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2.6 제주 고산리유적(2) 본문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2.6 제주 고산리유적(2)
대야발 2024. 2. 8. 17:31《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2.6 제주 고산리유적(2)
2008년 7월 25일자 경향신문 기사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6) 1만 년 전의 세계 제주 고산리(下)〉
『1만1000~1만 년 전 제주로 내려온 사람들이 있었다.
후기 구석기 최말기(세형돌날문화)~신석기 여명기(고토기문화)를 산 경계인들이었다. 출발지는? 고산리 신석기 유적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강창화(제주문화예술재단)는 지금의 아무르 강 유역이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식물성 고토기의 모양이 아무르강 유역의 그것과 매우 흡사한 점을 꼽는다. 그들은 어떻게 이 머나먼 제주 땅까지 왔을까.
■ 육지였던 황해
“일단은 1만 년 전의 기후나 지형을 한 번 살펴봐야겠지.”(조유전 토지박물관장)
“예, 그런 의미에서 당대의 기후와 해수면의 변화를 연구해봤습니다.”(강창화)
결론적으로 말해 1만 년 전 이전엔 황해는 바다가 아니라 표고 20~30m 정도 되는 완만한 평원지대였으며, 랴오둥(遼東) 반도에서 흘러오는 여러 개의 강줄기가 주변 대지를 아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아무르강 유역에 살던 사람들이 평원이나 혹은 강줄기를 따라 남으로 향해 제주도에 닿아 정착했다는 게 강창화의 결론이다.
박용안 서울대 명예교수가 그린 최종 빙하기의 해안선과 강줄기. 중국 대륙과 한반도가 육지로 연결되었음을 보여준다.
“지금으로부터 2만~1만8000년 전이 마지막 빙하기의 최전성기였습니다. 서해안의 해수면은 지금보다 150m 아래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즉 지금의 중국 동부해안과 서해안이 하나의 육지, 즉 황토층이었다는 것입니다.”(강창화)
“어디 황해뿐인가. 베링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시베리아 최동단 추코카(Chukotka) 반도와 알래스카의 최서단 스워드 반도가 서로 연육되었다잖아. 인류가 아메리카로 건너간 이곳을 베링육교라 하지.”(조 관장)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해수면은 서서히 상승하기 시작한다.
“고산리에 정착한 사람들은 육지였던 황해가 해수면 상승으로 물이 급속도로 불어나는 과정에서 막차를 탄 셈입니다.”(강창화)
“1만1000~1만 년 전 사이, 즉 1000년 동안 해수면이 급속도로 상승했다는데 사람들이 이동할 수 있었을까요?”(기자)
“수렵채집생활을 했던 구석기인들은 사냥감을 찾아 하루에 최고 50㎞씩 이동했다는 분석도 있기는 해요.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는 얘기죠.”(조 관장)
“급속도로 해수면이 증가했다지만 1000년이라는 세월이잖아요. 하루아침에 물이 불어나고 그러는 것은 아니니까,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물이 서서히 불어났을 겁니다.”(강창화)
■ 지구온난화가 낳은 승자와 패자
제주 고산리에서 확인된 식물성 고토기(사진 오른쪽). 아무르강 유역의 고토기(왼쪽)와 유사하다.
새로운 꿈과 희망을 찾아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화산이 빚어낸 빼어난 절경의 제주 땅 고산리에 둥지를 튼다. 식물성 섬유질 토기와 세석기 같은 당시로서는 첨단도구를 사용하면서….
그러나 지구 온난화와, 그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제주땅은 외딴 섬으로 고립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환경변화로 인해 고산리 사람들의 삶도 정체되고 만다. 이윽고 2000여년이 지난 BC 6000년쯤부터 섬이 된 제주도에는 혁명적인 변화가 생긴다.
한반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땅을 밟기 시작하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융기문 토기(덧띠무늬)와 지(之)자문 토기를 쓰는 사람들이며, 발해연안을 중심으로 문명을 일구기 시작한 동이족의 후예였다.
“토기에 융기문, 빗살무늬 문양을 넣을 줄 안다는 것은 문화적인 인간이 되었다는 뜻이죠. 토기의 표면을 화폭 삼아 다양한 무늬를 덧대거나 새기거나 그리지요.”(조 관장)
새로운 이주자가 도착하자 고산리 문화는 사라지고 만다. 이른바 고산리식 토기와 석기가 자취를 감추어 버리는 것이다. 기자가 보기엔 지구온난화의 희생양이었던 셈이다.
“그렇죠. 지구온난화의 산물이라 해석해도 되겠죠. 아직도 남는 수수께끼는 있어요. 고산리 사람들과 융기문 토기를 쓴 사람들은 과연 같은 조상을 둔 사람들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종족인지….”(강창화)
여하튼 절해고도가 된 제주땅을 차지한 융기문 토기인들은 왕성한 생명력과 활동력으로 제주땅을 풍미한다.
“그때부터 제주도는 한반도 출신 사람들의 문화가 이어집니다. 중산간지역에 폭넓게 발견되는 융기문 토기문화가 그 예입니다.”(강창화)
이후 한반도로부터 다양한 문화가 파상적으로 밀려들어온다.
지난 6월 말이었다. 조유전 관장과 기자는 제주 삼양동 유적(사적 416호)을 찾았다. 230여기 집자리가 확인됐고, 이른바 송국리형 주거지, 즉 뭍의 문화가 성행했음을 증거하는 마을유적이다. 부여 송국리에서 처음 확인되어 그 이름을 얻은 송국리형 주거지는 원형집자리 내부 중앙에 타원형의 구멍을 파고 기둥 두 개를 세우는,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주거형태이다. 강창화가 들려주는 여담 하나.
제주 무릉리에 복원된 송국리형 집자리. 제주의 거센 비바람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하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제공>
“원형 집자리가 얼마나 튼튼한지 예를 하나 들까요. 제주의 비바람은 유명하잖아요. 몇 년 전 서귀포 월드컵경기장 지붕까지 날릴 정도였는데…. 저희 재단(제주문화예술재단)이 무릉리 폐교 운동장에다 송국리형 집자리를 복원했는데, 월드컵경기장 지붕을 날린 비바람이 불어 닥쳤을 때도 이 복원된 집자리는 끄떡없었습니다.”
2000년 전 기법대로 축조한 집자리는 끄떡없고 21세기 최첨단 시설물은 바람에 날아가고….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각설하고 제주의 송국리형 주거지는 BC 3세기를 상한으로 해서 기원전후를 중심연대로 갖고 있다. 그런데 삼양동 대형집자리에서는 옥환(玉環), 청동칼 조각, 유리환옥 등 중국 및 한반도산의 흔적이 보인다. 옥은 두말할 것 없는 발해연안 등에서 확인되는 동이문화의 원형이다. 또한 화폐도 엿보인다. 제주 산지항과 금성리 패총유적의 예를 보면 오수전(五銖錢·BC 118년부터 주조된 중국돈)과 화천(貨泉)·화포(貨布·기원 직후에 주조된 중국 돈) 등이 확인되었다. … 이기환 선임기자』
(출처;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6) 1만년전의 세계 제주 고산리(下) - 경향신문 (khan.co.kr) )
2019년 2월 1일자 오마이뉴스 기사 〈김찬곤의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19] 빗살무늬토기의 비밀 8- 제주도 고산리식토기 무늬〉
『〈사진128〉을 보면 여느 신석기 그릇과 달리 무늬를 새기거나 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릇 표면을 보면 뭔가 무늬가 있다. 이 무늬는 풀대 자국이다. 그릇을 찰진 흙으로 빚은 다음 표면에 풀대를 듬성듬성 붙이고 넓적한 돌 같은 것으로 가볍게 두드려 그릇 겉면에 박히게 했다. 이렇게 빚은 그릇을 그늘에 말린 뒤 불에 구우면 불 속에서 풀대가 타고 자국이 남는다. 이 자국이 아래 그릇처럼 기이한 무늬가 된 것이다.
▲ 〈사진128〉 제주 고산리식토기. 높이 25.6cm. 보는 바와 같이 우리 신석기 그릇은 밑굽이 세모형이 아니라 이렇게 평평한 그릇에서부터 시작됐다. 〈사진129〉 고산리식토기 조각. ⓒ 제주국립박물관
흙 반죽에 풀대를 정말 섞었을까?
일단 이 그릇과 관련하여 학계에 잘못 알려진 것부터 정정할 필요가 있다.
고산리식토기라 하는 원시무문토기는 빚을 때 바탕흙(胎土)에 풀 같은 유기물을 첨가했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나왔다.
-이건무·조현종, 《선사 유물과 유적》(솔, 2003), 69쪽
여기서 이건무·조현종은 이 토기를 '무문토기', 즉 무늬가 없는 토기로 본다. 그런데 이 그릇의 겉면 풀대 자국은 고산리 신석기인이 일부러 낸 무늬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밝히겠다.
또 흔히 고산리식토기 하면 어느 글을 읽어도 흙 반죽에 풀을 섞었다는, '보강제'로 풀을 넣었다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이것을 알려면 투과전자현미경으로 그릇을 찍어 보든지 아니면 깨뜨려 봐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해봤다는 연구 성과물은 아직 없다.
지금 당장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그릇을 확대해 보는 수밖에 없다. 〈사진128〉은 해상도가 아주 높다. 크게 확대해서 보면 흙 반죽에 처음부터 풀대를 넣어 반죽했는지, 아니면 그릇을 빚은 다음 풀대를 그릇 표면에 두드려 붙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나는 그릇을 빚은 다음 나중에 덧붙인 것으로 본다.
흙 반죽에 처음부터 풀대를 섞었다는 말은 상식으로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된다. 풀대는 그릇을 구울 때 탈 수밖에 없다. 구덩이를 파고 아래에 나뭇가지를 놓고 굽더라도 불 온도는 600도 정도 된다. 이 온도면 그릇 표면뿐만 아니라 흙속에 있는 풀대도 탈 수밖에 없다. 그러면 풀대 공간이 생겨 물이 샐 수 있고 그릇이 잘 깨질 수밖에 없다.
이 그릇의 무늬를 읽을 때는 자신이 직접 고산리 신석기 그릇 장인이 되어야 한다. 한 신석기인이 고산리 산 낮은 언덕에서 흙을 파 왔다고 치자. 우선 신석기 장인은 흙 속에 있는 돌이나 나무뿌리 같은 것을 골라낼 것이다. 큰 모래 알갱이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 그릇이 매끄럽게 빚어지고 구워도 단단하다. 그릇을 빚어 본 신석기인이라면 이것은 그야말로 자명한 상식이다. 그래서 고산리 신석기인이 흙 반죽에 일부러 풀대를 넣었다는 것은 상식으로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뭔가 표현하고자 했다.
또 하나, 세계 신석기인들은 그릇에 무늬를 새기거나 그렸는데,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거의 모든 나라 신석기인들은 그릇에 비와 구름을 가장 많이 그렸다. 한반도 신석기인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신석기 1만 년 동안 달, 별, 해, 사람 같은 것은 새기지 않았다. 지방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그릇 겉면에 하늘 속 물, 하늘(경계), 하늘 아래 구름, 구름에서 내리는 빗줄기, 이 비가 흘러가는 심원의 세계를 새겼다. 제주도 신석기인 또한 마찬가지다.
▲ 〈사진130〉 1998년 암사동에서 나온 신석기 시루. 〈사진131〉 고산리 융기문토기. 높이 27cm. 국립제주박물관. 〈사진132-3〉 제주 삼화지구유적에서 나온 빗살무늬토기 조각. ⓒ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제주박물관
암사동과 고산리 신석기인의 그릇 무늬
우리 신석기학계의 제주도 토기 연구 논문을 살펴보면, 고산리를 비롯하여 제주도 여러 지역 토기를 내륙의 '빗살무늬토기' 문화권과는 성질이 아주 다른 것으로 놓고 분석한다. 그런데 〈사진132-3〉(삼화지구유적)을 보면 암사동 빗살무늬토기 무늬와 차이가 나지 않는다.
박근태(2012)가 〈제주도 초창기단계 유적출토 점열문토기 문양대〉에 정리한 토기 조각 표가 있다. 그는 '점열문(점점이 점을 찍은 무늬)' 무늬만 모아 네 종류(능형문, 사선문, 수직문, 방격문)로 분류한다.
그런데 이 '점열문' 토기는 모두 암사동에서 볼 수 있는 무늬이고, 하늘 속을 표현한 것은 6점, 구름을 표현한 것은 11점(여기서 삼각형 구름은 7점), 내리는 비를 표현한 것은 5점이다. 이 가운데 〈사진132-3〉은 암사동 신석기 그릇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삼각형 구름이다. 그리고 이 두 무늬는 점열문이면서 '빗살무늬'다. 나는 신석기학계와 달리 암사동 빗살무늬토기와 제주도 융기문토기·고산리식토기의 무늬를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본다.
2차원 평면화와 3차원 입체화
암사동 신석기인은 〈사진130〉에서 보는 것처럼 뭉게구름을 반원형으로 그렸다. 그리고 하늘에 길게 떠있는 구름(층적운, 층쌘구름)을 꽈배기 모양으로 표현했다. 이 두 구름을 점점이 점을 찍어 나타냈는데, 이 점은 구름 속의 수분(물기)이다(반원·반타원형·삼각형 구름에 대해서는 앞 글 〈6000년 전 암사동 신석기인이 그린 서울 하늘 뭉게구름〉을 참조 바람).
암사동 신석기인이 층쌘구름을 꽈배기 모양으로 표현했다면, 고산리 신석기인은 〈사진131〉과 같이 덧띠를 구불구불 붙여 나타냈다. 암사동 신석기인은 '실제 구름(3차원 입체)'을 그릇 평면에 그릴 때 초등학교 1, 2학년처럼 2차원 평면화의 성격을 살려 그렸다고 볼 수 있다. x축이든 y축이든 어느 한 축에서 본 구름을 1차원 평면에 그린 것이다. 이것은 초등학교 1, 2학년 아이들이 사람 코를 그릴 때 점이나 작대기 하나로 표현하는 것과 같다.
그에 견주어 고산리 신석기인은 1차원 평면에 실제 구름 이미지를 최대한 살려 그렸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1차원 평면에 3차원 입체 구름을 그리는 것이다. 이는 초등학교 5, 6학년 아이들이 사람 코를 그릴 때 x, y, z축에서 본 것을 종합하여 입체로 그리는 것과 같다. 물론 반죽 흙 평면에 입체를 표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고려 상감청자와 조선 청화백자에서 온전히 실현된다.
▲ 〈사진134-5〉 러시아 아무르 강 하류 수추 섬 신석기 유적지에서 나온 토기. 2000년 출토. 기원전 4000년 무렵. ⓒ 국립문화재연구소
아무르 강 수추 섬 신석기인이 새긴 구름과 비
〈사진134-5〉 토기 조각은 러시아 아무르 강 하류 수추 섬 신석기 유적지에서 나온 것이다. 수추 섬 신석기 유적 발굴조사는 우리나라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러시아 고고학민족학연구소가 공동으로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조사했다.
〈사진134-5〉는 제1차 발굴조사 보고서에 있는 토기 그림이다. 두 연구소는 공동으로 발굴조사 보고서를 냈는데, 두 연구소 모두 수추 섬 신석기인이 그릇에 무엇을 새겼는지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수추 섬 신석기 유적은 기원전 4000년에서 2000년 무렵의 주거지인데, 이곳에서 나온 그릇 무늬를 보면 실로 놀랍기 그지없다. 더구나 이 무늬는 암사동 신석기 빗살무늬 패턴과 아주 닮아 있다. 수추 섬 신석기인은 암사동 신석기인이 그랬듯 그릇 아가리 쪽에 하늘 속 물(水, 雨·雪)을 먼저 새기고, 그 아래에 구름을, 또 그 아래에는 비(雨)와 눈(雪)을 새겼다. 다만 비(雨)는 〈사진134〉에서 보는 것처럼 빗줄기(암사동)가 아니고 빗방울로 표현했다. 눈은 엄지 끝으로 꾹꾹 누른 것처럼 움푹 들어간 무늬로 나타냈다.
먼저 구름무늬를 보면, 이 무늬는 암사동보다는 〈사진131〉 고산리 융기문토기 무늬와 비슷하다. 수추 섬 신석기인은 고산리 신석기인이 그런 것처럼 1차원 그릇 평면에 3차원 입체에 가까운 구름무늬를 새겼다고 볼 수 있다.
▲ 〈사진136〉 스페인 알타미라 석회암 동굴의 상처 입은 들소. 기원전 13000년 전. 〈사진137〉 코스텐키 비너스. 1988년 러시아 돈 강 코스텐키(kostenki) 구석기 유적지에서 나온 비너스다. 구석기 솔류트레기(기원전 25,000∼20,000년). ⓒ 김찬곤
구석기 미술의 전통, 리얼리즘
러시아 아무르 강 수추 섬과 제주도 고산리 신석기인은 구름을 왜 입체에 가깝게 표현했을까. 두 지역 그릇 무늬는 신석기 미술사에서 아주 특별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나는 아직까지 수추 섬과 고산리 융기문토기·고산리식토기 말고는 이런 입체 구름무늬를 본 적이 없다. 답은 구석기인의 미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사진136〉은 동굴 천정에 그린 상처 입은 들소 그림이다. 기원전 1만 3000년 전 스페인 알타미라 구석기인은 상처 입은 들소 모습을 아주 '사실적'으로 그렸다. 더구나 그는 천정에서 볼록 튀어나온 곳을 찾아 거기에 맞게 상처 입은 들소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그렸다. 이뿐만 아니라 갈라진 틈으로 동물의 윤곽을 나타내기도 한다. 〈사진136〉에서 왼쪽 윤곽선은 그린 선이 아니라 갈라진 틈이다.
〈사진137〉은 기원전 2만 5000년 전 러시아 코스텐키 구석기 유적지에서 나온 비너스다. 만삭인 구석기 여인을 조각했는데, 머리에는 숏비니를 쓰고, 고개를 약간 수그리고 있다. 눈코입은 일부러 그리지 않았다. 팔 두께와 발 길이가 사실주의에서 벗어나 있는데 이는 이렇게 조각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있다(이에 대해서는 앞 글 〈빌렌도르프 비너스와 울산 신암리 여인상〉 연재글 세 편을 참조하기 바람). 이 구석기 비너스의 압권은 뒷모습이다. 만삭인 여자의 허리, 골반, 엉덩이를 아주 정확하게 붙잡아 조각했다.
알타미라 동굴벽화와 코스텐키 비너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구석기 미술은 추상미술이 아니라 구상 미술이고, 평면 미술이 아니라 입체 미술이다. 그리고 완벽한 '사실주의'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된 까닭은 다각도로 연구해 볼 수 있지만 우선 당시 구석기인들의 처지와 관련이 깊다. 먹이사슬의 중상층에 놓여 있던 구석기인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늘 입체로 보아야 했고, 언제나 눈과 감각의 촉수를 열어 두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 〈사진138〉 일본 신석기 조몬 중기 기원전 3000년 무렵 토기. 〈사진139〉 조몬 중기 기원전 2500년 무렵 토기. 〈사진140〉 조몬 후기 기원전 2000년 무렵 토기. 몸통 가운데 새끼줄 무늬가 있고, 매듭을 지은 것도 보인다. 일본 고고학계는 이 새끼줄과 매듭의 의미를 아직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 줄과 매듭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밝힐 것이다. ⓒ 김찬곤
'화염형' 토기가 아니라 '비구름' 토기
세계 신석기 미술사에서 가장 놀라운 미술은 일본의 조몬토기다. '조몬(繩文 줄승·무늬문)토기'는 말 그대로 줄(끈, 새끼줄) 같은 덧띠 무늬가 있는 토기를 말하지만(〈사진140〉 참조), 지금은 일본 '신석기 토기'를 두루 말할 때 쓴다. (그렇다고 해서 조몬토기가 모두 끈 무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이것을 끈으로 봐야 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이 토기는 세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토기다. 그런 만큼 일본은 이 토기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하다. 1877년 동경 오오모리 조개무지에서 처음 나왔는데, 그 뒤 142년이 흘렀는데도 일본 학계는 아직까지 이 토기의 무늬를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138〉 그릇은 일본 신석기 그릇 역사에서 가장 번성했던 조몬 중기 토기다. 일본 학계는 이 토기를 '화염(불꽃)형' 토기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불꽃이 아니라 '구름'으로 봐야 한다. (세계 신석기 그릇에서 불꽃을 아가리 쪽에 표현한 그릇은 찾아볼 수 없다) 〈사진138〉보다 더 나중 그릇인 〈사진139〉를 보면 무늬가 훨씬 단순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답은 언제나 이렇게 무늬가 단순해지는 말기나 번성하기 전 초기 그릇에서 찾아야 한다.
〈사진139〉는 조몬 중기에서도 더 나중 그릇이다. 〈사진138〉에 견주어 무늬가 간결해졌는데, 그래도 아가리 쪽은 여전히 복잡하다. 둥근 고리 모양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더 연구해 봐야 알겠지만 아가리에서 몸통까지 낸 무늬는 구름이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사진138〉 몸통 무늬도 구름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몸통 아래 밑굽 쪽은 빗줄기(雨)다. 이렇게 봤을 때 일본 신석기 조몬인 또한 암사동 신석기인과 마찬가지로 그릇에 구름과 비를 새겼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왜 구름을 〈사진138〉처럼 3차원 입체로 표현했을까. 이는 구석기 미술 전통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섬나라 일본은 대륙의 신석기 미술과 달리 구석기 사실주의 미술 전통이 그만큼 오랫동안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제주도 신석기인 또한 바닷물로 내륙과 분리되면서 구석기 리얼리즘 전통이 기원전 8000년 무렵까지 살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는 앞 글(〈한국미술의 기원, 드디어 풀리다〉 참조 바람)에서 살펴본 고산리 '융기문토기'(〈사진131〉)의 구름무늬와 지금 다루는 '고산리식토기'의 구름무늬에서 찾을 수 있다.
▲ 〈사진141〉 네덜란드 영화 〈레지스탕스 뱅커〉(2018, 요람 뤼르센 감독)의 한 장면. ⓒ Netflix
한국미술의 기원은 '추상미술'이 아니라 '리얼리즘'
〈사진141〉은 네덜란드 영화 〈레지스탕스 뱅커〉(2018)의 한 장면이다. 신석기 시대 제주도 고산리 앞바다 구름도 어떤 날은 이와 같았을 것이다. 고산리 신석기인은 이 구름을 그릇에 담고 싶었다. 그들은 이런저런 방법을 궁리했고, 흙 반죽에 우연히 풀대 몇 가닥이 들어갔을 때 그릇 겉면 무늬가 저와 같았다는 것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릇을 빚은 다음 억새, 기장, 강아지풀, 쇠풀, 잔디 풀대 같은 것을 뜯어다 그릇 표면에 붙였다. 처음에는 손바닥으로, 그 다음에는 넓적한 돌로 두드려 붙였다.
하지만 생각한 대로 구름무늬가 나오지 않았다. 앞에서 든 〈사진129〉 같은 구름무늬만 나왔다. 이렇게 실패를 거듭하다 그들은 새로운 방법을 궁리해 낸다. 걸쭉한 흙물에 풀대와 잎사귀를 넣고 그것을 휘휘 저어 막 빚은 그릇에 바르고 물 손질을 한다. 그런 다음 그늘에 살짝 말렸다가 넓적한 돌로 두드려 풀대와 풀잎을 그릇 표면에 붙이고, 마지막으로 풀대 없는 걸쭉한 흙물로 슬립(slip), 즉 물 손질을 한 번 더 했다.
▲ 〈사진142-3〉 제주 고산리 유적 제2구역에서 나온 고산리식토기 조각. 《제주 고산리유적Ⅰ(2구역)》(2017, 제주고고학연구소) ⓒ 제주고고학연구소
위 〈사진142-3〉을 〈사진129〉와 견주어 보면 구름무늬가 얼마나 자연스러워졌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사진143〉의 동그랗게 말린 풀대와 풀잎을 보면 확실히 차이가 난다. 이렇게 하니 구름무늬가 훨씬 자연스럽고 슬립(slip) 효과도 났다. 고산리 신석기 장인은 마침내 1차원 그릇 평면에 3차원 입체 구름을 거의 완벽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는 세계 신석기 미술사에서 고산리 말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의 신석기 조몬인이 그릇 아가리에 3차원 입체 구름을 아주 빚어 붙였다면 제주도 고산리 신석기인은 1차원 그릇 표면에 3차원 입체 구름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우리 한국미술의 기원이 입체화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한국미술의 기원이 '추상미술'이 아니라 '리얼리즘, 사실주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 작품(〈사진144〉)은 화가 신홍직의 〈우포의 저녁노을〉(2018)이다. 그는 나이프와 손끝으로 구름을 아주 강렬하게 그리고 있다. 구름에는 바람과 힘이 실려 있고, 물감을 부조처럼 튀어나오게 하여 1차원 평면에 3차원 입체 구름을 표현하고 있다. 나는 화가 신홍직의 구름 연작을 보면서 고산리 신석기인을 떠올렸다. 자그마치 지금으로부터 1만2000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도 예술가의 정신은 이렇게 이어져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 〈사진144〉 화가 신홍직의 〈우포의 저녁노을〉(2018) ⓒ 신홍직
(출처; 한국미술의 기원은 '추상미술'이 아니라 '리얼리즘'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
<참고자료>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6) 1만년전의 세계 제주 고산리(下) - 경향신문 (khan.co.kr)
한국미술의 기원은 '추상미술'이 아니라 '리얼리즘' - 오마이뉴스 (ohmy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