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우리겨레력사와 문화/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2) (26)
력사를 찾아서

계봉우(1880년(고종 17)~ 1959년)는 이명은 사방자(四方子)·뒤바보·북우(北愚). 함경남도 영흥 출신이다. 일제강점기 때, 임시의정원, 고려공산당에서 활동하며 국외 항일운동을 전개한 역사학자 · 독립운동가이다. 1908년 동경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太極學會)의 영흥지회에 들어가 「진지사(眞志士)」 등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며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국내에서의 신민회(新民會) 운동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나라를 잃은 뒤 북간도로 망명, 이동휘(李東輝)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3·1운동 이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북간도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어 상해에서 활동하였다. 한편, 1920년 가을 시베리아로 들어가 이동휘의 정치적 거점인 다르뷰로에 부설된 한인부(..

안확(1886년(고종 23)~1946년)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장, 신천지 편집인 등을 역임하였고, 『조선문학사』 등을 저술하며 국어학, 국문학, 아악 등을 연구한 국학자 · 독립운동가. 호는 자산(自山). 운문생(雲門生)이란 필명과 팔대수(八大搜)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우대마을(서울 성내의 서북쪽에 위치하는 지역, 곧 인왕산과 가까운 지역)의 안씨(安氏)집안 태생으로 중인 출신이다. 1895년 서울 수하동 소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교육받고, 1896년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개최할 때 그 모임에 참여하여 연설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소학교를 마친 뒤 당시 유행하던 서구 문명을 소개하는 책들을 보며 사상적 기반을 다져나갔다. 특히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과..

황의돈(1890년(고종 27)~1964년)은 일제강점기 『대동청사』, 『조선신사』, 『중등조선역사』 등을 저술한 학자. 역사학자이다. 호는 해원(海圓). 충청남도 서천 출생. 아버지는 황기주(黃麒周)이며, 한말의 문인 황현(黃玹)과는 족친간이다. 전통적인 유학 가문에서 1890년에 태어나 1894년 할아버지 황태현(黃泰顯)으로부터 한학을 공부해 17세 되는 1906년까지 한서 수십 권을 통독할 정도로 한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쌓았다. 1907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근대식 학교인 군산공립보통학교 보습과(補習科)에 입학해 1년 만에 수료하고 그 뒤 2년간은 서울과 일본의 동경(東京)을 내왕하며 근대 학문을 섭렵하였다. 1909년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존망의 위기에 놓였음을 직시하고 구국운동을 전개..

장도빈(1888년(고종 25)~1963년)은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산운(汕耘). 평안남도 중화 출신. 봉구(鳳九)의 둘째아들이다. 할아버지 제국(濟國)의 훈도로 5세에 사서삼경을 통독하여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 1902년 대한제국의 학부가 관장하던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에 평양감사의 천거로 입학, 1906년 졸업하였다. 한성사범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던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주필 박은식(朴殷植)의 소개로 1908년 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들어갔다. 21세에 논설위원이 되어, 8세 위이며 역시 신동으로 알려진 신채호(申采浩) 및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논진(필진)으로 일하였다. 입사 몇 개월 후 신병을 앓던 신채호의 후임으로 논설주필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아, 당시 친일 내각과..

《대동사강》(大東史綱)은 1929년에 김광(金洸)이 쓴 책으로, 단군조선에서 대한제국 순종 황제까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근거가 되는 사료는 명시되지 않았으나, 규장각학사 민경호(閔京鎬)의 서문에 의하면, 역사와 야승을 수 년간 모아 엮었다고 한다. 오진영(吳震泳)이 교정을 보았다. 출간사항 1929년(쇼와 4년), 대동사강사에서 상·하 2권으로 출간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상권 1권과 하권 2권이 보관되어 있다. 1974년, 경문사에서 상·하권을 합본하여 출간하였다. 권초에 '동국역대제왕전수통도(東國歷代帝王傳授統圖)'가 그려져 있다. 이에 따르면, 기씨조선 이후로는 기씨조선, 한, 부여, 예, 맥, 옥저, 숙신 등의 여러 나라로 나뉘었으며, 이들이 서로 합쳐지고 나뉘면서 단씨조선-기씨조선-마한..

대종교의 제2대 교주인 김교헌(1867~1923)은 주요 경전 『신고강의(神誥講義)』, 『신리대전』, 『회삼경(會三經)』, 『신사기(神事記)』, 『조천기(朝天記)』, 『신가집(神歌集)』 등의 편찬을 주관한 대종교의 이론가임과 더불어 치열한 민족사학자이다. 그는 특히 대종교의 종사(倧史)인 『신단실기(神壇實記)』와 민족통사인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백유(伯猷), 호는 무원(茂園), 당명은 보화(普和), 뒤에 이름을 김헌(金獻)이라고도 하였다. 수원(지금의 화성시 비봉면 구포리)에서 출생,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는 공조판서 김창희(金昌熙)이며, 어머니는 풍양조씨로 판관을 지낸 조희필(趙熙弼)의 딸이다. 1885년 정시 문과에 급제, 한림옥당 · 병조참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