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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야(13) 고구려 보다 앞서 꽃피운 ‘가야불교’ 김수로왕 일곱 왕자가 성불한 ‘가야불교’의 발상지 하동 칠불사 본문

여러나라시대/가야(가라)

1. 가야(13) 고구려 보다 앞서 꽃피운 ‘가야불교’ 김수로왕 일곱 왕자가 성불한 ‘가야불교’의 발상지 하동 칠불사

대야발 2025. 12. 16. 17:38

 

 

 

 

김수로왕 일곱 왕자가 성불한 ‘가야불교’의 발상지 하동 칠불사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 2편-고구려 보다 앞서 꽃피운 ‘가야불교’

 

파이낸셜투데이 김영권 기자 입력 2018.04.23 09:18 수정 2018.04.23 09:22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소수림왕 즉위 2년 임신(372)년에 전진왕 부견이 사신과 순도를 시켜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다. 2년 후인 갑술년에는 아도화상(阿道和尙)이 동진에서 왔다. 이듬해 2월 초문사를 지어 순도가, 이불란사를 지어 아도화상을 머물게 했다. 이것이 고구려 불법의 시초이자, 그동안 우리가 믿어온 한국불교의 시초이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이보다 약 300년 앞선 한반도 남쪽지역에 이미 전해져 있었다. 한반도 남쪽에 있던 금관가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이다. 그동안 가야사가 상대적으로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현재에 엄연히 존재하는 가야불교가 실존역사가 아닌 허구의 역사로 치부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가야사 복원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한국불교의 역사도 바뀔 가능성이 높아졌다.

 

 

경남 김해시 신어산에 자리잡고 있는 은하사는 허황옥의 오빠인 장유화상이 창건했다는 설화를 간직한 사찰이다. 사진=김해시 제공

 

 

신어사 경내에 있는 물고기 문양의 다리. 물고기 문양은 가야를 상징하는 대표적 문양이다. 사진=김해시 제공

 

 

 

경남 김해시 신어산에 자리하고 있는 은하사는 허황옥의 오빠인 장유화상이 창건했다는 설화를 간직한 사찰이다. 고려시대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스님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김해 지역 사람들은 ‘허황옥이 인도에서 건너왔고, 장유화상이 가락국에 불교를 전파했다’라는 하나의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남방불교 전래설로, 가야불교의 연원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김해지역에는 허황옥이 인도에서 건너왔다는 유물들이 현존해 있어 가야불교에 대한 보다 큰 확신을 주고 있다. 김수로왕릉의 ‘신어상(쌍어문)’, ‘태양문’과 수로왕비릉의 ‘피사석탑’이 바로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쌍어문은 두 마리의 물고기를 상하 또는 좌우 대칭으로 배치한 문양으로, 종교적인 상징 문양이다. 쌍어는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가지는 문양이다. 인도의 아요디아[阿踰陀國]의 문장이 쌍어문이라고 한다. 고대 인도어인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를 ‘가락’이라고 한다. 염직품의 문양으로 사용되고 장식재로도 사용된 예가 많다.

 

 

김수로왕릉중건기적비에 있는 태양문양의 모습. 태양문양은 김수로왕이 태양으로 부터 내려온 태양의 아들임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상징이다. 사진=김해시 제공

 

 

 

가야 고도(古都) 김해시의 대표적 상징물인 쌍어문양의 두 마리 물고기 중 한 마리는 허황옥의 고향인 아유타국을 나타내고, 또 다른 한 마리는 가야국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또 수로왕비릉 내에 있는 파사석탑은 한문음으로 ‘파사석탑’이라고 표기하나 범어(梵語)로는 ‘바사석탑’이라고 하는데, 파(婆)는 범어로 바(bha)이며 그 뜻은 유(有)이고, 사(娑)는 발음이 사(sa)로서 그 의미는 체(諦 : 진실한 도리)이다.

 

 

따라서 파사는 유체(有諦)로서, 일체의 지혜가 현증(現證)한다는 뜻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석탑은 4각형의 지대석 상면에 높직한 굄대가 있어 그 위에 여러 개의 부재(현재는 6석임)를 받고 있

 

이 석탑은 허황옥이 인도에서 가야로 바다를 통해 건너올 때, 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배에 싣고 왔다고 전해진다.

 

 

수로왕비릉 내에 있는 파사석탑은 한문음으로 ‘파사석탑’이라고 표기하나 범어(梵語)로는 ‘바사석탑’이라고 하는데, 파(婆)는 범어로 바(bha)이며 그 뜻은 유(有)이고, 사(娑)는 발음이 사(sa)로서 그 의미는 체(諦 : 진실한 도리)이다. 사진=김해시 제공

 

 

 

<삼국유사> 권 제3 타상편 제4 금관성파사석탑조(金官城婆娑石塔條)에 다음과 같이 보이고 있다. “금관성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은 옛날 이 읍(邑)이 금관국으로 되어 있을 때, 세조 수로왕의 비(妃)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갑신(甲申)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어버이의 명을 받들고 동쪽으로 오려고 하다가 파신(波神)의 노여움에 막혀서 할 수 없이 돌아가 부왕(父王)에게 아뢰니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 하여 무사히 바다를 건너 남쪽 물가에 와서 닿았는데, 비범(緋帆:붉은색의 배)·천기(茜旗:붉은 색의 기)·주옥(珠玉)의 아름다움이 있었으므로 지금도 이곳을 주포(主浦)라 한다. …(중략)… 탑은 사면으로 모가 나고 5층인데, 그 조각이 매우 기이하며 돌에는 조금씩 붉은 반점이 있고 석질이 매우 부드럽고 특이하여 이 지방에서 구할 수 있는 돌이 아니다”

 

 

이와 같은 내용에서 파사석탑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또 조선시대 김해부사로 있던 정현석은 “이 탑은 허황후꼐서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것이니 호계사가 아닌 허황후릉에 두어야 한다”며 현재의 자리에 옮겨 놓았다고 한다.

 

 

특히 지리산 중심봉인 반야봉(1,732m)의 남쪽 800m 고지에 위치하고 있는 칠불사(주지 도응)는 가야불교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칠불사는 1세기경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외숙인 범승(梵僧) 장유보옥(長遊寶玉) 화상(和尙)을 따라와 이곳에서 동시 성불한 것을 기념하여 김수로(金首露) 왕이 국력으로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칠불사는 1세기경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외숙인 범승(梵僧) 장유보옥(長遊寶玉) 화상(和尙)을 따라와 이곳에서 동시 성불한 것을 기념하여 김수로(金首露) 왕이 국력으로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칠불사 일주문 모습. 사진=김영권 기자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의하면 수로왕은 서기 42년에 화생(化生)했으며, 남해바다를 통해 가락국에 온 인도 아유타국(阿踰陁國) 허황옥 공주를 왕비로 맞아 10남 2녀를 두었다. 그 중 장남은 왕위를 계승하였다. 둘째와 셋째 왕자는 어머니의 성을 이어 받아 김해 허씨(許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 나머지 일곱 왕자는 외숙인 장유화상을 따라 출가했다.

그들은 장유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가야산에서 3년간 수도하다가 의령 수도산과 사천 와룡산 등을 거쳐 서기 101년에 지리산 반야봉 아래에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정진한지 2년 만에 모두 성불했다.

 

 

칠불의 명호는 금왕광불(金王光佛), 금왕당불(金王幢佛), 금왕상불(金王相佛), 금왕행불(金王行佛), 금왕향불(金王香佛), 금왕성불(金王性佛), 금왕공불(金王空佛)이다. 이 칠왕자의 성불로 인하여 칠불사라 하였다.

 

 

이 외에 칠불사 경내에 있는 영지(影池)와 칠불사 인근 지역에 남아있는 명칭 등을 통해서도 칠불사가 가야불교의 성지임을 알 수 있다. 칠불사의 영지는 칠왕자의 그림자가 나타났다는 연못이다.

 

 

칠불사 경내에 있는 영지(影池)와 칠불사 인근 지역에 남아있는 명칭 등을 통해서도 칠불사가 가야불교의 성지임을 알 수 있다. 칠불사의 영지는 칠왕자의 그림자가 나타났다는 연못이다. 사진=하동군 제공

 

 

 

수로왕 부부가 출가한 일곱 왕자를 만나기 위해 칠불사 터에 와서 왕자를 보려 하자 장유화상은 “왕자들은 이미 출가하여 수도하는 몸이라 결코 상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꼭 보고 싶으면 절 밑에 연못을 만들어 물속을 보면 왕자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장유화상의 말에 따라 김수로왕 부부는 연못을 만들어 놓고 그 연못을 보니 과연 일곱 왕자들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를 보고 수로왕 부부는 환희심을 느끼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이 연못을 영지라 부르게 되었다.

 

 

또 칠불사 인근 마을의 명칭인 범왕(凡王)마을과 대비마을도 칠불사가 가야불교의 성지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범왕리라는 명칭은 김수로왕이 칠왕자를 만나기 위하여 임시 궁궐을 짓고 머무른 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또 화개면 정금리의 대비마을(大妃洞)은 허황후가 아들을 만나기 위하여 머물렀다는 데에서 비롯됐다.

 

 

칠불사 주지 도응스님은 “칠불사 창건 및 가야불교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범왕마을과 대비마을과 같은 지역명은 남아 있다”면서 “이와 같은 지역명이 아무런 의미없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칠불사 주지 도응스님. 그는 “칠불사 창건 및 가야불교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범왕마을과 대비마을과 같은 지역명은 남아 있다”면서 “이와 같은 지역명이 아무런 의미없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칠불사 제공

 

 

 

도응스님은 “지난 6월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국정과제에 포함시켜 달라고 주문하고, 지난달 19일 정부가 ‘가야문화권 조사·연구 및 정비’가 포함됐다”면서 “이번 기회에 가야사가 제대로 연구 및 복원되어 한국불교사도 재정비가 되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도응스님은 “가야문화권 역사관광 벨트가 전북 군산에서 전남 목포와 장흥을 거쳐 남해안을 아우르는 L자형 벨트”라면서 “이는 전남·북과 경남·북의 영역이다. 영호남의 화합이라는 좋은 뜻을 가지고 있다. 화합과 소통에 방점을 둔 대통령의 뜻이라고 본다”고 말했다.(1)

 

 

 

 

[이덕일의 내가 보는 가야사] ⑦ 가야 불교는 언제왔나 삼국유사 살펴보자

매일신문 최창희 기자   입력 2023-06-26 14:33:30 수정 2023-06-26 17:45:46

 

 

삼국유사의 해동말과 상교미 원본, 원본은 분명히 末과 未를 구분해서 판각했다.

 

 

 

◆왕후사 창건이 불교 전래와 같은가?

 

가야에 불교가 언제 들어왔는지를 살펴보자. 불교전래에 대한 '삼국유사' 기록은 혼란스럽다. 수로왕의 왕비 허왕후가 서역(西域), 즉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기 때문에 이때 불교가 들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허왕후를 위해 세운 왕후사(王后寺)는 아래의 기사처럼 서기 452년에 창건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원군(元君:수로왕)의 8대 후손인 김질왕(金銍王)은 정사에 근면하고 또 진리를 매우 숭상했는데, 세조모(世祖母:시조모) 허황후(許皇后)를 위하고 그 명복을 빌기 위해서 원가(元嘉) 29년(452) 임진에 원군(元君)과 황후가 합혼(合婚)한 곳에 절을 세워 이름을 왕후사라고 하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근처의 평전(平田) 10결을 헤아려 삼보(三寶)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원가(元嘉)는 중국의 남조 송(宋) 문제(文帝) 유의륭(劉義隆)의 연호로 그 29년은 서기 452년이다. 이 기사를 가야에 불교가 처음 전래하였다는 내용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기사는 누가 보더라도 왕실에서 시조모를 기리는 사철을 창건했다는 기사이지 가야에 불교가 처음 전해졌다는 기사가 아니다.

 
 
김해 바닷가 섬지도, 허왕후가 온 뱃길을 상상할 수 있다.

 

 

 

◆서역에서 가져온 파사석탑

 

'삼국유사'의 〈금관성 파사석탑〉조는 허왕후가 서역에서 파사석탑을 가져왔다고 말하고 있다.

 

"금관 호계사(虎溪寺) 파사석탑(婆裟石塔)은 옛날에 이 읍(김해)이 금관국이었을 때 시조 수로왕의 비인 허황후 황옥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48)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아유타국에서 왔다고만 했는데 〈금관성 파사석탑〉조는 '서역의 아유타국'에서 왔다고 써서 서역, 즉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말하고 있다. '파사(婆娑)'라는 석탑의 이름도 불교와 관련이 깊다. 동양고전에서는 파사라는 말이 '시경(詩經)' 〈동문지분(東門之枌)〉에 한 번 나오는데 '춤추는 모양'이라는 뜻이다. 그 시는 "동문(東門)의 흰 느릅나무와 완구(宛丘)의 상수리나무 있는 곳, 자중씨(子仲氏)의 딸이 그 아래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는구나[東門之枌 宛丘之栩 子仲之子 婆娑其下]"라는 내용이다.

 

 

이 시는 남녀가 자신의 일을 버리고 자주 길에 모여서 노래하며 춤추고 노는 것을 풍자한 것이므로 시조모 허왕후와 관련된 내용은 아니다. '파(婆)'자는 '할머니'라는 뜻이고, '사(娑)'는 승려들이 어깨에 걸쳐 입는 승복을 뜻하는데, 파사는 고대 인도어인 범어(梵語)의 음역으로 승려를 뜻한다. 〈금관성 파사석탑〉은 허왕후가 서기 48년 서역의 아유타국에서 불탑을 싣고 왔다는 것이니 이에 따르면 불교는 왕후사가 세워지기 404년 전인 서기 48년에 전래한 것이다.

 

 
 
유주비각, 창원시 진해구 용원동에 있다. '대가락국 태조왕비 보주태후허씨 유주지지(維舟之地)'라고 새겨져있다. 유주는 배를 맸다는 뜻과 제후가 타는 배라는 뜻이 있다.

 

 

 

◆허황후 이전에 불교를 알았던 수로왕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불교가 처음 전래하였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 왕실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기록이지 불교 자체가 처음 전래한 기록은 아니다. 그 이전에 이 땅에 불교가 전래하였다는 기사는 그리 드물지 않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도 허왕후가 가야에 오기 전에 수로왕이 이미 불교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수로왕은 재위 2년(43) 정월, "짐이 경도(京都:서울)를 정하려고 한다"면서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新沓坪)으로 행차해서 사방의 산악을 바라보면서 좌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땅은 좁기가 여뀌 잎과 같지만 (경치가)수려하고 기이하여 16 나한(羅漢)이 살만한 곳이다. 또한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루니 칠성(七聖)이 살 곳으로도 이곳이 적합하다. 이 땅에 의탁해서 강토를 개척하면 마침내 좋은 곳이 될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부처의 열여섯 제자를 뜻한다.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룬다'는 말은 오행설(五行說)에 따른 설명이다. 오행은 만물의 기초를 이루는 다섯 사물이 서로 순행하는 것인데,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공자가 오행에 대해 설명한 내용이 있다.

 

 

공자의 고국인 노(魯)나라의 실권자인 계강자(季康子)가 오제(五帝)의 이름을 묻자 공자가 답했다. "하늘에는 오행이 있는데 수, 화, 목, 금, 토(水·火·木·金·土)입니다. 때를 나누어 화육(化育)해서 만물을 이루니 그 신(神)을 오제(五帝)라고 합니다." 오행은 서로 돕고 살리는 상생과 서로 부딪치고 죽이는 상극이 있다. 물에서 나무가 나오는 수생목(水生木)은 1, 3으로 상생이지만 물이 불을 끄는 1, 2 수극화(水剋火)는 상극이다.

 

 

1에서 3을 이룬다는 수로왕의 말은 물에서 나무가 나오는 상생이다. 오행의 순환에 따르면 3은 목(木)이고 7은 화(火)다. 그래서 3에서 7을 이룬다는 말도 나무에서 불이 나오는 목생화(木生火)로서 이 역시 서로 살리는 상생이다. 수로왕이 도읍으로 삼으려는 땅이 물에서 나무가 나오고, 나무에서 불이 나오는 상생의 땅이란 것이다. 이런 상생의 땅이기 때문에 부처의 제자인 16나한이 살만하고 칠성이 살만하다는 것이다.

 

 

◆불교의 칠성이 살만한 땅

 

칠성(七聖)이란 진리를 깨달은 일곱 성자를 일컫는다. 첫째 남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수행해서 견도(見道)에 이른 성자가 수신행(隨信行)이고, 둘째 스스로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해서 견도에 이른 성자가 수법행(隨法行)이다. 셋째 남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믿어서 그를 따라 수도(修道)에 이른 성자가 신해(信解)이고, 넷째 스스로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여 수도에 이른 성자가 견지(見至)이다.

 

 

다섯째 마음의 작용을 소멸시키고 몸으로 고요한 즐거움을 체득하여 수도에 이른 성자가 신증(身證)이고, 여섯째 지혜로써 무지를 소멸시켜 그 속박에서 벗어난 무학도(無學道)의 성자가 혜해탈(慧解脫)이다. 일곱째 지혜로써 무지를 소멸시키고, 또 선정(禪定)으로 탐욕을 소멸시켜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무학도의 성자가 구해탈(俱解脫)이다.

 

 

칠성을 과거 세상에 출현했던 비바시불(毘婆尸佛),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등의 일곱 부처를 뜻하는 칠불(七佛)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칠성이든 칠불이든 수로왕의 이 말은 수로왕이 허황후가 가야에 오기 전에 이미 오행과 불교에 대해서 알고 있었음을 뜻하며 가야를 불국토로 만들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해동 '끝머리'인가? 해동에는 '아직'인가?

 

한국사를 연구하다보면 그간 당연시 여겼던 해석에 의문을 갖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금관성 파사석탑〉조에는 "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이해서 함께 15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는 내용의 다음 구절이 海東末(해동말)인가, 海東未(해동미)인가에 따라서 불교 전래시기가 크게 달라지는 것도 그런 예다.

 

 

그간 해동미(未)로 해석해서 "그러나 이때는 해동에서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있지 않았다[然于時海東未有創寺奉法之事]"라고 해석해 왔다. 그런데 김해 여여정사의 주지이자 가야문화진흥원장인 도명 스님이 원본은 해동말(海東末)로 되어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래서 국보인 '삼국유사' '규장각본(1512년)'과 보물인 '고려대학교 소장본'을 살펴보니 모두 '해동말'로 되어 있었다. 이 경우 해석은 "그래서 이때 해동의 끝에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들었다"는 것이 되니 완전히 다르다. 목판본은 장인이 한 자 한 자 정성 드려 새기기 때문에 두 판본이 모두 오자가 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국보와 보물 삼국유사가 모두 '해동말(海東末)'로 되어 있다.

 

 

게다가 두 판본 모두 다음 문장에는 '상교미(像敎未)'라고 불교가 아직 이르지 못했다고 '未(미)'라고 판각했다. 해동미를 해동말로 판각했을 가능성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해동말로 석문(釋文)하면 해석은 다음과 같다.

 


"그래서 이때 해동의 끝에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들었으나 대개 상교(像敎:불교)가 아직 이르지 못해서 토인(土人)들이 믿고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세계 역사상 수많은 순교(殉敎)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종교는 목숨과도 바꾸는 신앙체계다. 〈금관성 파사석탑〉조는 허왕후가 바다 건너 동쪽으로 가려다가 파도신에 막혀 되돌아갔다가 부왕의 명으로 파사석탑을 싣자 바다를 쉽게 건넜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당시 가야인들이 전통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불교를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허왕후 일행이 이 파사석탑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렸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수로왕과 허왕후 때 가야에 불교가 들어왔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허왕후가 가져온 파사석탑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것이 후대인들에게 그런 사실을 증거하고 있기도 하다.(2)

 

 

 

<자료출처>

 

(1)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 2편-고구려 보다 앞서 꽃피운 ‘가야불교’  - 파이낸셜투데이

 

 

(2) [이덕일의 내가 보는 가야사] ⑦ 가야 불교는 언제왔나 삼국유사 살펴보자 - 매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