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2. 12,000년 전~ 9,000년 전

유적명 위치 실험실번호 표본 측정연대
(B.P./년 전)
Cal BC 참고문헌
가샤 5 ЛЕ-1781 12960±120 13800~13010 Оклаников Медведев 1983
  아래층 GEO1413 11340±60 11370~11160 Keally et al. 2004
  아래층 AA13393 10875±90 11080~10800
곤챠르카1, 1995 얼음쇄기 충진토 LLNL102169 12500±60 13010~12280 Shevkomud 1997
곤챠르카1, 1995 얼음쇄기 충진토 AA-25437 12055±75 12130~11810 Джалл и др. 2001
곤챠르카 1, 2001 4노지 TKa-13005 11340±110 11460~11050 Шевкомуд 2005
곤챠르카 1, 1995 3B토기출토 LLNL102168 10590±60 10850~10450 Shevkomud 1997
곤챠르카 1, 2001 3B노지 옆 TKa13007 10550±80 10850~10240  
남장두 T3,북벽중부 5 BK87086 진흙 9980±100 ` 保定地區文物管理所·北京大學考古系·徐水縣文物管理所·河北大學歷史系 1992
T3북벽중부, 6층저부 BK87088 진흙 10815±140 `
T1, 5~6 BK66120 나무 9875±160 `
T1, 5~6 BK86121 나무 9690±95 `
T1, 5~6 BK87093 나무 9810±100 `
T2, 6층 저부 회괭 BK87075 10510±100 `
T1, 1m5~6층 사이 BK89064 나무 9850±90 `
키토이문화 로코모티프
(Локомтив)
22a ГИН3333 6370±60 BC5240 Мамонова Н.НСулержцкий Л.Д. 1986
22 ГИН3331 6700±180 BC5640
23 ГИН4033 6740±180 BC5550
10 ГИН3030 6780±80 BC5580
28 ГИН4035 6820±100 BC5620
24 ГИН4034 6830±80 BC5630
8 ГИН3329 6870±70 BC5750
포파노보
(Фофаново)
3 ГИН4128 6350±50 BC5220
75유체 ГИН4131 6450±50 BC5320
2 ГИН4127 6720±70 BC5600
76유체 ГИН4130 7000±60 BC5880
7 ГИН4129 7040±100 BC5920

(출처; https://eastsearoad.tistory.com/15?category=735219)

 

2.1 아무르강유역 오시포브카문화(Osipovka文化); 17000년 전~10000년 전(BC15,000∼BC8000년)

『아무르 강 유역의 신석기문화(Amur 江 流域 新石器文化)

 

아무르 강은 최상류의 실카 강과 오논 강을 포함해서 길이 4350㎞에 달한다. 몽골고원 북부에서 발원하여 블라고베셴스크 부근에서 제야 강과 부레야 강이 합류하고, 하바롭스크시 부근에서 송화강과 우수리 강이 합류한 후 북동류하여 사할린 앞바다로 나가는데, 대략 제야 강까지를 상류, 하바롭스크시 부근까지를 중류, 니콜라옙스크항까지를 하류로 나눈다. 주로 아무르 강 하류와 중류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이 조사되고 있다. 아무르 강 하류는 최근 새롭게 분리된 마린스카야문화를 비롯해서 오시포브카문화, 말리셰보문화, 콘돈문화, 보즈네세노브카문화가 있고, 아무르 강 중류는 노보페트로브카문화, 그로마투하문화, 오시노오제로문화가 있다.

 

아무르 강 하류의 가장 이른 토기문화는 오시포브카문화로 원시고토기의 가샤유적을 대표로 하는데 기원전 15,000∼9000년 사이에 속한다. 마린스카야문화는 하바롭스크 수추 섬 유적을 통해서 가장 최근에 밝혀진 신석기문화로 기원전 7천년기 후반∼6천년기로 편년된다. 말리셰보문화와 콘돈문화는 최근 문화의 서열에 상반되는 견해가 제시되어 좀 더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말리셰보문화의 토기는 다치구로 압인문이 시문되고, 표면에 적색 마연된 것이 특징이다. 학계에서는 연해주의 보이스만문화와 관계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이 문화는 기원전 6000~3000년경까지 제시된 연대 폭이 크다. 콘돈문화는 능형압인문이 시문된 평저토기가 특징으로, 기원전 4000년기 말의 하바롭스크 콘돈-포치타유적을 대표로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하바롭스크 말라야 가반유적 발굴을 통해 콘돈문화가 말리셰보문화에 선행한다는 견해도 있다. 아무르 강 하류의 가장 늦은 신석기시대 문화는 기원전 3000년기를 중심으로 하는 보즈네세노브카문화로 연해주의 자이사노브카문화와 병행한다. 아무르 강 하류와 연해주의 이른 시기 신석기문화는 상호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으나, 후기 신석기문화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진척된 연구가 없다. 시문방법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어골문, 타래문 등의 문양형태가 공통적인 점 등은 연구되어야 할 것이라고 판단된다.

 

아무르 강 중류는 아직까지 유적조사가 미비해서 가장 이른 신석기시대 문화인 노보페트로브카문화와 그로마투하문화가 기원전 9000년 이전까지 올라가며, 오시노오제로문화가 기원전 3000년경으로 그 사이의 공백 기간이 길다. 각종 세석기와 함께 고토기, 융기문토기가 출토되는 노보페트로브카문화는 한반도의 융기문토기문화와 관련해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로마투하문화에서도 일부 융기문토기와 함께 다치구 압인문토기가 주류를 이루며, 쐐기형몸돌, 돌날, 긁개 등도 많이 출토되었다. 두 문화는 여전히 신뢰할만한 방사성탄소연대가 없고 연대 하한이나 문화 분포에 대한 연구도 미비해서 재고찰할 여지가 많다. 아무르 강 중류의 가장 늦은 신석기문화는 오시노오제로문화로 아무르 강 하류의 보즈네세노브카문화, 연해주의 자이사노브카문화와 병행한다. 보즈네세노브카문화 토기와는 달리 돌대가 여러 줄 부착되는 특징이 있는데, 앙앙계(昻昻溪)문화의 토기와 유사하다.

 

아무르 강 하류에 말리셰보문화와 콘돈문화가 존재할 때 아무르 강 중류에는 어떠한 신석기문화가 영위되는 지에 대해서는 아직 조사되지 않았고, 말리셰보문화와 콘돈문화와의 관계, 콘돈문화의 절대연대 등도 최근 아무르 강 하류의 조사에서 상반되는 견해들이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풀어야할 문제가 많다. 하지만 한반도 신석기문화를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자료로써 적극적인 자료 활용과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김재윤)』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028)

 

『오시포브카문화(Osipovka文化)

 

아무르 강 하류역에서 갱신세 말기에 후기 구석기 전통과 함께 토기를 공반하는 전환기 단계를 오시포브카문화로 부른다. 오시포브카문화 유적들은 아무르 강 하류와 우수리 강을 따라서 550 반경 안에 위치한다. 이 문화의 가장 북쪽 경계는 아무르 강 하류의 북동쪽으로 훔미 유적이 있는 예브로노-고린스키 지질고고학지구이고 남쪽 경계는 우수리 강 하류의 요하(饒河)이다. 특히 우수리 강과 아무르 강이 합류되는 지점으로 하바롭스크 시내에서 중국 국경까지의 지역은 헤흐치르(Khekhtsir) 지질고고지구로 70개 이상의 오시포브카문화 유적이 알려져 있고, 그중 56개 유적은 서로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

 

오시포브카-1, 가샤, 훔미, 곤차르카-1, 노보트로이츠코예-3·7·10·14·17, 오시노바야 레치카-10·16 유적이 이 문화에 속한다. 특히 헤흐치르에서 오시포브카문화 유적이 많이 조사되었는데, 노보트로이츠코예-3·10·14·17, 곤챠르카-1∼4, 오시노바야 레치카 유적 등이 해당된다.

 

가장 이른 오시포브카문화층에서는 주거지시설이 확인되었는데, 이동식주거지와 유사하다. 주거지는 3.5×4.5m, 5×1.7m의 장방형으로 내부구조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이 외에 훔미유적에서 보이는 반수혈식 주거지도 이 시기에 보인다.

 

오시포브카문화에서 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은 14개소 이상인데, 오시포브카-1, 가샤, 훔미, 곤챠르카-1·3, 고샨, 아무르-2, 노보트로이츠코예-3·7·10, 오시노바야 레치카 10·16 등이다. 그중에서도 토기 기종의 다양함이나 양으로 보아서 가장 중요한 유적이 곤챠르카-1유적이다.

 

이 문화의 토기 특징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태토에 풀을 섞어서 성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샤모트’(내화토)가 혼입된 경우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의견도 있다. 가샤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의 태토에서는 풀을 넣은 경우가 알려졌지만 그러한 토기는 일부이고 대부분은 샤모트가 혼입되어 있다고 보고되었다. 이외에 태토에서 플린트, 석영, 혈암과 드물게는 석영과 장석도 확인된다.

 

토기기형은 발형평저(鉢形平底) 위주이다. 가샤유적에서 출토된 심발형평저토기는 표면에 세로방향으로 시문구로 정면한 흔적이 잘 남아 있다. 곤챠르카-1유적의 토기는 구연부가 직립하거나 약간 내만한다. 유일하게 복원된 기형은 구경이 기고 보다 많이 넓은 발형토기이다. 구연단에는 공열문, 융기문이 시문되며, 동체부는 다치구에 의한 지그재그 문양이 시문되거나 문양이 생략되기도 한다. 시문에는 회전식 시문구나 다치구 혹은 나무막대기나 판에 줄을 감아서 만든 도구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석기는 세석인몸돌, 세석인, 다양한 모양의 양면조정첨두기, 긁개, 석부 등이 있다. 세석인몸돌은 양면석기로 제작된 것 중에서도 유베쓰[湧別]기법과 작은 자갈돌을 소재로 해서 정면한 세석인 2종류로 나눌 수 있다. 긁개는 평면 삼각형인 것이 가장 특징적이다. 석재는 이암, 옥수석, 각섬석 등이다. 이 밖에 대형 어망추, 굴지구, 화살촉 등이 있고, 부분적으로 마연된 석부도 확인된다.

 

토제 및 석제의 예술품과 우상물(偶像物)도 있다. 예술품은 주로 석제의 목걸이, 펜던트 등이고, 우상물은 돌로 만든 새, 흙으로 빚은 곰, 남녀의 성기를 양쪽 끝에 조각한 석제품 등이 있다. 이 문화의 연대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기원전 15,000∼8000년 사이에 해당한다.(김재윤)』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099)

 

 

뉴스메이커 750호, 2007 11 20일자 기사 〈[특별기획]동북아 북방문명의 젖줄, 아무르〉

 

『신석기시대에 아무르 강 중류와 하류에는 수많은 고고학 문화가 발전했다. 하류 지역에서는 이미 1만3000년 전에 토기를 사용했다. 가샤 유적에서 출토한 이 토기는 지구상에서 가장 이른 토기 중의 하나다. 더 하류로 가면 수추 섬 유적이 있는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3년 동안 러시아와 공동 발굴조사를 한 유적이다. 길이가 약 400m에 불과한 자그마한 이 섬에서는 신석기시대 전 기간의 주거지가 약 120여 기 확인되었다.

 

 

 

아무르 강 유역 유적 분포도

 

이 섬 안에는 환호가 있어 사람과 영혼이 거주하는 지역이 서로 구분되어 있으며, 주거지에서는 토기와 석기는 물론이고 사람 형상과 동물 형상을 한 다량의 토우도 출토되었다. 토기 중에는 번개무늬 토기가 있는데, 6000~7000년 전의 토기에 지금 우리가 쇠 울타리, 베개, 담장의 그림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꼭 같은 모양의 번개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 유적은 풍부한 유구와 화려한 출토 유물 덕분에 ‘아무르의 미케네’라고 불리기도 한다.

 

 

 

코리안 루트 상에 분포한 대표적인 암각화인 레나강 상류 카축의 암각화(사진|김문석기자)와 아무르 강 유역 시카치-얄랸 암각화(사진|정석배교수), 그리고 울산시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왼쪽부터)

 

또한 아무르 강 하류 지역에는 ‘아무르의 비너스’라고 불리는 토우도 있으며, 토기에 사람의 얼굴을 새긴 것도 있다. 나나이인들이 사는 시카치-알랸 마을 주변에는 암각화 유적이 있다. 사람의 얼굴을 새긴 것과 사슴과 같은 동물의 형상을 새긴 바위들이 아무르 강변을 따라 수없이 널려 있다.

 

나나이인들은 이 암각화를 매우 신성하게 여긴다. 태초에 사람이 3명 있었다. 그들은 카도라는 남자와 쥴치라는 여자를 만들고, 나중에 마밀쥐라는 처녀를 만들었다. 카도는 하늘에 해가 3개 있어 너무 뜨거워 살 수가 없다면서 2개의 해를 활로 쏘아 떨어뜨렸다. 이를 기념하여 마밀쥐가 암석에 그림을 그렸고, 쥴치가 이제 사람들이 내 남편이 2개의 해를 죽인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나나이인들은 이 신화의 내용대로 시카치-알랸 암각화를 자신들의 조상들이 남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르 강 유역에서 발굴한 세칭 ‘아무르의 비너스’(왼쪽)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1만3000년 전) 토기의 조각들. |정석배 교수

 

아무르 강 중류 지역에는 신석기시대 전기의 노보페트로브카 유적이 있는데, 평저 융기문토기와 돌날로 만든 석기가 특징을 이룬다. 비슷한 평저 융기문토기가 한반도 동해안과 남해안 지역의 신석기시대 전기 유적에서도 많이 출토된다. 강원도 오산리 유적과 부산 동삼동 패총 유적 그리고 제주도 고산리 유적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이런 유형의 신석기문화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바이칼 지역이나 중국의 중원문화권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 시기에 이미 환(環)만주문화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출처;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id=16049&p_date=뉴스메이커-750)

 

네이버블로그 유라시아어와 한국어의 기원》 〈인류의 언어와 생물학적 유전자(DNA)와의 상관관계

 

6. 최대 빙하기와 소빙하기 사이에 (BC13~BC15백년) 어떤 일이 있었나?

*. 현대 문명의 시작은 동북아에서 부터 비롯한다.

7만 년 전부터 시작된 최후 그리고 최대 빙하기는 혹독한 환경이 되고, 현생 인류는 아프리카를 떠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빙하기가 드디어 끝이 난다. 빙하기 물러가면서, 거대한 시베리아와 유럽, 북미 지역은 불모의 땅에서 옥토로 뒤바뀐다. 그리고 현재 문명의 시작이 되는 데, 그 시초는 동북아이다. 이는 고고학적 유물의 발굴로 이러한 점들이 다음과 같이 입증이 된다.

 

즉 아무르강을 따라, 토기문명을 지닌 사람들이 대거 시베리아 내륙으로 진입을 한다. 이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인더스 문명, 황화 문명보다 5천년 이상 오래된 문명이다. 이들은 15백년부터 약 1,500년간 계속된 소빙하기때 기후가 추워질 때까지 상당한 수준을 이루었다. (참고로 "터키의 괴베클리 테베 유적" 참조하라)

 

아무르강에서 발굴되는 토기 유적을 보면, 최대 빙하기가 끝나고 동북아에서 문명이 비약적으로 발달했음이 입증됨.

아무르강 수추섬 (120여기)

가샤유적: Osipovska 문화

그로마투카 토기:

노보페트로브카 유적이 있는데,

평저 융기문 토기와 돌날로 만든 석기가 특징을 이룬다.

비슷한 평저 융기문 토기가 한반도 동해안과 남해안 지역의 신석기시대 전기 유적에서도 많이 출토된다. 강원도 오산리 유적과 부산 동삼동 패총 유적 그리고 제주도 고산리 유적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기원전 6~3천 년경: 빗살무늬 토기 분포가 이를 반증.

한반도 38도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핀란드 북위 55도까지 분포함.

 

12. 중국 성조는 어쩌다 생겼나?

 

중국의 홍산문화는 북방스텝문화의 소산으로 유전적으로 현재 중국인과는 관련이 없다.

시기적으로 하가점상층문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조금씩 그 흔적이 보인다.

기원전 7000년부터 취락이 발견되는데 이는 빙하기가 물러나면서 번성하기 시작한 아무르강 등의 문화의 연장선상이다.

빙하기가 끝나면서 홀로세 기후최적기(HCO)가 오면서 시베리아는 살기 좋은 지역으로 바뀐다.

몽고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은 현재처럼 사막이 아니라 아열대 초원이 었다.

따라서 인류 최초의 문명은 북방에서부터 먼저 일어났다. 즉 툰드라 지역에 서 남하하는 것이다.

즉 아무르강->홍산문명->앙소문화->용산문화처럼 발생된다.

BC5000년에 흥륭와문화에서는 최초로 빗살무늬 토기가 출현하는데 이는 아 무르강의 토기와 조몬토기, 제주도 고산리 토기의 연장선상이다.

이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와 스칸디나비아반도를 잇는 고위도 시베리아를 관통하여 발달된 토기문화로 이런 북방계문화의 대표적인 표지이다. 이는 언 어와 유전자의 분기와 상관관계를 보인다.

빗살무늬토기는 인도유럽어의 본 고향인 흑해 북단의 얌나야문화의 특징인 새김무늬토기(Corded Ware Pottery)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시베리아 스텝인들로 지금의 중국과는 유전적 관계가 없다.

다만 하가점하층문화인 BC2200~BC1600년경에 와서야 발해만에 가까운 해안지역에서 부계로 O형이 드디어 등장한다.

하가점상층문화인 BC1000~BC600년경에는 조금 더 북쪽으로 확산된다.

그러나 이 근방의 Zingouzi유적에서는 동시대이지만 전부 스텝지역의 DNA 로 구성이 된다.

이 결과는 중국 측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거한 것으로 신뢰성에 의문이 가는 데이터이지만 아무튼 그들이 내놓은 결과를 보더라도 현대의 유전자 구성과 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런 경향은 황하지역에서 발굴되는 거의 모든 인골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 는 현상이다.

앙소문화도 중국문화 아닌 북방스텝문화이다.

황하 중류지역의 BC 5000~BC3000년 문화로 홀로세기후최적기(=HCO)에 발 달된 문화로 이때 발굴된 고인골은 모두 북방 스텝인들로 현재 중국인과는 거의 100% 관계가 없다. 이들은 부계 ‘N’형으로 이 홍산문화와 앙소문화인 들과 같은 부계 ‘N’형이 유럽의 인구 구성과 언어 형성에 많은 역할을 한다 고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은 북방 스텝의 남방 끝자락에 해당한다.

이 앙소문화는 중국 후대문화에 유전적 영향을 주지 않고 문화적인 영향만 을 후대의 용산문화 등에 주었다.

중국의 용산문화도 많은 부분은 불확실하고 다만 동쪽으로 해안가로 가까이 갈수록 그리고 후대로 갈수록 비로소 중국문화라고 인정할 만한 것이 나타 나기 시작한다.

양자강유역부터는 고고학발굴과 일치하므로 중국문명은 황하문명이 아니라 양자강문명이라고 해야 된다.

(출처; https://blog.naver.com/joonghyuckk/110164323896)

 

2.2 노보페트로브카문화(Novopetrovka文化);13000년 전~9000년 전(13,0009000 BP)

아무르 강 중류의 가장 이른 신석기시대 문화로 노보페트로브카유적의 발굴을 통해서 밝혀졌다. 콘스탄티노브카와 세르게예브카 유적이 대표적이며, 세석인석기와 융기문토기가 공반하는 특징을 지닌다. 노보페트로브카문화의 주거지는 콘스탄티노브카유적에서 8, 노보페트로브카유적에서 25기가 확인되었다. 주거지는 말각방형의 수혈식이며 기둥구멍도 중앙과 벽 쪽에 있다.

 

토기의 출토양은 그리 많지 않은데, 노보페트로브카 8호주거지에서 원통형토기가 발견되었다. 태토에 굵은 모래, 자갈, 식물줄기 등이 섞였고, 구연부는 직립하거나 약간 외반하고 융기문이 횡방향으로 부착되었다. 내부에서 외부로 반관통한 공열문토기도 있다. 이러한 융기문토기가 한반도의 융기문토기와 유사해서 상호관계에 대해서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남아 있다. 이외에 토기가 깨어진 뒤 수리한 흔적으로 보이는 구멍이 뚫어진 무문양토기도 있다.

 

석기의 가장 큰 특징은 쐐기형 몸돌과 프리즘형 몸돌에서 떼어낸 돌날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돌날석기가 잘 발달되어 있으며, 날 부분에만 중점적으로 세밀하게 잔손질되어 있다. 특히 화살촉이 대표적 돌날석기로 양면을 중점적으로 잔손질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화살촉 가운데는 슴베가 있는 것이 있는데, 비슷한 시기의 다른 문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특징이다. 석기 중에는 여러 가지 용도가 복합되어 있는 것도 있다. 칼은 새기개, 긁개 등과 함께 복합되고, 긁개와 새기개, 뚜르개와 천공구 등은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 문화의 연대는 1970년대 데레뱐코에 의해서 기원전 60005000년경으로 주장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아무르 강 하류의 고토기 발견과 함께 신석기시대의 연대가 상향되어 기원전 10,000년 이전으로 보고 있으며, 방사성탄소연대값은 13,0009000 BP로 측정되었다. 노보페트로브카문화는 아무르 강 하류의 오시포브카문화와 유사한 점이 많고 기원이 동일하다는 주장도 있다.(김재윤)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600)

 

2.3 남장두유적(난좡터우, 南庄头, Nanzhuangtou); 12600년 전~

Nanzhuangtou ( 중국어 : 南庄头 , Nánzhuāngtóu ) 년대는 12,600-11,300 CAL BP 또는 11,500-11,000 CAL BP,  9,500-9,000 BC 또는 BP 10,700-9,500,  8,700-7,500 BC이고, 중국 허베이 Xushui 카운티 Baiyangdian 호수 근처에 있는 초기 신석기 유적이다. 이 유적은 토탄 늪지 에서 발견되었다. 도기 47 점 이상이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Nanzhuangtou는 중국 북부에서 발견된 가장 이른 신석기 시대 유적지이다. Nanzhuangtou에 있는 사람들이 개를 길들였다는 증거가 있다. 석재를 연마하는 석판과 롤러 및 뼈 유물도 이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10,500 BP로 년대가 측정되는 기장 재배의 증거를 보여주는 초기 유적 중 하나이다. 도자기는 10,200 BP로 년대가 측정된다.

 

유적은 1986년 발견되었는데 동물 뼈, 목탄 및 석기 도구의 문화층이 발견되었다. 이 층은 땅 아래 180 센티미터였으며 두꺼운 검은 색과 회색 실트 점토와 같은 호수 퇴적물로 덮여 있었다. 지금까지 북경 대학 고고학과 , 하북성 대학 역사학과, 하북성 문화 유적 연구소와 시 및 군 수준의 문화 기관과 같은 기관에서 세 가지 고고학적 발굴 작업을 수행했다.

전기 신석기 시대 (BC 7,000-5,000 년) Nanzhuangtou를 계승하였는데, Peiligang 유적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중국의 충적 평야에 농경 마을이 들어선 것이 특징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Nanzhuangtou)

 

2.4 길림성 후타오무가 유적; 12,000년 전

Live Science. July 10, 2019 기사 12,000 Years Ago, a Boy Had His Skull Squashed into a Cone Shape. It's the Oldest Evidence of Such Head-Shaping. 12,000년 전, 한 소년이 그의 두개골을 원뿔 모양으로 납작하게 하였다. 그것은 그런 머리모양의 가장 오래된 증거다. 번역은 파파고번역임.

 

 

 

중국의 고대 사람들은 약 12,000 년 전 인간의 머리 모양 만드는 것을 연습했는데, 일부 어린이의 두개골을 묶어 머리가 길쭉한 타원으로 자라도록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두개골을 납작하게 한 ​​기록이 있는 가장 오래된 집단이 되었다는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중국 동북부 지린성 후타오무가 신석기시대 유적지(석기시대 말기)를 발굴하던 중 고고학자들은 유아부터 어른에 이르는 남성과 여성 11개의 긴 두개골을 발견했는데, 이는 의도적인 두개골 개조(ICM)라고도 알려진 고의적인 두개골 재형성의 징후를 보였다.

 

텍사스 A&M대 치의대 생명과학부 부교수인 첸 왕 교수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고의적인 머리 변형 징후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세계 최초"라고 말했다. "만약 이 관행이 동아시아에서 시작된다면, 그것은 베링 육교를 가로질러 아메리카 대륙으로 동쪽으로뿐만 아니라 스텝을 통해 중동, 러시아, 유럽으로 서쪽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

 

후타오무가 유적지는 12000~5000년 전 매장물과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보물창고다. 2011년에서 2015년 사이의 발굴에서 고고학자들은 25명의 유해를 발견했고, 그 중 19명은 ICM을 위해 연구될 만큼 보존되었다. 이들 두개골을 각 시료의 3D 디지털 이미지를 생성하는 CT 스캐너에 넣은 후, 연구원들은 11개의 두개골이 납작해지고 이마 부분이 길어지는 등 명백한 두개골 형상의 징후가 있음을 확인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가장 오래된 ICM 두개골은 12,027년에서 11,747년 전에 살았던 성인 남성의 것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전 세계에 거주하는 모든 대륙에서 인간의 두개골을 재조립한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왕 교수는 라이브 사이언스와의 인터뷰에서 "만약 이 발견이 확인된다면, 첫 등장 이후 같은 장소에서 7,000년 동안 지속된 고의적인 머리 변형의 가장 초기 증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왕 교수는 11 명의 ICM 개체는 3 세에서 40 세 사이에 사망했으며, 이는 두개골 형성이 인간의 두개골에 아직 손상을 줄 수 있는 어린 나이에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왕 교수는 "이 특정 문화가 왜 두개골 수정을 시행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다산과 사회적 지위, 아름다움이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후타오무가에 ICM을 묻힌 사람들은 특권층 출신일 가능성이 높았는데, 이들 개인들은 무덤과 장례 장식을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 젊은이들은 훌륭한 장례식을 치렀는데, 이것은 높은 사회경제적 계층을 암시할지도 모릅니다,"라고 왕 교수는 말했다.

 

왕 교수는 "후타오무가가 ICM 역사상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사례임에도 불구하고 ICM의 다른 알려진 사례들이 이 그룹에서 퍼졌는지, 아니면 서로 독립적으로 일어섰는지는 미스터리"라고 말했다.

왕 교수는 "동아시아에서 고의적인 두개골 개조가 처음 발생해 다른 곳에서 확산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며 "다른 곳에서 독자적으로 시작됐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더 많은 고대의 DNA 연구와 두개골 검사가 이 관행이 퍼졌다는 것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By Laura Geggel 

(출처https://www.livescience.com/65901-china-oldest-skull-shaping.html)

 

2.5 우스티노브카유적(Ustinovka Site); 10000년 전(BC 8000년)

『연해주의 신석기문화(沿海州 新石器文化)

 

연해주에서는 태토에 풀이나 동물 털을 혼입해서 저화도 소성의 고토기가 나오는 시점을 신석기시대 시작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기원전 8000년경의 우스티노브카-3, 체르니고브카-알티노브카-5 유적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러한 고토기가 구석기시대 전통의 세석기와 함께 출토되기 때문에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의 전환과정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다. 이 고토기 단계는 아직까지 하나의 고고문화로는 규정되지 않고,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 단계로만 파악되고 있다. 이외에 연해주의 신석기문화는 토기문양을 기준으로 3개의 문화로 크게 나누고, 하부단위로 유형들을 분리하고 있다. 루드나야문화는 2개 유형, 보이스만문화는 6단계(유형), 자이사노브카문화는 3개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그 외에 아직 특정한 고고문화로는 나누어지지 않았지만 상기한 문화와는 차이가 있는 유형으로서 베트카유형, 세클라예보유형이 있다.

 

루드나야문화는 압인문(押印文)토기와 융기문토기를 특징으로 하며 한카호 부근과 연해주 동해안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최근 토기의 기형과 문양을 기준으로 해서 루드나야유형과 세르게예브카유형으로 분리하였다. 루드나야문화는 기원전 7000년기 후반∼6000년기까지 지속되어 보이스만문화에 비해서 이른 시기에 끝난다.

 

보이스만-2유적에서는 여러 형식의 다치구 압날문토기가 6개의 층서를 이루며 출토되었다. 각 층에서 출토된 유물은 같은 시간에 공존한 것으로 생각되어서, 보이스만 전체 문화에서 하나의 단계로 파악되었다. 따라서 보이스만문화는 원(原)보이스만 단계부터 보이스만 5단계(유형)까지 구성되어 있고, 토기기형, 문양의 형태·시문방법·시문범위에 따라서 각 단계 내에서 여러 가지 형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문화는 원보이스만 단계의 기원전 6000년경부터 마지막 5단계의 기원전 4000년기 전반까지 존속하였다.

 

베트카유형은 최근 새로이 베트카-2유적을 발굴해서 분리된 유형으로 압인·압날문토기가 대표적이다. 유사한 문양시문방법을 보이는 루드나야문화의 세르게예브카유형 토기는 구연부에만 시문되는 되는 데 반해서 이 유형은 동체부 1/2, 3/4 까지 시문되고, 압날과 압인문이 교대로 시문되어 문양대를 형성하고 있다. 연대는 기원전 5000년경으로 추정된다.

 

자이사노브카문화는 자이사노브카-1유적에서 출토된 침선문토기를 기본으로 해서 설정되었다. 최근 2000년대 들어서 침선문토기와 승선문(繩線文)토기가 공반된 주거지가 새롭게 발견되었다. 또한 한카호 유역의 내륙에는 횡주어골문이 아닌 궁형문의 침선문토기 등이 확인되었다. 지역에 따라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자이사노브카유형과 한카호유형으로 나누거나, 자이사노브카문화의 지역을 넓혀서 두만강유형, 한카호유형, 목단강유형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자이사노브카문화는 이른 시기에는 승선문 기법의 토기와 압인점선문, 늦은 시기에는 침선문토기가 주요하다. 이 문화는 기원전 4000년기 전반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000년기 전반까지 지속된다.(김재윤)』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078)

 

『우스티노브카유적(Ustinovka Site)

 

러시아연방 프리모르스키Primorsky, 연해주 지방 우스티노브카 마을에서 하류로 약 4 떨어진 곳에 있는 제르칼리나야Zerkal’naya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코로트키이 루체이KorotkiiRuchei 하천 우측의 18m 상의 단구 사면에 위치한다. 제르칼리나야 강은 시호테-알린Sikhote-Alin’ 산맥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빠져나간다. 이 유적은 1954년 지질학자 페트룬V. F. Petrun’에 의해서 발견되었으며, 발굴은 1963년과 1968년에 오클라드니코프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1966년에는 안드레예바Z.V. Andreeva에 의해서 조사되었으며, 이후 1980; 1981; 1984년에는 러시아 과학원 시베리아분소 고고학, 민족학 연구소에서 발굴하였다.

 

이 유적은 3개 문화층으로 구분되는데, 이는 다시 상부 문화층(1·2층)과 하부 문화층(3층)으로 재분류된다. 이 유적에서는 약 10만여 점의 석기가 출토되었는데 90% 이상이 격지, 파편, 규질 응회암제 부스러기이다. 1963년 이루어진 사용흔분석 결과 격지, 응회암과 플린트제 파편 11,494점, 돌날과 돌날 파편 1,139점, 몸돌과 부산물 395점, 나무를 가공하기 위한대팻날 3점, 가죽을 가공하기 위한 긁개 17점, 같은 목적의 측면날 긁개 2점, 뚜르개 및 잔손질용 석기 8점, 뚜르개 2점, 기타 톱날과 망치돌 등으로 분류하였다. 분석된 총 13,128점의 유물 중 13,038점이 몸돌과 버려진 석재이었으며,  100점 만이 석기로 분류되었다. 일부 격지와 돌날들은 추가 잔손질 없이 사용된 것을 확인하였다. 예를 들어 1963년에 확인된 1,176점의 격지 중 사용 잔손질이 있는 격지는 133점에 이른다.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이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와 버려진 석재들 간의 상관관계 비율을 종합해보면 석기 제작을 위한1차 작업이 유적 밖에서도 이루어짐과 동시에 석기제작소와주거지 주변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1980년 발굴조사에서는 발굴 구역의 북편에서 수혈주거지가 발굴되었다. 주거지의 형태는 타원형으로 3.4×2m의 규모에, 깊이는 36㎝가량 된다. 주거지의 장축은 북서와 남동 방향이다. 주거지 바닥은 전체적으로 2~5 정도로 황토다짐되어 있으며 일부분은 연하늘색 점토가 퇴적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주거지 남벽 쪽으로는 대형 자갈돌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이러한 돌들은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견고한 구조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인접한 남동 벽에는 불땐자리가 발견되었는데 바로 옆에 26~30 크기의 연석이 위치하고 있다.

 

이 유적에서 확인된 몸돌은 총 265점이며, 다시 평행 박리가 적용된 몸돌군, 돌날을 떼어 내기 위해 반평행 박리 기반의 몸돌군(단일 또는 2작업 면), 방사상형몸돌 또는 원반형몸돌군, 쐐기형의 세형돌날몸돌군(좀돌날몸돌군), 직각 또는 비정형적인 박리가 진행된 몸돌군 등 5개의 유형으로 분류된다.

 

석기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전형적인 석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긁개류(끝날긁개, 옆날긁개), 새기개, , 찌르개, 양면석기, 뚜르개, 대팻날, 자귀 등이 주로 확인된다. 이들 석기는주로 작업 날을 조성할 때 배면에서 등면으로 손질이 이루어졌다. 석기는 주로 돌날이나 돌날격지를 활용하여 제작하였다. 끝날긁개의 경우 돌날격지를 활용하여 정교하게 손질하였으며, 찌르개는 편평한 돌날상에 첨두 부분과 옆날 부분을 배면에서 등면으로 일부 손질하여 제작하였다. 새기개는 다양한 종류로 제작되었는데, 주로 돌날상에 작업이 이루어졌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 새기개 중 일부를 아라야계 새기개로 보기도 한다. 칼형석기는 길이 2.5~5.8㎝의 돌날격지와 돌날상에 정교하게 제작되어 졌다.

 

우스티노브카유적의 석기 문화는 상부와 하부, 2개 문화층으로 구분된다. 하부 문화층은 원판형몸돌, 대형 옆날긁개, 대패날, 돌날상에 잔손질한 칼형석기 등이 특징이다. 상부 문화층은 옆날긁개는 부족하지만 새기개, 긁개, 뚜르개, 외면으로 손질된 돌날찌르개, 돌날로 제작된 양면석기, 다양한 칼형석기가 두드러진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우스티노브카유적의 두 석기군은 궁극적으로 서로 연관되어있어 갱신세 후기 1 8천~1 2천 년 전 사이에 형성된 단일 문화 유형이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헌종)』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구석기시대편),

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4&idx=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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