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1.1 세계의 신석기시대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신석기시대는 야생작물과 재배작물, 가축을 사용하여 행동과 문화의 특성과 변화의 진전이 생긴 시대이다.

 

신석기시대는 약 12,000년 전 근동에서 중석기시대에 농사의 첫 발전이 나타나면서 시작되었고, 이후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농사의 첫 발전이 시작되었다. 6,500년 전(BC 4500년)부터 과도기인 금석병용시대까지 지속되었고 야금술의 발달로 두드러져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로 이어졌다. 북유럽에서는 신석기시대가 약 BC 1,700년까지 지속되었고 중국에서는 BC1,200년까지 연장되었다. 세계의 다른 지역(신대륙포함)은 유럽 접촉전까지 광범위하게 신석기시대 단계에 남아있었다.

 

ASPRO연대기에 따르면 신석기시대는 선구적인 야생 곡류 사용이 초기 농경으로 발전하는 나투프문화에서 발생한 레반트에서 약 BC 10,200년에 시작되었다. 나투프 시기 또는 원 신석기시대는 BC 12,500년부터 BC 9,500년까지 지속되는데 선- 도자기 신석기시대인 BC 10,200-8800년과 겹친다. 나투프사람들이 음식으로 야생 곡물에 의존하게 되고 정주 형태가 시작되고 영거드라이아스기(약BC 10,000) 기후 변화로 그들이 농경을 발전시키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BC 10,200-8800년에 레반트에 농경 공동체가 생겨나고 소아시아, 북아프리카와 북메소포타미아로 퍼졌다. 메소포타미아는 약 BC 10,000년경 신석기혁명의 가장 초기의 발달 지역이다.

 

초기 신석기시대 농경은 야생종이나 재배종 둘 다 외알밀, 기장, 스펠트밀을 포함한 좁은 범위의 식물과 개, , 염소의 보유로 제한되어 있었다.  BC 6900-6400년경에는 소와 돼지를 기르고 영구적이고 또는 계절적인 정착촌이 세워지고 도자기를 사용하였다.

 

신석기시대의 이러한 모든 문화적 요소가 같은 순서로 어디나 나타나지는 않았다. 근동의 초기 농경사회는 도자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아프리카,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와 같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독립적인 길들이는 행적이 유럽과 서남아시아와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그들만의 지역 특유의 신석기문화로 이어졌다. 초기 일본 사회와 다른 동아시아 문화는 농업을 발전시키기 전에 도자기를 사용하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번역은 구글 번역임.

https://en.wikipedia.org/wiki/Neolithic)

 

〈위키백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신석기 시대(新石器時代, The Neolithic Age)는 석기 시대 후기로, 돌을 갈아 만든 간석기와 질그릇(토기)을 도구로 사용하여 식량 생산 단계에 이른 시대를 말한다. 인류사회는 구석기시대의 채집 경제로부터 신석기 시대의 생산경제로 발전하는데 이러한 생산 경제로의 전환은 인류 문화사상 하나의 전기를 가져온 사건이다. 때문에 이러한 전환을 신석기 혁명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비약을 가져온 이유의 하나로서 기후의 변화를 들 수가 있는데, 그것은 플라이스토세 빙하기(氷河期)가 끝나고 홀로세에 들어오면서 오늘날과 같은 기후로 변해 농업 생산에 적합한 시기에 돌입했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이른 신석기문화는 팔레스티나의 예리코(Jericho)와 이라크의 자르모(Jarmo)이다. 이들 중동의 문화는 석기 시대의 말기인 기원전 9600~9500년 전에 시작되었으며, 홀로세의 아구석기의 시대가 끝나고 따라오는 시대이다

 

신석기 시대 대부분 사람들은 부족과 씨족으로 구성된 150명에서 2000명 정도 되는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대부분의 신석기 사회에서는 계층화가 진행된 과학적인 근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회 계층화는 청동기 시대와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후기 신석기의 어떤 사회에서는 고대 하와이인들과 같이 폴리네시아 사회와 유사한 복합적으로 계층화된 지도계층을 형성하지만, 대부분의 신석기 사회는 상대적으로 단순하면서 평등하였다. 그러나 신석기 사회는 보통 수렵과 채집 생활을 선행하기 때문에, 구석기보다는 더 계층적인 사회였다. 기원전 8000년경의 동물의 가축화는 급격한 사회적인 불평등을 초래하였다. 가축을 소유한다는 것은 경쟁력을 의미하였고, 부의 불평등을 전승하는 결과를 나타내었다. 대규모의 가축을 소유하게 된 신석기의 목자들은 점차 보다 많은 가축을 소유하게 되었고, 이것이 경제적인 불평등을 더욱 더 심화시켰다.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C%84%9D%EA%B8%B0_%EC%8B%9C%EB%8C%80)

 

1.1.1 농경과 가축사육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농업은 세계 각지에서 독립적으로 시작되었고 11개의 지역이 독립적인 원산지 중심지로 포함되었다. 인류는 BC 20,000년부터 야생곡물을 채집하여 먹었다. BC 9500년부터 레반트에서 8개의 신석기시대 창립자 작물인 에머밀, 외알밀, 겉보리, 완두콩, 렌즈콩, 살갈퀴(야생완두), 병아리 완두콩, 아마를 재배하였다. 호밀도 일찍 재배하였는데 논란의 여지가 있다. 쌀은 BC 5700년 또는 BC 6200년에 중국에서 재배되었고 뒤이어 녹두, , 팥도 재배되었다. 사탕수수와 일부 뿌리채소는 BC 7000년경 뉴기니에서 재배되었고, 사탕수수는 또한 아프리카 사헬지역에서 BC5000년에 재배되었다. 감자는 콩, 코카, 라마와 함께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에서 BC 8000년에서 BC 5000년 사이에 재배되었다. 메소아메리카에서 BC 4000년까지 야생 테오신트가 옥수수로 길들여졌다. 면화는 페루에서 BC 3600에 재배되었다.

돼지는 BC11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길들여졌고, 양은 BC 11000년에서 BC 9000년 사이에 길들여졌다. BC 8500년경 터키와 파키스탄 지역에서 야생 오로치가 소로 길들여졌다. 낙타는 BC 3000년경에 길들여졌다.(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agriculture)

 

 

 

 

바빌로프의 원산지 중심지;(1)멕시코-과테말라, (2)페루-에콰도르-볼리비아, (2A)칠레 남부, (2B)파라과이-브라질 남부, (3)지중해, (4)근동, (5)에티오피아, (6)중앙아시아, (7)인도-버마, (7A)시암-말라야-자바, (8)중국과 한국.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Center_of_origin)

Area 3 (회색)은 더 이상 원산지 중심지로 인정되지 않고, 파푸아 뉴기니(빨강, 'P')는 최근에 인정되었다.(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agriculture)

 

1.1.2 토기의 발명

동아시아에서는 농경보다는 토기가 먼저 사용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세계 최초로 토기가 발명되었다.

 

 

2012년 중국 장시성 완안현 셴런둥(仙人洞) 동굴유적에서 발견된 2만 년 전 토기 파편(18,000 BC)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Pottery#History)

 

 

 

1998년 일본 북부 도호쿠 지방의 아오모리현 소토가하마시 오다이 야마모토 I 유적에서 발견된 16,5000년 전(BC 14,500년경) 46점의 토기 파편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J%C5%8Dmon_pottery)

 

 

 

아무르강 하류 가샤유적에서 발견된 15,000년 전(B.C.1 3000)의 토기편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3&aid=0000219858)

 

 

 

1992~1998년 발굴조사한 한국 제주도 고산리유적에서 발견된 10,000년 전 고산리식토기 파편

(출처;

https://jeju.museum.go.kr/_prog/collection/index.php?mng_no=7&mode=V&menu_dvs_cd=)

 

 

 

(출처; http://gosanriyujeok.co.kr/earthenware)

 

 

1.2 동아시아 신석기문화

1.2.1 러시아 극동의 신석기문화(Russia 極東 新石器文化)

러시아 극동의 신석기문화는 아무르 강 하류역, 연해주, 사할린으로 구분해서 설명한다. 아무르 강 유역은 아무르 강 중류와 하류로 나누어지는데, 아무르 강 하류의 연구가 비교적 자세하게 진행되고 있다.

 

아무르 강 하류에는 최근 새롭게 분리된 마린스카야문화를 비롯해서 오시포브카문화, 말리셰보문화, 콘돈문화, 보즈네세노브카문화 등이 있다. 특히 1990년대부터 원시고토기가 출토되면서 후기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출현 문제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하바롭스크 가샤유적을 대표로 하는 오시포브카문화가 가장 빨라 기원전 15,0009000년 사이에, 가장 늦은 보즈네세노브카문화는 기원전 30001500년경에 해당된다.

 

아무르 강 중류는 현재까지 노보페트로브카문화, 그로마투하문화, 오시노오제로문화 등이 있다. 노보페트로브카문화와 그로마투하문화가 거의 비슷한 시기로 기원전 9000년을 상회하며, 오시노오제로문화가 기원전 3000년경으로 가장 늦다. 아무르 강 중류에는 아직까지 신석기시대 연구가 부족하다.

 

연해주의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10,000년경부터 고토기가 출토되는 우스티노브카3유적이 가장 이르다. 이 단계는 아무르 강 유역처럼 아직 고고문화로는 분리되지 않았다. 이를 뒤따르는 신석기문화는 토기문양을 기준으로 3개의 문화로 크게 나누고, 그 문화의 하부단위로 유형들을 분리하고 있다. 루드나야문화는 2개의 유형, 보이스만문화는 6단계(유형), 자이사노브카문화는 3유형으로 나누어진다. 그 외에 아직 특정한 고고문화로는 나누어지지 않았지만 상기한 문화와는 차이가 있는 유형으로서 베트카유형이 있다. 루드나야문화는 기원전 7000년대 후반6000년대, 보이스만문화는 기원전 60004000년대 전반으로 편년된다. 베트카유형은 최근 새로이 베트카2유적을 발굴해서 분리되었다. 연대는 기원전 5000년경으로 보이스만문화의 2단계와 병행하고, 토기 특징으로는 1단계와 유사하다. 자이사노브카문화는 연해주의 마지막 신석기단계로 이른 시기에는 승선문기법의 토기와 압인점선문, 늦은 시기에는 침선문토기가 유행한다. 지역에 따라 두만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자이사노브카유형과 한카호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또한 자이사노브카문화의 범위를 목단강유역까지 넓혀서 목단강유형을 추가하기도 한다. 이 문화는 기원전 40001500년으로 편년된다.

 

사할린의 신석기시대 시작 단계는 후기 구석기시대 연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장 이른 시기의 문화는 후기 구석기시대 최말기의 소콜, 타코예2, 임친1 유적 등이 있는데, 세석인문화를 계승하는 문화상을 보여준다. 전기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5000년대 전반의 임친2유적으로 대표된다. 후기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노글리카2·4, 스타로둡스코예2 유적에서는 평저토기와 첨저토기가 같이 출토되었다. 토기에는 빗살문, 승석문, 사선문 등이 시문되어 조몬문화와의 관련성을 상정하는 견해도 있다. 사할린 신석기문화는 태평양 일대 오호츠크문화, 캄차카반도까지 넓게 퍼져 있으며 모두 러시아 극동의 신석기문화에 포함된다.(김재윤)

(출처;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718)

 

1,2,2 중국의 신석기문화

중국의 신석기문화는 서고동저라는 중국 대륙의 지형과 다양한 자연환경에 의해 지역적인 차이가 많다. 이를 크게 북방지구(北方地區), 황하유역(黃河流域), 장강유역(長江流域), 화남지구(華南地區) 4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반도와 관련되는 중국 북방지구의 신석기문화는 요하유역에 흥륭와(興隆窪), 조보구(趙寶溝), 부하(富河), 홍산(紅山), 소하연(小河沿) 문화가 존재하고 있다.

 

흥륭와문화는 내몽고 흥륭와유적을 기반으로 하며, 시기는 기원전 62005400년 사이에 해당한다. 중국 최고의 취락유적이 조사되었으며, 토기는 자문의 통형관(筒形罐)이 확인되고 있다.

 

조보구문화는 기하문의 토기가 유행하며, 일부의 토기에는 동물도형이 시문되기도 한다. 석기는 정교하게 만든 돌보습이 특징적이다.

 

부하문화의 주거지는 장방형에 속하고 내부에 위석노지(圍石爐址)가 있으며, 수렵과 농경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홍산문화는 원시농경, 유목, 어업, 수렵 등 다양한 생업활동이 진행되었다. 토기는 홍색 바탕에 흑색문양의 채도가 있으며, 옥벽(玉壁), 옥환(玉環) 등 정교하고 다양한 옥기(玉器)가 출토된다. 여신묘, 적석총 같은 대형 제사유적이 중심이 되고 있기도 하다.

 

송화강유역에서는 신개류(新開流), 앙앙계(昻昻溪) 문화가 존재한다. 앙앙계문화와 신개류문화는 세석기(細石器)를 중심으로 한 문화이며, 주로 어로에 종사한 흔적이 보인다.

 

흑룡강성에서 길림성의 서부에 걸친 사구지대에서는 세석기를 주류로 하는 유목문화가 번성하였으며, 길림성의 중부지역에는 농경문화, 길림성 동부지역에는 농경을 기본으로 하면서 수렵도 이루어졌다.

 

요동반도에는 신락하층(新樂下層)문화와 소주산하층(小珠山下層)문화가 존재한다. 신락하층, 소주산하층 문화에서는 한반도와 관련되는 자문토기가 출토되어 비교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황하유역에서는 노관대(老官臺), 자산(磁山), 배리강(裴李崗), 북신(北辛), 앙소(仰韶), 용산(龍山) 문화가 형성되었다.

노관대문화는 위수유역과 단강상류에 위치하며, , 수수를 비롯한 농경문화가 이루어졌다. 도기(陶器)는 홍도가 주류를 이루며, 규칙적인 배열의 묘지와 제사유구도 보이고 있다.

 

자산과 배리강 문화는 중원지구에 있으며, 이곳은 강수량이 많아 농경에 좋은 환경조건을 갖추고 있다. 토기는 승석문(繩蓆文)토기, 채도(彩陶), 양이부호(兩耳附壺) 등이 출토되며, 빗살문이 있는 토기나 양이부호는 중국 동부와 한반도에서도 보이는 유물이다.

 

북신문화는 산동성 남부에서 강소성 북부에 분포한다. 자산과 배리강 문화의 초기문명이 황하를 따라 동진하면서 산동성으로 들어와 북신문화가 생성되고, 그 후 대문구(大汶口)문화, 앙소문화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앙소문화는 하남성, 산서성, 협서성에 분포하고 있으며, 토기는 승고문(繩叩文)을 거칠게 새긴 도기와 채도가 있다. 돌보습, 괭이의 농경구로 곡물을 재배하고, 이를 수확하는 돌칼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용산문화는 농경기술의 진보가 엿보이며, 토기는 흑도가 등장하고 토기제작의 전업화가 이루어진다. 대략 앙소문화는 기원전 60005000, 용산문화는 기원전 4000년 전후의 연대를 보이고 있다. 산동성에는 용산문화에 앞서는 대문구(大汶口)문화가 존재하며, 일찍이 앙소문화와도 교류가 이루어졌다.

 

황하의 상류에서는 앙소문화의 영향을 받은 마가요(馬家窯)문화, 용산문화와 관련된 제가(齊家)문화가 존재하였다. 이 지역은 채도가 유행하며, 농경과 목축을 기반으로 문화가 번성하였다.

 

장강유역의 신석기문화는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장강 중류역에는 팽두산(彭頭山), 대계(大溪), 굴가령(屈家嶺), 석가하(石家河) 문화, 장강 하류역에는 하모도(河姆渡), 마가빈(馬家浜), 청련강(靑蓮岡), 숭택(崧澤), 양저(良渚) 문화 등이 존재한다.

 

팽두산문화는 절강 하모도유적보다 이른 시기에 중국 최고의 야생벼가 재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토기는 원저의 심발, , 사발에 승석문이 주류이며, 석기는 돌도끼, 갈돌, 원반형석기, 긁개, 찍개 등이 보인다.

 

대계문화는 장강 중류역과 한수유역의 문화이며, 앙소문화와도 접촉한다. 환호(環濠)가 만들어지며, 벽돌을 사용하여 주거가 만들어져 취락이 형성된다. 또한 수리시설을 이용하여 도작농경이 정착되었다. 토기는 홍도가 주류이며 취사, 저장, 식기 등이 셋트로 제작된다.

 

굴가령문화는 호북성 서북부와 장강 남안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황하유역의 앙소문화와 용산문화의 중간 시기에 해당한다.

 

하모도문화는 장강 하류역에서는 가장 빠른 시기의 하모도유적으로 대표된다. 이 유적에서는 목조건축 유물과 목기, 골각기, 대량의 벼가 발견되고 있다. 토기는 흑도가 주류이며, 골제 농경구로 벼농사를 짓고, 농경취락이 형성되었다. 또한 개, 돼지, 양 등의 가축을 길렀으며, 수렵과 어로에도 종사하였다. 특히 하모도유적의 도작농경은 장강유역에 확대되어, 절강성의 마가빈문화, 강소성과 안휘성(安徽省)에 이르는 청련강문화, 북부의 양저문화, 호북성에서 하남성 남부의 굴가령문화기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화남지구에는 광동성의 독석자(獨石仔), 서초산(西樵山) 유적, 광서성에는 백련동(白蓮洞), 보적암(寶積岩), 증피암(甑皮岩) 유적 등이 분포한다.

 

독석자유적에서는 빠른 시기의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상층이 기원전 13,000년 정도의 연대가 나왔다. 생업에 있어서 어로, 채집, 수렵에 종사하며, 초기농경이 이루어졌다. 이 지역의 토기는 기하학적인 인문(印文)을 시문하는 인문도(印文陶)가 출토되고 있으며, 석기는 첨상기(尖狀器), 모룻돌, 돌도끼, 찍개 등이 있다.

 

이와 같이 중국의 신석기문화는 초기부터 농경과 가축의 사육에 의한 문화가 지속되었으며, 농경과 관련하여 다양한 형태의 농경구가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다.

 

농경의 작물은 자연환경의 차이에 따라 황하유역과 장강유역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황하유역에서는 조, , 수수 등의 곡물농경이 주류를 이루며, 장강유역에서는 주로 벼농사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정주생활이 시작되면서 취락을 이룬 마을이 생겨나며 개, 돼지, , 양 등의 가축을 사육하였다. 농경의 진전과 함께 각종 생산도구가 제작되었으며, 저장, 취사, 제사에 사용되는 다양한 토기와 장신구로 활용된 정교한 옥기가 제작되기도 하였다.(이상균)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285)

 

1.2.3 일본 신석기문화(日本 新石器文化)

일본 신석기문화(日本 新石器文化) : 일본의 신석기문화에 대한 이해는 한국에서 전개되어간 신석기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한국 남해안 등지와 자주 교역한 증거가 나타나며 지역적으로 가깝다보니 제 문화요소 및 문화양상들도 비슷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매우 독특한 신석기문화의 발전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신석기문화라는 말 대신에 죠몽(繩文)기라는 용어를 변함없이 사용하고 있으며 죠몽토기는 지구상에서 가장 일찍 출현한 토기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죠몽의 초창기는 한랭한 최종 빙하기에서 조금씩 후빙기로 향하는 과도기 단계이며, 방사성탄소연대에 의하면 13000~10000 B.P.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대형 돌창이나 도끼 등 대륙 석기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석기군의 출현을 특징으로 한다. 이를 전후하여 죠몽문화의 특징적인 도구인 돌화살촉이나 토기도 출현한다.

 

조기 단계는 관동지방의 토기편년에서 말하는 撚文系土器群 貝殼沈線文系土器群 貝殼條痕文系土器群의 시기로 방사성탄소연대로는 10000~6000 B.P.에 해당한다. 조기 단계가 시작되는 10000년 전 무렵 세계적으로 기후가 따뜻해지기 시작하는데, 일본 최고의 조개무지인 神奈川縣 夏島 조개무지나 千葉縣 西之城 조개무지가 이 시기에 형성되고 후빙기의 환경변화에 대응한 본격적인 수산자원의 이용이 개시된다. 식물채집 가공구인 뗀도끼, 갈돌, 공이 등이 생산용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뼈낚싯바늘과 작살형의 자돌구(刺突具)가 나타나는 것도 이 시기부터이다. 토기는 대부분 깊은바리모양(深鉢形)으로서 초창기 단계와 근본적인 변화가 없으나 그릇의 크기와 장식상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입술부분이 벌어지고 끝이 뾰족한 토기가 대부분인데, 서일본에는 일부 납작밑 토기도 확인되며, 조기 후반에는 구연부가 파상으로 된 자형이나 입술 아래 부분에 단이 져 있다든지 목이 잘록하다든지 하는 변화가 나타난다. 그리고 이 단계에 수렵·어로·식물채집이라고 하는 생업활동의 수단이 본격적으로 확립되면서 연중 계절적 변화에 따른 식료획득이 용이하게 되어 본격적인 정주생활이 시작된다.

 

전기 단계는 조기 단계의 토기 형태가 둥근밑(丸底)에서 납작밑(平底)으로 일반화되고 문양이 다승문(多繩文)으로 변화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방사성탄소연대에 의하면 6000~5000 B.P.에 해당한다. 전기 전반은 전신세의 최온난기에 해당하고 해수면 상승도 최고조에 달한다. 일본 각지의 해안가에서는 조개무지(貝塚)의 형성이 본격화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어로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온난한 기후환경에 따른 안정된 식료자원을 배경으로 이 단계 이후 정형적(定型的)인 대규모 취락이 형성되며, 취락의 내부나 인접지에 집단무덤이 형성되고 있다. 간도끼나 목공기술의 발달에 의하여 여러 가지 목제품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특히 칠()기술이 발달하여 실용품에서 장식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칠기가 나타나고 있다. 전기 말에는 얕은 바리나 목단지도 등장하는 등 그릇의 형태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으며, 동북지방에서는 대형의 원통모양 토기가 많이 만들어진다.

 

중기 단계는 죠몽토기 중에서도 가장 입체적인 조형문양이 발달한 점이 특징이다. 특히 관동 중부지방의 勝坂式土器나 호꾸리꾸지방의 馬高式土器(火焰土器)라 불리고 있는 일군의 토기는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용기 자체보다 덧붙인 장식적 돌기가 더 큰 토기도 출현한다. 방사성탄소연대로는 5000~4000 B.P.의 연대에 해당하며, 중부 일본에서는 토기의 기능분화가 현저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중부 일본에서는 기종이 다양해지는 반면 동북 이북이나 서남 일본에서는 여전히 심발형이 기본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시기의 생산용구는 식물채집도구 및 가공구인 뗀도끼, 갈돌, 공이 등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식물채집 가공구가 생산용구의 주체를 점하게 되었음이 명확시되고 있다. 식물자원을 고도로 이용하는 생업형태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안정된 식료자원의 공급이 보장되어, 중부 관동 동북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죠몽문화의 최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관동지방의 武藏野 대지는 중 소하천 유역 평균 3~4사이에 중기 단계의 취락 유적이 분포하는데, 이것은 평균적인 죠몽인의 행동범위라 생각되는 5의 수치에 비교하면 폭발적이라 할 수 있는 취락의 증가와 팽창을 나타내는 것이다.

 

후기 단계는 대략 4000~3000 B.P.에 해당하는데, 기후가 한랭하고 습윤한 환경으로 변화하여 육상 식물에 큰 피해를 가져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기는 堀之內式에서 加曾利B에서와 같이 마소승문(磨消繩文)의 발달이라고 하는 공통점을 가진 토기군이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 또한 동일본에서는 기벽이 얇고 정교한 토기가 만들어지는데, 기형변화가 비약적으로 증대하고 심발(深鉢), 천발(淺鉢) 등이 나타남은 물론 귀때토기, 표수토기(釣手土器), 고배, 향로형토기, 목단지들과 함께 쌍구(?)토기 등의 각종 이형(異形)토기도 출현한다. 후기 후반의 구주(九州)지방에서는 마소승문 수법은 점차 모습을 감추고 만기(晩期)에 일반화하는 흑색마연토기가 등장한다.

 

이 시기에 있어서 주목되는 것은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라 중부?관동의 내륙부에, 중기에 폭발적으로 증가한 인구로 인해 식료자원이 부족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동일본의 태평양 연안지역에서는 적극적으로 어업자원을 개발하고 관동지방에서는 내만성 어로를 발달시켜 대규모 조개무지가 형성되고 있다. 쿠로시오해류(黑潮)와 친조(親潮)가 교차하는 해역을 가진 동북지방에는 주술적?제사적 유물이 풍부하게 만들어지고 환상석렬(環狀石列)이나 환상토리, 환상성토 유구 등 대규모의 제사유구도 등장하고 있다. 한편 서일본에서는 중기 단계의 폭발적인 인구증가는 확인되지 않으며, 동일본에서의 기후 악화와는 달리 비교적 변화가 없는 추이를 보인다.

 

만기 단계는 3000~2400 B.P.의 연대에 해당하며, 풍부한 기종과 장식성을 특징으로 하는 카메가오카()式系 토기군과, 천발과 심발이라고 하는 단순한 기종 그리고 장식성을 배제한 서일본의 돌대문(突帶文)계 토기군이 일본열도를 크게 구분하며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중간에 위치하는 관동지방에서는 만기 전반까지 안쿄우(安行)式系 토기군이 지역색을 뚜렷이 나타내며 분포하는데, 후반에 들어오면서 관동지방의 독자적인 지역색은 점차 없어진다. 만기의 동북지방에는 후기 단계의 외양성 어로를 보다 발전시킴과 아울러 연어?송어 등 하천어업을 최대한 활용하였으며, 이것을 기초로 죠몽문화의 극치를 나타내는 카메가오카()문화가 전개되고 있다. 각종 어로구는 카메가오카()문화에 최고도로 발전하고 토우(土偶), 암판(岩版), 석봉(石捧) 등 주술적?제사 유물의 다채로움이 더해지면서 극히 뛰어난 칠기가 제작되는 등 그 내용의 풍부하다.

 

만기 단계의 구주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서일본에서는 식물채취 가공구인 굴지구, 갈돌 등의 출토 예가 증가하고, 특히 굴지구에 수확도구로 추정되는 석기가 세트로 등장하고 있어 만기 전반에는 이미 재배식물의 이용이 진전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한국으로부터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는 논농사기술도 등장하게 된다.

 

1.2.4 한국의 신석기문화

한국의 신석기시대도 먼저 토기가 출현하고, 농경의 시작이 다소 늦다는 점에서 동북아시아 전체의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그 시작에 대해서는 현재 제주 고산리·서귀포 강정동 유적 등을 중심으로 고산리식토기 등의 고식토기와 함께 구석기 제작수법이 남아있는 돌날·좀돌날 및 좀돌날몸돌·양면조정 찌르개 등이 공반되어 출현함이 알려졌다. 요약하면 좀돌날+양면석기+고토기의 존재를 한국 신석기의 시원이라고 보는 것이며, 방사성탄소연대(AMS)로는 대략 10,000년 전으로 측정되어 초창기 신석기문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장차 조흔문(條痕文)토기 또는 유기물의 흔적이 남아있는 토기 및 공반 유물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연구가 필요하다. 한반도에서 발달된 신석기문화는 서북지역·동북지역·동해안지역·서해중부지역·남부 내륙지역·남해안지역 등 지역에 따른 문화발달상의 차이가 있으나 고산리식 토기문화를 초창기로 하여 조기·전기·중기·후기의 4단계 발전과정을 거쳤다고 본다.

 

신석기시대 조기문화

 

기원전 6000년 무렵부터 시작되며, 유적은 주로 남해안과 동해안지역에서 확인된다. 남해안지역의 유적은 대부분 조개더미[貝塚]로 나타나는데 부산 동삼동·범방·북정, 여수 돌산 송도 패총, 울산 신암리, 통영 욕지도·연대도·상노대도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동해안지역에서는 양양 오산리, 고성 문암리 유적 등이 널리 알려졌다.

 

북한에서는 종래 동북지역의 나선 서포항유적과 서북지역의 의주 미송리 유적을 기원전 6000년 기에 해당하는 신석기문화 시기로 보아왔으나, 최근에는 서포항유적 1기문화층을 러시아 연해주지역의 보이스만문화와 대비하여 신석기시대 전기 말 내지 신석기시대 중기로 보는 관점이 우세하므로 앞으로의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미송리 동굴유적에서는 자문토기 2편과 새김무늬, 화살촉 반제품, 뼈송곳 3점 등이 확인되었다.

 

남해안지역의 신석기시대 초기에는 덧무늬토기[隆起文土器]에 포함되는 토기들과 찌르개·화살촉 등 사냥용 석기, 찍개·긁개·밀개 등 조리 및 일반용구도 갖추어져 나오며 작살·그물추·묶음(결합식)낚싯바늘 등 어로구도 나온다. 다만 이른 시기에는 아직 어구(漁具)는 많지 않다. 일반 뼈연모로서 섬세한 뼈바늘·뼈송곳·삿바늘·긁개·밀개·찌르개 등도 많이 만들어졌다.

 

동해안의 오산리유적에서는 원형의 주거지가 10여 기 확인되었다. 토기들은 입술 가까이부터 34줄 정도 시문한 것이 가장 많은데 이것들을 오산리식토기라고 한다. 납작밑에 무늬 없는 토기들도 많다. 돌칼·화살촉·석창·묶음낚싯바늘·돌톱·추모양 석기·그물추·숫돌·갈돌·찍개·긁개 등의 석기들이 출토되었으며 묶음낚싯바늘의 허리부분이 많이 출토되었다. ()형석기(3.37 정도, 긴 것은 10 이상)는 줄을 매는 홈이 있고 전면이 갈려 있다. 최근에는 오산리 C지구 발굴 결과 오산리식토기 하층에서 압날점열구획문의 적색마연토기와 무문토기 등이 나와 시기를 더 올려보는 논의도 시작되었다. 이로 볼 때 초기 신석기문화 요소들은 대개 덧무늬·민무늬·찍은무늬·납작밑 토기, 다양한 뗀석기, 일부(주로 날 부분)만 마연한 석기, 다양한 뼈도구 등으로 종합된다. 초기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사냥, 채집, 어로구를 주로 하면서 살아간 것으로 보인다. 사냥의 주 대상은 사슴과(Cervidae)와 멧돼지이며 고래·바다사자·돌고래 등의 큰 바다짐승도 잡았던 것으로 나타나지만 아직 물고기와 조가비가 다양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창녕 비봉리유적에서는 배의 존재도 확인되었는데, 바다살림과 더불어 교역활동의 증거가 되는 중요 유물이다.

 

신석기시대 전기문화

 

기원전 4500년 무렵부터 3500년 무렵까지 지속되는 문화로서 압인(壓印압날(押捺자돌(刺突) 등의 찍은 무늬와 자돌문 토기들이 유행하는 시기이다. 토기는 입술 및 그 가까운 부분에 짧은 횡주어골문(橫走魚骨文)이나 빗살무늬[斜線列文]를 찍거나 누른 종류가 대표되며 이러한 시문방식이 사용되는 시기를 부산기 또는 영선동식토기단계라고도 한다. 대체로 무늬들이 매우 작고 미세하며 따라서 그릇의 두께도 얇은 경우가 많다. 토기는 목이 생기거나 손잡이가 붙는 경우가 많다. 이 무렵은 기후가 무척 따뜻했다고 추정되며 이러한 환경변화에 따라 전기의 살림살이도 이전과 많이 달라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뗀석기의 비중은 줄어드나 석기의 종류는 다양해져 타제의 돌도끼·자귀·화살촉 등이 나타나며 뼈로 만든 어로구(낚시·작살 등), 생활용구 등이 나온다. 이 시기에는 물고기와 조개종류 등 자연유물의 출토가 매우 늘어나는데, 이는 어로구의 증가와 일치하는 현상이다.

 

남해안지방에서는 전기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한곳에서 지속적으로 살았던 흔적이 나타난다. 이 무렵에는 여러 곳에서 주거지가 찾아짐은 물론, 연대도유적에서는 처음으로 집단무덤이 나와 중요성을 갖는다. 무덤은 대개 구덩을 파고 큼직한 냇돌[川石] 등을 깐 뒤, 주검을 놓고 그 위를 작은 돌, 고운 흙과 토기조각 등의 유물로 덮은 형식이다. 펴묻기[伸展葬]나 엎드려묻기[俯身葬]가 있다. 합장의 풍습도 보여준다. 무덤은 당시의 사회구조나 장례풍습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많고, 형질인류학적 연구자료로도 기여할 바가 크다.

 

동해안에서 오산리식토기는 몸체가 줄어들며 바닥이 상대적으로 넓어져 안정감을 주게 되었으며, 목단지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여준다. 석기들은 묶음낚시바늘·돌칼·추모양 석기들이 나와 이전과 거의 같다.

 

전기 후반 무렵부터는 서해중부지방의 유적들이 많아진다. 이 무렵에는 전형의 뾰족밑 빗살무늬토기가 만들어져 유명한데 평안남도 온천 궁산리와 황해도 봉산 지탑리, 한강유역의 서울 암사동, 하남 미사리 유적 등의 주거지가 잘 알려져 있다. 이곳의 주거지들은 평면이 대개 원형 내지는 말각방형이다. 중부 내륙지방에서 보자면 동굴이나 바위그늘이 주거지 대용으로 여전히 사용되기도 하였다.

 

궁산, 지탑리, 암사동, 단양 상시 유적에서는 석기가 많이 출토되었다. 간화살촉이 많이 나오며 버들잎모양의 긴 화살촉 같은 찔개살도 많이 출토된다. 서해안지방에서는 물고기잡이 도구로 특히 이러한 찔개살을 많이 사용하였던 것 같고 이와 함께 납작한 자갈돌의 양면이나 네 면을 쪼아 만드는 그물추도 많이 나왔다. 돌도끼는 날 부분만 간 네모도끼[四稜斧] 위주이나 단면이 렌즈모양의 편평도끼도 보인다. 그리고 대패날··자귀·창끝·마치·크고 작은 숫돌과 찰절구(擦切具닦음돌·발화석 등 종류가 다양하며 주거지 안에서 석재를 같은 크기로 잘라놓은 반제품도 보인다. 갈돌·갈판 세트도 많이 나오는데 이들은 지탑리유적 2지구의 보습과 낫, 금탄리유적의 괭이·보습, 암사동유적의 괭이·돌낫·보습 등과 함께 농사짓기로 인한 곡물가공의 의존도가 높았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탑리와 봉산 마산리 유적에서는 탄화된 좁쌀이 나오기도 하였다. 뼈연모는 궁산유적과 상시유적에서 나왔다. 궁산에서는 뼈송곳(찌르개)과 예새가 가장 많이 나왔는데 짐승의 해체나 조리에도 많이 쓰였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슴뿔로 된 뿔괭이와 뒤지개 등 농사도구가 나온 것이다. 또 산돼지의 송곳니로 만든 낫 6점과 함께 칼·삿바늘·베실이 꿰여 있는 뼈바늘과 짐승뼈 반제품도 나와 아기자기한 신석기시대 살림을 잘 보여준다. 상시유적에는 찌르개·송곳·창끝·긁개·밀개·째개 등의 뼈연모가 있고 자라의 배 밑판을 이용하여 구멍을 뚫고 만든 치레걸이, 투박조개 팔찌 등이 나왔다. 투박조개는 원래 남동해안이 산지인데 내륙지방에서 전복 등의 바다조개와 함께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남동해안지방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신석기 전기 후반에는 남해안지방이나 서해중부지방 모두에서 유물들이 양적·질적으로 확대되며 무덤도 나타나 붙박이 살림이 궤도에 올랐다고 하겠다.

 

신석기시대 중기문화

 

기원전 4000년대 후반부터 출현하는데 남해안지방에서는 굵은 빗살무늬라고 할 수 있는 태선침선문(太線深線文 : 수가리식토기)을 베푼 토기들이 주로 나오는 시기이다. 토기는 대형화되며 다양한 생김새의 그릇들이 출현한다. 한국의 전 지역에서 이 시기의 흔적이 있어 신석기 중기문화의 확산을 알 수 있다. 반면 신석기시대 중기의 흔적이 곳에 따라 나타나지 않은 경우도 있다. 통영 상노대도 상리유적의 경우 신석기 초기 전기 후()기의 자취는 강하나 중기는 빠져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당시에 최고조에 달한 해수면상승으로 사람들이 활동장소를 옮겨갔거나 농사짓기를 비롯한 내륙 자원을 중시하게 됨에 따라 패총 형성이 급감한데서 비롯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삼동패총에서 보자면 어로가 늘어나면서 동시에 짐승사냥의 증거도 늘어나 살림의 증가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석기와 뼈도구의 출토 양상에서 확인된다. 즉 타제석부와 장대형 도끼의 등장, 갈돌·갈판의 증가 등 석기의 대형화, 다양화와 함께 뼈도구가 다양화되고 작살 등 각종 찌르개가 정형화되는 현상과도 관련된다. 더구나 좁쌀의 재배가 전국적으로 나타나 농사짓기의 확대현상을 볼 수 있다. 동삼동패총의 투박조개 팔찌는 일본 규슈산 흑요석의 존재와 함께 외부지역과의 교류사실과 특정제품을 전업적으로 생산하는 생업구조, 또 교역을 전담한 집단이 있었으리라는 추정 등 연구거리를 많이 제공하고 있다.

 

동해안의 오산리유적에서는 서해안지역계통의 뾰족밑 빗살무늬토기가 나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중부 내륙지방에서 보자면 단양 도담 금굴, 단양 상시3바위그늘, 영월 연당 쌍굴 유적 등에서 빗살무늬토기, 석기 등이 확인되고 있어 당시까지도 동굴이 사람들의 활동지로 쓰였음을 보여준다.

 

신석기시대 중기문화가 가장 압도적인 곳은 서해중부지역으로서 유명한 궁산, 지탑리, 암사동 유적 등 이외에도 2000년대 들어 용인 농서리, 시흥 능곡동, 안산 신길동, 인천 영종도 중산동·운서동 유적 등에서 신석기시대의 대규모 취락이 잇달아 발굴되고 있으며 때로는 50여 기 이상의 주거지들이 밀집됨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신석기시대 중기 생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조와 기장을 중심한 농사짓기 활동이다. 현재까지 약 10개 유적에서 탄화곡물이 나타났으며 대략 기원전 3500년 무렵부터 농사짓기가 전국으로 확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 후기문화

 

남해안지방에서는 매우 특징 있게 생긴 겹입술(이중구연)토기가 만들어진다. 입술부분을 한 겹 덧대어 이중으로 만든 것인데, 모래질이 매우 많이 포함된 흙으로 만들어 단단하고 사각거리며 크고 무겁고 검은 빛을 띤다. 겹입술토기는 남부지방에서 조사된 거의 모든 유적에서 확인되어 사람들이 널리 퍼져 살았던 시기임을 잘 보여준다.

 

겹입술토기만의 층으로 이루어진 단순유적들도 있는데 사천 구평리, 부산 금곡동 율리, 김해 농소리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금곡동 율리유적 바위그늘의 경우 사람들이 살기도 하였고 또 무덤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부산 수가리패총의 경우 태선문 시기는 짧으며 겹입술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수가리패총에서 보면 두터운 겹입술 아래에 띄엄띄엄 빗금무늬를 베풀었지만 점차 후기로 가면서 겹입술의 모양이 흐트러지며 구평리와 금곡동 율리 유적에서 보듯이 다시 홑입술에 가깝게 회귀하며 입술은 바라지고 무늬가 거의 베풀어지지 않게 된다. 즉 무문토기로 가고 있는 것이다. 후기의 하한은 수가리3문화층·금곡동 율리·상노대도2층 토기에서 측정된 방사성탄소연대로 보아 기원전 1500년 무렵에 해당한다.

 

이 무렵에 오면 남해안지방에서도 보습·괭이·다양한 간석기·갈돌과 갈판·주먹괭이 등 농사짓기와 관련되는 도구들이 자주 나타나서 살림살이가 전환되어 갔음을 유추하게 한다. 손잡이 아래가 옆으로 퍼져 어깨가 붙은 것처럼 보이며 대표적인 농사도구로 보이는 곰배괭이도 나온다. 또 새로운 유물로 대패날이 확인되었다. 이 무렵에 해당하는 함경북도 청진 농포동유적이나 무산 범의구석[虎谷洞]유적에서는 칼·찌르개·긁개·화살촉·여러 점의 돌날 등 흑요석 석기가 많이 나왔다. 후기의 뼈연모로는 활촉·창끝·멧돼지 이빨로 만든 칼·작살·낚시·찔개살·예새·송곳·바늘·고래뼈로 만든 노(뼈숟가락 등이 확인되었다. 이때부터 굽은 낚싯바늘도 많이 나오고 있다. 가장 늦은 시기가 되면 뼈바늘이 들어 있는 뼈바늘통·뿔괭이·조개껍질을 이용한 반달돌칼도 만들어졌다.

 

서해안지방에서 신석기시대 후기의 토기는 오이도·시도 등 서해도서지방 거의 전역에서 발견되어 사람들이 널리 퍼져 살았음을 보여준다. 토기는 시문(施文) 면적이 크게 줄어들어 주로 입술부분에만 무늬가 새겨지며, 이것도 매우 퇴화된 양식으로 되어 무늬가 거칠고 엉성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12줄의 빗금무늬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도 결국은 어골무늬가 해체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다른 지역의 후기 토기와 마찬가지로 무문화(無文化) 경향을 띄게 되는 것이다. 대동강유역의 대규모 주거지인 평양 남경유적에서는 공공건물인 31호주거지에서 탄화된 좁쌀과 함께 3000여 개의 그물추, 갈판 12개 등이 나와 신석기 말의 거창한 살림을 보여준다. 그릇의 무문화 경향으로 보아 다음 시기인 민무늬토기로의 점진적인 변이를 보여주는 시기이다.

 

신석기시대 후기의 토기들은 무문화 경향을 띄어가거나 남해안지방의 경우처럼 겹입술을 갖기도 하는데 후자에 대해 이른 무문토기의 하나인 겹입술의 팽이형토기[角形土器]와 관계있을 것으로 추정하거나 신석기·청동기의 전환기 또는 청동기시대의 이른 시기 토기로 보는 관점 등도 새로이 등장하고 있다.

 

생업을 중심한 신석기시대의 활동 이외에 신석기시대의 교역이나 관념형태 및 신앙, 제의 등의 활동도 중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창녕 비봉리유적에서 나온 배는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 전국에서 확인되는 결상이식(?狀耳飾흑요석기 등의 존재는 중국 동북지방, 러시아 연해주 및 아무르지역, 일본 등지와 한반도 신석기시대의 교역활동 정도와 범위가 매우 컸음을 보여준다. 남해안지방에서는 동삼동과 여수 안도를 비롯한 여러 조개더미유적에서 나온 투박조개와 조몬토기 등이 교역의 증거로 더해지고 있다.

 

신석기시대의 관념형태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예술품 및 치레걸이가 있다. 신석기시대 후기로 가면서 출토 예가 늘어나는데 서포항과 농포동 유적에서 출토된 것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울산 신암리의 흙으로 빚은 여성 조각과 부산 금곡동 율리의 흙으로 빚은 자안패 모양의 조각이 있다. 1980년대 이후 양양 오산리유적에서는 흙으로 빚은 사람 얼굴 조각품이 나오며, 동삼동에서는 사슴모양 그림을 새긴 토기들도 나왔다. 완도 여서도패총에서 나오는 골각기들은 다양하며 그 예술성도 서포항, 농포동 유적 못지않게 뛰어나다. 이러한 것들은 대체로 주거지보다는 무덤이나 조개더미 등에서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무덤유적이 확인된 곳은 신석기시대 조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연대도를 포함하여 약 20여 곳에 이른다. 특히 최근에는 여수 안도, 울진 처용리, 부산 가덕도 장항 유적 등에서 집단무덤이 발굴되고 있는데 펴묻기·엎어묻기·굽혀묻기 등 장법도 다양하며 투박조개를 장착한 채로 나온 시신의 예도 있다. 옥제 치레걸이, 일본과의 교류를 증거하는 조몬 토기 등도 출토된다. 무덤유적은 특히 당시의 장례를 중심으로 하는 의례관계와 생사관(生死觀), 사회구성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 신석기문화 연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이다.(신숙정)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000)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홍산문화와 공존한 한반도의 신석기문화 2〉

 

한반도는 토기의 특징에 따라서 대략 5개의 문화권으로 구분된다. 그 토기의 특징은 토기의 형태(기형)과 문양이다. 특히 큰 구분 기준이 되는 것은 그룻형태이다. 이에 따라 구분하면 그림과 같다.

 

압록강 유역, 중서부지역, 동북지역~영동지역, 남부내륙지역, 남해안지역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그림은 고정된 것은 아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변화가 있다. 가장 변화가 심한 지역은 영동지역이다. 대략 기원전 3500년 이후가 되면 중서부지역과 같은 문화권으로 변화한다. 또한 남부내륙지역과 중서부지역의 구분 문제에서도 필자는 생각이 좀 다르다.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압록강 유역, 동북지역~영동지역에서 출토되는 평저토기와 그 이남에서 보이는 비평저토기이다. 좀 더 자세하게는 중서부지역에서는 흔히들 이야기 되며 빗살무늬토기라고 하는 포탄형 모양의 빗살무늬토기와 남해안 지역의 원저토기가 중심이라고 한다. 하지만 남해안의 토기도 바닥이 뾰족한 토기들이 있어서 단정적으로 원저토기가 중심이라고만 할 수 없다. 따라서 가장 큰 구분은 평저토기문화권과 비평저토기문화권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반도 신석기문화의 토기를 이야기 할 때는 압록강 유역, 두만강 유역, 중서부지역, 남부지역으로 구분한다.』

(출처;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https://eastsearoad.tistory.com/119)

 

 

 

한반도 토기의 지역 구분(한국고고학 강의, 한국고고학회 2007)

(출처;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https://eastsearoad.tistory.com/119)

 

김재윤은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김재윤 2017, 접경의 아이덴티티: 동해와 신석기문화〉에서 평저문화권을 제기하였다.

 

『필자는 한반도 동해안의 유적에서 확인되는 평저토기가 동해안의 북부인 연해주와 더 나아가 아무르강 하류와도 관련성을 제기하였다. 결국 기온변화에 따라서 동해안을 따라서 이동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고(김재윤 2016), 특정한 식량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이동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수렵채집민은 아주 넓은 지역에 대한 이해가 있었는데, 북극 수렵민이 수백 평방킬로미터를 포괄하는 지역을 기억만으로 지도를 그린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자원을 관리하기 위해서이다(로버트 켈리 2014).

 

이러한 이동의 결과가 물증으로 나타는 것이 일정한 범위에서 나타나는 고고문화일 것이며, 이것을 확대한 개념이 일정한 문화권이다. 물론 유물이 넓은 지역에 분포할수록, 특히 토기는 똑같은 형식으로 확인되는 예는 거의 없다. 특정한 제작 기법이나 시문방법 혹은 문양은 공통적일 수 있지만 기형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림 1. 평저토기문화권의 범위 평저토기문화권 전체가 완벽한 같은 문화양상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토기양상에서 차이가 있다. 공통점은 토기 바닥이 편평하다는 사실.)

 

일례로 편보문화의 토기는 산동반도 북신문화에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 받고 있는데, 동체부에 세로로 부착되는 세퇴문양의 요소가 북신문화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朱永剛, 1993;궈다순·장싱더, 2008). 북신문화의 세퇴문은 삼족기에 표현되지만, 편보문화에서는 동북지방의 전통적인 심발형토기에서 확인된다. 또한 소하연문화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구연이 두 개인 호형토기는 소하연문화에서부터 확인되는 전형적인 기형인데, 여기에 뇌문이 시문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재지적인 기형에 하요하 유역 등에서 받아들인 문양이 그려진 것으로 파악된다(김재윤 2015b).

 

한반도 동해안에서 확인되는 신석기시대 적색마연압날문토기도 적색으로 마연하는 기법, 다치구로 찍는 기법, 구연부에만 문양을 시문하는 기법은 아무르강 하류의 말리셰보 문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지만 기형 중에서 표주박형(그림 30-21)은 한반도 동해안에서만 확인되는 것이다. 동해안에서는 유일하게 문암리 유적에서 출토된 접시형 기형(그림 32-4)이 말리셰보 문화의 기형을 그대로 닮았다.

 

고고문화는 일정한 지역적 범주와 시간상에서 확인되는 유물과 유구의 조합(몬가이트 1951)이며, 한 지역사회로 볼 수 있다. 신석기시대 수렵채집사회에서는 이들이 남긴 흔적을 현대 고고학에서는 고고문화라고 부르며, 비슷한 문화가 광범위하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문화권이라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한반도 주변의 동해안과 관련된 곳이다. 이 지역과 관련된 문화권은 평저토기문화권, 아무르편목문토기문화권, 동북한문화지역 등이 있다. 또한 앞서 신석기시대만 국한하지 않는다면 환동해문화권도 포함될 수 있다. 그 중 가장 넓은 범위의 문화권은 평저토기문화권(大貫精夫 1998)이다.』

(출처; https://eastsearoad.tistory.com/95?category=723258)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선사시대 동심원문 암각화를 통해서 살펴본 환동해문화권의 범위와 교류영역

 

 

1. 사카치알리안, 2. 세레미체보, 3. 쌍탑, 4. 지초리, 5. 영천보성리, 6. 포항 대련리, 7. 대구 진천동, 8. 대구 천내리, 9.고령 앙전동, 10. 고령 안화리, 11. 밀양 안인리, 12, 함안 도항리, 13. 동래 복천동(김재윤 2019)

 

 

 

 

시간에 따른 환동해문화권의 범위와 교류권 김재윤 2019

(출처; https://eastsearoad.tistory.com/298?category=772722)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영남에 나타난 동심원문암각화의 의미는 무엇인가?

 

 

환동해문화권의 동심원문암각화와 극동전신상토우(김재윤 2018)

출처; https://eastsearoad.tistory.com/279?category=772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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