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3.3 흥륭와(싱룽와)문화; 8200년 전~7400년 전(BC 6200~5400)

중국 내몽고자치구 오한기(敖漢旗) 보국토향(寶國吐鄕) 흥륭와촌(興隆窪村)에서 확인되었다. 흥륭와문화(興隆窪文化)는 서요하(西遼河), 대릉하(大凌河) 유역에 분포하는 신석기시대 조기에 해당하는 문화이다. 이 지역은 중국의 고고학적인 구분에 의하면 요서지구에 해당하며, 후대에 북방유목민들이 활동하던 무대이기도 하다. 1983년에 조사된 흥륭와유적의 발굴조사로 인해 동남부 지역의 선사고고학상 큰 진전을 이루게 되었다. 흥륭와문화의 연대는 기원전 62005400년 사이에 해당하며, 황하유역 중원지구의 노관대(老官臺), 자산(磁山)문화와 동일한 발전단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흥륭와유적에서는 6차례의 발굴을 통하여, 주거지 170여 기, 저장구멍 300여 기, 무덤 30여 기 등이 조사되었다. 대규모의 취락유적이며, 방형의 형태에 주거 내부 중앙에는 노지가 있고, 주변에 기둥이 있는 구조이다. 대개 20 정도 규모의 주거는 계획적으로 열을 지어 축조하였고, 환호(還濠)가 둘러싼 배치를 보인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는 평저 통형관(筒形罐)이 주류를 이루며, (), (), () 등이 있다. 토기의 문양은 압인문(壓印文), ‘자문, 요현문(凹弦文), 단사선문(短斜線文) 등이 시문되고 있으며, 간혹 문양이 없는 토기도 있다. 이 중에 통형관에 시문된 자문은 자문토기문화의 기원과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며, 하북지역, 요하 이동지역에서 출토되는 자문토기와도 관련된다.

 

석기는 각종 세석기와 호미, 괭이, 돌삽의 농경구, 도끼, 자귀, 끌 등의 가공용구, 그리고 갈돌, 갈판 등이 출토되고 있다. 골기는 칼, 송곳, 바늘, 작살 등이 출토되었다.

 

무덤은 주거지의 한쪽 벽에 접하여 만들어진 단독장의 수혈토광묘이다. 부장유물은 토기, 석기, 골기, 옥기 등이며, 멧돼지를 순장하는 경우도 있다. 무덤에서 출토된 소형옥기는 중국 최초의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옥기문화는 후대의 홍산(紅山)문화 단계에 절정을 이룬다. 이 외에 화강암으로 제작한 돌조각의 여인상도 발견되었으며, 이는 모계사회의 증거품으로 해석되고 있다.

 

북방지구의 흥륭와문화(興隆窪文化)는 황하유역과 장강유역에 버금가는 중요한 위치에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중국 최고의 취락, 최고의 옥기가 출토된 지역으로 평가되고 있다. 흥륭와문화 이후에는 조보구(趙寶溝), 부하(富河), 홍산(紅山), 소하연(小河沿)문화로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으며, 흥륭와유적의 출토품은 요하지역 각 문화기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출처; 한국고고학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440)

 

싱롱와 문화는 비취 등의 구슬 제품이 출토된 문화로서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용이 출현하는 문화 중에서도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또한 싱롱와 문화 유적에서는 평저원통형의 비교적 낮은 온도로 구운 토기가 출토되었다. 황하 문명 외에 선사시대 중국의 신석기 시대 문화가 남쪽의 장강 유역 및 북쪽의 랴오허에서 발견되어 싱롱와 문화는 랴오허 문화의 하나로서 중요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싱롱와 문화 유적에서는 계획적으로 취락을 쌓아 올린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주거가 열을 이루고 있는 상태의 취락 흔적이 세 개의 유적에서 발견되었고, 또 몇 개의 유적에서는 한 층 더 큰 건물이 발견되었고, 굴에 둘러싸인 환호 집단 취락지도 발견되었다.

 

싱롱와 문화의 표식유적인 싱롱와 유적은 내몽고 자치구의 츠펑 시 아오한 기의 구릉 남서쪽 기슭에 있다. 이 유적은 남동쪽 1.3 km 위치에 있는 싱롱와 군락 유적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유적에서는 수혈식 주거가 120개소가 발견되었고, 각 주거의 중앙에는 부뚜막이 있었다. 싱롱와 유적의 중앙에는 큰 건물이 있었던 흔적 외에도, 중국에서도 초기 시대에 발견되는 환호(굴을 파서 만든 집)도 발견되었다. 이 굴 안은 2도 있는 큰 취락이 존재하였다. 매장 풍습도 독특하여, 몇 개의 유골은 주거 아래에 매장되어 있었다. 싱롱와 문화의 다른 유적 같이, 싱롱와 유적의 분묘 등에서도 비취로 만든 구슬이 발견된 분묘에서는 구슬 제품 외에도 돼지 한 쌍과 함께 매장된 유골도 있었다. 최근 발견된 싱롱구 유적(興隆溝遺跡)에서는 잡곡이 있던 증거가 발견되었고, 싱룽와 문화에 있어서 유일한 농업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8B%B1%EB%A3%BD%EC%99%80_%EB%AC%B8%ED%99%94)

 

 

2007 11 9일자 경향신문 기사 [코리안루트를 찾아서](6) 싱룽와 신석기 유적동이의 발상

 

 

 

도시처럼 계획된 ‘8000년전 東夷마을’ 

 

# 중국 100대발굴

 

싱룽와 유적. 네이멍구 자치구 우한치(오한기·敖漢旗) 바오궈투(寶國吐)향 싱룽와 촌에서 동남쪽 1.3에 자리 잡고 있다. 82년 지표조사에서 처음 발견됐으며, 중국 고고학 역사상 100대 발굴 중 하나로 기록됐을 정도로 중요한 유적이다. 96년에는 우리로 치면 사적(전국중점보호단위)으로 지정됐다. 우한치 박물관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이곳을 역사유적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해마다 많은 국내외 학자들이 오고간다고 소개해 놓았다. 하지만 탐사단이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찾아왔고, 인근 주민들도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를 정도이니 어떻게들 찾아온다는 것인지 원!

 

발굴이 끝나 지금은 유적을 덮어놓은 상태. 풀밭과 옥수수밭으로 남게 되었으니 힘겹게 찾아온 사람들은 다소간 실망할 수 있다. 하지만 다링허(대릉하·大凌河) 지류인 왕뉴허(牛河)와 맞닿은 싱룽와 유적이 갖는 의미는 같은 다링허 지류에 속한 차하이 못지않다.

 

탐사단이 먼저 가본 차하이는 용의 고향이며, 그곳에서도 옥과 빗살무늬 토기가 나왔다. 기자는 차하이를 설명하면서 에 대해서는 언급했지만 옥과 빗살무늬 토기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쓰지 않았다. 빗살무늬 토기에 대해서는 차하이와 같은 시대인 싱룽와 유적, 옥에 대해서는 차하이싱룽와 문화를 잇는 홍산문화를 설명하면서 하기 위함이었다.

 

 

 

차하이 옥결, 싱룽와 옥결, 고성 문암리 옥결(왼쪽부터)

 

 

 

싱룽와에서는 사람과 돼지가 함께 순장된 장례풍습이 확인됐다.

 

# 8000년 전의 계획도시

 

 

 

 

싱룽와는 왜 중화시조취락이라는 명성을 얻었을까. 83~94년 사이 7차례나 발굴한 조사단은 깜짝깜짝 놀랐다. 175기의 집자리가 마치 도시계획으로 조성된 주택단지의 형태로 고스란히 확인된 것이다.(차하이에서도 55기의 주거지가 발견됐지만, 싱룽와보다는 규모가 작은 편이다)

 

중국에서 가장 넓고 보존이 잘된 신석기 시대 대규모 취락이다. 4에 달하는 마을은 환호(環壕·적의 침입을 막으려 도랑으로 두른 것)로 보호돼 있었다. 집자리의 규모는 보통 60( 18)인데, 가장 큰 두 곳은 140( 42)를 훌쩍 넘었다.

 

마을 한복판에 있는 두 개의 집자리엔 영도자가 살았거나, 회의 혹은 원시종교의식을 행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8000년 전의 마을에 벌써 2개의 씨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학계는 이 원시마을에 약 300명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각 방의 모습을 보면 취사용구뿐 아니라 생산도구, 심지어 식품저장용 움막까지 지니고 있었다. 이는 가정마다 경제적인 독립성을 지녔다는 얘기다. 또한 마을은 10개 정도의 열()을 지어 일정하게 구획됐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같은 배열에 살았던 가정끼리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1개 마을의 최소단위인 가정과, 같은 열에 사는 혈연관계로 맺은 가까운 친척, 그리고 마을 안에서 함께 살았던 먼 친척까지 하나의 씨족마을을 이뤘음을 말해준다.

 

# 싱룽와 마을의 비밀

 

차하이 유적도 마찬가지인데 이상한 점은 무덤이 주거지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이죠. 옛날 사람들은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고 믿었나봐요.”(이형구 교수)

 

무덤에는 빗살무늬 토기와 옥기, 골기 등과 함께 사람과 돼지를 합장한 흔적도 보였다. 이것을 순장(殉葬)이라 한다면 훗날 동이족의 나라인 상()도 순장의 풍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제사용 구덩이에서도 돼지뼈가 다수 발견됐는데, (지금의 돼지머리처럼) 돼지는 8000년 전에도 제수용품으로 사랑받은 게 분명하다. 돼지 외에도 사슴뼈와 물고기뼈가 대량으로 나왔다.

 

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돼지사육과 돼지숭배는 원시농업의 시작을 보여주는 단서이므로 차하이싱룽와인들은 어렵과 수렵을 주요 생산활동으로 하면서 농업을 막 시작한 단계로 볼 수 있다고 추정한다.

 

사족을 달면 차하이와 싱룽와는 200나 떨어져 있지만 연대와 문화양상은 매우 비슷하다. 따라서 중국학계는 차하이싱룽와 문화라는 용어로 묶는다.

 

차하이싱룽와 유적이 중요한 것은 용(차하이)이나 취락의 규모(싱룽와) 때문만은 아니다. 차하이, 싱룽와에서 동시에 출토된 옥과 정교한 빗살무늬 토기 덕분이다. 또한 확인된 175기의 주거지 가운데 5기가 동이의 문화인 홍산문화 주거지라는 점이다. 이것은 홍산문화(BC 4500~BC 2000)가 싱룽와 문화의 전통을 그대로 이었음을 웅변해준다.

 

옥 문화에 관해서는 옥 문화가 찬란한 꽃을 피운 홍산문화를 다룰 때 다시 언급하겠다. 다만 차하이·싱룽와에서 발견된 옥결(·옥귀고리)과 똑같은 것이 최근 한반도 중부(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7000년 전 유적에서 나왔다는 사실만 우선 언급해두고 싶다.

 

여기서는 빗살무늬 토기에 주목하고자 한다. 중국고고학계의 태두 쑤빙치(蘇秉琦)는 차하이와 싱룽와에서 발견된 빗살무늬 토기를 두고 “(발해문명을 꽃피운) 홍산문화의 근원이 중국중원에 있다는 믿음이 깨졌다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중원(황허)과 동북(싱룽와)의 신석기문화는 서로의 특색을 지닌 채 발전했으며, 두 곳의 공통점은 중화민족의 발상지 중 하나라는 점이며 모두 영도자가 살았다는 것이라고 견강부회했다.

하지만 빗살무늬 토기 문화는 주지하듯 한반도 신석기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발해연안에 있는 차하이싱룽와는 중국인들도 인정하듯 동이의 영역이다. 이기환 선임기자

(출처;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1091447501&code=210000#csidx8df6ec931fa0c5ca8b033ce235a37ed)

 

 

블로그 실증환인환웅단군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촌락은 내몽고 오한기 흥륭와興隆窪 지역으로서 지금부터 8200년 전의 촌락이고 사각형의 반지혈식半地穴式 방이 150, 묘장이 10, 탄갱이 12개가 있으며, 촌락 주위에 방어호圍壕가 만들어져 있다. 신석기 시대의 정주定住 민족의 모습이다. 따라서 유목 기마 민족의 도래 이전이다. 이와 같이 성을 쌓고 혈거하는 것은 축성혈거築城穴居라 하여서 [위서魏書-물길전勿吉傳]에 소개되어 있는데, 당시 장춘시長春市 동북방 송화강가 유수시楡樹市 부근에 있던 물길국은 본래 숙신肅愼의 후예라고 했다. 마한馬韓 말갈靺鞨, 물길勿吉, 숙신肅愼, 여진女眞이 결국 모두 같은 뿌리이다.

 

흥륭와 유적지에서는 소형 옥기장식 3개 귀걸이 등(아래 사해문화의 옥기 사진 중 오른쪽 옥결 귀걸이와 거의 비슷)이 발굴되었으며 이는 중국 최초의 옥기이다. 그 외 화강암으로 만든 67cm, 40cm의 돌조각 여인상 2개도 발굴되었다. 질그릇은 회색이 많고, 기하문 토기의 모든 것이 나타나는데 주로 요현문凹弦紋(회전시키면서 파내어 새기는 줄무늬)이 기본적으로 있고, 더하여 물결무늬나, 돗자리무늬를 덧새기기도 했다.

 

우리 한반도인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는 이들 예맥인들은 모계사회 농경민족이었으며, 이미 개와 돼지 등의 가축을 길렀고 흙과 함께 살고 죽었다. 산군山君 호랑이를 섬기는 한반도의 풍속은 예맥인들의 고유한 것이다. 환웅의 도래로 웅족, 즉 부여족에게 밀려난 적도 있지만 결국은 융합한다. 이 예맥문명은 황해 주변의 모든 신석기 문화지에 펼쳐져 양자강 아래 광동성까지 퍼져나갔다. 오래된 때를 가리키는 우리말 -은 바로 신석기시대 우리나라  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옛날 옛날 고리 적에라는 말은 즉 예의 날”, “고구려의 날 등 오래된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출처; 실증환인환웅단군역사http://daangoon.pe.kr/b1.htm)

 

3.4 사해(차하이)문화; 8000년 전(BC 6000)

중국 요녕성 부신시(阜新市) 부신몽고족자치주(阜新蒙古族自治州) 사납진(沙拉鎭) 사해촌(査海村)의 서남방 약 2.5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내몽고 동부 흥륭와(興隆窪) 문화 단계에 포함되는 한 문화유형으로, 중국 동북지역 신석기시대 유적 중 가장 이른 단계에 해당된다. 시기는 기원전 약 6000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문화의 명칭이 부여된 사해유적은 주거지 13기가 발굴된 바 있으며, 유적의 층위는 단순하고 문화층은 비교적 얇은 편이다. 주거지는 유적 서남부분에만 위치하고 있는데, 암반을 깎아서 주거면을 형성하고 있으며, 반지하식으로 화강암과 편마암의 기반을 수직으로 파들어 간 구조이다. 평면 배치는 서쪽으로 배열되었으며, 평면형태는 말각방형 또는 그에 가까운 형태이다. 각 줄에 맞춰 23기씩 배치되어 있는데, 거의 6줄에 해당하며 비교적 밀집분포하고 있지만 각 문지와 주거지의 방향은 일치한다. 이러한 점을 통하여 가옥 축조가 계획적으로 안배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주거지는 대··소의 3유형으로 분류된다.

 

출토 유물은 사질토기가 많고, 색깔은 주로 회갈색이며, 적갈색과 흑도도 보인다. 이 사해문화유형 유물은 홍산문화의 기원이 되는 한 구성요소로 생각되며, 세로 방향의 소위 자문은 동북지방 신석기시대 토기의 주요 문양의 하나이다. 특히 서요하 상류와 대·소능하유역에서 발달하였으며, 기원전 60005000년 전의 흥륭와(興隆窪), 사해 유적으로부터 5000년 전후의 홍산(紅山)문화, 부하(富河)문화에도 나타나고 있다. 사해유적의 토기 문양은 자문을 중심으로 비교적 규칙적으로 시문되었다. 특히 토기 경부의 기하문대는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흥륭와에서 보이는 삿자리문[菱形集線文]은 보이지 않는다.

 

석기의 종류는 비교적 단순한 편인데, 주로 대형 타제석기이며, 석산(石鏟), 석부와 갈돌, 갈판 등 전형적인 석기이다. 출토된 옥기는 20점이나 되며, 장식품과 실용공구의 2가지 종류가 있다. 장식품은 세장형, 숟가락형의 패옥[匙形器], (), 관옥(管玉), 환옥(環玉), 옥부(玉斧) 등이 있다. 또한 어린이 무덤에 6점의 옥기가 부장되었는데, 순옥(殉玉)의 풍습은 이후 형성된 홍산문화와 완전히 일치한다. 또 사해유적의 옥결 제작방법은 홍산문화 옥저룡(玉猪龍)의 제작법과도 같다.

 

이 유적의 방사성탄소연대는 7360±150 BP(비보정연대), 6925±95 BP(보정연대 7600 BP)로 확인된 바 있다. 이 유적 출토 옥제품이나 순옥의 풍습은 중국 내에서도 가장 이른 단계에 해당한다. 또한 2003년에는 용을 상징하는 20m 길이의 대형 부석(敷石)유구가 발굴되었으며, 뱀과 두꺼비 형상이 부착된 토기나 결상이식(玦狀耳飾), 토기에 용무늬로 판단되는 도소(陶塑)편이 출토되는 등 전설적인 용의 형상이 최초로 등장하는 시기의 유적으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동아시아문화의 원류와도 깊은 관련성이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이동주)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845)

 

 

2007 10 26일자 경향신문 기사 [코리안루트를 찾아서](4) 동이의 본향, 차하이

 

 

 

 

『-마을중심에 용 돌무더기 그렇다면

 

중국인들이 중화 제1(차하이)’, ‘화하(華夏) 1(싱룽와)’이라 하여 중국 시조의 마을로 떠받드는 곳이다. 하지만 이 두 곳은 발해문명. 즉 우리 민족뿐 아니라 중국·일본까지 아우르는 동아시아 문명의 젖줄이 된 발해문명의 여명을 열어젖힌 곳이 아닌가.

 

# ‘중화 제1 동이 제1

 

# 마음의 본향

 

내심 실망감이 고였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라고 해서 중화 제1이라 해놓고 이렇게밖에 꾸미지 못하나. 박물관 전시실을 둘러본 뒤 차하이 유적을 찾았다. 발굴이 끝난 지 오래된 탓인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탓인지 발굴했던 곳엔 수풀이 무성했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속이 다 시원할 정도다. 낮은 구릉지대 위에서 보는 뻥 뚫린 시야. 이곳은 지리상 상당히 드라마틱한 곳이다.

 

특히 우리 민족을 비롯한 동이족의 활동무대인 랴오시(遼西)와 랴오둥(遼東)이 이곳을 지나면서 서로 이어져 있다. 이곳은 랴오시의 가장 동쪽 평탄한 구릉지대이며, 랴오시와 랴오둥을 구분하는 이우리산(巫閭山)이 끝을 이룬다. 서쪽은 다링허(大凌河)와 이어지고, 동쪽은 랴오허 하류로 이어져 발해만으로 연결된다.

 

북쪽은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동남부 초원과 접해있다. 지금 다링허 상류지역인 이 지역은 메마른 하천이 많다. 하지만 8000년 전 이곳에 마을이 들어섰을 때는 고온 습윤했다고 한다. 발해와 다링허, 랴오허 등 바다와 강이 인간의 삶을 도와주면서 교역로의 구실을 해주고, 원시농경 등 생산활동에 유리한 개활지가 넓은 이곳. 그랬으니 이곳에 중화 제1’, 아니, ‘동이의 제1이 탄생한 것이다.

 

 

 

용 혹은 뱀이 두꺼비를 삼키는 모습을 새긴 빗살무늬 토기()와 용을 새긴 토기편. 모두 차하이에서 발견됐다.

 

 

# 8000년 전의 용()

 

이형구 교수가 돌무더기 형상 주변을 돌며 언뜻 구체적인 형상을 그려내지 못하는 기자에게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해준다. 정말이다. 용머리와 용 몸 부분의 돌무더기는 두껍고 조밀하게 용을 표현했다. 반면 꼬리부분의 돌무더기는 느슨하게 흩어져 있다. 용은 머리를 쳐들고 입을 벌리고 있으며, 몸을 뒤틀고 있다. 꼬리는 숨긴 듯 드러나게 해서 마치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듯한 느낌이다.

 

용의 전체 길이는 19.7이고, 몸의 폭은 1.9~2에 달합니다.”

 

희한한 것은 이 용 형상의 돌무더기가 마을의 중심부에 있다는 점이다. 사방에 60기에 가까운 주거지가 둘러싸여 있고, 용의 머리 앞에는 10여기의 무덤이 있었다. 용 모양의 방향인 215도였는데, 이는 주거지의 건축 방향과 일치한다. 1982, 랴오닝성 전체에 대한 발굴조사 때 주거지와 함께 이 용 형 돌무더기를 확인했다

 

 

 

다링허 상류 낮은 구릉지대에 자리잡은 차하이 유적에서 확인된 돌무더기 용의 형상이다. 주거지와 주거지 사이에서 발견됐으며, 용 신앙의 시원으로 평가된다. <차하이/김문석기자>

 

# 용의 고향은 발해만

 

발굴자는 깜짝 놀랐지만 처음엔 무척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보통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차하이 주거지 유적의 탄소측정 연대는 7500년 전. 그러나 수륜교정 연대(나이테를 분석한 연대)에 따르면 8000년 전까지 올려볼 수 있다. 만약 8000년 전 차하이 마을 사람들이 이미 용을 형상화하고 신성시했다면.

 

그때까지 알려진 가장 원시적인 형태, 즉 돌로 쌓아 모양을 만들어간 용 형상은 허난성(河南省) 푸양()과 후베이성(湖北省) 황메이룽(黃梅龍)이었다. 연대는 6000년 전이다. 그런데 그보다 2000년이나 앞선 8000년 전에 중국 동북쪽, 즉 오랑캐의 소굴이라고 폄훼했던 발해만 연안의 동이지역에서 용이 발견되다니. 이 돌무더기는 과연 인간이 어떤 뜻을 갖고 쌓은 것인가, 아니면 그저 자연스러운 돌무더기에 불과한 것인가.

 

중국학계는 술렁거렸다. 중국 사상의 원형인 용신앙은 과연 중원이 아니라 발해만에서 태어난 것인가. 그러나 종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용신앙의 원천이 차하이 유적임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들이 잇달아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즉 토기 위에 부조로 장식된 용의 문양이었다.

 

이 용문양 토기편은 역시 차하이 유적의 주거지에서 발견된 빗살무늬 토기편이다. 기자는 랴오닝성 박물관에 전시된 용문양 토기편 2점을 보았다. 하나는 감아도는 용의 몸뚱이이며, 다른 하나는 위로 오르는 용의 꼬리가 맞았다.

 

# 중국인만 용의 자손?

 

더욱 재미있는 것은 완형의 원형도관(圓形陶罐) 표면에 선명하게 새겨놓은 두꺼비와 뱀의 형상이다. 이는 뱀이 두꺼비를 입에 물고 삼키는 극적인 장면을 표현했는데, 8000년 전 사람들의 사실적인 표현력을 알 수 있다.

 

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이런 것들은 모두 용의 형상을 표현하는 수법이며 강렬한 신비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았다. 궈다순은 더 나아가 이런 수법은 분명 제사와 관계있는 것이며, 용 숭배 사상이 8000년 전 차하이 마을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차하이 박물관 전시실은 중국 제1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설명해놓고 있다.

 

차하이는 농업생산 위주의 씨족 부락이었는데, 용은 원시종교와 원시문화의 산물이다. 차하이 사람들은 허무적인 용신앙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킨 사람들이다. 차하이 용은 우리나라(중국) 최초의 용이다. 용은 농경문화에서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용은 과연 중화민족만이 사랑하고 숭배한 영물인가. 그렇지는 않다. 역사적으로 중국인들은 용의 자손이라 했고 용을 신앙으로 추앙했다. 하지만 차하이에서, 그리고 곧 방문할 싱룽와에서 보이는 문화의 양상을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이기환 선임기자

(출처;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0261501551&code=210100#csidx1dd0fd618f0dfe79f8c59bcd023ff1e  )

 

블로그 실증환인환웅단군

 

우리 민족의 선조는 예맥濊貊 민족이며, 지금부터 8000년 전 신석기시대에 만주와 시베리아, 한반도, 산동반도 등지에서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석기 예술의 정수인 옥기 문화를 오랑캐문화로부터 받아서 이어갔다.

라는 글자는 이십사절기를 알고 농사를 짓는 민족이라는 의미가 있고, 은 호랑이나 표범 꼬리를 머리에 매고 다녀서 얻어진 이름인데 예인은 호랑이를 숭상했다. 곰이 아니다. 단군왕검 신화에서 환웅에게 밀려난 민족이 바로 예족이기도 한데 한반도의 토템이 역시 호랑이, 산군山君이다.

 

[후한서後漢書] [위지魏志] <예전濊傳>에서 기자조선箕子朝鮮이 언급되는데, 마지막 왕 조선후朝鮮侯 기준箕準까지 무려 40여세를 전한 국가로 적고 있다. 비록 고조선古朝鮮을 언급하지 않고, 고작 고조선의 변방인 중국계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기록했지만, 이 고조선이나 기자조선의 중심 민족도 바로 예맥족이다.

[후한서], 예국濊國에서는 현재 압록강鴨綠江가의 궁간목弓幹木에 의한 강력한 활인 낙랑단궁樂浪檀弓이 만들어졌고, 조기班魚가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설문說文]에서는 예야두국?耶頭國에서 참조기?를 수출한다고 했다. 조기는 발해 연안에 알을 낳고 회귀하는 물고기이다. 이로 인해, 낙랑군 동쪽 예국 위치는 한반도 동해안이 아니라, 요동반도 동해안으로 고증된다.

 

한편 [후한서]에서는 부여국에 대해서 본래 예의 땅本濊地也이라고 기록하였고, 예성濊城도 있고,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는 국새國璽가 있었다. [진서晋書]에서 벼 화변의 예자가 출현하며, 만주를 다스리던 백제 담로제의 지방관직으로 추정되는 임예태수臨穢太守 관인官印이 요동반도 신금시新金市에서 발견되었다. 신금시는 백제 국모 소서노가 세웠던 어하라於瑕羅 영역이고 뒷날 대방백제의 영역이다.

 

[위서魏書-두막루전豆莫婁傳]에서도 송화강 북쪽 두막루땅이 구북부여舊北夫餘의 후손이고 본래 예의 땅이라고 했다. [후한서-구려전句麗傳]의 구려는 맥궁貊弓을 사용하던 일명 맥이족貊夷族, 소수맥족小水麥族인데, 고구려의 기저 바닥 세력이고 이 역시 예맥인이다. 구려句麗는 구려九黎이기도 하다. 은 보리, 는 좁쌀을 의미하는데 좁쌀이 먼저 재배되었다. [신당서新唐書-발해전渤海傳]에서는 모란강 동경성 일대가 예맥고지다. [삼국사기]에서 신라 남해왕 때에 북명北溟(= 강원도 강릉) 사람이 예왕濊王 도장을 주워서 바쳤다. 위만衛滿 침략 때에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의 이십만호는 서남으로 이주하여 중국 천진시天津市 남쪽의 창해군蒼海郡에 옮겨갔다. 이 모두를 종합하면 예맥인의 영역은 만리장성 동쪽의 요녕지방, 길림지방, 흑룡강지방과 한반도가 다 포함되고 일본 열도의 원주민도 되며 이는 빗살무늬토기문화권과 같다.

 

지금부터 8000년 전, 신석기시대에 예맥인은 황해 연안을 따라서 만주와 시베리아, 한반도, 산동반도, 중국 동남해안에서 빗살무늬토기 문화권을 일으켰다. 북방 지역은 기장쌀에 의한 농경이 발달하였고 화북 지방은 지금보다 따뜻하여 벼농사를 지었고, 양자강 이남은 오늘날의 아프리카 열대림처럼 미개척지였다.

그 당시 만주는 따뜻했으며, 마지막 남은 털코끼리와 코뿔소를 사냥했다. 예맥인은 돼지나 개 가죽 옷을 입고, 코뿔소 가죽은 귀족들의 전투용 갑옷이었으며, 호랑이나 표범 꼬리로 머리를 장식했다.

 

이때 부족 사회가 연합한 왕권 체제가 생겨났는데, 이 예맥 문화의 모습은 내몽고 적봉시赤峯市 오한기敖漢旗 흥륭와문화興隆窪文化와 요녕성遼寧省 부신시阜新市 사해문화査海文化에서 보이는 선홍산문화先紅山文化.

 

두 유적지 중에서 화려한 것은 부신시 사해문화인데 왕권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사해문화에서는 왕권의 상징인 용토템이 출현하는데, 이 지역을 고대에 구려(句麗 =九黎)라고도 하였다. [전한서]에서 중국이 현도군을 설치하고 이를 구려의 서북이라고 하였는데 당시 현도군은 부신시 북쪽에 있었고, 그 동남의 사해 문화 유적지가 바로 고대 구려로서 구려九黎의 중심이었다. [사기]에서는 청동무기로서 중국에 진출한 치우천왕을 구려九黎의 왕이라고 하였다. 아홉 부족을 의미하는 구려에는 창려, 옥려, 부려, 무려 등이 속했었다.

 

사해문화의 도기는 황갈색이고 지자문之字?이 많고 뱀과 두꺼비를 숭상했는데 용과 함께 농경문화를 의미한다. 도기에서 용무늬가 발견되었고 또한 2003년에는 바위에 새겨진 20 미터 길이의 대형 용조각이 발굴되었다. 농사를 짓는 민족은 비를 뿌려주는 용과 한발旱魃(=가뭄의 신)을 잡아먹었다는 전설의 호랑이를 숭상한다. 그중에서 용은 이 시대에 왕권王權의 출현을 의미한다. 아울러서 20여건의 옥기가 발굴되었고 옥비玉匕, 옥부玉斧, 옥분?, 옥관玉管, 옥주玉珠 등이다.

 

빗살무늬 토기는 bc6000년 전에 시작되었다. 이 토기는 산동반도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bc5000 -3000)와 한반도, 압록강 집안, 요동의 대련반도 소주산문화素珠山文化 심양의 신락문화新樂文化(bc5500) 길림시吉林市 서단산문화西丹山文化와 장춘시長春市 좌가산문화左家山文化, 그리고 서요하西遼河 상류, 내몽고 적봉시 홍산문화紅山文化(bc5500)까지 고루 발견된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바다가 훨씬 작았던 황해를 둘러싸고 예맥의 문화가 퍼져나간 흔적이다.

 

그러나 11600년 전 이후의 더운 날씨로 인해 내륙은 사막화가 되고,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발해 바다가 50m 이상 차오르고, 바다 주변은 차오른 물로 인하여 예전보다 더 추워졌다. 8200년 전에 일어난 지구 냉각기 200년의 사건이다. 그중 중심이 되는 bc6000년의 부신시 사해문화査海文化와 오한기 흥륭와문화興隆窪文化는 심양의 신락문화新樂文化보다 1000년 이상 빠르고, 적봉의 홍산문화紅山文化보다도 2000년 정도 이르므로 선홍산문화先紅山文化라고 한다.

 

옥도끼玉斧는 석병石兵 시대에 신권神權을 상징하는 새로운 옥병玉兵 시대를 열었다. 더욱이 옥도끼는 빛을 발함으로써 당시의 어떤 무기보다 무서운 역병을 일으키는 귀신들을 내쫓는 효험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월절서越絶書]에 신농, 혁서 때에는 석병石兵을 쓰고, 황제시대(bc2700)에는 옥병玉兵을 쓰고, 하우夏禹(bc2100) 시대에는 동병銅兵을 쓰고, 그 후에 철병鐵兵을 썼다고 한다. 예맥 문명에서 옥병의 출현은 중원보다 빠른 bc6000년이다. 중원의 옥기 문화는 흥륭와문화, 사해문화로부터 대문구문화를 거쳐 태호太湖의 양저문화良渚文化에서 가장 꽃피는데 bc3000년 이후다.

(출처; 실증환인환웅단군역사http://daangoon.pe.kr/b1.htm)

 

3.5 로관대(라오관타이)문화; 8000년 전~5000년 전(BC 6000년~BC 3000년)

『라오관타이 문화(중국어 정체자: 老官台文化, 병음: lǎoguāntái wénhuà Laoguantai culture[*], 기원 전 6000년경 - 기원 전 3000년경)는 중화인민공화국 화북의 황하 중류 지역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문화이다. 섬서성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문화 중 현재로서는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 문화이다.

 

표식 유적은 1950년대 후반에 조사된 산시성 (섬서성) 화저우구 현성의 남서(중국 황화강의 지류의 하나로 서사군도강의 연안)에 있는 라오관타이 유적이다.

 

라오관타이 유적은 이 문화의 유형 유적 내에서 최초로 발견된 유적이었지만, 출토한 문물은 비교적 적었다. 그러나 감숙성 친안 현의 다디완 유적에서 대량의 유물이 발견된 후, 이 문화를 《다디완 문화》(Dadiwan culture)라고 부르려는 움직임이 학자들 사이에서 나왔다. 그러나 다디완 유적에서는 복수의 시대에 문화의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이유로, 이 문화 유형의 유물만 출토된 서안시 림동구의 백가촌 유적을 따서 《백가촌 문화》(白家村文化)라고 명명하려는 주장도 있었다.

 

명명 논쟁은 현재까지 계속 되고 있으며, 종합적으로 보면 라오관타이 문화는 두 개의 단계로 추측된다. 전기는 다디완기(大地湾期로) 대표되는 약 7300년 전 경이고, 후기는 섬서성 바오지 시에서 출토한 북수령하층(北首嶺下層)으로 대표되는 약 7300년부터 7000년 전의 사이의 시기이다. 라오관타이 문화의 발견은 그 후 이 땅에서 만들어진 채도 등을 특징으로 하는 신석기 시대 문화와 양사오 문화의 기원을 찾는 의의를 가진다.

 

당시의 사람들은 벌써 조 등의 잡곡류를 재배하고 있었고, 돼지나 개 등의 가축을 길렀으며, 정주하고 취락을 쌓아 만드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의 공구는 마제 석기가 주를 이루지만 , 타제석기나 세석기 등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또 도기의 제작도 시작되어 수는 적은 비교적 저온으로 구운 토기가 발견되고 있다. 채도(채색 토기)는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B%9D%BC%EC%98%A4%EA%B4%80%ED%83%80%EC%9D%B4_%EB%AC%B8%ED%99%94)

 

3.6 보이스만 문화(Boisman文化); 8,000년 전~6,000년 전(BC 6000년~4000년)

보이스만문화는 러시아 연해주의 해안가에 주로 분포하는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패총문화이다. 이 문화는 1950년대와 60년대 자레치예와 키롭스키유적에서 압날문이 발견되면서 처음 알려졌고, 1990년대 보이스만2유적을 발굴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되었다. 루드나야문화와는 다치구의 시문구로 토기를 시문한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대표적 유적으로 보이스만2, 루자노바 소브카 유적이 있다. 보이스만2유적은 러시아의 하산지구 동해안가에 위치한 패총이다. 유적에서는 다치구 압날문토기가 6개의 층위를 이루며 출토되었는데, 각 층에서 여러 가지 형식의 토기가 한 층위에서 출토되어 각 문화의 한 단계를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보이스만문화를 이 유적의 각 층을 기준으로 해서 원()보이스만 단계부터 보이스만 5단계(유형)까지로 구분한다.

 

보이스만2유적에서는 2기의 합장묘와 2기의 단장묘가 조사되었다. 묘광선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인골 주위에 모닥불을 피운 자리가 발견되었다. 무덤 주위에서는 사슴뿔, 남근모양의 돌들도 발견되었다. 특히 5호분은 측와굴장(側臥屈葬)을 한 성인 남성이 묻혔으며 머리 주위에 마제석촉이 발견되었다. 4호에서는 길이가 21에 달하는 흑요석제 작살이 출토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남성 무덤과 반대로 여성 무덤에서는 대부분 조개껍질로 만든 팔찌와 달력을 상징하는 골제품이 발견되어서 부장품의 성별에 따른 차이를 보여준다. 무덤에서는 총 15명의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형질인류학적 분석결과 인종적인 특징은 캄차카유형과 가까운 것으로 밝혀졌다.

 

출토된 인골의 머리뼈에서는 다양한 편두의 습속이 확인되었다. 편두는 천을 감아서 묶는 방법, 나무판자와 같은 물체로 누르는 방법 등으로 전두, 측두, 후두 등을 변형하였는데, 두개골이 완전히 자라지 않은 소아기에 만든 것이다. 보이스만의 편두 두개골은 극동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무덤 외에도 패각층 아래에서 파괴된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보이스만문화의 토기는 각 단계마다 특징에 차이가 있다. 원보이스만 단계는 첨저토기로 구연부의 단면이 괄호‘)’모양이고 구연부에만 압인문이 시문되었고, 동체부는 무문이다. 압인문의 문양은 삼각형, 원형 등 다양하다. 보이스만문화의 1단계는 토기의 기형과 문양 특징에 따라서 5류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1류인데, 구연부가 계단식으로 표현된 평저토기이다. 저부를 제외하고 거의 전면에 다치구로 압인문과 압날문을 번갈아 가면서 시문하였다. 동체의 대부분은 하부의 좁은 대상을 제외하고 스탬프 압날과 침선 기법으로 시문하였다. 2단계의 토기는 구연부가 1단계와 마찬가지로 계단식이지만 구연단 폭은 일률적이다. 시문 범위는 대체적으로 동체부의 반 정도 채워진다. 압날문이 주요한 시문 방법이고, 그 사이에 점선문도 시문된다. 이 단계부터 경부가 있는 옹형토기가 나타난다.

 

3단계 토기는 1·2단계의 계단식 구연부가 축약되어 구연단이 두텁고 둥글게 표현된다. 이전 단계에서 압날 혹은 압인 기법으로 시문된 계단식 구연단이 3단계 옹형토기의 경부에 그대로 표현되고, 그 위에 단순하고 둥근 구연단이 형성되었다. 문양은 구연부에서 저부까지 전면 시문되었다.

 

4단계 토기는 구연단이 편평하고, 구연부 부근에만 시문된다. 시문기법은 압인과 짧게 눌러서 찍는 기법이다. 5단계 토기는 구연부에서는 4단계와 구별이 없지만, 완전하게 압날문토기로 전면이 시문되거나, 저부 부근에만 문양이 생략된 것, 혹은 동체부의 1/2가량이 시문되는 등 이전 단계에 비해서 동체부 시문 범위가 일정하지 않다. 석기는 규질편암으로 만든 양면가공 석기가 주류를 이룬다. 돌날로 만든 칼, 유엽형의 석부, 어망추, 갈돌 등이 있으며 석촉은 대부분 양면 가공한 유엽형과 삼각형이고 마연한 것도 있다.

 

골제품은 어로구가 대부분으로 작살만 100여 점 이상이 나왔는데 고정식, 조립식, 회전식 등 종류가 다양하다. 보이스만2유적의 층서를 바탕으로 각 층에서 출토된 숯을 바탕으로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원보이스만 단계는 기원전 6000년경, 1단계는 기원전 6000년기 전반, 2단계는 기원전 6000년기 말, 3단계는 기원전 5000년기 중엽, 4단계는 기원전 5000년기 후엽, 5단계는 기원전 4000년기 전반에 해당한다. 한반도 동북지방에도 보이스만문화 요소가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다치구 압날문토기가 특징인 서포항 1기를 보이스만 5단계와 같은 흐름으로 보기도 한다.(김재윤)

(출처; 한국고고학전문사전,

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800)

 

티스토리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연해주에서는 신석기시대에 무덤과 패총이 확인되었다. 앞서 설명한 바 있는 루드나야 문화와는 다른 토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남긴 유적이어서 다른 문화로 구분되었다. 이 문화의 이름은 보이스만 문화이다.

 

보이스만-2유적에서는 7000년 전부터 5000년 전 까지 6개의 층으로 문화가 변화해 온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 고고학 변화는 토기에서 관찰되는 것이 기본이다.

 

보이스만-2 유적은 연해주에서도 핫산지구 즉 제일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서 두만강 유역과의 거리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이 유적은 패총위에 형성된 무덤 유적이다. 현재의 위치는 앞의 지도와 같다. 패총은 주로 바다와 접한 곳에 생기는데, 현재의 위치는 바다와는 약간 거리가 있다. 패총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동해의 기온이 계속 올라가서 유적이 바다와 접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가장 바다와 가까운 시점이 6000년 전이다

패총유적이어서 뼈로 만든 골각기가 특히 많이 남아 있게 되었다.

 

 

 

(보이스만 2유적의 전경, 지도상으로는 유적은 바다와 인접하는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떨어져 있다.)

 

왜냐하면 연해주도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토양에 산성성분이 많아서 유기물질이 잘 남아 있지 않는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유적에 화재가 나거나, 패총 위에 유적이 형성될 경우는 뼈와 가죽과 같은 유기물질이 남아 있게 된다.』

(출처; https://eastsearoad.tistory.com/115?category=732912)

 

티스토리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보이스만-2 유적에서는 무덤이 확인되었다.

2점으로 나누어져서 확인되었는데, 단독으로 뭍인 경우도 있고, 집단으로 매장된 경우도 있다.

 

 

 

(그림1. 보이스만 문화의 집단매장묘)

 

주로 양 다리와 양 발을 모두 굽히거나 혹은 다리만 굽힌 경우도 있으며, 옆으로 뉘운 자세인데, 측와굴신장(側臥屈身)(그림2)이라고 한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죽으면 사후강직이 일어나기 때문에, 굴신장은 의도적으로 묶어서 매장된 것으로 보고 있다.

 

여성으로 판명된 인골 옆에는 토기를 두고, 남성 인골 옆에는 활자루와 작살을 둔 흔적이 확인된다.

 

 

 

(그림2. 여성인골)

 

 

 

(그림3. 보이스만 문화의 남성인골)

 

 

앞서 무덤을 살펴보면, 무덤을 판 흔적이 없다. 무덤의 깊이가 아주 얇았거나 거의 파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보이스만 문화에는 두개골을 변형시킨 인골도 확인되었다. 이른바 편두(偏頭)의 습속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4. 보이스만2 유적 출토, 변형된 두개골)

 

 

 

(그림5. 극동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편두)

 

신석기문화에서는 장신구가 많이 확인되는데, 편두도 일종의 성형이라는 점에서 신석기인들이 미를 추구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의 의미는 사회적 위치이다

 

편두 된 두개골의 모양은 정수리가 상당히 올라가게 변형되어 있다(그림 4). 두개골을 변형시킴으로써 자연적으로 머리변형으로 자신의 위치를 높이고자 했을 수도 있다. 모자를 쓴 효과를 내는 것처럼... 이것은 두개골의 정수리 부가 상당히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 내린 추측이다.

 

주지하다시피 편두는 삼국지위서동이전에 가야인의 편두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는 실제로 김해 예안리고분에서 출토되기도 해서 흥미로운 연구주제이기도 했다. 가야의 편두 습속이 일종의 DNA처럼 전해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보이스만 문화의 편두와 가야의 편두를 연결시킬 고리는 충분하지 않다. 한반도 남부지방 신석기 유적에서 혹시 편두가 나온다면 또 모를까.....애매한 이야기이다.

 

고고학자료는 역사서처럼 미주알고주알 적어 놓지 않아서 상상을 자극하기 좋다. 그러나 상상과 팩트의 경계는 어딜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보이스만-2 유적은 패총 위에 무덤이 형성되어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출처; https://eastsearoad.tistory.com/117?category=73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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