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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5) 9대 성종(1469년~1494년) 1470년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 1474년 『오례의(五禮儀)』, 1476년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1478년 『동문선(東文選)』, 1485년 『경국대전(經國大典)』 완성 · 반포, 『동국통감(東國通鑑)』 1492년 『대전속록(大典續錄)』 완성, 1493년 『악학궤범(樂學軌範)』 본문

남국/조선

1. 조선 (5) 9대 성종(1469년~1494년) 1470년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 1474년 『오례의(五禮儀)』, 1476년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1478년 『동문선(東文選)』, 1485년 『경국대전(經國大典)』 완성 · 반포, 『동국통감(東國通鑑)』 1492년 『대전속록(大典續錄)』 완성, 1493년 『악학궤범(樂學軌範)』

대야발 2025. 9. 12. 17:37

 

 

 

 

1469년 예종의 뒤를 이어 성종(成宗, 1457~1494년, 재위 1469~1494년)이 13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성종은 왕의 계승 순위에서는 넘버 3의 위치였지만, 장인 한명회의 영향력 속에 대비인 정희왕후의 지원으로 왕이 될 수 있었다. 

 

즉위 초반에는 대비의 수렴청정을 받기도 했지만, 호학(好學) 군주 성종은 학문적 능력과 정치력을 바탕으로 왕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해나갔다. 성종은 세조대에 추진했던 ‘경국대전’ ‘동국통감’의 편찬 사업을 완성함으로써 조선 전기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성종의 묘호(廟號)가 이룰 ‘성(成)’ 자를 쓰는 ‘성종(成宗)’인 배경이다.

 

성종은 선왕인 세종처럼 인재 등용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세종에서 세조 시대를 거치면서 국정 경험을 쌓은 학자들을 최대한 중용했다. 이 결과 성종 시대에는 정인지, 신숙주, 서거정 등 쟁쟁한 학자들이 배출됐다. 특히 ‘악학궤범(樂學軌範)’의 편찬을 주도한 성현(成俔, 1439~1504년)은 성종을 음악과 학술 분야에서 보좌한 대표적인 참모였다.

 

 

■[신병주의 '왕으로 산다는 것'] (5) 성종이 최고 권력자인 장인(한명회)을 몰아낸 사연..화려했던 압구정(鴨鷗亭), 추락의 빌미로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804호(2015.04.22~04.28일자) 기사입니다]
2015. 4. 27. 09:07
 

 

 

 

한명회(韓明澮)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조선 전기 대표적인 '권모술수의 달인'이었다는 점이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세조)의 대표적인 참모이자 지략가로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기 위해 일으킨 사건)을 성공시킨 주역이다. 수양대군을 왕으로 만든 '킹메이커'였을 뿐 아니라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보냄으로써 왕실의 장인으로 오래도록 굳건한 지위를 유지했다. 또 세조에서 성종에 걸쳐 행해진 다섯 번의 공신 책봉 과정에서 네 번이나 일등공신에 올랐다.

 

 

한명회가 세조의 총애를 바탕으로 성종대까지 권력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장면이 있다. 바로 13세의 사위 '잘산군', 즉 성종(成宗)을 왕위에 올리는 데 성공한 순간이다. 그러나 장인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성종은 그리 만만한 왕이 아니었다. 성종에게 있어서 장인 한명회는 최고의 정치 후원자였지만, 새 시대로 나가는 데 있어서는 최대의 걸림돌이 되는 존재기도 했다.

 

 

1469년 예종이 14개월의 짧은 왕위를 뒤로하고 승하했다. 예종에게는 안순왕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4세의 아들 제안대군과 요절한 의경세자(세조의 장남, 후에 덕종으로 추존)의 맏아들 월산대군이 있었지만, 왕위는 의경세자의 차남인 13세의 잘산군으로 결정됐다.

 

 

왕이 죽은 그날 바로 다음 왕을 결정하는 파격적인 이 조처의 주인공은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였다. 잘산군은 어떻게 이렇게 전격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세조 사후 예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부터 왕실은 다음 왕위 계승과 관련해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세조의 맏아들은 의경세자였다. 세조가 단종에게 왕위를 빼앗은 후 18세로 왕세자에 책봉됐으나, 2년간 병으로 앓다가 사망했다.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은 "세조가 어린 조카를 죽인 죗값을 받은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맏아들이 죽자 자연히 왕세자의 자리는 차남인 해양대군(예종)의 차지가 됐다.

 

 

1457년 형의 죽음으로 8세에 세자로 책봉된 예종은 세조 사후인 1468년 9월,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예종은 곧바로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아직 20세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인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다. 여기에 더해 세조 때 막강한 권력을 형성한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 등 훈구대신들의 정치적 입김도 만만치 않았다.

 

 

예종은 14개월이라는 짧은 치세 동안 왕권 강화를 시도했지만 확고한 세력 기반을 갖춘 훈구대신들의 장벽 속에서 별다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병으로 승하했다. 예종이 왕으로서 큰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종 사후 왕위 계승 결정권은 자연히 대비인 정희왕후와 훈구대신들에게 넘어갔다. 이 상황에서 한명회는 정희왕후를 움직여 자신의 사위 잘산군을 왕으로 올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성종은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 형님인 월산대군에 이어 넘버3였다. 그럼에도 대비인 정희왕후는 제안대군은 네 살로 너무 나이가 어리고 월산대군은 병약하다는 이유로 잘산군을 예종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정희왕후는 훈구대신으로 조정 분위기를 주도하는 한명회의 정치적 후원을 받음으로 왕실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을 터다.

 

 

예종이 왕세자 시절 딸(장순왕후)을 시집보냈지만, 예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딸이 요절하는 바람에 왕의 장인이라는 프리미엄을 마음껏 누려보지 못했던 한명회. 그러나 다시 한 번 사위 성종을 왕위에 올리는 정치력을 발휘함으로써 세조 때부터 승승장구한 그의 이력에는 왕의 장인이라는 영예가 더해졌다. 덕분에 그야말로 세조에서 성종에 이르기까지 '끝나지 않는' 한명회 시대를 연출할 수 있게 됐다.

 

 

실록 기록에 따르면 "모든 형벌과 상을 주는 것이 모두 그(한명회)의 손에 있었다(1461년 9월 26일)"는 내용이 나와 흥미를 끈다. 그만큼 한명회의 권력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한명회의 졸기(卒記·죽은 후 그 인물에 대한 기록)는 한명회의 위상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권세가 매우 성해 따르는 자가 많았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문에 가득했으나, 응접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시의 재상들이 그 문에서 많이 나왔으며 조관(朝官)으로서 채찍을 잡는 자까지 있기에 이르렀다." 성종이 왕으로 즉위한 후 한명회의 위세는 더욱 커졌다. 최고 권력을 구가하던 한명회는 1476년(성종 7년) 한강가에 '압구정(鴨鷗亭)'이란 정자를 지었다. 압구정이란 이름은 명나라 사신인 예겸이 지어준 것이다. '압구'는 갈매기를 가까이한다는 뜻으로 갈매기를 벗하며 유유자적하게 말년을 보낸다는 뜻을 담고 있다.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마무리 짓겠다는 의지로 지었지만 압구정은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한명회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공간이었다.

 

 

압구정이 완성되던 날, 성종은 이를 기려 직접 시를 지어 내릴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듬해 한명회를 견제한 젊은 관료들의 반발로 현판에 걸린 성종의 시는 철거됐다.

 

 

사실 당시 한강 주변에는 왕실 소유 '희우정'이나 '제천정' 등만 있었다. 최고 조망을 가진 곳에 신하의 신분으로 정자를 건립한 것 자체만으로도 한명회의 위상이 어떠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압구정은 한명회의 화려했던 정치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 부메랑으로 날아왔다.

1481년(성종 12년) 6월의 일이다. 압구정의 명성이 중국까지 알려지면서 조선을 방문한 사신이 성종을 통해 압구정 관람을 청했다. 이에 한명회는 장소가 좁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의 뜻을 보였다. 성종은 아무리 장인이지만 왕의 뜻을 거역하는 한명회의 태도가 불쾌했다. 더구나 한명회가 왕실에서 사용하는 용봉(龍鳳)이 새겨진 천막을 사용하게 해준다면 잔치를 벌이겠다는 이야기를 하자 분노가 극에 달했다. 이에 성종은 제천정에서 잔치를 치르고, 희우정과 제천정을 제외한 정자는 모두 없애겠다는 강경한 선언을 했다.

 

 

'성종실록(1481년 6월 25일)' 기록을 보자.

 

"강가에 정자를 지은 자가 누구누구인지 모르겠다. 이제 중국 사신이 압구정에서 놀면 반드시 강을 따라 두루 돌아다니면서 놀고야 말 것이고, 뒤에 사신으로 오는 자도 다 이것을 본떠 유람할 것이니, 그 폐단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제천정의 풍경은 중국 사람이 예전부터 알고, 희우정은 세종께서 큰 가뭄 때 이 정자에 우연히 머물렀다가 마침 영우(靈雨)를 만났으므로 이름을 내리고 기문을 지었으니, 이 두 정자는 헐어버릴 수 없다. 그 나머지 새로 꾸민 정자는 일체 헐어 없애어 뒷날의 폐단을 막으라."

 

왕의 권위를 우습게 보는 한명회에게 확실하게 자신의 모습을 각인시키려는 강경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왕보다는 사위라는 인식이 강해서였을까? 한명회는 제천정에서 벌이는 잔치에 '아내가 아파서 나갈 수 없다'는 핑계를 댔는데 이게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한명회에 대한 성종의 의중을 알아차린 승지와 대간들은 연이어 한명회를 비난했다. 성종은 잘못을 꾸짖는 선에서 일을 매듭지으려고 했지만 반발이 계속되자 결국 한명회의 국문을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명회는 추락했다.

 

 

즉위 직후 밀월관계였던 성종과 한명회 사이의 균열을 보여주는 사건은 이전에도 있었다. 1476년 성종의 나이 스무 살이 되자 대비인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성종에게 친정을 시키겠다는 언문교지를 내렸다. 이 조치에 대해 한명회는 "동방의 백성들을 버리는 것이며, 대궐에 나아가 한잔 술을 편히 마시지 못할 것"이라며 반대 의견을 표시하고 계속 수렴청정해줄 것을 건의했다. 한명회와 정희왕후 사이가 워낙 각별해서 나온 발언이긴 했지만, 성종 입장에서는 성년이 된 자신을 여전히 믿지 못하는 장인에 대해 불만을 가질 법도 했다.

 

 

최고의 권력이었지만, 추락도 한순간이었다. 그를 추락하게 한 주역이 자신이 왕으로 만들어준 성종이라는 사실은 한명회의 마음을 더욱 씁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성종에게 있어 한명회는 이제 장인이자 자신의 후견인이라는 측면보다는 새로운 시대에 극복해야 할 훈구파의 중심이었다. 성종은 신숙주나 한명회와 같은 훈구파 빈자리에 김종직 등 사림파를 등용했고 그렇게 새 시대를 열었다.(1)

 

 

 

■[신병주의 '조선의 참모로 산다는 것'] (8) 성종의 문화 참모 '성현' 악학궤범·용재총화 쓴 학문·예술 팔방미인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07호 (2017.05.10~05.16일자) 기사입니다]
2017. 5. 15. 08:28
 
 
 
 
 
 

1469년 예종의 뒤를 이어 성종(成宗, 1457~1494년, 재위 1469~1494년)이 13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성종은 왕의 계승 순위에서는 넘버 3의 위치였지만, 장인 한명회의 영향력 속에 대비인 정희왕후의 지원으로 왕이 될 수 있었다. 

 
 
 

즉위 초반에는 대비의 수렴청정을 받기도 했지만, 호학(好學) 군주 성종은 학문적 능력과 정치력을 바탕으로 왕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해나갔다. 성종은 세조대에 추진했던 ‘경국대전’ ‘동국통감’의 편찬 사업을 완성함으로써 조선 전기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성종의 묘호(廟號)가 이룰 ‘성(成)’ 자를 쓰는 ‘성종(成宗)’인 배경이다.

 

 

성종은 선왕인 세종처럼 인재 등용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세종에서 세조 시대를 거치면서 국정 경험을 쌓은 학자들을 최대한 중용했다. 이 결과 성종 시대에는 정인지, 신숙주, 서거정 등 쟁쟁한 학자들이 배출됐다. 특히 ‘악학궤범(樂學軌範)’의 편찬을 주도한 성현(成俔, 1439~1504년)은 성종을 음악과 학술 분야에서 보좌한 대표적인 참모였다.

 

 

▶세조부터 연산군 시대 거친

▷학자이자 예술인이었던 성현

성현은 1439년 세종 때 태어나 세조부터 연산군 시대를 살아간 학자이자 예술인이다. 자는 경숙(磬叔), 호는 허백당(虛白堂), 용재 등 다양하게 사용했고, 시호는 문대(文載)다. 본관은 창녕으로, 고조부 성여완은 고려 말 문하시중을 지냈다. 성여완은 석린, 석용, 석인의 세 아들을 뒀다. 성석린은 조선 건국에 참여한 후 태종 때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함흥차사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성석용이 대사헌, 성석인은 판서직을 지내는 등 조선 초 명문가의 위상을 지켰다. 조부는 성엄이며, 부친 성염조는 도승지, 형조참판 등을 거쳐 관직이 지중추원사에 이르렀다. 하지만 성석용의 손자인 성승은 아들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했다가 삼문, 삼빙, 삼고, 삼성과 손자 셋이 모두 죽음을 당해 후사가 끊어졌다.

 

 

성현은 1439년 지중추부사를 지낸 성염조와 순흥 안씨의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외가인 순흥 안씨 또한 명문가로 어머니는 성리학을 처음 고려에 들여온 안향의 손녀. 성현의 부인은 한산 이씨로 고려 말 대학자 이색의 현손녀였다. 12세에 부친상을 당한 후, 18세 나이 차가 나는 큰형 성임에게서 수학했다. 어린 시절 형의 친구들인 김수온, 강희맹, 서거정 등을 만나면서 이들로부터 학문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들은 성종대 훈구파로 분류되는 학자들로서 성종을 보필해 학술 편찬 사업의 완성에 공을 세웠다.

 

 

1459년(세조 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462년 23세 나이로 식년문과에 급제하면서 관직에 진출했다. 세조대 소장관리로서 홍문관, 예문관 등에서 주로 근무했으며,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경연관에 발탁됐다.

 

 

성현이 관료로서 꽃을 피운 시기는 성종 때였다. 1472년(성종 3년)에는 진하사로 임명된 형 성임을 따라 명나라 베이징으로 가는 기회를 얻었고, 기행시 ‘관광록(觀光錄)’을 남겼다. 1475년(성종 6년)에는 한명회의 종사관이 돼 재차 베이징에 다녀왔는데, 중국으로의 사행 경험은 그의 학문에도 큰 영향을 줬다. 1475년 11월 음악을 관장하는 부서인 장악원 첨정(僉正)에 임명된 것 또한 운명적이었다. 이때의 경험을 발판 삼아 장악원 제조에 이르렀고 이는 ‘악학궤범’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이후 홍문관, 사간원, 승정원의 주요 직책을 두루 거치면서 성종의 총애를 얻어 1480년에는 우승지에 올랐다. 1481년 인사권을 잘못 행사한 죄로 잠시 파직됐다, 1482년 복직해 형조참판, 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1485년 천추사가 돼 다시 중국을 다녀왔으며, 1488년(성종 19년) 2월 평안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당시 성현의 시가 명나라 사신들을 탄복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같은 해 7월 동지중추부사로 사은사가 돼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후에는 대사헌, 경상도 관찰사에 이어 예조판서가 됐다. 당시 유자광은 “경상도 관찰사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있지만 장악원의 제조는 성현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라며 성현의 음악적인 자질을 높이 평가했다. 결국 성현은 예조판서와 장악원 제조를 겸직했다. 성종과 성현의 인연은 성종 사후 빈전도감 제조로 상례를 주관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연산군 즉위 후에는 한성판윤, 공조판서, 대제학을 지냈다. 그러나 1504년 1월 사망 후 7개월 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를 당한다.

 

 

▶조선 초 음악도서 악학궤범 편찬

▷신변잡기 기록한 용재총화까지

다른 건 몰라도 음악과 예술 분야에 있어서 성현은 성종의 최고 참모였다. 성종은 성현에게 조선 전기 음악의 정리를 맡겼다. 마치 세종의 명을 받아 궁중음악을 정리한 박연의 관계와 유사하다. 예악일치(禮樂一致)를 표방한 유교 국가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위상은 지금보다 훨씬 중요했다.

 

 

장악원에 간수된 의궤(儀軌)와 악보가 세월이 오래 지나는 동안에 모두 해어지고 떨어져나가고, 다행히 남아 있는 것도 모두 소략하고 잘못되고 절차가 빠진 것이 많았다. 성현과 유자광, 신말평, 박곤과 김복근 등은 성종의 명을 받들어 음률을 만든 원리, 악기와 부속품의 형체와 그것을 제조하는 방법과 춤추는 것과 그 대열과 전진하며 후퇴하는 절차를 구비해 총 9권으로 구성된 ‘악학궤범’을 편찬했다.

 

 

성현이 음악에 대해 조예가 깊었음은 그의 또 다른 저술 ‘용재총화’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예조판서로서 장악원 제조를 겸했다. 여러 나라의 사신을 위한 잔치를 베풀려면 악기에 익숙한 사람을 뽑아야 하는데, 그럴 때면 음악을 듣지 않는 날이 없었다. (중략) 나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판서에 이르러 밤낮으로 노랫소리에 묻혀 있으니, 어찌 이렇듯 태평한 음악을 혼자서 누린단 말인가.”

 

 

용재총화는 조선 전기 신변잡기에 관한 기록이다. 말 그대로 ‘총화(叢話)’로, 저자 성현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시간적으로는 조선 초기, 공간적으로는 한양을 중심으로 해 중국에 관한 사항까지 기록했다. 특히 용재총화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당대의 모습은 물론 그때까지 전해오던 이야기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성현은 평소 여러 책을 섭렵하고 여행하기를 좋아했으며, 네 차례나 중국에 사행하면서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고려 시대부터 내려온 패관잡기(稗官雜記)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용재총화에는 총 324편의 글이 10권에 나눠져 수록돼 있는데, 자유로운 형식 속에서 민간의 풍속과 제도, 문화, 역사, 지리, 학문, 종교, 문학, 음악, 서화 등 생활과 문화 전반을 다뤘다. 특히 인물에 관한 일화는 용재총화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은 분량을 차지해 조선 전기 인물을 복원할 수 있는 새로운 단서를 제공해준다.

 

 

승정원, 집현전, 홍문관 등 주요 관청의 역사와 관청에 담긴 일화를 비롯해 과거제도의 구체적인 모습이나 여러 풍속까지 세밀히 기록한 점도 돋보인다. 또한 궁중에서 행해지던 처용희(處容戱), 나례(儺禮·귀신을 쫓는 의식)를 비롯해 각종 흥미로운 내용이 줄줄이 나온다. 당대까지 전해오는 이야기를 걸러냄 없이 그대로 서술하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관점을 견지해 생활상을 정확하고 역동적으로 보여준 점이 용재총화의 매력이다.

 

 

성현은 악학궤범 편찬을 주관하면서 성종의 대표적인 예술 분야 참모로 자리매김했지만, 용재총화를 통해 다양하게 당대의 모습을 전해줌으로써 시대의 증언자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가적인 편찬 사업을 책임질 만큼 큰 비중을 지닌 유학자였지만, 꾸며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풍속과 생활, 제도, 일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남겨준 열린 관리이자 학자였다.(2)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150427090707756

 

 

(2) https://v.daum.net/v/20170515082802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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