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3.14 여수 안도패총(麗水 安島貝塚); 8000년 전~4500년 전(BC 6000~2500)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1313-1 일원에 위치한다. 1992년 처음으로 학계에 알려진 안도패총은 모두 세 지점으로 각각 패총·‘패총’·‘패총으로 구분된다. 지표조사 당시 융기문토기를 비롯하여 원거리 교역관계를 보여주는 흑요석 등 특징적인 유물이 채집된 바 있다. 세 패총 중 패총이 2007년 발굴조사 되었다. 여수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안도는 동도(東島)와 서도(西島)로 이루어졌다. ‘패총은 서도 북단의 저평지(해발 8m)에 형성되어 있으며, ‘패총과 패총은 동도 북서단의 만입한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다. 조사된 패총의 층위는 크게 패각층, 혼사력패층, 사력층 등 3개 층으로 구분된다. 유물은 각 층에서 출토되나, 주로 패각층에서 확인된다. 패각층은 흑갈색사질점토층을 경계로 하층인 패각층과 상층인 패각층으로 세분된다. 하층인 패각층은 유적 전반에 걸쳐 퇴적되어 있지만, 상층인 패각층은 유적의 북단에서만 확인된다. 출토된 유물들은 남해안 신석기시대 조기의 융기문토기부터 만기의 이중구연토기까지 광범위하다. 그러나 각 층별로 출토된 유물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남해안 신석기시대 조기의 특징적인 유물 조합인 융기문토기와 결합식조침은 최하층인 패각층에서 나타나며, 흔히 영선동식토기로 일컫는 압인문토기는 패각층 이상에서만 확인된다. 침선문토기는 전형적인 태선문토기는 보이지 않으며, 외반구연에 구연으로부터 23 정도의 공백을 남겨두고 시문하는 봉계리식토기가 이중구연토기와 함께 사력층을 중심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층위별 유물 출토 양상을 고려한다면, 안도 패총은 크게 3개의 문화층으로 구분된다. 문화층은 유적 전반에 퇴적되어 있는 패각층으로 신석기시대 조기에 해당된다. 이 문화층에서는 융기문토기와 결합식조침을 비롯하여 석거(石鋸), 결상이식(?狀耳飾) 등이 출토되었다. 한편 이 문화층에서 출토된 융기문토기 중 기면에 패각조흔(貝殼爪痕)이 있는 토기는 일본 규슈지방의 조몬토기[繩文土器]인 도도로키식토기[轟式土器]와 유사하다. 또한 일본 조몬시대의 특징적인 석기인 석시(石匙)도 이 층에서 확인되었다. 문화층은 패각층으로 신석기시대 전기에 해당하며, 영선동식토기가 어망추와 함께 출토되었다. 문화층은 유적의 남서쪽에 퇴적되어 있는 사력층이다. 이 층은 패각층 형성 이후 파랑에 의한 침식과 퇴적에 의해 형성된 층으로, 봉계리식토기와 이중구연토기가 출토되었다. 이중구연토기는 이중구연 밑으로 아무런 문양이 없는 것도 있지만, 침선문이 시문된 것도 있다. 따라서 이 문화층은 봉계리식토기와 이중구연토기의 공반, 혹은 봉계리식토기에서 이중구연토기로 전이되는 단계로 볼 수 있다.

 

한편 각 층에서 출토된 뼈와 패각을 시료로 실시한 연대 측정 결과도 각각 기원전 6000년에서 기원전 2500년까지 다양하게 나오고 있어, 각 문화층의 연대와 어느 정도 일치한다. 안도패총에서는 신석기시대 무덤 4, 노지 9, 수혈유구 11, 집석유구 3기 등 다수의 생활 흔적과 융기문토기를 비롯한 남해안 신석기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500여 점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이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모두 5개체의 인골이 확인된 신석기시대 무덤과 신석기시대 한·일간 교류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신석기시대 무덤은 모두 얕은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안치한 뒤 흙으로 덮은 토광묘이다. 다만 무덤구덩이가 뚜렷한 수직각을 이루지는 않는다. 4기 모두 인골이 하늘을 바라보며 몸을 똑바로 편 채로 누운 형태인 앙와신전장(仰臥伸展葬)이다. 이들 무덤 중 1·2호 무덤은 그 윤곽선이 패각층에서 확인되며, 3·4호 무덤은 별다른 구덩이의 윤곽선 없이 혼사력패층 밑의 구 지표상에서 확인된다.

 

1·2호 무덤의 인골이 패각층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두 무덤은 패각층의 형성시기에 축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혼사력패층은 파랑에 의한 침식과 퇴적에 의해 형성된 층임을 고려한다면, 별다른 윤곽선 없이 구 지표상에서 확인되는 3·4호 무덤의 조성 시기는 1·2호 무덤의 조성 시기와 그리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2·3호 무덤의 상면에는 크기 3040 가량의 돌들이 부정형으로 쌓여 있어 발굴 당시에는 무덤과 관련된 시설로 보았다. 그러나 2호무덤의 적석은 무덤의 장축방향과 그 방향성은 일치하나 무덤 전체를 덮고 있지 않고 극히 일부만 확인되며, 3호무덤의 경우 무덤의 장축방향과 적석시설의 장축방향이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인접한 1·4호 무덤에는 이러한 적석시설이 없다. 남해안지역의 통영 연대도·욕지도 유적에서도 안도패총의 무덤과 유사한 토광묘가 확인된 바 있는데, 잔돌로 무덤 상면을 덮는 경우가 있다고 보고되어 있지만 분명치 않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적석시설은 무덤과 관련된 시설이기 보다는 집석유구의 일종일 가능성이 있다.

 

무덤의 침향(枕向)은 모두 북동침으로 등고선 방향과 수직을 이루고 있다. 연대도·욕지도 유적의 토광묘는 모두 서침이라는 점에서 신석기시대 인의 태양숭배 혹은 생활 터전인 바다와 관련짓기도 한다. 그러나 안도패총의 토광묘를 비롯하여 통영 산등·범방 패총, 고성 문암리유적의 토광묘는 각각 북동침, 동침, 북서침, 남침으로 일정하지 않다. 침향의 방위적 요소만을 고려한다면 규칙성이 없어 보이지만, 무덤의 장축방향과 등고선의 방향 관계를 고려하면, 토광묘의 두향은 모두 등고선 방향과 직교한다. 즉 시신의 머리를 육지의 높은 쪽으로 하고 전면에 넓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는 형상이다. 따라서 신석기시대 토광묘의 두침은 방위적 요소보다는 지형적 요소에 의해 결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도 패총의 무덤 내에서는 1호무덤의 남성과 3호무덤 여성의 오른쪽 팔목에 패천(貝釧)이 착용된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부장품은 없다. 이 중 3호무덤의 인골(4호 인골)은 패천 5개를 착용하고 있다. 1호무덤의 경우 30대 남성과 20대 여성의 합장묘로 2구의 시신 모두 하늘을 보고 바로 누운 앙와신전장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신석기시대 토광묘 중 연대도·욕지도 유적에서 한 무덤구덩이 안에 23개체의 인골이 나온 예가 있기는 하지만 2구 모두 앙와신전장인 경우는 처음이다. 2구의 시신 중 서쪽의 인골(2호인골)은 분석 결과 30대의 남성이며, 동쪽의 인골(1호인골) 20대의 여성이었다. 2호인골은 두 팔을 밑으로 쭉 뻗고 누운 형상이지만, 1호인골은 두 팔을 ‘< >’ 형태로 오므린 형상이다. 1호인골의 오른팔이 2호인골의 왼팔 위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1호인골을 안치한 후 2호인골을 안치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1호인골의 뼈가 흩어지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두 인골의 합장은 그리 긴 시간차가 없었으며, 거의 동시기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무덤에서 확인된 인골은 비교적 양호한 편으로 신석기시대 인의 형질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인골의 성별은 5개체 중 남성이 3개체(2·3·5), 여성이 2개체(1·4)이고, 연령은 20 1개체(1), 30 2개체(2·3), 50 1개체(4), 60 1개체(6)로 다른 유적과는 달리 노년층이 확인되었다. 또한 이 60대 남성의 하악골에서 추운 지역 사람들의 특징인 하악융기가 확인되어 한반도 신석기시대 인의 계통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확보되었다. 이곳 출토품 중 특히 주목되는 유물은 일본 조몬문화와 관련된 것들이다. 조몬토기로 추정되는 완형(完形)의 토기 4점 외에도 일본 조몬시대의 대표적인 석기인 석시, 그리고 원산지가 규슈[九州]지역으로 추정되는 흑요석제 박편석기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신석기시대 한·일 양안 간의 인적·물적 교류를 보여주는 직접적인 증거이다.

 

융기문토기 중 기형이 원통형의 심발형에 기면 전체에 패각조흔문이 있는 토기는 한반도의 융기문토기와는 차이를 보인다. 이 토기들은 규슈지역의 조몬시대 조기와 전기에 해당하는 구루하마식토기[苦浜式土器], 세노칸식토기[神式土器], 도도로키A식토기[A式土器] 등과 유사하다. 그러나 저부가 상당히 좁다는 점에서 구루하마식토기 혹은 세노칸식토기와는 차이를 보이며, 융기문으로 기면을 장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도로키A식토기와도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우리나라 융기문토기와 비교되는 도도로키B식토기[B式土器]는 환저인데 반해 안도패총 출토 조몬계토기는 평저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양안의 교류를 보여주는 석기로는 석시와 흑요석제 박편석기가 있다. 석시는 일본 조몬시대의 대표적인 석기로, 작은 돌기가 달린 일종의 석도(石刀)이다. 석시는 동물의 해체 및 조리에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무나 뼈를 깎을 때도 사용한 다용도의 석기로, 조몬시대 조기부터 사용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연대도유적에서 1점 확인된 바 있다. 더불어 흑요석제 박편석기 220여 점도 확인되었는데, 이는 단일유적에서 출토된 양으로는 최대이다. 안도패총에서 가까운 여수 돌산 송도패총을 비롯해 남해안 신석기유적에서 출토된 흑요석의 원산지는 고시다케[腰岳], 우시노타케[] 등 일본 규슈지역으로 분석된 바 있다. 이로 볼 때 안도패총의 흑요석도 규슈지역이 원산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것들은 우리나라 남해안지역과 일본 규슈지역 간 사람과 물자의 교류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들이다.

 

안도패총은 여수 돌산 송도, 신안 가거도, 완도 여서도 패총에 이어 지금까지 전라남도에서 발굴된 신석기시대 패총으로 네 번째이지만, 다른 유적들과는 달리 다양한 유구와 유물이 다량으로 조사되었다. 남해안지역 전체로 보았을 때에도 매장 방식의 특징이나 대외교류와 관련된 유물 등은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러한 자료는 남해안지역과 일본 규슈지역의 신석기시대 매장 풍습과 문화교류 등에 대해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이 될 것으로 보인다.(양성혁)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036)

 

뉴시스 2007 3 27일 기사 여수에서 신석기 인골 2구 발견

 

 

 

신석기시대 인골 2구가 출토됐다.

국립광주박물관(관장 조현종)은 전남 여수시가 금오도와 안도를 연결하는 연도 가설공사에 따른 사전 매장 문화유적 훼손 방지 차원의 발굴조사 결과, 여수시 남면 안도리 1313번지 일대에서 신석기시대 무덤 2기가 발견됐다고 27일 밝혔다.

 

패총에서 인골이 발굴된 적은 있었지만 하나의 토광에서 2구의 인골이 매장된 사례는 국내에서 아직 보고된 바 없다. 당대 매장 풍습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광주박물관 측은 "골반부분을 확인한 결과 인골 1구는 여자가 확실하지만 나머지 1구는 훼손돼 성별 구분이 안된다" "인골 전문학자들이 조사중"이라고 전했다.

 

1호 무덤에서는 조가비 장신구가 손목 부위에서 출토됐다. 또 불을 땐 자리 7기와 수혈유구(竪穴遺構) 7기 등도 확인됐다. 두립문토기, 융기선문토기를 비롯해 결상이식 등 약 500여점의 유물도 함께 발굴됐다.

 

무덤은 얕은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넣은 뒤 패각이 섞인 흙으로 덮은 토장묘로 추정된다. 토광 내에는 인골 2구가 신전장으로 매장돼 있었으며, 인골의 상태는 비교적 양호했다.

 

수혈유구는 수혈내부에 크고 작은 돌이 채워져 있는 집석수혈(集石竪穴)과 패각이 채워져 있는 패각수혈(貝殼竪穴)로 구분된다. 패각층 최상부에서 확인된 집석수혈 유구는 지름이 약 210인 원형이며, 내부에는 지름 약 30 내외의 큰 돌들과 지름 약 10 내외의 작은 돌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수혈의 깊이는 약 15이며 내부에는 검게 그을린 흔적이 있는 뼈조각과 자연돌이 소량으로 검출됐다. 불 땐 자리는 모두 7기가 확인됐다. 크기는 일정하지 않았으며, 특별한 시설물도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직경이 125 내외, 깊이 40 내외의 수혈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결상이식 1점은 납석제로 추정하고 있다. 결상이식은 한반도를 비롯해 중국과 동북부, 연해주, 일본열도 등 주로 해안과 도서 지역을 중심으로 출토되고 있는 매장품 가운데 하나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 고성 문암리에서 석제품 1쌍이 무덤 주인공의 머리 부분에서 출토된 적이 있다. 청동기시대 청도 사촌리 등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안도패총 출토 결상이식은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서 최초로 동아시아 신석기 문화권내 교역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전망이다.

 

이번 유적의 중심연대는 패각 퇴적층에서 융기문토기, 압인압날문토기, 문문양토기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신석기 전기로 판단된다. 유상우 기자

(출처; https://news.v.daum.net/v/20070327174910916?f=o)

 

한국디지털뉴스 2007 4 25일 기사 여수 안도패총서 5개 팔찌 낀 인골 확인

 

 

 

다량의 흑요석 등 6,000 여 년 전 한일 교류의 구체적 근거 확보

국립광주박물관 (관장, 조현종 )은 지난 1 15일부터 4 6일까지 90여 일 간에 걸쳐 여수시 남면 안도리에서 발견된 패총을 발굴 조사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신석기시대 무덤 4, 주거지 2기 등 다수의 생활 흔적과 500 여점이 넘는 유물이 발굴됐다.

 

안도패총에서는 지난 3 27일에 있었던 현장설명회 이후 유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2구의 인골이 추가로 드러났고, 흑요석 220여점이 출토됐다.

 

특히 이 가운데 3호 인골은 팔목에 5개의 조개비팔찌를 끼고 있었다. 이는 지난번 공개한 합장묘와 함께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장제문화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조개비팔찌를 착용한 인골은 경남 통영시 상노대도 산등패총에서 1 예가 보고된 바 있다.

 

그러나 5개의 조가비팔찌를 착용한 사례는 국내에서는 최초이며, 인골의 연대도 그 보다는 앞선다.

신석기시대 팔찌의 착용은 성인식 문화와 연결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와 같은 풍습은 일본의 구주 지역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이는 것이다. 구주 지역의 경우 10개 이상의 팔찌를 패용한 인골이 합장된 예가 다수 알려지고 있다.

 

대표적 예인 후쿠오카현 야마카 패총에서는 10~20개의 팔찌를 착용한 합장 인골 3구가 보고된 바 있다. 이들이 착용한 팔찌는 대부분이 투박조개를 갈아 만들었는데, 안도패총 3호 인골이 착용한 팔찌도 투박조개인 것으로 밝혀졌다.

 

더불어 이번조사에서는 흑요석 220 여점이 확인되어 단일유적으로는 최대 수량이다. 흑요석은 날카로운 날을 얻을 수 있는 화산암질 석재로 신석기시대 어러나 사냔을 위한 작살과 같은 도구제작에 널리 사용되었다. 이러한 흑요석의 원산지는 백도산과 일본 열도이며,안도패총에서 가까운 여수시 돌산읍 송도패총(1989년 국립광주박물관 발굴)에서 출토된 흑요석의 일본 서북 구주의 고시다케 지역으로 분석된 바 있다.이로 볼 때 안도패총의 흑요석도 구주지역이 원산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여수지역은 지금가지 확인된 신석기시대 패총유적만 해도 22개소를 능가하여 우리나라 신석기유적의 집중분포지이자 신석기문화 연구의 최대보고이다. 1989년과 1990년에 송도패총이 발굴되어 대략의 윤곽이 드러났지만, 이번 안도패총에서 확인된 인골과 흑요석을 비롯한 토기자료는 일본 구주지역과 물자와 사람들의 교류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신석기시대에 대한해협을 사이로 두고 남해안지역과 구주지역이 문화적으로 매우 유사한 환경에 놓여있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들이다.

 

앞으로 안도패총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이루어지면 우리나라 남해안지역 뿐만 아니라 일본 구주지역을 연결하는 문화적 고리가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이강영 기자

(출처;

http://koreadigitalnews.com/board/view.php?&bbs_id=sub_05&doc_num=248)

 

 

3.15 신락(신러)문화; 7500년 전

신러 문화(중국어 간체자: 新乐遗址, 정체자: 新樂遺跡, 병음: Xīnlè Yízhǐ Xinle culture[*])은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선양 시의 시가지의 북부에 있는 기원전 7200년경의 신석기 시대 모계씨족의 정주 취락 유적이다. 중국은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싱룽와 문화(중국어 간체자: 兴隆洼文化, 정체자: 흥륭와문화(興隆窪文化), 병음: xīnglóngwā énhuà Xinglongwa culture[*]), 훙산문화(중국어 간체자: 红山文化, 정체자: 紅山文化, 병음: hóngshān wénhuà), 자오바오거우 문화(중국어 정체자: 趙寶溝文化, 병음: Zhàobǎogōu wénhuà), 신러 문화(중국어 간체자: 新乐遗址, 정체자: 新樂遺跡, 병음: Xīnlè Yízhǐ Xinle culture[*])등의 요하일대의 신석기문화를 문화의 단계를 넘어 세계의 새로운 문명으로 보아 '요하문명'(遼河文明)으로 명명(命名)하여 부르고 있다.

 

1973년 발굴 유적에서 40여 채의 신석기 주거를 발견하였다. 부장품으로는 석기와 도기, , 골각기, 나무 조각품, 정제된 석탄 등을 발굴하였다. 1978년에 또 다른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는데, 토템 숭배의 도구로 보이는 7200년 전의 나무 조각품을 발굴해냈다. 이것은 선양 지역에서 발굴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었고,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목조 조각품 중의 하나였다. 이 발굴 조사에서 키탄국(契丹國)으로 불리던 요왕조의 1000년 전의 무덤도 발굴되었다. 이 발굴지는 원래 신러 기숙사(新樂宿舍)라는 오래된 건물이 있는 곳이었는데, 그것을 따서 신러 문화라고 불렀다.

 

박물관

1984년에 신러유적 박물관(新樂遺址博物館)이 개관하였다. 현재는 유적 공원으로서 복원 주거를 세우는 등 정비가 되어 있고 박물관도 있다. 이 유적에서 발견된 나무조각 圖騰鳥(새의 토템)은 선양 시의 심볼이 되었으며, 이것을 본뜬 기념탑이 선양 시내의 시 광장에우뚝 솟아 있다. 또 유적 공원 내에는 요나라 대의 고분 두기도 있다. 2001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B%9F%AC_%EB%AC%B8%ED%99%94)

 

2007 11 2일 경향신문 기사 〈[코리안루트를 찾아서](5) 신러유물 권장(權仗)의 비밀〉

 

 

 

 

 

용과 새가 한꺼번에 표현된 유물(지팡이)가 출토된 선양 신러유적. 사진은 유적을 복원해놓은 모습이다. 새는 홍산문화의 옥에서도 잘 표현됐다. 신러/김문석기자

 

 

 

 

『용과 새는 동이족 상징 아닐까

태양신이자 농업의 신인 신농씨(염제)의 탄생 전설 가운데도 용이 나타난다. 신농씨의 어머니 여등은 볕을 쬐려고 나들이에 나섰다가 신비로운 용을 보았다. 여등은 순간 온몸이 감전된 듯한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임신한 것이다. 여등은 열 달 후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염제 신농씨다.

 

 

 


# 용의 몸을 지닌 새(鳥)
그런데 ‘차하이(査海) 용’을 보던 기자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전통적으로 용은 중국 민족의 상징이라고 하고, 동이족의 토템은 ‘새’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이의 상징이라는 ‘새’는 어찌된 걸까.


2400년 전 유적인 대전 괴정동에서는 따비로 밭을 가는 모습을 그려 넣은 농경문청동기가 확인됐는데, 청동기 뒷면엔 새 한 쌍이 마주보는 솟대가 보였다. 그만큼 새 신앙의 역사가 뿌리 깊은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 때까지는 용이 임금을 상징했지만, 지금은 봉황이 대통령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기자는 7월30일 선양 신러(新樂) 유적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을 보고 지울 수 없었던 수수께끼를 풀 하나의 단서를 움켜잡았다. 차하이에서 140 정도 떨어진 신러유적은 차하이보다 약 500년 늦은 7500년 전 유적이다.


“자, 이 유물은 권장(權仗·권력을 상징하는 지팡이)이라는데, 새 모양이잖아요.”(이형구 교수)


38.5㎝의 나무 지팡이는 신러 유적의 가장 큰 주거지에서 발견됐다. 발굴자는 이 유물은 나무로 새의 부리와 머리, , , 꼬리를 조각한 것으로 새를 토템으로 삼는 씨족이 남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차하이의 ‘용’과 신러의 ‘새’라. .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그런데 기자는 궈다순(郭大順)의 책,  ‘용은 랴오허에서 태어났다(龍出遼河源)’를 들춰보다가 아주 흥미로운 문구를 발견했다. 궈다순은 이 새 모양의 지팡이를 용으로 볼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새의 몸을 자세히 보면 용의 비늘 같은 문양이다. 즉 용을 나무에 새긴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용은 권장일 수도 있지만 비녀로 볼 수도 있다. 민족지 자료를 보면 비녀는 계급을 나타내는 예기(禮器)이다. 신러에서 발견된 유물은 여인이 실제 사용하기엔 부담스러운 크기다. 예기였다는 증거다.”


# 용과 새는 동이의 상징
궈다순의 해석처럼 이 유물이 권장인지, 아니면 비녀인지, 그리고 그것이 용을 표현한 것인지, 새를 표현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용의 몸을 하고 태어난 새. 즉 용과 새를 한꺼번에 표현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어쨌든 이형구 교수가 의견을 내놓는다.


결국 7000~8000년 전 발해만에서 살던 사람들은 용과 새를 함께 모신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교수는 차하이·싱룽와(興隆窪)-신러문화의 뒤를 잇는 홍산문화에서도 용과 새 문양의 옥제품이 섞여 나오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용과 새를 함께 모신 사람들.


그렇게 해석하면 모든 의문점이 풀린다. 앞서 우리 민족과 용의 밀접한 관계를 사료와 고고학적 증거로 언급했지만, 우리 민족과 새의 관계 또한 두껍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앞서 예를 든 부여 창업주 해모수와 신라 박혁거세, 석탈해 신화는 용은 물론 새가 상징하는 천강(天降·하늘에서 내려오는) 신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용과 새가 같은 신화 안에 공존한다는 뜻이다.


백제예술의 정수인 금동대향로는 용이 입을 벌린 채 향로를 받치고 있고, 맨 꼭대기에는 하늘과 교통할 수 있는 봉황이 서있다.


이형구 교수는 “용은 물을 상징하지만, 새와 마찬가지로 하늘을 상징하기 때문에 천계를 넘나드는 하늘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중국인들은 용을 신앙으로 삼지만 새는 그렇게까지는 신성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천진기 과장은 “물론 봉황을 태평성대에 나타나는 상상의 새라고 하지만 용처럼 그렇게 다양한 양상으로 숭배하지는 않는다.”고 전했다.


다만 동이의 나라인 상나라만이 난생신화를 건국신화로 삼고 있다. ‘사기 은본기에는 “은(상)의 시조 설의 어머니 간적이 제비알을 삼켜 임신한 뒤 낳은 이가 바로 설(契)이다”라고 기록해 두었다. 결국 용과 새를 동시에 신성시한 종족은 중국인이 아니라 동이족이었다는 뜻이다. 이기환 선임기자』 

(출처;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1021453051&code=210100)

 

3.16 울산 세죽유적(蔚山 細竹遺蹟); 7500년 전~7000년 전(BC 5500~5000)

울산광역시 남구 황성동 661700 일원에 위치한다. 유적은 청량면의 덕하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진행하는 외황강의 하구 북안에 입지한다. () 주변은 매립되어 온산공단의 일부로 개발되었다. 지리적으로 이곳은 울산만의 바로 남쪽에 해당한다.

 

유적주변에서 세죽유적과 출토 유물에서 유사한 울산 성암동패총, 울주 우봉리·신암리, 경주 하서리 유적 등이 분포한다. 특히 성암동유적은 본 세죽유적과 입지와 유사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비해 우봉리유적은 바다 쪽이 절벽을 이루는 대지상의 평탄지에 흑색토층에서 유물이 채집되고 있다. 이 양자는 조기 당시의 해안선 추정과 기후, 자연환경 등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일 것이다.

 

세죽유적은 해안에 입지한 패총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래 당초 낮은 구릉지에 형성된 유구 혹은 문화층이 해수와 후대의 개간 등으로 인해 재퇴적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적의 층위는 4개 층으로 대별되는데, 유물이 출토된 층은 Ⅱ∼Ⅳ층이다. 층은 외황강에 의해 형성된 육성층으로 표토층을 포함하여 자갈이 여러 층으로 두텁게 형성되어 있다. 두께는 3m 정도이고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층은 점토가 소량 포함된 사질토층으로 미소패를 포함하고 있다. 층은 유물이 집중하는 층으로 10개 층으로 세분되지만 크게 4개 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 -1층은 파도에 의해 파쇄된 패각이 소량 혼입되고, 산호가 확인되며, 육지로부터 유입된 나무의 잔해가 출토된다. -2층은 파쇄된 패각이 다량 혼입된 사질토층으로 산호가 출토되었다. -3층은 유기물과 패각으로 이루어진 층으로 암갈색을 띠며 사질토가 소량 혼입되었다. -4층은 흑갈색점토층 속에 홍합을 주체로 하는 쉘벨트(조개대)가 형성되었다. 층은 흑갈색점토층으로 미량의 숯과 목질을 포함하며, 유물은 소량 출토되었다. 기반층은 안산암이다.

 

유구는 -3층에서 도토리 저장혈로 판단되는 수혈 18기가 노출되었다. 수혈은 두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해발 ?1.5m 선상에 있는 16·17호 수혈로 단면이 역대상(逆臺狀)이며, 수혈의 상부에 적석(積石)되었다. 이 수혈에서는 도토리 껍질과 식물질이 층위를 이루며 검출되었다. 다른 하나의 군집은 나머지 16기의 수혈로 해발 ?0.3m에서 ?1.1m 사이의 군집으로 열상(列狀)을 이루고, 수혈 내부에 적석(積石)되지 않았다.

세죽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다량의 즐문토기를 비롯하여, 석기, 골각기, 자연유물 등이 있다. 즐문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에서 이른 시기로 편년되는 조기인 기원전 5000년 전후의 융기문토기와 자돌문, 압인문, 두립문, 침선문, 압날문, 점토대문토기 등 매우 다양하다. 기형은 대부분 발형이며, 호형토기와 동체가 굴곡진 형태의 토기도 다소 존재한다.

 

석기는 석부, 석창, 지석, 석촉, 결합식조침 등이 출토되었다. 석촉은 흑요석으로 만든 것도 있는데 평면형태는 삼각형을 이룬다. 결합식조침은 소위 오산리형으로 불리는 석축과 골제 침부가 함께 출토되었다. 이 밖에 토우와 원반형 토제품, 조개팔찌 등이 출토되었다.

 

세죽유적은 강원도지역과 남해안지역의 교류적 측면뿐만 아니라 동해안지역 이른 시기의 신석기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생각되며 형성 시기는 기원전 55005000년 정도로 추정된다.(최득준)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925)

 

3.17 북신(베이신)문화; 7300년 전~6100년 전(BC 5,300년경~BC 4,100)

베이신 문화(중국어 정체자: 北辛文化, 병음: bĕixīn wénhuà Beixin culture[*], 기원 전 5,300년경 - 기원 전 4,100년경)은 중국 화북 산둥성의 황하 하류 지역에 있었던 신석기 시대의 문화이다.

 

표식 유적은 1964년에 산둥성 남부, 텅저우 시(당시는 등현)의 베이신 가도에서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에 의해 발견된 베이신 유적이다. 이 유적은 다원커우 문화(기원 전 4100년경 - 기원 전 2600년경)의 유적아래에서 발견되었다. 그 일부가 1978년부터 1979년에 걸쳐 발굴되었다.

 

이 문화의 유적에서는 황갈도(모래가 섞인 흙을 낮은 온도로 구운 도기)나 홍도(치밀한 진흙을 높은 온도로 구운 도기)로 완성된 솥 등의 조리기구가 발견되었고, 일부에서는 보다 더 높은 온도로 구운 회도나 흑도도 출토되었다. 돌도끼나 돌낫 등을 이용한 마제석기나 타제석기, 골각기 등도 발견되었다.

 

이 문화의 연구 결과 당시는 채집이나 수렵 외에, 잡곡을 재배하는 원시적인 농업이나, 돼지나 소 등의 사육이 행해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B%B2%A0%EC%9D%B4%EC%8B%A0_%EB%AC%B8%ED%99%94)

 

3.18 조보구문화; 7200년 전~6400년 전(BC 5200~4470)

중국 내몽고자치구 적봉시(赤峰市) 오한기(敖漢旗) 조보구유적을 조사하여 확인된 문화이다. 조보구문화는 서요하(西遼河), 대릉하(大凌河) 유역에 분포하는 신석기시대 조기에 해당하는 문화이다.

 

1986년 조사된 이 문화는 조보구유적과 소산(小山), 남대지(南臺地), 소선덕구(小善德溝), 백음장한(白音長汗), 수천(水泉) 등의 유적을 통해 그 특징을 알 수 있다. 조보구문화의 연대는 기원전 52004470년으로 황하유역의 노관대(老官臺)문화 단계에 해당한다.

 

주거지는 소산유적에서 8, 백음장한유적에서 2, 수천유적에서 17, 조보구유적에서는 18기가 조사되었다. 조보구유적 주거의 평면형태는 방형, 장방형, 철형(凸形)이며, 반지하식 주거이다. 노지와 기둥구멍이 내부에서 확인되고 있다.

 

출토된 토기는 통형관(筒形罐), 광구관(廣口罐), 원저관(圓底罐), 권형고복관(圈形鼓腹罐), 권저발(圈底鉢), 존형기(尊形器), 평저발(平底鉢), 요저발(凹底鉢), () 등 다양하며, 저부가 타원형이거나 권형(圈形)의 기형이 보인다.

 

문양은 구연부와 동부의 구분이 없어지면서 자문이 주류를 이루며, 직선으로 조합한 기하학문(幾何學文)도 시문된다. 또 일부의 토기에는 사슴머리, 돼지머리, 새머리, 소의 뿔 등을 신화한 신수문(神獸文)이 시문되기도 한다. 토기의 동부(胴部)에 시문되는 소용돌이 문양은 뱀이나 용의 모습에 유사하다. 이러한 토기는 홍산(紅山)문화의 특징인 채도(彩陶)의 원형이라 볼 수 있다.

 

석기는 격지와 몸돌, 화살촉, 긁개 등의 세석기, 농경과 관련된 정교한 보습, 돌도끼, 돌호미, , , 갈돌, 갈판, 공이 등의 마제석기도 출토되고 있다. 골각기는 송곳과 바늘이 출토되며, 조개의 장신구도 있다.

 

그 외에 동물유체로 민물조개, 어류와 함께 고라니, 노루, 사슴, 돼지, , 오소리, 곰 등의 뼈가 출토되었다. 조보구문화는 흥륭와(興隆窪)문화의 뒤를 이은 문화이며, 조보구문화 이후에는 부하(富河), 홍산(紅山), 소하연(小河沿)문화가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출처; 한국고고학전문사전,

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255)

 

3.19 부산 가덕도 장항유적; 7200년 전~6400년 전(BP 7200~BP 6400)

우리나라에 신석기시대 무덤유적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가운데 부산 가덕도 장항유적의 집단묘역 (인골 48개체) 확인은 주목할 만한 성과이다. ~ 주변에는 부산 범방(凡方)패총·영선동(瀛仙洞)패총·동삼동(東三洞)패총·통영 연대도(煙臺島) 패총·상노대도(上老大島)패총·여수 안도(安島)패총 등 신석기시대 대표적 유적들이 분포한다.

 

지금까지의 발굴조사 성과를 토대로 남해안 신석기시대는 토기문화의 변화에 따라 조기에서 만기까지 5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조기는 평저(平底)의 덧무늬토기(隆起文土器), 전기에는 원저(圓底)의 찍은무늬토기(押印文土器), 중기는 첨저(尖底)의 굵은새김무늬토기(太線沈 線文土器), 후기에는 첨저의 봉계리식토기, 퇴화새김무늬토기, 만기에는 원저의 겹아가리토기(二重口緣土器)로 변화된다. 또한 문양구성에서도 복잡한 것에서 단순한 것으로 변화하며 만기에는 문양이 대부분 소멸하여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無文土器)로 이어진다.

 

특히 중기 이후부터 갈돌(石棒)과 갈판, 굴지구, 탄화곡물 등 농경과 관련된 유물이 급격하게 증가되는 것은 원시적인 농경 가능성을 추정하게 한다.

 

최대 규모의 남해안 신석기시대 무덤

 

우리나라의 동·남해안지역의 신석기시대 무덤유적은 고성 문암리, 춘천 교동, 울진 후포리·부산 동삼동·범방패총·통영 욕지도·상노대도 산등·여수 안도 등이 있다. 이 무덤들은 독(甕棺), (土壙), 동굴, 그리고 돌무지(積石)나 깐돌(敷石) 형태이다. 독무덤(甕棺墓)은 조기(기원전 5,000년경)에 나타나 중기(기원전 2,000년경)까지 이어지고 있고, 돌무지 혹은 깐돌 형태의 무덤은 전기(기원전 3,000년경)부터 만기(기원전 1,500)까지 존속된다. 무덤에서는 귀걸이·팔찌·발찌 등의 인골 착장 장신구와 대형 돌도끼·낚시바늘·돌화살촉·작살 등의 생활용구들이 부장 되었는데, 희귀품의 부장 유무는 피장자의 신분이나 위계의 분화로 이해하기도 한다. 아직 신석기시대 장제와 사후관념, 나아가 신석기인의 형질학적 해석은 미진한 편이며, 계속적인 발굴 자료의 축적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이번에 조사된 부산 가덕도 장항유적의 사례는 이러한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가덕도 장항유적은 섬의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다. 가덕도는 부산과 거제도 사이에 위치한 부산에서 가장 큰 섬으로 진해만으로 들어가는 해로의 관문이다. 조사는 한국문물연구원에서 2010년부터 2011년까지 실시하여 신석기시대 전기의 대규모 묘역(인골 48개체)과 구덩(竪穴) 100여 기, 전기에서 후기까지의 돌무지유구(集石 遺構) 90여 기가 발견되었다. 전기의 묘역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로 돌무지유구, 구덩 유구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묘역에서는 파손되지 않은 100여 개의 토기를 비롯하여 옥제 드리개, 문양이 시문된 골제품, 상어 이빨 등 인골에 착장된 유물들이 확인되어 신석기시대 계층화된 사회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 묘역의 지근거리(至近距離)에 위치한 연대도의 인골 13개체의 묘역과 욕지도·상노대도 유적의 묘역 등으로 보아 이 일대에 대규모 묘역을 조성한 집단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 중기만기에 이르면 유적의 해안선에서 야외화덕으로 추정되는 돌무지유구가 열상으로 나열되어 있어 장항유적이 생산을 위한 곳으로 변화한 것을 알 수 있다. 가덕도 장항유적은 크게 풍화암반층-사질점토층-혼토패층(모래층) 순으로 퇴적되어 있고, 세부적으로 12개 층으로 구분된다.

 

자세히 살펴보면, Ⅰ~ Ⅷ층은 모래를 기반으로 하는 혼토패층으로 겹아가리(二重口緣), 굵은새김무늬(太線 沈線文), 밀집빗금무늬(短斜集線文), 퇴화새김무늬 등의 유물이 주를 이룬다. 이 혼토 패층은 중기 이후 해수면의 상승에 따라 형성된 층이다. 묘역이 확인된 Ⅸ~Ⅹ Ⅱ층은 패각의 혼입이 없는 갈색계 사질점토층으로 덧무늬와 찍은무늬, 지두문(指頭文) 등 전기의 토기가 주를 이룬다. 광루미네 센스(luminescence) 분석(OSL) 결과에서도  층은 B.P. 6400, 층은 B.P. 6700, ⅩⅠ 층은 B.P. 7200년을 전후한 시기로 신석기시 대 전기의 유구와 유물임을 알 수 있다. 사질점 토층은 육성층으로 신석기시대 전기에는 현재 보다 해수면이 낮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자료는 남해안의 해수면 변동 및 기후변화 연구 등의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신석기인들의 장례모습

 

가덕도 장항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 전기에 해당되는 매장 인골 48개체와 다량의 부장용 토기가 출토되었다. 인골은 대체로 층과 층 경계면에 안치되어 있었고, 일부 중첩되어 무덤이 사용되었는데 집단이나 시기적인 차이라기보다 매장시점의 시간적 차이로 여겨진다. 또한 인골 주변으로 무덤구덩이(墓壙) 및 봉토(封土) 등의 시설은 확인되지 않지만 훼손없는 인골과 주변에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묘역으로 볼 수 있다.

 

이런 특징은 남해안지역 무덤유적 대부분에서 확인된다. 연대도의 경우는 일부 인골의 무덤구덩이가 남아 있으나 깊이와 규모로 볼 때 인골을 매장하기 위한 시설로 보기는 어렵고 지면을 정리한 정도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동물에 의한 인골의 훼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유기물을 이용한 초장(草葬) 등의 매장의례를 추정하게 한다. 한편 가덕도 장항유적에서는 인골이 출토되지는 않았으나 보통의 야외화덕과 다른 형태의 돌무지유구가 다수 확인되었다.

 

인골과 동일 시기의 돌무지유구는 중기의 야외화덕과는 다르게 구조와 평면 배치 상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형태는 부천 시도패총· 범방패총·율리패총 등에서 조사된 바 있으며, 분묘나 의례와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앞으로 더 많은 발굴사례가 축적되면 돌무지유구의 기능도 명확해질 것이다. 가덕도 장항유적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상태가 양호한 인골의 출토일 것이다.

 

인골은 배치상태로 보아 등고선에 평행한 남북방향으로 안치하였고, 두향은 대 체로 북서쪽과 북동쪽이다.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두향은 유적에 따라 다른데, 안도패총은 북동쪽, 연대도패총은 서쪽방향으로 주로 바다를 향하고 있다. 주검을 처리하는 방식에는 기본적으로 펴묻기(伸展葬)와 굽혀묻기(屈葬)가 모두 확인된다. 인골 48개체 중에서 매장자세를 확인할 수 없는 17개체를 제외하면, 굽혀묻기 23개체, 펴묻기 8개체로 굽혀묻기가 74%를 차지한다.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매장방법이 대부분 눕혀펴묻기(仰臥伸展葬)인데 반해 가덕도 장항유적은 굽혀묻기의 비율이 높은 점이 특징적이다.

 

펴묻기된 8개체의 인골은 모두 다리를 곧게 펴고 있으며, 일부 양팔을 가슴 또는 배 위에 올린 경우도 있다. 유적 중앙에 위치한 8호 인골의 경우, 좌오른쪽 팔꿈치관절과 무릎관절이 곧게 펴진 상태에서 무릎은 내측으로 모아져 있다. 인골 위를 토기로 덮었고, 주변으로 완 3, 적색 안료 2점이 출토되었다. 굽혀묻기된 23개체 인골은 다리를 자상으로 대퇴골과 종아리를 묶어 놓은 것과 다리를 꺾어 하반신 전체를 상반신과 함께 묶어놓은 것 등이 있다. 양손은 대체로 가슴 위에 올려놓았으며 두개골은 발치를 바라보고 있다.

 

15호 인골의 경우 좌 오른쪽 팔꿈치관절이 굽어져 골반위로 내회하고 무릎은 내측으로 모아져 있으며 종아리는 대퇴골 뒤쪽으로 꺾여 있다. 오른쪽 요골은 이탈하여 흉골위에 위치한다. 또한 매장시 토기를 시상대로 사용하거나 인골 위를 토기나 돌로 덮는 경우가 있다. 17호 인골의 경우 토기를 시상대와 덮는데 이용하였고, 27·38호 인골의 경우 인골 위에 2030cm의 깬돌(割石)을 덮었다. 그리고 2호 인골은 두개골 밑에 돌베게(頭枕石)로 추정되는 깬돌이 놓여 있다.

 

인골의 형질인류학적 접근

 

가덕도 장항유적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굽혀묻기는 일본의 양상과 비교해도 팔과 다리를 더 강하게 굽힌 모습으로 가덕도 만의 특징을 나타내며, 이러한 굽혀묻기를 김재현은 가덕도식 굽혀묻기라고 명명하였다. 가덕도식 굽혀묻기는 팔과 다리의 관절이 모두 심하게 꺾여 있어 죽은 후 즉시 또는 경직이 풀린 후에 강굴(强屈)된 형태를 유지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죽은 후 어느 시점에 염과 같은 의례행위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36호 인골의 경우 가덕도식 굽혀묻기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다른 매장사례들과 달리 오른쪽 대퇴골과 경골의 원래 위치가 바꿔져 있다. 이것은 주검 매장 이후 다리의 관절을 연결하는 인대가 부식하여 정강이뼈와 분리되어진 흔적이다.

 

성별이 확인된 인골은 전체 18개체에서 남성이 8개체, 여성이 10개체로 남녀 성비가 비슷하다. 또한 연령별로도 20대에서 50대까지 골고루 분포하는 편이어서 일반적인 묘지로 판단된다. 그리고 대퇴골과 상완골을 이용해 추정한 키는 남성은 평균 157.8±7.33cm이며 여성은 평균 146.8±7.99cm로 추정된다.

 

무덤에서 발견된 옥장식 무덤에서는 토기·석기·흑요석·짐승뼈(獸骨조개팔찌(貝釧) 등이 출토되었다. 교역의 산물로 이해되는 흑요석은 조사지역 전반에 산재해서 200여 점이 출토되었다. 대부분 특정한 용도를 알 수 없는 박편이지만, 화살촉을 비롯해 2차 가공이 이루어진 석기도 수점 확인되었다. 석기는 돌도끼 4, 숫돌 1점이, 장신구로는 대형 옥제 드리개(垂飾)(pendant) 1, 투공된 상어이빨 1, 조밀하게 홈이 파진 짐승뼈 1, 조개팔찌 20여 점 등이 출토되었다.

 

신석기시대 옥제품은 출토사례가 매우 드문 유물로 울진 후포리, 춘천 교동, 통영 연대도, 부산 범방, 고성 문암리, 부산 동삼동 등지에서 12점이 출토되었다. 이에 반해 장항유적은 무덤과 구덩이유구 에서 옥제품 6점이 출토되었다. 인골에 착장되어 확인된 드리개는 부산 장항유적을 비롯해 부산 범방패총, 울진 후포리유적에서 발견되었으며, 그 외 고성 문암리유적·울산 처용리유적·제주도 공항유적 등에서 옥제 귀걸이가 출토된 바 있다.

 

인골에서 출토된 옥제 드리개는 대부분 펜던트(pendant)의 형태이나 장항유적에서는 관옥의 형태로 출토되었다. 그리고 인골 2호에서도 사슴의 다리뼈를 가공하여 드리개로 사용한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형태를 하고 있으며 표면에는 기하학문의 작은 홈들이 파져 있다. 유사한 형태의 장신구가 완도 여서도패총에서 발견된 적이 있다. 이러한 장신구는 중국의 선사시대 유적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장신구이나 남해안 지역의 다수 유적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동아시아의 전반적인 문화교류 관계의 증거로 추정된다.

 

또한 조개팔찌는 다수의 유적에서 많은 양이 출토되었으나 인골이 착장한 형 태로 출토된 유적은 안도패총·산등패총·장항유적 뿐이다. 특히 조개팔찌(패륜) 20여 개를 연결하여 목걸이를 만든 것은 장항유적이 첫 사례이다. 인근의 동삼동 패총, 범방패총에서는 제작과정의 조개팔찌가 다량 출토된 바 있다. 조개팔찌는 신석기시대 보편적인 장신구로 그 용도에 대해 손목 장신구로 보는 경향이 많았으나 이번 조사결과를 통해 볼 때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무덤의 토기는 대부분 파손이 되지 않은 상태로 출토되었다. 소형 토기는 인 골의 발치와 허리에 부장되었고, 대형의 호형, 심발형토기는 인골과 1m 가량 떨어져서 23점이 부장되었다. 문양은 대부분 조기의 덧무늬이나, 기형은 영선동식토기와 유사한 원저의 기형이다. 이는 조기에서 전기로 이행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형의 옥제 드리개와 다량의 조개팔찌, 다량의 부장용 토기는 한국 신석기유적 전체에서도 보기 드문 사례로 피장자의 특별한 지위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아가 피장자의 성별性別 또는 혈연관계 등에 따른 부장유물 차이도 생각할 수 있다.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들

 

가덕도 장항유적에서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신석기시대 전기의 묘역과 묘 시설로 추정되는 돌무지유구 등이 발견되면서 신석기시대 매장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남해안지역에서 인골이 확인된 유적은 입지와 출토유물, 좁은 공간에 여러 개체의 인골을 매장하는 행위 등 유사한 양상으로 일종의 문화권을 설정할 수 있다. 다만 모든 유적을 동시기로 보기 어렵기 때문에 세밀한 편년을 통한 문화권 설정이 필요하다.

 

또한 가덕도 장항유적에서는 무덤유구와 함께 약 500점에 이르는 흑요석이 출토되었다. 이곳이 묘역의 공간뿐 아니라 석기제작 장소였음을 추론하게 해주며,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 규슈 지역과의 교류를 추정해 볼 수 있다. 남해안지역 신석기시대 다수의 유적에서는 흑요석과 죠몽(繩文)토기 등이 출토된다. 지금도 후쿠오카 (福岡)-이끼(壹岐島)-쓰시마(對馬島)-장항유적을 잇는 해로는 일본과의 최단거리 교통로이다. 따라서 장항유적의 신석기인들은 광역적 교류를 통해 흑요석의 원석획득·제작· 분배 등의 과정을 행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방법과 경로로 원석을 획득했는가는 현재로서 알 수 없으며, 죠몽인들과의 교환물이 무엇인지도 아직 의문으로 남는다. 가덕도 장항유적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신석기시대 전기 최대 규모의 묘역일 것이다. 매장방법에 있어 굽혀묻기가 처음 확인된 유적이며, 다량의 옥 장신구와 조개팔찌 등의 껴묻거리는 신석기시대 사회적 지위의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앞으로 가덕도 장항유적 출토 묘역과 인골에 대해 더욱 정밀한 분석이 이루어진다면 한반도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신석기시대 매장의례를 비롯한 사회상 등을 규명할 수 있는 획기적 단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문물연구원 김상현

(출처; 2011 한국고고학저널,

http://portal.nrich.go.kr/kor/journalUsrDtlView.do?menuIdx=801&idx=&d_idx=249)

 

 

2011 2 17일자 연합뉴스 기사 8천 년 전 신석기시대 공동묘지 발견 

 

 

15호 인골

 

가덕도 신항 예정지서..인골 26구 출토
 8천 년 전 무렵 신석기시대 초기에 만든 공동묘지가 부산 가덕도 신항 예정지에서 발굴됐다. 이곳에서는 26구에 달하는 인골이 확인됐다.


이 묘지는 현재까지 보고된 신석기시대 공동묘지 중 연대가 가장 오래됐을 뿐만 아니라 규모 또한 최대로,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한국문물연구원(원장 정의도)은 부산 강서구 성북동 가덕도 1194-2번지 일대 부산 신항 준설토 투기장사업 부지 동단을 발굴한 결과 신석기시대 조기(早期) 혹은 전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집단 묘역(墓域)을 확인했다고 17일 밝혔다.


조사결과 신석기시대 문화층 중에서도 제5층으로 드러난 이 공동묘지는 당시 사람들의 집단 생활공간으로 보이는 집석(集石. 돌무더기) 시설과는 공간 배치가 뚜렷이 구분된다는 점에서 의도적으로 묘역과 생활공간을 분리해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조사단은 덧붙였다.


특히 이 묘역에서는 모두 26명에 달하는 인골이 확인됐다. 이들 인골은 서로 중첩되지 않고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점에 미뤄 공동묘지임이 확실하다고 정의도 원장은 전했다.

 

 

 

   

시신매장 방식으로 볼 때 인골은 현재까지 시신을 곧게 편 신전장(伸展葬) 3, 팔다리를 묶은 채 굽힌 굴장(屈葬) 7구로 드러났으며 머리는 모두 북쪽, 혹은 북동쪽으로 둔 것으로 밝혀졌다.


무덤구덩이인 묘광(墓壙)이나 봉토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토기를 비롯해 석기와 옥 등 부장품이 함께 발굴됐다.


깬 토기를 시신 밑에 깐 인골도 보고됐다. 이들 토기는 인골 하부에 깔거나 주변에 깐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인골 위에 덮은 사례도 발견됐다. 나아가 편평한 깬돌을 머리에 받친 채 그 주변에  모양으로 다른 깬돌을 두른 시신도 드러났다.


어떤 인골의 좌측 팔 옆에서는 황화수은이 주성분인 주사(朱砂)나 산화철 계통으로 생각되는 붉은색 안료가 출토되기도 했다.


정 원장은 "인골 주위로 완전한 모양을 갖춘 토기가 집중 확인돼 이를 부장품으로 묻었을 가능성을 짐작케 한다."고 말했다.


대형 옥 제품을 착용한 인골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번에 발견된 옥 제품은 강원 고성 문암리 유적에서 출토된 옥결이라 일컫는 일종의 옥 귀걸이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이른 시기의 옥제품으로 추정된다.

 

 

 

옥제품

   

정 원장은 "융기문(隆起文. 돋음무늬)이나 압인문토기(押引文. 찍어눌러 만든 문양) 토기 등으로 보아 묘역이 조성된 시기는 신석기시대 조기(早期) 혹은 전기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시신을 매장하는 방법 등에서 일본 조몽문화와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면서 "묘역과 인골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이뤄지면 한국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신석기시대 매장 의례를 비롯한 사회상의 규명에 획기적인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태식 기자

(출처;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2/17/0200000000AKR20110217066800005.HTML?did=1179r)

 

다음카페 분자인류학논단 초재의 글 〈<한국 가덕도 장항유적 출토 인골의 DNA 분석소개 및 해설

 

2014 KBS파노라마 <코리안 이브>라는 프로그램에서도 가덕도 장항유적이 언급된 바 있는 데, 형질인류학적으로 가덕도 장항의 고인골은 한국인에는 드문 장두형(머리의 앞뒤가 긴 두상, 현대 한국인은 주로 머리의 앞뒤는 짧은 단두에, 머리의 위아래가 긴 고두가 다수)으로 유럽인에 가깝고, 중앙대 연구진이 이 유적의 고인골들에 대한 초보적인 조사를 통해, 17개체 중에 유럽인들에 주로 나오는 모계 하플로인 H가 있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

 

2019년 말 부산에 위치한 한국문물연구원에서 발간하는 고고학 관련 저널인 <문물연구>에 비로소 가덕도 장항에서 발굴된 고인골을 대상으로 한 <한국 가덕도 장항 출토인골의 DNA분석>이라는 제대로 된 분자인류학 연구 논문이 나왔는데, 아마 최초로 한국에서 출토된 고인골의 상염색체 DNA에 분석이 나온 논문이 아닐까합니다. 한국에서 그동안 고인골의 분자인류학적 분석이 미토콘드리아 DNA분석에 집중된 원인은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질내 수백개나 존재하는 세포소기관이기에 남아있는 유전정보가 극히 빈약한 고인골에서도 채취할 수 있는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한반도에서 출토된 고인골에 대한 최초의 상염색체 분석을 한 이 논문의 저자들은 아쉽게도 한국인이 아닙니다. 일본에서 고인골 관련 분자인류학 연구를 활발히 하고 있는 국립박물관 인류학 연구부의 시노다켄이치(篠田健一), 칸자와히데아키(神澤秀明) 와 이들과 같이 큐슈 서북부의 시모모토야마이와카게(下本山岩陰)유적의 야요이시대 고인골에 대한 논문을 공저했던 야마나시대학(山梨大学)의 카쿠다츠네오(角田恒雄), 아다치노보루(安達登)  4명입니다. 아마도, 이들이 한반도 남해안과 교류가 많았던 큐슈지역의 죠몽인과 야요이인을 연구하는 연장선에서, 가덕도 장항 고인골의 존재를 알고, 문물연구원측에 자료의 제공을 요청해서, 이번 연구가 이루어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

 

1)      모계 미토콘드리아DNA 하플로그룹

 

<1> 가덕도 장항유적 고인골의 미토콘드리아 DNA 하플로 그룹

 

 

 

가덕도 장항 유적에서 나온 고인골  중에서 분자인류학적 분석을 위해 제공된 4개의 고인골 샘플 중에  7번과 48 샘플은 상염색체 전체에서도 유의미한 분석이 가능한 수의 SNP 획득하지 못했음은 물론, mtDNA 하플로 그룹도 확정하기 어려웠습니다. 2번과 8 샘플은 상염색체 분석이 가능함은 물론,  mtDNA 하플로 그룹도   있었는데결과는 위의 표와 같고모계 하플로와 상염색체 분석이 가능했던 2번과 8 샘플 모두유전자 분석결과에서 부계 Y하플로 분석이 가능하지 않은 여성인 것으로 나왔습니다따라서한국에서 출토된 고인골에 대한 제대로  부계 Y하플로 분석이 나온 논문은 다음 기회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장항 샘플 2번이 속한 D4b 현대 한국인에서 6.36%,8번이 속한 D4a*7.7%(Hong et al. 2014)  나타나고, D4b D4a 속한 상위의 D4 하플로그룹은 전체적으로는 27~30% 정도로 한국인에게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모계 mtDNA하플로그룹임은 물론일본인(33%), 북방한족  많은 동아시아 인구집단에서도 높은 비율로 나타납니다또한장항지구 고인골보다는 휠씬 시간이 지난 후이지만지리적으로 가까운 경남 사천군 늑도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유적에서 21개체의 확인 가능한 유골들 중 11개체가 D4 하플로에 속하고  2개체가 D4b였습니다그러므로발굴된 고인골의 수가 무척 적고시대간의 간격도 크지만적어도모계 mtDNA하플로 그룹 D4 한반도에 정착한 역사는 적어도 신석기 초기 정도로 오래되고청동기 시대를 거쳐서현대에까지 이어지면서한반도인들의 주류 모계 하플로의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있습니다.

(출처; 카페 분자인류학논단, cafe.daum.net/molanthro/I4qd/119)

 

3.20 키토이문화; 7000년 전~6000년 전(BC 5,000~BC 4,000)

1880년 비트콥스키가 키토이 하천에서 발굴을 시작하면서 키토이 신석기시대 문화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러시아혁명 전기에 주로 러시아 지질학회가 앙가라 강 유역의 석기시대 유적을 발굴하면서 키토이문화를 확인하였고, 1920~1960년대 오클라드니코프에 의해 앙가라 댐 수몰지구 조사, 부리야트지역 조사 등 체계적인 발굴이 실시되었다. 1950년대 이후에는 이르쿠츠크 고고학조사단이 무덤유적 및 주거유적을 발굴하였다. 자바이칼에서는 19세기에 처음 신석기시대 유적이 확인된 이후 1980년대부터 이바니시나에 의

해 다양한 문화기가 정리되었다.

 

19세기 말 고고학 발굴을 통해 알려졌으며, 시베리아 고고학의 서장을 여는 역할을 하였다. 프리바이칼지역은 바이칼 호수부터 앙가라 강 유역까지를 일컫는데, 이르쿠츠크주 및 크라스노야르스크의 서부, 크라스노야르스크 내부의 에벤키자치구 남부 등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역들을 포함한다.

 

신석기시대 중기에서 말기에 걸친 문화로 프리바이칼에서 최초로 정식 발굴된 고고문화이다. 1880년도 비트콥스키에 의해 명명된 이후, 시베리아고고학이 프리바이칼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된 문화이다. 키토이문화의 고분은 부정형의 얕게 판 토광(석판 설치 예는 거의 없음), 신전앙와장, 시신 주위에 뿌린 황토, 토기는 적은 양만 출토되나 낚시바늘 등 어로도구가 많이 출토된다는 사실, 골제 원통막대기·물고기형 장식품·새머리가 새겨진 골제 조각 등의 장식품 출토라는 특징이 있다. 연대는 B.C.5,000년기~B.C.4,000년기 중반이다.

 

 

 

키토이문화 출토유물(최몽룡 외 2003:167)

 

(출처; 김동훈, 시베리아동부 바이칼 일대의 고고유적과 문화 프리바이칼 소해협과 자바이칼 울란우데의 주요유적을 중심으로, 러시아연구 제21권 제2)

 

3.21 이사코보문화; 7000년 전~5000년 전(B.C.5,000~B.C.3,000)

오클라드니코프에 의해 발굴된 이사코보 고분을 통해 명명되었고, 앙가라 강 유역에 주로 분포하며 고분 자료가 다수이다. 신전앙와장으로 묘광은 깊지 않으나 시신 주위 및 상부를석판으로 덮었으며, 일부 석판은 지상으로 노출되어 마치 즙석한 것처럼 보인다.

 

주로 단인장이며, 시신 주변에 황토의 흔적이 확인된다. 사냥과 관련된 유물이 공반 출토되는데, 삼각형 석촉이 거의 모든 무덤 안에서 날부분이 발 쪽을 향한 채 군집되어 발견되었다. 시신의 발끝에 놓인 토기는 높이·구경 20cm 내외의 첨저포탄형으로 토기 표면의 망상문으로 보아 표면을 그물 같은 것으로 덮어서 두드린 것으로 추정되며, 그 외 구연부 근처에 공열문 혹은 단사선문이 존재하는 특징이 있다. B.C.5,000년기 후반~B.C.3,000년기 중엽 사이에 존속한 고고문화이다.

 

 

 

이사코보문화 출토유물 (최몽룡 외 2003:170)

 

(출처; 김동훈, 시베리아동부 바이칼 일대의 고고유적과 문화 프리바이칼 소해협과 자바이칼 울란우데의 주요유적을 중심으로, 러시아연구 제21권 제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