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3. 9,000년 전~ 6,000년 전

3.1 루드나야문화(Ludnaya文化); 9,000년 전~8,000년 전(BC 7000~BC 6000)

루드나야문화는 루드나야 프리스탄, 마략 르발로프 유적 등의 발굴에서 압인문(押印文)토기가 확인되면서 문화의 개념이 수립되었다. 그 후에 쵸르토비 보로타유적의 발굴을 통해서 압인문토기와 함께 융기문토기가 출토되면서 루드나야문화의 토기 특징이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 문화는 2000년대 들어와서 세르게예브카1, 세클라예보7 유적 등을 발굴하면서 더욱 세분화되어 기형과 문양을 기준으로 루드나야유형과 세르게예브카유형으로 분리되었다.

 

루드나야유형은 구연부에만 능형 혹은 삼각형 문양이 압인된 발형토기가 특징이다. 세르게예브카유형은 압인이라는 공통적인 시문방법이지만 토기 기형은 목이 있는 옹형이며, 능형압인문을 중심으로 해서 위 아래로 다치구 시문구로 압날문을 복합해서 시문한 문양대가 특징이다. 이 유형에는 융기문토기도 함께 출토된다.

 

루드나야문화는 한카호 부근과 연해주 동해안에 주로 분포하고 있는데, 루드나야유형의 대표적인 유적은 루자나야 소브카2, 루드나야 프리스탄 유적이 있다. 세르게예브카유형은 세르게예브카1, 쵸르토비 보로타, 엘제페36 유적 등이 있다.

 

주거지는 세르계예브카1유적의 수혈주거지와 쵸르토비 보로타유적의 동굴주거지가 알려져 있다. 동굴주거지는 평면형태가 방형이며 주거지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기둥구멍이 확인되었다. 면적은 45로 두꺼운 숯 층이 주거지 내부에 퇴적되어 있다. 주거지의 모서리에는 5구의 인골이 발견되었으며, 토기 이외의 유기물로 된 유물도 대량 발견되었다. 다양한 장신구도 많이 출토되었다. 골제 장신구는 주로 드리개장식으로, 마연한 후 불에 태워서 흑갈색 빛을 띤다. 조개나 돌로 만든 장신구도 있으며, 직물도 확인되었다.

 

인골 중 4구에 대한 분석이 행해졌는데, 1213세의 유년, 5060세의 여성, 1820세의 남성, 4050세의 남성으로 밝혀졌다. 인종은 북아시아 몽골로이드의 바이칼그룹에 속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루드나야 프리스탄, 쵸르토비 보로타, 세르게예브카1, 우스티노브카8 유적 등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통하여 대체로 루드나야유형은 기원전 7000년 기 후반, 세르게예브카유형은 기원전 6000년 기로 편년된다. 그러나 두 유형의 병행관계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 성과가 필요하다. (김재윤)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 신석기시대편,

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720)

 

3.2 요하문명(발해문명); 9000년 전~3000년 전(BC 7000~BC 1000)

리아오강에서 이름을 따온 리아오 문명 또는 리아오강문명은(요하 문명) 중국 북동부 리아오유역이고 만주 남부에서 유래한 고대 중국 문명이다. BC  6,200 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명은 1908년 일본 고고학자 류조 토리가 홍산 문화를 발견했을 때 발견되었다.

 

대규모 수혈주거, 무덤, 제단이 있는 사원이 발굴되었다. 리아오문명은 선사시대에 "한 나라"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홍산문화의 유물에서 풍수의 모델이 발굴되었다. 흥륭와문화의 유적에서 중국 용의 선구격인 옥과 같은 공제품이 발견되었다. 또한, 가장 오래된 빗살무늬토기와 랴오닝청동단검(비파형청동검)이 발굴되었다.

황하 문명과 장강 문화와 동시에 발생했기 때문에 고대 중국 문화에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역은 지난 1백만 년 동안 사막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15년 연구에 따르면 이 지역은 12,000년 전부터 4,000년 전까지 한때 풍부한 수생 자원과 깊은 호수와 산림이 특징이었다.  4,200년 전에 시작된 기후변화로 사막으로 변했다. 따라서 홍산문화의 사람들은 약 4,000년 전에 남쪽으로 이주했을 것이고 나중에 중국문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리아오 지역에서 BC 6,500년에서 BC 2,700년으로 연대측정이 되는 인간의 뼈에 대한 유전자 분석은 Y-DNA 하플로그룹 N(우랄어족 사람들과 야쿠트족에서 흔함) 60-100%로 관측되었다.

 

List of cultures

Xinglongwa culture About 6200 - 5400 B.C.

Xinle culture About 5200 - 4800 B.C.

Zhaobaogou culture About 5400 - 4500 B.C.

Hongshan culture About 4700 - 2900 B.C.

Lower Xiajiadian culture About 2000 - 1500 B.C.

Upper Xiajiadian culture About B.C. 1100 - B.C. 500

(출처; 위키피디아, 번역은 구글 번역임.

https://en.wikipedia.org/wiki/Liao_civilization)

 

2007 10 7일자 경향신문 기사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한반도·문명의 젖줄 발해문명

 

-발해만 동이족, 동아시아의 새벽을 열다-

 

랴오허(요하, 遼河) 유역은 고문명의 발상지, 다민족 다문화의 교류지였다.”(선양박물관 랴오허 문명전 전시실 입구 소개문)

 

중국 문명은 랴오허문명과 황허문명의 결합으로 완성됐다.”(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

 

유적·유물이 어쩌면 그렇게 우리 것과 같은지 모르겠다.”(이형구 선문대 교수)

 

1980년을 전후로 중국 고고학계는 그들의 표현처럼 굉동(轟動·충격)’의 상황으로 빠져든다. ‘중국문명=황허문명이라는 중화주의를 고수했지만 더는 그런 주장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낱 오랑캐(동이·東夷)의 영역으로 폄훼했던 발해만 일대에서 황허문명보다 앞서는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졌으니 말이다.

 

 

 

훙산문화의 대표유적인 뉴허량 유적 전경. 수장(首將)급이 묻힌 것으로 보이는 적석총을 비롯한 돌무덤들이 줄비하고, 왼쪽엔 조상신·하늘신에 제사지낸 원형제단도 조성돼있다.

 

중국 문명의 원조는 동이족

 

중국 고고학계의 태두 쑤빙치(蘇秉琦) 동이의 랴오허문명과 한족의 황허문명이 조화를 이뤘으며, 여기에 남방·서북문화가 중원으로 집합해 오늘날의 중국 문명이 완성됐다고 결론내렸다. 중국 문명을 일원일체에서 다원일체의 문명으로 바꿔 해석한 것이다.

 

중국인들의 용 신앙이 중원이 아닌 대릉하 상류의 동이족 본거지에서, 그것도 BC 5600년 유적(차하이(사해, 査海))에서 용 형상의 돌무더기 형태로 확인된 것도 충격이었다. 또한 차하이 유적과 동시대(BC 6200~BC 5200)인 싱룽와(흥륭와, 興隆窪) 유적에서는 요즘의 전원주택단지와 같은 주거유적이 발견되었다. 중국인들은 차하이와 싱룽와 유적의 이름을 중화(中華) 1(차하이)’, ‘중화시조의 취락(싱룽와)’이라고 명명했다.

 

이 차하이싱룽와 문화는 뒤에 이어지는 훙산문화(紅山·BC 4500~BC 3000)의 원형이었다. 랴오닝성 차오양시 젠핑(건평, 建平)과 링위안(능원, 凌源) 양현 경계에 걸쳐있는 뉴허량(우하량, 牛河梁) 유적은 무덤과 제단, 신전(여신묘) 등 고대사회의 3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츠펑(적봉, 赤峰) 싼줘뎬(삼좌점, 三座店)과 청쯔산(성자산, 城子山·샤자뎬 하층문화 즉, BC 2000~BC 1200)에서 확인한 엄청난 규모의 석성과 돌무덤떼, 제단, 주거지 등도 이미 고국(古國)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쑤빙치는 훙산문화와 샤자뎬(하가점, 夏家店) 하층문화, (()의 문화는 고국(古國·훙산)방국(邦國·샤자뎬 하층)제국(帝國, ·)으로 발전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이것은 중국 문명과 국가 형성의 기원 형태를 단적으로 알려주고 있다고 보았다.


석성, 돌무덤, 빗살무늬토기, 옥기

 

경향신문 탐사단은 727일부터 5일간 동양문명의 서막을 연 다링허·랴오허 일대를 돌아보았다. 국내언론사상 처음 있는 취재이니만큼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탐사단은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발굴이 끝나 아직 국내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유적(싼줘뎬 석성)도 보았다. 이외에도 청쯔산, 싱룽와 유적, 차오마오산(초모산, 草帽山) 제사유적 등도 전문가들의 발길을 쉽게 허락치 않은 궁벽한 곳에 놓여 있다. 한데 전혀 낯설지 않았다.

 

차하이와 싱룽와 유적에서 확인된 갈지()·사람 인()자 빗살무늬 토기는 우리 신석기문화의 전형적인 유물이 아닌가. 또한 영생불멸의 상징인 옥결(玉玦·옥으로 만든 귀고리)은 차하이싱룽와 유적부터 훙산문화까지 도배하다시피했다. 이형구 교수는 옥결은 최근 한반도 동해안 고성 문암리(BC 6000)에서도 나왔다면서 엄청난 규모의 돌무덤과 제단, 신전인데 석관묘, 석실분, 적석총 등 돌무덤은 우리 민족의 고유 묘제라고 설명했다.

 

훙산문화의 대표 유적인 뉴허량에서는 수장(首將)의 것으로 보이는 큰 적석총과 27개의 석관묘가 확인됐다. 이 양식은 고구려·백제의 적석총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뉴허량 유적 바로 곁에 있는 직경이 100가 넘는 돌로 쌓은 대형 피라미드(금자탑)도 이번에 직접 보았다.

 

또한 뉴허량 유적에는 조상신과 하늘에 제사 지낸 원형 제단이, 인근 구릉에서는 지모신 신앙의 상징인 여신묘와 여신상이 각각 확인됐다. 이런 여신상은 랴오허를 거쳐 랴오둥 반도와 한반도에서도 두루 보인다

 

 

 

확인된 치() 13개나 되는 어마어마한 츠펑 산줘뎬(삼좌점, 三座店) 석성(BC 2000~BC 1200). 고조선의 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고구려 백암성과 백제 계양산성 등과 축조기법이 똑같다. 지난해 발굴이 끝났으며, 이번에 경향신문 탐사단이 처음 공개하는 것이다. 이형구 선문대교수(왼쪽)가 성의 규모에 감탄하며 축조기법을 설명하고 있다. 츠펑/김문석기자

 

13개 치()가 달린 석성은 고조선?

 

이밖에 싼줘뎬과 청쯔산에서 확인한 석성과 제사유구, 주거지 등을 본 이형구 교수는 어쩌면 이렇게 우리 고유의 축성술과 같은지 모르겠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싼줘뎬 석성은 확인된 치만 13개나 되는 견고한 석성이었다. 청쯔산 역시 고국(古國)이 존재했던 곳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하가점 하층문화(BC 2000~BC 1200)에 속하는 이 유적들은 과연 고조선과의 연관성은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이렇게 동이족, 그 가운데서도 우리 민족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발해문명을 어떻게 요리하고 있을까. 훙산문화 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쉬쯔펑(서자봉, 徐子峰) 츠펑대 교수는 황허문명은 농업 중심의 문화였고, 랴오허문명은 신권 중심의 복합문화였다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확실하게 정리했다. 다만 랴오허문명과 황허문명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것.

 

훙산문화의 대표는 황제(黃帝)? 

 

 

차하이에서 발굴된 빗살무늬 토기.

 

쉬쯔펑 교수는 동이계의 대표인 치우와 중원의 황제가 싸웠다는 기록이 있지 않으냐면서 이것이 바로 문명의 충돌이자, 문명의 습합일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학계는 결국 문명의 서곡을 연 주체는 동이족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랴오허문명 역시 통일적 다민족국가를 형성한 중요한 몫을 한 중화문명의 일부라고 못박고 있다. 선양박물관의 랴오허문명 특별전을 보면 알 수 있다.

 

전시실 입구엔 랴오허 유역은 고문명 발상지라는 전언(前言·서문)을 걸어놓고 있으며, 전시실 한 쪽엔 훙산문화와 오제전설을 설명하는 도표와 그래픽을 전시했다. 훙산문화와 양사오(앙소, 仰韶)문화, 그리고 다원커우(대문구, 大汶口)문화, 량주(량저, 良渚)문화의 상호 연관성을 관람객들이 알아보기 쉽게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훙산문화의 주체를 중국인들이 중화민족의 시조로 떠받드는 황제집단이라고 못박아 두었다. 도표는 훙산문화로서 대표되는 황제집단의 활동 범위는 연산남북지구라고 해놓았다. 그래픽은 훙산문화가 중원의 양사오 문화를 대표하는 신농씨의 화족집단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고 했다. 중국학계는 훙산문화를 포함한 랴오허문명을 동이의 문명이라고 하고, 관람객들에게는 훙산문화의 주체를 황제 집단이라고 교육홍보하는 이중성을 드러낸 것이다.

 

이번엔 중화문명 탐험공정

 

랴오허문명이 중국 문명의 기원인 이상 중국의 목표는 확실하다. 중국은 1990년대 이후 하상주 단대공정을 실시, 전설상의 왕조였던 역사시대로 끌어올려 하나라의 건국연대를 BC 2070년으로 확정해 버렸다. 하지만 4대 인류문명의 발상지에 속하는 황허문명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BC 3000)에 비해 여전히 1000년가량 뒤처진 상태. 5000년 중국 역사라고 해왔지만 1000년이 부족했던 것이다. 중국은 이제 랴오허문명으로 전설상의 5제시대를 역사시대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쉬쯔펑 츠펑대 교수의 말이 중국의 향후 과제를 대변한다.

 

중국 정부와 학계는 이 1000년의 갭을 보완하기 위해 올해부터 중화문명 탐험공정을 시작했다. 우리는 철학, 문학, 과학, 종교 등 모든 학문을 동원해서 이 잃어버린 1000을 복원하는 작업을 벌일 것이다. 훙산문화 연구가 그중 하나다.”

 

이제는 발해문명으로

 

하지만 궈다순(곽대순, 郭大順)의 말처럼 랴오허문명은 고대문화의 생장점이자 다민족 문화의 거대한 멜팅포트였다. 이 지역은 고조선과 고구려, 부여 등 우리 민족은 물론 선비, 거란, 말갈 등 서로 피를 나눴거나 이웃으로 지냈던 이른바 동이족이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무대였다

 

 

 

뉴허량 유적에서 나온 옥룡.

 

그리고 무대는 랴오허 유역뿐 아니라 중국의 허베이성, 랴오닝성, 네이멍구(내몽고, 內蒙古)자치주, 지린성, 헤이룽장성은 물론 중국의 산둥반도, 그리고 한반도까지를 포함한다.

 

따라서 랴오허문명은 너무 한정적이고, 중국 중심의 용어라 할 수 있다. 이형구 교수는 지중해 문명이 서양문명의 자양분을 공급했듯, 동이족이 발해연안에서 여명을 연 문명은 중국문명은 물론 랴오둥과 만주, 한반도, 일본의 문명을 일궈내는 젖줄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따라서 랴오허문명은 발해문명으로 바꿔 불러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중국학계도 상나라 이전의 문화는 발해만에 있다(先商文化在渤海灣)”(궈다순)고 분명히 못박고 있다.

 

따라서 중국 중심의 랴오허문명이라는 용어의 폐기와 함께 발해문명이라는 새로운 용어의 도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져야 할 것 같다. 경향신문 기획시리즈는 첫 회에서는 혼란을 피하려 중국 학계의 용어대로 랴오허문명이라 했지만, 다음 회부터는 발해문명으로 표기할 것이다.

(출처;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0071750011&code=210000#csidx4347fe9c4bce51dae31fb1771985218)

 

 

 

출처;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연합뉴스 2008 2 24일자 기사 <인터뷰> 요하문명 연구 우실하 항공대 교수

 

"요하문명은 고조선의 뿌리 '문명공정'에도 경각심 가져야"

 

"중국이 고조선 이전의 상고사까지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요서(遼西)지역 신석기문화와 한반도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입니다."

 

지난 15일부터 대학교수와 사학자 등 10여 명으로 구성된 고조선유적답사단을 이끌고 21일까지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와 랴오닝(遼寧)성 북서부 지역을 둘러본 우실하 항공대 교양학부 교수.

 

그는 1999년부터 2002년까지 랴오닝(遼寧)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일찍이 요하문명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온 사학자로 23일 중국 선양(瀋陽)에서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요하문명은 중원에서 시작된 여타 문명과 별개로 중국 동북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출현한 문명으로 한반도와도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지난 1983년 랴오닝(遼寧)성 젠핑(建平)현과 링위안(凌源) 사이의 뉴허량(牛河梁)에서는 기원전 5500년 전의 제단, 여신전, 여신상, 적석총 등이 대거 발굴돼 전 세계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35제 시대를 운운하는 신화시대였던 기원전 3500년에 이미 초기국가 진입단계의 대규모 유적이 발견된 것은 고대국가발전단계를 황허(黃河) 유역의 하()에서 시작해 상()과 주()로 이어지는 것으로 봤던 역사학계의 정설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뉴허량유적은 훙산(紅山)문화, 더 나아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문명의 하나로 꼽히는 요하문명의 꽃으로 불리고 있다. 뉴허량유적지는 최근 광산개발업자들의 불법채굴로 훼손된 사실이 중국 언론에 보도되면서 또 한 번 주목을 끌기도 했다.

 

문제는 중국이 이런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요하문명의 주도세력을 황제(黃帝)족으로 설정하고 중화민족의 시조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우 교수는 "최근 중국에서 요하지역에서 발원한 모든 고대 민족이 황제족의 후손으로 중화민족으로 일원으로 보는 역사해석이 등장하고 있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이들 지역에서 등장한 단군과 주몽은 당연히 황제의 후예가 된다."고 우려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중국의 동북공정은 깃털에 불과하며 중국의 고대문명탐원공정(古代文明探源工程)이 몸통이라고 지적한다.

 

우 교수는 "중국고대문명탐원공정은 21세기 중국의 '대중화주의건설'을 위한 국가적 프로젝트로 동북공정은 그의 일환으로 동북지역의 민족문제와 역사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추진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중국의 문명공정을 반박하기 위한 논리로 국경이 없었던 시절의 과거 문명 주도세력이 어디로 이동했는지를 중심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일례로 요서지역에서 발견된 적석총, 피라미드식적석총, 빗살무기토기, 비파형청동검은 중원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한반도와 일본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됐다. 바로 요하문명이 중원에서 발상한 문명과는 달리 주로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전래된 동북아문명의 시원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원전 21500년 시기에 형성된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는 고조선문화로 이어졌으며 이 지역에서 발견된 '()를 갖춘 석성'과 비파형청동검은 고조선문화의 상징이면서 비슷한 시기 중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 특유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 교수는 "이러한 특징을 갖춘 요하문명은 동북아 모든 국가들의 공통적 시원문화로 21세기 동북아 문화공동체 형성을 위한 근원으로 삼을 수 있다" "이를 위해 협소한 영토중심의 역사관을 넘어 역사를 흐름과 교류로 보는 '열린 역사관' '열린 민족주의'를 한..일 국가들이 공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계창 특파원

(출처;

http://media.daum.net/foreign/china/view.html?cateid=100023&newsid=20080224080112714&cp=yonhap)

 

 

2017 10 25일자 시사저널 기사 [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요하문명은 왜 갑자기 끝났을까?

 

요하문명에 관련된 세 가지 의문이 있었다. 첫째, 과연 요하지방을 포함한 한반도 일대에서 세계 최초의 문명이 있었을까? 둘째, 있었다면 그 문명의 주역은 지금 중국인의 조상일까 한국인의 조상일까? 셋째, 만일 한국인의 조상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고도의 문명을 건설했다면, 왜 그 사실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을까?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지금까지의 글에서 충분히 나왔다고 본다. 우선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단연 ‘YES’. 앞서 보았듯이 여러 가지 생태학적 특성을 고려해볼 때 한반도는 12000년쯤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후 세계 중에서도 가장 살기 좋은 조건을 갖춘 곳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발달된 문명을 이루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두 번째 질문, 요하문명의 주역이 지금 누구의 조상이었을까? 최근 속속 발굴되는 고고학적 유물·유적들로 인해 지금까지의 역사기록에 남아있는 것보다는 과거 인간들의 교류가 훨씬 활발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요하문명에서 홍산문화 직전에 있었던 조보구 문화 유적지에서 벌써 채색토기가 발굴되는 등 중국 문화의 영향이 뚜렷하다. 따라서 지금 중국인과 한국인들도 DNA의 상당부분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요하문명이 지금 어떤 국가 국민의 조상이었다고 말하는 건 지나치게 단순하게 선을 긋는 일이다,

 

하지만 요하문명의 주역이 지금 중국인의 조상이냐 아니면 한국인의 조상이냐, 이렇게 이분법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하나만 택하라면, 한국인의 조상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선택은 더 잘 먹고 잘 사는 방향으로 간다. 요하문명 당시 그 지역 주민들이 남쪽에서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올라간 사람들이든, 아니면 더욱 북서쪽 내륙으로부터 내려온 사람들이든, 아니면 그 두 계열의 혼합집단이든, 이들은 자신의 거주지를 확대할 때 중국 동해안보다는 살기 좋았던 한반도 서해안을 택했으리라는 건 자연스러운 추측이다. 요하에서부터 한반도 남단, 그리고 빙하기 직후에는 한반도 남부에 거의 붙어있었던 일본 규슈지역까지 하나의 문화권으로서 특징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 서해안의 생산성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세 번째 질문, 우리가 왜 그 사실을 잘 몰랐을까? 이 답은 이 연재를 통해서도 여러 번 나왔기 때문에 아주 쉽다. 역사왜곡 때문이다. 우리가 중국보다 열세에 있었던 과거 1000년 이상의 기간 동안, 그리고 짧지만 최근 경험이어서 우리의 집단적 기억에 선명한 일제강점기 동안 중국과 일본에 의한 역사왜곡은 주도면밀하고 끈질기게 지속되어 왔다. 게다가 우리는 지금 서구문화의 영향으로 우리가 가진 것을 못 보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부정하는 행동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깨어있는 정신을 가진 독자라면 여기서 질문을 멈추지 않고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우리 조상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고 중국은 후진지역이었다면 왜 중국이 더 강국이 되어 역사를 왜곡시켜 왔을까?

 

이 질문에 대해 아주 포괄적으로 답한다면,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하는 우주와 지구의 환경요인이 이 지구상에서 삶의 조건을 규정해왔고, 그에 대응해서 인간의 대응전략이 바뀌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연재에서는 그 중에서도 요하문명과 한반도 문명 사이의 그 오랜 단절에 기여했던 두 가지 큰 사건을 조명하려 한다. 하나는 철기제작 유목민에 의한 요하문명의 붕괴, 또 하나는 백두산 폭발로 인한 동아시아 판세의 역전이다.

 

먼저 요하문명의 붕괴. 이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된 바가 없다. 요하문명이란 키워드 자체가 세계의 학계에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고, 현재까지 중국에 의해 자료가 독점되어 요하문명을 포함한 중국역사 만들기에 급급한 상황이다. 요하문명의 종말을 논할 분위기는 아니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정보로도 요하유역의 유적이 기원전 1100년에서 1000년 사이에 급격히 끝나버렸다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 이후엔 이 지역에 고도의 문명생활을 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일단 한 번의 단절이 생겨난다.

 

이 단절에는 지금까지 이 연재를 통해 보아왔듯이, 급격한 기후변화가 상당히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에 나왔던 요하문명의 기후변화 그래프를 다시 보자. 소하연 문화를 끝으로 요하문명이 끝난 시점인 기원전 1000년 전후 무렵의 기후변화에 주목하자.

 

 

 

© 사진=이진아 제공

 

이 시기는 철기 시대 한랭화기라는 이름이 붙여진 시기로서, 온난기의 정점에서 갑자기 기온이 곤두박질쳤던 시기다. 세계적으로 볼 때는 이 기온 급강하 경향이 거의 기원전 1000년에서 기원전 250년까지 지속되지만, 요하유역을 비롯해서, 태평양으로부터 난류를 지원받는 한반도 서해안 지역의 기온은 금방 온난화 단계를 회복했던 것 같다. 하지만 보다 내륙 쪽으로 위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빠르게 추워지는 날씨로 인해 무엇보다 심각한 식량부족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 결과 좀 더 기온이 따뜻하고 식량생산성이 높은 곳, 즉 요하지역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의 물결이 생겨났을 것이다.

 

요하유역은 북아시아 내륙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꿈의 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기원전 7000년부터 기원전 1000년까지 6000년 동안, 그렇게 넘보는 이방인들을 잘 제어해서 든든하게 고도의 문명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던 요하인들이 기원전 1000년에 와서 무너지면서 요하문명이 끝나버렸을까?

 

여기에는 기후변화 뿐 아니라 이에 대응하는 인간전략이라는 차원이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서쪽으로 철기를 제작할 줄 아는 유목민족의 한 흐름이 요하지방을 공격해서, 흑요석과 청동의 무기를 병용하던 요하문명의 맥을 끊은 것이라고 말이다.

 

본격적인 철기 문명은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 즉 이란 및 이라크 일대에서 기원전 2000년대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철광석은 지구상 어디서나 쉽게 발견되지만 문제는 이를 제련하는 데 필요한 나무다. 앞서 길가메시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아나톨리아 지방은 지구상에서 가장 목재가 풍부했던 곳이기도 하지만 빨리 소진되고 회복되기 쉽지 않았다. 철기 무기를 확보해야 할 필요에 쫓긴 사람들이 여기서부터 동서로 확산되어가면서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려 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철기문명은 기원전 3세기 경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이다. 하지만 한반도 철기 문명에 관해서는 최근 점점 더 새로운 면이 드러나고 있다. 두만강 유역 동북부 일대,  부여라고 불리던 곳에서는 기원전 1000년 무렵, 함경북도 무산과 강원도 홍천에서는 기원전 600년 무렵부터 철기가 많이 사용되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이는 적어도 기원전 1100년 무렵에는 철기를 제작하는 인간 집단이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얘기다.

 

아직 이 철기제작인들과 요하문명의 관계는 학문적으로 연구된 바 없다. 이 모든 것이 아직 너무 새로운 자료이며, 더욱 새로운 자료들이 빠른 속도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밝혀진 사실을 토대로 추정은 할 수 있다.

 

비옥한 땅을 기초로 성립한 농경·해양 복합 문명이었던 요하문명의 주역이 식량을 가진 자와 흑요석이라는 무기 소재를 가진 자와의 연합으로 오랫동안 막강한 문명으로 군림해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소외되었던 인간집단, 예를 들면 아무르 강을 따라 연해주까지 이어지면서 형성된 부족연합들은 그 문명과 적대적 관계를 가졌을 것이다. 이들이 서쪽으로부터 아무르 강 연안을 따라 철기 문명을 가져온 유목민 집단을 받아들여 요하문명의 주역들을 공격해서 쓰러뜨렸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한랭기가 되어 살기 힘들어지고, 문화수준은 낮아도 더 강력한 철제 무기로 무장한 이민족에 의해 터전을 빼앗긴 요하문명의 주역들은 남쪽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서 고조선 같은 국가를 키우는 데 크게 기여했을지 모른다. 또 요하문명 특유의 문물을 한반도 전체에 전파하는 데도 기여했을 것이다.』​

(출처; 시사저널,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171868)

 

 

2007 10 16일자  뉴스메이커 745 [커버스토리]우리가 환만주 문화권 중심이었다

청동기시대 고조선~발해 2000 장구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

 

 

다이내믹한 묘제가 나타난 체르냐치노 5유적의 발굴 당시 모습. <정석배 교수>

 


선사시대와 초기 역사시대에 동북아시아는 크게 3개의 문화권을 구성하고 있었다. 내몽골 오르도스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북방 유목 문화권, 중국의 중원 문화권 그리고 동북 3성과 연해주, 아무르강 유역, 한반도를 포괄하는 가칭 ‘환(環)만주 문화권’이 그것이다.


우리의 활동공간이 ‘환만주 문화권’의 중심지인 만주였던 때는 청동기시대 고조선부터 발해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근 2000년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이었다. 아마도 청동기시대 이전 신석기시대와 구석기시대에도 ‘환만주 문화권 지역은 우리 선조들의 중심 활동공간이었을 것이다. 아직 연구가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할 뿐이다. 우리의 중심 활동공간이 한반도로 축소된 것은 장구한 역사에서 본다면 불과 1000년 남짓할 뿐이다. 아니, 이 시기에도 간간히 우리의 선조들이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중국 동북 3성과 연해주 그리고 아무르강 유역은 역사·문화적으로 우리 선조들의 활동공간 그 자체였다.


역사시대에 한반도는 중국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시대가 올라갈수록 우리 문화는 서쪽의 초원지대와 시베리아 그리고 아무르강 유역과 훨씬 더 깊은 관련성을 보인다.


한국의 청동기시대에는 요녕지역과 중국을 포함하여 유공부라는 도끼가 있다. 날이 있고, 등 쪽에 날과 일직선상으로 소켓 모양으로 자루 구멍이 뚫려 있는 도끼다. 이 도끼는 알타이지역에서 발원한 세이마-투르비노 문화에서 기원한다. 기원전 17~15세기에 심을 넣어 대롱 모양의 창과 도끼를 주조할 수 있는 복잡한 모양의 거푸집을 발명한 세이마-투르비노인들은 전사 집단으로서 나중에 서쪽으로 핀란드지역까지 이동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은허에도 유공부가 다수 발견되는 것을 보면, 그 영향력은 동쪽지역으로도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또한 고구려 무인들의 투구에 쇠뿔이 달려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시베리아 하카시아-미누신스크 분지의 신석기시대 후기 타스민 문화 석상에 보면 사람 얼굴에 쇠뿔 모양의 뿔이 머리에 양쪽으로 달려 있는 표현이 많다. 신라의 금관에 보이는 출(出)자 모양의 문양 모티브는 시베리아와 몽골의 동기시대 유물에서도 적지 않게 보인다.


마제석검의 수수께끼적 현상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에 걸쳐 한반도, 중국 동북 3성 그리고 연해주지역에는 한 가지 수수께끼 같은 현상이 있다. 마제석검이 그것인데, 이 마제석검은 중국 중원지역에는 보이지 않고, 유목 문화권에도 보이지 않는다. 환만주 문화권에만 특징적인 현상이다.


수수께끼 같은 현상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마제석검이 초원 유목민 문화의 청동단검을 그대로 모방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마제석검은 비파형 동검과 함께 출토된다. 부여 송국리 석관묘에서 함께 출토된 비파형 동검과 마제석검이 그 좋은 예다. 청동 단검과 마제석검을 제작한 집단은 두 종류의 단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청동으로 주조해서 비파형 동검만 만들고, 돌을 갈아서 아카나크 식의 마제석검만 만들었을까.

 

 

 

체르냐치노 2유적에서 발굴한 옥저 쪽구들 아궁이. <정석배 교수>

 

 

아키나크식 마제석검 이전에는 검신이 세장한 삼각형 모양인 마제석검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시베리아 카라수크 문화의 동검과 형태가 흡사하다. 두 가지 계통의 주민들이 한 곳에 거주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 종류의 단검은 실용적인 기능을, 다른 한 종류의 단검은 의례적인 역할 혹은 상징적인 기능만 가졌기 때문일까. 그야말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이 외에도 북방 유라시아 대륙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한반도 및 ‘환만주 문화권’은 초원 유목 문화권 및 시베리아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유사성을 보인다. 그렇다면 이 문화들은 항상 서쪽에서 동쪽, 북쪽에서 남쪽으로만 전파되었을까.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신화나 백제의 건국신화를 보면 건국의 주체들이 모두 북쪽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첨저 혹은 원저의 토기를 보이는 시베리아 바이칼 유역의 신석기시대 후기 세로보 문화는 한반도의 첨저 빗살무늬토기보다 연대가 오히려 더 늦다. 두만강 가까이에 자리 잡은 연해주 보이스만 문화 인골은 형질인류학적 분석을 통해, 신석기시대 전기에 두만강 유역에서 북쪽으로 주민들의 이동이 있었고, 지금의 에스키모인들은 바로 두만강 유역에서 이주한 보이스만 문화인들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몽골의 거란성터 주인공은 발해 유민


최근 조사하고 있는 몽골의 거란 성터도 마찬가지다. 발해 멸망 후에 몽골로 잡혀간 발해 유민들이 몽골지역에 발해 계통의 성터를 쌓고, 선진 발해문화를 퍼트렸음은 자명한 일이다. 유사성이 반드시 문화의 전파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 문화집단 간의 관련성 혹은 친연성은 입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며, 또한 위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문화의 전파는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적이었을 것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사실 중국은 우리의 역사뿐 아니라 중국 북방과 서방 그리고 동방의 모든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고조선, 부여, 옥저, 고구려, 발해 등 당연한 우리의 북방역사가,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이 정치적인 이유로 왜곡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역사상 흔적을 보이는 고조선, 부여, 옥저, 고구려, 발해에 대해서는 아직은 적지만 그래도 학자들이 관심을 보이면서 연구 활동을 하고 있기도 하다. 필자도 러시아 연해주에서 올해까지 5년 동안 매년 여름에 발해 유적을 조사하여 국내에 소개했다. 발해 체르냐치노 5 고분군에서는 발해의 고분을 120여 기 조사했고, 체르냐치노 2 주거유적에서는 발해와 옥저의 쪽구들을 조사했다. 발해의 유적을 조사하고, 답사를 거듭할수록 발해와 고구려와의 관련성, 계승성은 더욱 드러나고 있다. 특히 쪽구들은 옥저에서 기원하여 고구려로, 발해로 그리고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문헌에 등장하는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고 지키는 데도 힘이 부치지만, 점차 문헌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정석배|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문화유적>』

출처;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id=15675

 

 

2019 8 07일 문화일보 기사 신용하의 인류 5 古朝鮮문명’ -  밝족의 한·· 3부족 분화;

밝음 숭배한 밝족 후예가 한강·대동강·요하문명 꽃피웠다

 

 신용하의 인류 5 古朝鮮문명’ -  밝족의 한·· 3부족 분화

신석기 혁명으로 농업 시작되자 한반도에 태양숭배 밝족 형성

한강·대동강 뻗어 나간 한족’ 풍요기원 햇빛살무늬토기 사용 우리에겐 빗살무늬로 알려져 

요동 반도로 이동한 예족은 호랑이 토템 삼고 철광석 활용 

요서 평야지대 정착했던 맥족’ 玉器 쓰며 제의문화 발전시켜 

3부족이 결합해 고조선 건국 인류 최초 독립 문명 탄생 원천

 

 

 

▲ ① 천손 사상을 상징하는 옥천 안터 1호 선돌  한강 유역 암사동 뾰족밑 햇빛살무늬 토기  우하량 제2지점 1호총 제21호묘 출토 거북 모양 옥기  대전 괴정동 출토 농경문 청동기  신락하층문화 유적의 석탄정제품  충북 단양 소재 현대에 복원된 솟대 끝의 새

 

()한반도 중부 남한강·금강 유역에서 시작된 신석기 농업혁명은 식량공급을 일거에 증가시켰으나, 인구증가도 뒤따랐으므로 식료부족 문제를 다 해결하지 못했다. 이에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은 농업경작의 새로운 방법과 기술을 간직한 채 고한반도의 북위 40도선 이남의 농업경작이 가능한 크고 작은 모든 강변과 해안으로 이동을 감행했다. 농업경작은 햇빛의 은혜에 직결되므로,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은 매우 일찍 공통으로 태양()숭배 사상을 갖게 됐다. 그들은 밝음’(光明)을 숭상했으며, ‘태양이 있는 하늘을 숭배하고, 태양이 있는 하늘을 나는 를 토템으로 정해 애경했다. 후에 그들의 후예들은 태양의 밝음을 의미한 , 후대의 고대중국인의 차음표기로는 발인(發人), 백족(白族)이라고 호칭했다.

 

주목할 것은 약 12000년 전9000년 전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농업경작·사냥·어로·식료채집을 하고, ‘태양 하늘숭배, 천손의식, ‘밝음 애호 사상, ‘ 토템을 공통으로 형성해 오래 교류하며 생활하는 동안에 사람과 문화에 공동 유형을 형성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들을 족이라고 통칭하면서도 학술용어로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유형’, 그들의 문화를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 문화유형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유형(밝족)’은 성립 후 처음 단계에서 크게 3갈래로 분화·발전했다. 첫째는 지구기후 온난화 이후에도 고한반도의 북위 40도 이남의 강변과 해안에 그대로 계속 남아 정착해서 고대를 맞은 신석기인들이다. 이들은 스스로 자기들을 족이라고 호칭했으나, 후에 대족 기원의 다른 부족들과의 구별을 위해 그들이 남한강을 거쳐서 강 유역 등에서 유래했다는 특징이 파악돼 족이라는 호칭도 갖게 됐다. 이때의  ’ ‘하나’ ‘하늘의 뜻을 가진 고한반도 신석기인들의 고유어라고 해석된다. 즉 그들은 족 또는 족으로 호칭되다가 대족의 분화 진전에 따라 족으로 점차 호칭이 확정돼간 것이다.

 

족 신석기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당시 세계 최선진 신석기 농업혁명의 성취와 그에 인과관계를 가진 모든 문화항목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태양 숭배, 태양이 있는 푸른 하늘 숭배, 천손의식, ‘ 토템 등이었다. 현재도 충북 옥천에 세계 유일의 태양을 잉태한 신석기시대 여성상이 남아 있다. 햇빛살(태양광선)이 토템 에 집중해 비쳐서 잉태해 에서 천손 영웅이 탄생했다는 유형의 난생설화도 밝족·한족의 설화다.

 

한족은 약 12000년 전부터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문암리 유적 제10),  1만 년 전부터는 햇빛살 무늬를 그린 뾰족밑 토기가 출토돼 나오기 시작한다. 이 무늬를 일본 학자들이 머리 빗는 빗살무늬(櫛目紋)’ 토기라고 이름했는데 잘못된 호칭이다. 머리 빗는 빗살을 그린 것이 아니라, 농업생산을 풍요롭게 해 주는 햇빛살을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아래가 뾰족한 독특한 형태의 족 토기 명칭은 빗살무늬(줄목문)’ 토기가 아니라 햇빛살무늬(태양광선)’ 토기, ‘빛살(광선)’ 토기로 호칭돼야 할 것이다.

 

족은 족을 본터에서 계승해 하늘을 나는 ()’를 토템으로 애경했다. 필자가 2013년 고조선문명 세미나에서 처음 발표한 밝족과 한족의 토템은 라는 명제는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쉬운 것이다. 사회학·인류학적으로 토템 장대(totem pole)인 한족의 솟대 꼭지에 세우는 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삼국지’ ‘후한서 등 중국 고대문헌들이 이 를 써놓지 않고 蘇塗’(소도)라는 귀신 제사하는 곳으로 써 놓았기 때문에 이를 몰랐을 뿐이다.

 

한민족은 고조선·고구려·백제·신라·가라·탐라 모두  토템이었으며, 모자에도 두 귀 위에 새털 깃을 세우고, 왕관에도 새털 깃 도안을 했으며, 죽으면 무덤에도 새털 깃을 넣었다. 지금도 한국 대통령의 상징 도안은 봉황새. ‘족은 족과 마찬가지로 10진법과 자(尺度)를 사용했으며, 천문지식과 기하학적 도안을 크게 발전시켰다. 햇빛을 그림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특히 기하학적 도안이 크게 발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족은 죽으면 상층은 고인돌 무덤을 썼다. 고인돌은 족의 무덤양식이었다.

 

둘째 갈래는, 지구 기후 온난화로 동토(凍土)가 녹아 북위 40도선 이북도 농경이 가능하게 되자, 고한반도 족의 일부가 북위 40도선 이북의 요동지역에 이동·정착해 형성된 ()’족이다. 이들은 자기들을 개척지의 큰 강 요하 (,)’쪽으로 이동한 족의 일부라고 자부해 ’()족이라고 차별화해서 호칭했다. 후대에 고대 중국지식인들은  ’ ‘’ ‘’ ‘ 등으로 음차 표기했다가, 후에 남방음으로 변음돼 ’(Ye)로 발음하게 됐다.

 

족은 약 9000년 전6000년 전에 한반도에서 압록강을 건너서 또는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요하 동쪽으로 이동해서 지금의 요동반도·태자하·목단강·2북류 송화강·두만강 하류 일대를 중심으로 널리 분산해서 정착한 신석기인들이었다. ‘족은 요하 이동지역에서 고한반도와 동일 기초의 문화를 가지면서도 요하 이동 새 정착지에서 독자적 신석기문화를 창조해 생활했다. 심양 부근의 신석기 신락(新樂)문화는 현재 발굴된 족의 대표적 신석기문화 유적이라고 판단된다. ‘후한서 예전에서 “(예족은)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추니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또 범()을 신()으로 여겨 제사 지낸다고 했다. ‘족은 환경의 영향을 받아 맹수의 왕인 을 주토템으로, ‘를 부토템으로 정해 외경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예족은 부근에 풍부한 무순광산의 노천 철광과 노천 석탄광이 있으므로, 7200년 전의 신락문화 유적에서는 이미 석탄정제품과 적철광석 덩이가 출토됐다.

 

셋째 갈래는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밝족) 일부가, 북위 약 40도 이북의 과거 동토였던 지역이 인간거주와 농경 가능지역이 되자,  9000년 전6000년 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서북방이동을 감행해 지금의 요서 대릉하 및 시라무렌강 사이 평야지역·내몽고자치구 동부지역 일대에 정착한 ()’족이다. 그들은 새 환경에 적응해 토템을 ()’으로 정하고, 고한반도에서 가져온 는 부토템으로 했다. ‘후한서에서도 맥이(貊夷)는 웅이(熊夷)라고 했다. 이들은 자기들을 대족의 일부로서 서북방 이동을 감행했다고 북밝족으로 자부했는데, 후대에 고대 중국인들은 그들에게 한자로 북발’(北發) 또는 단음으로 ’(, , )족이라 이름을 붙이고 ’ ‘이라고 발음하다가 후에 남방 발음으로 변음돼 이라고 읽게 됐다.

 

종래 일부 고대사학자가 ’() ()의 짐승의 표기로 해석하고, 또 시베리아 또는 중앙아시아 또는 바이칼호 부근 북방 부족 ’ ‘족이 빈 공간의 고한반도에 이동해 들어왔다고 해석한 것은 지구 기후변화를 모르던 시기의 낡은 가설이다. 그러한 북방은 동토가 돼 당시 부족과 문명의 기원 형성지가 될 수 없었다. ‘족은 원래 고한반도에서 족 일부가 서북방으로 이동해 요서지방 대릉하와 시라무렌강 유역에 정착해서 형성됐으며, ‘족이 그곳에서 만든 신석기문화가 홍산문화(紅山文化)이고, 그 가장 발전된 중심이 우하량(牛河梁) 유적이다. 우하량 유적 제1지점에는 제단과 신()을 모시는 신성한 묘당(廟堂)이 있고, 그 묘당에서 진흙으로 만든 여신상과 곰의 조각상, 새의 날개 등이 부서진 상태로 출토됐다. 이 부족은 여신을 숭배하고 을 주토템과 를 부토템으로 한 부족이었음이 증명됐다. 우하량 유적 제2지점에는 여신을 위해 제사하는 제단 다음에 족장급의 무덤들이 있는데, ‘족장을 나타내는 맨 앞의 중앙 대묘의 유골은 여성이었다. 이 곰 토템 부족의 족장은 여성이었다.

 

홍산문화의 족장급 무덤들에서는 오늘날의 눈으로 보아도 당시 세계 최선진의 찬란한 옥기(玉器)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 일부 고고학자는 홍산문화의 찬란한 옥문화와 제의문화를 놓고 요하문명이라는 개념과 학설을 정립해, 심양 요령성 박물관에서 장기 전시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고중국문명의 시작은 황하문명에서가 아니고 그보다 1000여 년 앞서 요하문명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하면서, 홍산문화의 창조자는 하()를 건국한 황제(黃帝, 軒轅) 황제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홍산문화와 우하량 출토유물은 그들이 고한반도의 족과 동일한 북밝족이며 족임을 출토유물이 매우 명료하게 증명하고 있다. 신성한 묘당에서 여신상과 함께 맥족의 토템인  상과 족 및 족의 토템인  상이 출토되지 않았는가? 중국 문헌 역사 25왕조사의 어디에도 황제족이라는 족속은 아예 없었다. ‘ 토템과  부토템을 가진 것은 (, )족뿐인데, 그들은 고한반도 계통이며, 고조선에 통합된 부족의 일부였다.

 

고중국은 명나라 초기 이전까지는 이 홍산문화 지역에 발도 들여놓은 적이 없다. 역대 고중국학자들은 그들이 모두 東夷(동이) 또는 北狄(북적)이어서 자기들의 조상이 아니라고 한결같이 강조, 주장하고 배척해 왔다. 홍산문화는 고한반도 밝족 계열인 맥족(貊族)의 신석기시대 문화이며, 후에 고조선문명의 선행요소의 일부로 고조선문명에 통합된 신석기문화다. ‘고조선문명이 탄생한 것은 약 5000년 전에 앞에서 고찰한 족의 한강문화와 대동강문화  족의 요하 이서 홍산문화(일부 중국학자의 요하문명’)  족의 요하 이동 신락문화 등 크게 4대 신석기문화가 하나로 통합되고 한 단계 지양·승화·발전돼서 탄생한 것이다. ‘고조선문명을 큰 강과 연관해 표현하면, 신석기시대 한강문화’ ‘대동강문화’ ‘요하문화’(중국 고고학자들의 요하문명’)가 하나로 통합되고 한 단계 더 발전해 탄생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아시아 3대강(한강·대동강·요하) 문화가 밝족과 그 후예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고 한 단계 더 발전돼 고조선문명이 탄생한 결정적 계기는 약 5000년 전에 고한반도에서 ’ ‘’ ‘’ 3부족이 결합해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 고조선을 건국한 대변혁에 의거한 것이었다.

 

중국 고고학자들과 사회과학원은 맥족의 요서 지방 홍산문화 하나를 갖고서도 요하문명론을 정립하고 있는데, 그보다 선진한 고한반도 한강문화와 대동강문화, 그리고 요동의 예족문화와 요서의 맥족 홍산문화(요하문명)를 모두 통합해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고조선문명을 인류 최초 독립문명의 하나로 정립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출처; 문화일보,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80701032812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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