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우리겨레력사 (22) 윤내현 교수 '한국 열국사 연구' 본문

윤 교수는 이 시기 고조선 붕괴 후 동부여·읍루·고구려·동옥저·동예·최씨낙랑국·대방국·한(삼한)·신라·백제·가야 등의 고대국가가 들어서 고조선의 후예를 자처하며 치열하게 다퉜다고 본다.
윤 교수의 연대 구분은 기원 전후부터 약 300년 동안을 '원(原)삼국시대'로 부르며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체제의 원시적 형태로 보는 통설과 어긋난다. 윤 교수는 원삼국시대라는 용어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시기라는 뜻을 담고 있어서 열국의 역사를 통째로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열국들의 활동 영역도 남서쪽으로는 중국 요서(遼西) 지역과 상하이(上海) 등 동부 해안지역 , 북동쪽으로는 만주와 연해주를 아우를 만큼 광범위하다. 열국들이 고조선의 뒤를 이은 만큼, 고조선이 요하(遼河) 서쪽까지 넓은 영토를 가졌다는 윤 교수의 고대사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 윤내현 교수 '한국 열국사 연구' 개정판 출간

"고조선 뒤이은 국가들 치열하게 다툰 시기"
고대사에 대한 주류 학계의 통설을 뒤집어 재야 사학계의 거두로 꼽히는 윤내현(76) 단국대 명예교수가 '한국 열국사 연구' 개정판(만권당)을 펴냈다.
1998년 첫 발간 이후 18년 만이다. 수록된 지도와 일부 표현을 다듬었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이전 판본과 같다.
책은 고조선이 멸망한 기원전 1세기부터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사국시대'가 열리는 5세기까지 600여 년을 '열국(列國)시대'로 정의한다.
윤 교수는 이 시기 고조선 붕괴 후 동부여·읍루·고구려·동옥저·동예·최씨낙랑국·대방국·한(삼한)·신라·백제·가야 등의 고대국가가 들어서 고조선의 후예를 자처하며 치열하게 다퉜다고 본다.
윤 교수의 연대 구분은 기원 전후부터 약 300년 동안을 '원(原)삼국시대'로 부르며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체제의 원시적 형태로 보는 통설과 어긋난다. 윤 교수는 원삼국시대라는 용어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시기라는 뜻을 담고 있어서 열국의 역사를 통째로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열국들의 활동 영역도 남서쪽으로는 중국 요서(遼西) 지역과 상하이(上海) 등 동부 해안지역 , 북동쪽으로는 만주와 연해주를 아우를 만큼 광범위하다. 열국들이 고조선의 뒤를 이은 만큼, 고조선이 요하(遼河) 서쪽까지 넓은 영토를 가졌다는 윤 교수의 고대사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윤 교수는 통치제도가 지방분권제에서 중앙집권제로 변모했고 새로운 종교사상과 철학체계가 형성되는 등 열국시대를 한국사의 중요한 전환기로 평가한다.
그는 "민족을 단위로 본다면 한민족은 열국시대 말기에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을 지배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며 고조선과 삼국시대 사이의 '낀 시대'라는 통념을 깬다.
'한국 열국사 연구'는 '한국 고대사 신론'(1986년), '고조선 연구'(1994년)와 함께 윤 교수의 고대사 연구 3대 저작으로 꼽힌다. '고조선 연구'는 올해 초 개정판이 나왔다. 만권당은 올해 안에 '한국 고대사 신론'도 개정해 출간할 계획이다.(1)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윤내현 교수 '한국 열국사 연구' 개정판 출간, 2016. 7. 5.
최근 또다른 한국고대사 관련 연구물인 「한국열국사연구」를 출간한 윤내현 단국대 교수는 원래 중국 고대사가 전공이었으나 지난 82년 발표한 `기자조선고'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한국고대사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의 한국고대사 연구 서막을 알리는 이 논문은 그때까지 남한 사학계가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기자조선이 당시 발굴된 갑골문과 고고학 유물들을 볼 때 실재 존재했음이 명백하다고 주장함으로써 발표 당시 굉장한 파문을 일으켰다.
■ 윤내현 학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1999. 3. 13.
그는 이후 일련의 한국고대사 관련 논문에서 광범위한 중국 고대사서들과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 나온 고고학적 발굴 성과들을 증거로 위만조선이 들어서기 이전까지 고조선의 중심영역이 지금의 북경 동쪽을 흐르고 있는 난하(鸞河) 유역이었으며 그 통치영역이 만주와 한반도 전역이었다는 과감한 주장들을 줄기차게 내놓았다.
특히 그는 기원전 108년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설치했다는 낙랑.진번.임둔.현도의 이른바 한사군(한사군(漢四郡)) 위치가 이병도 이후 남한사학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평양일대 한반도 북부가 아니라 난하 동쪽이었다는 주창했다.
남한 사학계 통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이런 대담한 학설은 한국 고대사학계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무엇보다 윤교수가 활발한 저술활동 뿐만 아니라 방송매체에까지 등장해 이병도 이후 남한의 한국고대사 통설들을 뒤엎고 일반국민들에게도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이른바 `강단사학계'가 거세게 윤교수를 공격하고 나섰다.
지금도 그렇지만 `기자조선고' 발표 당시에도 한국 고대사학계는 일제때부터 한국고대사 연구를 주도한 이병도와 그의 제자들을 필두로 한 이른바 `강단사학자' 그룹과 `재야사학자'들이 마주 달리는 열차처럼 첨예한 대립을 빚고 있었다.
이기백 당시 서강대 교수를 비롯해 이기동(동국대),노태돈(서울대) 교수 등 이른바 `강단사학계'를 이끌고 있는 학자들이 윤교수 비판을 주도했다.
반면 윤교수를 비판한 이들 학자들을 `강단사학자'라고 싸잡아 비난하고 있던 `재야사학자' 그룹에서는 윤교수를 지지하고 나섰다.
`윤내현 학설'을 둘러싼 이런 격렬한 논쟁이 급기야 인신공격으로 비화하고 나아가 기존 강단사학계가 현재는 윤교수의 주장을 아예 묵살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의 학설에는 우리 고대사학계가 그냥 묵살하기 어려운 대목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 한국고대사 분야에서 윤교수 만큼 광범위하게 중국 문헌과 중국 고고학 성과를 두루 인용한 학자도, 윤교수보다 많은 고대사 관련 저술들을 낸 학자도 남한에서는 거의 없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는 그만큼 윤교수가 나름대로 치밀한 문헌고증을 했으며 고고학 성과를 최대한 반영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윤교수의 학설이 북한역사학자 리지린이 쓴 `고조선사'를 상당부분 인용하고 있고 이 때문에 기존 남한 학계에서는 "윤내현의 학설은 리지린을 베낀데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실제 리지린은 윤교수처럼 고조선 중심지를 난하 유역으로 보고 있으며 두 학자의 인용문헌과 인용대목이 대부분 겹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설사 윤교수가 일부 남한 학계 주장처럼 리지린의 연구성과를 대폭 수용했다고 해서 이것이 "윤교수 학설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며 북한에서 나온 한국 고대사 관련 연구업적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는 더욱 바람직하다"고 윤교수 지지자들은 반박하고 있다.
더구나 기존 남한학계가 윤교수 학설에 대한 공격의 주된 근거로 삼고 있는 `고조선 중심지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부지역이 아니며 이른바 한사군 또한 지금의 요서지방에 설치됐다'고 하는 주장은 윤교수나 리지린만의 독특한 학설이 아니라는 점도 남한 학계가 주목해야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고조선 중심지와 한사군이 만주에 있었다는 주장은 가깝게는 단재 신채호와 위당 정인보가 주장했던 것이며 조선후기 실학자 중 일부도 이런 학설을 폈다는 것은 기존 남한학계 통설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요구하는 대목이다.(2)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윤내현 학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1999. 3. 13.
<자료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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