기 베틀의 구조를 밝혀낼 수 있는 중요 자료다. 최근 확인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비단의 존재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나오는 ‘양잠을 알고 옷감을 만들었다’는 마한 관련 기록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6. 최고의 현악기 = 신창동 유적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현악기인 슬(瑟)이 출토됐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도 삼한 사람들이 노래 부르고 춤을 출 때 슬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신창동 현악기는 대전 월평동 및 경산 임당 121호분 출토품 및 신라 토우에서 보이는 현악기 등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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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신창동 유적 출토 바디 등 방직 도구와 발화 도구, 수레바퀴 부속구, 신발골(위부터).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
7. 최고의 발화 도구 = 우리나라 최초이자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발화 도구인 발화막대와 발화막대집, 발화대가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됐다. 이와 함께 한쪽에 불을 붙였던 흔적이 남아 있는 관솔(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 조각)도 확인됐다.
8. 최고의 수레바퀴 = 신창동 유적에서는 마차와 관련된 바퀴통, 바퀴살, 바퀴축, 가로걸이대 등 수레 관련 부속구가 출토됐다. 전체 크기가 직경 160㎝로 추정되는 나무 수레바퀴의 확인으로, “소와 말을 탈 줄 모르고 장례에 다 써버린다”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은 설득력을 잃게 됐다. 신창동 유적과 비슷한 시기의 수례 관련 자료로 평양 지역 낙랑의 금속제 수레부속구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9. 세계 최고의 신발골 = 신을 만들 때 사용됐던 틀인 신발골이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됐는데, 이 시기(기원전) 신발을 만들 때 사용된 도구로는 유일한 유물이다. 발등에서 신코가 경사져 있어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에서와 같이 가죽신을 만드는 데 사용됐을 것으로 보인다.(2)
문화일보, 9大 키워드로 알아본 ‘신창동 유적’, 2012.12.27.
<자료출처>
(1) ‘자연의 타임캡슐’ 저습지… 수천년전 유기물까지 원형 그대로|동아일보 (donga.com)
(2) 9大 키워드로 알아본 ‘신창동 유적’ (naver.com)2012-12-27
<참고자료>
광주 신창동 유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신창동 유적서 ‘초기 철기시대 밭’ 국내 첫 확인 | 중앙일보 (joongang.co.kr)2015.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