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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3.22 부하문화~3.28 통영 상노대도패총 본문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3.22 부하문화~3.28 통영 상노대도패총
대야발 2024. 2. 8. 18:11《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3.22 부하문화; 7000년 전~6400년 전(BC 5000~4400년)
『중국 내몽고자치구 파림좌기(巴林左旗) 부하구문(富河溝門)유적을 통해 확인되었다. 부하문화(富河文化)는 서납목륜하(西拉木倫河) 이북지역인 오이길목륜하(烏爾吉木倫河) 유역에 집중하고 있으며, 조보구문화(趙寶溝文化)의 다음 단계에 속한다. 이전 문화기의 조보구문화와 관련되며, 1962년에 조사된 파림좌기(巴林左旗)의 부하구문(富河溝門)유적을 통해 그 특징을 알 수 있다. 부하문화의 연대는 기원전 2700년경으로 보고되고 있다.
부하구문유적에서 출토된 주거지는 37기이며, 대부분 방형을 이루고 있다. 내부의 중앙에는 위석노지(圍石爐址)를 설치하고 있는 구조이다. 이 유적에서는 원형인 주거지도 4기가 조사되었으며, 노지는 원형과 방형이 있다. 유물은 토기를 비롯하여, 농경 관련 도구, 사슴, 멧돼지, 개 등의 동물뼈가 출토되고 있어 수렵과 농경을 겸한 생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토기는 심복통형관(深腹筒形罐)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직복발(直腹鉢), 곡복발(曲腹鉢), 두(豆), 소배(小杯) 등이 소량 보이고 있다. 문양은 빗살점문이 종방향으로 ‘之’자문을 연접하여 시문하고 있으며, 이 ‘之’자문토기가 부하문화토기의 특징이다. 부하문화기의 통형관은 조보구(趙寶溝)문화의 것과 동일하며, 문양도 유사하다. 석기는 세석기, 몸돌, 긁개, 찍개, 박편석기, 화살촉, 첨상기(尖狀器), 돌자귀, 돌삽, 돌보습, 석추 등이 있으며, 골각기는 칼, 골화살촉, 바늘, 복골(卜骨)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복골은 사슴이나 양의 견갑골을 사용하고 있으며, 은허(殷墟)의 복골이 바로 여기에서 전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하문화(富河文化)는 조보구(趙寶溝)문화의 영향을 받아 지속되었으며, 부하문화 이후에는 홍산(紅山), 소하연(小河沿) 문화로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출처; 신석기시대편 - 국가유산 지식이음 (nrich.go.kr) 부하문화(富河文化) )
3.23 길림 좌가산문화(左家山文化); 7000년 전~5000년 전(BC 5000년~BC 3000년)
『중국 길림성 농안현에 위치한다. 송화강의 지류인 이통하(伊通河)의 북안에 위치하며 농안현성에서 동북으로 4㎞ 떨어져 있다. 좌가산문화는 1985년 길림대학과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에 의해 같은 이름의 유적이 조사된 후 명명되었다. 유적의 보고자들은 좌가산1∼3기로 크게 나누었다.
좌가산1기문화 토기는 협사도(夾砂陶) 위주이며 조개가루를 섞은 것이 그 다음을 차지한다. 기종은 통형관이 일반적이며 소량의 고복관(高腹罐), 발(鉢)과 사구기(斜口器)가 있다. 구연부가 두터운 것이 특징이다. 대부분의 토기에 문양이 시문되는데, 구연부 직하부터 시문하지만 저부 쪽은 시문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양으로는 압날이나 침선의 시문기법을 이용한 평행선문과 계단상 문양이 많고, ‘人’자문, ‘之’자문, 삿자리문, 파상선문 등이 있다. 도구로는 석부나 석분, 갈돌, 갈판 등 이외에 골침, 골촉 등 다양한 골각기가 확인되며, 세석인(細石刃)도 남아 있다.
좌가산유적 1기층에서는 주거지가 1기 확인되었는데 대체로 방형을 띠며 혀 모양의 돌출식 출입구가 있다. 중앙에서 치우져 방형에 가까운 수혈식의 노지가 위치한다. 길림성 내에서 좌가산 1기와 유사한 유적으로는 농안현 원보구(元寶溝), 장령현 요정자(腰井子), 덕혜현 대청취(大靑嘴), 길림시 교외의 이도영자(二道?子) 유적 등이 있다. 심양의 신락하층문화와 유사한 면이 많으며 연대는 기원전 5000∼4000년 정도이다.
좌가산2기문화는 좌가산1기문화와 공통되는 면이 많은데, 협사도(夾砂陶)에 통형관(桶形罐)을 기본으로 하고 침선이나 압날기법의 ‘之’자문이 성행한다. 그러나 두터운 구연이 사라지고 구연에 공백부를 남기고 문양을 시문하며, 전형적인 침선계 현문, 평행선문, ‘人’자문 등이 사라지는 등 차이점도 많다. 그러나 ‘之’자문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좌가산1기와 시기적으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단계까지는 세석인과 석인촉(石刃鏃)이 확인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좌가산3기문화는 이전 시기와는 토기양상이 크게 바뀌어 대부분의 토기가 조개가루를 섞으며 좌가산문화 유물 극소량의 니질도가 확인된다. 기형은 통형관 위주이며 극소량의 사구기가 남아 있다. 문양은 토기의 상반부에만 시문되었고 주로 침선의 ‘人’자문, 삼각집선문, 격자문, 부가퇴문 등이 확인되며, 무문양의 토기가 많아진다. 연대는 대체로 기원전 4000∼3000년 정도이다. 석촉은 마제의 유엽형직기촉이 확인된다. 골침이나 골제 작살 등 다양한 골각기가 확인된다. (임상택)』
(출처; 신석기시대편 - 국가유산 지식이음 (nrich.go.kr) 좌가산문화(左家山文化) )
3.24 앙소(양사오)문화; 7000년 전~5000년 전(BC 5000년~BC 3000년)
『양사오 문화(중국어: 仰韶文化, 병음: Yǎngsháo wénhuà)는 황하 중류의 채도를 동반한 신석기의 농경문화이다. 채도가 특색으로 채도문화(彩陶文化)라고도 한다. 기원전 5000년 ~ 기원전 3000년 사이에 존재했다.
유적의 대부분은 강기슭의 대지(臺地)에 있고, 거주지와 공동묘지가 있다. 정주생활을 했고 조·수수 등을 재배하고 가축 사육과 사냥, 고기잡이도 병행했다. 간석기·뗀석기·돌식칼 등으로 수확하고, 흙을 구워서 만들거나 돌을 갈아 만든 팔찌도 애용했다.
토기로는 붉은간토기와 바탕흙에 모래알이 함유된 회도(灰陶)가 있었는데, 특히 일부 붉은간토기에 기하학무늬와 사람 얼굴 등을 그린 채도는 제사라든지 묘장공헌(墓葬供獻)에 쓰였다. 성인(成人)은 공공묘지 안의 구덩이에 매장되었으며, 어린 아이는 옹관장(甕棺葬)으로 집 근처나 마루 밑에 묻혔다. 유적은 하남성(河南省) 서부, 산서성(山西省) 남부, 섬서성(陝西省) 중부 등지에 분포되어 있으며, 대표적 유적으로는 산시 성 서안시(西安市) 반파(半坡) 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반파 유적과 하남성 섬현(陝縣)의 먀오디거우(廟底溝) 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먀오디거우 유적이 있다. 시간적으로는 반포 유적쪽이 더 오래되었다.
양사오 문화는 황하 상류에 전파되어 간쑤양사오(甘肅仰韶)문화의 탄생과 산둥(山東)의 농경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중원에서는 이 문화에 뒤이어 룽산 문화(龍山文化)가 성립했다. 최근의 새로운 조사를 통해 허난 성 신정 현(新鄭縣)의 배리강(裵李崗)과 허베이 성 무안 현(武安縣)의 자상(磁上) 등에서 양사오 문화보다 앞서 있었던 초기 농경문화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출처; 양사오 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
3.25 울주 신암리유적(蔚州 新岩里遺蹟); 7000년 전~5000년 전(BC 5000년~BC 3000년)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 일대에 위치한다. 유적이 위치하는 신암리부락은 울산시와 부산시의 중간 위치에 해당하는 해안부락으로 1019번 지방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유적 주변은 해발 100m 이내의 야산지대로 둘러싸여 있으며 유적의 정북향에 솟아 있는 해발 209m의 용곡산에서 발원한 산간지류가 인근마을인 용리(龍里)와 나사리(羅士里) 사이로 흘러 신암리 일대의 저평한 충적지대를 지나 바다로 유입된다. 유적 북쪽의 용동마을 주변의 평지성 구릉지대에는 30여 기의 지석묘가 분포하고 있다.
신암리유적은 1935년 일본인 학자 사이토[齋藤 忠]에 의해 즐문토기의 존재가 보고된 바 있고, 1966년에는 임효재의 시굴에 의해 즐문토기편과 함께 융기문토기의 존재가 확인되면서 유적의 중요성이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974년에 유적내의 두 지점을 선정하여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즉, 제1지구는 신암리마을 가운데 위치한 융기문토기유적이고, 제2지구는 서생초등학교 뒤편의 즐문토기유적으로 이들 양 지구는 가까이 위치하면서도 출토 유물의 성격과 양상은 다르다. 그 후 1988년 지표조사를 통해 새로이 두 곳의 유적이 추가로 확인되어 제3지구와 제4지구로 보고됨으로써 유적이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현재까지 조사성과로 보아 신암리유적은 4개지구로 구분할 수 있으며, 현재는 각종 개발 등으로 대부분 파괴 소멸되어 유적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신암리 제1지구는 신암리 마을중간에 위치하며 진하(鎭下)·서생(西生)을 잇는 1019번 지방도와 접하는 서생면 신암리 산 69 일대이다. 제1지구는 융기문토기를 중심으로 하는 단일 문화층 유적으로 야산 지대가 끝나는 도로변에 있으며 이곳에서 해안까지의 거리는 200m 정도이다. 1지구에서는 생활유적으로 추정되는 석렬유구가 확인되었는데, 지표하 25∼90㎝의 깊이로 경사져 나타나며 부채꼴모양으로 휘어지는 형태이다. 대부분의 유물은 석렬구조의 내부에 채워진 부식된 흑갈색진흙층에서 출토되었으며 석렬의 바로 윗면에서도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 유물은 토기가 대부분이며 그 밖에 토제품과 석기가 있다. 토기의 형태는 평저 혹은 원저의 발형토기 또는 심발형토기이며 문양은 융기문토기가 압도적이며 이 밖에 약간의 침선문토기와 무문토기가 있고 주칠토기편도 있다. 융기문토기는 문양대가 거의 융기대문, 융기선문이 독립 혹은 복합적인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기에 침선문이 첨가되기도 한다. 석기는 박편석기와 부분적으로 마연한 석기가 있는데 돌도끼, 긁개, 격지, 몸돌, 숫돌, 공이 등이며 특히 몸돌과 격지의 출토량이 많다.
신암리 제1지구는 출토 유물의 양상으로 보아 융기문토기를 중심으로 하는 유적으로 판단되지만, 토기 가운데 일부는 침선문토기의 문양요소가 복합되고 있어 융기문토기 단계로부터 침선문토기 단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유적으로 보인다. 융기문토기 중 일부는 일본의 조몬[繩文]토기 특히 구주지역의 도도로키식[轟式]토기와 유사한 것도 있다. 유적의 형성 시기는 융기문토기의 형식적인 특징으로 보아 신석기시대 조기 후반대인 기원전 5000년 전후로 추정된다.
신암리 제2지구는 신암리 223일대의 서생초등학교 구내에 위치하는 포함층 유적이다. 발굴조사 당시 이 학교가 서생중학교였으나 1977년 신축 이전해 가고 여기에 서생초등학교가 옮겨 왔다. 이곳은 융기문토기가 출토되는 제1지구에서 동쪽으로 불과 50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낮은 구릉의 말단부에 위치하고 있는 제2지구는 구릉 하단부의 바닷가에 형성된 낮은 충적대지에 자리 잡고 있다. 제2지구에 대한 조사는 짧은 기간 동안 3개의 트렌치를 설정하여 조사한 것이 전부이다. 표토인 Ⅰ층은 경작층으로 4∼10㎝ 정도의 두께이고 그 아래의 Ⅱ층은 갈색사질토층이다. Ⅲ층은 회갈색 혹은 회흑색사질토층인데 10∼30㎝ 정도의 두께로 Ⅰ,Ⅱ층과 마찬가지로 순수 자연퇴적층이다. Ⅳ층은 흑색사질토층으로 신석기시대 유물포함층인데 대체로 18∼66㎝ 정도의 두께로 비교적 두텁게 퇴적되어 있다.
신석기문화층에서 출토된 토기류는 융기문토기편이 전체의 4%, 압형·압인문토기편이 6%, 침선문토기편이 39%로 가장 많고 지두문토기편이 26%, 단도마연토기편과 무문양토기가 24% 정도이다.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하여 융기문토기는 거의 소멸된 단계로 파악되며 침선문과 지두문이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토기의 태토분석에서 압형문이나 압인문토기의 경우 혼화재를 서로 달리하였음이 확인되었고, 지두문토기가 점차 무문양으로 변화되는 양상이 간취되었다. 그리고 침선문토기는 격자문과 단사선문도 있으나 대부분이 집선문으로서 삼각집선문, 능형집선문이 주류이고 장사선문도 있다. 이들은 전형적인 남해안식 태선침선문계의 시문기법을 보이나 다만 격자문의 경우 침선이 가늘어지고 정연성이 떨어지며 시문면적도 좁아져 퇴화된 양상을 보인다.
제2지구의 중심 연대는 출토 유물 가운데 가장 빈도가 높은 태선침선문계토기를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신암리 제2지구의 태선침선문토기가 문양구성이나 시문기법 등이 대체로 수가리Ⅰ식토기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 기원전 3000년 전후로 추정되며 일부 토기 중에는 수가리Ⅱ식토기와 일본 조몬토기인 아타카식[阿高式]토기도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후기 단계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제2지구는 남부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단일문화층 유적으로, 출토 유물의 종류가 다양하지 못하고 유적의 성격도 단순한 편이다. 약간의 석기와 토제품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즐문토기들로서 유구에 대한 조사내용이 없어 유적의 성격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따른다.
신암리 제3지구는 신암리 274 일대에 위치하며 해안포구의 동락 구릉지에 입지한다. 유물은 해발 5m 정도의 밭으로 경작되는 곳에서 융기문토기편과 각종 석기가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융기문토기의 문양은 구연선단으로부터 일정한 공백을 두고 횡으로 점토띠를 붙여 각목 시문한 융기대문이 많으며 세선의 사선이 집선으로 시문된 융기선문도 있다. 동체 상부에 동그라미 형태의 융기문을 시문한 조몬토기편도 출토되었다. 토기의 저부는 모두 평저이며 바닥면에 엽맥흔이 찍혀 있는 것도 있다. 이 밖에 석기는 흑요석제 석촉과 사누카이트제의 작살(石?) 및 가마자키[鎌崎]형 긁개와 유견선상석기(有肩扇狀石器), 석영암제 박편석기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눌러떼기기법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결합식조침 축부가 출토되었고 조침의 축부를 만들기 위해 일차적으로 가공한 석재들도 있다. 이 밖에도 많은 양의 사누카이트 박편과 석기들이 출토되었고, 멧돼지의 이빨과 팔뼈 등 짐승뼈도 확인되었다. 제3지구 일대의 구릉상에는 적갈색 점토층이 표토를 이루고 있으며 이와 같은 유물 출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융기문토기인의 생활유적으로 판단되며 주거지가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암리 제4지구는 제1·2지구의 동북쪽에 위치하는 신암리 281 일대이다. 용리쪽에서 발원하는 작은 개울이 흘러 신암리 마을 앞의 자그마한 포구로 유입되는 곳에 유적이 형성되어 있으며 신암리에서 가장 지대가 낮은 유적이다. 개울과 바다가 만나는 부분은 저습지를 형성하고 있는데 공사를 위해 이곳에서 퍼 올린 흙에서 많은 패각과 함께 융기문토기편과 즐문토기편을 비롯하여 각종 석기와 고래뼈 등이 채집되었다. 융기문토기편은 제3지구와 마찬가지로 점토띠를 횡으로 붙이고 각목시문한 융기대문이 많으며 즐문토기편은 전형적인 남해안식의 태선집선문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문양이 없는 구연부편 가운데는 이중구연토기도 있어 출토 유물로 볼 때 시기차가 많은 양상을 보인다. 가공된 흔적이 있는 패각과 지름 10㎝에 가까운 고래뼈가 함께 출토되었다. 이처럼 제4지구는 출토 유물의 연대폭이 넓고 지형적으로 바다로 유입하는 개천의 유로에 접해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시기를 달리하는 주변의 여러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부터 유입되면서 재퇴적된 것으로 추정된다. 패각과 고래뼈 등의 자연유물의 출토 양상을 통해 볼 때 패총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신암리유적 일대는 신석기시대의 이른 시기로부터 늦은 시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유적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시기를 달리하는 단위유적들이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한 곳에서 지점을 달리하며 융기문토기유적과 즐문토기유적이 서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경우는 지금까지 찾아보기 어렵다. 그뿐만 아니라 지리적인 조건으로 볼 때에도 남부지방 신석기문화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신암리유적은 지리적으로 부산 동삼동패총을 비롯한 남해안지역의 제유적과 울주 우봉리유적 및 울산 세죽유적 등을 비롯한 동해안지역의 유적을 연결할 뿐만 아니라, 아울러 바다를 통한 생업과 주거, 원거리 교역 등 이와 관련된 많은 문제들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신암리유적에서 출토되는 도도로키식[轟式]토기와 흑요석제 석기, 가마자키[鎌崎]형긁개와 유견선상석기(有肩扇狀石器) 등은 일본열도와의 교류를 파악하는데, 석기의 재료가 되는 원석과 각종 장신구 등은 신석기시대 원거리 교역의 실상을 판명하는데 많은 정보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신종환)』
(출처; 신석기시대편 - 국가유산 지식이음 (nrich.go.kr) 신암리유적(蔚州 新岩里遺蹟) )
3.26 울산 반구대 암각화; 7000∼3500년 전
(출처; 암각화박물관 (ulsan.go.kr) )
『국보 제285호(지정명칭은 울주 대곡리 반구대암각화).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999–1 일원에 위치한다. 유적은 울산 태화강 지류에 해당하는 대곡천변에 입지하며, 자연적으로 형성된 깎아지른 절벽에 너비 약 8m, 높이 3m의 판판한 수직 암면에 그림이 집중적으로 새겨져 있다. 주변 10곳의 암면에서도 소수의 그림이 확인되고 있다. 바위의 암질은 셰일(shale)과 혼펠스(hornfels)로 구성되어 있다. 암면의 방향은 북향으로 석양이 질 무렵에만 잠시 빛이 들어오며 윗부분이 앞으로 돌출된 바위그늘[岩陰] 구조로 되어 있다. 유적 발견은 천전리암각화를 발견한 이듬해인 1971년 12월 25일 문명대, 이융조, 김정배가 천전리 각석을 답사하는 과정에서 지역주민의 제보를 통해 이루어졌다. 1984년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간한 최초의 보고서에서는 191점의 그림이 소개되었으며, 2000년 울산대학교 박물관이 실시한 조사에서 100여 점이 추가로 확인되어 모두 296점의 형상이 표현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림은 주제에 따라 크게 사람의 전신(全身)이나 얼굴을 표현한 인물상(人物象), 바다와 육지동물을 표현한 동물상(動物象), 배나 부구(浮具)와 같은 수렵이나 어로와 관련된 도구상(道具象), 그림의 주제나 형태를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미상(謎象)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인물상은 측면(側面)을 표현한 전신상이 많으며 활로 동물을 사냥하거나 두 손을 치켜든 모습, 악기로 보이는 긴 막대기를 불고 있는 모습 등은 사냥과 일종의 종교적 행위를 연상시키고 있다. 측면 전신상의 대부분은 다소 과장된 남근(男根)을 표현하고 있으며, 사지를 벌리고 있는 정면상이나 가면처럼 얼굴을 표현한 그림도 있다.
동물상들은 구체적인 종 구분이 가능할 정도로 각 동물의 형태와 생태적 특징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 동물그림에서는 고래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주암면 좌측 편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 사슴과 같은 발굽동물과 호랑이와 표범, 늑대와 같은 육식동물들은 주암면 우측 편에 많이 새겨져 있다. 구체적인 종 구분이 가능한 동물로는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참고래, 귀신고래, 향유고래와 같은 대형고래류와 바다거북, 물개, 물고기, 바다새와 같은 바다동물, 백두산사슴, 사향사슴, 노루, 고라니, 호랑이, 표범, 늑대, 여우, 너구리, 멧돼지 등의 육지동물이 있다. 고래는 대체로 20∼30㎝ 정도 크기의 그림이 가장 많으며 큰 것은 80㎝ 정도이고 작은 것은 10㎝ 정도이다. 대부분의 고래 그림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본듯한 조감적(鳥瞰的) 표현으로 머리를 위로 향해 무리지어 헤엄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측면으로 새겨진 고래의 경우는 꼬리를 엇비스듬하게 새긴 ‘비틀림 화법’을 사용하여 물고기와 구별되는 고래의 수평 꼬리를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새끼를 업고 있는 어미고래나 물 위로 도약하는 모습 등 고래의 생태적 특징을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한 그림들도 있다. 몸통을 수평으로 배를 뒤집고 있는 고래 그림은 이미 죽은 것으로 표현한 것으로 판단되며 몸통에 새겨진 줄무늬는 일종의 분배(分配) 또는 해체(解體) 선으로 여겨지며 민족지자료에서 볼 수 있는 원주민들의 고래 분배 그림과 매우 유사하다. 이와 같은 그림들은 고래와 같은 대형동물의 사냥과 분배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육지동물들은 주암면 우측 편에 집중되어 있다. 고래와 달리 대부분 측면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이는 네발 달린 육지동물의 형태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화법이다. 사슴류에서 뿔을 관찰할 수 있는 종은 백두산 사슴, 우수리 사슴, 수컷 노루 등이 있으며, 이외 몸통의 형태, 털 무늬, 꼬리와 다리 길이 등을 통하여 종 구분이 가능하다. 육식동물은 몸의 무늬와 꼬리와 다리의 길이, 어깨선 등으로 판단할 수 있다. 유적에서 이런 방법을 통해 구분할 수 있는 종류는 백두산사슴, 사향사슴, 노루, 고라니 등이 있다. 고래와 사슴류는 몸통의 내부를 모두 쪼아 표현한 그림이 많으며 육식동물은 외곽선과 무늬만을 선으로 표현한 것이 많다. 이러한 차이는 그림의 중복관계를 따져 볼 때 시간적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유적에서는 고래류, 사슴류, 육식동물의 순으로 비중을 갖고 있으며 거북과 물개, 물고기, 조류 등도 소수 확인할 수 있다. 주암면 좌측 상단에 새겨진 세 마리의 거북은 마치 무리지어 헤엄치는 고래를 인도하는 장면으로 표현되어 있다. 바다거북은 산란을 위해 초봄에서 여름 사이에 해안으로 오르기 때문에 흔히 민족지에서나 고대 신화에서는 바다와 육지를 넘나드는 상징적 동물로 해석되곤 한다. 물고기는 측면으로 표현된 상어와 물 위를 뛰는 연어로 보이는 물고기 머리부분이 표현되어 있다. 바다새 그림은 항상 고래 주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먹이를 사냥하는 고래 주위에 몰려든 바다새를 연상시킨다. 동물그림 중에서는 먼 바다를 회유(回遊)하는 대형고래와 육지동물 중에서는 짝짓기 하는 장면이나 털갈이와 무늬, 낙각(落角) 등을 통해 계절을 유추할 수 있는 그림들도 있으며, 주로 환절기와 번식기에 나타나는 생태적 특성을 표현한 그림들이다.
도구상은 사냥·어로와 관련된 것으로 배와 부구, 작살, 그물, 어살, 활 등으로 유적의 조성시기와 당시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유적에서는 그물을 이용해 고래를 잡는 장면과 호랑이를 포획하는 장면의 그림이 있다. 아직까지 선사시대 그물이 발굴된 사례는 없지만 부산 동삼동패총에서 출토된 토기표면에 찍힌 미세한 그물망 흔적을 볼 때, 당시 어로뿐만 아니라 사냥에서도 그물이 널리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흔히 목책(木柵)이나 울타리로 해석되어온 그림의 경우, 초기에 제작된 도면과 달리 실제 암면에서는 육지동물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내부 형상의 윤곽선이 물고기와 유사하여 목책보다는 어살의 형태와 유사하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를 배나 무리를 지어 춤추는 사람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국내유적에서 발굴된 사례는 없지만 일본의 조몬[縄文]시대 유적에서 연어와 숭어 잡이 어살이 확인된 바 있다. 그림만으로 이를 단정하기 어렵지만, 주제가 불분명한 이 그림을 통해 목축(牧畜)을 유추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유적에서는 고래사냥을 매우 상세하게 표현한 장면들을 볼 수 있다. 고래 주변에 새겨진 배에는 17명, 7명, 5명 가량의 사람이 승선하고 있다. 배는 뱃머리와 고물이 반달처럼 휘어져 있으며, 고래 몸통에 박힌 작살과 줄에 매달린 부구와 연결되어 있다. 이는 지금까지도 행해지고 있는 원주민들의 고래사냥에서 사용되는 도구들과 거의 동일하다.
미상은 정확한 주제와 내용을 알 수 없는 그림으로서 그림의 상태가 양호하나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주제미상(主題迷象)과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마모와 탈락 등으로 판독(判讀)이 어려운 형태미상(形態迷象)으로 세분할 수 있다. 이 중에는 일정한 패턴을 지닌 기호로 볼 수 있는 그림도 있겠지만, 유적에 표현된 그림만으로는 이를 구별해 내기는 어렵다. 기호는 실제 현실 속에서 볼 수 없는 관념적 표현물로 최소한의 반복적인 표현으로 일정한 패턴을 찾을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암각화는 단단한 돌연모를 사용해 쪼기, 갈기, 긋기 수법으로 제작되었으며 각흔(刻痕)의 깊이와 너비, 크기, 밀도, 표현기법을 통해 크게 4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돌연모와 금속으로 새긴 그림은 각흔의 형태를 분석하여 구분할 수 있다. 대체로 돌연모의 경우 단면의 형태가 ‘∪’자형이며 금속의 경우 ‘⊔’ 자형 또는 ‘∨’자형을 띤다. 이외에도 각흔의 깊이와 너비, 균일도(均一度)에서 그 차이를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유형Ⅰ은 쪼기기법을 사용해 새긴 그림으로 형상의 크기가 작고 각흔의 깊이가 얕은 편이다. 전체 형상을 점 쪼기로 표현하였으며 고래를 사냥하는 장면이나 작은 동물, 주제를 알 수 없는 그림들로 구성되어 있다. 암면에서 가장 먼저 새겨진 그림에 해당한다. 유형Ⅱ는 흔히 면 그림으로 분류되어온 것으로 쪼기기법을 사용해 그림의 내면을 모두 쪼아 내거나 일부는 자연면을 이용해 새끼고래나 작살 등을 양각(陽刻)으로 표현한 것도 있다. 고래에 박힌 작살처럼 외곽을 긋기로 마무리한 그림도 있다. 점 쪼기에 비해 그림의 크기가 크고 각흔의 깊이가 상대적으로 깊고 규칙적인 편이지만 각흔이 다소 거칠게 남아 있다. 이 유형으로 표현된 그림들은 주암면의 좌측 편에는 고래와 같은 바다동물, 우측 편은 사슴이나 늑대·여우와 같은 육지동물들을 주로 표현하고 있다. 바다와 육지 동물의 비중은 거의 비슷하다. 유형Ⅲ은 흔히 선 그림으로 분류되어온 그림으로 각흔의 깊이가 깊고 쪼기와 함께 갈기 수법을 사용하였다. 그림의 윤곽선이 비교적 매끈하게 마무리 되었으며, 쪼아 새긴 각흔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 유형에서는 바다동물이나 사슴류보다는 호랑이나 표범과 같은 육식동물의 비중이 매우 높은 편이다. 유형Ⅱ와 유형Ⅲ은 그림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그림의 주제에서도 바다동물에서 육식동물이란 뚜렷한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 유형Ⅳ는 쪼기와 함께 갈기기법으로 이전에 새겨진 그림들을 많이 훼손하고 새긴 것으로 도약하는 고래와 새끼멧돼지 그림이 있다. 전체적으로 그림이 크고 그 수도 적다. 그림의 중복관계를 통해서 선후관계를 유추할 수 있으며 후대로 갈수록 바다동물의 비중이 감소하고 육지동물과 육식류의 비중이 증가한다. 흥미로운 점은 암각화유형의 주제 변화와 신석기시대 패총에 포함된 동물유체의 비중에서 어떤 관련성을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암각화에 새겨진 그림은 단순히 사냥의 대상을 그대로 표현했다기보다는 관념적 표현물로 이를 직접적으로 비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한데에 노출된 암각화는 정확한 제작연대를 추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유적 발견 당시부터 조성연대를 두고 연구자들 간에 많은 이견이 존재하고 있다.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차는 있겠지만 대체로 신석기시대 말에서 청동기시대 초기까지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전혀 다른 주제를 담고 있는 천전리암각화가 유적에서 불과 2㎞ 내에 위치하고 있는 점, 우리나라 남부지방 전역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암각화에서 표현된 검, 동심원, 음문, 검파형, 이외 추상적인 기하문 등의 그림을 유적에서 전혀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이들 유적을 모두 동시시대로 보기는 어렵다. 최근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조성시기를 밝히려는 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분석들이 시도되고 있다. 울산과 동남해안 일대의 패총에 포함된 동물유체 분석결과와 울산만 고(古)환경 연구 등에 따르면, 유적 조성의 중심연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7000∼3500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동삼동패총 출토 사슴선각문토기, 그물문토기, 조개가면, 양양 오산리유적 출토 얼굴상, 통영 욕지도유적 출토 멧돼지 토우, 울산 신암리유적 출토 여인상, 울산 세죽유적 출토 물개 토우 등 암각화에 표현된 그림의 주제와 관련된 많은 유물들은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볼 수 있다. 특히 동삼동패총 출토 사슴선각문은 양식적으로 반구대 사슴그림과 동일한 양식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2005년 창녕 비봉리유적에서 배가 발굴된 바 있으며, 2010년 한국문물연구원이 실시한 울산 황성동유적 발굴조사에서는 고래사냥을 실증적으로 밝혀주는 작살이 박힌 고래뼈가 출토되었다. 보다 자세한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이들 유적은 신석기시대 전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당시의 생업 환경, 사냥과 어로 도구, 관련 유물, 시대적 맥락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볼 때 유적의 조성연대는 최소한 신석기시대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유적이 알려지기 전까지, 인간이 바다에서 처음으로 고래를 사냥한 시기는 10∼11세기로 추정되고 있었다. 반구대암각화는 이 보다 수 천 년이나 앞선 그림으로 인류 최초의 포경유적일 뿐만 아니라 북태평양 연안지역의 선사시대 해양어로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이상목)』
(출처; 신석기시대편 - 국가유산 지식이음 (nrich.go.kr) 반구대암각화(蔚州 盤龜臺岩刻畵) )
3.27 부산 범방유적(釜山 凡方遺蹟); 7000년 전~4000년 전(BC 5000년~2000년)
『부산광역시 강서구 범방동 175 일원에 위치한다. 2001년 부산 아시안게임 승마경기장 및 부산·경남 공동경마장 조성부지에 대한 사전 문화재 지표 및 시굴조사 결과 부산 범방패총 인접지역에서 타제석부, 즐문토기 등이 출토되는 유물포함층이 확인됨으로써 발굴되었다. 발굴은 유적 중 일부만 실시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보존되어 있다.
유적은 낙동강 하류역의 하구변에 입지하며, 1991년 부산박물관에서 발굴한 범방패총과는 북쪽으로 연접해 있다. 유적 주변에는 부산 수가리·북정, 김해 농소리·화목동 유적 등이 분포하고 있다.
유적은 동서로 뻗은 금병산에서 갈라진 동남향의 저구릉을 따라 해발 4∼7m 선상에 길게 형성되어 있으며, 유적 전방은 저습지가 퇴적되어 만들어진 충적대지가 형성되어 있다. 유적 주변은 현재 전체가 개간과 가옥의 축조 등으로 인해 계단상으로 평탄하게 조성되어 있으나 조사결과 문화층의 퇴적상태, 집석노지 등 유구 설치면의 위치, 유적 주위의 지형·고환경 등으로 보아 당시는 해안과 접한 완만한 저구릉지역으로 추정되며, 유적 형성 이후(조기 이후) 어느 시점에는 유적지 가까운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유적은 고려시대 이후 현재까지 계속해서 전답으로 이용되어 신석기시대 문화층이 부분적으로 훼손 또는 유실되었으나 유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발굴되지 않은 범위까지 포함한다면 그 규모는 매우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범방유적의 퇴적상태는 조사지점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으나 기본 층위는 동일하다. 전체 층위는 10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문화적으로 의미있는 층위는 7개 층뿐이다. 현재 층위 상태가 잘 보전되어 있는 A지구의 경우는 표토층(Ⅰ층), 고려·조선시대 경작 및 유물포함층(Ⅱ층), 갈색부식토층(Ⅲ층), 갈색사질토층(Ⅳ층), 회색모래층(Ⅴ층), 담황색모래층(Ⅵ층), 회색사질토층(Ⅶ층), 생토층인 풍화암반의 기반층(Ⅷ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층위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형식학적 특징, 유구의 중복관계 등을 통해 볼 때 크게 4개의 문화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제1문화층은 최하층인 Ⅶ층과 Ⅵ–1층·Ⅵ–2층으로 구상유구 출토 유물을 표식으로 하는 신석기시대 조기의 융기문토기 단계이며, 제2문화층은 Ⅵ–1층의 상면에 설치된 집석노지와 위석노지·Ⅵ층의 퇴적층 출토 유물을 중심으로 하는 전기의 영선동식토기문화 단계이다. 제3문화층은 Ⅵ층의 상면에 설치된 방형 적석유구와 집석노지, Ⅴ층의 퇴적층 출토 유물 중심으로 하는 중기의 수가리Ⅰ식토기문화 단계이다. 제4문화층은 Ⅳ층의 상면에 설치된 집석노지와 위석노지를 중심으로 Ⅲ·Ⅳ층 퇴적층 출토 유물을 특징으로 하는 후∼말기 토기문화 단계이다.
범방유적에서 확인된 유구는 집석노지 37기, 위석노지 21기, 방형 적석유구 1기, 대형집석 1기, 구(溝) 1기이며 그 밖에 주거시설이나 무덤은 확인되지 않았다. 범방유적에서 확인된 집석노지는 형태와 구조적인 측면에서 볼 때 2종류로 구분된다. 제1류는 당시 생활면에 할석 내지 천석을 1∼2단 정도 원형 내지 타원형으로 깔아 만든 형태이며, 제2류는 직경 1∼3m 정도의 타원형 수혈을 파고 그 내부에 적석한 형태이다. 집석은 대부분 화기를 받아 적색으로 변색되어 버석버석한 상태이다. 규모는 직경 0.5∼3m 정도로 다양하나 1m 내외가 보통이다. 집석노지 주위에서 타제석부, 갈돌, 갈판, 태선침선문토기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견과류 조리용으로도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남해안지역 신석기 전기에서 후·말기까지 사용되었다.
위석노지는 평면형태에 따라 원형과 장방형의 상형노지로 구분된다. 상형노지는 장방형의 토광을 파고 납작한 판상석을 비스듬히 세워 만든 형태이며, 규모는 길이 0.77∼0.9m, 너비 0.45∼0.5m, 깊이 0.15∼0.2m 정도이다. 원형노지는 직경 0.5∼0.8m, 깊이 0.1∼0.2m 정도이며, 구조는 할석 또는 천석을 세우거나 눕혀서 만든 형태이다. 이들 노지는 내부에서 목탄은 검출되지 않았으나 노벽석이 부분적으로 화기에 의해 적색으로 변색되거나 균열·박리되어 있는 상태이다. 위석노지는 후기에 속하는 것도 있으나 주로 전기에 조성되었다.
적석유구의 상부가 후대의 경작으로 유실되고 교란되어, 다소 원상을 잃고 있으나 구조는 인두대(人頭大)의 화강암석을 거의 정방형으로 구획하고 그 내부에 대소 할석을 쌓은 형태이다. 규모는 9.3×9.6×1m 정도이다. 적석유구 주변에서는 중기의 태선침선문토기편과 타제석부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축조시기는 중기로 추정된다.
적석유구는 유사한 사례가 아직 조사되지 않아 정확한 성격을 가늠할 수 없지만, 축조 위치가 당시 해안가인 점과 동시기에 조성된 음식물 조리시설인 집석노지가 주위에 다수 배치되어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보아 생업과 관련하여 의례행위를 행하던 시설물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대형집석은 B지구의 위석노지가 밀집한 곳에서 확인되었는데, 구조는 길이 50㎝, 두께 30㎝ 전후의 화강암제 대형 할석 3매를 집석하고, 그 주변에 대소 할석을 모은 구조이다. 집석 아래에 대형 타제석부가 은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제의와 관련된 시설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성시기는 유구 주변 출토 유물과 층위로 보아 신석기시대 중기로 추정된다.
구상유구는 유적이 위치하는 구릉 하단부의 풍화 암반층을 따라 길게 형성되어 있는데, 특별히 인위적으로 어떤 시설을 조성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신석기시대 조기 단계에 구릉의 말단부를 따라 지하수가 흐르던 구(溝)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
이 밖에 유구는 아니지만 폐기된 생활시설물이 해수 작용으로 인해 형성된 대상집석(帶狀集石)이 확인되었다. 집석 가운데는 즐문토기편과 타제·마제석부 등 파손된 석기류가 출토되었으며, 너비는 대략 2.5m 전후 규모이다. 형성 시기는 중기 이후로 추정된다.
범방유적에서 다양한 형식의 즐문토기를 비롯하여 각종 석기류,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는데, 석기를 제외하고 토기류는 대부분 편들이다. 당시 조사에서 확인된 즐문토기는 기왕의 범방패총 출토품과는 큰 차이가 없으며, 신석기시대 조기의 융기문토기류부터 전기의 자돌압인문토기, 중기의 태선침선문토기, 후·말기의 퇴화침선문토기, 이중구연토기 등 여러 종류의 즐문토기가 다량 출토되었다.
특히 구상유구와 Ⅵ–1, Ⅵ–2, Ⅶ층에서 출토된 융기문토기류는 문양구성과 시문수법 등에서 다양한 형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범방패총의 Ⅰ기층 융기문토기류와 같은 형식들이다. 기형은 심발형을 기본으로 하며, 일부지만, 파수부토기와 구연부가 외반하는 옹형토기도 존재한다. 저부는 밑이 납작한 평저와 둥근 원저, 뾰족한 첨저로 구분되며, 일부 토기에는 동체가 납작한 편동형토기도 있다. 문양대는 구연하에 횡대를 구획하고 상하에 기하학적 융기문을 시문한 형식이 주류를 이루며, 문양형태는 융대문, 융기선문, 침선문이 단독 또는 복합문을 이루고 있다. 융기문토기류와 공반되는 즐문토기로는 무문양토기, 지두문토기, 단도마연토기, 채색토기, 세침선격자문토기 등이 있다.
전기의 영선동식토기는 Ⅵ층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으며, 기형은 원저의 심발형토기가 주류를 이루나 호형토기도 존재한다. 문양형태는 전기 즐문토기의 특징적인 문양인 압인횡주어골문를 비롯하여 압날단사집선문, 세단사선문, 세격자문, 점열문, 구순각목문, 삼각집선문, 거치문, 능형점열문, 지두문 등이 있다. 이들 문양은 단독 혹은 복합문 형태로 문양대를 구성하며, 문양대 형태는 영선동식토기의 특징적인 구연부 문양대를 이룬다.
중기의 태선침선문토기는 Ⅴ층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관련 유구에 비해 출토양이 많지 않다. 토기형식은 남해안지역의 전형적인 수가리Ⅰ식토기이며, 문양형태는 삼각집선문, 어골문, 사격자문, 조대문(능형집선문), 지자문, 연속압날문, 단사집선문, 죽관문, 압인단사집선문 등이 있다. 이들 문양은 어골문을 제외하고는 주로 구연부에 한정하여 시문되며, 단독문 혹은 복합문 형태를 이룬다. 문양대의 시문 범위는 동체까지만 하는 경우와 저부까지 전면 시문하는 것으로 구분되면, 문양대 사이에는 파상문이 삽입되어 종속문을 갖는 형태도 있다.
Ⅲ층과 Ⅳ층에서 출토되는 후기 즐문토기 종류는 퇴화침선문토기, 이중구연토기와 단사선문토기, 봉계리식토기, 고배형토기 등이 있으나 수량이 적어 형식적인 특징과 기종조성은 자세하지 않다. 기형은 고배형, 소형 평저발, 심발형 등이 있다. 퇴화침선문토기는 구연하에 세침선으로 격자문을 시문한 것이며, 단사선문토기는 구연하에 일정한 여백을 두고 단사선을 시문한 형태이다.
범방유적에서 출토된 석기류는 타제·마제석부를 비롯하여 석착, 유견석부, 유선형석기, 세장방형석기, 흑요석제 박편석기 및 원석, 결합식조침, 고석, 대석, 갈돌, 갈판, 어망추, 석추, 지석, 석제 작살, 장신구 등이 있다. 재질은 주로 유적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혼펠스와 응회암, 니암 등의 석재를 사용하였으나 벌채 내지 목재 가공용의 마제석부와 조침 중에는 범방유적 주변에서 산출되지 않는 화강편마암, 편마암 계통의 석재를 가공한 것도 있다. 이들 석기는 외부지역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된 석기류 중에서 가장 많은 양이 출토된 것은 석부류이다. 석부는 외견상으로 크게 타제석부, 마제석부, 인부마연석부로 구분되나, 크기, 평면형, 인부형태, 제작기법 등 세부 속성의 특징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누어진다. 이것은 타제·마제석부가 기능과 용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고 기능에 따라 형태 분화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타제석부는 두께와 외형적인 특징에 따라 일반적으로 따비형과 괭이형으로 구분되며, 형질적 속성(크기, 두께, 형태, 재질 등)에서 다양성과 규격성을 보여 준다. 특히 석부 중에는 편암과 편마화강암 계통의 석재로 가공한 마제석부는 다른 석부류와의 제작기법과 형태 그리고 석부의 재료가 부산 주변에서 산출되지 않는 암석인 점으로 보아 타 지역으로부터 교역에 의해 범방유적에 반입된 것으로 판단된다.
결합식조침은 소위 오산리형으로 불리는 형식이며 모두 30여 점이 출토되었다. 결합식조침 축의 형태와 결합면 형태에 따라 ‘J’자형, ‘I’자형으로 구분된다. 축의 형태와 결합부의 속성 등에서 전형적인 오산리형과는 구분되는 남해안지역의 특징적인 범방형에 속하는 것이다. 갈돌과 갈판도 다수 출토되었는데, 말안장형의 전형적인 갈판의 측면에는 손잡이 용도의 홈이 마련되어 있는 것도 있다. 형태는 북한 봉산 지탑리유적이나 서울 암사동유적 등 중서부지역 침선문토기 단계의 갈판과 동일하다. 이 밖에 흑요석 박편도 다량으로 출토되었으나 완제품은 한 점도 검출되지 않았다. 분석결과 일본 규슈[九州]의 고시다카[腰岳]와 요도히메[淀姬]산으로 밝혀졌다.
범방유적은 범방패총과 바로 인접하여 위치하고 출토된 즐문토기 및 석기류 등 유물의 형식적인 특징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범방패총을 남긴 신석기인들의 해빈(海濱) 생활유적으로 추정되며, 유적의 분포 범위가 넓고,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생활유적이라는 점에서 남해안지역 신석기문화의 성격과 전개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유적은 각 층에서 출토된 융기문토기를 포함한 각종 즐문토기류의 형식적 특징, 문화층의 내용 등으로 보아 기원전 5000년 전후에서 기원전 2000년 전후까지 지속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신석기시대편 - 국가유산 지식이음 (nrich.go.kr) 범방유적(釜山 凡方遺蹟) )
3.28 통영 상노대도패총; 7000년 전~4000년 전(BC 5000년~2000년)
『내용 요약
상노대도 패총은 경상남도 통영시 욕지면에 있는 신석기시대의 즐문토기·석기 등이 출토된 조개더미이다. 패총은 상노대도의 상리마을과 산등마을에 각각 분포하고 있다. 상리패총은 신석기시대 조기에서 말기의 유적으로 다양한 생활도구와 각종 동물뼈가 출토되어 주거를 위한 생활공간으로 추정된다. 산등패총은 신석기시대 후·말기 유적으로 분묘와 인골 등이 나와 임시캠프나 무덤 등으로 추정된다. 이 인골과 분묘는 도서지역의 묘제와 장례습속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상리패총에서 나온 일본의 흑요석제 석기, 승문토기 등은 남해안과 일본의 교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하다.
상리조개더미는 남해안 신석기시대 조기(서기전 5,000년 전후)부터 말기(서기전 2,000년 전후)까지 장기간에 걸쳐 존속했던 유적이며, 연세대학교와 동아대학교에 의해 발굴되었다. 유적의 입지 환경과 출토유물, 동물유존체의 양상으로 보아 어로와 수렵을 통해 식량자원을 조달하고 생계를 영위했던 생활공간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로는 다양한 문양이 시문된 즐문토기(櫛文土器: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하여 각종 석기, 골각기,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산등조개더미는 유적의 입지 환경과 한정된 유물의 종류, 패각층 내의 집석유구(集石遺構)로 보아 어패류 등 해양자원을 획득하고 조리하던 한정행위 장소인 임시 캠프로 추정되며, 일시적으로는 매장지로도 이용되었다. 유적의 중심 시기는 남해안지역 신석기시대 후 · 말기(서기전 2,500~2,000년)로 추정된다. 유물은 전기에서 말기에 걸치는 즐문토기와 석기, 조개팔찌 등이 소량 출토되었다.
상리조개더미는 통영시에서 서남방으로 32㎞ 떨어진 상노대도 상리마을의 남쪽 해안가에서 5~10m 정도 떨어진 완사면에 자리한다. 여기서 서북쪽으로 4㎞ 떨어진 곳에는 산등조개더미가 있다. 상리조개더미는 동아대학교 사학과 김동호 교수가 남해안지역 지표조사 과정에서 발견하였으며, 감귤 재배와 경작 등으로 많은 부분이 훼손된 상태이다. 발굴 조사는 1978년 연세대학교와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공동으로 4개 지구로 나누어 실시하였으며 1·4지구는 연세대학교에서, 2·3지구는 동아대학교에서 담당하였다.
2·3지구의 조개더미는 지점에 따라 층위를 달리하지만 크게 보아 5개 층으로 구분된다. 각 층에서는 조기의 융기문(隆起文)토기와 다양한 문양이 시문된 전기의 자돌문(刺突文), 압인횡주어골문(押引橫走魚骨文), 격자문, 구순각목문(口脣刻目文)토기 등의 영선동식토기가 출토되었다. 퇴적 층위는 불안정한 면도 있지만, 크게 하층(5·6층)의 조기 융기문토기 문화층과 상층(3·4층)의 전기 영선동식토기 문화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주변에서 말기의 이중구연(二重口緣)토기와 단사선문(短斜線文)토기가 채집되는 것으로 보아 유적의 존속기간은 말기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2·3지구에서는 즐문토기 이외에 긁개, 밀개, 인기(刃器) 등 다량의 박편석기류를 비롯한 고석(敲石), 대석(臺石), 숫돌, 석부, 몸돌, 수정제 석기, 흑요석 편 등이 출토되었다.
연세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한 1·4지구의 조개더미는 표토층을 제외한 10개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각 층에서는 시기를 달리하는 유물이 혼재하는 경우도 있지만, 출토유물의 형식적인 특징과 퇴적 양상으로 보아 3개의 문화층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최하층인 10층은 토기가 출토되지 않고 박편과 타제석기류만 출토되어 신석기시대보다 이른 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1문화층(9층)은 융기문토기를 표지로 하는 시기이며, 2문화층(5~8층)는 영선동식토기, 3문화층(2~4층)은 이중구연토기와 단사선문토기 등 율리식토기가 중심을 이루는 시기이다.
출토유물로는 남해안의 전형적인 즐문토기를 비롯하여 각종 석기, 골각기, 패제품, 동물유존체 등이 있다. 즐문토기 종류는 남해안지역의 조기에서 말기에 걸치는 융기문토기, 압인문(押引文)토기, 태선침선문(太線沈線文)토기, 압인점열문(押引点列文), 조우문(鳥羽文), 격자문, 파상문(波狀文)토기, 이중구연토기, 단사선문토기 등이 있으며 이밖에 일본의 승문토기(繩文土器) 등도 출토되었다.
석기는 박편석기, 유견(有肩)석기, 몸돌석기, 조합식작살, 인부마연석부, 반환형 장신구, 갈돌, 갈판, 고석(敲石), 숫돌, 흑요석제 석기 등이 있으며, 골각기는 그 양이 많지 않고 종류도 단순한 편이다. 고라니 이빨로 만든 수식, 결합식낚시바늘, 골침, 첨두기, 자돌구, 송곳과 일본 구주(九州)지역 승문(繩文)문화의 특징적인 서북구주형 낚시바늘이 출토되었다. 패제품으로는 배말조개와 투박조개로 만든 조개팔찌와 국자가리비, 말전복 등을 가공한 장신구 등이 있다. 이들 유물 중 조합식작살과 결합식조침, 흑요석제 석기, 승문토기는 당시 남해안과 일본 구주지역과의 교류 관계를 직접적으로 증명해주는 자료이다.
이밖에 멧돼지, 고라니, 사슴, 수달, 여우, 취, 개, 고래, 물개, 바다사자, 바다거북, 새, 참수리, 까마귀, 가마우지, 슴새, 가오리, 곰치, 농어, 참돔, 졸복, 굴, 홍합, 소라, 개조개, 눈알조개 등 육상 및 해양 포유류와 각종 어패류가 출토되었다. 9층에서는 45세 가량의 사람 어금니도 검출되었는데, 분석 결과 육식과 채식을 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상리조개더미는 주거지를 비롯하여 생활 시설물 등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패각층에서 출토된 다양한 생활도구와 각종 동물유존체 등으로 보아 장기간에 걸쳐 어로와 수렵활동을 통해 식량자원을 조달하고 생계를 영위했던 생활공간으로 추정된다. 조개더미는 토기의 형식적인 특징으로 미루어 신석기 조기(서기전 5,000년 전후)부터 말기(서기전 2,000년 전후)까지 장기간에 걸쳐 존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등조개더미는 노대리 산등마을의 끝에 돌출하여 작은 반도 형태를 이루는 언덕 위에 자리하며, 앞면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조개더미에서 동남쪽으로는 4㎞ 정도 떨어진 곳에 상리조개더미가 위치한다. 유적이 입지하는 곳은 해발 10m 정도의 작은 구릉이며 규모는 길이 70m, 너비 20m 정도이다. 유적 범위는 상당히 넓은 편이였으나 후대의 경작 등으로 훼손된 상태이다.
발굴조사는 2개 지구로 나누어 실시되었으며, 여기서 확인된 퇴적층은 표토층을 포함하여 흑회색혼토패층(2층), 회색혼토패층(3층), 순패층(4층), 흑회색혼토패층(5층), 다갈색점토층(6층)으로 구분된다. 층위 상태는 다소 불안정하며 동일층에 시기를 달리하는 토기형식이 출토되는 양상으로 보아 퇴적 과정에 다소 교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패층 내에서는 분묘 1기와 집석유구 6기가 확인되었다.
유물은 각층에서 즐문토기, 석기, 조개팔찌, 인골 등이 출토 되었으며, 그밖에 어패류, 동물유존체 등도 다수 출토되었다. 즐문토기는 여러 시기의 다양한 종류가 출토되었는데, 유사융기문토기, 영선동식토기, 단도마연(丹塗磨硏)토기, 태선침선문토기, 단사집선문(短斜集線文)토기, 삼각집선문토기, 봉계리식의 점열문, 유충문(幼蟲文), 조우문토기, 퇴화침선문토기, 단사선문토기, 능형문(菱形文)토기 등이 있다. 석기 종류는 타제석부, 인부마연석부, 석인(石刃) 석착(石鑿), 갈돌, 지석, 박편석기 등이 있으며, 그밖에 부장품으로 조개팔찌가 인골과 함께 출토되었다
자연유물은 패류, 어류, 수골 등이 있으며 이 중에서 패류가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한다. 패류는 굴, 홍합, 전복소라, 삿갓조개, 고둥, 투박조개, 개조개 등이 있다. 이외에도 고래, 사슴, 어류 뼈도 소량 출토되었다.
유구는 분묘 1기와 집석유구가 1·2지구에서 여러 기 확인되었다. 분묘는 2지구 3층에서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비교적 완전한 형태의 인골이 출토되었다. 매장 형태는 신전장(伸展葬)이며, 머리 방향은 동침(東枕)이다. 인골 상태는 양호한 편이며 13~15세의 여성으로 추정되었다. 인골 왼팔에는 3개의 조개팔찌가 착장되어 있는데, 2점은 투박조개, 한 점은 큰배말조개로 만든 형식이다. 팔찌 크기는 내경이 5㎝ 정도이다. 조개팔찌가 인골에 착장된 채로 출토된 최초의 사례이다. 최근에는 여수 안도와 가덕도 장항유적에서 조개팔찌를 착용한 인골이 확인되고 있다.
집석유구는 1, 2지구에서 확인되었는데, 1지구의 것은 규모가 직경 165~130㎝ 정도이며 서로 인접해 축조되어 있다. 2지구 3층에서 출토된 집석유구는 형태가 명확하지 않으나 그 범위는 대략 길이 350㎝, 너비 150㎝ 정도이다. 집석유구는 20㎝ 크기의 소형 할석을 1~2벌 깔아 만든 형태인데, 구조는 원형 내지 타원형을 이룬다. 용도는 어패류 등의 음식물을 조리하는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등조개더미는 일부만 조사하였기 때문에 유적의 성격이나 범위, 존속기간 등은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조개더미의 입지, 출토유물의 종류와 다양성 등으로 보아 주거를 위한 생활공간보다는 어패류 등 해양자원을 획득하고 조리하던 한정행위 장소인 임시 캠프 기능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패각층 내에서 출토된 인골로 보아 일시적으로는 매장지로도 이용된 것 같다. 유적의 형성 시기는 토기의 형식적 특징으로 보아 신석기 전기~중기까지 올라가지만, 중심 시기는 남해안지역 신석기시대 후 · 말기(서기전 2,500~2,000년) 로 추정된다.
상리조개더미에서 출토된 다양한 형식의 즐문토기와 각종 석기, 골각기, 동물유존체 등은 남해안 도서지역의 신석기문화의 성격과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데 많은 정보를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도서지역의 신석기인 생계와 생업활동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일본 승문문화와 관련한 조합식 작살과 결합식 조침, 흑요석제 석기, 승문토기 등은 남해안과 일본 구주지역과의 교류 관계와 그 실태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산등조개더미에서 발굴된 분묘와 인골은 도서지역의 묘제(墓制)와 장례습속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학술 자료로 평가되며, 완전한 형태의 인골은 신석기인의 형질적인 특징을 연구하는데 일조할 것으로 기대된다.』
(출처: 상노대도 패총(上老大島 貝塚)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
<참고자료>
신석기시대편 - 국가유산 지식이음 (nrich.go.kr) 부하문화(富河文化)
신석기시대편 - 국가유산 지식이음 (nrich.go.kr) 좌가산문화(左家山文化)
양사오 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신석기시대편 - 국가유산 지식이음 (nrich.go.kr) 신암리유적(蔚州 新岩里遺蹟)
하인수, 신석기시대 패총문화의 이해
신석기시대편 - 국가유산 지식이음 (nrich.go.kr) 반구대암각화(蔚州 盤龜臺岩刻畵)
신석기시대편 - 국가유산 지식이음 (nrich.go.kr) 범방유적(釜山 凡方遺蹟)
상노대도 패총(上老大島 貝塚)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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