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29) 대한민국임시정부 제3대 국무령 이상룡(1925년 7월 7일 ~ 1926년 2월 18일) 본문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29) 대한민국임시정부 제3대 국무령 이상룡(1925년 7월 7일 ~ 1926년 2월 18일)
대야발 2025. 5. 12. 16:56

■ 상하이 삼일당에서 초대 국무령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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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
ⓒ 이항증 |
이상룡은 60대 중반의 고령으로 각 단체의 통합을 위해 조정자 역할을 하면서, 갈수록 강대해지는 일제와 싸우기 위해서는 통합 이외의 길이 없다고 역설하였다. 단체의 수장을 맡기도 했지만 대부분 2선에서 조정자·중재자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던 중에 임시정부 수반의 제의를 받고, 지도자들의 의견을 두루 청취했다. 지지하는 편이 있었고, 반대하는 사람, 그리고 이제야 임시정부가 항일무장투쟁의 본산이 될 것을 기대하는 측이 있었다.
그는 8월 하순 단둥(안동)으로 가서 영국선박 애인호를 타고 서해를 넘어 상하이에 도착했다. 막내 동생 봉희의 장남 광민의 보필을 받았다. 그는 정의부의 민사부 서무과 주임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을축년(1925년) 7월 석주 어른께 상해 임시정부 초대국무령으로 부임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내각책임제의 국무령이면 지금의 대통령에 해당한다. 취임식이 9월 며칠인지는 몰라도 상해로 떠나시기는 9월 9일날 떠나셨다.
군정서 회의 후에도 여러 차례 연락이 오고가고 하더니 임정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신 것 같았다. 상해에서도 만주권 독립인사를 영입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활동은 북간도, 서간도를 망라한 만주 일대에서 일찍 시작했고, 그 쌓아 놓은 기반도 무시 못했지.
국무령이면 내각의 총책임자라 정부 최고 높은 자리라고들 했으나, 내게는 항상 시할아버지였을 뿐이었다. 다만 나가나 들어오나 그 어른 앞에선 저절로 고개 숙여지고 엄숙한 그 무언가가 느껴졌다고나 할까…. (주석 3)
대통령 궐위시기 임정을 이끌고 있던 이동녕·이시영·노백린·조상섭·김구 등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들과 향후 임정의 운영에 관해 논의하고, 만주 쪽의 사정을 설명하였다. 또 상하이와 임정의 사정도 들었다.
9월 24일 상하이 삼일당에서 초대 국무령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취임사는 다음과 같다.
국무령 이상룡 취임사
나는 이에 일반 국민의 앞에서 가장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삼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의 자리에 취임하나이다.(…)
이제 경장쇄신을 시작하여 국민 전체가 온전히 대동단결의 조직선에서 함께 분투하여야 하겠으며, 이를 조속히 성취하려면 먼저 그동안 마음을 다해 희생적으로 분투하여 오던 용감한 전사들이 속히 최고기관(대한민국 임시정부) 아래에서 완전히 결합하여 운동의 기초를 공고히 하여 역량을 강대하여야 될 줄 깊이 믿고 이에 힘쓰려 하나이다.(…)(주석 4)
국내의 한 신문도 이를 간략하게 보도했다.
이상룡 씨가 임시정부의 국무령이 되야 일전에 상해에 도착하였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 이씨는 지난달 24일 밤에 삼일당에서 취임식이 있었다는 데 최 의장의 사회로써 우렁찬 노래와 식사가 있었다. 하여 방침은 대동단결을 이루어서 민주적으로 조직을 일구고 기초를 공고히 함에 있다고 선언하였다는 바 그 뒤에 만세를 삼창한 후 폐식하였다는데 참관하는 동포도 많이 있어서 근래에 처음 있는 성황이었다더라. (주석 5)
국무령은 명칭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많은 권력이 부여된 임시정부의 수반이다. 하지만 그는 전임 박은식과 같이 권력이나 명예에 급급한 인물이 아니었다. 취임 당시 67세로 건강도 썩 좋은 편이 못되었다. 여생을 바쳐 임시정부를 발전시키고 이를 동력삼아 조국광복에 초석이 되고자 다짐한다.
국무령 취임 후 약 보름 동안 주변의 인물들과 협의해 내각을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10월 10일과 12일 양일간에 걸쳐 이탁·김동삼·오동진·윤세용·현천묵·윤병용·김좌진·조성환·이유필 등 9명을 국무위원으로 발표하였다.
이들 중 이유필을 뺀 나머지 8명이 모두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탁과 김동삼·오동진·운병용은 정의부의 인물이었고, 현천묵과 김좌진·조성환은 신민부의 인물이었으며, 윤세용은 참의부의 인물이었다. 임시정부의 지도층을 만주에서 무장투쟁 경력을 갖춘 인물들로 구성해 군사위주의 최고기관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주석 6)
주석
3> 허은, 앞의 책, 138쪽.
4> <독립신문> 호외, <국무령 이상룡 취임식 거행>, 1925년 9월 25일치.
5> <동아일보>, 1925년 10월 2일치.
6> 채영국, 앞의 책, 225~226쪽.(1)
국무령 사임하고 다시 서간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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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주 이상룡의 임청각의 군자정. 그는 “공자·맹자는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고 하며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
ⓒ 장호철 |
이상룡의 조각은 실패했다. 각료에 지명된 인사들이 하나같이 취임을 사양(거부)한 것이다. 상하이 쪽 인사들의 의견을 충분히 고려하여 주로 만주의 무장독립운동가들을 기용했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이상룡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인물을 국무위원으로 선임했다. 김동삼·김좌진·오동진·윤병용·윤세용·이탁·이유필·조성환·현천묵 등이 그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상해로 간다면 만주지역 독립운동 전선에는 커다란 공백이 생기게 된다. 더구나 그때는 일제가 만주 군벌과 '삼시협정'을 맺어 한인 독립운동 세력을 압박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불똥은 정의부 내에서 일어났다. 1925년 말 제2회 중앙의회가 중앙행정위원회에 대해 불신임안을 제출하자 중앙행정위원회는 이에 맞서 중앙의회 해산을 결정하고 총사퇴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25년 10월 10일자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선임된 김동삼은 선뜻 상해로 부임할 수 없었다. (주석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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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표지 |
ⓒ 민족문제연구소 |
만주 무장독립운동 세력이 조직한 정의부의 내부 사정도 크게 작용했다. 당초의 약속과 다르다는 주장이었다.
정의부 중앙행정위원회와 중앙의회 간에 큰 충돌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 원인은 이상룡이 중앙의회 의결사항을 무시하고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한 데서 비롯되었다. 정의부 중앙행정위원들은 임시정부의 두 파견원 오영선과 이유필이 만주에 왔을 때 신민부의 대표들까지 불러 4개의 합의사항을 만들고, 이면으로 임정의 최고 책임자를 정의부에서 추천한 인물로 추대하자는 사항을 제시한 바 있다. 이들의 이러한 제시를 중앙행정위원들이 받아들여 이상룡을 추천하고, 또 이상룡은 행정위원들의 말을 듣고 상해로 와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그런데 중앙행정위원들은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천하는 건에 대해서는 중앙의회의 안건에 상정하지 않고 4개의 합의사항만을 의결사항으로 보냈다. 그 결과 중앙의회에서는 4개의 합의사항을 임시정부의 각료를 위원제로 고치는 것과 장차 임정을 만주로 옮기자는 등의 조건을 제시하며 이 안건을 통과시켰다. 중앙의회의 의결대로 임시정부를 만주로 옮길 것이라면 이상룡이 상해로 갈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주석 8)
이유가 무엇이던 간에 이상룡으로서는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본인이 원했던 자리가 아니고, 떠밀리다시피 하여 추대된 것인데, 결국 조각이 안 된 것이다. 해서 이듬해 2월 18일 미련없이 국무령을 사임하고 베이징을 거쳐 서간도 호란(呼蘭)으로 돌아왔다.
공은 탄식하기를 "내가 늙은 몸으로 헛된 명예에 몸을 굽히는 것은 절대 내 평소의 바람이 아니다. 그래도 이번에 몸을 한 번 움직인 것은 각각의 의견들을 조정해서 통합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그럴 가망이 없으니, 내 어찌 여기에 지체하랴"하고, 국무령직을 버리고 귀로에 올랐다. 북경에서 난리를 만나 이듬해 봄에 호란으로 돌아왔다.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가을달이 사람 청해 경솔히 문을 나섰다가
봄바람을 짝으로 삼아 집으로 잘 돌아왔네
산도 울고 노하는 시기가 난무하는 판국에서
웃는 낯으로 맞이해 주는 건 너 꽃뿐이로다. (주석 9)
조각에 실패한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의정원은 이상룡의 후임으로 양기탁을, 다시 안창호를 국무령으로 선출했으나 이들은 부임하지 않았고, 한동안 의정원 의장 최창식이 국무령을 대리했다. 1926년 7월 홍진이 취임했다가 12월 9일 사임하고, 12월 10일 김구가 선출되는 곡절을 겪으면서 임시정부는 겨우 정상화되었다.
서간도 무장전쟁론자인 이상룡이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자 초긴장했던 일제는 그가 사임하자 한시름을 놓으면서도 계속해서 그의 뒤를 쫓았다. 손부 허은 여사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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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시절을 증언해준 허은(1907~1997) 여사.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을 남겼다. 후손 이항증 선생의 허락으로 이 작품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 이항증 |
3월에 국무령 사임하고 상해에서 서간도로 나오실 때 일경들이 당신 뒤쫓고 있다는 보도를 천진에서 신문을 보고야 놀랐다. 그때 당숙(이광민)이 함께 수행했다. 신문을 본 당숙은 속으로 '저 칠순 노인 가다가 만약에 잡히는 날이면 말이 아니다. 일본놈 손에 걸리기만 하면 영 끝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천진부두에 도착하니 웬 사람들이 와 사진을 찍어 갔다. 신문기자였는지 중국경찰인지 모른다 했다. 당시 어른께서는 하이칼라 머리에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계셨다. 복장은 역시 중국옷을 입었고 그래야 중국사람 행세 하거든, 사진 찍어간 것이 마음에 걸려서 배에서 내리자마자 이발관에 가 머리와 수염을 빡빡 깎아 드렸다. 연락선 시간이 다음날 아침이었다. 그날 밤은 여관에서 자야 했다. (주석 10)
7> 김병기, <만주지역 통합운동의 주역 김동삼>, 14쪽.
8> 채영국, 앞의 책, 226~227쪽.
9> 권상규, 이상룡의 <행장(行狀)>, <석주유고(하)>, 161쪽.(이후 <행장> 표기)
10> 허은, 앞의 책, 143쪽.(2)
<자료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