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1.3 청동기시대, 1.4 철기시대 본문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1.3 청동기시대, 1.4 철기시대
대야발 2024. 2. 8. 17:11《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1.3 청동기시대
『1. 시대 개념과 시기 구분
청동기시대는 덴마크의 톰센(C.J. Thomsen)이 제안한 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로 구성된 3시대 체계(three age system) 중의 한 시대로 신대륙에서는 사용되지 않지만 구대륙에서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시대 개념이다.
청동은 광석에서 구리를 추출한 후 주석, 아연, 납 등 몇 가지 다른 금속과 배합하여 주조하는데, 그 기술은 고도의 숙련과 전문적 지식을 갖춘 장인을 필요로 한다. 영국의 고든 차일드(Gordon Childe)가 주장하였듯이 청동기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직업의 전문화는 단순히 석기만을 사용하던 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계층사회의 발전을 가져오는 혁신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예 · 맥 · 한 종족으로 구성되는 한민족 혹은 고조선과 부여, 진국(辰國) 등의 정치체(政治體)가 있었던 공간적 범위는 대체로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에 걸쳐 있다. 이 영역에 서기전 1000년 전반을 중심으로 비파형동검을 지표로 하는 한국 청동기 갖춤새가 분포한다.
이들 지리적 영역의 청동기시대에 대체로 중원 지역의 삼족기(三足器), 내몽골 시베리아 지역의 기하학무늬토기와 구분되는 무문평저(無文平底)토기가 널리 제작 사용된다. 그에 따라서 그 공간적 분포와 시간적 범위에는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무문토기시대’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그 시기 구분에 대해서 청동기와 무문토기의 형식과 갖춤새를 기준으로 하여 조기,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한다.
조기는 비파형동검이 제작되기 이전으로 서기전 15~12세기경에 해당한다. 요서의 고태산(高台山) 문화, 요동 북부의 마성자(馬城子) 2기, 요동반도에서는 쌍타자(雙砣子) 3기, 길림 동부 및 동북한 지역은 흥성(興城) 3기 혹은 호곡 1기, 서북한 북부의 신암리(新岩里) 2기와 공귀리(公貴里) 1기, 서북한 남부의 신흥동(新興洞) 1기, 남한 지역의 미사리(美沙里) 유형이 이에 해당된다.
전기는 비파형동검이 보급되기 시작하는 단계로서 서기전 12~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요동 서부의 위영자(魏營子) 시기, 요동 북부의 마성자 3기, 요동 남부의 상마석(上馬石) 상층, 길림 동부와 동북한의 흥성 4기나 호곡 2기, 서북한 북부의 공귀리 2기, 서북한 남부의 신흥동 2기, 남한 중서부에서는 가락동 · 흔암리 · 역삼동 유형 단계가 이에 해당한다.
중기는 전형적인 비파형동검이 보급되는 단계로, 서기전 8~6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요서에서는 십이대영자(十二臺營子) 유형 [요령 십이대영자 유적], 요동 북부에서는 신성자(新城子) 유형, 요동 남부에서는 쌍방(雙方) 유형, 길림 지역에서는 서단산(西團山) 유형, 길림 동부에서는 흥성 4기 유형, 서북한 남부에서는 신흥동 3기 유형이 대세를 이룬다. 남한 지역에서는 중부에 늦은 흔암리(欣岩里) 유형, 서남부에 송국리 유형, 동남부에서는 검단리(檢丹里) 유형이 성행한다.
후기는 서기전 5~4세기경 변형 비파형동검과 초기 세형동검이 유행하는 단계로 점토대토기가 요서 지역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전 지역에 걸쳐 분포한다. 각 지역별 토기 속성과 갖춤새의 차이가 있어 중국 요서(遼西) 지역의 원대자(遠臺子) 유형, 요북(遼北)의 양천(凉泉) 혹은 정가와자(鄭家窪子) 유형 [요령 정가와자 유적], 요남(遼南)의 ‘윤가촌(尹家村) 상층’, 남한의 ‘수석동(水石洞)’ 유형으로 규정된다. 이와 함께 남한 지역과 제주도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토기와 함께 이전의 송국리 유형의 토기 전통이 지속되기도 한다.
생업 활동으로 신석기시대의 어로 방식은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이 각종 어망추를 통해서 널리 입증된 바 있다. 조기의 요동 지역 마성자 혹은 쌍타자, 남한의 정선 아우라지는 물론 전기의 포항 대련리 등 남한 지역 생활 유적에서 석제와 토제 그물추가 다량 출토하고, 전기의 태안 고남리와 제주 상모리처럼 해안가 패총 유적의 형성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조기와 전기에 여전히 어로가 비중 높은 생계 양식이 지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렵 활동 또한 보다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음이 청동기시대 거의 전 기간 전 지역에 걸쳐 발견되는 다양한 형식의 마제 석촉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전-중기에 속하는 남한의 춘천 천전리, 세종 대평리, 울산 입암리, 진주 평거동 등지에서 마을 공간의 외부 경계에 조성된 함정 시설을 통해서 수렵활동의 방식이 보다 적극적으로 계발되었음이 확인된다.
조, 피, 수수 등의 잡곡은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재배되었으나,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이다. 조기의 쌀농사 증거로 중국 요동 남부의 대련 대취자(大連 大嘴子) 3기의 주거지에서 수습된 탄화미(炭化米)가 있다.
한반도 남부의 밀양 금천리(琴川里)에 이 시기에 속할 가능성이 있는 논 유구가 발굴 조사를 통해서 제시되었으나 확실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전기에 해당하는 여러 유적에서 탄화미가 발견되었는데, 대동강 유역의 평양 남경, 남한강 유역의 여주 흔암리, 동해안의 고성 송현동 등 유적의 사례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사례가 밭벼인지 논벼인지는 분명치 않다.
벼를 재배하는 경작지의 사례가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은 청동기시대 중기에 들어와서이다. 단위 논의 규모는 작지만, 경계 둑이 조성된 논이나 집수시설과 수로 등 수도작(水稻作)에 관련된 시설이 취락 인근의 소규모 곡간 충적지에서 발견된다. 논산 마전리, 진주 평거동, 울산 무거동(無去洞) 등의 사례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이랑과 고랑이 조성된 밭이 진주 대평리와 평거동 유적에서 대규모로 확인된 바 있다. 밭 유구(遺構)는 대체로 이들 생활 가옥 외곽에 조성되어 있는데 개별 경작지의 면적이 수백 ㎡에 이른 것이 보통이고, 전체를 합하면 수천 ㎡에 이른다.
농경 토지의 개간과 벌목 작업, 그리고 목제 농구의 제작이 활발해지면서 신석기시대에 이미 상당수 보급된 마제수법의 돌도끼가 더욱 다종 다양한 형식으로 발전한다. 중기 이후에는 특히 유구(有溝) 혹은 유단(有段) 석부(石斧), 대팻날 석기가 널리 제작 사용된다.
곡물 농사가 발전하면서, 수확구로 돌낫과 석도(石刀)가 유행하는데, 후자의 경우 전기에는 서북한과 남한 전역에 물고기 모양 혹은 배 모양, 동북한에서는 장방형이 보급된다. 중기가 되면 남한 서부 지역의 송국리 문화 권역에서 삼각형 석도가 유행하는 지역성을 보여준다.
살상용 혹은 위세품으로 정교한 편평 만입(灣入) 삼각촉, 꼭지가 달린 유경식(有莖式)촉 등의 마제 석촉과 함께 구하기 어려운 청동 단검을 대신하여 마제석검이 전기부터 중기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를 중심으로 널리 제작되었다.
서북한에서는 검몸에 피홈이 있고, 자루 대신 슴베가 달린 유경식(有莖式), 검몸에 피홈이 드물고, 자루가 달린 유병식(有柄式), 그리고 후자 중에는 자루에 마디가 있는 유절병식(有節柄式), 단이 형성된 유단병식(有段柄式)이 있다.
중기에는 무덤에 부장되는 위세품(威勢品)으로서 자루가 과장된 유단병식의 대형 석검이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유행하였다.
청동기는 조기에 남부 시베리아 계통의 무기와 공구, 장신구 등이 중국 요령 지역을 중심으로 보급되지만, 한반도 지역에서 발견된 사례도 드물게나마 확인된다. 요동 법고 만유가(灣柳家)에서 동물머리 장식 도자를 비롯하여 여러 점의 도자와 공내과(銎內戈), 도끼 그리고 무순 망화(望花) 유적에서는 환두도자의 출토 사례가 있다.
쌍타자 유형의 여순 타두(砣頭) 적석묘에서 낚시 활촉, 대취자(大嘴子) 주거지에서 청동촉과 과신, 신흥동 유형의 평양 금탄리 주거지에서 청동끌, 미사리 유형의 정선 아우라지 주거지에서 청동 장식, 진주 대평리 주거지에서 곡옥형 청동기가 발견되었다.
각 지역 현지에서 발견된 무기, 공구는 석제 거푸집으로 주조되었지만, 일부 공구는 순동에 가까워 두들겨 만든 청동기도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기에 이르면 대표적인 무기로서 자루를 별도로 조립하고, 검몸이 비파형으로 양측에 돌기가 있고 원형 단면의 슴베가 달린 단검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논란이 있지만 요동 지역의 검신 봉부가 짧은 이도하자(二道河子)식, 요서 지역의 검신이 긴 화상구(和尙溝)식, 서북한의 검신 폭이 좁은 선암리(仙岩里)식 등이 있어 이른 형식으로 주장된다. 거의 전부 목제 자루를 별도로 장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기와 공구는 물론 각종 장신구와 의기가 다량 제작 보급되는 것은 중기로서 그 중심은 요령(遼寧) 지역, 그중에서도 조양 십이대영자(朝陽 十二臺營子), 객좌 포수영자(喀座 包手營子) 등의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요서 지역이 중심을 이룬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비파형동검이 요서에서 길림과 한반도에 걸쳐 널리 보급된다. 청동제 자루를 장착한 사례가 요서 지역에서 처음 보급되고, 요동으로도 확산되지만, 한반도에서는 기본적으로 목제 자루를 끼운 동검이 성행한다. 비파형동검과 함께 번개무늬 장식의 청동거울이 요서 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반도에서는 비파형동검과 동모 등의 무기와 도끼 등의 공구(工具)가 제작 보급되었지만, 그 종류와 수량은 많지 않다.
후기가 되면 여전히 요서 지역에서 여전히 제작 전통이 이어지는데, 나팔형동기, 동탁(銅鐸), 말재갈 등이 동반 출토한 흥성 주가촌(興城 朱家村)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한편으로 능원 삼관전자(凌原 三官甸子), 객좌 남동구(喀座 南洞溝), 건창 동대장자(建昌 東大丈子)에서 보듯이 변형 비파형동검과 함께 일부 전국계 무기와 제기가 보급된다. 그 청동기 보급의 중심지가 요동 지역으로 확대되는데, 다량의 청동기가 출토한 심양 정가와자(瀋陽 鄭家窪子) 무덤의 사례가 이를 입증한다.
이 유적에서는 청동제 검병이 달린 변형 비파형동검과 다량의 화살촉, 말재갈 이외에 번개무늬 거울, 원개형(圓蓋形)동기, 방패형동기, 나팔형동기 등의 각종 이형(異形)동기와 장신구가 다량 출토하였다.
한반도에서는 정가와자와 비슷한 동검, 동경, 이형동기 등은 청동기시대 후기인 평양 신성동 유적과 다음 초기 철기시대의 대전 괴정동, 예산 동서리, 아산 남성리, 군산 선제리 무덤 유적의 부장 유물로 확인된다. 앞서 열거한 대부분의 무기와 공구는 석제 거푸집으로 주조되지만, 정교한 무늬와 복잡한 형태의 청동기는 모형을 먼저 만들고 이를 점토로 찍어 만든 거푸집을 활용해서 주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 유적도 그렇지만 마을 유적은 2000년대 이후 중국 동북 지역과 북한보다 남한 지역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사례가 발굴 조사되어 동 지역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다. 조기에 남한 여러 곳에서는 소형의 (장)방형 주거지와 함께 정선 아우라지에서 보듯이 장축이 15m, 면적이 150㎡가 넘는 대형 주거지가 유행한다.
대형 주거지의 경우 20명이 넘는 구성원을 수용할 수 있어 여러 가구 혹은 몇 세대가 공동 거주하였을 가능성이 많은데, 한두 기의 화덕을 공동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취락은 상당수가 강변의 충적대지에서 발견되고, 구릉 사면이나 고지대에서는 그 사례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단위 취락을 구성하는 주거지 숫자가 많지 않아 취락의 규모가 차별화되는 현상은 보이지 않는다.
전기의 이른 단계에는 화덕 1-2기를 갖춘 장방형 평면의 주거지, 늦은 단계에 다수의 화덕을 갖춘 (세)장방형 평면의 주거지가 유행한다. 그중에서 2열의 주춧돌, 돌을 둘린 화덕 1-2기를 갖춘 장방형 주거지는 금강 중류와 남한강 상류의 호서 지역을 중심으로 조성된다.
장단축비가 4:1 정도인 (세)장방형 평면에 화덕이 4∼8기 설치된 주거지는 경기 남부와 호서 서부, 북한강 상류의 영서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는데, 단일 가옥에 여러 핵가족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기와 달리 세대마다 화덕과 주거 공간을 구분하는 현상이 나타나는바, 이는 같은 가옥 내이지만 세대마다 독립적인 주거생활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취락의 입지는 앞 시기와 달리 지역마다 구릉 정상부, 강변 충적대지, 완경사면 등 다양하다.
청원 대율리처럼 중심 주거지를 둘러싼 소규모 환호시설이 있어 거주 공간의 차별화 현상도 일부 확인된다. 규모는 정확하게 추산하기 어려우나 대규모 취락과 그 주변으로 소규모 취락이 분포하면서 중핵 취락과의 연결망(network)을 이루는 현상이 확인되기 시작한다.
중기에 주거지는 소형화된 방형과 원형 평면의 것이 압도적이어서, 소규모 가구 혹은 핵가족 중심의 거주 방식이 성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남한의 부여 송국리식 및 서산 휴암리식, 동남한의 울산 검단리식, 그리고 중부 지역의 춘천 천전리식 주거지가 그 사례이다.
송국리식 주거지는 원형 평면에 두 개의 기둥 구멍을 갖추고 있는 형식인데, 방형인 것은 휴암리식이라고도 한다. 검단리식 주거지는 장방형 4개 기둥, 혹은 6~8개 기둥이 있고 화덕 1기가 갖추어진 주거지이다. 대형의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대부분 소형이다. 천전리식 주거지는 한쪽에 이색 점토구역을 갖춘 것으로 역시 작은 방형 주거지이다.
한 시기에 혹은 여러 시기에 걸쳐 한 지점에 지속적으로 조성되어 1∼2백 채의 주거지를 갖춘 대규모 취락 형태를 띤다. 단위 취락 내에 주거지 배치에서도 일정한 패턴이 확인되어 취락 공동체의 조직과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사례가 늘게 된다.
그 주변으로 10∼20여 기의 주거지로 구성된 소규모 취락이 분포하면서 중핵 취락과의 연결망(network)이 더욱 많은 지역에 발전하는 사실이 확인된다. 취락 연결망은 대체로 하천 유역의 결절지점, 선상지상 대지 혹은 분지형 평지에 입지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몇몇 취락에서는 평면 방형 혹은 원형의 환호(環濠) 시설이 확인되는데, 춘천 중도, 울산 검단리, 진주 대평리 등이 대표적이다. 환호는 방어나 의례 혹은 사회적 구분을 목적으로 조성되는데, 그 유무에 따라 취락 간 기능의 차별화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후기에는 같은 점토대토기를 내는 요동 지역의 심양 공주둔(公主屯) 후산(后山) 유적 등의 사례와 유사한 벽부식(壁付式) 노지를 갖춘 말각방형의 소규모 수혈 주거지가 남한 여러 지점에서 확인된다. 남양주 수석동이나 보령 교성리(校城里) 등 유적이 대표적인데, 대체로 10여 채 내외의 주거로 이루어진 소규모 취락들이다.
벽부식 노지가 없는 주거지로서 50기 이상의 주거지로 이루어진 일정 규모 이상 취락의 사례로 고지에 입지한 안성 반제리(盤諸里), 고성 송현리(松峴里) 등의 유적도 있다.
앞의 유적들이 남한에서는 청동기시대 중기의 원주(原住) 집단에 채 융합되지 못하고 떨어진 높은 구릉에 정착한 반면, 보령 관창리(寬倉里) 유적 등 낮은 구릉이나 평지에 조성된 전형적인 송국리형 취락에서도 점토대토기를 내는 주거지가 소수이지만 확인되어 원주집단에 이주집단이 흡수 혹은 수용되었던 상황을 보여준다.
송국리형 원형 주거지는 호남 지역에서 제주도로 전이(轉移)되어 이 지역에서 청동기시대 이후 더욱 늦은 시기에 오랫동안 널리 조성된다.
청동기시대 조기에 속하는 무덤 유적으로 요서 지역에서는 신민(新民) 고태산 유적에서 군집을 이룬 토광묘가 확인되었지만, 요동 지역에서는 본계(本溪) 일대의 동굴(복합)묘와 대련시 일대의 적석(복합)묘가 있다.
마성자유형이 성행한 태자하(太子河) 유역에서는 동굴 안에 공동묘지가 조성되었는데, 간단히 땅을 파고 1인의 시신을 안치한 다음 다수의 토기와 생활공구를 부장하고 있다. 모양을 갖춘 석관시설은 늦은 단계에야 조성되기 시작한다.
요동반도 남단에서는 다수의 인골을 매장한 단위 분묘를 적석 연접하여 공동묘역을 조성하였는데. 흔히 대표 유적 지명을 따 대련(大連) 장군산(將軍山)식 적석묘 [고인돌]로 불린다. 이에 속하는 여순(旅順) 우가촌(于家村) 타두(砣頭) 적석묘의 경우, 한 묘역에 58기의 묘광(墓壙)이 조성되어 있고, 각 묘광에는 10인 내외의 주검이 매장되어 있다.
부장품은 대부분이 토기이고, 석검과 동검 등 무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서북한 지역에서 황주 침촌리형 소형 지석묘나 석관묘가 조성되기 시작하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전형적인 지석묘나 개석식 지석묘[大石蓋墓]가 본격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장군산식의 적석묘에서는 한 묘광에 다수의 주검을 안치함으로써 혈연집단의 긴밀한 유대가 반영되는데, 비슷한 정황은 한 동굴에 다수의 1인 무덤이 조성된 마성자식 동굴묘도 마찬가지이다. 부장되는 유물과 분묘의 규모로 볼 때 피장자 간 차이가 확인되지 않아, 공동체 내에 구성원 혹은 가구 간에 위계적인 모습을 볼 수 없다. 아울러 무기가 부장되지 않아 군사적 귄위를 가진 엘리트의 모습도 확인되지 않는다.
전기에 요동과 서북한 지역에 탁자식 지석묘와 대석개묘, 석관묘가 등장한다. 요동 지역의 개주 화가와보(伙家窩堡) 지석묘가 이른 사례로서, 판석 모양의 지석과 상석을 갖춘 것으로 상석 길이가 2m 남짓한 소형이다.
수암 쌍방(双房)의 개석묘는 지하에 석관시설을 갖추고 지상에 큰 상석을 덮은 것이다. 요동에서는 무순(撫順), 청원(淸原) 일대, 길림 동부의 연길(延吉) 등에서는 석관묘가 조성된 사례가 확인된 바 있다. 남한에서는 소형 석관묘나 도랑이 둘린 주구묘(週溝墓)가 조성되었지만 제대로 모양을 갖춘 지석묘는 아직 조성되지 않았다.
비파형동검이 부장된 사례로 요동 수암 쌍방(雙方)의 대석개묘와 서남한 서천 오석리의 주구(週溝) 석곽묘를 들 수 있는데, 이전 단계에 무기가 전혀 부장되지 않은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로 보아 세습적이지는 않더라도 일정한 위세가 있는 개인이 등장한 사실이 확인된다.
청동기시대 중기에 각지에서 다양한 묘제가 성행하게 된다. 청동기를 다량 부장하는 분묘와 함께 앞선 시기의 돌무덤은 더욱 발전하여 각 지역에서 각기 다른 형식으로 발전한다.
다량의 청동기를 부장한 석곽 무덤으로서 대릉하 유역의 조양 십이대영자 무덤이 대표적이다. 내부에 목관이 있는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인골과 함께 비파형동검, 청동 화살촉, 청동 도끼와 함께 다뉴(多鈕) 기하학문경과 원개형동기 등이 부장되어 있었다.
비파형동검 등의 여러 청동기가 부장된 사례로 요서 지역의 객좌 포수영자(砲手營子), 요동 지역의 경우 부장되는 청동기의 수량이 축소되어 동검과 동경이 본계 양가(梁家)의 무덤에서 확인된다. 인력 동원으로 권위를 강조하며 공동체를 선도하는 지도자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는 지석묘 혹은 대석개묘와 달리 이러한 청동기 부장묘는 무기와 의기로 보아 군사적, 종교적 위세를 갖춘 실력자의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동과 서북한에서는 대형의 탁자식 지석묘로서 요동 개주 석붕산(蓋州 石棚山), 서북한 은율 관산리(冠山里) 등지에서 판석으로 만든 지석이 높이가 2m가 넘고, 상석 길이가 8m에 이르는 사례가 발견된다. 또한 지하에 시신 매장 공간을 마련한 다음 지상에 상석을 덮는 대석개묘 혹은 개석식 지석묘가 축조된다. 요동 본계 신성자(新城子)와 봉성 동산(鳳城東山) 유적, 서북한 개천 묵방리(墨房里) 유적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요동 남부에서는 이전의 적석묘가 계속 조영(造營)되지만 앞선 단계와 달리 단일 적석묘역 내 분묘 간에 구조와 배치상에 일정한 차이가 확인된다. 대련 강상(崗上) [요령 강상 유적]이 바로 그것으로 중앙의 7호묘를 중심으로 주위에 20여 기의 석관 혹은 석곽묘가 배치되어 있다. 전 단계와 마찬가지로 한 분묘에 10∼20명의 주검이 매장되어 있으며, 비파형동검 등의 청동기가 부장되어 있다.
남한에서는 큰 규모의 개인 묘역을 갖춘 지석묘가 등장하는데, 묘역 시설은 크게 두 가지 형식이 있다. 하나는 장방형의 경계 구획을 줄구덩이로 시설한 형식, 다른 하나는 적석 기단으로 장방형 혹은 원형의 경계 구획을 시설한 형식이다. 전자는 북한강 상류의 춘천 천전리(泉田里) 지석묘가 대표적으로, 길이가 수십 m에 이르는 대형의 주구가 확인되었다. 후자는 경산 대학리, 산청 매촌리(梅村里), 진주 초장동(草長洞), 창원 덕천리(德川里), 마산 진동리(鎭東里) 등 영남 지역 전역에서 다수가 확인되는데, 묘역의 길이 또한 수십 미터에 이른 것이 적지 않다.
한편 지하 매장 시설을 조성하는데, 토광을 깊게 파고, 바닥에 석관을 안치한 다음 그 위로 3~7겹의 개석 시설을 갖춘 다중 개석묘(多重 蓋石墓)가 있다. 한반도 남부 해안에 근접한 지역에서 확인되었는데, 보성 동촌리(東村里), 김해 율하리(栗下里) 등 유적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후기에는 심양 정가와자(鄭家窪子) 6512호 목곽묘의 부장 양상에서 보듯이, 요동 지역에서의 우두머리의 모습에서도 변화를 보인다. 이 분묘에서는 청동 단검과 함께 다뉴경, 마구, 의기, 동경 그리고 수백 점의 청동 화살촉이 부장되어 있다.
정가와자와 같은 다량의 청동기를 부장한 수장급 피장자의 분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서북한의 경우 평양 신성동(新城洞) 석곽묘를 통해서 초기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남한 중서부에서 정가와자 사례 유사한 동경과 동검을 비롯한 다량의 청동기를 부장한 적석 목관묘는 초기 철기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아산 남성리, 대전 괴정동, 예산 동서리 등지에서 보인다.
청동기를 다량 부장하는 분묘가 널리 확산되는 데에도 불구하고 전단계의 큰 돌 무덤의 전통은 각 지역에서 지속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요동에서는 환인, 본계, 영길 등지에서 대석개묘, 앞서 소개한 남한 남부의 묘역식, 다중개석식, 위석식(圍石式) 등의 지석묘 일부가 이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집단 구성원을 아우르는 신앙 · 의례 행위는 이미 청동기시대 조기는 물론 신석기시대부터 유행했을 수도 있지만 실제적 증거는 중기의 유적과 유물에서 다수 확인된다.
청동기 중기부터 등장하는 다뉴 기하학무늬 동경(銅鏡)은 근대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거울이 중요한 무구(巫具)이었듯이 제사를 주관했던 실력자의 권위를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된다. 제사의 공간으로서는 구릉 정상의 환호 시설이 확인되거나 제사용 건물로 사용되었을 고상 가옥의 터가 확인되기도 된다. 전자는 창원 남산 서상동의 사례가 있고, 후자로는 경상남도 사천 이금동(梨琴洞)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금동의 경우 15m가 넘고 총 20여 개의 기둥 구멍이 쌍을 이루며 확인되었는데, 생활구역과 분묘군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후기에 안성 반제리, 합천 영창리(盈倉里), 화성 동학산(東鶴山), 경주 화천리 등 유적에서는 구릉 정상부를 둘러싼 환호가 발견되는데, 주거 구역과는 분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내부에 다른 기능의 시설이 없고 청동기를 매납한 사례도 있어 중기보다 의례적 성격이 더 강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밖에 장방형으로 구획된 적석 시설을 갖추고 한가운데에 입석(立石) 혹은 선돌을 설치하여 제사시설로 인정되는 사례가 대구 진천동(辰泉洞), 밀양 신당동(新堂洞) 등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산청 매촌리(梅村里)의 경우 방형 적석묘역을 갖춘 지석묘와 쌍을 이룬 원형 적석 제단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김해 율하리 낮은 구릉 위 거대한 적석 묘역 시설 근처에서 발견된 기둥 구멍이 대전 출토 농경문 청동기의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은 솟대와 같은 제의 시설이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별도로 동물문과 기하학문의 암각화가 시문된 바위와 암벽 유적 또한 제사 공간으로 활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각종 고래와 함께 호랑이, 노루 등 육지 짐승이 묘사된 울산 반구대 암각화 제사 유적은 그 상한이 신석기시대로 올라간다고 주장되지만, 표현 내용으로 볼 때 청동기시대에까지 지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기에 속하는 것으로 여수 오림동, 경주 안심리 지석묘 상석에 마제석검의 그림이 있어 이를 숭배하는 의례 활동이 이 유적 공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제단 석축과 입석에서 동심원문 등의 암각화가 장식된 사례가 앞서 진천동과 신당동의 유적에서 확인된다.
각종 기하학 무늬가 새겨진 영남과 그 주변에서 확인된 암각화 유적은 고령 장기리, 경주 금장리 사례를 비롯하여 대체로 초기 철기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의례 활동은 청동기시대 후기에서 시작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청동기시대인 서기전 1000년에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에 걸쳐 있는 인구집단과 관련하여 중국 문헌 기록에 예 · 맥 · 한이라는 종족 명칭의 이름이 전하지만, 그 실체와 시공간적 위치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집단 스스로 내세우는 정체성은 타자가 인식하는 것과 같지 않아, "종족(ethnicity)은 일정한 물질 문화를 공유하는 인구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는 고전적인 인식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
그렇지만 동일한 토기 갖춤새와 청동기를 공유하는 경우 집단의 구성원 간에 최소한의 동류 의식을 갖춘 집단의 전제 조건으로 검토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 그러한 점에서 평저 무문토기와 비파형동검을 공유하는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의 주민 집단에 대해서 예 · 맥 · 한과 그에 속하는 복합사회 혹은 정치체의 관점에서 검토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이들 종족 내의 기록에 전하는 정치체로 고조선과 부여, 진국 등이 있으며, 그중 고조선이 앞선 시기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다.
고조선은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전하고 춘추시대 제(齊) 나라와 교역을 하는 서기전 8~6세기의 전기 고조선, 우두머리가 왕이라 이름을 칭하고 전국 연과 각축을 벌이는 서기전 5~4세기의 중기 고조선, 전국 연(燕)의 소왕(昭王) 때 장수 진개(秦蓋)의 동진으로 고조선의 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하는 서기전 3세기의 후기 고조선, 그리고 위만(衛滿)이 고조선 준왕(準王)을 내몰고 세운 서기전 2세기의 위만조선으로 구분하여 살필 수 있다.
그중 전기와 중기 고조선이 청동기시대에 속하는데, 일정 수준의 복합사회로서 국가 이전 단계의 수장사회(chiefdoms society)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한 고조선을 요동과 서북한 지역의 지석묘 집단을 통하여 설명하는 관점이 있다. 지석묘는 묻힌 사람이 아니면 그 집안의 정치적 권위와 경제적 부를 토대로 하여 다수의 인력을 동원해서 축조한 무덤이다. 개별 취락 혹은 여러 취락의 구성원이 일상 혹은 유사시에 공유한 이념과 사회조직을 동원하여 협력해서 지석묘를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무덤에 부장되는 위세품은 마제석검과 석촉이 대부분으로 청동기로는 동검이 간혹 부장되어 묻힌 주인공이 보여주는 군사적 권위도 높지 않다. 따라서 지석묘 축조 집단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초기 복합사회 혹은 족장사회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어서 중국 측 기록에 전하는 종족 집단 혹은 정치체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기반이 되는 하위 혹은 원주 집단이라 할 수 있다.
훨씬 발전된 복합사회 혹은 수장사회는 무기, 공구, 의기(儀器), 장신구 등의 다종 다양한 기종의 청동기를 부장한 무덤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다. 이들 무덤의 주인공은 부장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군사 · 종교적 권위를 앞세운 엘리트로서, 지석묘에서 보는 공동체적(group-oriented) 성향보다는 개인적인(individualizing) 권력을 지향하면서 사회를 통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동북 지역에서는 서기전 9~7세기경에 요서 대릉하 유역의 조양 십이대영자, 서기전 6~5세기에는 요동 혼하 유역의 심양 정가와자, 길림 지역의 서황산둔(西荒山屯)에서 사례가 발견되며, 서기전 4~3세기 한반도의 서북한에서 수장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성천과 맹산 등의 다뉴경 거푸집, 서남한의 아산 남성리 등의 사례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지역마다 다소 형식의 차이가 있지만, 토기는 점토대 심발형토기를 표지로 하고, 청동기는 비파형과 세형의 청동 단검, 다뉴 기하학문경을 표지로 한다. 이러한 새로운 청동기 부장묘 주인공이 이끄는 정치체가 각 지역별로 시기를 달리하여 등장하였으며, 그중에서 고조선 정치체를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요약해서 말하면 문헌 기록에 고조선의 공간 추정 범위인 요령 지역에서 서북한에 걸쳐 확인되는 서기전 1000년 전반의 비파형동검과 다뉴 기하학문경을 표지로 한 청동기 부장묘로서 고조선 정치체의 모습을 단편적이나마 고고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리고 서기전 1000년 후반에는 길림 지역, 그리고 한반도 서남부에 유사한 청동기 부장묘가 있어, 이를 통해서 고조선의 뒤를 이어 각각 부여와 진국으로 이해할 수 잇는 정치체가 등장하였음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출처: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
1.4 철기시대
『개설
한국 고고학에서 철기시대란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서기전 300년경부터 삼국이 정립된 서기 300년경까지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고고학자들은 이 시대를 두 시기로 나누어 서기전 300년에서 서기 전후(혹은 서기전 100년)까지를 초기철기시대(初期鐵器時代)로, 서기 전후(혹은 서기전 100년)부터 서기 300년까지를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로 구분하고 있다. 반면 일부 연구자는 이를 통합해서 삼한시대(三韓時代)로 지칭하기도 한다.
고고학에서의 시대구분은 19세기 덴마크 국립박물관의 톰센(Thomsen, C. J.)에 의해서 처음 이루어졌다. 그는 1836년에 간행된 덴마크 국립박물관 안내책자에서 무기와 도구를 만드는데 사용된 도구에 따라 돌, 청동, 철의 순서로 계승되었다고 설명하였다. 그 후, 그의 제자인 월사에(Worsaae)가 층서적인 발굴을 통해 이를 보완하면서 선사시대를 석기시대(Stone Age) · 청동기시대(Bronze Age) · 철기시대(Iron Age) 등으로 나누는 삼시대법(三時代法)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삼시대법은 곧 바로 전 세계 고고학계로 파급되었다.
철은 청동기를 잇는 새로운 금속기로 인류가 도시나 국가를 형성한 문명단계에 들어서면서 등장하였다. 청동에 비해 철의 원료는 세계 각지에 널리 분포되어 있어서 야철기술(冶鐵技術)만 습득하면 생산이 가능하였다. 인류가 철을 최초로 이용한 예는 서기전 4,000년대에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철제구슬로 알려져 있다. 본격적인 철의 제작은 서아시아의 아나토리아(Anatoria) 지방에서 출현한 히타이트(Hittite)제국(서기전 1450∼1200)에서 시작되었다. 히타이트제국이 멸망한 뒤 철은 급속히 사방으로 퍼졌다. 대체로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서기전 13세기, 이집트는 서기전 12세기, 이란은 서기전 10세기, 유럽은 이보다 약간 늦은 서기전 9∼8세기경에서야 철이 보급되었다.
한편, 서기전 8세기경에는 북방 흑해연안에도 야철기술이 전파되어 이 지방 주민들의 기마유목화(騎馬遊牧化)를 촉진시켜 스키타이(Scythai)문화를 꽃피우게 하였다. 스키타이 유목족에 전파된 철기문화는 동방으로 퍼져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파급되었다. 중국에서 인공철은 춘추시대(春秋時代) 말에서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등장한다. 전국시대 후반에 들어서면 철기의 보급이 현저하게 진전되었으나 출토유물들은 농공구(農工具)가 주류를 이루었다. 전국시대 말에서 전한(前漢) 초에 걸쳐서 철의 생산이 급진전되지만 여전히 주조(鑄造)로 된 농공구가 주이고, 무기는 청동제를 사용하였다. 전한 말에서 후한(後漢)대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강(鋼)이 본격적으로 생산되어 철제 큰칼〔大刀〕와 같은 무기가 등장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철기문화의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있으나 대체로 크게 두 단계를 거쳐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첫째 단계는 중국제 철기가 들어온 시기이다. 서기전 4∼3세기에 해당하는 명도전(明刀錢)이 압록강 중류지방에서 서북지방에 걸쳐서 철기류와 함께 출토되었다. 즉 평안남도 덕천군 청송리에서는 명도전이 철제이기(鐵製利器)와 함께 출토되었고, 평안북도 위원군 용연동에서는 연(燕)나라 제품이 분명한 철제 농기구가 일괄 발견된 바 있다. 명도전은 중국연나라의 동으로 만들어진 화폐로서 표면에 ‘명(明)’자가 양주(陽鑄)되어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이와 같이 한반도 북부지역에 유입된 철기류는 중부지역을 거쳐 서남부지역까지 파급되었는데 충청남도 부여 합송리유적, 당진 소소리유적과 전북특별자치도 익산 신동리유적, 완주 갈동 · 신풍유적, 장수 남양리유적 등지에서 주조철기가 청동기류와 함께 다수 발견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철기는 주조로 된 농기구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세형동검(細形銅劍)을 표지로 한 청동제 무기와 덧띠토기〔粘土帶土器〕등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위만조선(衛滿朝鮮)의 건국 전후에 한반도로 들어온 철기문화의 여파가 남부지역까지 도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단계는 철기가 본격적으로 생산,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서기전 108년 한나라 무제(武帝)에 의한 낙랑군(樂浪郡)의 설치는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부터 철기는 우리나라 전역으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즉 도끼 · 가래 · 낫 등 철제 농경구와 단검 · 창 · 꺽창을 비롯한 무기류가 전국적으로 생산,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중 · 남부지역 철기문화는 최소한 두 가지 통로로 유입된 문화를 수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하나의 통로는 육로를 이용한 것으로 대동강유역으로부터 한강유역을 거쳐 낙동강유역으로 파급되었다. 낙동강유역의 움무덤〔土壙墓〕에서 철기와 함께 중국 전한대에 제작된 일광경(日光鏡), 소명경(昭明鏡), 가상부귀경(家常富貴鏡) 등 거울이 발견되고 있으며 특징적인 토기는 와질토기(瓦質土器)이다. 다른 하나는 해로를 이용한 것으로 서해안과 남해안을 거쳐 동남부지역으로 파급되었다. 이 지역의 조개더미에서 화천(貨泉), 오수전(五銖錢) 등 중국의 화폐와 점뼈〔卜骨〕가 발견되었고, 특징적인 토기로는 경질민무늬토기와 적갈색연질토기 등이 있다. 다만 두 계열의 문화는 낙동강 하류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혼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경주 황성동유적에서는 철을 채취하던 제철유적이 발견되어, 이 시대에 철 생산활동이 활발했음을 엿볼 수 있다. 또『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을 보면 서기 3세기경 영남 일대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 대방(帶方), 왜(倭)와 철을 교역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비단 서기 3세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교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철기생산의 전국적인 확산은 낙랑군이 설치된 이후, 이 지역에서 밀려난 위만조선 유민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큰 한편 해로를 통해 동아시아에서의 문화교류가 활발해진 결과이기도 하다.
철기시대의 문화양상은 북부 · 중부 · 남부지역 등 각 지역별로 다소 차이를 보인다.
먼저 북부지역에서 가장 이른 철기시대 유적은 평안북도 위원 용연동유적, 영변 세죽리유적 등이다. 용연동유적에서는 연나라 제품이 분명한 쇠도끼〔鐵斧〕 · 쇠화살촉(鐵鏃) · 쇠꺾창〔鐵戈〕등과 함께 쇠낫〔鐵鎌〕 · 반달쇠칼〔半月形鐵刀〕 · 쇠가래〔鐵鍬〕 · 쇠호미〔鐵鋤〕등의 농기구가 일괄 발견된 바 있다. 또 세죽리유적의 철기시대 층에서 확인된 집자리는 모두 지상가옥이다. 집자리에서 명도전, 포전(布錢) 등의 화폐와 삿무늬토기〔繩蓆文土器〕및 철기 등이 출토되었다. 세죽리유적이 존재했던 시기의 무덤으로는 움무덤, 조개더미, 독무덤〔甕棺墓〕등이 주를 이루며, 유물로는 철기, 청동기와 더불어 회색의 삿무늬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그 중 철기로는 호미, 괭이, 삽, 낫, 반달쇠칼, 도끼, 자귀 등이 있다. 고고학계에서는 이 시기의 문화유형을 소위 “세죽리-연화보유형”이라 명명하고 있다. 한편 동북부지역인 함경북도 회령 오동유적에서는 제6호 집터에서 주조 쇠도끼가 출토된 바 있다. 그리고 무산 호곡동유적에서 5기와 6기에 속하는 집터가 철기시대에 속하며 다수의 철기를 포함하고 있다. 특히 5기에 속하는 집터에서 출토된 주조 쇠도끼는 연나라의 철기와 관련된다고 보고 있다.
대동강유역에서 철기시대의 무덤은 널무덤〔土壙木棺墓〕, 덧널무덤〔土壙木槨墓〕, 귀틀무덤〔木室墳〕으로 구분되고 있다. 북한에서는 널무덤의 연대를 서기전 5세기에서 2세기 중엽으로, 덧널무덤을 서기전 2세기 중엽 이후로 보고 있다. 강서 태성리유적의 널무덤에서는 세형동검과 동투겁창〔銅矛〕등의 청동기류, 쇠도끼, 철단검 등의 철기류, 화분토기〔花盆形土器〕, 배부른 단지 등의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철기시대 초기의 유적으로는 서흥 천곡리 돌널무덤〔石棺墓〕, 황해도 송산 솔뫼골 돌돌림무덤〔圍石墓〕, 함흥시 이화동 움무덤 등이 있다. 따라서 대동강유역의 철기문화는 세형동검이 만들어지고, 움무덤이 유입된 서기전 3∼2세기경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다. 또 서기전 1세기 이후에는 귀틀무덤과 벽돌무덤〔塼築墳〕등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낙랑군 계통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중부지역의 대표적인 철기시대 집터 유적으로는 가평 마장리, 이곡리유적과 춘천 중도유적을 들 수 있고, 이후 조사된 것으로는 하남 미사동유적, 수원 서둔동유적, 횡성 둔내유적, 양양 가평리유적, 명주 안인리유적, 중원 지동 · 하천리유적 등이 있다. 이 유적들에서는 중부지역 특징적인 여(呂)자형 집터와 철(凸)자형 집터가 발견되었고, 유물로는 경질민무늬토기, 두드림무늬토기〔打捺文土器〕, 회색토기 등의 토기류와 다수의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화성 기안리유적에서는 대규모 철기 생산시설이 조사되었는데 여기에서는 단야로(鍛冶爐)와 더불어 숯가마, 송풍관, 송풍구, 쇠찌꺼기〔鐵滓〕,쇠조각〔鐵片〕등이 조사되었다. 그리고 중부지역의 여러 유적에서 낙랑계 토기가 출토되고 있어 낙랑과의 교류가 활발하였음 알 수 있다.
중부지역 철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으로는 움무덤, 독무덤, 돌무지무덤〔積石墓〕등이 있다. 움무덤은 가락동유적의 제1호 무덤에서 처음 알려졌다. 그리고 천안 청당동유적에서는 다수의 도랑〔周溝〕이 있는 움무덤, 즉 도랑움무덤〔周溝土壙墓〕이 조사되었다. 유물은 연질짧은목항아리〔軟質短頸壺〕와 깊은바리모양토기〔深鉢形土器〕, 청동제 말모양띠고리〔馬形帶鉤〕11점과 다량의 유리구슬이 출토되었다. 이후 여러 지역에서 도랑움무덤이 조사되었다. 그리고 독무덤은 가락동 제2호분과 같이 움무덤과 합장(合葬)으로 발견되거나, 단독묘일 경우에도 돌무지무덤과 같은 다른 묘제에 종속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돌무지무덤은 양평 문호리유적, 춘천 중도유적, 제원 양평리 · 도화리유적 등 한강 상 · 중류에서 서기 2∼3세기경에 해당되는 무기단식 돌무지무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4세기 이후에는 백제식 토기의 등장과 함께 기단식 돌무지무덤 등의 고분이 등장하였다.
남부지역의 철기문화는 대체로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Ⅰ기는 세형동검이 사용되면서 일부 주조철기류가 나타나는 단계로 서기전 3∼2세기경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해당되는 유적으로는 전북특별자치도 익산과 완주지역에서 다수의 널무덤들이 확인되었다.
Ⅱ기는 철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단계로 서기전 1세기 초반에서 서기 2세기 전반까지로 비정된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광주 신창동유적, 해남 군곡리 조개더미, 사천 늑도 조개더미, 김해 봉황대 조개더미 등이 있고, 창원 다호리유적, 경주 조양동유적 등지에서 널무덤이 확인되었다. 집터의 형태는 서남부지역에서 네모모양, 동남부지역에서 원형 혹은 타원형을 띠고 있다. 출토된 철기로는 쇠낫, 쇠도끼 등 농공구와 쇠창 · 쇠화살촉 · 철검 등의 무기류가 있다. 조개더미에서 주로 보이는 경질민무늬토기는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와 같은 계통이지만 경도가 높아지고 기형이 다양한 토기를 말한다. 또 동남부지역에서 주로 나타나는 와질토기는 소성도(燒成度)가 낮아서 흡수성이 있고 기와와 비슷한 회백색 혹은 회색을 띠는 연질의 토기인데, 물레로 빚었기 때문에 토기의 벽이 얇고 표면이 고르며 기종도 다양하다.
Ⅲ기는 철기문화가 발달하는 단계로 서기 2세기 중엽에서 3세기 후반까지로 설정할 수 있다. 집터는 대부분 네모모양 혹은 타원형 구덩식〔竪穴式〕집터이다. 무덤은 서남부지역에서 다수의 도랑움무덤이 확인되었고, 동남부지역에서 김해 양동리유적, 울산 하대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덧널무덤이 새로이 등장하였다. 덧널무덤에서는 장검,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 쇠화살촉 등 철제무기류의 부장이 증가하였다. 또 서남부지역에서는 연질의 두드림무늬토기가 등장하고, 동남부지역에서는 와질토기가 지속된다. 두드림무늬토기는 노천요(露天窯)에서 구워낸 민무늬토기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일부는 물레로 성형해 등요(登窯)에서 구워낸 것인데, 기벽을 강화하기 위해 박자(拍子)로 기벽을 때린 두드림무늬가 있는 토기를 말한다.
서기 3세기 말 이후에는 서남부지역인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대형 독무덤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고분이 등장한다. 한편 동남부지역의 경주와 김해를 중심으로 고식도질토기, 북방계 말갖춤〔馬具〕과 무기류가 출현한다. 이와 더불어 입지의 우월성, 독립부장곽(獨立副葬槨)의 존재, 무기의 개인집중화, 순장(殉葬)의 조건을 갖춘 고분, 즉 덧널무덤에 이어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墳〕등이 출현하게 된다.
철기시대에 대한 연구는 최근 유적 발굴조사의 급격한 증가로 인하여 많은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철기시대 초기(초기철기시대)의 양상이 어느 정도 밝혀지고 있고, 고대국가가 형성된 시기의 양상도 드러나고 있다. 철기시대의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북부지역에서는 후기 고조선과 위만조선에 뒤이어 부여, 고구려, 낙랑, 옥저(沃沮), 예(濊) 등이 등장하였던 시기이고, 중 · 남부지역에서는 삼한에 이어 백제, 신라 및 가야 등 고대국가가 형성되었던 시기이다. 우리나라의 철기문화는 중국 대륙으로부터 유입되었고, 한반도 북쪽에서 남쪽으로 전파되었지만, 토착적인 청동기문화와 융합되어 새롭게 생성, 발전되어 나갔던 역사적 특수성이 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시대구분 용어에 대한 논란이 많다. 우선 철기시대의 문제점으로는 역사성의 부재를 들고 있다. 반면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의 경우, 초기철기시대(서기전 300∼100년)를 하나의 시대로 설정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고, 원삼국시대도 역사학계에서는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삼한시대의 경우, 역시 한반도 남부지역에 한정되는 용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으로 인하여 앞으로 이 시기의 시대구분 용어를 통합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
(출처; 철기시대(鐵器時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
<참고자료>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철기시대(鐵器時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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