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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3.7 빗살무늬토기문화 본문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3.7 빗살무늬토기문화
대야발 2024. 2. 8. 17:54《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3.7 빗살무늬토기문화(빗살무늬토기시대); 8000년 전~3500년 전(BC 6000년~1500년)
『빗살무늬토기 시대( ── 土器時代) 또는 즐문토기 시대(櫛文土器時代, Jeulmun pottery period)는 한반도의 고고학적인 시대 구분으로 기원전 8200년부터 기원전 1500년에 이른다. 이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로, 전기에서 중기에 걸친 토기에 빗살과 같은 모양의 무늬가 발견되어 이것을 따서 이름이 붙여졌다.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로 주로 곡식의 씨나 먹다남은 음식따위를 저장하는 용도로 쓰였다.
개요[편집]
토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시대로, 한반도는 신석기 시대이며, 농업은 아직 소규모인 수렵과 채집이 중심이었던 시대이다.
토기의 겉면에 빗 같은 무늬새기개를 이용해 만든 기하학적인 무늬를 배합하여 각종 무늬를 그린 토기이다. 대체로 나무·뼈연장 또는 그것으로 만든 여러 가닥이 난 빗살모양의 무늬새기개를 가지고 그릇 바깥 면에 짤막한 줄이 배게 누르거나 그어서 새긴 것을 빗살무늬라고 부른다. 이러한 빗살무늬는 질그릇에 따라 여러 모습을 나타내는데, 한국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선·점선으로 된 짧은 줄을 한쪽 방향으로 또는 서로 방향을 엇바꾸어가면서 그려서 그 모습이 생선뼈처럼 생긴 것이다.
그릇 모양은 밑창이 달걀처럼 생긴 것과 밑이 납작하여 깊은 바리처럼 생긴 것이 대표적인데, 그릇 종류에는 독 모양이 큰 것을 비롯하여 항아리·단지·대접·보시기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바탕흙에는 진흙에 모래만 섞은 것과 석면·활석부스러기 같은 것을 섞은 것이 있으며, 그릇 색깔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갈색이 기본을 이룬다. 대체로 섭씨 600~700℃의 열을 가하여 구운 것인데, 땅을 판 구덩이에서 별다른 특별한 시설 없이 장작불을 피워 구운 것으로 생각된다.
토기의 용도는 그 크기에 따라 각각 달랐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현재의 독과 같이 대형은 저장용, 중형은 취사용, 소형은 식기와 음식준비 과정에 각각 사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빗살무늬그릇은 형태와 무늬가 지역에 따라 다양한 차이를 보인다.
역사[편집]
초기,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한다.
초기[편집]
초기는 기원전 8200년에서 기원전 6000년경까지 이른다. 초기의 토기로서는 남부에서 덧무늬토기(隆起紋土器, 융기문토기)가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겉면에 진흙띠를 덧대어 붙이거나 겉면을 맞집어 돋게하여 무늬를 만든 것이다.
덧무늬토기는 남쪽으로는 제주도 고산리 유적, 부산 동삼동 유적(사적 266호, 영도구)과 영선동 유적, 울산 우봉리 유적, 거창 임불리 유적, 양산 신암리, 통영 상노대도 등과 남부 지역과 양양 오산리 유적, 춘천 내평리 등 북부지방까지 남해안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도 발견되었다.[1]
일본 쓰시마섬의 고시다카 유적(越高遺蹟)에서도 부산 동삼동의 것과 비슷한 형태의 기원전 5000년∼기원전 4500년의 것으로 보이는 덧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전기[편집]
전기는 기원전 6000년부터 기원전 3500년경까지로 추측된다. 어로나 수렵을 하고, 움집에 반정주적인 생활을 했다. 후반기에는 대규모 패총을 볼 수 있다. 기원전 4000년경에 〈빗살무늬 토기〉가 출현한다. 이것은 유라시아 북부 일대(핀란드, 러시아, 시베리아, 만주 등)에 퍼진 넓은 의미의 《빗살무늬토기(Comb ceramic)》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2]
한편 조몬 시대 전기에 일본 열도의 규슈에서 난세이 제도까지 퍼진 《증전식 토기(曾畑式土器)》도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생각되고 있다.
중기[편집]
중기는 기원전 3500년부터 기원전 2000년경으로 여겨진다. 잡곡 등의 재배가 시작되었지만, 중심은 어로나 수렵에 있었다고 추측된다. 부산시 영도구 동삼동 유적(사적 제266호)은 이 시기의 조개더미 유적으로 1930년 초반 일본인들에 의한 소규모 발굴이 있었으며, 1962년~64년까지 미국인들에 의한 발굴이, 1969년~1971년은 서울대학교 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발굴을 하였다.
이 시기에 빗살무늬 토기가 서해안의 내륙과 남해안에서 발견되었다.
후기[편집]
후기는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500년경으로 추측된다. 내륙부의 거주가 증가하여 패총의 수가 줄어들고, 농업에 의존하는 생활이 진행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초기 민무늬 토기(기원전 1500년~기원전 1250년)의 등장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소규모의 농경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후기 빗살무늬 토기는 랴오닝의 샤자디안 하층문화와 거의 같은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가 이 시대의 것이라고 주장을 하지만 논란이 되고 있다.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는 후기 빗살무늬 토기 시대의 사람들은 점차 남쪽으로 이주하여 농경으로 전환된 민무늬 토기의 사람들로 바뀌어 갔다.
진주시 대평면 상촌리 유적이나 합천댐 수몰지구에서 발견된 거창군 임불리 유적 등이 이 시기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출처; 빗살무늬토기 시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
2007년 11월 16일 경향신문 기사 〈[코리안루트를 찾아서](7)빗살무늬 토기문화〉
『“이건 빗살무늬 아닌가요? 아! 여기 덧띠무늬(토기)도 있네.”
차하이(사해·査海)와 싱룽와(흥륭와·興隆窪) 마을은 물론 신러(신락·新樂), 뉴허량(우하량·牛河梁) 유적을 둘러본 기자는 깜짝깜짝 놀랐다. 싼줘뎬(삼좌점·三座店)과 청쯔산(성자산·城子山) 유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발길에 부딪히는 토기편을 주우면 어김없이 관찰되는 빗살무늬와 덧띠무늬….
츠펑대 유물관리실에 전시된 싱룽와 마을 출토 빗살무늬 토기들. 덧띠-현문-덧띠-현문-빗살문-사격문-편직문 등 다양한 문양을 차례로 새겨넣었다. <츠펑/김문석기자>
두 말 할 것도 없다. 기자가 금방 다녀온 차하이와 지금 서있는 이 싱룽와는 8000년 전 동이의 마을. 랴오둥(遼東) 선양시의 신러유적과 동이의 문화가 꽃피운 훙산문화의 본거지 뉴허량 유적도 마찬가지다. 이미 탐사단이 살펴봤던 싼줘뎬과 청쯔산은 BC 2000년 고조선의 영역일 가능성이 짙은 곳이 아닌가.
갈짓자 문양을 새기는 방법.
기자는 이제서야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그토록 “우리 신석기 문화의 고향은 발해연안이며, 시베리아가 절대 아니다”라면서 가슴을 치며 끈질지게 주장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빗살무늬는 과연 무엇이고, 시베리아 설은 또 무엇인가.
신석기 문화의 상징
빗살무늬 토기. 고고학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들일지라도 ‘빗살무늬 토기’라 하면 금방 알 것이다. 초기 동북아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지표유물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수렵 및 채집생활로 이리저리 떠돌던 구석기시대를 지나(약 1만 년 전) 가장 획기적인 발명품을 창조해낸다. 바로 토기이다. 토기의 발명은 빙하기를 극복한 인류가 정착 및 농경생활을 시작했으며, 비로소 문명의 새벽을 열어젖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부터 한 곳에 모여 살면서 무리를 이루고, 씨족을 형성했으며, 훗날에는 부족, 그리고 더 나중에는 국가를 이뤘다.
물론 동북아인들이 창조한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만은 아니다. 토기 표면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민무늬 토기와 덧띠무늬 토기(토기 겉면에 덧띠를 두른 토기) 등도 있다. 요즘들어 한반도에서 잇달아 확인되는 덧띠무늬 토기도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지금까지는 빗살무늬 토기가 단연 각광을 받아왔다. 빗살무늬 토기는 토기의 표면을 머리빗 같은 시문구(施紋具)로 긋거나 찍어 무늬를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형구 교수에 따르면 빗살무늬 기법에는 빗점무늬와 좁은 의미의 빗살무늬가 있다. 빗점무늬는 빗살로 그릇의 표면을 점점이 찍는 것이며, 좁은 의미의 빗살무늬는 빗살로 사선, 평행선, 곡선 등 갖가지 기하문을 그릇 표면에 그린 토기를 말한다. 빗살무늬의 종류로는 이른바 ‘지(之)자문’, 즉 지그재그형 빗살무늬와 ‘사람 인(人)자문’ 등이 있다.
싱룽와(왼쪽)와 함북 서포항에서 나온 빗살무늬 통형관. 기형과 아가리 모양과 문양이 비슷하다.
철옹성, 시베리아 기원설
“빗살무늬를 쓰던 사람들은 시베리아, 몽고의 신석기 문화를 폭넓게 받아들이면서 각지의 문화를 발전시켰다.”(1983년판 국사교과서)
“빗살무늬 토기와 함께 빗살무늬 토기를 쓰던 사람들이 시베리아에서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한국고고학개설’ 73년판)
최근까지도 빗살무늬 토기의 기원은 유럽이며, 시베리아~몽골·만주~한반도로 건너왔다는 설이 우리 학계를 지배해왔다. 가히 철옹성 같았다. 불과 5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이 펴낸 도록(2002년간)을 보면 극명해진다.
“한반도 신석기문화는 기원전 8000년 시베리아 여러 곳에 흩어져 살던 고아시아족(고 시베리아족)들이 중국 동북지방과 연해주 지역을 거쳐 한반도로 이주해오면서부터다. 빗살무늬를 비롯한 출토 유물은 내몽고, 바이칼호 주변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연관 관계를 갖고 있고 우리나라 신석기문화의 뿌리를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런데 시베리아 기원설의 근거가 된 토기 유형은 이른바 오목점 빗점무늬 토기문화였다. 이 문화는 주로 동부 유럽과 시베리아 삼림지대, 즉 볼가-올가지방에서 유행했다. (6400~4500년 전)
시베리아 전래설을 처음 주장한 것은 일본인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 였다. 이형구 교수는 “후지다가 1930년대 한반도에서 출토된 새김무늬(선무늬의 일종)를 유럽과 시베리아에서 보이는 토기와 연결시켜 즐목문(櫛目文) 토기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견해가 70여년간 줄곧 정설로 굳어진 것이다.
일제관학의 퇴출
그런데 2005년 용산시대를 맞아 새롭게 펴낸 국립중앙박물관의 도록은 180도 바뀐다.
네이멍구 츠펑 싱룽와(맨 위)와 강원 고성 문암리(가운데), 함북 굴포리 서포항(밑)에서 출토된 빗살무늬 토기들. 기형과 문양의 토기들이 매우 흡사하다.
이형구 교수는 “그 영역을 여전히 ‘한반도’로 묶어두었지만 일단 시베리아 기원설을 완전히 삭제한 것은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일제시대 후지다가 제기한 견해를 엎고, 민족문화의 자생설을 강조했다는 것 자체가 획기적인 역사 인식의 전환이라는 평가다.
“국가를 대표하는 공간물, 즉 국립중앙박물관 도록이 일제관학에서 유래된 외래전래설을 떨쳐낸 것은 의미있는 일이었죠.”(이형구 교수)
사실 1970년대 후반부터 발해문명을 연구해온 이교수는 줄기차게 ‘신석기 문화의 본향은 발해연안’이라고 주장해왔다. 1970년대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발해유역의 신석기 시대 자료를 토대로 ‘시베리아설의 허구’를 논증해온 것이다.
“시베리아 빗살무늬 토기의 연대는 빨라봐야 BC 4500년이지만, 싱룽와와 차하이에서 보듯 발해연안 빗살무늬 연대는 BC 6000년까지 올라가잖아요. 1000년 이상 차이가 나는데 무슨….”
동이의 영역에서 속출한 빗살무늬
발해만 유역에서 빗살무늬 토기 문화가 발견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 73년 신러유적에서 BC 5300~BC 4400년으로 편년되는 지(之)자형 토기가 확인된 것이다. 이후 76년 황허 하류인 허베이(河北)성 우안(武安)의 츠산(磁山)유적과 77년 페이리강(裴李崗) 유적에서 잇달아 之자와 人자 토기가 확인됐다. 연대는 BC 6000~BC 5500년이었다. 이런 형태의 토기들은 훙산문화의 본거지인 둥산쭈이(동산취·東山嘴·1979년)와 링위안(凌源)현 뉴허량 유적(1984·85년)에서도 잇달아 확인됐다. 이런 가운데 80년대 초반 동이의 본향인 차하이-싱룽와 마을에서 8000년 전 사람들이 새긴 정교한 빗살무늬 토기들이 확인되자 중국 학계도 깜짝 놀란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랴오둥 반도 최남단 섬인 샤오주산(小珠山)과 다롄(大連)시 뤼순(旅順)의 궈자춘(郭家村)에서도 之자, 人자형 토기들이 속출했다.
빗살무늬 토기들이 나온 곳들을 살피면 이른바 발해문명권, 다시 말해 중국인들이 말하는 동이족의 영역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인(人)자형은 한반도 압록강·대동강·재령강·한강유역은 물론 두만강과 동해안, 그리고 남해안 등 전국적으로 분포되고 있어요. 지(之)자형은 평북 의주읍 미송리 동굴유적, 경남 통영 상노대도, 김해 수가리 유적에서 보이고…. 빗점무늬는 대동강의 궁산·남경유적, 재령강의 지탑리 유적, 한강유역의 암사동 유적, 동북부의 서포항 유적 등에서 확인됩니다. 한반도 전역을 포함한 발해연안이 바로 빗살무늬 토기문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이형구 교수)
또한 한반도에서는 처음으로 옥결(옥귀고리)이 나온 강원 고성 문암리(BC 6000년)와, 양양 오산리(BC 5000년)에서는 초기 신석기 문화의 양대토기인 덧띠무늬 토기와 빗살무늬 토기가 함께 나오기도 했다. 문암리 유적을 발굴한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관은 “차하이-싱룽와에서 나온 유물을 본 결과 문양을 그려넣은 기법이나 토기의 기형이 문암리와 상당히 유사하다”면서 “발해연안과 한반도가 같은 문화권임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보았다.
8000년 예술의 정수
또하나 강조할 부분은 빗살무늬 토기의 예술성. 이형구 교수는 빗살무늬 토기를 “8000년 전 예술의 정수”라고 극찬한다.
“신석기인들은 토기를 요즘으로 치면 화폭으로 여기고 빼어난 예술감각을 자랑했어요. 크게 상·중·하로 화폭(토기표면)을 나눠 3~7단까지 구성하여 갖가지 문양을 새겼어요. 상부는 빗금, 배부분은 갈지자, 밑바닥은 선무늬…. 뭐 이런 식으로 예술적인 욕구를 정교하게 표출한 거죠.”
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토기 하나에 눌러찍은 압인무늬와 빗살무늬와 덧띠무늬를 동시에 표현했으며, 무늬 자체도 직선 혹은 활무늬, 之자무늬, 마름모무늬, 교차무늬, 그물무늬, 번개무늬, 꽃무늬 등 매우 다채롭다”고 극찬했다. 이런 예술적 감수성은 한반도 출토 토기에도 그대로 투영돼 있다.
차하이-싱룽와에서 확인된 계획도시를 방불케 하는 주거지와 빼어난 예술감각을 표현한 빗살무늬토기, 그리고 신앙의 상징인 용과 옥결까지….
저명한 중국 고고학자인 쑤빙치가 “(차하이-싱룽와 문화는) 문명의 시작을 알린 표지이며, 중화문명의 시원이라 할 수 있다”고 평가했던 이유다.
한반도를 극복하라
7월27일 저녁 6시20분. 싱룽와를 떠나는 기자는 동이의 본향을 짙게 물들인 석양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이제. 우리 역사를 살필 때 ‘한반도 신석기 문화’ ‘한반도 청동기 문화’라 해서 ‘한반도’라는 좁은 틀로 가두면 안되지 않을까. 올해 초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시작’과 관련된 개정 국사교과서 논쟁도 역시 ‘한반도’라는 좁은 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빚어진 것은 아닐까.
8000년 전 동이는 결코 한반도라는 좁은 영역에서만 살지 않았을 것인데…. 발해연안에서 출발해서 황허유역을 포함한 산둥반도, 지금의 만주 일대와 한반도까지를 누볐을 것인데…. 이기환 선임기자』
(출처; [코리안루트를 찾아서](7)빗살무늬 토기문화 - 경향신문 (khan.co.kr) )
블로그 〈실증환인환웅단군역사〉
『빗살무늬 토기는 bc6000년 전에 시작되었다. 이 토기는 산동반도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bc5000 -3000년)와 한반도, 압록강 집안, 요동의 대련반도 소주산문화素珠山文化, 심양의 신락문화新樂文化(bc5500년), 길림시吉林市 서단산문화西丹山文化와 장춘시長春市 좌가산문화左家山文化, 그리고 서요하西遼河 상류, 내몽고 적봉시 홍산문화紅山文化(bc5500년)까지 고루 발견된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바다가 훨씬 작았던 황해를 둘러싸고 예맥의 문화가 퍼져나간 흔적이다. 그러나 11600년 전 이후의 더운 날씨로 인해 내륙은 사막화가 되고,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발해 바다가 50m 이상 차오르고, 바다 주변은 차오른 물로 인하여 예전보다 더 추워졌다. 8200년 전에 일어난 지구 냉각기 200년의 사건이다.
그 중 중심이 되는 bc6000년의 부신시 사해문화査海文化와 오한기 흥륭와문화興隆窪文化는 심양의 신락문화新樂文化보다 1000년 이상 빠르고, 적봉의 홍산문화紅山文化보다도 2000년 정도 이르므로 선홍산문화先紅山文化라고 한다. 옥도끼玉斧는 석병石兵 시대에 신권神權을 상징하는 새로운 옥병玉兵 시대를 열었다. 더욱이 옥도끼는 빛을 발함으로써 당시의 어떤 무기보다 무서운 역병을 일으키는 귀신들을 내쫓는 효험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월절서越絶書]에 신농, 혁서 때에는 석병石兵을 쓰고, 황제시대(bc2700년)에는 옥병玉兵을 쓰고, 하우夏禹(bc2100년) 시대에는 동병銅兵을 쓰고, 그 후에 철병鐵兵을 썼다고 한다. 예맥 문명에서 옥병의 출현은 중원보다 빠른 bc6000년이다. 중원의 옥기 문화는 흥륭와문화, 사해문화로부터 대문구문화를 거쳐 태호太湖의 양저문화良渚文化에서 가장 꽃피는데 bc3000년 이후다.』(출처; 실증환인환웅단군역사, http://daangoon.pe.kr/b1.htm)
2018년 10월 8일 오마이뉴스 기사 〈김찬곤의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13] 빗살무늬토기의 비밀2 -물과 통로, 경계, 구름, 빗줄기, 땅속〉
『빗금은 낱낱이 하나씩 새겼다
'빗살무늬토기' 명칭과 관련해서 이것부터 먼저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역사책에서 '빗살무늬토기'를 설명하는 부분을 읽어보면 상당수가, '이 그릇은 빗(또는 빗살) 같은 무늬새기개로 찍거나 그어서 무늬를 새겼다'고 말하고 있다. 아래 〈사진18〉 양양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 설명글도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과연 이 말은 맞는 말일까. ......
빗처럼 살이 달린 무늬새기개로 새기려면 그릇을 빚어 조금만 말린 다음 바로 새겨야 한다. 너무 마르면 애당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적당히 말려도 생각처럼 무늬가 나오지 않고 자꾸 흙이 묻어 올라오고, 어쩌다 흙속에 아주 작은 모래 알갱이 하나만 있어도 흙이 파이고 만다. 그래서 '빗' 같은 무늬새기개로 새긴 것이 아니라 나무나 뼈끝을 갈거나, 돌이나 그릇 조각을 깨뜨려 끝을 날카롭게 하거나, 조개껍데기 같은 새기개를 썼을 것이다.
▲ 〈사진22〉 서울 암사동 빗살무늬토기. 높이 25.9cm. 〈사진23〉 서울 암사동 빗살무늬토기. 높이 20.8cm. 〈사진2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0》 빗살무늬 그림. 〈사진25〉 삼각형 비구름. 서울 암사동. 국립중앙박물관. 〈사진26〉 서울 암사동 빗살무늬토기 굽 무늬 ⓒ 국립중앙박물관
한반도 빗살무늬토기의 '무늬'는 크게 다섯 가지
〈사진24〉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0> '빗살무늬토기' 편에 나와 있는 무늬 이름이다. 우리나라 역사 관련 책에서 빗살무늬토기를 다룰 때 보통 이 무늬 이름을 쓴다. 보면 알 수 있듯이 무늬 모양만 말해 줄 뿐 그 무늬가 '무엇을' 새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 한반도 신석기인들은 그릇 아가리 쪽에 물을 가득 담고 있는 '하늘 속 물(水)'을 새겼고, 그 다음 '하늘 속 물'과 '구름'을 '하늘(맨 눈으로 봤을 때 파란 하늘)'로 경계를 지었다. 그런 다음 그 아래에 비를 품고 있는 반타원형 또는 삼각형(〈사진22, 25〉 참조) '비구름'을 새겼다. 〈사진22〉의 '삼각형 구름'을, 빗줄기를 양쪽으로 내리 뻗치면서 새기다 보니 저절로 생긴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암사동 빗살무늬토기 조각과 강원도 양양 지경리·오산리에서 나온 빗살무늬토기 '삼각형 구름'을 보면 암사동 신석기 장인이 처음부터 이렇게 삼각형 구름을 새기려 마음먹고 한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 한국미술의 자연스러움, 없는 듯한데 찬찬히 보면 그 자리에 태연히 앉아 있는, 그러한 천연덕스러움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사진25〉의 삼각형 구름 속 점은 수분(水)을 뜻한다. 이제 곧 비를 뿌릴 비구름인 것이다. ('삼각형 구름'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세계 신석기인이 새긴 구름(삼각형·반타원형)과 우리 한반도 신석기인이 새긴 구름을 낱낱이 견주어 가며 자세히 밝히겠다) 그리고 구름 아래로는 양쪽으로 비스듬히 내리는 비(〈사진22〉) 또는 지그재그로 내리는 비(〈사진23〉)를 새기고 그 물이 깊은 심원(深遠, <열자(列子)> <탕문(湯問)> 편에서는 그곳을 '바닥이 없는 골짜기'라 하여 '귀허(歸墟)'라 한다)의 세계로 흘러가는 것을 밑굽에 표현했다(〈사진26〉 참조).
▲ 〈사진27-28〉 세모형 빗살무늬토기 밑굽 무늬, 서울 암사동, 국립중앙박물관. 〈사진29〉 스페인 신석기 그릇 밑바닥 무늬, 높이 9.2cm, 기원전 2200-1500년, 스페인 고고학박물관. 세 그릇 모두 하늘에서 내린 비가 땅속 심원의 세계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표현했다. "초기" 신석기인들은 비가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많은 비가 내리는데도 땅이 물에 잠기지 않는 것이 신기했고, 또 두려웠다. 비가 흘러들어가는 곳, 그들에게 그곳은 심원의 세계였고 ‘공포’였을 것이다. 〈사진28〉에서 초록선 위는 사람이 사는 세상이고 그 아래는 땅속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스페인 고고학박물관
밑굽 무늬와 한반도 신석기인의 세계관
〈사진22〉는 빗살무늬토기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그릇이다. 〈사진22〉와 〈사진23〉은 둘 다 서울 암사동에서 나온 것인데 〈사진22〉가 더 먼저 빚은 그릇일 것이다. 그 까닭은 사람이 살아가는 땅과 그 아래 공간(땅속)을 뚜렷하게 경계 지었기 때문이다.
〈사진26〉이 바로 〈사진22〉 같은 토기의 아래 굽이다. 무늬를 새기기 힘든 곳인데도 아주 세심하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사진23〉은 굽 부분 무늬를 새기지 않고 빗줄기가 아래 밑굽까지 쭉 내려온다. 이것은 아래 밑굽 무늬에 대한 생각이 그들의 세계관에서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 시간에 선사 시대 그릇 무늬와 관련하여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가장 먼저 밑굽 무늬가 없어지고, 그 다음 몸통, 마지막 아가리 무늬가 없어지면서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민무늬토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사실만'을 말할 뿐이다. 문제는 왜 그들이 밑굽에서부터 아가리까지 점점 더 무늬를 새기지 않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앞으로 빗살무늬를 낱낱이 해석하면 자연히 드러날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에 올라온 서울 암사동 빗살무늬토기 사진 자료 474장에서 밑굽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릇과 토기 조각은 274점이다. 이 가운데 밑굽 무늬를 새긴 그릇은 238점이고 새기지 않은 그릇은 36점이다. 인천시 편 빗살무늬토기 사진 자료 533장에서 밑굽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릇은 22점인데, 이 가운데 2점만 무늬를 새겼다. 경기도 편 빗살무늬토기 사진 자료 203장에서 밑굽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릇이나 조각은 26점이고, 이 가운데 6점만 무늬를 새겼다.
부산 동삼동 편 빗살무늬토기 사진 자료는 179장인데, 이 가운데 밑굽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릇이나 조각은 없었다. 부산 동삼동, 경기도, 인천 빗살무늬토기에서 밑굽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릇이나 조각은 그 수가 많지 않고, 또 있다 하더라도 무늬를 새기지 않은 것이 더 많았다. 이것은 밑굽 무늬에 대한 세계관이 그들의 삶과 사고에서 해결이 되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그러한 세계관이 없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출처; 한반도 빗살무늬토기의 '무늬' 종류는 다섯 가지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
<참고자료>
빗살무늬토기 시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코리안루트를 찾아서](7)빗살무늬 토기문화 - 경향신문 (khan.co.kr)
한반도 빗살무늬토기의 '무늬' 종류는 다섯 가지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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