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2.6 제주 고산리유적(3)

 

2008 7 18일자 경향신문 기사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5) 1만 년 전의 세계 제주 고산리()

 

구석기와 신석기의 경계를 풍미한 맥가이버들

1987 5월 어느 날.

 

 

 

 

제주도 서쪽 끝 마을인 북제주군 한경면 고산리. 흙을 갈고 있던 마을주민 좌정인(左禎仁)씨가 돌 두 점을 주웠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뭔고?”

 

고구마처럼 생긴 돌이었는데, 예사롭지 않았다. 좌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돌 두 점을 집으로 가져갔다.

 

“()덕중아, 이 돌들이 이상하게 생겼는데 한번 봐라.”

 

마을엔 제주대 사학과에 다니던 윤덕중이란 학생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 이 심상치 않은 돌을 보여준 것이다. 윤덕중 학생은 이 돌 두 점을 다시 스승인 이청규 제주대 교수(현 영남대)에게 보여주었다. 이 교수는 곧 돌을 수습한 현장에서 지표조사를 벌였다.

 

 

 

농부 좌정인씨가 수습했던 석창과 긁개. 문화유산은 이렇게 이름 없는 백성들 덕분에 찾고 보존된다.

 

농부가 찾은 1만 년 전의 세계

 

좌씨가 주워온 것은 길이 8.5,  3, 두께 1나 되는 큰 석창(돌로 만든 창) 1점과 긁개 1(길이 4.3)이었다. 석창과 긁개는 후기 구석기 시대의 석기제작 기법인 잔잔한 눌러떼기 수법으로 성형했다. 지표조사 결과 마제석부(자갈들을 때려 다듬은 다음 날부분과 몸통부분을 부분적으로 간 것) 1점과 각편석기 1점을 추가로 확인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후 7개월이 지난 88 1, 영남대 대학원생이던 강창화씨(현 제주문화예술재단 문화재연구소)가 다시 이곳을 찾았다.

 

개인적으로 한번 조사해보고 싶었어요. 겨울바람을 헤치고 이리저리 헤맸죠.”

 

그의 눈에 띈 곳은 수월봉(해발 65m)에서 북쪽으로 150m 떨어진, 국토방위군이 파놓은 참호였다. 그런데 참호의 단면 50 바닥 가까이에서 뭔가 이상한 징후가 포착되었다. 조심스레 파보니 그것은 융기문토기(隆起文·덧띠새김무늬)였다. 덧띠의 문양은 첫 줄은 수평을 이루지만, 둘째줄과 셋째줄은 일정한 간격마다 S자와 포물선으로 크게 휘어진 형상이었다.

 

 

 

강창화씨가 수습한 융기문토기. 토기는 신석기인들의 화폭이었고, 그들은 토기에 빼어난 예술성을 뽐냈다.

 

 

이런 석창과 긁개, 마제석부, 그리고 융기문 토기의 잇단 발견은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그저 몇 점 수습했을 뿐인데, 후기 구석기 말~신석기로 이행하는 단계의 유물(석창과 긁개 등), 신석기 초기 유물(융기문 토기)가 나왔으니까요.”(강창화씨)

 

이렇게 뜻깊은 단서가 나오자 가만있을 수 없었다. 제주대박물관은 91~92년 겨울 약 6000점에 이르는 유물을 수습했다. 이어 94년부터 98년까지 세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발굴이 벌어졌으며, 모두 10만점이 넘는 유물이 쏟아졌다.

 

 

그들은 맥가이버였다

 

이쯤해서 조유전 관장(토지박물관)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구석기~신석기 시대의 전환과정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결론적으로 말해 고산리 유적은 후기 구석기 최말기~신석기 초기로 넘어가는 전환기,  12000~1만 년 전의 유적으로 각광받고 있어요. 물론 연대에 관해서는 다소간 논란은 있겠지만.”(조유전 관장)

 

고고학적인 설명을 가하자면 동북아 후기 구석기의 전형적인 문화는 이른바 세형돌날문화(좀돌날문화)이다. 작은 몸돌에서 눌러 떼어낸 아주 자그마한 돌날과 긁개, 조각도, 석촉, 창끝, 양면석기, 송곳 등 다양한 도구를 만드는 것이다.

 

동북아 후기 구석기 사람들은 손재주가 기가 막힌 사람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맥가이버 같은 사람들이었어요. 5가 될까 말까 한 몸돌에서 맥가이버처럼 아주 다양한 도구들을 척척 만들어냈으니 말입니다.”

 

 

 

5㎝도 안되는 몸돌을 깎아 다양한 도구를 만든 구석기 최말기를 풍미한 사람들. ‘맥가이버’란 별명을 들을 만하다. <강창화씨 제공>

 

 

그런데 1만 년 전을 전후로 구석기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정착을 하게 된 사람들은 농경생활을 하게 되고 곡식 등을 저장하는 도구, 즉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을 하게 된다. 바로 토기의 발명이다.

 

농경과 간석기, 그리고 토기의 출현을 신석기혁명이라 하지. 그런 점에서 이 고산리에서 후기 구석기 최말기의 세형돌날 문화와 신석기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고토기(古土器)가 속출했고, 그리고 신석기시대의 출현을 알리는 토기 즉 융기문 토기가 나왔다는 게 의미심장해요.”(조유전 관장)

 

부연 설명해보자. 고산리에서는 후기 구석기 최말기 문화의 전통이 밴 세형몸돌, 세형돌날, 첨두기(尖頭器·끝이 뾰족한 도구), 양면 석촉(돌화살촉) 등이 속출했다. 또한 신석기의 여명을 알리는 고토기 조각도 2500여점이나 확인됐다.

 

고산리에서는 특히 문양이 없는 원시 고토기 즉 식물성 섬유질이 혼입된 고토기가 전체 수량의 85% 이상 차지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토기는 아무르강 유역의 세형돌날문화(11000~1만 년 전)에서 보이는 후기 구석기 최말기~신석기 여명기에 출현하는 고토기와 흡사한 모습입니다.”(강창화씨)

 

이런 고토기는 인류가 토기라는 것을 처음 만들면서 450~600도에서 구운 저화질 토기이다. 구울 때 성형(成形)을 위한 보강재로 식물의 줄기를 섞었다. 연한 억새풀 같은 것을 짓이겨 썼다. 그런데 쉽게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두개 있다. 우선 첫번째.

 

희한한 것은 이런 고토기가 한반도 본토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거지.”(조유선 관장)

 

. 그래서 학술적으로 이 고토기를 고산리식 토기라 부르게 되었지요.”(강창화씨)

 

왜 한반도에는 보이지 않은 고토기가 제주도에서는 보일까. 두번째 수수께끼. 이런 고토기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8000년 전부터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근거는 무엇인가.

 

구석기와 신석기에 넘나든 경계인

 

제주도 유적들을 살펴보면 이상한 현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후기 구석기 최말기 세형돌날문화 석기들과 고토기가 함께 출토되는 곳,  11000~1만 년 전의 유적은 고산리 한 곳밖에 없다는 겁니다.”(강창화씨)

 

반면 8000년 전부터로 편년되는 융기문(덧띠무늬) 토기문화가 제주도에서 성행한다는 것이다.

 

융기문 토기는 애월읍 고성리, 제주시 아라동, 구좌읍 대천리 등 해발 200~450m인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서 흔히 확인되는 유물이다. 또한 발해연안, 즉 동이족의 본향에서 흔히 확인되는 지()자문 토기(빗살무늬 토기)도 보인다.

 

()자문 토기는 제주도 온평리 유적과 고산리 동굴유적에서 볼 수 있는데 모두 지그재그형의 사선으로 짧고 깊은 문양을 보인다.

 

기자는 이쯤해서 지난해 발해문명의 시원지, 즉 동이(東夷)의 본향이라 할 수 있는 차하이(査海싱룽와(興隆窪) 유적을 비롯, 다링허(大凌河랴오허(遼河) 유역에서 기자의 손으로도 숱하게 수습할 수 있었던 융기문·빗살무늬 토기들을 떠올렸다.

 

또한 90년대와 2000년대 초까지 확인된 강원 고성군 문암리와 양양 오산리 유적에서도.

 

융기문 토기는 시대의 선후는 있을지언정 문암리·오산리 등 동해안뿐 아니라 남해안, 충청내륙, 남해안 도서지방에서도 확인되지.”(조유전 관장)

 

강창화씨는 특히 제주도산 태토로 만들어진 융기문 토기가 제주도와 가까운 여서도에서 확인된 것에 주목하고 있다. 제주도와 남해안 지역이 같은 문화권이라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융기문 토기와 지()자문 토기를 포함한 빗살무늬 토기는 발해문명, 즉 동이족의 문화라고 하지 않았나. 이쯤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고산리 유적에서 강(창화) 선생이 수습한 융기문 토기와 고산리식 토기는 어떤 관계가 있지 않나요.”

 

고산리에서 후기 구석기 최말기 문화인 세형몸날문화+고산리식 고토기와, 초기 신석기 문화의 지표유물인 융기문 토기가 함께 나왔다면 문화는 단절이 아니라 연결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기자는 바로 그 점을 물은 것이다.

 

제가 88 1월 고산리 인근 참호에서 발견한 융기문 토기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제가 그곳에서 융기문 토기 1개체분을 확인한 뒤 무려 165(50) 이상을 더 팠습니다. 하지만 고산리식 토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동떨어진 문화라는 뜻, 바로 융기문토기와 고산리식 고토기(식물성 고토기)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의미죠.”(강창화씨)

 

강씨는 제주도 삼양동 유적의 예를 든다. 즉 이곳에서는 신석기 초기의 토기인 세선(細線) 융기문토기(가는 선으로 덧띠를 만든 토기)와 함께 어로용 도구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한반도의 고성 문암리, 양양 오산리 유적과 닮은꼴이었다.

 

, 다시 요약해보자. 지금으로부터 11000~1만년 전 중국 동북과 연해주 사이인 아무르 강에서 살던 사람들이 내려와 지금의 제주도에 정착했다고 치자. 그들은 세형돌날문화와 식물성 섬유질을 보강한 고토기를 사용한 후기 구석기 최말기~신석기의 여명기, 즉 인류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시대를 풍미한 경계인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고산리 문화를 창조한 사람들은 어느 순간 사라진다. 그런 뒤 융기문과 지()자문 토기문화의 주인공들로 교체된다. 이때가 8000년 전 쯤이다. 이후 제주도는 광범위한 동이의 문화권이 되어 문화의 연속성이 이루어지고 지금에 이른다. …. 이기환 선임기자

(출처;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07181739475&code=900305)

 

 

2019 1 21일자 오마이뉴스 기사 김찬곤의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18] 빗살무늬토기의 비밀7-제주 고산리 융기문토기의 석 줄 띠무늬

 

 

 

▲ 〈사진112 고산리 유적 출토 융기문토기. 높이 27cm. 보는 바와 같이 우리 신석기 그릇은 밑굽이 세모형이 아니라 이렇게 평형한 그릇에서부터 시작됐다. 이 토기가 중요한 까닭은 한국미술의 시원이자 기원이기 때문이다. 사진113 대전선사박물관, ‘처음 만난 토기, 제주 고산리 유적 전시 포스터. 이 특별전은 오는 2 28일까지이다.  국립제주박물관

 

 

 

▲ 〈사진118 1988년 강창화 씨가 찾은 제주 고산리 융기문토기 조각. 사진119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나온 덧띠무늬토기 조각. 구름 띠 위 빗금은 수분(물기)을 표현한 것이다. 사진120 경기도 연천에서 나온 빗살무늬토기 조각. 이 조각은 아가리 쪽에 하늘 속 ()을 새겼다.  국립제주박물관

 

토기가 세상에 나온 지 벌써 22년째인데도

 

사진118 고산리 덧띠(융기) 무늬와 사진119 부산 동삼동 덧띠 무늬를 보면 아주 닮아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렇게 비슷한 무늬가 나오면 두 지역의 영향 관계부터 따진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것을 밝혀내지 못했다. 부산 동삼동 유적은 최대 기원전 6000년까지 내려잡을 수 있고, 제주 고산리 유적은 기원전 1만 년까지 내려간다.

 

그렇다면 굳이 영향 관계를 따지지 않더라도 제주 고산리에서 부산 동삼동으로 이러한 무늬가 흘러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토기를 놓고 영향 관계부터 따지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경우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무늬가 무엇인지, 무엇을 '구상'으로 한 것인지 먼저 밝혀야 한다. 이 토기가 세상에 나온 지 올해로 22년째 되어 간다. 그런데도 우리 고고학계와 미술사학계는 이 덧띠 무늬 세 가닥 가운데 어느 한 가닥도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

 

한국미술사의 시작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진112 고산리 유적 출토 융기문토기(덧띠무늬토기)를 들 수 있고, 이 토기야말로 우리 한국미술의 시원이고 기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이 토기의 무늬를 해석한다는 것은 한국미술의 시원과 기원을 밝혀내는 일이기도 하다.

'빗살무늬토기의 비밀' 연재글을 읽은 독자라면 이 무늬가 무엇인지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진112 그릇 무늬에서 가장 위 한 가닥은 하늘()이고, 그 아래 두 가닥은 구름()이다. ….

 

신석기 미술은 '추상미술'이 아니라 '구상미술'

 

사진122 고산리 융기문토기에 대해 국립제주박물관은 아래와 같이 풀이하고 있다.

 

"토기는 대부분 고산리식 토기로 불리는 원시무문토기와 융기문토기, 소량의 압인문토기가 출토되었다. 융기문토기는 아가리 부근에 3줄의 점토 띠를 에스(S)자 모양으로 곡선화 시킨 기하학 무늬로 태선융기문과 유사하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의 역사와 문화(통천문화사, 2001), 33

 

참으로 어려운 설명글이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구절은 "아가리 부근에 3줄의 점토 띠를 에스(S)자 모양으로 곡선화 시킨 기하학 무늬"라는 말이다. 이 말을 우리 말법으로 고쳐 쓰면, '아가리 쪽에 흙 띠 석 줄을 에스(S)자 모양으로 덧붙인 기하학 무늬'쯤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무엇을 새롭게' 알려주는 설명글이라 할 수 있을까. 더구나 흙 띠 세 가닥을 보는 눈도 잘못되었다. 가장 위 아가리 쪽 한 가닥은 아가리와 반듯하게 '평행'을 이루고 있고, 밑에 두 가닥만 구불하게 붙였다.

 

유홍준은 양양 오산리, 부산 동삼동과 더불어 제주 고산리 덧띠무늬토기를 설명하면서 이 '덧띠 무늬' '추상 무늬'라 한다.

 

"덧띠무늬토기는 그릇을 성형한 다음 이를 단단하게 하기 위하여 표면에 굵은 띠를 서나 가닥 덧붙인 아주 세련된 토기다. (……) 덧띠 장식에는 자연스런 추상 무늬 효과도 있고 느릿한 동감과 진한 손맛이 느껴진다. (……) 이런 덧띠무늬토기에서는 모던아트modern art의 프리미티비즘primitivism 예술에서나 볼 수 있는 현대적인 아름다움까지 느껴지는데 원초적 삶의 건강성이 살아 있다는 점에서 예술성을 앞세운 모던아트의 그것보다 더 진한 감동을 받게 된다. -유홍준,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1>(눌와, 2012), 26-28

 

여기서 유홍준은 '융기문토기'라 하지 않고 '덧띠무늬토기'라 한다. 이것은 아주 알맞게 정정했다고 볼 수 있다. 보통 융기는 스스로 일어나는 것인데, 사진112의 그릇 무늬는 저절로 융기한 것이 아니라 고산리 신석기인이 '일부러' 흙띠(덧띠)를 붙여 '무언가'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융기문'보다는 '덧띠무늬'가 더 알맞다. 그런데 그는 이 덧띠무늬가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짐작조차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 덧띠가 그릇을 더 '단단하게' 하는 구실을 한다든지, 모던 아트의 '원초적인 삶'이 살아 있다 하고, 결국 국립제주박물관의 설명글처럼 '추상 무늬'로 보는 것이다. 

 

 

 

▲ 〈사진123 고산리 덧띠무늬토기 그림. 이렇게 그림으로 그려 놓고 보니 꼭 우동 그릇 같다. 이 그릇은 높이가 27cm, 아가리 지름이 50cm나 되는, 아주 커다란 물독이다. 사진124 미국 미시시피 알칸사스 신석기 토기. 구름이 한 가닥이지만 한 가닥을 석 줄로 그렸다. 고산리와 알칸사스 신석기 토기는 본질적으로 같은 무늬라 할 수 있다.  김찬곤

 

유홍준과 거의 같은 풀이는 김원룡·안휘준의 <한국미술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다. 더구나 이 책은 한국미술사 관련 책 가운데 기본서라 할 수 있는데, 2003년 개정판을 내면서도 한국미술의 기원 고산리 덧띠무늬토기는 다루지 않았다.

 

"덧무늬는 아마 토기 아가리에 보강을 목적으로 감아 돌렸던 끈에 착안하여 발생하였다고 생각되는데, (……) 빗살무늬토기에서처럼 덧무늬들이 모두 비구상의 기하학적 무늬라는 것이 우리 신석기시대 도안의 공통적 성격이라 하겠다." -김원룡·안휘준, <한국미술의 역사>(시공사, 2016), 36-37

 

토기 부분은 김원룡이 썼을 것이 분명한데, 그는 덧띠의 기원을 그릇 아가리 쪽에 감았던 끈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이는 세계 신석기 미술사나 문양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주장이다. 또 신석기 무늬를 '비구상의 기하학적 무늬'라 단정하는데, 이 또한 잘못된 전제다.

 

지금까지 나는 한반도 빗살무늬토기를 다루면서 빗살무늬가 희랍의 기하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신석기 미술을 '비구상의 미술'로 보고 있다. 이는 한반도 신석기인이 1만 년 남짓 '추상미술'을 했다는 말이고, 우리 미술의 시작을 추상미술로 보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동안 '빗살무늬토기의 비밀' 연재글에서도 밝혔듯이 한반도 신석기인의 무늬는 철저히 구상(천문, 구름, )에서 왔고(앞 글 '빗살무늬는 과연 암호일까?' 참조 바람), 그런 만큼 한반도 신석기인의 미술은 추상미술이 아니라 '구상미술'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하겠다.

 

 

 

▲ 〈사진125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적봉시 대전자유적(大甸子遺蹟)에서 나온 채색 옹관(독널). 하가점하층문화(기원전 20001400). 요령성박물관. 사진126 일본 조몬 만기 토기. 기원전 1000400. 사진127 미국 호튼 신석기 빗살무늬토기. 기원전 4000.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고조선과 일본·미국 신석기인의 구름무늬

 

사진125는 고조선 전기(단군조선, 청동기시대) 옹관이다. 그릇 전체 무늬는 구름무늬인데(이 구름무늬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특히 아가리 쪽 무늬는 제주 고산리 덧띠무늬토기의 구름무늬와 비슷하다.

 

사진127은 미국 미시간 주 호튼(Houghton) 신석기 빗살무늬토기다. 이 무늬 또한 고산리 덧띠 구름무늬와 닮아 있다. 사진127은 일본 신석기 조몬시대 말기 토기다. 암사동 신석기인이 구름 속에 점을 찍어 구름 속 물(, 수분)을 표현했듯 일본 신석기 조몬인 또한 똑같은 방법으로 구름 속 수분을 표현했다(앞 글 '6000년 전 암사동 신석기인이 그린 서울 하늘 뭉게구름' 참조 바람).

 

그리고 구름 둘레에 점을 찍었는데, 이것은 봄비() 또는 씨앗으로 볼 수 있다. 세계 여러 나라 신석기 그릇을 보면 일본 조몬인처럼 구름 둘레에 찍은 점무늬를 볼 수 있다. 이는 구름에서 봄비가 내리고 그 봄비를 맞고 싹이 틀 씨앗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봄비이면서 씨앗인 것이다.

 

나는 위 세 토기의 무늬를 구름()으로 보지만 중국·일본·미국 고고학계와 미술사학계에서는 우리 학계가 '기하학적 추상 무늬'라 하듯 그들 또한 여전히 '기하학적 무늬' 또는 '추상 무늬'라 하고 있다. 우리 학계가 그렇듯 그들 또한 신석기 세계관이 공백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출처;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05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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