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4. 6,500년 전~ 4,500년 전 4.1 홍산문화(1) 본문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4. 6,500년 전~ 4,500년 전 4.1 홍산문화(1)
대야발 2024. 2. 8. 22:53《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4. 6,500년 전~ 4,500년 전
4.1 홍산문화; 6500년 전~5000년 전(BC 4500년~3000년)
『훙산 문화 (홍산문화, 중국어 간체: 红山文化, 정체: 紅山文化, 한어 병음: hóngshān wénhuà)는 중국 만리장성 북동부에 존재했던 신석기 시대의 문화이다.
옥으로 만든 용, 홍산 문화 출토품
홍산문화는 요하문명의 대표 문화로 중화인민공화국 네이멍구 자치구 츠펑 시와 랴오닝 성 조양 시 일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홍산문화는 빗살무늬 토기와 적석총 등으로 대표되는 문화로 중국의 중원 문화와 구별되며 고조선 등 한반도 초기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홍산문화는 1908년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는데, 연대는 기원전 4700년 ~ 기원전 2900년경으로 지금까지 츠펑(赤峰, 발견 당시엔 열하성), 링위안(凌源), 젠핑(建平), 차오양(朝陽) 등 500여 곳의 유적을 찾아내어 발견 지역은 옌산 산맥의 북쪽 랴오허 지류의 서 랴오허 상류 부근에 널리 퍼져 있다. 중국에 의해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싱룽와 문화(興隆窪文化), 훙산 문화, 자오바오거우 문화(趙寶溝文化), 신러 문화(新樂遺跡)등의 요하 일대의 신석기문화를 문화의 단계를 넘어 세계의 새로운 문명으로 보아 '요하문명'으로 명명하여 부르고 있다.
연대 인상과 평가
요하 유역에서 새로운 유적들이 계속 발견됨에 따라 도리이 류조의 처음 발견 당시의 추정보다 연대가 훨씬 오래된 기원전 8000년까지 인상되었다. 이에 따라 홍산 문화는 황하문명의 영향을 받은 아류 문화가 아니라 오히려 황하문명의 원류가 아닌가 주목받고 있다.
위치
내몽골자치구 츠펑 시에는 붉은 기운이 도는 홍산이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지역에서 옥기가 발견돼 홍산옥기(紅山玉器)라 하였고 중국 중원에서 보기에 홍산 뒤쪽에서 발견되었기에 내몽고 자치구의 츠펑 시에 있는 홍산 호우(红山 後, 홍산 후) 유적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현재의 하베이성 북부에서 내몽골 자치구 동남부, 랴오닝 성 서부에 해당된다.
역사
현재의 명칭은 내몽고 자치구의 츠펑 시에 있는 홍산 호우(红山 後, 홍산 후) 유적에서 유래하였다. 홍산문화는 190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저명한 인류학자 겸 고고학자인 도리이 류조가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우연찮게 많은 신석기 유적과 돌로 쌓은 묘(적석묘) 등을 발견한 것. 이것이 후대 세계를 놀라게 한 홍산문화 적석총 유적이다.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였다.
하지만 당대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후 20세기 초 중국에 온 프랑스 예수회 신부 에밀 리상(Emile Licent·1876~ 1952)도 22곳의 신석기 유적을 발견했지만 류조와 마찬가지로 간단한 글만 남겼다. 그러나 1920년대 미국 하버드대에서 유학중이던 고고학도 양사영(梁思永·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은 이 글을 놓치지 않았다.
결국 1930년 귀국한 양사영은 그해 겨울에 적봉으로 향했다. 중국 중앙연구원 고고분과 담당자로서 내몽골 임서 일대와 흑룡강 등 동북지방에서 잇따른 신석기 유적 발견을 바탕으로 본격적 발굴작업을 계획한 것이다. 하지만 정세불안과 건강 악화로 발굴이 지연되다 1934년 ‘열하고고보고(熱河考古報告)’로 학계에 첫 보고를 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보고서엔 “동북 4성(요녕·길림·흑룡·열하성) 발굴작업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썼다. 이것이 오늘날 동북공정은 중국인 양사영으로부터 시작된 격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발굴은 일본인 손에 의해 이뤄졌다. 일본 고고학의 아버지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가 주인공으로 당시의 대규모 발굴단을 끌고와 발굴을 진행했는데 만주족과 몽골족이 내몽골 동부에서 발원, 중국과 역사적으로 독립했음을 밝히는 게 목적이었고 일본편입이 목표였다. 이렇게 1906년 일본의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에 의해 발견되어, 1935년 하마다 코사쿠(濱田耕作)나 미즈노 세이치(水野清一) 등에 의해 대규모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전후 각지에서 발굴이 잇달았으며, 채도와 세석기의 특징을 가진 이 문화는 1954년홍산후를 기념하여 홍산 문화라고 명명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이 실시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에 입각한 공정 연구의 일환으로, 2003년 6월부터의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을 통하여 중국은 황하문명보다 빠른 요하문명을 중화문명의 뿌리로 규정하고 있다. 이제까지 야만인인 동이족의 땅으로 보던 요하문명을 중국문명의 시발점으로 보기 시작했으며, 이를 중화민족과 중국사에 편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2012년 7월 초,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내몽고 제1공작대와 아오한치(熬漢旗·오한기) 박물관의 합동발굴팀은 중국 네이멍구자치구 츠펑시 오한치의 싱룽고우(興隆溝·흥륭구) 유적 제2지점에서 53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소남신상(陶塑男神像, 흙으로 구운 남신상)’을 발굴하였다.
요하문명의 대표적 신석기 문화인 ‘홍산문화(紅山文化)’ 유적에서 여신상은 발굴된 적이 있지만, 남신상이 발견된 것은 중국 최초이다. 인민일보·CCTV 등 중국 언론들은 “5300년 전의 조상 발견”, “중화조신(中華祖神) 찾았다”는 내용으로 발굴성과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이와함께 2004년 11월, 기존의 랴오닝성박물관(遼寧省博物館, 요녕성박물관)을 개축하여 건축면적 2만 8900㎡, 12개 전시실에 전람면적 8530㎡에 이르는 신관을 개관하였고 2010년 8월 8일, 중국 내몽고 자치구 적봉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이같이 중국 내몽고에는 박물관 신축과 개관, 확장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적봉시 인근의 오한기(敖漢旗)·임서(林西)박물관은 신축을 마치고 2010년 후반기에 이전했고 극십극등기(克什克騰旗) 역사박물관과 파림좌기(巴林左旗)의 요상경(遼上京)박물관은 그전에 이미 신축해 개관됐다. 요하를 중심으로 발견된 고고학적 성과, 즉 홍산문화를 정점으로 하는 요하문명을 집중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생활상
훙산 문화에서는 농업이 주를 이루며, 가축을 사육한 축산도 발달하고 있어 돼지나 양이 길러졌다. 한편에서는 수렵이나 채집 등으로 야생 동물을 사냥하거나 야생초를 채집하기도 했다.
유적 유물
이들은 농업을 주로 한 문화로 용등을 본떠 만든 비취등의 구슬로부터 현재 중국에 연결되는 문화나 종교의 존재도 볼 수 있다.
홍산 문화의 주된 유적은 서 랴오허 상류의 지류인 황수(潢水) 및 투허(土河) 유역에 퍼져 있다. 발견된 석기는 타제석기, 마제석기, 세석기 등으로 그 대부분은 농기구이며, 돌보습(石耜), 돌쟁기(石犁), 돌호미(石鋤) 등의 종류가 많다.
홍산 문화의 도기는 진흙 홍도 및 협사회도(夾沙灰陶)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진흙으로 만들어 붓으로 그림 그린 채도(채문 토기)는 취사나 식사 등에 사용되고, 문양이 새겨진 협사회도는 음식을 담는 곳에 사용되었다. 다른 도기에서는 임산부를 본뜬 흉상이 각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홍산 문화에서는 양사오 문화와 같은 채도 문화는 발달하지 않았지만, 룽산 문화의 흑도와 같은 세련된 조형미를 가진다. 또 후기 유적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환도도 발견되고 있다.
홍산 문화의 분묘에서는 비취 등의 석재로 동물 등의 형태로 조각한 장식품이 많이 출토되었다. 돼지, 호랑이, 새 외에도 용을 새긴 것도 발견되고 있다. 높은 공예의 수준이 홍산 문화의 큰 특징이 되고 있다. 《저룡(猪龍)》또는 《옥저룡(玉猪龍)》이나 《옥웅룡(玉熊龍)》등으로 불리는 홍산 문화의 옥용(용을 조각한 구슬)의 조형은 단순하며, 용이 원형으로 된 것이 많지만, 후기로 가면서 반용(盤龍), 문용(紋龍) 등의 구별이 분명해진다. 고고학자 중에는 홍산 문화가 이후 중원에서 시작된 용 숭배의 근원이라는 견해도 있다.
한편 홍산문화의 옥기나 유적 등에 대한 다른 견해 또한 존재한다. 중국인들이 주로 저룡(猪龍)이나 옥저룡(玉猪龍)이라고 명명하는 형태의 옥기가 실은 용이 아닌 생물의 태아를 본 떠 만든 것이라는 견해와 홍산문화에서 적석총(돌무지무덤)이 발견되는 것을 근거로 하여, 홍산문화가 적석총이 다수 발견되는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한민족(韓民族, 또는 동이족)문화의 연원이라는 견해가 나오면서 한(韓)·중(中) 간에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현재 요하문명의 상징물이 급속도로 중국화하고 있는데 홍산문화 유적지가 밀집한 내몽고의 적봉시, 옹우특기, 오한기, 요녕성의 능원시, 건평현 조양시 등의 상징을 몇 해 전부터 홍산문화의 상징인 옥저룡(玉猪龍)ㆍ옥웅룡(玉熊龍)으로 교체했다. 중국 영토에 사는 민족은 중화민족이고 역사도 중국사라는 논리이다. 56개 민족을 하나의 단일한 중화민족으로 묶는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이론의 바탕이다.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 1996~2000)’→‘동북공정(2002~2007)’→‘중화문명탐원공정(2003~ )’→‘국사수정공정(2005~2015)’으로 이어지는 논리의 구조이다.
현재 진행 중인 국사수정공정은 이런 일련의 역사 관련 국가 공정의 완결판인데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들을 토대로 중국사를 전체적으로 수정하는 것이다. 2005~2007년 기초자료 수집을 마치고 2007년부터 본격 수정을 시작해 2015년 완료를 목표로 중국의 정사(正史)인 25사를 대대적으로 수정해 재편찬하고 있는 것이다.
뉘우허량 유적
홍산문화(뉘우허량 유적)에서 발견된 다양한 모양의 옥기와 문암리 옥결(오른쪽 하단)
1983년에 랴오닝성 링위안 시에서 젠핑 현에 걸친 넓은 범위에서 발견된 《뉘우허량 유적》(牛河梁遺跡, Niuheliang)에서는 기존의 홍산 문화와 다른 거대한 제사 시설이 발견되었다. 유적은 5km2의 넓은 범위에 돌을 쌓아 만들어진 분묘나 제단이 정연하게 분포하고 있다. 또한 돌 마루와 채색한 벽이 있던 신전이 발견되었고, 눈을 비취로 만든 여성두상 도기가 발견되어 《여신묘》라고 불리게 되었다. 발굴 과정에서 지하 1m에서 제사를 지냈던 장소나 제단, 벽화, 돌무덤(석총) 등이 발견되었다.
여신묘 안에는 사람 세 배 크기의 도제의 상이 줄지어 있었다. 이 상은 신상으로 추측되며, 현재 중국 문화에서는 유례없는 것이다.
뉘우허량에서 발견된 기념비적인 건축물의 존재나 또 여러 가지 토지와 교역의 증거로 인해 이 시기에 선사시대의 수장국인 왕국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여신묘에서는 채도도 발견되었다. 부근에서 60개 이상의 고분도 발굴되었고, 이것들은 돌을 짜서 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조약돌을 씌워 무덤을 만들었다. 그 내부에서 구슬 등의 유물도 발견되었다. 근처의 두 곳의 언덕 위에는 돌무덤이 발견되었고, 그 가까운 곳에서는 석회암을 쌓아 올려 만든 둥근 무덤이나 사각형의 무덤도 있었다. 이러한 고분 중에서는 곰이나 용, 거북이의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유물로 홍산 문화에서는 이미 제물을 바쳤다는 지적이 생겨나고 있다.
양사오 문화 초기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에서 알 수 있듯이 홍산 문화의 유적에서도 초기의 풍수의 증거로 여겨지는 것이 발견되고 있다. 뉘우허량 유적 등, 홍산 문화의 제사 유적에 볼 수 있는 원형이나 방형(사각형)은 천단의 우주관이 벌써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시사하고 있다.
1980년 초기, 이전에는 역사기록에 없는 그 누구도 몰랐던 여신묘에서 다량의 옥기가 부장품으로 출토되었다. 또한 중국의 옥기 전문가들은 이곳에서 옥을 자를 때 쓴 도구를 발견했는데, 당시 그 시대와 동일한 조건에서 실험을 해보니 실제 발굴되는 것과 비슷한 1.5cm정도 두께의 옥에 모래나 옥가루를 뿌려가면서 나무 막대기를 돌려서 구멍을 파는데 순수한 작업시간만 31시간이 걸렸다.
홍산문화 유적에서 발견되는 정교한 옥기 하나를 완성하려면 엄청난 인력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을 짐작케 하는 내용이다. 이것으로 중국 학자들은 홍산문화 시대에 최소한 몇등급으로 신분이 분화되었다고 주장하는데 홍산문화 시대에 옥기를 만드는 장인집단이 따로 존재했었고, 신분이 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해 묘장 마다 크기가 다르고, 매장 방식이 다른 것도 신분 분화의 증거라는 이유다.
여신묘와 한 변이 20~30미터짜리 3층 피라미드식 적석총, 가장 큰 60미터짜리 7층 피라미드식 적석총을 쌓으려면 많은 인원을 필요하므로 중국학계에서는 홍산문화 후기 단계를 초기 국가단계, 초기 문명단계라고 보고 있다. 우하량 제2지점 제단 유적지 안내문에는 ‘약 5500년 전에 이미 국가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홍산문화유적지’라고 쓰여 있다. 다만, 중국 외의 타 국가에서는 홍산문화가 도시화, 문자사용, 계층 분화 등 문명의 요소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고 보아 독자적 문명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기존의 역사학의 시각에서 보면 국가단계에 진입한다는 가장 유력한 증거는 문자와 청동기였는데 홍산문화 시대에 문자와 청동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초기 국가단계라고 주장하는 것은 여러 형태로 있는 다량의 옥기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 뉘우허량 유적의 발견이후 청동기가 없어도 국가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줘 ‘옥기시대’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이것은 뉘우허량 유적으로 대표되는 흥륭와문화(홍산문화)의 가장 큰 특징으로 평가되고 있다.
2007년에 대한민국의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비슷한 옥결이 인골과 함께 발굴되었다. 기존 흥륭와문화 옥결과 똑같은 모양인데 기원전 6천년까지 올라간다고 보고 있는 유적이다. 이러한 가운데 흥륭와문화(홍산문화)와 같은 모양의 옥결이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유적에서도 나왔다.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 문암리유적에서 나온 옥 귀걸이(사적 426호)도 기원전 6,000년 이상으로 연대를 추정하고 있다. 흥륭와에서 나온 옥결이 중국 내에서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연구한 사람이 있다. 홍콩 중문대학의 등총교수라는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옥기 전문가의 논문에 의하면 “기원전 6000년께 요서지역 흥륭와문화에서 시작된 옥결은 기원전 5000~4000년께 장강 유역에 전파되고, 기원전 2500년께 중국 광동성 광주 근처 주강 유역까지 퍼졌다. 옥결은 기원전 2000년께 더 남쪽인 베트남 북부까지 전파되고 기원전 1000년께 운남성 일대와 베트남 남부까지 시간차를 두고 확산되었다.”고 전해진다.
한반도에는 흥륭와 형성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옥결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흥륭와 옥의 성분을 분석했더니 직선거리로 400 km 떨어진 랴오닝 성의 수암이라는 지역에서 생산된 옥으로 밝혀졌다. 수암에서 조금만 더 가면 압록강이고 두만강쪽으로 동해를 타고 내려오면 문암리로 연결된다. 흥륭와 일대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토기도 문암리 유적에서 똑같이 나온다. 기원전 6천년에 흥륭와문화 단계에서는 한반도 북부지역과 요서, 요동 지역이 하나의 단일 문화권이었다는 이야기다.
홍산문화의 가장 놀라운 유물은 흥륭와에서 발견된 치아 수술 흔적이다. 중국, 일본 학자들이 이것을 발굴하고 4년을 고민했다고 한다. 진짜 수술 흔적 같기는 한데, 기원전 6천년 흥륭와문화 시대에 치아 수술을 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학자들이 이 유골을 가져가서 4년간 집중연구를 해 2008년 2월 정식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틀림없이 인공적인 치아수술 흔적이라는 것이다. 두개골이 그대로 나왔고, 치아에 뚫린 구멍의 직경이 모두 같고 도구를 이용한 연마흔적도 발견되었다.
현미경 사진을 찍어봤더니 나선형 연마흔적을 발견했고 이것은 인공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구멍을 뚫은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충치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뚫은 것이다. 그래서 정확한 수술 흔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두개골 수술은 유럽에서 기원전 5천 년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었고, 중국에서도 기원전 2,500년 두개골 수술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이렇게 이른 시기에 치아 수술 흔적이 발견된 것은 흥륭와 유적지가 유일하다.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9B%99%EC%82%B0_%EB%AC%B8%ED%99%94)
2006년 10월 24일자 뉴스메이커 696호 〈사라진 단군의 진실을 복원하라〉
『사학계 한민족의 원류 ‘홍산문화’에 초점… “동북공정 깰 수 있는 열쇠” 주장
<우실하 교수 제공>
‘요하문명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광활한 요하의 ‘홍산문화’가 국내 사학계에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한민족의 기원과 함께 상고시대에 사라진 고조선과 단군의 진실을 밝혀줄 단초가 될 것이란 기대감 때문이다. 이곳 유물은 중국이 국가적 명운을 걸고 진행중인 동북공정을 저지할 한민족의 비기라는 게 일부 재야 학자의 주장이다.
홍산문화 지역에서 출토된 옥으로 만든 유물. <국학원 제공>
기원전 3500년께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는 분업화가 이뤄진 국가형태를 띠고 있다. 통상 청동기대에나 출현 가능한 흔적이다. 무엇보다 가면과 옥장식 등에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대거 발견됐다는 주장이 잇따라 이곳이 단군신화 속 곰 토템을 지닌 웅족(웅녀)과 고조선(청동기 시대) 이전 한민족 원류 중 하나인 배달국(신석기 시대)이 자리했던 곳이란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청동기 문명을 갖고 이주한 환인족(부계사회)과 웅족(모계사회)의 결합을 통해 단군조선이 건국됐다는 설이다. 문제는 여지껏 이를 확증할 사료가 없다는 점. 하지만 재야 학자들은 이를 대신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정황증거를 어느 정도 갖출 수 있다는 입장이다.
붉은산 인근의 후기 신석기문화
위_ 삼좌점 터에서 발굴된 성벽. 움푹 튀어나온 ‘치’ 는 고구려 고유의 축성양식을 연상시킨다. 아래_ 삼좌점 발굴현장에서 모습을 드러낸 대형 집터. 대문과 문설주는 물론 곡식창고까지 완벽하게 보존돼 있다. 이곳 60여 채의 군락은 매우 드문 큰 규모로 파악된다. <국학 학술원 제공>
이와 같은 주장에 불을 댕긴 대표적 학자는 우실하 항공대 교수. 문화·사상사를 통해 한민족 원류를 밝히는데 힘써온 그는 “홍산문화를 직접적으로 단군조선 원류로 거론하긴 아직 이르지만 우리 민족 정체성의 근거가 그곳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라며 조심스럽게 화두를 던졌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홍산문화 전문가도 “결국 중국은 이곳을 한민족 원류로 인정할 것”이라고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렇다면 대체 홍산문화란 무엇인가. 홍산(紅山)은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의 동북방에 인접한 산의 이름. 몽골인은 ‘우란하따(烏蘭哈達)’라고 부르는데 이 역시 ‘붉은 산’을 의미한다. 실제로 철 성분이 많은 바위산으로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그런데 이 붉은산 인근에서 중국학계를 놀라게 한 거대한 제단(壇)과 신전(廟), 적석총(塚) 등 삼위일체의 거대 후기 신석기문화가 발견됐다. 상식을 깨고 국가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흔적이다. 홍산문화란 명칭은 적봉시 홍산에서 비롯됐지만 이후 발견된 대규모 유적은 넓게 퍼져 있다. 요녕성, 내몽골, 하북성 경계 연산(燕山) 남북과 만리장성 일대를 포괄한다.
우 교수에 따르면 그 시작은 190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저명한 인류학자 겸 고고학자인 도리이 류조우(鳥居龍藏)가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우연찮게 많은 신석기 유적과 돌로 쌓은 묘(적석묘) 등을 발견한 것. 이것이 후대 세계를 놀라게 한 홍산문화 적석총 유적이다.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였다. 하지만 당대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중국 동북성 남부 평원을 가로지르는 길이 1400km의 요하 모습. 이 강을 중심으로 요서와 요동이 나뉜다. <국학 학술원 제공>
이후 20세기 초 중국에 온 프랑스 예수회 신부 에밀 리상(Emile Licent·1876~ 1952)도 22곳의 신석기 유적을 발견했지만 류조와 마찬가지로 간단한 글만 남겼다. 그러나 1920년대 미국 하버드대에서 유학중이던 고고학도 양사영(梁思永·철학자 양계초의 아들)은 이 글을 놓치지 않았다.
결국 1930년 귀국한 양사영은 그해 겨울, 왜소한 체구로 동북지방 한파를 뚫고 적봉으로 향했다. 중국 중앙연구원 고고분과 담당자로서 내몽골 임서 일대와 흑룡강 등 동북지방에서 잇따른 신석기 유적 발견을 바탕으로 본격적 발굴작업을 계획한 것. 하지만 정세불안과 건강 악화로 발굴이 지연되다 1934년 ‘열하고고보고(熱河考古報告)’로 학계에 첫 보고를 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보고서엔 “동북 4성(요녕·길림·흑룡·열하성) 발굴작업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썼다. 오늘날 동북공정의 첫 삽을 양사영이 뜬 셈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발굴은 일본인 손에 의해 이뤄졌다. 일본 고고학의 아버지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가 주인공. 대규모 발굴단을 끌고와 발굴을 진행했는데 만주족과 몽골족이 내몽골 동부에서 발원, 중국과 역사적으로 독립했음을 밝히는 게 목적이었다. 일본편입이 목표였다.
‘천부경’의 비밀 간직한 유적들
위_ 삼좌점 유적지의 문설주들은 매우 정돈된 모습으로 고대 국가의 통치력을 연상시킨다. 아래_ 삼좌점 유적터의 곡식창고. <국학 학술원 제공>
처음 청동기 문명 발굴에 초점을 맞춘 발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시대 이전(신석기 시대)으로 옮아갔다. 신석기 주거지 31곳과 옥구슬 380여 기, 골기(骨器) 33점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광복 이후 1955년 홍산문화라 이름 붙일 당시까지도 별다른 이목을 끌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1982년 능원현과 건평현(建平顯) 경계 ‘우하량(牛河梁)’에서 유물이 대거 발굴되며 세계 언론은 ‘미지의 왕국’이 등장했다고 요란을 떨었다. 일본 신문 ‘아사히’ ‘마이니치’도 ‘5000년 전 신비의 왕국이 베일을 벗었다’고 대서특필했다. 발굴은 인근에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홍산문화의 특징은 새로운 신석기문화라는 것. 황하 유역 앙소문화 등과 서로 영향을 미치며 경쟁관계에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덕분에 세련된 채도문화와 거석문화, 세석기문화와 빗살무늬토기 등이 뒤섞여 있다. 무엇보다 요하지역은 만리장성 이북으로 전통적으로 이민족 역사의 장이었다. 우실하 교수는 “퉁구스계열 토착세력의 흔적으로 이를 웅족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며 “중국 측은 이를 전설의 인물 황제와 손자인 고양씨 전욱 계통 문명으로 설정해 억지로 중화문명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사실 누가 이 문명의 주인이라 단정하기보다 동북아 공동문명권의 모태문화로서 공동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유럽이 에게해 문명을 그리스만의 것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고구려 축성방식의 원형도 발견
홍산문화지역에서 출토된 원형제단. 천손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국학원 제공>
단군조선 건국의 밑바탕을 이룰 가능성이 농후한 홍산문화. 우 교수에 따르면 이곳에는 민족 최고 경전인 ‘천부경’의 비밀도 숨어 있다. ‘1, 3, 9, 81’을 내포한 유물이 수없이 발굴된다는 얘기다. 천제단과 무덤, 사당구조가 3층인 점, 용 모양 곡옥이 9개 한 세트를 이룬다는 점도 그렇다. 천제단구조도 그렇다. 이곳에서 발견된 천제단은 자금성의 천단과 구조가 동일한데 천단은 한족이 아닌 청나라 때 만주족이 건설한 것이다. 천단은 북방 샤머니즘 고유 사유체계인 ‘3수 분화의 세계관’을 형상화한 것으로 첫 번째 원이 9개의 대리석, 마지막 원이 81개 대리석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 원형제단도 비슷한 구조다. 이는 음양 2분법적 중국 고유 사유체계와 다르다.
무엇보다 적석총 무덤양식은 바로 고구려의 그것이다. 현재 일반인에게 유일하게 공개되는 우하량 제2지점에선 지금도 직경 20~30m에 이르는 거대한 제단과 적석총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이 때문인지 중국측도 홍산문화에 대한 관심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다. 1973년 장강 하류에서 앙소문화(황하문명)보다 이른 시기의 하모도문화가 발견되면서 중화문명의 시발점을 하모도문화로 설정했지만 우하량유적(홍산문화) 발견 직후 이를 엮어 중국 3대 문화로 보고 있다. 특히 홍산문화를 ‘요하문명’이라 칭하며 중화문명의 새 시발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요녕성 박물관 앞에 ‘3황5제 시대는 다민족 통일 국가를 형성하는 바탕을 이뤘다’고 적고 홍산문화를 고양씨 전욱 계통 문명으로 못박았다. 이는 동북공정의 하부공정인 웅녀공정, 고구려공정보다 진일보한 움직임이다.
주목할 점은 홍산문화 바로 위층 하가점 하층문화. 황제족(한족)의 황하문명보다 앞선 홍산문화층 위에 중국 최초 국가인 하나라보다 앞선 청동기 유물이 발견된다. 고조선의 자취를 좇는 학자들은 이를 고조선 출범과 연계시킨다. 청동기를 개발한 3000여 명 환웅세력이 웅족과 결합해 강력한 국가체제를 다진 것으로 추정하는 것. 고조선 건국연대인 기원전 2333년은 이 지역 청동기의 추정연대인 기원전 2400년 무렵과 거의 일치한다. 일단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곳이 고조선 초기 강역이었다는 점에선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다.
최근 홍산일대를 답사하고 돌아온 유임현 국학학술원 사무총장은 “일부 중국학자들은 ‘이곳 유적 중 일부를 대동강 일대에서도 봤다’고 증언했다”며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히진 않았지만 그들도 이곳이 기존 한족 문명권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고 말했다. 또 “이곳은 중국 송대 이후에야 중국 양식의 무덤이 발견되는 고구려 비사성 자리였다”며 “과연 중국의 역사 문화권인지 의심스럽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예로부터 중국 사서들이 외국인으로 분류했던 동이족의 원형이 이곳에 묻혀 있다는 게 유 사무총장의 해석이다. 그는 “중국측 교수가 ‘모호한 유적이 발굴되면 이전에는 그냥 덮어버리기도 했다’고 말했다”고 전해 이와 같은 의혹을 부채질했다.
지난 10월 초 홍산의 모습. 전봇대와 고압선탑이 전경을 망치고 있다. <국학 학술원 제공>
중국 하나라보다 앞선 청동기 유물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대목은 최근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음하 상류 ‘삼좌점 유적’. 하가점 하층문화로 추정되는 이곳의 발굴은 극비리에 이어져 올해 말 마무리될 예정이다. 유 사무총장이 국내에선 처음으로 보고 돌아와 전한 이곳 실상은 가위 충격적이다.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적석묘는 50~70㎝ 원을 중심으로 사방 20여m까지 확장될 만큼 거대해 제단과 구분되지 않는다. 완벽한 형태의 우물과 60여 채의 집터, 외성과 내성으로 구분된 성곽은 고구려의 그것과 다름없다. 부족회의 장소로 추정된 모임장소와 석회를 이용한 담벽 등도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곡식창고와 문설주까지 완벽하게 보존돼 있는데 특히 내성 북쪽 성벽의 ‘치’가 눈길을 끈다. 성벽이 쑥 튀어나왔다 들어간 치는 적을 수비하는데 유리한 양식으로 고구려 특유의 것이라 한다. 축성방식도 초기 고구려 축성방식보다 살짝 뒤져 있다. 곳곳엔 해독되지 않은 상형문자들이 널려 있다.
고조선 시대와 겹치는 하가점 하층에서 출토된 청동투구(위), 홍산문화지역에서 출토된 여신상. 가부좌를 튼 채 두손을 다소곳이 모은 형상은 중국 여타 지역에서 출토되지 않는다. <국학 학술원 제공>
하지만 이와 같은 진일보한 시각에 대한 기존 국내 사학계의 반응은 다소 조심스럽다. 노태돈 서울대 교수는 “객관적 사실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자칫 민족적 이해가 엇갈려 극단주의로 흐를 수 있다. 개연성과 토대를 충분히 확립해야 한다”면서도 “정신사적 흐름 연구와 바른 역사인식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존 연구로는 동북공정 못이겨”
반면 대표적 재야 사학자로 분류되는 윤내현 단국대 교수는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한다”면서도 “우리 역사학계 내부에서도 이견이 빈발하는데 어떻게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역사를 중국학자에게 이해시키겠느냐”고 질타했다.
그는 이어 “기존 사학계 연구로는 동북공정을 극복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윤 교수는 하가점 하층문화에 대해선 “독자적 문화인 것은 분명하지만 만주와 요서·요동을 합한 공통의 문화”라며 “북경 근처 갈석산까지 고조선 영토였음을 감안하면 연관성을 추측할 수 있지만 한반도 내에서 발견되는 구석기 문화 등도 간과하면 안 된다”며 중립적 견해를 견지했다.
모두 취합해도 A4용지 한 장을 넘기기 힘들다는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기록들. 유일한 단서가 될 수 있는 유적들은 어떤 해결점을 제시할까. 한민족 기원과 고조선과 단군에 대한 비밀을 풀어주는 것은 물론 민족 정체성 확립과 남북한 통합, 나아가 중국의 동북공정을 저지하는 가장 좋은 대처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동북공정 속에 그려진 고조선
중국이 고구려는 물론 발해, 나아가 고조선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군신화가 중국신화의 영향을 받은 중국문화의 반영이라 주장하는 중국 사학계의 주장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기자 동래설 등을 근거로 고구려 이전 단계에서부터 중국사에 우리 민족사가 포함된다는 것을 강조해 중화적 우위성을 강조하고 고조선-고구려로 이어지는 민족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것이다.
조법종 우석대 교수에 따르면 중국은 태양 숭배 신화인 ‘탕곡신화’와 ‘명이’라는 표현이 조선(朝鮮) 명칭의 기원이라 주장한다. ‘산해경’에 나타난 탕곡이 조선의 명칭이며 ‘주역’에 나오는 명이가 은나라 시대 조선 명칭이란 것이다. 또 3황5제 신화 속 황제의 후손인 전욱고양의 신화가 동이족 문화이고 곧 고구려 문화라 주장한다.
이런 중화우월주의는 ‘기자 동래설’에서 극에 달한다. 은말 주초 은나라 신하였던 기자가 동쪽으로 피난해 조선의 왕이 됐다는 기자조선설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중원민족이 동북민족의 원류가 된 계기로 설명한다.
이는 1차 동북공정 중 장벽파의 ‘기자여기자조선연구’에서 본격화됐다. 기자조선은 은나라 후예가 조선반도에 세운 지방정권으로 실재했던 철학가·정치가인 기자에 의해 중국 동북사가 시작됐다고 본다. 또 기자조선은 주·진의 속국으로, 이후 위만조선은 한의 속국으로 분류한다. 민족적 기원으로는 숙신·예맥·동호계로 동북지방을 3분하고 ‘모두 중국 역사 범주에 존속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중국 측 주장은 우리 민족과 관련된 구체적 역사를 보편성과 연결지어 부정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게 국내 학계의 반론. 무엇보다 단군신화를 중국신화에 나타난 ‘신성한 존재의 출현이 초인간적 상황 속에 전개된다’는 일반론을 바탕으로 중국신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측하고 있다. 단군신화 속 곰 숭배 사상이 한국 신석기문화 속 고아시아족의 특징임을 망각한 것이다.
또한 중국사료인 ‘상서대전’ 등에 기록된 기자동래설은 다른 사서에선 일절 언급되지 않았고 조선시대 일부 유학자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신뢰성이 떨어진다. 고조선의 청동문화는 중국과 계통이 다른 비파형동검과 돌널무덤 및 고인돌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논리상 맞지 않다. 최근 일부 국내 학자들은 오히려 위만조선이나 한군현 등을 고조선 서쪽 변방에 자리한 고조선의 속국이라 보고 있다.
한편 중국 측 동북공정에 대해선 학계·정치권의 자성 목소리가 높다. 김정배 전 고구려연구재단 이사장은 자신의 논문에서 “관심이 많은데도 고조선에 관한 연구가 부진한 것은 새로운 문제의식과 해석을 과감히 표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자아비판한 바 있다.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도 “동북공정의 문제는 단순히 역사왜곡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정부의 정치·외교력 부재를 드러낸 것”이라며 “근본적 대책을 마련해 조직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오상도 기자』
(출처; 주간경향,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id=12983)
2007년 11월 23일 경향신문 〈[코리아루트를 찾아서](8)차오마오산과 홍산문화〉
『제단과 무덤, 여기도 동이의 흔적…
“우한치 쓰자쯔(四家子) 차오마오산(초모산·草帽山) 유적에서 5500년 전 홍산문화 시기의 제단+무덤 결합형식의 의례(儀禮) 건축물이 발견됐다. 이는 원시종교와 장례풍습, 제사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새로운 자료다.”
가장 최근에 확인된 차오마오산 유적. 이형구 교수와 기자가 석관묘를 실측하고 있다. 차오마오산/김문석기자
2006년 6월5일, 네이멍구 츠펑 방송은 ‘5500년 전 홍산문화(BC 4500~BC 3000년) 시대 적석총의 발견’ 소식을 숨 가쁘게 전했다. ~
저만큼 앞서간 윤명철 동국대 교수가 자리를 잡는다. 학자들 또한 흥분에 도취된 듯하다. 차오마오산은 그야말로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하는 천혜의 곳이다. 해발 40m의 낮은 구릉인데 정남쪽 500m 앞에는 다링허(大凌河) 지류인 라오후산허(老虎山河)가 흐르고 있다. ~
홍산문화의 이름을 낳게한 네이멍구 츠펑시 잉진하 유역에 있는 홍산.(위) 츠펑대 박물관 유물관리실에 진열된 홍산문화·샤자뎬 하층문화 유물들.(아래)
원래 이 유적은 1983년 처음 발견되었지만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2001년부터였다. 당시 제2지점에서 석관묘 7기, 제단 1기와 돌로 만든 여신상 1점, 남성생식기 모양의 돌인형(石祖), 뼈로 만든 피리(骨笛), 그리고 토기 표면에 ‘미(米)’자, ‘십(十)’자로 읽을 수 있는 수수께끼의 부호가 확인했다.
발굴단은 “3층으로 잘 쌓은 제단과 돌무덤떼가 발견됐는데, 이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금자탑(피라미드의 중국말)”이라고 의미를 두었다. 지난해 제3지점 발굴 때도 비슷한 양상의 유구가 발견됐다.
-빙산의 일각-
원형제단 중간에 사각형의 대형 석관묘가 있었는데, 석관묘 앞에는 불에 탄 붉은 흙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늘 와서 불을 피우고 제사를 지냈다는 증거였다. 결국 이 적석총 안에 누워있었던 이가 숭배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대량의 토기들이 띠를 이루며 무덤 주위를 둘렀다.
홍산문화의 토기.
이는 특수한 장례 풍습을 웅변해준다. 이 풍습은 앞선 문화인 싱룽와에서도 보이며 수천 년 후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도 그 전통이 이어진다. 그런데 라오후산의 양쪽 강가 10㎞ 인근에는 샤오구리투(小古力吐) 등 차오마오와 같은 유적들이 즐비한데, 제단과 돌건축물들이 대부분 층층이 높아지는 피라미드 형태이다.
“보세요. 석판을 차곡차곡 쌓고, 판석을 덮는 형식이네요. 전형적인 석관묘네요. 그리고 저기 적석총도 있고…. 저기 3단으로 쌓은 제단도 있고….”
이교수는 “장례풍속과 제사 유적 등을 미뤄볼 때 발해문명의 출현과정을 추론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보고 있다. 중국 학계가 가장 최근까지 발굴한 차오마오산 유적에 비상한 관심을 두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차오마오산 유적은 홍산문화의 ‘단적인 예’일 뿐이다. 탐사단은 맨 처음, 4000년 전 조성된 고조선의 성일 가능성이 짙은 싼줘뎬(삼좌점·三座店)·청쯔산(성자산·城子山) 석성을 실마리로 발해문명 탐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8000년 전 동이의 본향인 차하이(査海)-싱룽와(興隆窪) 마을을 지나 이제 홍산문화의 땅, 바로 차오마오산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홍산문화는 차하이·싱룽와 문화-홍산문화-하가점 하층문화(고조선의 석성들)로 면면이 이어지는 발해문명 계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황허문명=중화문명이라는 철옹성 같은 관념을 마침내 버리고 발해문명이 중국문명의 기원이며, 홍산문화에서 이미 초기 국가의 형태인 고국(古國)이 탄생했다”(쑤빙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 학계도 인정하듯 발해문명의 창시자는 우리 민족을 포함한 동이족이다.
토기 가운데는 남녀가 춤을 추면서 구애 혹은 성접촉을 상징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붉은 봉우리-
그렇다면 홍산문화란 대체 무엇인가. 홍산문화에 대한 연구·조사가 시작된 것은 올해로 딱 100년이 됐을 만큼 깊지만, 제대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지는 불과 30년 전부터다. 지금까지 츠펑, 링위안(凌源), 젠핑(建平), 차오양(朝陽) 등에서 500여 곳의 홍산문화 유적이 쏟아졌다. ~
홍산문화의 토기들.
하지만 1970년대 말까지도 홍산문화 연구는 토기와 세석기 등에 집중됐고, 그저 넓은 의미의 북방 세석기문화, 즉 일종의 변경문화로만 인식됐다. 그러나 1979년 카줘 둥산쭈이(동산취·東山嘴)에서 임신한 여인의 소조상을 포함한 엄청난 제사유적이 발견되고, 83년에는 뉴허량(우하량·牛河梁)에서 제단(壇)과 신전(廟), 무덤 등 이른바 단묘총 유적이 3위일체로 출현한다. 두 유적과 후터우거우(호두구·胡頭溝) 유적에서는 세계가 깜짝 놀랄 대량의 옥기로 도배되다시피했다.
“제단, 신전, 무덤은 문명탄생의 세 조건이라 하죠. 옥기로만 도배되다시피한 무덤은 사회분화, 계급탄생의 신호죠. 결국 쑤빙치를 중심으로 한 중국학계는 홍산문화를 중화문명의 기원을 상징하는 문화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이형구 교수)
그런데 조상숭배와 하늘숭배, 적석총·석관묘를 포함한 홍산문화는 다름 아닌 동이의 문화였다. 중국학계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차오마오산에서 홍산문화의 맛을 살짝 본 탐사단은 바로 그 유명한 뉴허량 유적을 찾아 발길을 돌렸다. 이기환 선임기자』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1231536581&code=210000)
2007년 11월 30일 경향신문 기사 〈[코리안루트를 찾아서](9)뉴허량의 적석총들〉
『제단(壇)과 신전(廟), 무덤(적석총), 그리고 옥기(玉器). 흔히 집과 금속, 문자를 문명의 3요소라 하지만 인간의 정신세계와 관련 깊은 제단과 신전, 무덤은 이 3요소를 초월한다. 또한 옥기는 계급·사회분화, 그리고 제정일치 사회의 상징물이다. 바로 발해문명의 뼈대가 된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BC 4500~BC 3000년)의 빛나는 창조물들이다.
뉴허량 유적은 랴오닝성 차오양시 젠핑(건평·建平)과 링위안(능원·凌源)의 경계선에 걸쳐 있다. 1940년 역사교사 둥주천(동주신·冬柱臣)이 채색토기를 발견했고, 1979년 역시 이곳 영역내인 싼관뎬쯔(三官甸子)에서 옥기묘를 발굴한 적이 있다. 하지만 본격 발굴된 것은 1983년이었다. 쑨서우다오(손수도·孫守道)와 함께 발굴을 주도한 궈다순(郭大順)의 회고.
“지난 100년 동안 500여 곳의 훙산문화 유적을 발견했는데, 무덤이 확인된 예는 거의 없었습니다. 뉴허량 유적이 하나하나 벗겨질 때마다 학계가 경악했어요. 적석총과 제단, 신전은 물론 다량의 옥기가 쏟아진 것이죠. 그리고 한 변이 100m에 달하는 수수께끼의 금자탑(피라미드)까지…. 발굴단은 모두 20여 곳의 유적을 확인했고, 16개 지점에 대한 번호를 매겼어요. 확인된 유적의 면적은 무려 50㎢에 달했고….”
탐사단의 이날 목표는 제2지점(적석총+제단+옥기)과 1지점(여신묘), 13지점(대형 피라미드)이다. 제일 먼저 찾은 것은 적석총과 제단, 옥기가 나온 뉴허량에서 가장 유명한 2지점이다. ~
뉴허량 16개 지점 가운데 13곳이 적석총으로 조성됐다. 그 가운데 이곳(2지점)의 적석총이 대표적이다.
들어가자마자 가운데 조성된 적석총은 남북 18.7m×동서 17.5m의 방형으로 조성됐는데, 3층으로 된 계단식 적석총이다. 적석총 안에는 석곽을 놓았고, 그 안에 석관을 조성했다. 석관 안에서는 성인 남성의 인골과 홍산문화 옥(玉)의 대표격인 용 모양의 구부러진 옥이 확인되었다.
대형 적석총은 양 옆으로 원형 제단과 거대한 적석유구를 거느리고 있다. 이런 계단식 적석총의 전통은 훗날 고구려·백제 적석총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또한 제단과 관련한 이야기는 후술하겠고, 여기에서 언급할 것은 적석유구이다. 이 돌로 쌓은 유구 안에는 무려 26기의 크고 작은 석관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큰 석관은 길이 2m, 높이 60㎝를 넘고, 작은 석관은 길이 55㎝ 정도인 것도 있다. 순장의 흔적도 보이는데 순장은 상(은)나라와 부여의 풍습으로 이어지는 장례 풍습이다. 그리고 적석유구 속에 석관묘를 밀집시켜 조성한 것은 한반도 황해도 황주 침촌리 적석총과 강원도 춘천 천전리 적석총과 비슷하다.
뉴허량 2지점 항공사진.
이 유적의 모티브는 뻔하다. 가운데 중심대묘, 즉 대규모 적석총은 이 지역 수장급의 무덤이 분명하며, 적석유구 속에 조성된 26기의 무덤은 씨족사회의 구성원들이 계급별로 묻힌 것이다. 그리고 제단은 그들이 지모신과 조상신을 모신 증거이다. 중국 학계는 3단 계단식 적석총의 위용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이는 훙산문화 사회는 일인독존(一人獨尊)의 사회였으며, 신분과 계층의 차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훙산문화처럼 계급이 확실하게 나타난 선사시대 유적은 없어요. 이미 단순한 씨족사회를 넘어선 고국(古國)의 단계로 볼 수밖에 없는 증거들이 속출했어요.”
이형구 교수가 뉴허량 제2지점에 있는 계단식 적석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2지점은 제단과 적석총, 그리고 26기의 석관묘가 묻힌 적석유구 등으로 구성됐다. 뉴허량/김문석기자
-동방의 피라미드-
“동방의 피라미드요?”
“가보면 압니다.”
잠깐 길을 잃었다가 뉴허량에서 1㎞ 정도 남쪽으로 떨어진 ?산쯔(전산자·轉山子)라는 곳을 ‘발견’했다. 저 멀리 낮은 나무가 서있는 아주 낮은 구릉이 보이는데, 바로 그곳이 동방의 피라미드(제13지점), 즉 중국말로 진쯔타(金字塔), 즉 금자탑이란다. 이집트의 웅장한 피라미드와 비교한다면 ‘피식’거릴지 몰라도 중국학계의 자부심은 대단하단다.
“그럴 만도 하죠.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1000년이나 앞선 시기의 피라미드니까요.”
기자는 속으로 중국인들 특유의 ‘뻥’인가 싶어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계단식 적석총을 흔히 피라미드라 하고, 그런 측면에서 고구려 장군총 역시 피라미드라 일컫는다. 그보다도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범상치 않은 모양이다.
1992년에 확인된 동방의 피라미드(제13지점). 아직 정식 발굴이 이뤄지지 않았다.
“한 변이 100m나 되는 거대한 층급형 피라미드예요. 지금 확인되는 것은 7층까지랍니다.”
이교수의 설명이 이어진다.
“가운데는 판축의 형태로 흙을 다지고(층마다 8~10㎝로) 바깥쪽은 돌로 쌓았어요. 다진 할석의 면을 바깥으로 하고, 무너지지 않도록 견치석과 엇박자로 쌓는 석축의 방법은 훙산문화~샤자뎬 하층문화~부여~고구려·백제·신라~일본 규슈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한마디로 적석총과 같은 모티브라는 것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피라미드가 조성된 앞에 제단(60×40m)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훙산문화 사람들이 이 제단에서 피라미드의 주인공에게 제사를 드렸다는 얘기가 된다. 이 피라미드는 1992년 본격적으로 확인됐다. 아직도 표면만 발굴했을 뿐 중앙부에는 접근조차 하지 못한 상태다. 중국인들이 이 수수께끼 유적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피라미드라 일컫는 이런 거대한 적석총의 존재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는 이집트 사카라에 있는 제2왕조 파라오인 조세르(BC 2630~BC 2612년 추정)의 계단식 피라미드다. 그런데 이 동방의 피라미드는 이보다 1000년 앞선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이교수는 “모티브는 이집트 피라미드와 같다”면서 “이 건축물은 제단을 갖춘 무덤이며 그리스 신전 같은 역할을 했으니 훙산문화가 다른 세계문명보다 결코 뒤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청동기 문화는 동이가 창조했다?-
또 하나, 이 피라미드에서는 청동기를 제조할 때 청동주물을 떠서 옮기는 그릇과 청동찌꺼기(슬래그)가 발견됐다.
이를 두고 중국의 저명한 야금학자는 “기존 중국의 청동기 시작 연대(BC 2000년 설)보다 1000년 이상 앞선 BC 3500~BC 3000년 사이에 이미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 준다”고 주장해왔다. 아직은 그의 견해가 세계학계에서 공인되지 않고 있다. 만약 공인된다면 다링허(대릉하·大凌河) 유역에서 동방 최초로 청동기가 창조됐다는 이야기이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무엇보다 이곳은 동이의 영역 아닌가.
중국학계는 입이 딱 벌어졌다. 중국 고고학자 옌원밍(엄문명·嚴文明)은 “이 피라미드는 왕의 묘일 가능성이 높다”면서 “중화문명 5000년 역사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이런 피라미드는 어떻게 다링허와 랴오허(遼河)를 건너 랴오둥 반도와 만주 일대, 그리고 한반도로 퍼졌을까. 고구려 지안(集安) 국내성 일대에서 발견된 1만 여기의 적석총은 이 뉴허량 적석총과 어떤 친연관계를 갖고 있을까. 기자는 이형구 교수와 함께 그 수수께끼를 푸는 여행을 떠나보련다. 이기환 선임기자』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1301556371&code=210000)
2007년 12월 7일 경향신문 기사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0)랴오허 동서쪽의 적석총〉
『“돌무덤이 고인돌로 발전했을 것”
-외줄타기-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여전히 식민·분단·냉전사학은 떠도는 원혼처럼 우리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북한·중국·러시아 등 우리 역사의 중요한 무대에 대한 현장 조사가 시작된 것은 20년도 되지 않았다. 이형구 교수처럼 일찍이 한·중 수교 이전에 중국 본토의 역사와 고고학을 공부한 이도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런 가운데 중국은 동북공정, 하·상·대 단대공정, 중국문명 탐원공정 등 장기 프로젝트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다.
이형구 교수가 뉴허량 2지점에 조성된 석관묘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왼쪽) 이교수는 이런 석관묘가 훗날 고인돌 무덤으로 발전했다고 보고 있다. 뉴허량·선양/김문석 기자
역사왜곡의 주범인 일본은 말할 것도 없다. 반면 우리는 어떤가. 단적인 예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믿지 못해 AD 0~300년 사이의 역사를 ‘원삼국시대’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둔갑시킨 지 어언 40년 되지 않은가. 그런 마당에 “남의 땅(중국·러시아)에서 우리 것을 찾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폄훼한다면 지나친 냉소·허무주의가 아닐까.
“우리 것이라고 굳이 주장할 필요도 없어요. 그저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는 대로 쓰면 됩니다.”
-랴오허 동쪽과 서쪽-
뉴허량 2지점 무덤 주위에는 토기들이 정렬돼 있다.
적석총·피라미드와 함께 또 하나의 단서는 무덤 주변을 빙 둘러서 꽂아놓은 통형관(밑이 없는 토기) 행렬. 모종의 장례 습속이 분명한 이 행렬은 훗날 한반도 전남지방에서 그대로 보이며, 일본 열도의 하니와(埴輪)로도 연결된다.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 돌무덤은 라오닝성 푸신(阜新) 후터우거우(호두구·胡頭溝)에서도 확인됐다. 이 또한 의미심장했다. 훙산문화 시대(BC 4500~BC 3000년) 위 문화층에서 한반도와 발해연안의 대표 유물인 비파형 청동단검이 나왔기 때문이다. 비파형 청동단검을 썼던 사람들이 훙산문화인들의 묘제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의미. 이 얼마나 끈질긴 문화적인 연속성과 계승성인가. 돌이켜보면 우리 민족은 끔찍하게 돌무덤을 사랑했다. 1966년 문화대혁
명 직전 중국 정부는 지안(輯安)의 국내성 주변에서만 1만3000여기의 고구려 적석총을 확인했다. 43년이 흐른 지금에도 약 6000기가 남아 있다.
“(장례 때) 고구려는 돌로 쌓아 봉분을 만든다(積石爲封)”(삼국지 위서 동이전)는 기록이 단적인 예다. 그런데 고구려 시대보다 무려 3500년 전에 조성된 엄청난 적석총과 피라미드가 랴오허 동쪽인 랴오둥(요동·遼東)이 아니라 서쪽인 다링허(大凌河) 유역에서 확인됐으니 무슨 조화인가.
“적석총은 그전까지는 랴오허를 중심으로 서쪽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어요. 랴오둥 반도, 그것도 신석기 말~청동기 초기의 무덤이었거든.”
이교수의 말마따나 랴오둥 반도에는 BC 2500~BC 2000년의 돌무덤이 곳곳이 흩어져 있다. 적석총뿐 아니라 석곽묘·석관묘, 그리고 지석묘(고인돌무덤)까지 다양하다. 우선 랴오둥 반도에는 뤼순(旅順)시 라오톄산(老鐵山)과 장쥔산(將軍山)을 비롯해 쓰핑산(四平山)·위자춘(于家村)·바이강쯔(柏崗子)·다타이산(大臺山) 등 이름을 열거하기도 힘든 적석총들이 있다. 이 돌무덤들은 주로 바닷가에 면한 산등성이와 낮은 언덕에 수기 혹은 수 십기씩 연속적으로 배열돼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광주 명화동 고분에서도 같은 형식의 장례풍속이 나온다.
이 가운데 만주침략의 사전 준비에 나선 일본 인류학자 도리이 류코(鳥居龍藏)가 가장 먼저 라오톄산 적석총(1909년)을 발견했다. 적석총 안에서는 여러 개의 석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훗날 발견된 훙산문화 시기의 뉴허량 적석총과 비슷한 구조다. 또한 인근의 장쥔산 적석총은 1963~65년 북한과 중국의 합동조사단이 발굴했는데, 모두 9개의 묘실을 갖추고 있었다.
1960년대 초반 북한과 중국의 합동조사로 확인된 장쥔산 적석총의 그림. 적석총 안에는 9개의 석곽묘가 조성돼있었다.
-4000년 이어진 돌무덤의 전통-
랴오둥 반도의 고고학 조사는 이런 풍상을 겪으면서 진행되었다. 라오톄산과 장쥔산 외에도 우자춘에서는 58기의 묘실을 담은 엄청난 크기의 적석총이 확인됐다. 어떤 묘실에는 무려 21구의 인골이 매장됐다. 또한 뤼순시 허우무청역(後牧城驛) 강상(崗上)·러우상(樓上) 적석총에서는 23개 혹은 10개의 석관이 중앙의 큰 석관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배치돼 있었다. 그런데 시기는 다소 늦지만 한반도에서도 비슷한 돌무덤들이 속출한다.
황해도 황주 침촌리 적석총
BC 1500년으로 편년되는 시도(矢島·인천 옹진군)적석총과 황해도 황주의 침촌리 적석총, 그리고 강원도 춘천 천전리 적석총이 그것이다. 이밖에 평북 강계 일원과 대동강 유역, 평남 강서·북창 일대, 재령강 유역의 황해도 봉산·인산·서흥·사리원, 한강유역의 양평, 경남 김해·진주, 충남 아산·예산·부여, 충북 단양 등지에 분포됐다. 돌무덤의 전통은 백제의 서울 석촌동 고분과 공주·부여의 석실묘까지 4000년 이상 이어진다. 이형구 교수의 정리를 들어보자.
“뉴허량 적석총은 BC 3500년으로 편년됩니다. 그리고 랴오둥 반도의 적석총군은 BC 2500~BC 2000년, 한반도의 적석총은 BC 1500년 이하…. 이것은 돌무덤의 원류는 홍산문화이며, 이것이 랴오허를 건너 랴오둥 반도를 거쳐 한반도~일본 열도로, 지린(吉林)~연해주로, 몽골~시베리아로 건너갔다는 얘기죠.”
-1000년의 공백? 고인돌?-
여기서 기자가 좀처럼 풀 수 없는 두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하나는 랴오허를 기준으로 왜 1000년의 공백이 생기는 것일까. 이형구 교수는 “훙산문화는 다링허(大凌河)와 랴오허를 건너 랴오둥을 거치는 동안 시간·공간의 과도기를 겪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이교수 역시 랴오허를 건너는 동안 생긴 1000년 가까운 공백에 대해서는 “학계가 풀어야 할 과제”라고 결론을 유보한다. 뉴허량에서 랴오허를 건너 선양(瀋陽)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갖가지 상념에 젖어 있던 기자가 눈을 떴다.
“저기가 바로 645년 당나라 대군이 궤멸당한 요택(遼澤)이야.”
누군가 소리친 것이다. 과연 대단했다. 수풀이 무성하고 물길이 수없이 뚫린 대습지. “세계 최대의 습지”라는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가이드는 “다링허~랴오허 삼각주는 무려 140㎞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과연 “진창이 되어 수레와 말이 지날 수 없으므로~얼어 죽는 이가 많았고~황제(당태종)가 스스로~일을 도울 정도”(삼국사기 보장왕조)라 할 만했다. 훙산문화 시기에는 더하면 더했겠지. 이런 습지로 극복하고 랴오허를 건너는 일은 엔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건널 엄두를 내지 못했겠지. 그게 돌무덤의 전파를 늦춘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기자의 천박한 상상력이다.
또 하나 의문점은 지석묘(고인돌 무덤)이다. 고인돌은 우리나라에만 3만 여기가 분포된 대표적인 청동기 시대 묘제이다. 가히 고인돌의 천국이라 할 만하다.
고인돌 전문가 쉬위린(許玉林)은 “고인돌은 BC 2000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중국 동북에서는 랴오허를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일까. 이형구 교수는 조심스럽게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뉴허량의 적석총·석관묘 같은 훙산문화 돌무덤이 랴오둥 반도에서 고인돌로 발전한 게 아닐까요. 석관의 4벽이 높아져 지상으로 올라가고, 그 위에 큰 개석을 덮게 되고…. 하나의 고인돌 무덤이 된 겁니다.”
-고조선의 숨결-
고인돌 무덤을 축조한 랴오둥의 사람들은 분명 고조선 사회의 구성원들이었다. 물론 랴오허 서쪽 츠펑(赤峰)에서 석성을 쌓았던 산줘뎬(三座店)과 청쯔산(城子山) 사람들도 고조선인들일 것이다.(경향신문 10월27일자) 쑤빙치(蘇秉琦)도 “이곳에 하나라(BC 2070년 건국)와 같은 시대의 강력한 방국(方國)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들은 대규모 석성과 피라미드를 방불케 하는 돌무덤과 빗살무늬토기, 갈지(之)자무늬 토기, 옥기 등을 공통분모로 발해문명을 이끌었던 것이다. 이기환 선임기자』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2071515001&code=2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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