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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해남은 고대 동북아의 ‘물류허브’ 였다1983년 3월 어느 날.황도훈이라는 해남의 향토사학자가 있었다. 해남문화원장을 지내면서 고향 땅을 답사하는 것을 여생의 일로 삼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군곡리 마을을 지나던 황씨의 눈길이 멈췄다. 무슨 옹관 같은 유물이 눈에 띈 것이었다. 게다가 불에 탄 흔적도 있었다. ■ 2300년 전 음식물 쓰레기장 해남 군곡리에서 확인된 뼈로 만든 연모. ‘이건 야철지 아닌가.’ 독학으로 고고학을 배우던 그의 눈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는 행장을 꾸려 서울로 올라가 서울신문사를 찾았다. “회사 논설위원 중에 해남 사람이 있었는데, 황도훈씨와 친구였지. 그 인연으로 우리 신문을 찾아온 거지요.”(황규호 전 서울신문 기자) 황 기자는 즉시 황도훈..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3.3 흥륭와(싱룽와)문화; 8200년 전~7400년 전(BC 6200년~5400년) 『중국 내몽고자치구 오한기(敖漢旗) 보국토향(寶國吐鄕) 흥륭와촌(興隆窪村)에서 확인되었다. 흥륭와문화(興隆窪文化)는 서요하(西遼河), 대릉하(大凌河) 유역에 분포하는 신석기시대 조기에 해당하는 문화이다. 이 지역은 중국의 고고학적인 구분에 의하면 요서지구에 해당하며, 후대에 북방유목민들이 활동하던 무대이기도 하다. 1983년에 조사된 흥륭와유적의 발굴조사로 인해 동남부 지역의 선사고고학상 큰 진전을 이루게 되었다. 흥륭와문화의 연대는 기원전 6200∼5400년 사이에 해당하며, 황하유역 중원지구의 노관대(老官臺), 자산(磁山)문화와 동일한 발전단계에 있었던 것..

지금까지 가야의 건국 연대, 건국 초의 사회수준, 건국 뒤의 성장 등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야에 관한 기본사료인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삼국사기》 김유신전에는 가야가 서기 42년에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는 이 연대를 믿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신라 · 백제 · 고구려의 건국과 한韓의 쇠퇴라는 당시 주변의 정치 상황을 살펴볼 때 서기 42년에 가야가 독립국으로 출범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서기 42년은 기본사료에 나타난 가야의 건국 연대이므로 이를 부인할 분명한 근거가 없는 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가야는 그 지역 토착인들이 건국하였는데 그들은 가야를 건국하기 훨씬 전부터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