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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 1월14일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이던 박종철 열사가 불법 체포돼 치안본부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수사관들에게 고문·폭행을 당해 사망한 사건입니다.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고 했으나 언론·의학·종교계의 끈질긴 노력으로 진상이 밝혀지면서 1987년 6월 시민항쟁의 주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 [정리뉴스]박종철 사망 30주기..사진과 글로 정리해보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정대연·홍진수·이재덕 기자2017. 1. 14. 00:35 [경향신문] 14일은 박종철 열사의 30주기입니다. 1987년 이후 해마다 돌아오는 기일이지만, 민주주의가 역행하는 한국사회 현 상황은 오늘 기일을 더 특별하게 만드는 듯 합니다. 향이네에..

"12.12 쿠데타는 한미군사협정 위반이지만 미국은 이를 묵인했다. 1980년 봄 학생들의 시위가 거세지자 국무장관은 글라이스틴에게 미국이 진압을 위한 군사 작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군부에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신군부가 5월 18일 계엄령을 선포하자 놀랐고 이후 전개에 당황했다. 백악관은 분단위로 광주 상황 보고받았는데 신군부의 왜곡된 정보에 의존해 통제 불가능한 폭동 내지 혁명이라고 인식했다. 카터 대통령은 광주를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정적인 것은 21일 군의 대학살이 있은 뒤 열린 22일 백악관 회의이다. 여기에서 미국은 군의 학살을 알면서도 광주 점령 군사작전을 승인했다. 민주화보다 진압이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이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최대 실책이었고 ..

전두환이 광주의 피의 학살을 통해 권력을 잡은 정권 초기인 1982년, 13살로 중학교에 다니던 그는 경찰에 의해 이렇게 형제복지원에 잡혀갔다. 정신병동에 감금된 그와 어린 학생 등에게 소대장이라는 사람이 발가벗으라고 하고 찬물을 끼어 얹은 뒤 침상에 자라고 했다. 그날 밤부터 그에게 성폭행을 당해야 했다고 한다. "왜 우리를 가두느냐"고 항의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담요로 싸서 폭행을 했고 그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죽여서 암매장한 것이다. 이렇게 납치되어 잡혀온 사람이 4300여 명, 암매장되어 사라진 사람이 최소한 513명이라고 하니, 생지옥 그 자체였다. ■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잡혀간 시민들은 '부랑자'로 죽었다 [손호철의 발자국] 15. 부산 : '사설 강제노동수용소' 형제복지원과 ..

'전두환 군부'가 국가의 실질적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함께 설치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사회악 일소를 위한 불량배 소탕 및 순화교육'을 명분으로 '계엄포고령 13호'를 발령했다. 이는 법원의 영장 없이 누구라도 체포가 가능하도록 한 삼청교육대의 시작이었다. 진실화해위 등 조사에 따르면 1980년 '계엄포고령 13호'로 검거된 사람은 총 6만 755명으로, 그들 가운데 약 4만 명이 A씨와 같이 삼청교육대에서 순화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신체적 자유를 박탈당하고 기본적 인권을 침해당했다. ■ 법률구조공단, '삼청교육대 피해' 구조 확대[아이뉴스24 최기철 기자] 2024. 11. 6. 15:47 법원 "진실규명 신청 안 해도 국가가 배상" 대한법률구조공단(이..

1979년 10월 겨울공화국의 붕괴 : 박정희 대통령 피살 1961년, 4·19민주혁명의 열망을 짓밟고 등장한 박정희 군부정권은 유신헌법을 공포하며(1972년) 1인 영구독재 체제를 획책하였다.박정희 정권의 폭력적 억압 속에서 계속되던 민주화운동은 1979년 10월 16일 ‘부·마 민주항쟁’으로 이어졌고, 난관에 부딪친 독재 정권은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만다. 10월 26일 궁정동 안가 만찬회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사망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979년 12월 유신잔재의 군사 쿠데타 : 신군부의 등장 최규하 권한대행과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10월 27일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전두환은 ..

12월12일 오후 7시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허삼수 등은 정 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50명을 투입, 33헌병대 병력은 공관을 경비하던 해병대 병력을 제압하고 공관에 난입한다. 난입한 지 21분께 이들은 정 총장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 오후 9시30분께, 전두환 등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 총장의 연행·조사를 재가해 달라고 요청한다. 13일 새벽 5시10분 최규하 대통령은 결국 정 총장의 연행·조사 재가를 내린다. 이날 오후,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담화문을 통해 ‘10·26사태’ 연루 혐의로 정 총장을 연행하고 이와 연관된 일부 장성 등이 구속된다. 12·12 사태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을 직접 임명하고 6인 위원회를 통해 군부의 인사를 조정하여 군의..

1979년. 유신체제(維新體制)가 지속되던 그해 10월 26일에 베일에 가려져 있던 궁정동이라는 장소에서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 총성으로 인해 오랜 기간 권좌(權座)에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사망했다. 총성을 가한 당사자는 놀랍게도 박정희 정권의 한 축을 담당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었다. 이에 따라 18년 동안 장기집권해 왔던 박정희 정권의 운명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10.26 사태'였다. 10.26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부터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암시하는 파열음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대내적으로는 민주화 운동과 야당의 투쟁이 절정에 이르렀고, 대외적으로는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미국과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또한 과거에 정권의 핵심에 있었던 인물이 등을 돌려 공격..

유신이 기승을 부리던 1979년 10월 16일, 이 도서관 앞에 모인 학생들은 ‘유신타도’와 ‘독재철폐’를 외쳤다. 이들이 대열을 갖춰 학교를 돌자 시위대는 급속히 늘어났고 이들은 정문을 통해 시내로 진출하려 했다. 경찰은 이를 저지하고 학내로 진입했다. 분노한 학생들은 5,000여명으로 늘어나 담을 부수고 광복동 등 중심가로 진출했다. 시민들도 동참하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집 배달원, 술집 종업원, 노동자, 구두닦이 등 도시 하층민이 적극 참여했다. 시위대는 파출소들을 공격했고 걸려있던 박정희 사진을 꺼내다 불태웠다. 한국 사회를 옥죄어온, ‘가장 악랄한 독재체제’인 유신의 종말이 시작된 것이다. 시위는 다음날에도 이어져 경남도청, KBS, 부산일보 등이 공격을 받았고 10월 18일에는 마산으로 번져..

결국 김 전 대통령은 신민당 총재직과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가택연금을 당했다. 이는 정치권은 물론 대학생들에게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10월 13일 김 전 대통령의 제명안에 반발해 신민당 의원 66명이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고 10월15일부턴 경남 일대 대학생들도 이에 동참했다. 이틀 뒤인 10월 15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민주선언문을 배포했고 이 일대 학생들과 함께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이는 삽시간에 경남 마산과 창원시까지 확산됐다. 이른바 '부마항쟁'이다. 이로부터 열흘 뒤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권력을 내려놓게 됐다. 그의 부하인 김재규로부터 저격당했기 때문이다. ■ 37년 전 오늘.. 김영삼의원 제명, '유신정권' 종식[머니투데이 이미영 기자] 2016. 10. 4. 0..

‘YH 무역 사건’은 1979년 8월9일 가발 수출 업체 YH 무역에 다니던 여성 노동자 187명이 회사의 불법 해고와 부당한 처우, 일방적인 폐업공고에 항의하며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 있던 신민당사 4층 강당에서 농성에 들어가면서 시작됐다. 경찰은 1979년 8월11일 오전 2시 2000여명의 경력을 투입해 농성진압에 나섰다. 진압과정에서 YH 무역 노조 집행위원이었던 김경숙씨(당시 21세)가 사망했고,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고 김영삼 전 대통령도 경찰에 연행됐다. ■ 'YH 무역 사건' 주도 여성 노동자들, 재심서 모두 무죄 [경향신문] 김원진 기자 2017. 1. 20. 16:18 유신시절 가발 수출업체의 여성노동자들이 생존권 보장을 촉구하며 농성을 벌인 ‘YH 무역사건’의 주역들이 재심에서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